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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신난(容身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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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8
최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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容 身 難[용 신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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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어떤 날 황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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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역을 떠나 서울로 가는 밤차는 호남선 송정리역(松汀里驛)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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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시골 산천을 울리는 차 바퀴 소리가 뚝 그치자 뒤이어 내리는 손님, 오르는 손님들로 하여 쓸쓸하던 시골 역은 들썩하였다. 들썩한대야 서울 정거장에 비기면 아무것도 아니지만은 한 달에 여섯 번씩 열리는 장날이나 그렇지 않으면 명절 때밖에 사람의 물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시골이라 매일 몇 차례씩 들레게 되는 정거장은 참말 위태하고도 복잡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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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 분 되나 마나 해서는 들레던 물결도 고요하여졌다. 그때는 오를 사람은 다 오르고 내릴 사람은 다 내려서 출구 밖으로 나온 때였다. 인제 들리는 것은 기관차가 뿜어내는 김 소리와 역부들이 외치는 미미한 소리였다. 그것은 극히 미미한 소리였다. 기관차의 숨소리에 위협을 받았는지 사람의 소리는 소리로서의 아무 효력도 보이지 못하였다. 다닥다닥 잇닿은 차장으로 들여다보이는 사람의 그림자들은 보는 사람의 눈에 많은 존재를 비추어 주지만 그것도 딱 버티고 길게 늘어진 엄연한 차체의 존재에 대면 역시 미미한 존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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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존재가 다시 김을 뽑고 하늘에 뻣뻣이 그은 굴뚝으로 검은 연기── 불꽃이 섞인 검은 연기를 심술궂게 뿜으면서 지나간 뒤의 정거장은 여전히 쓸쓸하였다. 좀 과장하여 말하면 십 리에 하나 되나 마나한 장명등 불빛은 점점 흐려 가는 대지를 꿈같이 비췰 뿐이었다. 그러나 찍혀 눌렸던 모든 것은 숨을 내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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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 점점 짙어가서 먼 산 산날이 하늘가에 물결같이 보이면서부터 봄은 봄이나 그저 겨울 기운이 남아 흐르는 하늘에는 별들이 가물가물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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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는 스쳐가는 실바람에 갈리는 보리싹의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플래트폼’ 과 역실에서 어물거리는 사람들까지도 고요히 왔다갔다 하였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흐뭇이 지친 끝에 솜같이 부드럽고 푸근한 안정을 바라는 고요함이었다. 그러나 또 미구에 굉굉한 소리를 내면서 달려들 그 엄연한 기계는 그네들에게 그네들이 바라는 안정을 허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지금의 사람들은 자기네가 만들어 놓은 기계로 말미암아 한평생의 안정을 잃는 것이요 자칫하면 목숨까지 빼앗기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운명을 저주하고 또 운명을 믿는 것을 보면 가긍하고도 우스운 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모순 덩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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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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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지나간 그 엄연한 존재가 이 고요한 정거장을 찍어 누르고 뒤흔들던 그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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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플래트폼’ 에 모여들어 차를 타는 사람 가운데 끼여서 삼등 차실로 들어오는 젊은 청년이 있었다. 그는 검은 무명 두루막에 고무신을 신었다. 키는 중키나 몸집이 그리 뚱뚱치 않고 가슴이 좀 나오고 어깨가 벌어져서 큰 키로 보였다. 퇴색된 회색 담요에 무엇을 싸서 든 손은 호화로운 사람의 손과는 정반대로 거칠고도 억세어서 강철이라도 거머쥐면 자리가 물씬 날 것 같이 보이고 그 팔은 쭉 뻗치면 심장에 뿌리를 박은 굵은 혈관이 툭툭 삐여질 것 같이 보였다. 하관은 좀 빠른 듯하나 이삼 분 기른 수염이 거칠거칠한 둥근 턱하며 꾹 다문 두툼한 입술하며 우뚝히 내려오다가 봉긋한 끝을 이룬 코는 어찌 보면 거만한 듯하나 자세히 보면 말없는 가운데 친분이 흐를 만한 순박함이 어디라 없이 흘렀다. 좀 둥근 듯 길고도 들어간 까풀진 눈을 열정적이요 이지적이요 사색적이었다. ‘도리우찌’ 아래 반쯤 나온 좀 넓고 둥근 이마하며 좀 여위었다고 할 만한 뺨은 거뭇한데 그것은 볕에 그을은 살빛이었다. 그 거뭇하면서도 푸른 기운이 흐르고 눈 가장자리에 흐릿한 기운이 어리인 것은 영양 부족과 큰 걱정을 보여 주는 빛이었다. 그러나 건실하게 보이는 골격이며 침묵한 태도는 삼십 다 된 사람같이 보이면서도 입 가장자리와 눈 가장자리며 귀밑에 흐르는 앳된 빛은 사오 년 더 젊어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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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처량한 기적 소리를 먼 하늘 밖에 남겨놓고 슬금슬금 걸음을 내는 때에 그 청년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그 전까지는 남들이 다 자리 잡기를 기다리는 듯이 한 귀퉁이에 가만히 서 있다가 차가 걸음을 내면서부터 불규칙하나마 차실 안이 정돈된 뒤에 중간으로 동편 쪽에 놓인 의자를 혼자 차지하였다. 목포서 떠나 몇 정거장을 들리지 않은 차실은 비교적 조용하고 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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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들었던 보자기와 썼던 모자를 시렁 위에 얹고 다시 두루막을 벗어서 시렁발에 걸어 놓고는 의자에 앉았다. 검은 바지 흰 저고리에 회색 조끼를 받치어 입었는데 무명은 무명일망정 깨끗하고 몸에 꼭 맞는 의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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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마주 어린애를 데리고 앉은 젊은 부인은 어린애를 안은 채 차창 쪽으로 머리를 기대고 잔다. 몸에 잘 어울리지도 않는 한두 번 빨은 듯한 옥양목 치마저고리는 먼지에 누릿하게 그을었다. 아무렇게나 틀은 쪽에 꽂힌 비녀는 뿌리를 겨우 지탱하였다. 금시에 떨어질 듯이 아차아차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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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꼬부리고 안긴 어린것은 고르르고르르 콧방울이 나오는 코를 이따금 비비고 꼼지락꼼지락하면서 킥킥러렸다. 그럴 때면 그 부인은 좀 넓적한 코 아래 그리 작지 않은 입은 경련적으로 움직이면서 좁은 얼굴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잠에 취한 커다란 눈을 무겁게 떠서 어린것을 보다가 다시 감으면서 어린것의 어깨를 두어 번이나 거겹게 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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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맞은편에 고요히 앉아서 볕에 그을은 그 두 생령── 농군의 아내와 농군의 아들을 두어 번 번갈아보던 그 청년의 눈은 스러졌던 꿈을 다시 쫓는 듯이 점점 흐릿하여지면서 동작을 잃었다. 좀 여위고 검붉은 두 뺨은 실룩거렸다. 한참 동안 그렇게 앉았던 그는 손가락과 손가락을 엇걸어 쥐었던 손을 두 뺨의 근육이 긴장하도록 이를 악물면서 꼭 쥐더니 머리를 몹시 흔들었다. 머리를 흔들고는 벌떡 일어나면서 깎을 때가 제인 머리를 만지고 한숨을 태산이 꺼지게 쉬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어서 좌우를 살펴보았다. 가슴에 치미는 모든 생각을 잊으려 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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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깊은 꿈을 깬 것 같았다. 모든 소리와 모든 빛은 그의 고막과 시신경을 다시 자극하였다. 차안의 공기는 텁텁하고 퀴지근하였다. 흐미한 전등불은 담배 연기에 한껏 흐미한데 전세계의 축도를 보는 듯한 가지각색의 사람들은 눕고 안고 졸고 떠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북덕 상토에 살터진 망건을 쓰고 다리미 밑구멍 신세는 한평생 저 못 본 듯한 두루막을 걸친 무리와 그 무리를 따르는 듯한 어린 것과 계집들은 쌀쌀한 그늘에서 자란 나무처럼 기운을 못 펴고 있었다. 두어 의자 건너편에 앉은 몸집이 좀 똥똥한──안경쓰고 양복 입은 사람은 쉴 사이 없이 입을 놀렸다. 담배가 아니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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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암만 떠들었대야 무슨 소용이야! 허허! 첫째 이것이야! (하고 그는 왼손가락으로 입을 가리켰다.) 첫째 먹어야지요! ××주의는 먹잖고 된답디까? 흐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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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술을 먹었는가? 그 목소리는 흐린 듯하고도 흥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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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주의는 굶고 싶어서 한답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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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편에 앉은 얼굴에 살점이 없어 마른 눈이 가느다란 친구는 조소와 멸시가 섞인 어조로 대답하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 똥똥한 친구는 제 말만 말이라는 듯이 버티고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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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돈이야요! 돈을 벌어요, 돈을……. 우리 모양으로 이렇게 나서서 돈을 번단 말씀이지요! 먹고 입고 나서 ××주의도……. 흥……노형도 지금 나 같은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지만 그 그런 게 아니요! 빌어서 득천하(得天下)라두 천하를 얻으면 좋다고 어쨌든 돈만 생기면 뭐든지 해요! 왜 못해요! 돈을 모으자면 이 뒤두〔後頭〕에 (그는 자기의 주먹으로 자기의 뒤통수를 거겹게 쳤다.) 손가락 자리가 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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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니 그는 허리를 쭉 폈다가 머리를 숙이면서 담배 한 모금을 빨아 길게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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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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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가 다시 말을 내려는 때에 창밖을 내다보던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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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굶은 놈에게 밥은 안 주고 배만 부르라는 셈이지……. 인제는 밤이 깊었는데……. 자── 우리 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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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불쾌한 듯이 양미간을 찌기고 의자에 머리를 기대면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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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어서 주무시지요! 다 우리 같은 사람의 말은 잘 듣지 않지만 나두 ‘막스’를 읽어 봤소마는 그저 남에게 못된 놈 소리를 들어야 되는 데야 어떡합니까? 그래야 돈이 모아집니다. 나두 마음이 너무 좋아서 이 모양이지만……. 나두 돈이 없어서 실연까지……. 아니 하옇든 돈을 벌어가지고…… 돈……,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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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야기 들어 주던 사람이 눈을 감고 듣지 않으니 그만 흥이 깨어졌는지 끝말을 힘없이 웅얼웅얼하다 그만두고 담배만 풀썩풀썩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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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맞은편에 피곤한 듯이 앉았던 시골 사람은 그 똥똥한 양복장이의 하는 짓을 보고 빙긋 웃었다. 소리 없는 그 웃음은 양복장이의 하는 짓이 자기로서는 이해치 못할 일이라 하는 듯한 단순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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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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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장이를 보던 그 청년도 곁의 사람이 들릴 듯 말 듯한 코웃음을 치면서 밖을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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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을 통하여 내다보이는 초승달 밤은 수묵을 끼얹은 듯하였다. 차가 앞으로 달아나는가? 땅이 뒤로 달아나는가? 먼 경은 흐리어서 잘 보이지 않고 가까운 땅은 활동사진 필름처럼 달아나서 눈이 아팠다. 그러나 내다보이는데는 넓은 들판이었다. 산 그림자라고는 먼 하늘가에 희미하게 보였다. 어느새 이리(裡里)를 지났던가? 여기가 논산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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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머리에는 작년 여름이 떠올랐다. 작년 여름에 태전서 열렸던 운동자 대회(運動者 大會)에 참석하게 되어서 이 들판을 가고 오고 두 번이나 지났던 것이었다. 그때에는 낮차를 탔었던 까닭에 철도 연선의 풍경을 마음껏 보았던 것이다. 옥야천리(沃野千里)의 찬사를 받는 이 들판에는 기름진 나락이 파랗게 깔리어서 스쳐 가는 더운 바람에 물결을 일으키었었다. 이 들밖 하늘가에 물결같이 보이는 중중첩첩한 산날 위에 뭉게뭉게 떠돌던 구름도 그럴 듯하였었다. 훤히 개인 하늘, 질펀한 벌판, 멀리 보이는 구름 봉오리는 참으로 시원스러웠던 것이었다. 그는 그때 차에서 이 들판에 뛰어내리고 싶었었다. 자유로운 대자연 속에 뛰어내려서 자기의 기운이 자라는 날까지 뛰어다니고 싶었었다. 노서아의 작가 ‘알튜이파세프’의 작인 『싸늰』의 주인공 싸늰 모양으로 이 대자연의 자유 속에 안기고 싶었었다. 그처럼 그의 마음에 충동을 주던 이 벌판은 지금은 황량한 들이나 다름없이 보였다. 얼레빗 등 같은 초승달 아래 놓인 벌판은 참말로 황량한 벌판이었다. 그 벌판은 자기의 신세를 말하고 자기의 가슴을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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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달아난다. 그를 태운 차는 굉굉한 바퀴 소리를 내면서 차디찬 하늘 아래 황량한 벌판을 달아난다. 앞에야 물이 있거나 산이 있거나 하여튼 불구하고 달아나는 차는 우리 주인공 조인현의 신세를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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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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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모든 사람들은 어디로 가나? 작년 걸음과 오늘 걸음은 달랐다. 그것은 작년 태전 갔다 오던 때의 조인현이와 지금 서울로 향하는 조인현이와 다른 것만치 달랐다. 그는 새삼스럽게 자기의 신세가 불쌍하였다. 슬펐다. 한 차에 같이 탄 모든 사람들까지 불쌍하게 보였다. 내일의 운명을 모르고 허덕이는 그 생령들의 하루살이 같은 목숨이 불쌍하고도 우스웠다. 그는 눈을 딱 감았다. 그의 입술은 말라 들었다. 그는 또 무엇을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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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싸고 흐르는 주위의 공기는 여전히 텁텁하고 요란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몸은 한 걸음씩 고향과 멀어지고 밤은 각일각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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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와 모든 음향은 우리 주인공 조인현의 날으는 생각을 막지 못하였다. 무엇이 보인다면 그것은 오직 그를 위한 그림자요 무엇이 들린다면 그것은 오직 그를 위한 음향이었다. 그는 그가 자유로 정복할 수 있고 자유로 들을 수 있는 큰 그림자와 큰 소리 속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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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경성역이었다. 우리는 그것이 어느 때인 것을── 아침인지 저녁인지 말할 필요가 없다. 그가 경성역에 내렸다는 것만 알아도 지금의 그의 생활을 넉넉히 볼 수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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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앞에는 큰 도회가 벌어졌다. 그것은 그가 글이나 사진에서 보던 큰 도회였다. 남대문, 남산, 북악산, 삼각산, 진고개, 종로, 학교, 회관──이 모든 것은 활동사진처럼 그의 눈에 비치었다. 다음은 그를 맞아 주는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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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기다렸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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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다정한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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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극히 짧은 시간에 많은 지식과 많은 돈을 얻었다. 그것은 극히 짧은 시간이었다. 참말 한 찰나간이었다. 한 찰나간에 얻은 그 지식과 그 돈은 사회를 위하여 쓰고 친구를 위하여 쓰고도 남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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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앞에는 영화와 행복이 넘쳐 흘렀다. 그에게는 주택이 생겼다. 그것은 그가 이때까지 이상에만 그려 보던 주택이었다. 그리 굉장하고 화려치는 않아도 넓은 뜰에는 사철나무, 개나리, 상나무가 우거졌다. 단아한 문화 주택은 이 나무 속에 싸여 있었다. 자기가 나갔다 들어오면 맞아 주는 애인이 있었다. 그것은 미인이었다. 당세의 사교계에도 이름이 있거니와 운동선상에 있어서도 상당한 수완가였다. 그는 그를 열렬히 사랑하였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을──목숨까지도 희생할 만한 여자였다. 그는 그에게 반하였다. 그의 사상에 반하고 그의 봉긋한 어깨와 상글상글 웃음을 띤 눈에 반하고 비단결 같은 살에서 스며 나오는 냄새에 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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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활이 예까지 이르는 때에 그의 생활을 막는 그림자가 있었다. 갸름하고 핼쓱한 얼굴, 가슴을 치고 뒤트는 그림자, 그 곁에 늘어진 어린 그림자──이 그림자가 그의 앞에 나타날 때 그는 그 든든한 주먹으로 자기의 가슴을 힘껏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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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못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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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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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공상이었다. 그것은 못된 공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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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서 이렇게 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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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어디까지 왔는가? 그저 뚤뚤뚤 굴러가고 있었다. 밤은 퍽 깊었나보다. 전등은 아까보다도 흐미한데 승객들은 거의 눈을 감았다. 어디선지 코고는 소리가 차 바퀴 소리 속에 미미히 울려 왔다. 그의 옆에는 언제인지 일인 하나가 모자를 쓴 채 게다를 벗어 놓고 쭈그리고 앉아서 잠에 취하였다. 그 맞은편에 어린애를 안은 부인의 곁에도 갓 쓴 늙은이가 앉아서 긴 장죽을 빨고 있었다. 부인은 언제 잠이 깨었는지 어린애에게 젖을 먹이다가 자기를 언뜻 쳐다보았다. 그 곁에 늙은이도 또 저편에 피곤히 앉았던 이도 졸음이 덜 깨인 눈으로 자기를 보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보는 때 그는 무류한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서 그네들을 바로 볼 수 없었다. 자기는 미친 놈의 짓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네들에게 자기의 더러운 생활──가슴을 치고 웅얼거리면서 일어난 것을 보인 것은 자기가 이때까지 하던 헛된 공상을 그네들에게 보인 것 같아 일종의 모욕을 느꼈다. 그는 그만 낯을 돌리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는 더 견딜 수 없는 듯이 차체의 동요로 말미암아 흔들리는 다리를 가누면서 변소에 들렀다가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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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빗 등 같은 초승달은 어느새 넘어갔는가? 달은 없으나 맑아서 좌우로 보이는 산과 들은 우수 달밤 같았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였다. 북두가 돌아진 것을 보니 새벽이었다. 흥분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새벽 바람은 시원스러웠다.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꿈을 한꺼번에 불어 예는 것 같다. 호화로운 공상의 꿈이 머리와 가슴속에서 스러지는 때 그는 그로도 알 수 없는 애연한 생각을 금치 못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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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몸을 경건하게 가지겠다. 수도원의 수도 부인이 주를 위하여 몸을 바치듯이 나는 이 몸을 나와 처지를 같이한 천하의 무산자를 위하여 바치겠다. 나는 그네의 벗이 되고 종이 되겠다. 그네의 벗이 되고 종이 되어서 겨죽을 먹을지언정 상전이 되어서 그네들이 방울방울 흘리는 땀으로 금의옥식을 원하지 않는다. 내 몸은 이미 바친 몸이다. 나는 그네들을 위하는 일이면 톱으로 이 몸을 열 토막 내고 도끼로 찬찬히 찍더라도 나는 그 괴로움을 사양치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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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가 그에게 늘 하는 맹세였다. 이러한 맹세를 하던 그가 아까와 같은 공상을 하였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치 않았다. 그는 일변 부끄럽고 일변 우스웠다. 둥근 듯 긴 눈을 꾹 감고 두툼한 입술이 빠작빠작 죄어들도록 그런 공상을 하던 자기의 그림자를 다시 눈앞에 그려 보는 때에 그는 그 그림자에게 가래침을 뱉고 싶었다.
 
55
“흥 더러운 녀석 같으니라구.”
 
56
그는 그 그림자를 보지 않으려는 듯이 눈을 딱 같았다 뜨면서 벌떡 일어나서 다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57
자리에 앉아서도 자기 한 몸을 위하여 갖은 공상을 부렸다는 것이 마음에 거리끼었다. 그것은 자기를 속인 것이었다. 수양의 부족이라고 할까? 평소에 가지었던 자기의 생각이 철저하지 못함이라 할까? 더구나 자기가 계집──그 문화 주택에서 자기를 맞아 주던 여자──까지 생각하였다는 것은 자기가 늘 없애려고 애쓰고 보이지 않으려고 감추어 두었던 추태가 한꺼번에 폭로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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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참으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59
그는 자기에게 물어 보았다. 아내의 몸이 식기도 전에──어린것의 소리가 그저 귀에 쟁쟁한데도 그런 생각을 하였다. 자기가 참으로 그 아내를 슬퍼하고 그 자식을 슬퍼한다면 아무리 불가피할 사람의 본능의 소위라 하더라도 용인할 수가 없었다. 그의 가슴은 저렸다. 그의 머리는 또 다시 들먹거렸다. 그는 들쑤시는 생각과 떠오르는 그림자를 피하려고 머리를 흔들고 눈을 딱 감았으나 그 생각과 그 그림자는 오뉴월 쉬파리처럼 또 다시 모여들었다. 생각의 그물은 풀려면 풀려고 할수록 엉클어지고 나타나는 그림자는 보지 않으려면 보지 않으려고 할수록 더 분명히 나타났다. 그의 고향이 나타나고 그의 집이 나타났다. 또다시 그때의 슬픈 막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60
그것은 전라남도 영광 어떤 쓸쓸한 시골 한 귀퉁이 산밑 외딴 집에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61
“엄마! 으응! 엄마 이차! 항 애── 애.”
 
62
엄마를 겨우 부르게 된 어린 것은 어미의 괴로움도 모르고 어미를 일으키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입을 비죽거리면서 울음을 내었다.
 
63
“억흐 아이구!”
 
64
여러 날 병에 지친 아내는 무엇이 가슴을 꽉 막는 듯이 나오는 숨을 힘주어 막았다가 겨우 내쉬면서 신음 소리를 모기 소리만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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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어디가 어떻소? 또 치미오?”
 
66
인현은 차디찬 아내의 손을 잡으면서 아내를 보고 어린것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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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흥! 아── 앙──.”
 
68
어린것은 애가 달은 듯이 몸을 틀면서 아버지의 손을 잡아 끌어다가 어머니의 머리에 놓았다. 그것은 말은 못 하나 어머니를 일으키라는 뜻인 줄을 그 방안에 앉았던 사람은 다 알았다. 그것을 보던 여러 사람의 낯은 슬픈 구름으로 흐렸다.
 
69
“으윽 아이후! 삼…… 삼룡이를? 흑──.”
 
70
아내는 한 번 더 이를 악물고 몸을 뒤틀다가 푹 꺼지고 힘을 잃은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고 가까스로 뇌이면서 어린 것을 끌어다가 젖을 물렸다. 그는 자기의 죽음을 각오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을 다투는 그의 가슴에 크나큰 못은 남편보다도 어린것이었다. 힘 잃은 그의 눈에도 자기가 죽은 뒤의 어린것의 운명이 희미하게나마 보이었던 것이었다. 푹 꺼져 들어서 기름기라고 보이지 않는 그의 눈에도 눈물이 남았던가? 벼잎에 오르는 이슬처럼 그 눈에 스르르 돌던 뜨거운 눈물은 소리 없이 뼈만 남은 양관지 아래로 흘러내려서 뗏국이 된 베개를 적시었다. 갸름한 낯이 볕에 그을어서 좀 거뭇은 하여도 그리 여위지는 않았고 애티가 흐르던 그의 두 뺨은 흰 듯 푸른 가죽만 남았는데 그 가죽은 이따끔이따금 경련을 일으키었다.
 
71
“두 목숨이 다 죽는구나!”
 
72
그것을 보는 인현의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라왔다. 늦되어서 그런지 아직도 젖으로 살아가던 어린것조차 어미가 병석에 누운 이후로 하루 이틀 거칠어졌다. 고사리 싹 같던 주먹과 고무볼 같던 두 뺨은 쭉 빠져서 설사병 들린 어린애 같았다. 찢기고찢기던 인현의 가슴은 너무도 찢긴 나머지에 인제는 마비 상태에 이르다시피 되었다.
 
73
급하고 세차던 병자의 기식은 깊어 가는 밤과 같이 점점 높아지더니 새벽녘에 이르면서는 좀 고요하여졌다.
 
74
“병환이 좀 진정하시는 모양이네.”
 
75
밤마다── 낮에는 틈이 있으면 와주는 청년회 회원들은 오늘밤에도 셋이나 와서 웃목에 앉아 있었다. 인현이는 돈은 없을까망정 청년들 가운데서도 상당한 신망을 받는 사람으로 그는 이곳 청년회 회원이며 노동 동맹 지부 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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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런가 봐!”
 
77
멀거니 앉았던 인현이는 이렇게 대답하였으나 무슨 말대답을 그렇게 하였는지 자기로도 몰랐다.
 
78
“여보게 삼룡이 아범!”
 
79
일 마장 되나 마나한 아랫 동네에서 밤마다 와서는 자고 가는 어떤 친구의 어머니는 인현이를 부르면서 좀 겁나는 듯한 의아한 눈으로 고요히 누운 병자를 보았다.
 
80
“글쎄 어째 저러냐?”
 
81
노파의 곁에 앉았던 인현의 누님도 병자를 보았다.
 
82
병자의 얼굴빛은 점점 푸르러 갔다. 감았던 두 눈은 반쯤 뜨였는데 흰자위가 드러나고 두 뺨의 살은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83
“김 생원을 데려와야지! 김 생원(의사)! 야 네 갔다 오니라!”
 
84
웃목에 앉았던 청년들도 병자를 보더니 그 중 나이 먹어 보이는 친구가 키가 후리후리한 친구를 보면서 나직이 말하였다. 그 소리를 낮으나 퍽 황급하였다. 휘둥글한 모든 사람의 눈에는 불안스런 빛이 흐르고 얼굴의 근육은 극도로 긴장하였다. 방안을 싸고 흐르는 어둑한 공기조차 아연히 긴장되어서 묵묵히 앞에 닥치어 올 최후의 운명을 미리 기다리는 것 같았다.
 
85
“여── 여──.”
 
86
인현이는 아내를 흔들면서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식어 들어가는 심장의 고동은 점점 미약하였다.
 
87
“동생 정신 채리소! 응 글쎄 정신을 채려라오! 응 글쎄 정신 채려!”
 
88
오라비댁을 부르는 인현의 누님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었다. 그는 점점 식어가는 엄마의 품에 철없이 안겨서 싹싹 자는 조카(삼룡이)를 끄집어다가 안으면서,
 
89
“아이구 삼룡아! 엄마는…… 저 저렇구나!”
 
90
하고 쿨적쿨적 코를 들이마시면서 자는 삼룡의 뺨에 그 뺨을 비비었다. 곁에 앉았던 노파도 소리 없이 눈을 비볐다.
 
91
“누님 왜 이러는가? 울기는 왜 울어라오! 지금 누가 주는가?”
 
92
인현이는 누님을 보았다. 자기딴은 태연히 하는 말이나 남 듣기에는 절망에 가까운 애조였다. 그의 낯빛은 파랗게 질리어서 금방 혼도라도 할 것 같았다.
 
93
흐미한 불빛에 파랗게 보이는 병자의 숨결은 각일각 미미하여졌다. 이제는 분분초초를 다투게 된 위급에 처하였다. 말없는 여러 사람의 얼굴에는 어서 어서 의사 데리러 간 사람 오기만 기다리는 표정이 선연하게 떠돌았다. 죽음을 목전에 보면서도, 아니 죽을 줄 번연히 알면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살려 하고 살리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아니 온 생물의 본능일 것이다. 이 본능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이다.
 
94
“여보소 자네 또 가 보소! 자네는…… 아니.”
 
95
하고 읍에서 문병 왔던 청년회 간부되는 숭굴숭굴한 친구는 곁에 앉은 사람에게 말하다가 무슨 생각이 났던지 자기가 일어서면서,
 
96
“내가라두 읍에 들어 가서 요시다(吉田)〔──그는 의사이다〕를 데리고 올께라오! 저 아래 학수 집에 자전거 있지라오잉?”
 
97
하면서 모자를 썼다.
 
98
“응 거기 자전거 있다데! 만약 거기 없거든 우리 집에 가서 말을 타고 가소!”
 
99
하고 나이먹어 보이는 친구는 말하였다. 그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열었다 닫는 문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몰려든 바람결에 기름불이 조상하는 듯이 잠깐 흔들거렸다.
 
100
“약 없는가? 약 대린 것 없는가?”
 
101
쪼그리고 앉았던 나이 많은 친구는 병자의 얼굴에 주었던 시선을 고요히 인현에게로 옮겼다.
 
102
“있어! 있지만…….”
 
103
인현의 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104
“그러면 대접해 보소!”
 
105
약을 데었다.
 
106
“여보!”
 
107
약사발을 들고 앉은 인현이는 아내를 흔들었다. 그는 아주 대답도 없었다. 두 번 세 번 부르고 흔들었으나 아무러한 효과도 얻지 못하였다. 이제는 병자의 입에다 떠넣는 수밖에 없었다. 푸르러 가는 입술 사이에 보기 좋게 막힌 이빨은 꼭 물렸다. 인현이는 떨리는 손에 숟가락을 잡았다.
 
108
이렇게 잘 벌어지지 않는 병자의 입을 이 사이에 술치를 넣어서 어기이고 데인 약을 떠넣었다.
 
109
검누런 탕약은 소리 없이 흘러들었다. 두 번째── 세 번째까지 무사히 들어갔으나 네 번째 숟가락을 입술에 닿는 때였다. 병자는 몸을 들썩하고 머리를 뒤로 벌떡 제끼다 말면서 약을 토하였다. 그는 폐기를 하는 것이었다.
 
110
“약은 그만두고 삼룡 아범 저 눈이나 쓰서 주소!”
 
111
노파는 경험 있는 자기의 말을 믿으라는 듯이 말하고 병자의 팔과 다리를 눌러 주면서,
 
112
“후생에나 좋은 곳으로 가거라! 휴.”
 
113
뇌이고 한숨을 쉬었다.
 
114
이불에 덮인 시체는 어둑한 불빛 속에 돌조각같이 고요히 누워 있었다. 방안에 흐르는 긴장한 공기는 모든 사람의 낯빛과 같이 스르르 풀렸으나 뒤이어 흐릿하고 무거운 구름이 슬프게 돌았다. 창을 치고 지나가는 밤바람 소리는 한껏 처량하였다.
 
115
“흑! 흑! 응! 응! 흑!”
 
116
아까부터 코를 들이마시던 인현의 누님은 나오는 울음을 억제하려면서도 억제치 못하여 흑흑 느끼었다. 두 오누이(인현이와 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손 아래서 잔뼈가 굵었다. 이때부터 오누이의 가슴에는 남 모를 설움이 컸다. 계모의 잔인한 매에 누이가 맞으면 동생이 울었고 동생이 맞으면 누이가 울었다. 그것도 눈물을 은근히 씻으며 나오는 소리를 머금고 울었다. 그러다가 계모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인현이도 차츰 면목이 넓어져서 남의 신용을 얻어 자유로운 생활을 할 만하게 되니 오라비댁은 세상을 떠난다. 그 오라비댁도 시어머니 즉 계모의 학대를 몹시 받던 사람이었다. 그래야 말 한 마디 없던 얌전한 오라비댁이었다. 슬프나 기쁘나 서로 통사정할 데는 네 식구── 인현이의 내외와 누님의 내외밖에 없더니 그 식구에서도 하나가 가고야 만다. 그(인현이의 아내)는 작년 가을에 목화를 따가지고 돌아오다가 돌에 채여 넘어져서 육삭이 된 태아가 떨어진 후로 피를 쏟으면서 드러누웠던 것이었다. 좀 남았던 양식은 약값에 달아나고 또 친구들 덕택으로 약첩이나 썼으나 어찌 흡족하였다고야 이를 수 있으랴!
 
117
인현이는 자기의 신세가 신세인 것만큼 아내에게 대한 애정이 컸다. 그는 이날 이때까지 이성에게 대한 사랑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철없어서 장가를 들었고 또 몸이 사회적으로 풀리게 되어 계통 있는 지식은 아니나마 남만한 식견은 가지게 되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신여성의 그림자를 보는 때에 그의 가슴에도 은연중에 솟아오르는 불만과 요구가 있었다. 밭이나 산에 나아가서 온종일 피곤한 몸이 집이라고 찾아들어서 인형 같은 아내를 보는 때면 그의 불만은 더욱 컸었던 것이다.
 
118
“우리는 눈이 상하는 줄 알면서도 기름불이나 촛불보다 전깃불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시골 처녀보다도 요염한 도회 색시를 요구한다. 그것은 자극을 구하고 이해를 구하는 현대인으로서는 하는 수 없는 일이다.”
 
119
하고 어떤 친구의 말을 처음에는 반대하던 인현이도 그것이 차츰 이해가 되었다. 그의 아내는 그를 사랑하고 그를 믿었다. (인현이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 사랑과 그 믿음은 겹겹이 싸인 구름 속의 달과 같이 이렇다 할만한 빛을 인현이에게 보이지 못하였다. 그저 무엇이든지,
 
120
“네 네.”
 
121
만 하는 것은 일종의 인형에서 다를 것이 없었다. 그것이 인현에게 큰 불만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동정하였다. 사랑하려 하였다.
 
122
그는 인습의 씨요 부자연한 도덕이 만들어 놓은 병신이었다. 꽃으로 말하면 지금 봉오리라고 할 만한 그는 그 인습 그 도덕으로 말미암아 피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성(個性)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기구한 자기 몸을 따라옴으로써 단풍 머리 찬서리 같은 계모의 학대까지 받고 빈곤의 갖은 곤란까지 받는 아내를 보면 그의 가슴은 찢기는 듯 쓰리었다. 아내의 허리를 끊어져라고 안아 주었다. 이것은 처지를 같이한 사람이 처지를 같이한 사람에게 대한 동정이요 사랑이었다. 그렇다고 이성으로서의 아내에게 대하는 사랑의 충동은 아니었다.
 
123
끊어지도록 안아도 그저 눈을 내리감고 귀밑만 불그레해서 일언반사가 없는 아내를 보는 때면 흥분되었던 그의 감정은 꿈같이 스러지면서 온몸의 피가 식어 내렸다. 동시에 어떠한 유혹을 느꼈다. 상긋거리는 맑은 눈! 타는 듯한 입술! 파르르 떨리는 백어 같은 손가락과 대리석같이 희고도 뜨거운 팔! 인정 있게 속삭이는 그 아름다운 목소리──그의 기억에 남은 소설의 주인공들이 그의 눈앞을 엷은 베일을 쓰고 꿈같이 지나갔다.
 
124
“응 아니다. 이 변태적 사회에 있어서 이성의 단꿈을 바라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짓이다. 그 아내가 나를 믿으니 나도 그를 믿어야 할 것이요, 또 그도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니 나도 그를 같은 처지의 사람으로 믿으리라!”
 
125
그리해 있는 동정과 뜨거운 사랑은──처지를 같이한 사람이 처지를 같이한 사람에게 대하는 이해의 동정과 사랑은 참으로 크고 굳세인 것이었다. 이성에게 대한 사랑은 단 한 사람을 포용하지만 그 사랑은 수없는 사람을 포용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그 사랑으로써 아내와의 동거를 충분히 유지하였고 청년회와 노동 동맹의 신망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가슴은 때로 헛헛하였다. 자기의 사업을 이해하고 자기의 사업에 힘될 이성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절망은 하지 않았다. 사람으로서 이성의 사랑을 못 느꼈다면 그마마한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큰 일이 있는 때에는 그것부터 하여야 하니 그것을 함으로써 모든 개인의 복리까지 얻을 수 있는 까닭이다.
 
126
장례는 그 사흗 날 지내었다. 읍에 있는 노동 동맹과 청년회 본부에서 까지 동원이 되어 상여를 메었고 언 땅을 팠다.
 
127
이 비극은──우리 주인공 인현의 젊은 생애를 통하여 크나큰 이 비극은 그 비극이 연출된 뒤로 그의 머리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다. 아마 이것은 그의 전생애를 통하여 그의 머리에서 뿌리를 거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극은 그에게 큰 충동을 주었다. 자기의 어깨에 누구보다도 가장 무겁게 걸머지고 자기의 품에 안았던 한 젊은 인형──인습과 도덕의 결정체요, 가난과 궁과 학대받는 무리의 한 표본이던 그 인형이 최후는 그에게 그가 바라는 기회와 욕망을 주었다.
 
128
그리하여 그는 이번 길을 떠난 것이었다.
 
129
그것은 아내가 죽은 뒤 한 달이 지난 이른 봄 어떤 날이었다. 어린것은 누님의 품에 의탁하고 고향을 떠났다. 이모의 품안이 남과는 다를 것이다. 동기지정이 흐를 줄 알면서도 어머니의 품에서 기르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에 무딘 칼이 박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자기가 계모의 손에서 자라났는지라 어린것의 운명이 몹시 쓰라리었다. 그러나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의주로 운동과 공부를 위하여 떠났다. 지금 줄달음질하는 차에 몸이 실려서 지나간 추억을 하는 그의 눈앞에는 어제 오후 영광서 자동차 타던 광경도 떠올랐다. 여러 청년 동지들도 나왔거니와 누님이 안고 나온 삼룡이가 자동차 탄 자기에게로 오려고 울던 것이 귀에 쟁쟁거린다. 그의 가슴은 또 찌르르하였다.
 
130
흔들리는 의자에 앉아 차창 턱에 팔을 기대었던 그는 또 한 번 입술을 깨물고 둥근 듯 긴 눈을 번쩍 들면서 주먹을 쥐었다.
 
131
어디로 보든지 자기는 자기 한 몸의 향락을 누릴 사람은 못 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쉽게 누려지지도 않거니와 누려진다 하더라도 그는 마땅히 거절해야만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사회와 민중은 불문에 붙인다 하더라도 그는 자기와 동고동감하던 아내를 위하고 이 몸의 품에서 어떠한 환경의 변동을 받을지 모르는 자식을 생각하여서라도 자기 한 몸의 향락은 고사하고 자기 한 몸의 향락을 위하는 꿈만이라도 꾸는 것이 죄송스러웠고 두려웠다. 그렇거든 그의 앞에 보이는 것은 아내나 자식뿐만이 아니었다. 자기 아내, 자기 자식을 빌미로 누님의 내외가 떠오르고 동지들 생활이 떠오르고 또 낯모르는 사람들의 생활이 떠올랐다. ──부자연한 인습 도덕 가난 학대의 희생자는 아내나 자식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눈앞에는 어둑한 구름 속 지저분한 진흙밭에서 어물거리고 고함치는 수많은 생령들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그네들과 함께 뒤궁구는 자기의 그림자도 발견되었다.
 
132
‘응 나는 싸우라! 사람은 고통을 벗으려고 함으로써 귀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과 싸워 이김으로써 귀한 것이다. 고통과 싸워서 고통을 이길 수는 있어도 그것을 벗을 수는 없으니 사람은 어느 때나 사람이라 현실을 벗을 수 없는 까닭이다. 나는 싸우라.’
 
133
그는 이렇게 가슴속으로 뇌이면서 또 한 번 가슴을 쳤다. 그리고 그는 모든 뒤숭숭한 생각을 잊으려는 듯이 머리를 흔들면서 한숨을 쉬더니 차창 유리에 눈을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134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낯설은 산 낯설은 들 낯설은 물 들이 보였다. 서울이 가까웠나 보다. 내게 얼음은 그저 풀리지 않았고 산골짜기에는 녹다 남은 눈이 보였다. 점점 훤하여 가는 새벽빛에 쓸쓸히 보이는 생소한 산천은 그에게 일종의 흥분과 고독을 주었다. 그의 가슴은 미구에 밟을 도회를 생각하고 울럴럴럴하면서도 황량한 들판을 외로이 방향도 없이 가는 것처럼 쓸쓸하였다.
 
135
차는 북으로 북으로! 달아나고 가고 오는 산천은 밤옷을 한 겹 두 겹 벗었다. 〔미완〕
【원문】용신난(容身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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