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임진 전란 후 여러 장군의 공적을 논함.
26
내가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평양에 이르러서
37
而世無有明知其實狀而能言之者 (이세무유명지기실상이능언지자)
38
그 후 사명(使命)을 받들고 남번(南藩)에 나가서
42
세상에는 그 실상을 분명하게 알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46
그러나 이따금 사대부들의 논의를 들어 보면
55
자색(紫色)이 주색(朱色)을 어지럽히는 격이 되어
56
시비가 천양지차로 달라지지 않기가 어려울 것이다.
57
上甞論水陸諸將之功曰 (상상론수륙제장지공왈)
58
상(上)이 일찍이 수륙(水陸)제장의 공을 논하여 이르기를,
63
“이순신과 원균이 해상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것과
65
의당 수공(首功)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으니,
74
*권빙군(權聘君)이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75
“세상에서는 내가 행주에서 한 일을 공으로 삼는데,
77
* 권빙군(權聘君) - 장인어른. 즉 항복의 장인 권률 장군을 말한다.
82
그러나 나는 항오(行伍) 사이로부터 일어나서
88
그 중에 전라도(全羅道) *웅치(熊峙)에서의 전공(戰功)이 가장 컸고
90
* 웅치(熊峙) - 남원군(南原郡) 주촌면(朱村面) 웅치리(熊峙里)지역. 곰재 또는 웅치(熊峙)
93
그런데 나는 끝내 행주의 전공으로 드러났으니,
115
그런데도 능히 죽을힘을 다하여 혈전(血戰)을 벌여서
117
열 배나 많은 사나운 적군을 막아 내어
133
사람들이 대부분 도망쳐 숨어 버렸으므로,
136
조정에서 그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140
그러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없는 깜깜한 밤에
141
자기들끼리 서로 격살(擊殺)한 것과 같았으므로,
166
이것이 공을 세우기가 쉬웠던 이유이다.
170
都城士民之在江華者 (도성사민지재강화자)
174
此其功之所以易顯也云 (차기공지소이역현야운)
176
게다가 마침 *천병(天兵)이 나와서 주둔하고
177
우리나라 제로(諸路)의 근왕병(勤王兵)들이
178
바둑알처럼 기전(畿甸)에 포치(布置)되었을 때,
179
강화(江華)로 피란 가 있던 도성(都城)의 사민(士民)들이
180
우리의 승전(勝戰)을 학수고대하던 터에
182
마침 다른 여러 진영(陣營)보다 먼저 있었으니,
183
이것이 바로 공이 쉽게 드러날 수 있었던 까닭이다.”라고 하였으니,
188
固不敢與李舜臣抗衡 (고불감여리순신항형)
190
다만 남을 의지해서 일을 성취시킨 자이니,
191
진실로 감히 이순신(李舜臣)과는 공을 겨룰 수가 없다.
202
그런데 만일 그 심적(心迹)을 추구해 본다면
203
또한 반드시 그 공을 나누어 가질 자가 있으나,
209
見人必問諸將用兵如何 (견인필문제장용병여하)
213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제장(諸將)들의 용병(用兵)이 어떠했는가를 물었는데,
215
꽤나 상세하게 그 사실을 말해 주었다.
216
* 해진(海陣) - 수군의 진이 있는 곳
229
노량(露梁)의 입구에 전함(戰艦)들을 죽 배열시켜
231
성(城)을 수리하여 스스로 지키려 하였고,
233
한산(閑山)의 어귀는 엿보지 않으려고 하여
234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241
그런데 당시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과
242
광양 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潭)이
243
이순신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일어나게 하고
246
비로소 이순신이 군대를 일으켰다고 한다.
250
論其功則舜臣實是首功 (론기공칙순신실시수공)
256
그 공을 논하자면 이순신이 실로 수공(首功)에 해당하지만,
257
그 심적으로 말하자면 이순신이 이 두 사람에게
260
世人獨稱延安李廷馣 (세인독칭연안리정암)
264
세상 사람들이 유독 연안(延安)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이정암(李廷馣)만 일컫고
265
진주(晋州)에서 순절한 김시민(金時敏)은 언급하지 않으니,
267
* 이정암(李廷馣)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황해도에서 의병을 모아 연안성을 지켰다.
268
* 김시민(金時敏) -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275
김시민과 똑같이 놓고 논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284
흑전장정(黑田長政)으로서 그 군대는 만 명도 채 되지 않았고,
288
또한 이정암의 군세(軍勢)와 서로 맞먹을 만한 이가 많았다.
302
이정암의 전공(戰功)을 꾸며 작성하기가 쉬웠고,
320
소서행장(小西行長)으로 흑전장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327
而時敏卒能嬰城固守 (이시민졸능영성고수)
332
진영(陣營)을 통틀어 합세(合勢)함으로써
336
비유하자면 마치 산(山)을 들어서 새알[卵]을 누르는 것과 같은 실정이었다.
337
그런데도 김시민은 끝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켜서
340
이정암의 처지에 비하면 월등히 어려웠다.
351
그것을 보아서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고,
357
世以趙憲高敬命之死爲節義 (세이조헌고경명지사위절의)
360
세상에서 조헌(趙憲)과 고경명(高敬命)의 죽음을 절의(節義)라고 하는데,
361
만일 왕사(王事)에 죽었다고 한다면 괜찮겠지만,
362
절의라고까지 칭하는 것은 안 될 말이다.
373
왕실(王室)을 보존하는 데에 뜻을 두었으니,
385
제군(諸軍)이 어둠으로 인해 패하여 무너져서
397
그들이 패한 것을 보고도 달아나지 않고
400
만일 절의라고 칭한다면 그것은 안 될 말이다.
415
급히 군대를 이끌고 그곳으로 달려 들어갔으니,
422
군중(軍中)에서 김천일이 사인(士人)이라는 이유로
423
그에게 군대를 부장(副將)에게 소속시키고
424
성을 급히 빠져나가서 자신을 보전하도록 권하였다.
431
끝내 촉석루(矗石樓) 일면(一面)을 굳게 지키다가
432
적병(賊兵)들이 성을 타고 올라옴에 이르러서도
434
조용하게 북쪽을 향하여 재배(再拜)하고 죽었다.
442
다만 김천일의 참모인(參謀人)이었을 뿐이니,
444
설령 죽지 않더라도 또한 괜찮은 처지였다.
450
그런데 김천일이 그로 하여금 성을 빠져나가서
452
그는 말하기를, “이미 일을 같이 하였으니,
463
범범하게 이상의 네 사람을 똑같은 등급으로 치고 있으니,
466
只有黃山之敗慶州之敗二者而已 (지유황산지패경주지패이자이이)
468
그리고 박진(朴晉) 같은 사람은 전후로 종군(從軍)하는 동안에
469
황산(黃山)과 경주(慶州) 두 곳에서의 패배만 있었을 뿐이고
470
적봉(賊鋒)을 꺾거나 적진(賊陣)을 함락시킨 일은 별로 없다.
476
감히 그와 더불어 고하(高下)를 겨룰 자가 없게 되었다.
488
그것은 대체로 박진이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있을 적에
489
정면으로 적로(賊路)의 문호에 위치했는데도
496
혈전(血戰)을 벌이다가 퇴각하였으므로,
498
또한 제장들에게 충분히 보여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512
온 도내(道內)의 크고 작은 장관(將官)들이
513
머리를 부둥키고 바람에 쏠리듯이 무너져서
514
감히 적에게 대항하도록 군대를 강력히 지휘하는 소리를 한 마디도 내는 자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525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황(戰況)을 치보(馳報)하고
527
當時朝廷賴以探知者 (당시조정뢰이탐지자)
529
若晉死則嶺南聲息幾乎絶矣 (약진사칙령남성식기호절의)
531
당시에 조정에서 적정(賊情)을 탐지할 수 있는 수단은
532
오직 박진의 첩보(牒報)가 있을 뿐이었으니,
533
만일 박진이 죽었더라면 영남(嶺南)의 소식은 거의 끊어졌을 것이다.
534
그래서 상 또한 박진을 가상히 여기며 감탄하여 이르기를,
542
晉無乃不量此勢而輕進耶 (진무내불량차세이경진야)
549
의당 형편을 보아서 진퇴(進退)해야 하는데,
550
박진이 혹 이런 형편을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진격하는 것이 아닌가?” 하였으니,
561
박진은 끝내 도내(道內)의 장사(將士)들을 수습하여
563
거의 끊어져 가는 온 도내의 기맥(氣脈)을
565
사람마다 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584
적수(賊首) 7백여 급(級)을 베고 나니,
586
한 도(道)의 수창자(首唱者)가 되었다.
592
突衝賊陣於鳴梁之口 (돌충적진어명량지구)
594
摧却賊船五百餘艘於碧波亭下 (최각적선오백여소어벽파정하)
595
使賊不敢復窺全羅右道 (사적불감부규전라우도)
602
조수(潮水)를 이용하여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603
명량(鳴梁)의 어귀에서 적진(賊陣)에 충돌한 다음
605
끝내 적선(賊船) 5백여 척을 벽파정(碧波亭) 밑에서 격파하여 물리쳤으니,
606
적들로 하여금 감히 다시 전라 우도(全羅右道)를 엿보아서
607
곧장 충청도(忠淸道)로 진격하지 못하게 한 것은
614
당시에 안위의 승첩(勝捷)이 아니었다면
615
적들이 한산(閑山)에서 승리한 기세를 타고
618
이를 물리쳐 금할 사람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624
그래서 변란이 일어난 이후 10년 동안에
628
권응수의 일에 비하면 또 어찌 만 배만 더 장쾌할 뿐이겠는가.
629
李時言金應瑞高彦伯李光岳 (리시언금응서고언백리광악)
635
이시언(李時言), 김응서(金應瑞), 고언백(高彦伯), 이광악(李光岳)은
636
크고 작은 싸움을 백여 차례나 치르는 동안에
641
朴名賢韓明璉洪季男具滉李楠等 (박명현한명련홍계남구황리남등)
645
그리고 박명현(朴名賢), 한명련(韓明璉), 홍계남(洪季男), 구황(具滉), 이남(李楠) 등은
648
감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가 없었다.
652
皆未有大段樹立可指而名者 (개미유대단수립가지이명자)
653
豈非所遭之機有不同耶歟 (기비소조지기유불동야여)
654
진영에 임하여 갑옷을 착용함에 이르러서는
657
모두 특별히 지명(指名)할만한 큰 공훈을 세운 것이 없으니,
658
이것이 어찌 조우(遭遇)의 기회가 사람마다 서로 다름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661
咸以爲終必爲賊所躡 (함이위종필위적소섭)
662
至於窮蹙而同歸於糜爛也 (지어궁축이동귀어미란야)
663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순행하던 때를 당해서는
664
사람들이 서로(西路)를 죽을 땅으로 보아서
666
심지어는 극도로 궁지에 빠져 모두가 아주 피폐한 지경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여겼다.
668
卛皆翺翔躑躅於京畿黃海之間 (솔개고상척촉어경기황해지간)
670
그래서 여러 장수들이 서로로 가려고 하지 않고
671
모두 경기(京畿)와 황해(黃海)의 사이에서 그럭저럭 배회하다가
672
형편을 보아서 전진하거나 후퇴하려고 생각하였다.
680
각기 스스로 도망하여 목숨을 보전하였다.
684
그런데 오직 이빈(李薲)만은 패배한 곳으로부터
693
사람들은 모두 일을 어찌할 수가 없다 하여
694
다 대동강(大同江)을 건너서 남쪽으로 내려갔고,
696
또한 그들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701
그러나 이빈은 또 정주(定州)로 물러가서
712
날로 여러 장수들을 근왕(勤王)하도록 불렀으나,
728
그를 말에 싣고 함께 돌아간 자도 있었고,
733
다른 사람을 대하여 냉소(冷笑)하는 자도 있었으니,
734
인심이 여기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던 것이다.
741
그러나 오직 전라 병사(全羅兵使) 최원(崔遠)만은
742
자기 소속 부대를 인솔하고 서쪽으로 올라가는데,
745
자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50여 인을 참수(斬首)하게 하여
755
故吾常以爲亂後諸將 (고오상이위란후제장)
765
그 마음은 또한 충분히 가상하기 때문에
766
나는 항상 변란이 일어난 이후의 여러 장수들 중에는
768
신하된 의리를 잃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