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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에 술 먹을 기회가 많이 생기는 것이 길한 일인지 흉한 일인지 또는 앞으로 한 해의 운이 활짝 트일 징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되 이 즈음 날로 장이 약해 가는 것 같고 이인 탓인지 숙취가 자심해서 통음한 뒷날 일, 양일간은 아무 일도 손에 대지 못하는 나로서는 위선 반가우면서도 은근히 켕기고 겁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원체 의지가 박약한 나인지라 위장이 약해지면 종차 위궤양이든가 위하수증(胃下垂症)이든가 하다 못해 소화불량이나 만성 장가답아증(腸加答兒症)이라도 얻을 것을 겁내 하면서도 더구나 내가 지은 소설의 주인공 한 분은 이 위궤양 때문에 마약 중독자로 까지 전락되어 작자인 내가 의술을 넘어서 어떻게든 정신적 개조를 해 보려다가 그만 어떻게도 할 수 없었던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상당한 과민벽을 부려야 할 터임에 불구하고 친구들과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는 즐거움과 도연(陶然)하여 수심가를 부르고 눈 오는 길을 걸으며 대신장담(大信壯談)하는 쾌감을 버릴 수 없어 술 먹을 기회를 피하기는커녕 때로는 스스로 만들어 보려고 애쓰는 위인이니 머리가 쇳덩어리처럼 무겁고 귓구멍이 윙윙거리고 연신 구역질이 나고 하여 어젯밤 웬 술을 이렇게 철없이 먹었던가 후회가 나고 자책까지도 해 보나 인제 아무리 뇌어 보았자 그야말로 후회막급인 것이다. 다행히 된장국이라도 한 사발 마시면 정신이 들어 그 날 하루에 해치우려고 예정표를 꾸몄던 것을 생각해 내고 푸시시 자리를 걷어차 보는 것이나 오금이 쑤시고 눈앞이 아찔하여 도저히 손을 책상 위에 올려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때 나는 국을 한 사발 더 청해 먹고 얼음판으로 나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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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군이 어느 잡지 설문에서 자기는 자꾸 니힐리즘에 대하여 매혹을 느낀다느니보다 알지 못하는 동안에 그리로 밀려 가는 것 같아서 퍽 마음이 쓰인다는 탁상 일기의 일절을 말한 것을 보고 적지 않은 흥미를 느끼었는데 실상인즉 이러한 심경은 아마 누구나가 크고 적고 간 느끼는 일일 것이다. 사전에 이놈이 두려워서 나는 본시 이런 부근에는 애써 눈을 팔지 않고 우회를 하는 축이다. 그럭하고 보면 모르는 동안에 묘한 고장에 파묻혀 보고 싶은 다른 적은 심경이 아늑히 나른 잡아 버리려 든다. 차이콥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나 들으면서 수서(水仙)이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며 하루 종일을 보내고 싶은 이런 아니꼬운 상태가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이다. 내가 이러다가는 추사의 글장이나, 질그릇 조각을 따라다니며 공연한 공상을 떨게 될는지도 모르겠다고 삼전(三轉)하여 생각해 낸 것이 이 또한 얼음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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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즘이 소설을 못 쓰도록 만들 위험성이 있을는지는 채군과 만나본지 오래 되어 미처 들어 보지 못하였으나, 급한 신간도 변변히 못 사 보는 가난한 녀석이 골동이나 서화(書畵)를 주무르며 고리타분한 궁상을 떨다가는 소설에 붓을 대지 못하게 될 것이 뻔한 일인지라 날이 차고 바람이 매워도 나는 얼음판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하기는 이런 때 언뜻 효석의 「소라」라는 소설의 주인공을 생각해 보지 않는 바 아니다. 그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질식한 듯한 정신 상태를 깨치고 나가기 위해서 바닷가 푸른 잔디판 위에서 풋볼을 차기로 했다. 그러나 내가 향하는 곳은 한강도 못되고 창경원도 못되고 구멍투성이 균열투성이의 인조 빙판이니 숨이라도 한번 상쾌하게 내뿜어 볼 길이 없다. 그래도 군도(軍刀) 같은 중학생들의 스케이트 틈에 끼어서 밟히면서 한바탕 뒹굴고 궁둥방아를 찧고 나면, 어진간히 젊은 기상도 소생하고 숙취도 도망간다. 위산 과다의 중화제나 섣불리 ‘미구레닝’제나 한두 봉지 먹는 것보다는 훨씬 씩씩하고 가까운 처방이다. 누구 친구나 생기면 한강엔들 못 갈 것이 무엇이냐. 이리하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혹시 오뎅보다는 시루꼬를 즐기게 될는지 그것 또 누가 알 일이냐. 스케이트이 가죽과 쇠가 모두 올라서 상당히 비싸졌으나 하룻밤 술값이면 멋진 피규어는 염려 없이 장만할 수 있다. 결코 체육을 소설도(小說道)난 시도(詩道)의 위에 두자는 것이 아니니 희망하는 이는 얼음판으로 나오라. 시인 이일(李一)을 주장으로 추대할 테니 어느 팀보다 그닥 손색을 없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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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39년 1월 12일, ‘신춘송’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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