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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일(明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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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10~12
채만식
1
明 日[명일]
 
 
2
오늘도 해도 아니 뜨고 비도 아니 온다. 날은 바람 한점 없이 숨이 탁탁 막히게 무덥다.
 
3
멀리 건너다보이는 마포(麻浦) 앞 한강도 물이 파랗게 잠겨 있는 채 흐르지 아니한다. 강 언저리로 동리 뒤 벌판으로 우거진 숲의 나무들도 풀이 죽어 조용하다. 지구가 끄윽 멈춰 선 것 같다.
 
4
내려다보이는 행길로 마포행 전차가 따분하게 움직거리고 기어가는 것이 그래서 스크린 속같이 아득하다.
 
5
영주는 방 윗문 바로 마루에 앉아 철 아닌 검정 빨래를 만지고 있다. 빨래에 물을 들이느라고 손에도 시꺼멓게 물이 들었다. 어깨 나간 인조항라적삼이 땀이 배어 등에 가 착 달라붙었다.
 
6
그는 자주 목 부러진 불부채를 잡아 성미 급하게 활짝활짝 부치나 소리만 요란하지 바람은 곧잘 나지도 아니한다.
 
7
남편 범수는 방에서 문턱을 베고 절펀히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있다. 잠방이 하나에 홑이불로 배만 가리어서 빼빼 야윈 온몸뚱이가 다 드러나 보인다.
 
8
오정 싸이렌이 우 하고 전에 없이 가깝게 들린다.
 
9
영주는 오목가슴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잊었던 시장기가 다시 들어 침이 저절로 삼켜진다.
 
10
범수가 입을 얌얌하면서 무어라고 분명찮게 잠꼬대를 한다. 그것이 영주에게는 꿈에도 시장해서 무얼 먹고 싶어 입을 얌얌거리는 것 같았다.
 
11
그렇게 생각하고 보아서 그런지 남편의 앙상하게 야윈 팔다리며 갈빗대가 톡톡 불거진 가슴이 숨을 쉬는마다 얄따랗게 달막거리는 것이 새삼스럽게 눈에 띄었다.
 
12
얼굴은 위로 이마가 훨씬 벗겨진데다가 화장이 길고 턱까지 쑥 내밀어 신경질로 날이 선 코까지 격이 맞아가지고는 전에 볼때기에 살점이나 붙어 있을 때에도 그리 푸짐한 얼굴은 아니었었다.
 
13
그런 것이 머리털이 제멋대로 자라 제멋대로 흐트러지고 위로 길게 째진 눈초리에 굵다란 주름살이 패고, 이마에도 그렇고, 위아래 수염이 비죽비죽 감은 눈언덕은 푹 가라앉아 그 꼴이 오랫동안 중병을 치르고 난사람 같았다.
 
14
“그 포동포동하던 속살은 다 어디 가고 저 모양이 되었을꼬!”
 
15
영주는 혼잣말로 두덜거리면서 갠 빨래를 보에 싸서 마루에 놓고 일어나 잘근잘근 밟는다.
 
16
서쪽으로 내어다보이는 하늘에는 낡은 솜 뭉텅이 같은 거지구름이 그득 덮여가지고 이따금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빗줄기만 몇개씩 내키잖게 흘리곤 한다.
 
17
바람이 금시로 솨 일어나고 굵다란 빗방울이 쏟아질 듯 싶으면서, 그러나 날은 꿈적도 아니하고 점점 더 무덥기만 하다. 사람을 답답하라고 약을 올리는 것 같다.
 
18
영주는 몇번이나 남편을 잡아 흔들어 깰까 하고 내려다보다가는 고개를 돌렸다.
 
19
더운 날 옆에서 낮잠을 자는 것을 보면 더 더운 것이다. 갑갑하고……
 
20
그러나 잠을 자고 있는 동안이라도 시장기를 잊을 것을 왜 할일도 없이 깨랴 싶어 그대로 두어두는 것이다.
 
21
마침 문간방에 따로 세 얻어든 젊은 색시가 갸웃이 들여보다가 범수의 벗고 누운 것이 눈에 띄자 고개를 옴칠한다. 영주는 웃으면서
 
22
“괜찮어, 일루 와서 앉어 놀아요.”
 
23
하고 아닌게아니라 좀 꼴 흉한 남편의 자는 양을 돌아다본다.
 
24
문간방 색시라는 건 시골서 농사일을 하다가 살 수가 없다고 서울로 올라와 막벌이를 하는 남편과 단둘이 지내는 식구다.
 
25
남편이란 사람은 나이 근 사십이나 되었으되 색시는 겨우 이십이 될까말까 도렴직한 볼때기에 애티가 아직 남아 있어 귀염성스러웠다.
 
26
그는 남편이 벌이를 나간 사이면 별로 할일도 없는지라 늘 안에 들어와서 영주의 허드렛일도 거들어주고 말동무도 되고 하였다.
 
27
색시는 영주가 들어오란 말에 살금살금 들어와서 범수가 아니 보이는 곳을 골라 마룻전에 걸터앉는다.
 
28
“무엇허세유?”
 
29
“빨래 좀 손질허느라구…… 날이 어쩌면 이렇게 극성스럽게 더웁수!”
 
30
“그러게 말이예요 비두 안 오시구!…… 그런데 저 거시키이……”
 
31
색시는 무슨 대단한 소식이나 내통하는 듯이 목소리를 죽여 말을 한다.
 
32
“올에 난리가 난대유!”
 
33
“난리가 ?”
 
34
하고 영주는 짐짓 웃으면서 되물었다.
 
35
“예…… 올이 벵자년이람서유? 그래서 난리가 난대유.”
 
36
“그럼 거 큰일났게!”
 
37
영주는 하는 양을 보느라고 허겁스럽게 맞방망이를 쳐주었다.
 
38
“큰일났어유. 도루 시굴루 가야 헐까배유.”
 
39
“시골 가면 난리를 안 만나우?”
 
40
“그래두 깊은 산중에 가서 살면……”
 
41
영주는 그렇잖다고 설명을 해주려다가 색시가 그것을 여간만 꼭 믿고 있는 눈치가 아니어서 그냥 말머리를 돌렸다.
 
42
“바깥양반은 벌이 나갔수?”
 
43
“예, 오늘버텀은 정기회사 일 헌대유?”
 
44
“전기회사?”
 
45
“예 저 전차 철둑 놓는 일이래유.”
 
46
“잘되었구먼?”
 
47
“그냥 돌아댕기면서 지겟벌이허너니버담은 낫다구 그래유. 하루에 육십오전씩은 꼭꼭 받는다구…… 그새 지겟벌이헐 때는 하루 삼십전 벌기가 고작이구, 그나마 공때리는 날이 퍽 많었는데유……”
 
48
영주는 자기네 일을 곰곰 생각하느라고 대답도 아니했다.
 
49
“이 세상에 제일 만만한 인종은 돈 없는 인테리.”
 
50
라고 남편이 노상 하는 말이 새삼스럽게 머리속에서 되씹혀지는 것이다. 남편이 그런 말을 할 때면 영주는
 
51
“그것도 사람 나름이지 제마다 다 그럽디까?”
 
52
하고 은연중 남편이 자기의 무능한 것을 이론으로 카무플라지하려는 듯한 심정이 미워서 톡 쏘곤 하였으나 막상 막벌이꾼도 나서기만 하면 적으나 많으나 간에 하루 먹을 것은 버는데, 돈 없고 실업한 인텔리란 걸로 그만한 변통성조차 없이 그저 막막한 자기네 처지를 생각하매 남편의 하던 말이 비로소 마음에 찰칵 맞는 것 같았다.
 
 
53
범수는 시장과 더위에 부대끼다 못해 그런지 깨우지도 아니했는데 혼자 꾸물거리다가 기지개를 기다랗게 뻗치고는 푸스스 일어나 앉는다. 문간방 색시가 질겁을 하고 달아나는 것을 영주는 웃으면서
 
54
“왜 발써 일어나우?”
 
55
하고 다 없어졌어도 다만 한가지 남아 있는 남편의 맑은 눈, 자고 나서도 흐리지 아니하는 눈을 바라본다.
 
56
“응.”
 
57
콧소리로 대답을 하고 범수는 자고 난 입맛을 다시면서 방바닥을 둘러본다. 입안이 텁텁한 게 무엇보다도 담배가 먹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담배는 아까 아침부터 없다.
 
58
“시장허잖어우?”
 
59
“응? 글쎄……”
 
60
범수는 모호하게 대답을 하고 데시기를 긁적긁적한다. 영주는 빨래를 다 밟고 나서 도로 마루에 앉아 보를 퍼놓는다.
 
61
범수는 또 한번 나른하게 하품을 하고는 안해가 손에 시꺼멓게 물을 들여가지고 검은 빨래를 만지는 것을 보고 내키잖게 묻는다.
 
62
“건 머야?”
 
63
“애들 봄살이……”
 
64
“봄? 살이?”
 
65
“응.”
 
66
“걸 지금 왜?”
 
67
“이거나마 손질을 해두어야 인제 가을에 가서 입히지…… 봄에 벗어논 것을 발써 빨어는 놓구두 손이 안 나서 그러다가 오늘은 일감도 없구 허길래……”
 
68
범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69
아침에 밀가루 십전어치를 사다가 수제비를 떠서 아이들 둘까지 네 식구가 요기를 하고는 당장 저녁거리가 가망이 없는 판이다.
 
70
그러니 하루 앞선 내일 일도 염두에 없을 테거늘 인제 가을에 가서 아이들을 입힐 옷을 시장한 허리를 꼬부려가며 만지고 있는 안해를 보며 범수는 인간이란 것은‘생활(生活)의 명일(明日)’에 동화 같은 본능을 가지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71
“아이들은 어데 갔소?”
 
72
눈에 아니 띄는 것도 아니 띄는 것이지만 낮잠을 자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지껄이고 떠드는 것이 성가시어 쫓아 내보내던 생각이 나서 안해 더러 묻는 것이다.
 
73
“방금 저 밖에서 소리가 났는데…… 거 어데서 놀 테지……”
 
74
범수는 아까 자던 대로 도로 드러누웠다. 첨 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딱 시장해서 앉아 있기도 대견했던 것이다.
 
75
“또 잘려우?”
 
76
“아니.”
 
77
“시장허잖어우?”
 
78
“아니.”
 
79
범수는 더덕더덕 반자에 바른 신문지에서 일류 양식당의 광고를 읽으면서 건성으로 대답을 한다.
 
80
“저 문간방 사내는 전기회사 일하려 다닌답디다.”
 
81
영주로는 노동자면 노동자 막벌이꾼이면 막벌이꾼 그것이 부러운 것은 아니나 무엇이든지 일거리에 다들리기가 쉬워 그만큼 변통수가 있는 것만은 부러웠던 터라 문득 그 일이 잊히지 아니하는 것이다.
 
82
“전기회사라니?”
 
83
“아마 선로공산가바요. 색시가 전차 철둑일이라는 것이……”
 
84
“나두 그런 거라도 좀 했으면……”
 
85
“죽으면 죽었지 그 짓을 해요?”
 
86
“근력만 당해낼 수 있다면……”
 
87
“세상에 해먹을 게 없어서 당신이 그 짓을 해요?”
 
88
“내가 무언데?”
 
89
“무어야 당신이지.”
 
90
“괜헌 객기를 부리지 말어요…… 있는 땅까지 팔어서 머리속에다 학문만 처쟁였으니 그게 무어야? 씨어먹을 수도 씨어먹을 데도 없는 늠의 세상에서 공부를 했으니 그게 무어란 말이야? 좀먹은 책장허구 무엇이 달러?”
 
91
인제는 흥분조차 잊어버렸으나 범수가 늘 두고 염불처럼 되풀이하는 말이다. 그는 어려서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또 중학 이후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그래서 공부를 하였다.
 
92
자기 앞으로 땅마지기나 있는 것을 톡톡 팔아서까지 학자를 삼아 대학까지 마치었다.
 
93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비록 의식하지는 못했으나마 천하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만 것이다. ─만일 학문을 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그 땅을 파고 있었다면…… 좌우간 머리속에 학문을 집어넣기 때문에…… 심신이 이렇게 약비해지지 아니했다면 내게는 명일(明日)이 있었을 것이다.─
 
94
범수는 늘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영주는 남편의 그러한 속을 이해할 수가 없는지라 그러한 말을 듣고 있으면 짜증만 나곤 했다.
 
95
“그거야 당신의 성미가 유난스러우니까 그렇지 다른 사람들은 그렇잖읍디다.”
 
96
“그 사람들은 별수가 있나! 모다들 개밥의 도토리지…… 인테리들의 운명이란 빤히 내다보이는걸.”
 
97
“그래두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직업을 가지구 그놈을 만족해서 아등바등 살려구 드는데 당신이야 어데 그렇수?…… 차라리 그럴테거들랑 자식들이나 내 걱정은 말구 당신 노상 하구 싶다는 대로 어데든지 가서 X XX X을 허든지 허구려……”
 
98
정말 남편이 그리 하려고 나선다면 질겁해서 못하게 말릴 테지만 영주는 악이 오르는 판이라 그렇게 앙알거리고 있는 것이다.
 
99
“글쎄 그렇게 해야 할 노릇을 하지 못하는 게 공부한 죄라니까……”
 
100
“그러면 눈을 질끈 감구 되어가는 대루 한세상 살든지……”
 
101
“그렇기라두 했으면 차라리 좋게?…… 아모것도 모르고 현재에 만족해서……”
 
102
“그러니 글쎄 어쩔 셈이요?”
 
103
영주는 보풀증이 났다. 남편과 말을 하고 있노라면 칼로 물을 치는 것 같아서 해먹기만 하지 시원한 꼴은 볼 수가 없다.
 
104
“나두 모르지…… 죄우간 내일(明日)이란 건 없으니까……”
 
105
“참말 큰일났수!”
 
106
영주는 탄식하듯 혼잣말같이 중얼거린다.
 
107
“큰일이야, 왼통 세상이 큰일인걸……”
 
108
“아까 문간방 색시두 그럽디다만 올에 병자년이라구 난리가 난답디다. 차라리 난리라두 났으면……”
 
109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야.”
 
110
“흥 난리가 난다면 당신 같은 사람이 멀 제법 괜찮을 줄 아우?”
 
111
“못해두 좋으니 제발 좀……”
 
112
범수는 문득 여러 날 신문을 보지 못한 것이 생각이 나서 궁금했다.
 
113
최근 것으로 불란서에서 인민전선파가 내각을 조각했다는 것을 보고는 벌써 반 달이나 신문을 얻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114
범수에게는 불란서의 인민전선파 내각의 그 뒤에 오는 것이 절대의 흥미였었다.
 
115
그는 문안에라도 들어갈까 하고 구중중한 벽에 가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단벌짜리 다 낡은 여름양복을 바라보았다.
 
116
“저녁거리가 없지?”
 
117
범수는 할 수 없으면 양복이라도 잡혀야겠어서 떼어 입고 나가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118
“번연한 속이지 물어서는 무얼 허우?”
 
119
영주는 풀 죽은 대답을 한다.
 
120
“그럼 저 양복이라두 잽혀 오구려.”
 
121
“그것마저 잽히구 어떡헐랴구 그러우?”
 
122
“그리 긴하게 양복을 입구 출입을 헐 일은 무엇 있나?”
 
123
영주는 그래도 느긋한 희망을 지니고 있었다. 남편이 몇 군데 이력서를 보내두었으니 그런 데서 갑자기 오라는 기별이 올지도 모르는 터에 양복을 잡혀버리면 일껏 된 취직도 낭패가 되고 말 것이다.
 
124
그리고 또 남편이 밖에 나가 있는 동안만은 행여 무슨 반가운 소식이나 가지고 돌아오나 해서 한심한 기대를 하는 터였었다.
 
125
“천하 없어두 그건 안잽혀요.”
 
126
“거 참 괘사스런 성미도 다 보겠네!”
 
127
하고 범수는 더 우기려 하지 아니했다.
 
128
“정말 큰일났수! 하두 막막한 때는 죽어바리기라두 하구 싶지만 자식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두 없구…… 글쎄 왜 학교는 안 보내려 드우? 우리는 이 지경이 되었으니 자식이나 잘 가르켜야지?”
 
129
영주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을 찢고 싶게 보풀증이 나는 것이다. 범수와 영주 사이에 제일 큰 갈등은 아이들의 교육문제인 것이다.
 
130
영주는 아이들을 공부를 시켜서 장래의 희망을 거기다 붙이자는 것이다. 그는 하다 못하면 자기가 몸뚱이를 팔아서라도 아이들의 뒤는 댄다고 하고 또 그의 악지로 그만 짓을 못할 것도 아니었었다.
 
131
그러나 범수는 듣지 아니했다. 섣불리 공부를 시켰자 허리 부러진 말처럼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반거충이가 될 것이요, 그러니 그것이 아이들 자신 장래에 불행하게 할 뿐 아니라, 따라서 부모의 기쁨도 되지 아니한다고 내내 우겨왔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보통학교의 교과서 같은 것을 참고해가며 산술이니 일어니 또 간단한 지리 역사니를 우선 가르치고 있었다.
 
132
그러나 영주가 보기에는 그것이 도무지 시원찮고 미덥지가 못했다.
 
133
범수는 안해에게 너무도 번번이 듣는 푸념이라 그 대답을 또다시 되풀이하기가 성가시어 아무 말도 아니하려 했으나 안해는 오늘은 기어코 여정을 낼 듯이 기승을 부리려 든다.
 
134
“글쎄 여보! 당신은 당신이 희망하는 일이나 있어서 그런다구 나는 어쩌라구 그리우?”
 
135
“낸들 희망을 따루 가지구 그리는 건 아니래두 그래! 자식들이 장래에 잘되어 잘살게 하자는 생각은 임자허구 꼭같지만 단지 내가 골라낸 방법이 옳으니까 그러는 거지……”
 
136
“나는 그 말 믿을 수 없어…… 공부 못한 놈이 막벌이 노동자나 되어 남의 하시나 받지 잘될 게 어데 있드람!”
 
137
“그건 이십 년 전 사람이 하든 소리야. 번연히 눈앞에 실증을 보면서 그래?”
 
138
“무어가 실증이란 말이요?”
 
139
“허! 그거 참…… 여보 임자도 여자고보를 마쳤지? 나도 명색 대학을 마쳤지? 그런데 시방 우리 둘이 살어가는 꼴을 좀 보지 못해?”
 
140
“그거야 공부한 게 잘못이요? 당신 잘못이지……”
 
141
“세상 탓이야……”
 
142
“이런 세상에서두 남은 제가끔 공부를 해가지구 잘들 살어갑디다.”
 
143
“그건 우연이고 인제 세상은 갈수록 우리 같은 인간이 못살게 돼요……내 마침 생각이 났으니 비유를 하나 허께 들어볼려우?”
 
144
“듣기 싫여요.”
 
145
영주는 말로는 언제든지 남편을 못 당하는지라 또 무슨 묘한 소리를 해서 올가미를 씌우나 싶어 톡 쏘아버렸다.
 
146
“하따 그러지 말구 들어보아요…… 자, 시방 내가 돈이 일 원이 있다구 헙시다. 그런데 그놈 돈을 어떻게 건사하기가 만만찮거든…… 돈을 넣을 것이 없단 말이야. 알겠수?”
 
147
“말해요.”
 
148
“그래 척 상점에 가서 일원짜리 돈지갑을 사잖았수?”
 
149
“일원밖에 없는데 일원짜리 지갑을 사?”
 
150
영주는 유도를 받아 무심코 이렇게 대꾸를 한다.
 
151
“거 봐! 글쎄……”
 
152
하고 범수는 싱글벙글 웃는다.
 
153
“우리가 시방 공부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일원 가진 늠이 일원을 넣어두랴고 일원을 다 주구 지갑을 사는 셈이야.”
 
154
“어째서?”
 
155
“지갑을 쓸데가 있어야지?”
 
156
“두었다가 돈 생기면 넣지?”
 
157
“그 두었다가가 문제여든…… 그 지갑에 돈이 또 생겨서 넣게 될 세상은 우리는 구경도 못해…… 알겠수?”
 
158
“난 모를 소리요.”
 
159
“못 알어듣기도 괴이찮지…… 그렇지만 세상은 부자 사람허구 노동자의 세상이지, 그 중간에 있는 인간들은 모두 허깨비야.”
 
160
“그렇지만 여보, 사람이 세상에 나서 빌어먹구 살기는 일반이 아니우? 그런데 하필 부모 된 사람이 앉어서 고되고 거센 일을 하고 남한테 하시받는 노동자로 자식을 만들 거야 무엇 있수?”
 
161
“빌어먹는 게 첫째 문제라나? 누가?…… 새세상에서 쓰일 인간을 만든다는 거지……”
 
162
“문간방 사람이나 또 뜰아랫방 목수나 다 별수 없읍디다.”
 
163
“그래두 나보담은 월등 나어요. 그러고 우리 아이들은 내가 따로 가르키면 다 제절로 눈이 떠져요.”
 
164
“나는 못해요. 나는 누가 무어라구 해두 내일버틈 사립학교라두 보낼테니 그리 알어요.”
 
165
영주는 필경 이렇게 내뻗고 말았다. 그러나 범수는 코로 웃고 맞서지도 아니한다.
 
 
166
비는 필경 오지 아니하고 어설픈 구름떼가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난다.
 
167
흩어지는 구름 사이로는 가끔가다 파란 하늘이 조각조각 내어다보인다.
 
168
영주는 손질한 빨래를 마당의 줄에다 척척 걸쳐 널고 도로 마루로 올라와 앉으면서
 
169
“비는 또 멀리 달어난걸.”
 
170
하다가 문득 남편이 하고 있는 짓을 보고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171
범수는 배를 깔고 엎드려 재떨이에서 꽁초를 골라내어 정성스럽게 까고 있었다. 꽁초래야 대빨주리가 새까맣게 타들어오도록 피우고는 뿜어버린 것이라 깜찍스럽게 잘다. 그래서 그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대로
 
172
“의사가 주는 극약적 분량.”
 
173
같았다.
 
174
그래도 그는 겨우 어떻게 한 대 분량을 장만해가지고는 오려놓은 신문지쪽에 말기 시작했다. 장히 어설픈 공정(工程)을 거쳐 그는 마지막 작업으로 침칠을 하고 있는 것이다.
 
175
그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만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을 찾다가 자기를 물끄러미 건너다보고 있는 안해와 눈이 마주치자 히죽이 웃는다.
 
176
“아이! 궁상이야!”
 
177
영주는 혀를 찬다. 그는 담배를 탁 채어서 싹싹 비벼버리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178
“왜? 무어가 궁상이야? 나는 좋구만.”
 
179
“나 같으면 저런 아쉰 담배는 안 먹어.”
 
180
“흥, 먹으랬으면 싸우자고 덤비겠네! 잔말 작작 해두고 성냥이나 찾어와.”
 
181
“사람이 궁했으면 그저 궁했지 어쩌면 그 모양이 되어가우? 점점……”
 
182
영주는 독살을 피우고 싶은 마음과는 딴판으로 말소리는 힘이 없이 푸죽었다.
 
183
전 같으면 남편이 그저 거리낌없이
 
184
“담배 좀 사와.”
 
185
이렇게 아무렇게나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를 못하고 다 타빠진 꽁초를 주워모아 신문지에 말아먹고 있게쯤 소심해진 그 심정이 밉살머리스러우면서도 한편 측은한 생각에 가슴이 질리는 것이다.
 
 
186
전이라고 해도 그다지 넉넉하게야 지냈을까마는 그래도 범수 자기 자신이 직업을 가지고 있어 벌이를 할 때에는 아무리 어려운 판에 당해서도 먹고 입고 살아가는데 궁상을 피우거나 소심하거나 하지는 아니했다. 사람이 퍽 침울은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상과 행동이 유리된 자기 생활을 반성하여 자신을 학대하는 데서 오는 오뇌 때문이었다.
 
187
그는 학교를 마칠 때까지만 해도 퍽 뇌락하고 활달한 성품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도 술이나 얼큰히 취하든지 어찌해서 기분이 좋든지 할 때는 안해로 하여금 믿음직한 미소가 저절로 흘러져나오게 할 만큼 퀄퀄하고 대담스러운 본성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좀처럼 안해의 눈치를 슬슬 본다든가 궁상을 피운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188
범수는 그 기묘한 외양에 타기조차 기묘하게 타는 담배를 붙여 물고 엎드린 채 단꿀 빨듯이 쭉쭉 빨고 있다.
 
189
“그게 그렇게 맛이 있수?”
 
190
하고 영주가 핀잔을 주나 그는 딴 생각을 하느라고 대답도 아니하고 안해의 얼굴만 말끄러미 뜯어보고 있다.
 
191
영주는 침이 묻지 아니한 한편쪽으로만 시뻘겋게 타들어가는 담배를 입술이나 데지 아니할까 조마조마 바라보다가 보다 못해서
 
192
“담배 한 곽 외상으루라두 갖다 달라우?”
 
193
하고 묻는다.
 
194
그는 담배를, 담배라도 십전짜리 피종을 외상이지만 사다 줄 생각인 것이다.
 
195
그까짓 십전 더 빚을 지나마나 일반이다. 그보다는 그놈을 갖다 주면 남편이 시방 먹고 있는 그 어설픈 담배보다 몇곱이나 맛이 있게 먹는 것을 보는 것이 퍽 재미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96
그래서 남편이 얼른
 
197
“응, 한 곽만 더……”
 
198
이렇게 대답할 줄 알았는데, 그러나 그는 아무 소리도 없이 영주의 얼굴만 그냥 보고 있다가
 
199
“임자두 인제는 퍽 늙었구려!”
 
200
하고 딴소리를 퉁 내놓는다.
 
201
“딴전만 보구 있네!…… 누가 이렇게 늙혀 놓았는데? 지금 이 나이에……”
 
202
영주는 그만 신명이 풀려서 되레 암상이 나가지고 톡 쏘아버린다.
 
203
범수는 입때까지 안해의 지금 얼굴에 그전 얼굴을 상상해서 스크린의 이중노출(二重露出)처럼 보고 있었던 것이다.
 
204
전에 복성스럽던 두 볼이며 해맑던 얼굴에 비해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쌍거풀진 큰 눈뿐이다.
 
205
그러나 콧잔등으로 눈아래로 기미가 까맣게 앉고 눈초리에는 주름살이 잡히고 볼은 홀쭉해져 앙상한 지금의 얼굴에는 어글어글하니 시원한 그의 눈도 도리어 부자연스러웠다.
 
206
“스물일곱에 저만큼이면 겉늙기는 했어! 아이도 둘밖에 안 났으면서……”
 
207
범수는 그렇다고 그리 안타까와하는 것도 아니요 그야말로 본 대로 중얼거린 것이다.
 
208
그러나 그 말이 영주에게는 그냥 무심히 들리고 말 수는 없었다.
 
209
그도 거울을 볼 때면 자기가 나이보다는 훨씬 겉늙은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약간 남은 옛 윤곽에서 또 아직도 고운 눈에서
 
210
“그래도……”
 
211
하는 위안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러던 터에 막상 남편의 입에서라도 아주 늙었다는 말이 나오고 보매 인제는 영영 늙었구나 싶어 심통이 버럭 상한 것이다.
 
212
그래서 번연히 죄도 없는 남편인 줄은 모르는 것도 아니나 제 성미를 못이겨 애꿎은 보풀떨이를 하는 것이다.
 
213
“또, 히스테리가 일어날 모양이군…… 개 주어도 안 먹는 것……”
 
214
영주의 생각에는 오늘은 어쩐지 남편이 일부러 자기 속을 질러주려고 하는 것만 같이 더욱 신경이 가스러졌다.
 
215
“십 년…… 십 년 당신한테 매어 사느라구 이렇게 된 줄은 몰라요?”
 
216
“매어살었나? 같이 살었지.”
 
217
“나를 살살 꼬인 건 누군데?”
 
218
“내한테 연애편지 답장한 건 누군데?”
 
219
“답장해 달랬으니까 했지.”
 
220
“허허허허…… 계집은 귀애할 동물이지 이해할 인간은 아니란 말이 옳은 말이야.”
 
221
범수는 오랜만에 너털웃음을 쳤다. 그러고 나서 벌떡 일어나 양복을 주섬주섬 걷어입는다.
 
222
넥타이도 변변한 게 있을 턱이 없고 모자는 소프트 그냥이다. 구두는 뒤축이 바짝 닳고 코가 벗겨진 검정이다.
 
223
양복도 거기 잘 어울리게 때가 묻고 꼬기작꼬기작한 포라다.
 
224
“어데 가요?”
 
225
영주는 악살을 풀지 못해서 내내 이렇게 기승을 피운다.
 
226
“바가지 긁는 꼴 보기 싫여. 나가서 죽어바릴란다.”
 
227
범수는 빈들빈들 웃으면서 마룻전에 걸터앉아 구두를 신는다.
 
228
“아이구! 제발 좀 그래주었으면……”
 
229
“그 대신 내가 죽었다구 시체 옆에 앉아서 울면 벌떡 일어나 따구를 붙일테야.”
 
230
“걱정을 말어요…… 춤을 출 테니.”
 
231
“그래도 돈을 마련해오면 입이 귀밑까지 째지렷다?”
 
232
“돈? 흥, 돈이 눈이 멀어서?”
 
233
“아이들 울어도 잘 달래지 때려주지는 말어…… 나는 혹시 늦을지 모르니.”
 
234
“오백년 안 들어와두 기둘르잖어.”
 
235
영주의 마지막 발악을 덜미로 들으면서 범수는 대문 밖으로 나섰다.
 
 
236
종로 네거리의 X X백화점 앞.
 
237
범수는 머리가 휘어지르르해서 쓰러지겠는 것을 한손으로 전신주를 붙잡고 겨우 몸을 지탱했다.
 
238
굶었으면 그대로 드러누워 있지 십리나 넘는 길을 오늘처럼 걸어들어와 돌아다니지는 아니했었다. 그런지라 이렇게 쓰러질 뻔하기도 처음 당하는 일이다.
 
239
범수는 부질없이 이러고 나왔구나 싶어 후회가 났다.
 
240
그는 오늘사 말고 유달리 까슬거리는 안해와 마주 붙어앉아 옥신각신하기가 싫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의 심중에는 그 자신도 분명히 의식치 못하는 막연한 기대가 잠겨 있었다.
 
241
도서관의 무료열람실에 가서 궁금하던 신문도 뒤적거리고, 그리고 길로 훨훨 돌아다녀 울적한 기분(씻을 수 있다면) 씻어버리고 한다고 하고 나오기는 나온 것이다.
 
242
그러나 그것은 자기기만(自己欺瞞)이다. 미상불 그는 불란서에서 블륌을 수반으로 조직된 인민전선내각의 그 뒷소식─가운데도 파업단에 대한 태도 같은 것─은 십여 일이나 신문을 보지 못한지라 퍽 궁금하기도 했다.
 
243
그러나 그는 도화동에서 들어와 총독부 도서관 앞을 지나면서도 그리로 들어가려고 아니했다. 몸이 대견한 탓이겠지만 마음이 내키지를 아니했던 것이다.
 
244
거리로 돌아다니며 울적한 기분을 발산시켜 버린다는 것도 실상 남의 꿈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것이다.
 
245
여러 끼를 굶어 뼈가 살에서 고스란히 쏟아져버릴 듯이 피곤한 몸뚱이로 먼지와 더위에 숨이 질리는 아스팔트를 아무리 걸어다녔자 푼더분한 남의 생활만이 눈에 띄어 더 우울은 할지언정 가슴이 시원스러울 리는 없는 것이다.
 
246
뇌수의 사치도 주리지 아니한 때의 말이다.
 
247
그러하니 그는 오던 발길을 냉큼 돌이켜 집으로나 갈 일이로되, 그러나 그는 마치 기사가 미리 방향을 틀어놓은 자동인형처럼 덮어놓고 종로까지 오고 만 것이다.
 
248
오고 나니 대낮에 활동사진을 보고 나온 때같이 온통 희어멀끔하고 싱겁기만 하다. 아무것도 변화도 생기지 아니하고 그저 주린 자기자신이 쓸데없이 번잡한 종로 네거리에 초라하니 놓여 있을 따름이다.
 
249
그는 밤이나 낮이나 늘 돈이, 쌀도 사야 할 집세도 주어야 할 옷도 해 입어야 할 두고 살림에 쓰라고 인해에게 줄 그리 할 돈이 좀 생겼으면 하고 생각을 한다.
 
250
그렇게 돈이 아쉬워서 생겼으면 생겼으면 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어떻게 해야 생긴다든가 어떻게 마련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은 성가시니까 접어놓고 껑충 뛰어 돈이 생기면 쓸 궁리에 골몰을 한다.
 
251
범수 자신더러 그의 가슴에 잠긴 막연한 기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서슴지 않고 정치적 변화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그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 더 절박한 것은 돈이 생겨지이다는 기대 그것이다. 그 자신은 그것을 부정할지언정 그것은 꼼짝할 수 없는 사실이다.
 
252
그는 경성역 앞에 우두커니 서서 오늘 그 시간까지 차표를 판 돈이 꽤 되리라고 생각해 보았다.
 
253
조선은행 앞을 지나면서는 어느 다른 은행의 행원인 듯싶은 매초롬한 양복장이가 불룩한 손가방을 안고 인력거를 타는 것을 보고 몇만 원 찾아가나 보다고 생각했다.
 
254
그는 한참이나 서서 그 인력거 뒤를 바라다보았다.
 
255
종각 뒤 동일은행 앞에서는 문앞 돌층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십원짜리를 흘리고 가지는 아니했다.
 
256
종로 네거리를 가로질러 서북편 귀퉁이에 있는 금은상 앞으로 가노라고 가는데
 
257
“고랏. (이놈아)”
 
258
소리가 들리며 삐그덕하더니 펜더가 앞 정강이를 지분거리며 머물러선다. 고개를 들어 보니 운전수가 눈을 부라리며 두덜거리고 교통순사가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259
무렴해서 슬슬 달아나고 싶은 것을 그리하지도 못하고 순사 옆으로 가니까 꾸지람을 하다가는 세워놓고 교통정리를 하고 또 몇마디 하다가는 제 볼일을 보곤 한다.
 
260
‘기니’ 어쩌고 하는 소리에 비위가 버럭 상했으나 쇠다가는 더 창피하겠어서 짐짓 고개를 숙여버렸다.
 
261
한바탕 졸경을 치르고도 그는 먼저에 바라고 가던 서북편 귀퉁이의 금은상 앞으로 가서 진열창을 들여다보았다.
 
262
그는 제법 지나는 길에 물건을 간색이나 하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들여다보기는 하나 가슴은 두근거렸다.
 
263
팔십이 원인가 하는 금비녀 한 개가 유독 눈에 들었다.
 
264
잡히면 오십 원은 줄 듯싶었다. 그러나 오십 원을 가지고 이것저것 쓸데를 생각하니 모자랐다.
 
265
값이 비슷한 놈으로 가락지를 하나만 더…… 이렇게 투정을 하다가 문득─기왕 도적질을 하는 바이면 그까짓것 백 원? 하고 돌아서버렸다.
 
266
그는 비로소 도적질이라는 생각에 연달아 내가 도적질을 하려고까지 하다니! 하고 얼굴이 화틋 달아올랐다.
 
267
엣! 치사스럽다. 이렇게 거진 입밖으로 말이 흘러져 나올 만큼 중얼거리고 그곳을 떠나려다가 지남철에 끌리는 쇠끝처럼 뒤를 돌아본다.
 
268
돌아다보는 눈에 다시 아까 그 금비녀와 금가락지가 어른거리자 그는 그대로 금은상으로 들어섰다.
 
269
“어서옵쇼.”
 
270
젊은 점원이 진열창 너머서 직업적으로 인사는 하나 이 초라한 손님의 몸맵시를 여살펴본다.
 
271
“저기 진열창에 있는 금비녀 좀 보여주시요.”
 
272
범수는 떨리는 가슴을 겨우 누르고 말을 했다.
 
273
“네 어느겁쇼?”
 
274
하고 점원은 진열창의 유리문을 열면서 내어다본다.
 
275
“바로 고 팔십이 원 정가 붙은 놈…… 그러고 여러 가지로 좀…… 그러고 가락지도 여러 가지로……”
 
276
점원은 비녀를 여러 개 가로 꽂아놓은 곽과 가락지를 끼워놓은 곽을 집어다가 범수 앞에 내놓는다.
 
277
“이게 몇돈쭝이지요?”
 
278
범수는 아까 눈독 들인 금비녀를 빼어 손바닥에 놓고 촐싹거려보며 묻는다.
 
279
점원이 그것을 받아 저울에 달고 있는 동안에 범수는 다른 놈을 두어개 빼어가지고 아름하는 듯이 양편 손바닥에 올려놓고 촐싹거려 본다.
 
280
이것이 기회인 것이다. 그는 그 기회를 이용하려고 다뿍 긴장이 되어서 점원이
 
281
“닷돈두푼쭝입니다.”
 
282
하는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아니했다.
 
283
점원이 저울질을 하는 잠깐 동안에 손빠르게 한 개를 요술하듯이 소매 속에든지 어디든지 감추었어야 할 것을 막상 다물리고 보니 범수에게는 그러한 재치도 없고 기술도 없으려니와 또한 담보의 단련도 없다.
 
284
첫시험은 실패를 하고 그 담에는 가락지를 가지고 시험을 해보았다. 그러나 역시 실패를 하고 말았다.
 
285
그는 점원의 멸시하는 시선을 뒤통수에 받으면서 금은상을 나와 화신 앞으로 건너왔다. 그는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286
보통학교부터 쳐서 대학까지 십육 년이나 공부를 한 것이 조그마한 금비녀 한 개 감쪽같이 숨기는 기술을 배우니만도 못하다고.
 
287
그렇다면…… 그렇다면…… 하고 그는 그 뒤를 생각하다가 도스토엡스키의『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가 도끼를 높이 들어 전당쟁이 노파를 내리찍는 장면을 생각하고 오싹 등어리가 추워 눈을 감았다.
 
288
그는 허위대가 이만이나 하고 명색이 대학까지 마쳐 소위 교양이 있다는 사람으로 도적질을 하려고 한 자기를 나무라보았다.
 
289
그러나 그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항거를 한다.
 
290
도적질을 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291
이 말에는 자기로서도 자기에게 대답할 말이 나오지 아니한다.
 
292
아니, 도적질을 하는 것이 나쁘고 악하고 하다는 것보다도 무엇보다도 더럽다. 치사스럽다.
 
293
이 해석이 마침 자기의 비위에 맞았다. 그래 그는 싱그레 혼자 웃었다. 그러면서 마침내
 
294
“뺏기지 않는 놈은 도적질할 권리도 없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295
어느결에 구름은 흩어져 서편 하늘가로 몰려가고 불볕이 쨍쨍 내려쪼인다. 범수는 팔을 짚어 쓰러지려는 몸뚱이를 지탱했던 전신주 옆을 떠났다.
 
296
새까만 거지아이놈이 조그맣게 두 손을 내밀면서
 
297
“나리, 나 동전 한푼만” 한다.
 
298
범수는 어이가 없어서 발을 멈추고 멀거니 거지아이를 치어다보느라니까 고놈이 마치 자기의 큰아들 종석이인 것같이 생각이 들었다.
 
299
“너 어데 사니?”
 
300
이렇게 물으니까 거지아이는 되레 뚜릿뚜릿한다.
 
301
“부모 없니?”
 
302
“없어요.”
 
303
더 물어볼 말이 없다.
 
304
“돈 시방 없다. 이담에 주마.”
 
305
“흥, 한푼만 줍쇼.”
 
306
거지아이놈은 범수가 상냥하게 말을 하니까 어리광하듯 떼를 쓰고 달라붙는다.
 
307
“너 배고프니?”
 
308
“네 어제 아침두 못 먹었어요.”
 
309
“거 배고프겠구나.”
 
310
“그러니깐 한푼만 주세요. 여기 사전 있으깐 호떡 하나 사먹게요.”
 
311
거지 아이는 딸랑하고 노랑돈 너푼을 손박에서 채어보인다.
 
312
범수는
 
313
“네가 나보담 낫다’고 하려다가 빙그레 웃고 말고
 
314
“시방 한푼도 없다.”
 
315
하고 화신 정문으로 들어섰다.
 
316
마침 뒤에서 쑥 들어서는 사람이 담배연기를 훅 내뿜는 서슬에 향긋한 담뱃내가 뼛속까지 스미는 것 같아 범수는 무심코 돌아보았다.
 
317
양복 입은 젊은 사람이 반도 못 탄 담배토막을 내버리면서 들어서서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고 있다.
 
318
담배는 경사진 시멘트바닥에서 대그르 굴러 길바닥에서 그대로 솔솔 타고 있다. 오고 가는 발들이 위태위태하게 그것을 밟으려고 한다.
 
319
얼핏 허리를 굽혀 집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차마 그 옆을 떠나지 못하는데 지게 진 품팔이꾼이 성큼 집어 그대로 입에다 물고 가버린다.
 
320
범수는 삼층으로 향해 올라가면서도 속으로 만나면 말을 넣을까말까하고 망설였다.
 
321
중학때에 퍽 가까이 지내던 동창생 하나가 서울서 전문학교를 마치고 벌써 삼사 년 전부터 이 화신에서 일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S라고 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되어서 그런지 무슨 주임이 되었다는 소식을 범수는 들었었다.
 
322
돈을 취해 달라고 하자면 일부러 찾아온 것같이 해야 하겠는데, 그랬다가 눈치가 달라 돈 말을 내지 못하게 되면 친한 사이라도 쑥스럽겠고, 그렇다고 문득 만난 것처럼 만나서는 아예 돈 말을 내려도 낼 수가 없을 것이고 해서 범수는 S가 있는 데를 어름어름하다가 S의 눈에 띄고 말았다.
 
323
S의 첫번 인사는 왜 이렇게 신색이 못되었느냐는 것이다.
 
324
굶어서 그렇다고는 못하더라도 그저 고생살이를 하느라니 그렇지야고쯤 대답했겠으나 범수는 쓰게 웃으면서
 
325
“신병 때문에……”
 
326
했다.
 
327
그러니까 S는 더욱 캐어묻는 것이다.
 
328
“무슨 병인데?”
 
329
“체증.”
 
330
체증이라고 대답을 하고 보니 범수는 미상불 위장병─못먹은 병─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속으로 웃었다.
 
331
“그래 요새 지내는 형편?…… 저기 그만두구 아즉 아무데두……?”
 
332
S는 고개를 흔들어 묻는다.
 
333
“응 그냥 번둥번둥 놀구 있지……”
 
334
“그럼 지내기두 곤란일걸! 어서 무얼 좀 붙들든지 해야지……”
 
335
범수가 웬만하면 S의 이 말끝을 받아서 양식이 없어 그런다든지 무엇에 급히 쓸 일이 있어 그런다든지 하고 돈을 암만만 돌려달라고 말을 내놓았겠지만 그는 그 반대로
 
336
“머 그저 그럭저럭 살어가지.”
 
337
하고 대수롭잖은 듯이 씻어넘겨 버린다. 그러고는 말줄이 끊이니까 되레 S더러
 
338
“그래 자네는 요새 어떤가?”
 
339
하고 묻는다.
 
340
“나? 하이구 말도 말게…… 일은 고되구 얻어먹는 건 칙살스럽게 적구…… 어서 이 노릇 작파허구 무엇이든지 내 영업으로 장사라두 시작해야지 허천나 죽겠네…… 월급이라구 받는다는 게 다달이 적자야…… 이삼십 원씩은 항용 밑져 들어가니 그 노릇을 누가 해먹나!”
 
341
이렇게까지 말이 나오매 범수로는 영영 돈 취해 달라는 말은 낼 수가 없고 만다.
 
342
나중 갈릴 때에 S는 범수더러 시방 그의 ‘생리상태’를 알 길이 없는 지라
 
343
“삼방 같은 데라도 가서 몸조섭을 잘 해야지 그대로 두어서는 못쓴다.”
 
344
고 신신 당부를 한다.
 
345
범수는 S를 작별하고 무엇에 빨리듯이 사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346
사층 층계를 다 올라서면서 신형의 동그란 선풍기에서 나오는 선풍기에 더위를 들이느라고 섰느라니까 등 뒤에서 누가 어깨를 턱 짚으며 서슴잖는 큰 소리로
 
347
“긴상 웬일이슈?”
 
348
하고 옆으로 다가선다.
 
349
범수는 깜짝 놀랄 뻔하다가 돌아다보고 그가 P인 것을 알았다.
 
350
전에 서울서 중학때도 알았지만 동경서 대학을 일 년만 같이 다녔고 술동무로 친해진 사람이다.
 
351
범수가 동경서 나오니까 P는 대학을 일 년만 졸업하고 먼저 나와 종로판의 행세꾼이 되어 있었다.
 
352
긴상이니 박상이니 하는 말투를 보면 장사패가 된 것 같으나 그는 장사를 하는 것 같지도 아니했다. 그는 장사를 할 사람도 아니요 또 할 줄도 모르는 귀골 서방님이다.
 
353
남북촌 백화점의 식당과 찻집과 삘리아드집과 빠와 요리집의 다섯 개 각(角)의 선(線) 위로 뱅뱅 도는 종로 활량 가운데 한 사람이다.
 
354
범수도 언제든지 종로에 오면 한번 이상은 기어코 이 P와 그 일행을 만나곤 했던 것이다.
 
355
“아! 나는 누구라구!”
 
356
범수는 언제 보나 근심기 없고 명랑해 보이는 P의 기분에 끌려 같이 웃으며 인사를 했다.
 
357
“그래 얼마나 더우시요?”
 
358
“나야 머 이렇게 야윈 사람이 더우를 타우? P씨야말로 얼마나 부대끼시요?”
 
359
어디다 내놓아도 늠름하니 호장부로 생긴 P를, 그리고 좋은 체격과 풍족한 생활에서 오는 근심기 없이 언제나 유쾌해 보이는 그의 언동을 절절히 부러워하며 범수는 윤기 있는 그의 얼굴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360
“아 참, 그러니 말이지 참 더워 죽겠수. 발개벗구 다니랬으면 좋겠어! 하하하하.”
 
361
P는 근처가 요란하게 큰 소리로 웃는다.
 
362
“그런데 무슨 볼일 계시유? 긴상? 가서 점심이나 자십시다.”
 
363
이 말에 범수는 어금니로 신침이 스미고 와락 시장기가 들었다. 그러나 그러는 것이 괜히 천적스러운 것 같아 얼핏 나서지를 못한다.
 
364
“멋 나는 괜찮으니 어서 가서 자시요.”
 
365
“아니야, 같이 가서 자십시다…… 볼일 계시유?”
 
366
“응 아니, 머 볼일은 없지만…… 나는 조반을 늦게 먹어서……”
 
367
“원 참 이게 어느때라구! 네시반인데! 자 갑시다.”
 
368
P는 범수의 팔을 잡아 끈다. 진열창을 들여다보다가 조선 런친지 하는 것을 먹기로 하고 P가 레지 앞에 가서 식권을 사는데 바른편 포켓에 손을 푹 집어넜다가 아무렇게나 꺼내는 것이 커다란 백원짜리가 두어 장 십원짜리가 여러 장이다. 그 밖에도 더 많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369
“가부를 좀 했지요.”
 
370
P는 십원짜리 하나를 내놓고 식권을 사면서 범수를 돌아다보고 웃는다.
 
371
“심심해서 장난삼아 해봤지요. 하하. 그랬더니 오늘 삼 백 원 도망갔어 하하하하…… 그래두 재미는 있어!”
 
372
너무 크게 웃고 크게 지껄이니까 드나드는 사람이 저마다 P를 한번씩 돌아다보고 간다.
 
373
하루에 백 원을 써도 이백 원을 써도 장난삼아 주식을 해서 삽백 원이 도망갔어도 돈은 아깝지 아니하고 재미만 있다는 이 P를 바라볼 때에 범수는 그냥 몸부림을 치고 싶게 안타까왔다.
 
374
식당으로 들어가 잠깐 앉더니 P는 양복저고리를 벗어 걸상 위에 놓아두고 변소에 간다고 도로 나갔다.
 
375
마침 바른편 돈 들어 있는 포켓이 위로 가서 있다.
 
376
범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그 속에 돈이 시글시글할 그 포켓을 바라다 보았다. 아까 금은상점에서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확확 달아오른다.
 
377
그는 진득이 가슴을 가라앉혀 가지고 좌우 옆을 둘러보았다.
 
378
전체로 손님이 드물고 범수네가 자리를 잡은 식탁 근처에는 아무도 앉지 아니했다.
 
379
고개를 들고 보아도 누구 하나 범수를 보는 사람은 없다.
 
380
기회는 절대로 좋다.
 
381
백원짜리는 없어지면 바로 자리가 날 테니 못쓴다지만 십원짜리 한두 장은 없어진대도 함부로 넣기 때문에 어디가 빠진 줄 그저 심상히 여기고 말 것이다.
 
382
이렇게 마음의 계획을 세우고 범수는 걸상을 다가놓는 체하면서 살며시 손을 뻗쳐보았다.
 
383
그러나 바르르 떨리는 손은 조금 나오다가는 무엇에 꼭 비끄러맨 듯이 더 뻗쳐지지를 아니했다.
 
384
그러면서 ‘도적놈의 권리’가 머리속에 떠오른다.
 
385
단행을 아니한 것이 섭섭도 하나 어쩐지 가슴이 홀가분해서 걸상을 도로 물려놓고 앉았느라니까 P가 터덜거리고 돌아와 앉으며
 
386
“아 참 긴상, 어데 편찮으슈? 신색시 아주 못됐어!”
 
387
하고 속도 모르고 걱정을 해준다 P가 돌아와서 자리에 앉고 그리하여 기회가 가고 없으며 범수는 ‘도적질도 할 수 없는 인종’이라고 속으로 자기를 저주했다.
 
 
388
범수는 본시 술을 못 먹는 편이 아니나 다뿍 시장했던 판에 날맥주를 한 조끼나 들이켜 그 위에다가 더운밥을 먹어, 해놓아서 술에 취하고 밥에 취하고 했다.
 
389
더구나 시장한 판에 정신없이 퍼먹은 밥이 술에 뒤섞여 배가 불러오매 그것은 배부른 안심이나 만족을 주지 아니하고 도리어 배고픈 때보다 더한 고통을 주었다.
 
390
이런 경험은 범수는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이 영락없이 있을 줄을 미리 알기는 알면서 다들리는 판에 먹지 아니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391
그래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라도 자고 싶게 몸이 사개가 풀린 것을 억지로 끌려 화신을 나서니까 얼큰해진 P는 또다시 빠로 가자고 우겨댄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요 세 번 만나면 두 번씩은 으레 술집으로 끌려가서 이 돈냥이나 있는 놀이꾼의 술을 얻어먹어 오던 터이다. 그럴 때마다‘병정’이라는 치사한 생각이 들어 범수는 앞뒤가 여살펴졌는데 차차 이러다가는 영영 P의 병정이라는 호를 타고 말겠구나 하기는 하면서, 그러나 그것을 뿌리치지 못하고 슬며시 따라섰다.
 
392
그것이 실상 속은 아무렇게라도 술이나 취하고 엄벙덤벙해서 우울한 것을 잊어버리자는 것이나, 그는 그러한 자기의 실속을 속이어
 
393
P가 굳이 잡아 끄니까……
 
394
P가 적어도 나만은 병정으로 알고 그러는 것이 아니요 일종의 존경하는 뜻으로 그리하는 것이니까.
 
395
이렇게 옹색스러운 위안을 만들어내었다.
 
396
‘뻐커스’라는 이 빠는 요새 새로 생기기도 했지만 범수는 처음이다.
 
397
그러나 종로 뒷골목에 흔히 있는 다른 빠와 역시 다를 것이 없는 곳이다.
 
398
그다지 교태도 없는 빠텐더가 있고 값 헐한 도배지를 희미한 전등으로 윤내고 군색한 걸상이 있고 혈색 좋지 못한 여자들이 제가끔 여왕인 체하고 있고,
 
399
“이 때갈년들 다 어데 가고 두 마리뿐이냐.”
 
400
P는 들어서면서 첫인사가 이것이다. 멀건 대낮에 손님이 있을 턱이 없다. 차를 마시는 한패가 구석자리에서 여자 둘을 다 차지하고 있을 뿐 이다.
 
401
“저 악한이 또 어데서 대낮에 얼어가지구 저래!”
 
402
맨다리에 원피스에 싱글에 얼굴 갸름한 여자가 말과는 반대로 해죽해죽 웃으며 P에게 달라붙듯이 어깨를 비빈다.
 
403
“더웁다 이년아, 비켜라.”
 
404
“내 이름이 이년인가! 깍쟁이……”
 
405
먼저 여자는 짐짓 쌜룩해서 저편으로 가고 거기 있던 조선옷 입은 얼굴 둥글고 계집애같이 생긴 여자가 갈아든다.
 
406
“P상 어쩌면 그렇게 한번도 안 오슈?”
 
407
“느이 보기 싫여서 안 왔다…… 자 거기 앉어라. 너 이 어른 첨 뵙지?”
 
408
“글쎄……”
 
409
“너 시집가구 싶으면 내 소개해 주랸?……참 훌륭하신 어른이다.”
 
410
“아이구! 그러면 나 같은 것이 어떻게……”
 
411
“이 때갈년들아 저런 어른허구 연애만 해봐라. 대번 코가 우뚝해지지.”
 
412
범수는 듣다 못해서
 
413
“원 실없은 소리!”
 
414
하고 웃어버렸다.
 
415
열모로 뜯어보아야 지금 자기의 몸차림새며 몸태가 여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하게 생겼는데 P가 자꾸만 그러는 것이 호의로 해석하자면 계집을 조롱하는 것이라겠지만 어떻게 보면 범수를 놀리는 것도 같아 자격지심이 들기도 했다.
 
416
그래 간단하게 차나 마시고 일어서자고 하고도 싶었으나 벌써 청한 맥주가 들어오고 여자 하나도 마저 이편 자리로 와서 시중을 든다.
 
417
자리가 그렇게 벌어진다고 범수가 먼저라고 일어서자면 못할 것은 아니다.
 
418
그러나 그렇게 할 용단까지는 나지 아니하고 모처럼 당한 이 유흥이 또한 자력(磁力)을 부리어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것이다.
 
419
술이 양에 넘치게 지나갔을 때에도 범수는 몸만 피곤했지 취하지는 아니했다. 도리어 정신이 더 드는 것 같아 도연한 가운데 다시금 자신을 돌아다볼 수 있게 되었다.
 
420
그는 돈푼이나 쓰는 친구에게 이렇게 병정을 서듯이 끌려다니며 술을 얻어먹는 것을 아까 금은상점 앞에서나 또 화신식당에서나 도적질을 하려던 자기보다 더 비루하고 치사스럽게 생각했다.
 
421
그것은 대부분이 술기운에서 생긴 객기요, 또 그 자리의 놀이가 웬만큼 싫증난 소치다.
 
422
P가 더 놀다가 친구나 몇 청해가지고 시외 어느 요리집으로 나가서 밤새껏 한바탕 놀자고 굳이 붙드는 것을 범수는 내내 볼일이 있다는 핑계를 하고 ‘뻐커스’를 나와 그 문앞에서 P를 작별했다.
 
423
벌써 일곱시가 지나고 긴 여름해도 저으기 기울었다.
 
424
취하고 지친 몸으로 십리길을 걸어나갈 일이 아득하여 범수는 몇번이나 저편으로 가는 P를 돌아다보았다.
 
425
그러나 차마 그를 도로 불러 돈 말을 내지 못했다.
 
426
범수는 할 수 없이 남대문편으로 향하여 찌는 햇볕을 쪼이며 타박타박 굳은 시멘트길을 걸어간다.
 
427
이 더위를 겪으면서 그는 겨울에 추워 고생하던 일을 생각해보았다.
 
428
그러자 마침 머리 위에서 하늘이 찢어질 듯이 프로펠라 소리가 쏟아지며 군용비행기 세 대가 소리와는 딴판으로 유유히 북쪽으로 떠가고 있다.
 
429
“체, 비행기를 만들어내는 연구, 비행기를 제작하는 노력이면 여름의 태양열을 저장했다가 겨울에 쓸 수가 없을까…… 어느편이 과학을 옳게 이용하는 편일고?”
 
430
범수는 이렇게 두덜거리며 다시 한번 비행기를 올려다보고 혀를 찬다.
 
431
청파에서 그는 문득 생각이 나 N이라고 하는 자동차 서비스에 들렀다.
 
432
그는 역시 청파에서 철공장을 경영하고 있는 친구의 소개로 이 N서비스공장의 주임격인 최씨와 만나 그의 큰아이 종석이를 두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433
범수의 욕심 같아서는 방면이야 무엇이 되었든 좀더 규모가 크고 경영도 합리화한 대공장으로 보내고 싶었으나 그런 곳에는 반연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434
월급이나 일급 같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니 그저 한 십년 하고 데리고 있어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직공만 만들어 달라고 그는 최씨더러 부탁을 했었다.
 
435
최씨는 그것은 장차 일이고 좌우간 주인과 상의해 보아서 가타고 하면 기별하겠다고 신어붓잖게는 대답했으나 벌써 한 달이 넘은지라 좌우간 어찌 되었나 싶어 둘러본 것이다.
 
436
최씨는 기름 묻은 작업복을 입고 공장에서 손수 일을 매만지고 있다가 범수를 보자 처음 만날 때와는 딴판으로 은근히 인사를 하며 사무실로 안내를 한다.
 
437
그러면서 그들을 소개한 철공소의 그 친구와 만나 ‘김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며 더우기 ‘자제’를 공장으로 보내려는 포부도 듣고 그 심경을 잘 이해하노라고 일종 존경하는 태도로 범수를 대해주었다.
 
438
범수도 그것이 싫지는 아니했다. 그런지라 점잖게 대할 이 사람을 이렇게 취기를 띠고 찾아나온 것이 면구스러웠다.
 
439
“진즉 제가 가서 기별을 해드릴렸는데 이렇게 찾어오시게 해서……”
 
440
최씨는 급사가 가져온 차를 범수에게 권하며 이렇게 요건을 꺼낸다. 범수는 일이 뜻대로 되었구나 짐작하고 흡족해서
 
441
“머 천만에…… 저야 번들번들 놀고 있으니까 얼마든지 찾어와도……”
 
442
하고 겸사를 한다.
 
443
“그 뒤 조용한 틈이 있길래 주인더러 이야기를 했지요. 친한 친구의 자젠데 무슨 생활이 궁해서 그런 것이 아니요 남다른 포부가 있기 때문에 학교교육보다는 공장에서 기술을 배우게 할랴고 그런다구…… 그랬더니 주인도 어린아이 하나쯤 더 둔다고 별일이야 없을 테니 맘대로 허라구 승낙을 허드군요.”
 
444
“네 참 감사합니다. 애써 주어서……”
 
445
“원 천만에…… 그러면 아주 제게 맡기십시요. 십년 위한하고 그저 다른 것은 몰라도 자동차에 관해서는 누구 부럽잖을 기술자를 만들어 드릴 테니까.”
 
446
“그럼 그렇게 수고를 해주시면……”
 
447
“그러고 처음 한두 달은 그냥 공장 안에서 심부림을 시키다가 그 뒤는 견습 직공으로 해가지고 다른 아이들 주는 대로 제 겸심값이라도 주게 하겠읍니다.”
 
448
이것은 범수로도 애초부터 바라지도 아니하던 것이라 더욱 고마왔다.
 
449
그래 진심으로 치하를 한 후 내일 일찌기 아이를 데리고 오겠다고 하고 자리를 일어섰다.
 
450
“그렇지만 나는 김선생의 방침에 한가지 찬성 못할 것이 있는데요?”
 
451
최씨가 작별차로 따라 일어서며 하는 말이다.
 
452
“그러시까요? 왜요?”
 
453
“머리속에다가 학문만 처쟁여도 병신이지만, 그 반대로 머리는 텅 빈 데다가 기술만 익혀 손끝 놀리는 재주만 지닌 것도 마찬가지로 병신이 아닙니까?”
 
454
“그야 물론 그렇지요.”
 
455
“그런데?”
 
456
“그러니까 적어도 초등 정도로부터 중등 정도까지의 상식은 제가 집에서 가르킬 생각입니다. 그것 못하면 야학이라도 보내고요.”
 
457
최씨는 비로소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한번 악수를 청한다.
 
458
“그러시다면 잘 알겠읍니다. 저도 그걸 유렴해서 다른 아이들보다는 정신들여 보아 드리고 되도록이면 시간 여유도 많이 갖도록 해드리겠읍니다…… 또 그리고 김선생이 손수 그렇게 상식 정도것을 가르켜 주신다면 저도 그 토대에다가 전문 방면의 지식도 가르켜서 머리와 손끝이 다같이 능란하도록 해드리겠읍니다.”
 
459
최씨는 퍽 유쾌해하며 멀리까지 따라나와 작별을 한다.
 
460
“나는 과학의 승리를 절대로 믿는 사람이니까 그 방면의 일꾼이라면 즉접이든 간접이든 웬만한 희생이 있더래도 양성해내고 싶으니까요…… 나는 인류가 X X X X X X X X X X X하기 전에 과학이 그것을 해결해줄 줄 믿고 있읍니다.”
 
461
최씨의 이 말에 범수는 다시 한번 그를 치어다보았다.
 
462
범수가 지칭하는 ‘X X의 중개자’만은 아니요, 상당히 머리를 써서 세상일을 관찰해 보려는 한 특수한 사람으로서의 최씨를 본 때문이다.
 
463
“혹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464
그렇다고 와락 속을 줄 수도 없는지라 이렇게쯤 대꾸를 하고 그 담 말이 무엇인지 들어보려는 것이다.
 
465
“혹 그럴는지 모를 게 아니라 나는 아주 확신을 가지는데요?”
 
466
“어떻게?”
 
467
“과학이 지금보다 훨씬 더 발달되어서, 가령 공기 중의 질소를 잡어다가 인공식량을 무제한으로 만들어낼 수가 있다면?…… 아마 식량 문제가 그렇게 해결된다면 싸흠은 없어질 것이 아니겠읍니까?”
 
468
“그렇게 된다더래도 그날까지는 싸울 것이지만 그렇게 된 뒤에도 달리 싸흠은 있겠지요. 투쟁이 영영 없어진다면 인류에게는 로마의 말년이 오고 말 겝니다.”
 
469
최씨는 범수의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지 또는 알아는 듣고도 찬동할 수가 없어서 그런지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웃어버린다.
 
 
470
범수는 무거운 짐 하나를 벗어놓은 듯이 가슴이 홀가분해서 집을 향했다.
 
471
그러나 한 발 두 발 집에 가까와가며 ‘명일’보다는 오늘의 양식이 아득해서 도로 침울해졌다.
 
472
언덕비탈을 올라가느라니까 서편을 등진 일본집들이 시원하게 문에다가 발을 쳐놓았고 문앞에는 날아갈 듯이 유까다를 걸치고 아이 데린 일본 아낙네들이 저녁 후에 이쑤시개를 문 채 집집이 나와서 서 있다.
 
473
초조 없이 안정된 생활에서 오는 침착과 단란을 족히 엿볼 수가 있는 한폭의 그림이다.
 
474
그와 반대로 자기의 집구석은 시방 어떠할까? 생각하매 마음은 급하면서 그러나 걸음은 내키지를 아니했다.
 
475
겨우 언덕바지를 넘어 다시 비탈을 내려가느라니 왼손쪽 자기 집에서 안해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476
낮에 범수가 나가고 나서……
 
477
영주는 줄에 넌 빨래를 만져보아 뿌득뿌득 말랐으면 그만 걷어다가 다듬질이나 할까 하고 마당으로 내려서는데 나가 놀던 작은아이 종태가 들어왔다.
 
478
손가락을 입에 물고 비슬비슬 걸어들어오면서 볼 먹은 소리로
 
479
“음마.”
 
480
하는 것이 벌써 이짐을 부릴 눈치다.
 
481
“오냐.”
 
482
영주는 입으로만 대답을 하고 빨래를 주섬주섬 걷느라니까 아이는 옆으로 와서 아랫도리를 안고 매달리며
 
483
“음마.”
 
484
하고 또 부른다.
 
485
결혼하던 해 봄에 큰아이 종석이를 낳아서 지금 열 살(임신은 그 전에 연애시절에 되었었다), 그 다음 세 살 터울로 작은아이 종태를 낳고는 이내 포태를 못했다.
 
486
작은아이를 해산할 때에 자궁후굴이 생긴 것을 치료도 아니하고 그대로 둔 것이 지금 와서는 포태도 포태려니와 중증의 히스테리를 잃게 한 것이다.
 
487
영주는 아이가 작은아이도 작은아이려니와 큰아이 종석이는 남편 범수를 닮았고 작은아이는 자기를 닮았기 때문에 큰아이보다는 작은아이를 더 귀여워하고 그것이 어느때는 남편이나 남의 눈에 띌 만큼 치우치기까지 했었다. 여자의 편성이라고도 하겠으나 거기에는 그의 히스테리증이 다분히 시키는 점이 많았다.
 
 
488
영주는 아이를 마루로 데리고 와서 땀이 까만 꼬장물 되어 흐르는 얼굴과 목을 씻어주며 달랜다.
 
489
“종태야.”
 
490
“응?”
 
491
“배고프지.”
 
492
“응, 배고파 엄마.”
 
493
아이는 전에 더러 끼를 굶고는 배고프다고 떼를 쓰다가 지천도 먹고 심하면 매도 맞고 해서 이제는 눈치가 올라 이짐은 부려도 제 입으로 먼저 배가 고프다고 밥을 달라고는 아니한다.
 
494
“배고파? 오냐 인제 아버지 돈 가져오시거든 쌀 팔어다가 응 고기두 사구 해서 밥 많이 해주께 응. 배고프다구 울구 그러지 마라 종태야.”
 
495
“응.”
 
496
아이는 대답만 하지 그래도 이짐은 풀리지 아니한다.
 
497
“에, 우리 종태 착허지…… 그러구 언니는 어데 갔나?”
 
498
“저기 가개 앞에……”
 
499
“혼자?”
 
500
“아니 아이들허구……”
 
501
“응, 그럼 어머니 다듬이헐 테니까 가서 언니허구 같이 놀아라…… 멀리 가지 말구 종태야.”
 
502
이렇게 살살 어르기는 하나 남편이 무슨 수로 다만 저녁 양식거리라도 구해가지고 돌아올까 싶지 아니해서 한심했다.
 
503
한편 속으로야 취직이 되었다든지 혹은 돈을 변통했다든지 해서 기쁜 낯으로 돌아왔으면 좋겠거니 하기는 한다. 더구나 아까 다투다가 나가면서
 
504
“돈을 마련해가지고 오면 입이 귀밑까지 째지렷다.”
 
505
고 한 말은 어쩐지 무슨 도리가 있을 법해서 한 소리같이 느긋이 기대가 되기도 했다.
 
506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편이 돈이나 변통하려고 시장한 것을 참아가며 더운 데 허덕허덕 돌아다닐 것을 생각하니, 그러면서라도 마음먹은 대로 돈이나 구처되었으면 신이 나서 돌아오려니와 모두 허탕만 치고 말면 얼마나 더 시장하며 낙심이 되랴 싶어 차라리 나가지 못하게 하니만 못했다고 누위치는 생각이 들기고 했다.
 
507
종태가 막 도로 나가려고 하니까 큰아이 종석이가 씨근버근 뛰어들다가 안으로 들어오지는 아니하고 대문간에서 갸웃이 들여다보더니
 
508
“종태야 종태야.”
 
509
하고 긴하게 불러낸다.
 
510
큰아이마저 배가 고파하고 시무룩했으면 그렇지 아니했으련만 그놈은 기운차게 뛰어다니고 하는 것을 보니 영주는 괜히 심정이 나서
 
511
“종석아.”
 
512
하고 팩 소리를 질렀다.
 
513
그러나 이어 뉘우치고 무슨 꾸지람이나 들을까 지레 겁이 나서 살금살금 들어서는 종석이를 보고 목소리 부드럽게 타이른다.
 
514
“너는 배두 안 고프냐? 그렇게 사뭇 뛰어다니게……”
 
515
종석이는 무렴했든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도 아니한다.
 
516
“종태는 왜 그래?”
 
517
“같이 놀려구……”
 
518
“울리지 말구 잘 데리구 놀아.”
 
519
“내.”
 
520
“멀리 가지 말구……”
 
521
“내.”
 
522
아우 형제가 나란히 서서 나가는 것을 보니 저것들이 배가 고프다 못해 집이라고 찾아들어왔다가 도로 나가느니라 생각하니, 영주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나 눈가가 싸하고 눈물이 돌았다.
 
523
그래 대문 기둥에 우두커니 기대서서 먼산을 바라보며 어떻게 좁쌀 되라도 마련할 도리가 없을까 늘 바느질을 가져오는 집에 가서 바느질삯이라도 미리 좀 선대해 달라고 혀짧은 소리를 해볼까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가난한 사람에게도 더러는 행운이라는 것이 천신 돌아오는 수가 있는 것인지 마침감으로 바느질거리가 들어왔다.
 
524
늘 바느질을 가져오는 아랫동리 싸전집의 젊은 아낙이 눈에 익은 알록달록한 보자기를 옆에 끼고 해죽이 웃으며 가까이 오는 것을 볼 때 영주는 꿈인가 싶게 기뻤다.
 
525
그는 그래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깊이 내쉬고 살뜰한 손님을 웃는 낯으로 맞이했다.
 
526
“어서 오세요. 얼마나 더우세요??”
 
527
“아이 안녕허십시요? 참 비두 아니 오시구 웬 더웁니까…… 첨 보겠어요.”
 
528
“그러게 말이에요! …… 댁에는 애기랑 잘 놀아요?”
 
529
“네…… 요새는 재주가 늘어서 따루따루를 헌다구 호호호호.”
 
530
“아이 어쩌면!”
 
531
콧등과 눈가로 주근깨가 다닥다닥 나고 뒤집히는 웃입술 밑으로 시뻘건 잇념과 누렇게 들여박은 금니가 내다보이고 하는 말하자면 추물이로되 또 어디서 어떻게 굴러먹었는지 근지도 모르나 늙게 상처한 싸전집 영감의 막지기로 들어와 없던 아들까지 낳아주어 호강이 발굼치까지 흐르는 이 ‘싸전댁’에 대해서 영주는 꺼림칙한 생각을 억지로 접어놓고 행여 빛다른 눈치를 보일세라 끔찍 조심해서 대하는 것이다.
 
532
“그래 영감이 하루에두 열 번 스무 번은 안에를 더 드나드신답니다.”
 
533
싸전댁은 자기 집같이 마루로 올라앉아 손수건에 싼 피종을 풀어놓고 피워 물고는 영주가 맞장구를 쳐주는 데 신이 나서 자랑을 쏟아놓는다. 항용 안잠자기나 심부름을 하는 아이를 시켜 바느질을 보내기도 하지만 심심이나 하고 하면 말동무를 찾아 자기가 이렇게 손수 가지고 와서는 놀 겸 다녀가곤 했었다.
 
534
훨씬 자기 집안 자랑을 늘어놓고 말머리가 막히자 이번에는
 
535
“그래 댁의 애기들두 잘……”
 
536
하고 새삼스럽게 인사를 차린다.
 
537
영주는 그렇다고 믿기는 하나 혹시 저 보자기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바느질감이나 아니면 어찌하나 싶어 어서 펴놓고 속시원하게 이리이리 해달라는 말이 나오기만 기다리는데 자꾸만 딴 수작이 벋어지니 여간만 속이 타지 아니한다.
 
538
“네, 그저 놓아멕이는 말새끼처럼……”
 
539
“바깥어른께서는 아즉두 노시구?”
 
540
“네 아즉.”
 
541
“거 참 걱정되시겠읍니다. 어서 생화를 허서야지.”
 
542
“그러게 말이예요. 허구헌날 참 못해 먹겠어요.”
 
543
“그러다뿐이겠어요…… 것두 다 팔자 소간이지요. 아, 허기야 오죽 훌륭허십니까! 밖에서는 대학교를 졸입허시구 또 안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입하시고…… 그러구두 저 고생이시니!”
 
544
“시방 세상에야 공부한 게 무슨 소용이 되더라구요!”
 
545
영주는 남편이 그런 말을 하면 왜 공부한 게 잘못이냐고 핀잔을 주지만 실상 자기도 그런 말을 곧잘 하는 것이다.
 
546
“거 참 그런가바요. 인제는 공부를 투철히 해두 소용이 없나바요. 세상이 말세가 되서 그런지……”
 
547
싸전댁은 말세라는 말 끝에 문득 생각이 나서 이어
 
548
“아이 참 금년이 병자년이라구 난리가 난대지요?”
 
549
하고 아까 문간방 색시만큼이나 긴하게 말을 한다.
 
550
“글쎄들 그럽디다만. 무슨 병자년이라구 난리가 나란 법이 있을라구요?”
 
551
“웬걸요. 꼭 난리가 난대요. 그래서 이 백금값두……”
 
552
하고 손에 낀 굵다란 백금가락지를 뻗혀보인다.
 
553
“——퍽 올랐다는데요.”
 
554
그의 손에는 가운뎃손가락에 백금가락지가 한 켤레 끼워 있고 또 무명지에는 새빨간 루비를 박은 금반지도 끼워 있다.
 
555
영주는 백금 같은 것은 패물로 가져본 적이 없는지라 푸르르죽죽하고 수퉁스런 백금가락지는 신통치 아니하나 루비 박은 금반지는 벌써 몇 해 전에 전당국에서 떠내려간 자기 반지 비슷해서 유달리 치어다보인다.
 
556
싸전댁은 그러나 백금반지를 설명을 해서 영주를 비로소 놀라게 한다.
 
557
“이 가락지가 글쎄 일곱돈쭝에 백금값이 팔십사 원, 공전 이십 원 해서 일백사 원이 먹은 건데, 이 시방은 백금 한돈쭝수에 이십육 원이 간답니다그려! 그러구두 인제 더 올른다는군요!”
 
558
영주는 그 푸르죽죽하니 납보다 좀 나이보일까말까 하는 가락지가 그렇게 값이 나갈 것인 줄은 몰랐다.
 
559
싸전댁이 말하는 대로 치면 그것이 일백오십 원도 더 해서 이백 원어치나 되는 것이다.
 
560
“어쩌면!”
 
561
영주는 무심코 손을 뻗쳐 싸전댁의 손에 끼워 있는 백금반지를 다시 만져보며 탄식을 한다.
 
562
이백 원! 이백 원이면 돈 그것은 그리 하찮은 돈이라더라도 영주에게는 끔찍이 귀한 돈이다.
 
563
그런 것을 손가락에다가 끼워두고 놀려도 괜찮을 이 싸전댁이 가락지와 한가지로 다시 한번 치어다보여지는 것이다.
 
564
“그런데 글쎄 호호.”
 
565
싸전댁은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말도 채 하지 아니하고 먼저 웃어놓는다.
 
566
“첨에 영감이 그리세요. 가락지만 백금으루 헐 게 아니라 반지, 귀이개 그리고 이 혁대고리까지 다 백금으루 허자구……”
 
567
싸전댁은 복판에 역시 루비를 박아 만든 혁대 장식을 내어보인다.
 
568
“그래두 나는 백금보담은 금이 보기가 좋길래 가락지만 백금으루 허구 이런 것은 우겨서 금으루 했시요. 아 그랬더니 이번에 백금값이 그렇게 올랐다는 말씀을 허시면서, 거 보라구 내 말대로 했으면 시방 그것들을 다 치면 사백 원은 남잖었겠느냐구 그러시겠지요.”
 
569
“거 참 그럴 줄 알았드라면 다른 거랑 더 좀 장만허실걸……”
 
570
“그러게 말이지요 여편네들이 허는 것이라니 다 그래요…… 그래 그건 그렇다구, 그러면 이 가락지나마 팔어다주시라구 그랬지요. 그랬더니 그냥 두어두래시는군요. 인제 사십 원은 갈 테니 그때 가서 팔어서 금으루 장만했다가 백금값이 뚝 떨어지거들랑 도루 백금으루 장만허자구……”
 
571
남이 먹는 떡같이 입맛이 당기는 백금가락지 이야기가 겨우 끝이 난뒤에 싸전댁은 비로소 가지고 온 보자기에 정신이 들어
 
572
“아이 참 내가 이렇게 정신머리가 없어!”
 
573
하고 옷감을 펴놓는다.
 
574
흰 생고사로 안팎을 마른 께끼적삼 한 감이다.
 
575
“이게 좀 급헌데…… 시방 되까요?”
 
576
그거야 이편에서 더 아쉬운 판이라 영주는 얼핏
 
577
“되구말구요.”
 
578
하고 옷감을 받아들었다.
 
579
“저녁 때 출입을 좀 해야겠어요…… 그럼 괴로우신 대루 시방 좀 박어주세요. 좀 있다가 안잠자기를 올려보내지요.”
 
580
급하다면서 실컷 이야기를 하며 놀다가는 이렇게 다지어놓고 그는 돌아갔다.
 
581
영주는 시장한 뱃속에 바람을 다뿍 집어삼킨 것같이 아까와 달리 약삭빠른 이 칠십 전짜리 바느질을 하기가 괜히 심정이 났다.
 
582
이것을 가지고 늘 다니는 재봉틀 둔 집에 가서 한 시간이나 그 이상 더 진땀을 뽑아가며 곱게곱게 해놓으면 칠십 전을 가지고 와 찾아가고 그 칠십 전에서 재봉틀을 쓴 세로 십오 전을 주고 나면 나머지가 오십오전——세 끼 굶은 입에다 밥티 한알 집어넣느니만도 못한 것——
 
583
이렇게 따져보며 생각하니 영주는 한심스러워 바느질감을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584
그러한 생각 끝에 연달아 그의 친정어머니가 얌전한 탓으로 바느질을 배워두었다는 것이 도리어 야속스럽기까지 했다.
 
 
585
도적맞을 것이야 없지만 문간방 색시더러 집을 보아달라고 부탁해두고 바느질감을 가지고 나오다가 영주는 대문 앞에서 집 세준 주인과 쭈쩍 만났다.
 
586
사내가 오면 늘 영주가 나서서 대응을 하는지라 집세 조르기가 헤먹었든지 여편네를 보내곤 하더니 오늘은 무슨 생각으로 사내가 온 것이다.
 
587
혹, 지날 길에 허실삼아 들여다보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588
그러나 그는 그러한 눈치는 아니 보이고 짐짓 찾아온 것처럼 더운 인사 가뭄 인사 하던 끝에
 
589
“좀 변통되섰나요?”
 
590
하고 집세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591
“아이구 저, 아즉 좀 못 되었는데요.”
 
592
영주는 집세는커녕 끼가 간데없는 터라 언제나 쓰지 아니한 빚을 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영영 못 내겠다고 하면 집을 비워달라고 할 판이라 곧 무슨 수가 생길 듯이 대답만은 흠선히 해두는 것이다.
 
593
“아 시굴서 아즉 아니 오섰나요?”
 
594
시골? 남편 범수 말인 듯한데 웬 시골인가 하다가 영주는 요 전번 여편네가 왔을 때 마침 남편이 나가고 없는 것을 시골로 돈 변통하러 갔다고 둘러대던 일이 생각이 났다.
 
595
“네 아즉 아니 오섰어요.”
 
596
“허, 거 참!”
 
597
집주인은 입맛을 다시다가
 
598
“언제쯤 오시나요?”
 
599
하고 파서 묻는다.
 
600
“글쎄요…… 소식은 없지만 아마 쉬 오실 듯해요…… 오시면 이번에 한꺼번에 해다 드릴 테니 염려 마세요.”
 
601
처음 이사올 때에 석 달치를 미리 주고는 지금 여섯 달이 되어오되 한달치도 내지 못했으니 석 달치가 밀린 셈이다.
 
602
그러나 범수네로는 행여 무슨 도리가 생겨 돈이 들어오더라도 밀린 석 달치를 주느니 그놈으로 딴 집을 세 얻어갈 요량이었던 것이다. ─졸리는 것도 소극적으로는 일종의 돈벌이야.
 
603
범수는 안해가 혼자서 졸리고는 그 화풀이를 하느라고 쫑알대면 번들거리면서 곧잘 하는 말이었었다.
 
604
졸리다 못해 내게 되면 졸린 것이 허사가 되지만 영 아니 낸다면 졸린 값을 찾게 되니까 버젓하게 가난뱅이의 직업이요 따라서 수입이라는 것이다.
 
605
범수는 궁한 몇해 살림에 그러한 철학(?)을 많이 터득했었다.
 
606
“좌우간 이 그믐은 넹기지 마서야 허겠읍니다…… 영 그러신다면 집을 비어주서야겠구요.”
 
607
집주인의 이 집을 비어내라는 말은 집세를 조르던 끝이면 으례 한번씩 하는 소리라 처음과 달라 그다지 위협스럽게 들리지도 아니했다.
 
608
“그믐이 아니라 그 안에라두 되면 우리가 갖다 드리겠어요.”
 
609
영주는 이렇게 한팔 늦구어 집주인을 배송시켜버렸다.
 
 
610
재봉틀을 빌어쓰려고 하니 영주는 다시 심정이 상했다.
 
611
영주는 한 달이면 많은 때는 사오 원 적은 때도 이삼 원 푼수는 재봉틀세를 준다.
 
612
재봉틀을 둔 그 집에서도 월부로 산 것인데 그 월부를 거진 영주가 내는 세로 물어가는 줄을 영주는 잘 알고 있다.
 
613
그러니 적이나 무엇하면 영주도 월부로 재봉틀을 한 채 들여놓고 세를 내는 정도로 월부를 치르어 갔으면 나중에 가서 재봉틀 하나는 떨어지려니 하고 남편 범수와 상의를 해보았으나, 그는 시원찮이 여겨 코대답밖에는 아니했었다.
 
614
또 막상 들여오재도 계약금으로 이삼십 원은 주어야 할 터, 보증인도 저편에서 요구하는 대로 세워야 할 터 해서 난처한 일이 아닌 것은 아니었었다.
 
615
그래 꿀침 넘어가듯 당기는 것을 못하고 번번이 약속받은 바느질삯에서 재봉틀세까지 떼어주게 되니 본시 살림에 밝은 영주로는 그게 안타깝지 아니할 리가 없는 것이다.
 
616
더구나 재봉틀을 논 집에서는 영주가 생각하기에는 과분의 세를 또박또박 받으면서, 그러니 고맙게 여겨주어야 할 것을 어느때는 되레 무슨 적선이나 하는 듯이 비쌔는 눈치를 일쑤 보이곤 했었다.
 
617
그래저래 해서 아예 심사가 좋지 못한 판인데 ‘아주머니’ 라고 편의상 부르는 과부댁이 변덕을 부리느라고 영주가 보자기를 끼고 들어서는 것을 첫인사가
 
618
“원 재봉틀이구 무엇이구 하두 함부루 써놓아서……”
 
619
하는 구누름이다.
 
620
자식도 없는 과부로 집은 방이 네 개나 되는 것을 조각보 오리듯 떼어 한 개씩 세를 놓고 자기는 혼자 홀몸으로 안방 하나만 차지하고 있어 그렇게 아등바등 아니해도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터건만 요새 와서는 한술 더 떠 속새를 대푼변 돈놀이까지 하고 있는 마흔댓이나 된 서울 토종이다.
 
621
과부로 오래 지내다가 인간으로의 성적 구별이 없어지려고 하는 그 나이가 그렇게 변덕스러운 성미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622
사실 그런 변덕만 아니면 여느때는 무척 삭삭한 마님이다.
 
623
영주는 그대로 홱 돌아서서 나오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러면서 이러한 때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저편이 해해하는지 속을 알고 있는지라 재봉틀 이야기는 쑥 잡아젖히고 얼마나 더우냐는 둥 신문은 보지도 못하고도 신문에 시골은 가물로 야단법석이 났다는 둥 한바탕 이야기를 떠벌려놓았다. 과연 효과여신(效果如神)이다.
 
624
정말이건 거짓말이건 이 과부댁에게는 이야기라면 세 끼 밥을 두 끼로 줄이고라도 홈 파듯 파는 성미다.
 
625
그래서 이야기가 오고가고 하는 동안에 어찌하다가 영주네 어려운 살림살이로까지 미끄러졌다. 그러는 동안 바느질은 벌써 시작이 되었고.——
 
626
처음 들어갈 때에 샐쭉했던 것과는 딴판으로 과부댁은 금시 무엇 도와라도 줄 듯이 영주를 동정해서 말을 하고 그 때문에 영주는 슬며시 끌리어 긴찮은 청을 내놓고 싶게까지 되었다.
 
627
청이라는 것은 재봉틀 한 대를 월부로 돌여놓을 밑천이다.
 
628
어떻게 생각하면 들어주지 아니할 것도 같으나 또 어떻게 보면 들어 줄 듯도 싶어, 에라 밑져야 말밖에 더 밑지랴고 영주는 마음을 도사려 먹고 이 말 끝 저 말 끝 여새기고 있는데 마침 적삼 깃을 곱게 접어 솜씨나게 박고 있는 것을 과부댁이 일부러 다가와서 들여다보다가
 
629
“원, 저렇게 바느질솜씨두 좋구 일물이랑 심덕이랑 얌전헌 이가!”
 
630
하고 혀를 끌끌 찬다. 그 끝을 영주는 냉큼 말을 받아
 
631
“그런데 참 아즈머니.”
 
632
하고 아주머니 소리에 가득 정을 부어 불렀다.
 
633
무슨 말인가 하고 과부댁은 무심히 영주를 바라본다.
 
634
“나 아즈머니헌테 꼬옥 청 한가지가 있어두 차마 입이 안 떨어져서 이내 혼자 속에다가만 두구 지냈는데요.”
 
635
말을 하면서 영주는 과부댁의 낯꽃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폈다. 약차하면 거북스럽잖은 딴 말로 말을 돌려 창피를 보지 말려는 것이다.
 
636
“응 무언데?”
 
637
과부댁은 영주의 속을 대강 못 알아는 차렸으나 짐짓 어리둥절해서 묻는다.
 
638
“나 돈 삼십 원만 취해주세요.”
 
639
말이 목구멍에서 나올까말까 하는 것을 영주는 억지로 끌어내버렸다.
 
640
과부댁은
 
641
“돈?”
 
642
하고 얼굴이 달라지더니 이어
 
643
“내가 돈이 어디 있수?”
 
644
한다. 차마 바로 고전까지 가지는 상냥한 태도를 싹 씻어버리지는 못하고 강잉해서 좋은 얼굴을 보이는 것이다.
 
645
영주는 일이 글러진 줄 알기는 하나 그러나 기왕 벌어진 춤이니 그 다음 말을 다 아니할 수는 없다.
 
646
“없으시다면 할 수 없지만, 혹 한 삼십 원 돌려주시면 다른 사람일레루 열두어 달에 나눠서 삼 원씩이구 갚어 드릴려구 그랬어요.”
 
647
“글쎄…… 돈은 삼십 원씩이나 갑자기 무엇에 쓸려구 그리우?”
 
648
“네 좀 긴히 쓸데가 있어서……”
 
649
재봉틀을 사놓는다고 바른 대로 말하면 될 것도 안될 터라 영주는 그냥 긴히 쓴다고만 대답했다.
 
650
“글쎄…… 긴 히 쓴다니 돌려주었으면 생색두 나겠지만 내가 무슨 돈이 있수!”
 
651
하고 잡아떼다가 다시 한가닥을 깔아놓는다.
 
652
“……게 있수 내 어디 한 군데 알아는 보리다마는 그 집에두 요새 돈이 없을 게야……”
 
653
많으나 적으나 돈놀이하는 사람이면 으례 당장 거절하기 어려운 자리에다가는 이렇게 비스감히 깔아놓았다가 나중에 못되었다고 핑계를 하는 것인데 그런 내평을 모르는 영주는 그것이 정말인 줄만 알고 느긋이 기뻤다.
 
654
그래 꼭 써야 하겠다는 것 그리고 한 달에 삼 원씩 열두 달에 나누어서 삼십육 원을 갚겠다고 낳지도 아니한 아기를 포대기 장만하듯 해놓은 뒤에 바느질을 마쳐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655
집에는 남편 범수도 아이들도 아니 들어오고 싸전집 안잠자기만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656
그래 부랴부랴 뜬숱을 다리미에 일궈 싹 다려주고는 십전박이 일곱 닢을 받았다.
 
657
여느때 같으면 이따가 저녁에든지 내일 일감이 생겨 바느질을 하러 가는 길에 갖다주어도 괜찮을 것이로되 영주는 과부댁에게 근사를 물어야 할 판이라 그 길로 싸전에 들러 쌀과 좁쌀을 한 납대기씩 팔고 나머지에서 십오 전을 선 자리에 갖다 주었다. 그러면서 한번 더 신신당부를 해두었다.
 
658
그렇게 하고도 나머지가 있어서 장작 한 단에 자반갈치 한 마리에 또 종태가 늘 노래부르듯 하는 감자를 오전어치만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니 좌우간 오늘은 살았구나 싶어 남편과 아이들이 까맣게 기다려졌다.
 
 
659
저, 아래 동리 전차길 근처에서.
 
660
골목쟁이로 늙수구레한 두부장수 하나가 두부 목판을 짊어지고
 
661
“두부나 비지 사우.”
 
662
외우며 들어선다. 갖에 두부집에서 나오는 길인지 목판 밑으로 물줄기가 줄줄 흘러내린다.
 
663
골목쟁이에서는 아이들이 한떼 왁자지껄거리고 떠들며 몰려나온다. 그 중에 종석이와 종태도 섞여 맨 뒤에 처져서 나오고 있다.
 
664
“제길, 아이들두 많기두 허다! 이러구두 자식 없어 설어허는 사람이 있으니!”
 
665
두부장수는 두부지게를 함부로 툭툭 치고 지나가는 아이들이 밉든지 혼자 두덜거리며 조심조심 비껴서 늘 다니는 단골집 앞에다가 짐을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간다.
 
666
종석이는 가는 아이들의 뒤를 그냥 따라가려는 종태의 팔을 잡아당겨 골목 안에 처졌다.
 
667
목판 틈으로 물이 흐르는 두부를 생각하니 갑자기 배가 더 고파 오고 꼭 그놈을 하나 먹고 싶었던 것이다.
 
668
전에 종석이는 집 근처 반찬가게에서 빵을 한 개 주인 몰래 집어먹은 일이 있었다.
 
669
처음 집으려고 할 때는 무서웠고 또 집어가지고 달아나서 먹으려니까 가슴이 울렁거리고 목이 매기는 했지만 그놈이 여느때 돈을 주고 사서 먹는 놈보다 더 맛이 있고 좋았었다.
 
670
그런 일을 생각하니 종석이는 지금 두부장수가 받쳐놓고 들어간 두부도 먹으면 더 배가 부르고 맛이 있을 것 같았다.
 
671
종태는 속도 모르고
 
672
“가자.”
 
673
하고 조른다.
 
674
“가만 있어. 인제 존 것 주께.”
 
675
종석이는 두부 목판을 눈독들여 바라보면서 동생을 달랜다.
 
676
“존 거 무어?”
 
677
“인제 보아.”
 
678
“난 배고프다. 얼핀 집에 가서 밥먹자.”
 
679
“피, 집에 가야 머 밥 있나…… 어머니가 밥 달랜다구 야단이나 허지.”
 
680
“아니야 아버지가 돈 가져온댔어.”
 
681
“피, 아버지가 무얼 돈 가져와…… 집에 가야 밥 아니했어…… 가만있어. 내 존 거 주께.”
 
682
마침 두부장수가 도로 나오더니 목판의 보자기를 걷고 소담스럽게 허연 두부 한 모를 집어 대접에 담아가지고 도로 들어간다.
 
683
종석이는 침이 꼴깍 넘어가고 종태는 형의 눈 가는 곳과 얼굴을 번갈아 보고만 있다 눈치를 챈 것이다.
 
684
종석이는 그동안 가서 한 모 꺼내지 못한 것이 안타까와 시무룩해졌다.
 
685
인제는 두부장수가 곧 나와서 짊어지고 가버릴 테니 소용없겠다고 그냥 갈까 하는데 두부장수는 나오기는 나왔으나 그대로 다음 집으로 들어간다. 종석이는 아우의 귀에 입을 대고
 
686
“아무 소리두 말구 가만히 섰어 응.”
 
687
하고 살금살금 두부지게 옆으로 가고 있다. 종태도 덩달아서 그 뒤를 가만가만 따라간다.
 
688
종석이는 두부지게 옆으로 다 가더니 짧은 키를 발돋움해서 두부목판에 매어달리듯 해가지고는 겨우 두부 한 모를 집어내었다.
 
689
그는 돌아서서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훔친 두부를 반을 떼어 종태를 주고 한편으로 볼이 꿰지게 밀어넣는다. 종태를 재촉해서 도망갈라 허덕허덕하는데 등 뒤에서
 
690
“네끼놈우 자식들!”
 
691
하는 호통소리가 들렸다. 두부장수는 나오다가 그걸 본 것이다.
 
692
종석이는 아우의 팔목을 잡아끌다가 쫓는 소리가 영 다급하니까 그냥 저 혼자 달아나고 종태는 두부 한쪽을 손에 쥔 채 겁결에 땅에 가 펄씬 주저앉아 엉엉 운다.
 
693
그래서 두부장수는 ‘도적’을 잡기에 큰 힘도 들자 아니했다.
 
694
두부장수가 외치고 떠들고 하는 바람에 집집에서 사람이 나오고 아이들이 모여들고 했다.
 
695
두부장수는 종태의 손목을 당시랗게 훑으려잡고 도둑눔의 자식이니 오랄질 놈의 자식이니 걸찍하게 욕을 한바탕 퍼붓는다.
 
696
구경하는 아낙네 가운데 누구는 어린 것이 철모르고 그랬으니 놓아주라고 만류하나 두부장수는 듣지 아니하고 종태를 끌고 두부지게를 짊어지고 등 뒤에 구경꾼 아이들을 죽 세우고 이렇게 행렬을 지어 웃동리로 향했다.
 
697
두부장수도 먼저 도망간 큰놈이 ‘진범’ 인 것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진범인’을 놓친 바에야 아무나 그 자리에서 두부 한쪽을 가지고 있던 놈을 붙잡았으니 그놈한테 둘러씌우면 그만인 것이다.
 
698
영주는 밥을 다 해놓고 밥에 찐 감자도 그릇에 담아놓고 남편과 아이들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데 문 밖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섞인 종태의 울음소리를 알아듣고 뛰쳐나갔다.
 
699
종태는 어머니를 보자 두부장수에게 붙잡힌 팔목을 뿌리치고 달려와서 매어달려 새삼스럽게 운다.
 
700
혹시 싸웠나. 싸웠다면 웬 두부장수가 어린아이를 이렇게 당시랗게 붙들고 왔을까? 영주는 잠시 당황해서 말을 못하다가 마침 지게를 받쳐놓고
 
701
다가서는 두부장수더러
 
702
“웬일이요?”
 
703
하고 물어보았다.
 
704
“그 애가 누구요?”
 
705
두부장수는 장히 도도하게 되레 묻는다.
 
706
“우리 아이요 왜 그러우?”
 
707
“두부값 물어내시요.”
 
708
“두부값이라니?”
 
709
“그애더러 물어보시우.”
 
710
그러자 뒤따라온 아이가 하나 쏙 나서서
 
711
“그애가 그 어른 두부 훔쳐먹었대요.”
 
712
하고 똑똑이를 부린다.
 
713
“엉?”
 
714
영주는 무심결에 외쳤다. 단번에 앞이 아찔해졌다.
 
715
영주는 겨우 울음을 그치고 치마폭에 숨듯이 매어달린 종태를 잡아 흔들었다.
 
716
“너 그게 정말이냐? 두부 훔쳐먹었냐?”
 
717
“아니야.”
 
718
영주는 가슴이 쑥 내려가고 신이 났다.
 
719
“이애는 아니라는데 어떻게 보구 허는 말어요. 괜히 남의 어린아이를 갖다가 도적의 얼을 씌울 양으루.”
 
720
영주가 이렇게 나무라는 데는 두부장수도 좀 결리는 데가 있는지라 버썩 쇠지는 못했다.
 
721
그러나 그렇다고 일을 이만큼이나 저질러놓고 그대로 뒤통수를 긁다가는 되레 욕을 먹을 판이다.
 
722
“그애 말만 제일이요? 내가 두부지게를 받쳐놓구 들어갔다가 나오니까 웬 그애보담 좀 큰 아이허구 두부를 끄내서 먹고 있읍디다. 저기 저애들두 다 본 중이라우.”
 
723
“옳아요. 나두 보았어요. 두부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가 요 밑에서 버린걸요.”
 
724
아까 그 똑똑이가 다시 내달아서 이렇게 그야말로 증인을 선다.
 
725
영주는 자신이 흔들려 종태를 굽어다보며
 
726
“네가 두부 먹었다면서?”
 
727
하고 물어보았다.
 
728
“죄꼼 먹었어.”
 
729
“먹었어?”
 
730
“응.”
 
731
“네가 집어서?”
 
732
“아니.”
 
733
“그럼?”
 
734
“언니가 집어주어서……”
 
735
“언니가?”
 
736
영주는 깡총 뛰었다.
 
737
두부장수도 그애들이 아우형제인 줄은 몰랐다가 이렇게 되고 보니 기승이 펄펄하다.
 
738
“거 보시우. 내가 괜히 남의 자식을…… 괜히 그러다가 마른벼락을 맞일려구 그랬겠우? 어여 두부값이나 내시우. 나두 가서 장사해야지.”
 
739
영주는 성미를 누르고 침착했다. 그는 서둘지 아니하고 낯꽃을 고쳐 두부값이 얼마냐고 물었다.
 
740
“몇모를 집어먹은지 알 수 있우…… 두 모 값만 내시우.”
 
741
“두부 몇 집었니?”
 
742
영주는 종태더러 물어본다. 두부장수가 두 모 값이라고 하는데 의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두 모 값만’이라고 하는 데 비위가 거슬려 수를 옳게 알아가지고 당장 돈이야 치르든 못 치르든 따져주자는 것이다. 종태는 둘째손가락 하나를 펴보인다.
 
743
“하나?”
 
744
“응.”
 
745
“꼭 그렇지?”
 
746
“응.”
 
747
“이애는 하나라는데 그리우?”
 
748
기회가 좋으니 한마디라도 두부장수를 면박주고 싶어진 것이다.
 
749
“누가 그애 말을 곧이들우?”
 
750
“아니 두 모 값은 말구 열 모 값이라두 주기는 주겠소만 한 모 먹은 것허구 두 모 먹은 것허구는 다르잖수…… 그러나저러나 간에 두 모 값을 주기는 줄 텐데 시방 바깥어른이 출입허구 안 계시니 내일 아츰에 한번 들르시우.”
 
751
범수가 들어왔자 빈손으로 돌아왔으면 별수 없겠지만 우선 당장은 그렇게 모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752
그러나 두부장수는 당장 받아가지고 가고도 싶거니와 더욱이 바깥어른이라는 말에 또 무슨 시비가 생길까 겁이 나서 당장만 내라고 조른다.
 
753
못한다거니 내라거니 하는 것을 다행히 아랫방의 목수가 들어오다 보고 자기 주머니에서 십 전을 꺼내주어 두부장수를 돌려보냈다.
 
754
영주는 회초리를 댓 개나 꺾어가지고 들어왔다.
 
755
종태는 회초리를 보더니 지레 겁이 나서 벌벌 떨고 운다.
 
 
756
“그래 종석이놈은 어데루 갔느냐?”
 
757
“몰라 도망갔어.”
 
758
영주는 아이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서 활씬 벗겨놓고 피가 흐르도록 잔채질을 했다.
 
759
그는 종태는 종석이가 두부를 훔쳐 주니까 그저 철모르고 받아먹었으리라고 짐작은 하면서, 그러나 자기 분에 못이겨 그것을 매로써 아이에게 푸는 것이다.
 
760
그런지라 만일 종석이도 같이 붙들려왔었다면 종태는 그다지 맞지 아니하고 말았을 것이다.
 
761
아이가 너무 자지라지게 울고 하니까 매질이 과한 줄 알고 문간방 색시와 또 아랫방의 목수네 어머니가 들어와 매를 빼앗고 아이를 데려 내가고 하며 말렸다.
 
762
영주는 말리는 대로 내맡기고 그 자리에 쓰러져 울었다. 울면서 남편이 들어오면 실컷 말이나 해주고 죽어버리려고까지 마음을 먹었다.
 
763
오직 부모 된 것들이 못났으면 자식이 도적질을 하랴. 도적질도 다른 도적질이 아니요 배가 고파 남의 두부목판에서 두부 한 모를 훔쳐먹으랴——하는 부끄럼과 노염이 영주로 하여금 죽고 싶은 마음까지 나게 한것이다.
 
 
764
훨씬 저녁때가 되어 종석이는 찰래찰래 들어왔다.
 
765
영주는 자식을 나무라고 때리기보다는 그때는 자책하는 마음이 더했으나 종석이가 눈앞에 보이고 또 제가 그렇게 훔쳐는 놓고 동생을 내버리고 도망을 간 소행머리가 미워서 일단 가라앉았던 분이 다시 치밀어 종태만 못지 아니하게 매질을 했다.
 
 
766
그렇게 매질을 하고 아이의 등과 볼기짝에서 피가 흐르고 하는 차에 얼큰히 취한 범수가 돌아온 것이다.
 
767
영주는 매를 늦추고 나무람을 하는 판인데 남편이 대뜰로 올라서는 것을 보니 그대로 퍽 엎드려 헉헉 느끼며 울었다.
 
768
“웬일야?”
 
 
769
범수는 대뜰에 선 채 이렇게 물었으나 안해는 눈물 젖은 눈을 들어 원망스럽게 한번 치어다보고는 도로 엎드려 울기만 한다.
 
770
영주는 폭포같이 말을 쏟뜨려놓고 싶어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다만 남편이 원망스럽고 노여워 울음이 앞을 서는 것이다.
 
771
“너, 요놈 또 어머니 말 아니 듣구 싸웠든지 그랬구나?”
 
772
하고 나무람 반 물었으나 아이 역시 대답이 없다.
 
 
773
그러자 안해가 고개를 번쩍 쳐들더니 범수를 치올려보며
 
774
“무슨 낯으루 자식을 나무래요? 다 에미애비 죄지.”
 
775
하고 악을 쓴다.
 
776
“아니 그건 무슨 소리야?”
 
777
“자식을 굶겨노니 안 그럴까?”
 
778
“아니 글쎄 왜 그러는 거야. 굶는 게 오늘 처음이요, 또 우리뿐이게 새삼스럽게 이리나?”
 
779
“그러니까 자식이 도적질을 해두 괜찮단 말이요?”
 
780
“도적질?”
 
781
“그렇다우…… 배가 고파서 두부장수 두부를 훔쳐먹다가 들켰다우.자, 시언허우.”
 
782
범수는 피가 한꺼번에 머리로 치밀어올랐다.
 
783
그는 무어라고 아이를 나무래려다가 문득 자기가 오늘 낮에 겪던 일이 선연히 눈앞에 나타나 그만 두 어깨가 축 처져버렸다.
 
784
그는 종석이를 흘겨보며
 
785
“흥! 이놈의 자식 승어부(勝於父)는 했구나.”
 
786
하고 두런거렸다. 영주도 남편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787
이튿날 아침 일찍이.
 
788
영주는 종태만이라도 근처의 사립학교에나마 보낸다고 데리고 나섰다. 종석이까지 데리고 간다고 밤 늦게까지 우기며 다투었으나 범수는 듣지 아니하고 정 그러려든 작은아이 종태나 마음대로 하라고. 그래 말하자면 두 사람의 소산을 둘이서 반분한 셈이다.
 
789
종태를 데리고 나가는 안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범수는 혼자 중얼거렸다.
 
790
“두구 보자——네 방침이 옳은지 내 방침이 옳은지. ——“
 
791
뒤미처 범수는 종석이를 데리고 서비스 공장으로 최씨를 찾아갔다.
 
 
792
<朝光[조광] 2권 10~12호, 1936>
【원문】명일(明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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