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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연(海燕) ◈
◇ 해연 1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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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
함세덕
1
海 燕[해연] (1막 2 장)
 
2
1 장
 
3
인생은 낮과 밤의 장기판이다.
4
그 우에서 운명은 장기를 두고 논다.
5
장(將)이 물러서고 졸(卒)이 이쪽 저쪽으로 뛰고 하지만 결국은 제각기 상자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 홀· 케인
 
6
인물 및 배역
 
7
등대지기(前[전] 모 사립보통학교 교장) …………… 沈影 (심영)
8
진숙(珍淑 ; 딸) ………………………………………… 兪慶愛(유경애)
9
안 의사(安醫師 ; 公職府會[공직부회] 의원) ………… 朱仁奎(주인규)
10
그의 부인 ………………………………………………… 金蓮實(김연실)
11
세진(世眞 ; 그의 아들) ‥……………………………… 柳玄 (류현)
12
윤첨지(尹僉知 ; 등대 인부) …………………………… 金東圭(김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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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룻배 사공
 

 
14
사면 일대(四面一帶), 암초에 둘러싸인 서해안 어느 섬.
15
우뚝한 검은 바위, 낙뢰(落磊)한 조개껍질 떼미, 풍우에 깎인 섬기슭. 중앙에 잡초가 덮힌 손바닥만한 평지가 있다. 그 뒤로 반석과 모래사장. 바른편 섬 일각(一角)에 화강암 석벽으로 외곽을 둘러싼 백악(白堊)의 등대가 용립(聳立) 해 있다. 석벽엔 첨궁형(尖弓形)의 쇠문. 평지에서 쇠문으로 올라가는 돌층대. 기슭엔 3월이 되면 진홍으로 해당화와 동백이 피지만 지금은 황량한 관목(灌木)이 있을 뿐이라.
16
그 사이로 석벽을 끼고 가느단 주름길. 이 길이 꾸부러지는 곳에 퇴락한 수직(守直)이의 집 일부가 보인다. 멀-리 바다 건너로 신기루같이 떠오르는 인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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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오르면, 섬을 삼킬 듯이 밀려들오는 파도를 헤치고 발동선이 섬을 향해 가까워오는 소리. 놀란 갈매기떼들이 물을 차고 날아 흩어진다. 평지에 웅크리고 앉어서 윤첨지, 조그만 상자를 짜고 있다. 사장(砂場)에서 쌀 씻는 솥을 들고 진숙, 윤첨지 앞으로 오며,
 
 
18
진   숙   그걸 입때 만들어?
 
19
윤 첨 지   인제 목수질도 다 까먹어서, 그것두 사개가 잘 안 맞는구나.
 
20
진   숙   껄핏하면 하룻밤에 관을 서너 개씩 짠다면서 웨?
 
21
윤 첨 지   그 건 젊었을 때 말이지. 집을 갈어주면 뭘 하냐? 며칠 안 있으면 떠날 텐데.
 
22
진   숙   어느새 떠나?
 
23
윤 첨 지   흥! 어느새가 뭐야? 구월인데.
 
24
진   숙   (생각난 듯이) 참말! 에민 그저 안 들왔지?
 
25
윤 첨 지   떠날 준비 하느라구 무척 바쁜 모양이드라.
 
26
진   숙   그래두 올핸 철이 늦으니까, 한 보름 더 있을껄?
 
27
윤 첨 지   떠날 땐 한 사날 전부터 에미하구 새끼들 우는 소리가 벌써 달르단다. 사람들 이삿집처럼 벅적하지.
 
28
진   숙   새소릴 윤첨지가 알어?
 
29
윤 첨 지   너 아버진 글이나 읽지만 내야 열 몇 해를 제비하구 등대만 쳐다보구 살었는데 그걸 몰라? 어젯밤에 바람만 좀 씨지 않었더면 오늘 아침엔 떠났을께다. 내 말대로 집에 똥이나 쳐주구, 깨끗이 떠나게나 해주라니까.
 
30
진   숙   (불평에 찬 소리로) 제비 가구 나면 가새에 성해가 또 하얗게 끼겠지. 그놈의 녹쇠가 내리불면 기왓장이 또 떠들석거리겠군.
 
31
윤 첨 지   성해낄 녘은 멀었어. 아직 떼무리 놈들 동아[冬魚]잡이 나가구두 한참 있어야 할껄.
 
32
진   숙   엊그저께 서낭님께 추위 달라구 고사들 지내든데!
 
33
윤 첨 지   정말?
 
34
진   숙   그럼 배님자 마누라가 검정 솜바질 해입구 산 우이서 춤추는 게 빤히 비든데 뭐.
 
35
윤 첨 지   네가 푸념했다구 올 겨울이 안 올 상싶으냐? 웨 닷다가 이러냐?
 
36
진   숙   그 럼. 말두 못하란 말이야?
 
37
윤 첨 지   느 아버지가 어저께 그러시드라. '해마다 제비가 떠날 땐 우리 진숙이두 내를 훅 떠나겠지’ 하는 생각이 들구 그럴쩍마닥 전신이 서늘해지는 것 같다구.
 
38
진   숙   내가 도망갈까봐 괜한 걱정을 하구 계시나 부지?
 
39
윤 첨 지   그런 게 아니라 시집을 보낼랴구 하시는 눈치드라.
 
40
진   숙   누가 시집 간댔나?
 
41
윤 첨 지   그럼, 이 섬구석에서 늙을 테냐?
 
42
진   숙   난 시집 안 간다구 벌써부터 아버지한테 그런걸.
 
43
윤 첨 지   흥! 사내 녀석들이 가만 둬야지. 통운환(通運丸) 선장두 네 얘길 하지, 용유면장 아들두 그러지, 경비선(警備船) 기관순 양식 실어다 줄 쩍마닥 느 아버질 졸르지, 팔미도 등대지기한테 과년한 딸 있단 소문은 근방 섬에 모르는 사람이 없어.
 
44
진   숙   그렇지만 항구에선 몰르는걸.
 
45
윤 첨 지   여름내 경칠 놈의 낚시꾼들이 쌀 들구와서 밥해먹고 가는 게 누구 때문인데? 민어는 떼무리가 여기보다 갑절이나 큰 게 물리지만 널 보러 온 것들이야.
 
46
진   숙   (긍지 속에) 아이, 수다 떨지 말어.
 
47
윤 첨 지   그러니까 네가 이 속에서 겨울나기두 올뿐이야. 내년 춘삼월 조기 떼 몰려와서 안섬 뒷섬 가시나들 한참 바람날 땐 넌 연지 찍구 시집갈거야.
 
 
48
'뚜 -’하고 발동선이 여울로 들어온 기적 소래. '땡땡’하고 경종. 연기 뿜는 소래 점차 완만해진다. 진숙, 돌연 솥을 땅에다 놓고 사장으로 달려간다.
 
 
49
윤 첨 지   너 또 그 학생 기대리냐?
 
50
진   숙   (고대하던 사람을 승객 중에서 찾느라고 정신이 쏠려 대답 없다.)
 
51
윤 첨 지   왔냐?
 
52
진   숙   (풀죽은 소래로) 안 왔어.
 
53
윤 첨 지   어째 요샌 아버지두 눈칠 채신 것 같드라.
 
54
진   숙   몰르셔.
 
55
윤 첨 지   좌우간 이렇게 눈을 속이구 가다간 무슨 일이 나고야 말걸.
 
56
진   숙   괜한 걱정 말구 이리와 봐. 웬 가방든 이가 나룻배루 바꿔 타는데?!
 
57
윤 첨 지   (달려가며) 우리 영순이 데려간 포주영감 아니냐?
 
58
진   숙   아니야! 양복 입었어. 체신국에서 등대기사가 나오신 거 아닐까?
 
59
윤 첨 지   고장두 안 났는데 무슨 기계조살 나와.
 
60
진   숙   낚시꾼두 아닐 텐데 그럼 누굴까?
 
 
61
발동선, 가뿌게 연기를 뿜고 멀-리 사라지는 소리. 이윽고 나룻배 한 척이 나타난다.
 
 
62
사   공   윤첨지, 줄 좀 받게.
 
 
63
사공, 줄을 던지고 발다리를 걸친다. 윤첨지, 줄 끝을 바위에 맨다. 사공과 안의사 내려온다. 진숙, 솥을 집어들고 쏜살같이 돌층대로 올라간다.
 
 
64
안 의 사   바닷물로 밥을 짓나요?
 
65
사   공   물이 원체 귀해서욥쇼. 안칠 땐 민물로 하지요. (윤첨지를 보고) 제밀[濟物浦]서 오신 양반이실세.
 
66
윤 첨 지   (황송하여) 누구신데?
 
67
사   공   쇠돌이가 동앗배에서 돛 들고 휘날려갔을 때 갈빗댈 다치구 입원 했던 병원 있지?
 
68
윤 첨 지   그래!
 
69
사   공   바루 그 병원 선생님이셔.
 
70
안 의 사   (윤첨지에게) 주임영감 계슈?
 
71
윤 첨 지   등대 깐에 들어가셨는데 부랄[分銅]이 좀 고장이 나서욥쇼.
 
72
사   공   영감님한테 할 말이 있다구 우정 오셨다네.
 
73
윤 첨 지   (등대를 향하여) 진숙아, 진숙아.
 
74
진   숙   (쇠문[鐵門] 앞에 나타나며) 웨 그루?
 
75
윤 첨 지   들어가 아버지한테 손님 오셨다구 여쭤라.
 
 
76
진숙, 쇠문 안으로 들어간다.
 
 
77
안 의 사   지금 그 여자가 등대주임 딸이오?
 
78
윤 첨 지   네.
 
79
안 의 사   학굔 어듸 댕겼나요?
 
80
윤 첨 지   항구 보통졸업 마쳤지옵죠. 그래두 중학교 졸업했단 너절한 시체 기집애들은 명함두 못 듸릴걸요.
 
81
안 의 사   그렇게 재주가 존가요?
 
82
윤 첨 지   아, 일본말루 등대일기를 척척 구다시루 써낸답니다. 해사과(海事課)에서두 칭찬이 자자한걸요.
 
83
안 의 사   그 참 싀굴선 보기 드문 여자군요?
 
84
사   공   저아버지가 밤낮으루 글을 가르치셔요. 배젓구 지날 쩍마다 늘 봐야 갱변에서 글 읽구 있지요.
 
85
안 의 사   그럼 주임영감도 학식이 많은 분이시군요?
 
86
윤 첨 지   아, 보통학교 교장까지 했으면 구만이지 더 해봅쇼?
 
87
안 의 사   교장요?
 
88
윤 첨 지   네!
 
89
안 의 사   그런 양반이 등대지길 웨 하여요?
 
90
윤 첨 지   무슨 일루 학교를 구만 두셨다지요 아마.
 
91
안 의 사   무슨 일로요?
 
92
윤 첨 지   몰르지요. 아무한테두 말 안 하시구 아까 그 딸한테두 그 얘기만은 안 하시니까요.
 
93
사   공   참 이상한 양반이에요. 산 속에서 도토리죽만 먹구 도 닦는 도사처럼 아주 세상하군 담 쌓셨어요.
 
94
안 의 사   그럼 항구에두 오신 적 없겠군요?
 
95
윤 첨 지   한 달에 한 번씩은 월급 타러 해사과에 가시지요.
 
96
안 의 사   양식이나 나무는 어떡하구요?
 
97
윤 첨 지   경비선이 빨간 깃대 달구 한 달에 두 번씩 실어다 줍지요.
 
98
사   공   어디 여느 사람이야 등대지길 시키나요? 조선 사람 등대지긴 경기도에 그 양반 한 분이에요. 그래두 다 이력이 있으니까 해사과에서 두 그 양반한테만은 깍은듯이 공대를 하죠.
 
 
99
등대지기, 기름 묻은 얼골을 씻고, 등대에서 나온다. 뒤따라 진숙, 얼골만 쇠문 밖으로 내민다.
 
 
100
등대지기   (윤첨지에게) 아, 웨 올라오시래지 않구?
 
101
안 의 사   괜찮습니다.
 
102
등대지기   (돌층대를 내려오며) 오래 기대리셨습니다.
 
103
안 의 사   바뿌신데 실례합니다. (명함을 꺼내주며) 안신건이라구 합니다.
 
104
등대지기   네?? 제가 등대 수직입니다. 저 집으루 좀 올라가시지요.
 
105
안 의 사   (지금까지와 는 딴판인 냉정한 어조로) 들으시면 불쾌하실 말씀을 여쭈러 왔는데……여기서 그냥 실례하지요.
 
106
등대지기   그러시드라두……?
 
107
안 의 사   (단도직입으로) 저 세진이라구 혹 아실는지요?
 
108
등대지기   첨 듣는 일홈입니다.
 
109
안 의 사   여기 자주 왔으니까 아실 텐데요.
 
110
등대지기   (기억을 더듬다가) 누군지요? 생각이 안 납니다.
 
111
윤 첨 지   아, 웨 떼무리서 천막 치구 밥 해먹는다든 학생이지 뭐여요?
 
112
등대지기   (그제야 비로소) 아, 그 학생! 네, 압니다. 가끔 나루를 건너와선 등대를 그리기두 하구 소라·고동을 잡기두 하구 했지요.
 
113
안 의 사   그 애가 바루 제 자식입니다.
 
114
등대지기   그러세요?
 
115
안 의 사   (사공에게) 영감은 배에 가 기대리슈.
 
116
사   공   네.
 
 
117
사공, 나룻배로 내려간다. 윤첨지도 눈치를 채고 만들든 상자를 주섬주섬 집어 들고 돌층대로 올라간다.
 
 
118
등대지기   몸이 실하지 못해 동무들과 수양한다든데 요샌 학교 잘 다닙니까?
 
119
안 의 사   개학한 지 벌써 달포가 넘두룩 휴학하고 있습니다.
 
120
등대지기   그럼 그저 성치가 않은가요.
 
121
안 의 사   제 직업이 의사라 의술은 할 만큼 다 해봤구 또 제 친구들한테두 일일이 한 번씩 진찰을 받어봤으나 이구동성으로 병은 없다구들 합니다.
 
122
등대지기   병이 없는데 학굘 안 갈 리가 있을까요?
 
123
안 의 사   제가 여기온 게 사실은 그것 때문입니다.
 
124
등대지기   (불안한 가운데) 그 일 때문에요?
 
125
안 의 사   댁에 따님이 계시죠?
 
126
등대지기   네, 우리 애하구 무슨 관계가 있어서 그러십니까?
 
127
안 의 사   수일 전에 그눔이 잠든 틈을 타서 책상 서랍을 뒤져 봤지요. 그랬드니 지가 섬에서 천막 생활하든 때의 일기책과 근방 경치를 사생한 그림책이 나왔었습니다.
 
128
등대지기   (탐색하는 듯) 거기에 내 딸 얘기가 적혀 있었단 말씀입니까?
 
129
안 의 사   (냉연히) 네!
 
130
등대지기   그럴 리가 있습니까?
 
131
안 의 사   사실이 증명하는 걸 어떻게 합니까?
 
132
등대지기   이 섬엔 여름철에 항구서 손님들이 많이들 놀러 옵니다. 그래서 언젠가 학생이 와서 등대실 속을 좀 구경하겠다기에, 내 딸더러 안내를 해주란 쩍은 있었지요.
 
133
안 의 사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닙니다.
 
134
등대지기   (약간 기분을 손상당한 듯) 그렇지만 일기에 내 딸 얘기가 씨였다구 그걸 가지구 둘의 사이를 단정할 순 없지 않을까요?
 
135
안 의 사   나두 그맘때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먼 발채로 바라본 여자를 그리워하고 동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가 했었습니다만 한 장 한 장 넘겨갈수록 더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됐습니다. (가방 속에서 일기책과 '스케치북’을 꺼내 조잡(粗雜)히 내밀며) 보십쇼.
 
136
등대지기   (그림장을 넘기며 신음하듯) 내 딸입니다, 내 딸입니다.
 
137
안 의 사   적어도 처녀가 남자 앞에 앉어서 자기 얼굴과 몸을 그리게 할 땐 그들 사이가 이만저만 깊은 것이 아니라는건 누구든지 추측할 수 있을 겁니다.
 
138
등대지기   그렇지요!
 
139
안 의 사   스무 장이 넘는 그림마다 장장이 따님이 뎀마에 걸터 앉었기도 했고 등대 앞에 기대섰기도 했으니 한두 번 만난 것두 아니겠지요? 더구나 이 섬엔 치부책 든 채연자지기가 졸구 있는 연자깐두 없구 버드나무가 쭉 늘어선 동구 밖 신작로두 없는 걸 보면 이 섬에서만 논 것두 아닙니다.
 
140
등대지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 , 어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난 전연 이런 줄을 몰랐는데 그년이 어느 틈에…….
 
141
안 의 사   (말을 가로막으며) 사람이 삼사십 호만 산대두 모를까, 여긴 영감님과 일꾼밖에 살질 않는다는데 여기서 그걸 몰르셨다면 그 말씀을 누가 곧이 듣겠습니까?
 
142
등대지기   (자존심을 손상당하여) 그럼 제가 알구두 몰랐다구 한다는 말씀입니까?
 
143
안 의 사   그렇게 생각할 수밖엔 없지 않어요?
 
144
등대지기   (나즉이) 그러시겠죠. 이게 모두 사실이라면 제가 큰 실책이었습니다.
 
145
안 의 사   난 뭐 영감님과 따님을 책하러 온 건 아닙니다. 첫째, 과실은 그 녀석한테 있으니까요. 그러나 아직 나이가 어릴 뿐 아니라, 제 어미가 참 금이야 옥이야 무러메서 기른 자식이라 중학교를 삼 년째 댕기지만 도무지 천둥벌거숭입니다.
 
146
등대지기   학생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모두가 내 딸하구, 교육을 잘못시킨 내가 잘못이지요.
 
147
안 의 사   요샌 보도연맹이란 기관이 생겨서 학생들은 구경두 못 가게 하는데 만일 이 소문이 연맹이나 선생 귀에 들어가보십쇼. 담박에 퇴학 처분 당하게 될 겁니다.
 
148
등대지기   그러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149
안 의 사   (입가에 냉소를 띠우고) 들으니 영감께서 예전에 자제들 교육에 헌신하셨다 하니까 앞으루 어떻게 해야 할거라는 건 나보다 더 잘 아실 줄 압니다.
 
150
등대지기   (찔린 듯이) 네!
 
151
안 의 사   (나룻배를 향하야) 뱃시간이 어떻게 되오?
 
152
사   공   (배에서 일어서며) 아직 멀었어요. 지금 타구 오셨든 배가 덕적도(德積島)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와야 할 테니까, 한 반 시간 더 기둘루셔야 하실껄요.
 
 
153
석벽(石壁) 앞에서 진숙은 아버지와 안의사의 대사가 바뀌는 동안 창백해진 얼굴로 떨고 서 있다. 윤첨지, 돌층대를 급히 내려온다.
 
 
154
윤 첨 지   선생님, 잠깐만. 배 올 때까지 기둘르시는 동안 우리 마누라 배 좀 봐주실 수 없을까요?
 
155
안 의 사   (직업 의식에 돌아가며) 무슨 병인데요?
 
156
윤 첨 지   병치군 망할 놈의 병이에요. 집안이 망할라면 에펜네 턱주가리에 시엄이 난다드구만, 이건 한술 더 떠서 오줌통이 붜가지구 남을 못살게 굽니다 그려.
 
157
안 의 사   신장염인게 군요.
 
158
윤 첨 지   배때지가 개구리 삼킨 뱀 모가지같이 시퍼렇게 부풀러가지구 오줌만 누게 해달라구 엠병을 핍니다 글쎄.
 
159
안 의 사   웨 진작 의사를 뵈지 않구 입때 그대루 뒀어요?
 
160
윤 첨 지   이 섬구석엘 누가 와준답니까?
 
161
안 의 사   (시계를 보며) 어듸 가봅시다.
 
 
162
윤첨지와 안의사, 층대를 올라 석벽 앞을 돌아 집쪽으로 내려간다.
 
 
163
등대지기   (다시 화첩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점점 솟아오르는 격노를 억제하며 등대를 향하여) 진숙아! 진숙아!
 
164
진   숙   (초연히 내려오며) 네.
 
165
등대지기   지금 왔든 이가 누군질 알겠냐?
 
166
진   숙   뒤에서 다 들었어요.
 
167
등대지기   (그림 첫장을 내밀며) 이게 정말 너냐?
 
168
진   숙   네. 낙지를 잡다가 돌아서 보니까, 그 학생이 나를 그리구 있었어요. 나올랴구 하는데, 다 됐으니 잠깐만 움직이지 말어 달라구 하기에…….
 
169
등대지기   대가리 커-단 기집애가 부끄럼 없이 그게 무슨 꼴이냐?
 
170
진   숙   자꾸 싫다구 했지만…….
 
171
등대지기   싫다는데 강제루 묶어 놓고 그리든?
 
172
진   숙   (무언)
 
173
등대지기   싫은 걸 어째서 그 그림을 다 그리두룩 낙지 잡는 시늉을 하고 있었냐? ……말을 해…….
 
174
진   숙   이런 풍경은 도회지에선 암만 찾어두 구할 수 없는 것이라구, 자꾸만 졸라요.
 
175
등대지기   이게 한두 장이야 말이지. 그건 그랬거니와 이넘어 스무 장이 넘는 그림을 뮛 때문에 시침을 떼구 그리게 했었냐 말이야?
 
176
진   숙   여름 방학에 도화 숙제가 스무 장이 나왔대요. 경치만 그리면 심심하구, 또 도화 선생이 될 수 있는 대루 좋은 경치 속에 사람이 움직이구 있는 걸루 그려오랬다구 자꾸 졸르기에…….
 
177
등대지기   아-니 넌 남을 위해서 사냐? '졸르기에’, ' 졸르기에’ 소리만 내세우니 남이 졸른다구 갈빗대두 빼줄 테냐?
 
178
진   숙   그렇지만…….
 
179
등대지기   뭘 잘했다구 그렇지만이야? (다시 한 장을 넘기며) 이건 용유도(龍遊島) 유성운네 연자깐이지?
 
180
진   숙   네!
 
181
등대지기   거긴 뭘 찾어 먹으러 갔드랬냐?
 
182
진   숙   (무언)
 
183
등대지기   배타구 갔드랬냐?
 
184
진   숙   네.
 
185
등대지기   노는 누가 젓구?
 
186
진   숙   (무언)
 
187
등대지기   누가 젓어?
 
188
진   숙   (무언)
 
189
등대지기   냉큼 말하지 못해?
 
190
진   숙   윤첨지가 젓어요.
 
191
등대지기   윤첨지가?
 
192
진   숙   (무언)
 
193
등대지기   기집애가 사내하구 딴 섬엘 갔었으니 동네 사람들이 오죽 숭을 봤을까?
 
194
진   숙   조기사리 나가구 아무두 없었어요. 아낙네들은 후리그물[地曳網] 끌러 갱변에들 나갔구요.
 
195
등대지기   얌전한 강아지 냄비전에 올른다든가. 이게 그림이니까 그래두 낫지, 사진으로 찍어서 항구 사진집 진열장에 내놨다구 해봐라. 누구든지 기생년이나 갈보루 알지, 책개라두 읽은기 집애루 보겠냐? 뭘 보구 그러는지, 그래두 널 얌전타구 사방에서 혼인하자구들 그러는데, 네가 이런 짓을 하구 댄 겼단 소문을 들어들 봐. 고갤 회회 돌리구 눈쌀들을 찌푸릴 테니.
 
196
진   숙   (흘연(屹然)히 소래를 높여) 그 학생은 같은 남자라두 날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니여요.
 
197
등대지기   뭐라구?
 
198
진   숙   나를 친누나처럼 생각해요. 나이두 나보다 두 살이나 아래구요.
 
199
등대지기   누나?
 
200
진   숙   네, 자기 집은 추수를 이삼천이나 하지만, 그게 저한텐 다 귀찮대요. 그대신 저 맘 속으로 털어놓구 이 얘기 할 수 있는 누나 하나 있었으면, 일생 원이 없겠다구 해요.
 
201
등대지기   (기가 맥힌 듯) 시집 장가들 갈 나이에 동생 누나가 뭐야?
 
202
진   숙   그렇지만 그 학생은 날 볼 쩍마다 '누나, 누나’했어요. 그리구 선생한테나 동무들한테두 이 그림은 누날 그린 거라구 하겠다구 했구요.
 
203
등대지기   동성끼리 혹 의형제 맺었단 소린 들었지만, 나이 찬 남녀가 남매 맺는단 소린 고금에 듣든 중 첨이다.
 
204
진   숙   (단호하게) 남들은 남들이구 우린 우리지요.
 
205
등대지기   내가 언젠가 구약 얘길 한 쩍이 있었지? 카인이란 자가 제 동생 아벨을 죽였다구.
 
206
진   숙   그건 동생을 시기했지만, 난 그 학생을 귀여워하지 않어요?
 
207
등대지기   세상이 네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깨끗한 줄 아냐? 에펜네가 남편과 핏덩이 자식을 헌식짝같이 내버리구, 딴 남잘 얻어 가기가 일수구, 자식이 애비를 걸어 재판을 서슴지 않구 하는 세상이야. 이 속에서 한두 번 밑두 끝두 없이 만났든 남녀가 어떻게 형제가 된단 말이야?
 
208
진   숙   웨 아버진 세상을 밤낮 더럽다구만 하세요? (다시 애소(哀訴)하는 듯이) 아버지, 난 그 학생을 대할 쩍마다 가슴이 부풀러오는 것 같구, 세상이 여간 아름답게 뵈지 않어요. 어떻게 깨끗하게 쉬영동생 삼을 수 없을까요?
 
209
등대지기   넌 그렇게 생각하지만 세상사람이란 다 이상하게 안 볼 수 없어. 당장 그 애 아버지 나한테 하든 소리 못 들었냐? 내가 자기 아들을 몰래 꾀내다가 너하구 놀게 한 것처럼 생각 하구있지 않든?
 
210
진   숙   그인 우리들을 보통사람들 연애하는 것처럼 오해하구 있어요.
 
211
등대지기   남녀는 결국 부싯돌이야. 부딪치면 기어코 불이 나구야 마는 법이 거든.
 
212
진   숙   (반항하며) 아버지두 우리들 사이를 그렇게 불순하게 보셔요?
 
213
등대지기   (날카롭게) 네가 그 학생을 정말 친동생같이 사랑했다면, 어째서 그걸 입때 나한테 숨겨 왔냐?
 
214
진   숙   여쭐랴구 했지만…….
 
215
등대지기   여쭐랴구 했는데 웨 말 안 했어? 응? 나한테 숨겨올 땐, 떳떳치 못한 데가 그래두 있길래 그랬지?
 
216
진   숙   (찔린 듯이 말이 쿡 막힌다)
 
217
등대지기   형제의 우애란 어떤 땐 부자나 모녀 사이보다 순수하구 고결한거야. 구태여 남의 눈을 피해가면서까지 사랑할 필요가 뭐야?
 
 
218
진숙, 조용히 운다. 섬 뒤에서 발동선이 질주해오는 소리. 윤첨지와 안 의사, 돌층대를 내려온다.
 
 
219
윤 첨 지   주사를 맞어야만 되는 걸, 가구리 강주부 말을 듣구 약탕관 밑바닥이 닳두룩 엉겅퀴[薊]만 대려먹였었군요.
 
220
안 의 사   그건 하혈하는 데들 먹지요.
 
221
윤 첨 지   며칠 전에 청국서 들어온 윤선에 호열자 환자가 타구 있었다나요. 그놈이 바다에다 똥을 깔겼을 테니까 고기들은 모두 그 전염병을 가지구 있을꺼래요. 그래서 민어를 잔뜩 잡어 들구 항굴 가니까 배를 대기가 무섭게 수상 경찰서 나리가 그대루 물에다 버리라는군요. 그러지 않어두 그걸 팔면 한번 찾어가 뵙구 모시구 올려구 했었습죠.
 
222
등대지기   치료빈 디렸나?
 
223
윤 첨 지   그냥 공으로 봐주셨답니다.
 
224
안 의 사   (아까와는 돌변한 상냥한 어조) 너머 노엽게 생각마십쇼. 지금 이 영감 얘길 들으니까 영감님께선 전연 두 사람의 사이를 모르셨다구 하는군요. 난 그런 줄 모르구 오해를 했었습니다. 몹시 맘속이 불안했구 또 흥분했던 끝이라 함부루 불온한 힐책 같은 소릴 여쭤서 어떻게 죄송한지 모르겠습니다
 
225
등대지기   온,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226
안 의 사   더구나 요전 장마에 천막이 날러가구 우리 아이가 가도 오도 못하게 됐을 때 영감님께서 제일 먼저 걱정을 하시구 손수 배를 젓구 가셔서 구해까지 주셨다는데 난 그런 일두 전연 모른 체 나오는 대루 말을 했었습니다.
 
227
등대지기   조금두 난 거리끼게 생각지 않습니다.
 
228
안 의 사   (진숙에게 다정히) 울지 말아요. 내가 심한 말을 여쭸기 때문에 아버님께서 좀 역정이 나셔서 꾸중을 하신 모양이에요.
 
229
등대지기   그대루 두십쇼.
 
230
안 의 사   사실은 그녀석두 어저께 내가 야단을 좀 쳤더니 밥두 안 먹구 집을 나가서 오늘까지 안 들어오는군요. 부모마음 자식 모른다구, 사랑하지 않으면 웨 야단을 치겠어요?
 
231
등대지기   (불안 속에) 그럼 그 애가 어델 갔을까요?
 
232
안 의 사   (눈물이 글성글성해지며) 팔방으루 찾는 중이지만 알 수가 없습니다.
 
233
등대지기   온, 저런 변이 있나요?
 
234
안 의 사   (진숙에게) 기선회사 사람들하군 이웃이라 다 가까웁구 더군다나 발동선 선장하군 중학교 때 동창생이에요. 그래서 세진이가 가더라두 절대루 배를 태주지 말라구 단단히 부탁을 해놨어요.
 
235
등대지기   그 잘하셨습니다.
 
236
안 의 사   그렇지만 세상일이란 누가 알 수 있어요? 그녀석이 만일 목선이나 빙선(氷船)을 타구 올지도 모르니까 오더래두 잘 얘기해서 돌려보내주세요.
 
237
진   숙   (적적히) 네.
 
238
안 의 사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발을 멈추며 등대지기에게) 어련하시겠습니까만 이루 사정 보시지 말구 톡톡히 야단을 치셔서 그 놈이 다시 이 섬에 발 들여놓지 못하게 해주십쇼.
 
239
등대지기   염려마십쇼.
 
 
240
발동선이 여울로 들어온 기적 소래. 나룻배로 바꿔타는 승객들의 소요(騷擾). 짐을 바꿔싣는 선원들의 거츠른 규환.
 
 
241
사   공   배 들왔습니다.
 
242
안 의 사   그 럼 안녕히 계십쇼.
 
243
등대지기   안녕히 가십쇼.
 
244
윤 첨 지   그럼 야낑집[魚物競賣場] 문 여는 날 민어 팔아가지구 데리구 갑죠.
 
245
안 의 사   그럭허슈. (다시 진숙에게) 울지 말아요.
 
246
진   숙   안녕히 가세요.
 
 
247
안의사, 사공과 배를 타구 사라진다.
 
 
248
등대지기   (진숙에게) 홀작거리지 말구 올라가.
 
 
249
진숙, 층대를 올라 집으로 내려간다. 윤첨지, 무서운 등대지기의 안광에 위축되어 자기 앞에 떨어질 벼락을 각오한 듯이 서 있다.
 
 
250
등대지기   난 몰랐거니와 윤첨지두 몰랐었나?
 
251
윤 첨 지   버, 벌써부터 알긴……했습죠.
 
252
등대지기   그런데?
 
253
윤 첨 지   쥔 어른 성밀 잘 아니까 만일 이, 이 얘길 했다간 당장 난리가 나겠기에 차일피일 밀러온 게 그만…….
 
254
등대지기   대관절 어느 때 내 눈을 속였나?
 
255
윤 첨 지   저녁 잡숫구 책 보실 때였지요.
 
256
등대지기   그년 말 들으면 그 학생이 저를 누나라구 불른다는데 정말인가?
 
257
윤 첨 지   네, 그때가 언젠가 아무튼 훤한 달밤이었어요. 낙배에서 민어를 잡다가 힐끗 보니까 둘이 모래밭을 걸어가드군요. 배지락 잡느라구 헤쳐논 웅뎅이에 자기들 얼굴이 비쳤던 모양이에요. 가다 말구 한참 섰더니 그 학생이 자긴 형제가 없으니 친누나처럼 저를 사랑해 달라구 그러더군요. (돌연 비애가 솟아오르는 듯 눈물 콧물을 훔치며) 그것들이 나란히 물속에 비친 얼굴 들여다보구 섰는 걸 보니까 어떻게 우리 영순이 년 생각이 나는지…….
 
258
등대지기   (측은한 감정이 들며) 자네가 그때 나한테 알렸드면 일이 이렇게 크게 벌어지지는 않었지?
 
259
윤 첨 지   그 후루 여러 번 타일르긴 했구 낚시꾼 꾐에 빠져 보따리 싸 가지구 도망간 연자지기 딸년 얘기두 했구요.
 
260
등대지기   진숙이야 내년 봄에 시집 보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학생 전도를 까닥하단 망쳐놓게 됐으니 걱정이란 말이야. 어저께 나간 애가 오늘까지 안 들왔다니 만일 어린 맘에 자살이라두 해보게. 그애 부모가 날 얼마나 원망하겠나? 이게 모두 윤첨지 주책없는 짓 때문이야.
 
261
윤 첨 지   그렇지만 내야 쇠돌이한테 시집가지 청루루는 안 가겠다구 댁기[甲板]에 발을 동동 구는 년을 팔아먹었지만 무슨 원한이 있다구 제비쌍같이 노는 것들을 고자질을 해서 야단을 맞게 합니까?
 
262
등대지기   (격앙하여) 고자질? 자네 그걸 말이라구 하나? 어린 것들 잘못을 부모한테 얘기해서 다시 못하게 하는게 고자질인가?
 
263
윤 첨 지   (입을 빗쭉하고 머리를 북 긁을 뿐) 등대지기 자네 말대루 고자질은 해달래진 않겠네만 자네더러 뚜쟁이 노릇 해달래던가? 웨 배는 태가지구 근방 섬을 돌아댄겼나?
 
264
윤 첨 지   배 타구 지날 쩍마다 '딸 팔아먹구 잘된 영감 못 봤다’구 눈깔을 희분덕거리구 악담하는 쇠돌이눔을 보면 서루 좋아하는 것들 성례 못 시켜준 게 뼈가 저려요. (콧물을 훔치며) 내 자식은 못 해줬으니 화풀이루라두 그대신 진숙이한텔 잘 해주겠다는 게 어쩌다 이렇게 틀어졌군요.
 
265
등대지기   아무튼 엎질른 물이야. 그땐 나하구 마즈막 보는 날일테니.
 
266
윤 첨 지   네.
 
 
267
등대지기, 층대를 올라 집으로 내려간다. 윤첨지, 멋적은 듯이 멀거니 바다를 바라보구 섰더니 돌연 깨여진 규환을 친다.
 
 
268
윤 첨 지   아-니, 저 애가 또 오는군.
 
 
269
사공의 "어여듸여"소래와 함께 중선 한 척 댓마다리(뱃머리)만 나타난다. 세진(17세, 눈에 총기가 도는 미소년) 돈을 꺼내 사공에게 주며 "고맙습니다 "치사(致謝)하고 배에서 뛰어내린다. 중선 다시금 미끄러지는 듯 사라진다.
 
 
270
윤 첨 지   아-니 누굴 죽일려구 여길 또 왔냐?
 
271
세   진   영감님 안녕하셨어요?
 
272
윤 첨 지   (깎은 듯한 인사말에 감격하여) 오-냐.
 
273
세   진   누나 있어요?
 
274
윤 첨 지   너 때문에 여기서 난리가 났었다. 너 아버지가 오셔서 너희들 사일 모두 일러바치셨단다.
 
275
세   진   그래 어떻게 됐어요?
 
276
윤 첨 지   진숙아버진 펄펄 뛰시구 날보구 진작 말 안 하구 감춰 왔다구 한참 야단치시다 지금에야 겨우 올라가셨다.
 
277
세   진   내 그렇게 될 줄 알었어요.
 
278
윤 첨 지   나가사낀[중선] 어떻게 탔었냐?
 
279
세   진   아버지가 표 파는 이한테 말을 해두셨나봐요. 당최 배를 태줘야지요. 할 수 없이 야낑집에서 조기 풀구 얨평으로 가는 배가 있기에, 붙들구 떼를 썼지요. 그래 누나두 막 야단들었어요?
 
280
윤 첨 지   말마라. 지금두 울구 있을께다.
 
281
세   진   좀 불러주세요.
 
282
윤 첨 지   안돼! 이번에 들켰단 너희들은 고사하구 내가 여길 내쫓기게 될거야.
 
283
세   진   나 때문에, 애맨 영감님두 야단을 맞이셨군요?
 
284
윤 첨 지   그걸 네가 알면, 뒀다 만나구 오늘은 그냥 가라.
 
285
세   진   여기까지 왔다 어떻게 그냥 가요?
 
286
윤 첨 지   그럼 네가 가서 불르든지 해라.
 
287
세   진   내가 어떻게요?
 
288
윤 첨 지   날더러 뚜쟁이라구까지 하셨단다. 모두들 한 패라구 생각하구 계시는데 너 못 불르는 걸 난 어떻게 불르겠냐? 오늘은 다 수굿이 그냥 가라. 오늘만 날이냐 어디?
 
289
세   진   뭘 타구 가라구 자꾸 가라구만 하세요?
 
290
윤 첨 지   (놀라며) 너 사공더러 기대리라구 안 그랬냐?
 
291
세   진   기대리는 게 뭐에요? 얨평으루 바루 가는 밴데.
 
292
윤 첨 지   갈 땐 어떻게 갈랴구 다 저녁때 여길 온단 말이냐?
 
293
세   진   못 가면 모래밭에서 자지요 뭐. 영감님! 누나한테, 나 왔다구 한마디만 해주세요. 다신 폐 안 끼칠 테니. 이번만 눈 꽉 감으시구 전해주세요. 네?
 
294
윤 첨 지   (거절을 못 하구 망설이다가) 이번만 만나구 다신 안 올 테냐?
 
295
세   진   네!
 
296
윤 첨 지   정말이지?
 
297
세   진   네! 나 때문에 누나가 야단을 맞었으니까 잘못했다구 사과해야 하지 않겠어요?
 
 
298
윤첨지, 주저하다가 분연(奮然)히 생각한 바가 있는 듯 층대를 올라간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판장(板墻) 너머로 손찟을 한다. 손을 입에 대는 것은 떠들지 말구 빨리 나오라는 신호. 이윽고 물 묻은 손을 행주치마에 훔치며, 진숙, 올라온다. 세진, 돌층대로 달려간다.
 
 
299
세   진   (동경에 찬 소래로) 누나!
 
300
진   숙   (반가움과 불안에 싸여) 어떻게 왔어요? (윤첨지를 보고) 아버지 나오시나 좀 봐주.
 
 
301
윤첨지, "잠깐 얘기하구 들와야 한다"하고 망을 보러 집으로 내려간다. 진숙과 세진, 나란히 층대를 내려온다.
 
 
302
세   진   누나! 오늘은 갈매기가 떼루 몰려 왔군요?
 
303
진   숙   (초조하여 집 쪽을 자꾸 돌아다보며) 달밤엔 저렇게 초저녁부터 사방에서 몰려들어요.
 
304
세   진   새두 달밤은 좋아하나 보지요?
 
305
진   숙   펄그물에 흘린 생선을 먹으러 오는 거에요.
 
 
306
間 [간]
 
 
307
세   진   누나, 아버지가 오셔서 뭐라구 하셨어요?
 
308
진   숙   날더러 누나라구 하지 마세요.
 
309
세   진   (의아한 듯 그 맑은 눈을 크게 뜨며) 웨요?
 
310
진   숙   우린 남매가 될 수 없어요.
 
311
세   진   어째서 못 돼요? 사랑만 있으면 되지 어째서 못 돼요?
 
312
진   숙   남들은 그렇게 보질 않는대요. 아까 아버지가 오셔서, 세진씨가 오거던 돌려보내달라구 애원하다시피 하구 가셨어요.
 
313
세   진   내가 조금만 일찍 왔었어두…….
 
314
진   숙   일찍 오셨드면 아버지하구 쌈을 하신단 말이예요?
 
315
세   진   그럼요.
 
316
진   숙   그게 무슨 소리예요?
 
317
세   진   (비탄인지 원망인지 분간키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난 참말이지 아버지한텐 털끝만치두 정이 없어요.
 
318
진   숙   그건 외진 생각이예요. 아까두 세진씨가 나가드니 밤새 안들 온다구 눈물이 글성글성하시든데요. 그런 어지신 아버님한테 정이 안 드시면 불효예요.
 
319
세   진   흥! 퍽두 어질겠지요? 그런 지극한 사랑 속에서 우리 누나가 웨 피지두 못 하구 죽었겠어요?
 
320
진   숙   (놀라며) 누나라니요? 누나가 없으시다면서?
 
321
세   진   있었는데 죽었어요.
 
322
진   숙   어쩌다요?
 
323
세   진   아버지가 생으루 죽이신 셈이지요.
 
324
진   숙   아버지가요?
 
325
세   진   네, 지금 살았으면 진숙이 누나보다 두 살 우이에요. 자기 육신은 이뻐두 이뻐뵈지 않는다지만, 정말이지 누난, 보면 볼수룩 아름다웠어요. (추억을 더듬으며 한마디 한마디 나즉이 이야기한다) 중학두, 전문과두 다 첫째루 졸업했어요. 문학을 지독히 사랑했지요. 늘 촛불키구 방 안에 혼자 있길 좋아했어요. 어떻게 책을 읽었는지 나중엔 눈이 짓물러서 수술까지 했었으니까요. 나두 누나한테서 첨으루 '미레-’, ' 베-토-벤’ 등의 예술가의 걸어간 길을 알게 됐구, ' 헬만 헷세’라는 고독한 시인의 글을 읽어보게두 됐었어요.
 
326
진   숙   그런 따님을 웨 아버지께서…….
 
327
세   진   말리는 연애를 했거던요. 아버진 친구의 아들루 그때 대학 의과를 졸업한 엄(嚴)이란 남자한테 시집을 보낼랴구 하셨지만, 누난 간판점을 하면서 그림공부를 하는 동무 오빠를 사랑했었어요. 도저히 그 이하구 결혼 못하게 될 줄 알자, 눈이 다리까지 퍽퍽 빳든 날 밤, 철원서 조굼 떨어진 어느 과수원 뒤에서 자살해버렸어요.
 
328
진   숙   에이, 저런! 어머니가 얼마나 애통하셨을까!
 
329
세   진   뭘요, 계몬데.
 
330
진   숙   그럼 친누나가 아니세요?
 
331
세   진   네. 누나 친어머닌 누날 낳구 곧 돌아가셨대요. 그래서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하구 재혼을 하셨지요. 난 그후부터 괜히 세상이 싫어졌어요. 누날 따러가구 싶은 생각이 자꾸 들지만 그렇다구 죽지두 못 했구 학교도 집어치구 어데로 떠나 버릴까 했지만 그러지두 못 하구 흐느적 흐느적 살아왔어요. 요전에 첨 진숙이 누날 보자 눈·코·귀·키 할 것 없이 똑같든지 난 하마트면 달려가서 '누나’하구 소리칠 뻔했었어요.
 
332
진   숙   누나 얼굴이 나하구 그렇게 닮었어요?
 
333
세   진   네. 지금두 진숙이 누날 이렇게 바라다보구 있으면 죽은 누나 얼굴이 그대루 떠올라오는 것 같애요.
 
334
진   숙   얼굴은 같지만 누난 그렇게 공불 많이 하셨다는데 난 이 섬 구석에서 아무것두 밴 게 없으니 세진씨 누나 될 자격이 없어요.
 
335
세   진   사랑에 지식이 무슨 관계가 있어요.
 
336
진   숙   (쓸쓸히) 그럴까요?
 
337
세   진   난 누나하구 이렇게 나란히 앉인 채 전설에 있는 형제암(兄弟巖)처럼 굳어버렸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말썽을 일으킬 리두 없지 않겠어요?
 
338
진   숙   오늘 집에 가시거든 아버지한테 우리들 사이를 자세히 얘기 해디리세요.
 
339
세   진   뭐라구요?
 
340
진   숙   의형제 맺게 해주시라구요. 세진 아버지께서 승낙하시면 우리 아버지두 반대하시진 않을 꺼에요. 그렇게 되면 서루들 맘대로 놀러갈 수 있게 되지 않겠어요? 이대루는 앞으로 또 만날 수두 없을 뿐 아니라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못 견디겠어요.
 
341
세   진   (들릴락말락한 나즉한 소래로) 그렇지만 벌써 늦었어요.
 
342
진   숙   늦긴 웨 늦어요? 지금부터두 잘 말씀 여쭤서 양해를 얻으면 돼요.
 
343
세   진   누난 참말루 날 동생같이 귀여할 뿐이예요?
 
344
진   숙   (애매하게) 그럼요.
 
345
세   진   그럼 웨 날 보구 '세진아’하시지 않구 자꾸 씨잘 넣요?
 
346
진   숙   닷다가 그게 무슨 소리예요?
 
347
세   진   누난 앞으루두 나한테 '해라’는 못 할꺼예요. 누나두 아까 날 보구 우린 도저히 남매가 될 수 없다구 하지 않었어요?
 
348
진   숙   (격한 감정의 북받침을 진정할랴고 애를 쓰며) 부모가 승낙 하시면 될 수 있어요. 양자두 삼는데요 뭐.
 
349
세   진   난 첨엔 죽은 누나한테서처럼 귀염받구만 싶었구 나두 그렇게 사모하구 왔었어요. 그러나 날이 갈수록 어쩐지 그 사랑 속에 한구팅이가 비인 듯한 생각이 들어요. 난 점점 누나라구 불르구 싶지가 않어졌어요.
 
350
진   숙   (당황하며) 안 돼요. 우린 형제처럼 사랑해야만 돼요.
 
351
세   진   구태여 형제처럼이라구 딱 제한을 질 필욘 없지 않어요? 사랑이란 해변에 댑싸리같이 저절루 자라는 거라구 언젠가 죽은 누나가 그런 쩍이 있었어요. 우리들 사랑이 상말루 연애든 우애든 난 그걸 따질 필요가 없을 줄 알아요.
 
 
352
이때 집에서 등대지기의 "진숙아, 진숙아" 불르는 소래. 윤첨지, 급히 석벽 앞에 나타나 허공을 향하여 외친다.
 
 
353
윤 첨 지   진숙아, 아버지가 부르신다.
 
 
354
진숙과 세진, 급히 몸을 바위틈에 숨긴다.
 
 
355
윤 첨 지   굴 웬만큼 땄거든 그만 올라오느라. 그놈의 굴두 하두 먹어서 인젠 보기만 해두 올챙이알같이 징글징글하드라. (집을 향하여) 굴 따는 모양입니다.
 
 
356
진숙, 바위틈에서 나와 등대로 올라갈랴구 한다.
 
 
357
세   진   (소매를 붙들구 안타까이) 잠깐만.
 
358
진   숙   안 돼요. 그만 가봐야 해요.
 
359
세   진   누난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난 이 모랫바닥에서 밤을 새야 할께 아니예요?
 
360
진   숙   이번 들키면 우린 다시 못 만나게 돼요. 내일두 같이 놀 생각을 해야지요.
 
 
361
세진, 뿌리치고 갈랴는 진숙의 머리에서 날래게 머리카락을 한 가닥 잡아 뺀다.
 
 
362
진   숙   (가느단 비명) 아야.
 
363
세   진   (침착히 자기 머리카락도 한 가닥 뽑아 주머니에서 준비했든 듯 하-얀 수건을 끄내 두 가닥을 싼 후) 이걸 실루 챙챙이 엮어서 남쪽을 향해 떼요. 동쪽으루 띠면 구숭숭한 선창으루 들어갈테구, 서쪽으루 띠면 청국눔들 시커먼 장굿배에 걸릴테니까. 그렇지만 남쪽은 물이 맑구, 모래밭이나 미역 잎에 가라앉게 돼요.
 
364
진   숙   그게 무슨 미신이예요?
 
365
세   진   머리카락은 썩는 게 아니니까, 우리 사랑두 언제까지든지 썩지 않을 꺼에요.
 
 
366
진숙, 흘러가는 수건을 한참 바라보드니,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동요에 몹시 고뇌한다.
 
 
367
진   숙   (돌연 소래를 높여) 아, 난 어떡허면 좋아?
 
368
세   진   (진숙의 가슴에 얼골을 파묻고) 누나!
 
369
진   숙   (격정에 떨리는 팔을 세진의 목 뒤로 돌려 얼골을 세차게 안으며) 아, 난 어떡허면 좋아?
 
 
370
어느듯 등대 앞엔 등댓불을 키러 올라오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노발충천(怒髮沖天)한 등대지기와 그 앞을 막아서서 애원하는 윤첨지가 서 있다. 진숙, 부(父)와 시선이 마주치자 망연자실하여 조용히 세진의 목에서 팔을 떨어트린다.
 
 
371
등대지기   이리 올라오느라.
 
372
윤 첨 지   쥔 어른, 참으십쇼. 쥔 어른! 참으십쇼.
 
373
등대지기   (윤첨지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올라오느라. ……썩 못 올라오겠냐?
 
374
진   숙   (공포에 질린 소리로)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375
등대지기   좌우간 올라오느라.
 
376
진   숙   아버지.
 
377
윤 첨 지   (이쪽 저쪽으로 등대지기 앞을 가루막아스며) 쥔 어른, 참으십쇼.
 
378
등대지기   저리 비키지 못해?
 
 
379
돌연 매달리는 윤첨지를 옆으로 떠다밀고 딸에게로 뛰여내려가 머리채를 잡아 쥐고 끌고 올라간다. 세진은 벌벌 떨 뿐, 무슨 말을 할랴구 하나 혀가 안 돌아가는 모양.
 
 
380
진   숙   (끌려가며) 아버지,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다신 안 그러겠어요.
 
381
등대지기   (격노에 부들부들 떨리는 소래로) 이 앙큼스런 년, 그게 손아래 아이를 친동생같이 사랑하는 짓이냐?
 
382
진   숙   아버지……. 아버지…….
 
383
등대지기   애비 눈을 그만큼 속였으면 그만이지 한 시간이 못돼서 또 속여.
 
 
384
등대 앞에서 깎아진 바위로 굴러떨어진 윤첨지는 안면에 철철 흐르는 피를 손으로 눌른 채 분노와 증오에 찬 소리로 쏘아 부친다.
 
 
385
윤 첨 지   쥔 어른은 딸자식 눈 속인 쩍 없소?
 
386
등대지기   당장 내 눈 앞에서 나가지 못해? 그래두 입이 뚫려서 무슨 말이야?
 
387
윤 첨 지   쥔 어른은 딸자식 속인 쩍 없냐구 했소. 자긴 학교 새로 진다구 기부금 몬 걸 천여 원씩 횡령해먹구, 감옥소 콩밥을 이 년 동안이나 먹은 이가 뭘 잘했다구 자식을 때리는거요? 청루루 딸 팔아먹은 나보다두 쥔 어른은 진숙이한테 큰 소리 못 해요.
 
 
388
등대지기, 별안간 전신이 탁 풀린 듯 쥐었든 머리채를 스루루 놓고, 쓰러질 듯한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서 있을 뿐.
 
 
389
진   숙   (도리어 부(父)에게 매달리며) 아버지, 그게 정말이에요? 거짓말이겠죠?
 
390
등대지기   (고개를 툭 떨어뜨리고 침묵)
 
391
진   숙   윤첨지, 그게 정말이야?
 
392
윤 첨 지   못 믿겠거든 경찰서에 가서 물어보렴. 서울가서 그 학교 종 치는 늙은이한테 물어봐두 알 테니. 기름장수해서 몬 돈을 기부했던 늙은 과부가 행길에서 뺌을 다쳤어.
 
 
393
등대지기, 휘뚝휘뚝 돌층대로 올라간다. 문득 생각난 듯 기계적으로 시계를 보더니 등대 안으로 들어간다.
 
 
394
間 [간]
 
 
395
주위는 어느 틈에 모색(暮色)에 싸였고 바다의 여광(餘光)이 희미할 뿐 정적. 이윽고 등대에 불이 들어와 해면(海面)에 사광(射光)을 던진다. 등대지기, 다시금 나와 집으로 내려간다.
 
 
396
윤 첨 지   (등대지기의 뒷모양을 바라보구 섰더니 자기도 의식지 않고 내뱉은 말이 후회가 나 눈물 콧물을 훔치며 세진을 보고) 네가 가서 잘못했다구 빌어라. 그리구 윤첨지가 용서해 달라구 그러드라구 여쭈구.
 
397
진   숙   (물을 가르는 듯이) 빌 필요 없어요.
 
 
398
세진은 경악과 공포 속에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뿐 진숙의 흐느껴 우는 울음 소래만 물새 잠든 먼-섬으로 흘러간다.
【원문】해연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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