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난중일기 ◈
◇ 갑오년 (1594년) ◇
카탈로그   목차 (총 : 7권)     이전 3권 다음
목   차
[숨기기]
 

1. 갑오년 1월 (1594년 1월)

2
1월 초1일 (경진)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양력 2월 20일]
3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한 살을 더하게 되니, 난리 중에서도 다행 한 일이다.
 
4
저녁나절에 군사훈련과 전쟁준비하는 일로 본영으로 돌아 오는데, 비가 그치지 않았다.
 
5
사과(司果: 五衛의 종6품 군사직 벼슬) 신(愼)씨에게 문안하였다.
 
6
1월 2일 (신사) 비는 그쳤으나 흐렸다. [양력 2월 21일]
7
나라제삿날(明宗 仁順王后 沈氏의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8
사과 신을 청하여 같이 이야기했다.
 
9
첨지 배경남(裵慶男)도 왔다.
 
10
1월 3일 (임오) 맑다. [양력 2월 22일]
11
동헌에 나가 공물를 보았다.
 
12
해질 무렵에 관사로 돌아와서 조카들과 이야기했다.
 
13
1월 4일 (계미) 맑다. [양력 2월 23일]
14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써 보냈다.
 
15
저녁에 사과 신 ∙ 첨지 배와 같이 이야기를 했다.
 
16
남홍점(南鴻漸)이 본영에 이르렀기에 그 가족이 달아나 숨어지냈는지를 물었다.
 
17
1월 5일 (갑신) 비가 내렸다. [양력 2월 24일]
18
사과 신이 와서 이야기했다.
 
19
1월 6일 (을유) 비왔다. [양력 2월 25일]
20
동헌에 나가 남평(南平)의 도병방(都兵房)을 처형했다.
 
21
저녁 내내 공무를 보며 공문을 써서 내려 주었다.
 
22
1월 7일 (병술) 비왔다. [양력 2월 26일]
23
동헌에 앉아 공무를 보고, 공문을 적어 보냈다.
 
24
저녁에 남의길(南宜吉)이 들어와서 마주 앉아 이야기했다.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25
1월 8일 (정해) 맑다. [양력 2월 27일]
26
동헌 방에 앉아서 배첨지 ∙ 남의길(南宜吉)과 종일 이야기 했다.
 
27
저녁자절에 공무를 보았으며, 남원(南原)의 도병방(都兵房)을 처형했다.
 
28
1월 9일 (무자) 맑다. [양력 2월 28일]
29
아침에 남의길(南宜吉)과 이야기했다.
 
30
1월 10일 (기축) 맑다. [양력 3월 1일]
31
아침에 남의길(南宜吉)을 맞이하여 이야기하다가 피난하던 때의 일과 그 때 길바닥에서 고생하던 상황을 죄다 들으니,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32
1월 11일 (경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3월 2일]
33
아침에 어머니를 볼려고 배를 타고 바람 따라 바로 곰내(古音川; 熊川)에 대었다. 남의길(南宜吉) ∙ 윤사행(尹士行) ∙ 조카 분(芬)이 함께 가서, 어머니 앞에 가서 뵈니 어머니는 아직 주무시며 일어 나지 않으셨다. 화가 나서 소리내는 바람에 놀라 깨어 일어나셨다. 기력은 약하고 숨이 금방 넘어갈듯 깔딱거려, 죽을 때가 가까와진 것 같아 감추는 눈물이 절로 내렸다. 말씀하시는데는 착오가 없으셨다.
 
34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이 날 저녁에 손수약(孫守約)의 아내가 죽었다는 부음(訃音)을 들었다.
 
35
1월 12일 (신묘) 맑다 [양력 3월 3일]
36
아침식사를 한 뒤에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37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
 
38
고 두번 세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떠나는 뜻이 싫어 탄식하지 않으셨다.
 
39
선창(船倉)에 돌아오니, 몸이 좀 불편한 것 같다.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40
1월 13일 (임진)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4일]
41
몸이 너무 불편하여 자리에 누워서 땀을 내었다.
 
42
종 팽수(彭壽) ∙ 평세(平世) 등이 와서 봤다.
 
43
1월 14일 (계사) 흐리며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5일]
44
아침에 조카 뇌의 편지를 보니, 아산의 산소에 설날 제사를 지낼 적에, 군호로 불러 모은 무리가 무려 이백 여 명이 산을 에워싸고 음식을 달라고 오르내렸다고 하니, 놀랍고도 놀랍다.
 
45
저녁나절에 동헌에 나가 장계를 봉함하고, 또 승장 의능에게 천민의 신분을 면해준다는 공문을 봉하여 올렸다.
 
46
1월 15일 (갑오) 맑다. [양력 3월 6일]
47
이른 아침에 남의길(南宜吉)과 조카들과 함께 있다가 동헌으로 나갔다. 남의길은 영광으로 가고자 했다.
 
48
종 진(辰)을 찾아내는 공문을 만들었다.
 
49
동궁(광해군)의 명령이 있었는데,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적을 토벌하라는 것이었다.
 
50
1월 16일 (을미) 맑다. [양력 3월7일]
51
아침에 남의길(南宜吉)을 불러 와서 잔치를 벌려 작별했다. 나도 몹시 취했다.
 
52
저녁나절에 동헌에 나갔다. 황득중(黃得中)이 들어왔다. 소문에, "문학 유몽인(柳夢寅)이 암행어사로 흥양현에 들어왔다" 고 한다. 잡문서가 그의 손에 들어갔다고 했다.
 
53
저물 무렵 방답과 배 첨지가 와서 이야기했다.
 
54
1월 17일 (병신) 새벽에 눈이 오고 저녁나절에 비가 왔다. [양력 3월 8일]
55
이른 아침에 배에 올라 아우 여필과 여러 조카와 아들 등을 배웅 했다. 다만 조카 분(芬)과 아들 울(蔚)을 배로 데리고 떠났다.
 
56
오늘 장계를 띄워 보냈다.
 
57
오후 네 시쯤에 와두(노량 땅)에 이르니, 역풍에 물이 빠져 배를 운행할 수가 없었다. 닻을 내리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여섯 시쯤에 다시 닻을 올려 노량에 이르렀다.
 
58
여도만호(김인영) ∙ 순천의 이함(李 ) ∙ 우후(이몽구)도 와서 잤다.
 
59
1월 18일 (정유) 맑다. [양력 3월 9일]
60
새벽에 떠날 때는 역풍(샛바람)이 세게 일었다. 창신도(남해군 창선도)에 이르니, 바람이 순하게(하늬바람) 불어, 돛을 올려 사량에 이르니까, 바람이 도로 거슬러(샛바람) 세게 불었다.
 
61
다만, 사량만호 이여염(李汝恬)과 수사의 군관 전윤(田允)이 와서 봤다.
 
62
전(田允)이 말하기를 `수군을 거창으로 붙잡아 왔다고 하며, 원수(권율)가 중간에서 해치려 한다고 했다. 우습다. 옛부터 공을 시기하는 것이 이같은 것이니, 무엇을 한탄하랴!
 
63
그대로 잤다.
 
64
1월 19일 (무술)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이고 바람이 세게 불더니 해질 무렵에는 더 거세어졌다. [양력 3월 10일]
65
아침에 출항하여 당포 바깥 바다에 이르러, 바람을 따라 돛을 반 쯤만 올려도 순식간에 한산도에 도착하였다.
 
66
활터 정자에 올라 앉아 여러 장수와 더불어 이야기했다.
 
67
저녁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왔다. 소비포권관 이영남(李英男)에게서 영남의 여러 배의 사부 및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겠다는 말을 들으니,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68
수사 원균 ∙ 공연수(孔連水) ∙ 이극성(李克誠)이 곁눈질해뒀던 여자를 몽땅 몰래 관계했다고 한다.
 
69
1월 20일 (기해)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11일]
70
추위가 살를 도려내는 듯하여 여러 배에서 옷 없는 사람들이 거북이 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미 듣지를 못하겠다. 군량미조차 오지를 않으니, 더욱 민망스럽다.
 
71
낙안군수 ∙ 우수 사우후가 와서 보다.
 
72
저녁나절에 소비포권관 ∙ 웅천현감 ∙ 진해현감도 왔다.
 
73
진해는 명령을 거부하여 머뭇거리며 오지 않았으므로 죄주려고 했다 그래서 만나지 않았다.
 
74
바람기가 자는 듯했으나 순천이 들어 올 것이 염려되었다.
 
75
병들어 죽은 자들을 거두어 장사지낼 차사원으로 녹도만호를 정하여 보냈다.
 
76
1월 21일 (경자) 맑다. [양력 3월12일]
77
아침에 본영의 격군 칠백마흔두 명에게 술을 먹였다.
 
78
광양현감(어영담)이 들어왔다.
 
79
저녁에 녹도만호(송여종)가 와서 보고하는데,
 
80
"병들어 죽은 시체가 이백열네 명을 거두어서 묻었다"
 
81
고 한다.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두 명이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진영에서 와서 여러가지 적정을 상세히 말하긴 했으나, 믿을 수가 없다.
 
82
1월 22일 (신축) 맑다. [양력 3월 13일]
83
날씨가 따뜻하고 바람도 없다.
 
84
활터 정자에 올라 앉아 진해현감으로 하여금 교서에 숙배례를 행하게 했다. 활을 종일 쏘았다.
 
85
녹도만호가 병들어 죽은 시체 이백열일곱 명을 거두어 묻었다고 했다.
 
86
1월 23일 (임인) 맑다. [양력 3월 14일]
87
낙안군수가 아뢰고 나갔다.
 
88
흥양의 전선 두 척이 들어왔다.
 
89
최천보(崔天寶) ∙ 류황(柳滉) ∙ 류충신(柳忠信) ∙ 정량(丁良) 등이 들어 왔다.
 
90
저녁나절에 순천부사가 들어 왔다.
 
91
1월 24일 (계묘) 맑고 따뜻하다. [양력 3월 15일]
92
아침에 산역(山役)하는 일로 자귀장이(耳匠) 마흔한 명을 송덕일 (宋得馹)이 거느리고 갔다.
 
93
영남우수사 원균(元均)이 군관을 보내 어 보고하기를,
 
94
"경상좌도에 있는 왜적 삼백 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95
고 한다. 정말 기쁜 일이다.
 
96
평의지(대마도주 종의지)가 지금 웅천에 있다고 하는데, 밝혀지지는 않았다.
 
97
류황(柳滉)을 불러서 암행어사가 붙잡아 간 것을 물었더니, 문서가 멋대로 꾸며졌다고 하였다. 놀랍다.
 
98
또 격군의 일을 들으니, 고을 아전들의 간악한 짓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99
전령을 내려 모집한 의병 백마흔네 명을 붙잡아 오라고 하고, 또 현감에게 독촉하여 전령을 보내게 했다.
 
100
1월 25일 (갑진)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였다. [양력 3월 16일]
101
송두남(宋斗男) ∙ 이상록(李尙祿) 등이 새로 만든 배를 돌아오게 하려고 사부와 격군 백서른두 명을 거느리고 갔다.
 
102
아침에 우수사 우후(이정충)가 와서 여기서 같이 아침밥을 먹고서 저녁나절까지 활을 쏘았다.
 
103
우수사 우후가 여도만호(김인영)와 활쏘기 시합을 했는데 여도만호가 일곱 푼을 이겼다. 나는 활을 열 순을 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스무 순을 쏘았다.
 
104
저녁에 종 허산(許山)이 술병을 훔치다가 붙잡혔기에 곤장을 쳤다.
 
105
1월 26일 (을사) 맑다. [양력 3월 17일]
106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활 열 순을 쏘았다.
 
107
순천부사(권준)가 기일을 어긴 죄를 논했다.
 
108
오후에 사로잡혔다가 도망해온 진주 여자 한 명, 고성 여자 한 명, 서울 사람 두 명을 데려 왔다. 서울 사람은 정창연(鄭昌衍)과 김명원(金命元)의 종이라고 했다.
 
109
또 왜놈 하나가 스스로 와서 항복하였다고 와서 보고했다.
 
110
1월 27일 (병오) 맑다. [양력 3월 18일]
111
새벽에 배 만들 목재를 끌어 올 일로 우후(이몽구)가 나갔다.
 
112
새벽에 변유헌과 이경복이 들어왔다고 보고했다.
 
113
아침에 충청수사의 답장이 왔다.
 
114
어머니 편지와 아우 여필의 편지가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 고 했다. 다행이다.
 
115
다만, 동문 밖 해운대(여수시 동북쪽에 있음) 옆에 횃불 든 강도가 들었고 미평(未坪)에 횃불 든 강도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놀랍고 놀랄 일이다.
 
116
저녁나절에 미조항첨사 ∙ 순천부사가 같이 왔다.
 
117
솟장과 그 밖의 공문을 써 보냈다.
 
118
스스로 항복해온 왜놈을 잡아 왔기에 문초했다.
 
119
수사 원균(元均)의 군관 양밀이 제주 판관의 편지와 마장 ∙ 해산물 ∙ 귤 ∙ 유자를 가지고 왔다. 즉시 어머니께 보냈다.
 
120
저녁에 녹도의 복병한 곳에 왜적 다섯 명이 마구 함부로 다니면 서 포를 쏠 적에 한 놈을 쏘아 목을 베고 나머지는 화살을 맞고는 도망을 가버렸다.
 
121
저물무렵에 소비포가 왔다.
 
122
우후의 배가 재목을 싣고 왔다.
 
123
1월 28일 (정미) 맑다. [양력 3월 19일]
124
아침에 우후가 와서 봤다.
 
125
종사관에게 낱낱이 공문을 조회하여 써서 강진 영리에게 주어 보냈다.
 
126
저녁나절에 원식이 서울로 올라 간다고 왔기에 술을 먹여서 보냈다.
 
127
아침에 경상우후(이의득)가 보고하기를,
 
128
"명나라 제독 유정이 군사를 돌려 이달 25 ∙ 26 일 사이에 올라간다"
 
129
고 하며, 또,
 
130
"위무사(장병을 위로하러 파견 된 관리) 홍문교리 권협이 도내를 순시한 뒤에 수군영으로 온다"
 
131
고 하며, 또,
 
132
"화적 이산겸(李山謙) 등을 잡아다 가두고, 아산 ∙ 온양 등지에서 함부로 다니는 도적떼 아흔 여 명을 잡아서 목을 베었다"
 
133
고 했다. 또,
 
134
"익호장(김덕령) 근일 중에 들어 올 것이다"
 
135
고 했다. 저물무렵에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내려 쓸쓸했다. 전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136
1월 29일 (무신) 비가 종일 오고 밤새도록 왔다. [양력 3월 20]
137
새벽에 각 배들이 아무 탈 없다고 한다. 몸이 불편하여 저녁에 누워서 신음했다.
 
138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가 거세어 배를 안정하게 매어 둘 수가 없으니, 마음이 몹시도 괴롭다.
 
139
미조항첨사(김승룡)가 배를 꾸밀 일로 돌아갔다.
 
140
1월 30일 (기유)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21일]
141
저녁나절에는 개이고 바람도 조금 잠잠했다.
 
142
순천부사 및 우수사 우후 ∙ 강진현감(류해)이 왔다.
 
143
미조항첨사가 와서 아뢰고 돌아 갔다. 그래서 평산포의 도망군 세 명을 잡아와서 그 편에 딸려 보냈다.
 
144
나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땀을 흘렸다. 군관과 여러 장수들은 활을 쏘았다.
 
 

2. 갑오년 2월 (1594년 2월)

146
2월 초1일 (경술) 맑다. [양력 3월 22일]
147
느지막이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써 보냈다.
 
148
청주의 겸사복 이상(李祥)이 임금의 분부(宥旨)를 가지고 왔다. 그 내용에 경상감사 한효순(韓孝純)의 장계에
 
149
"좌도의 적들이 모여서 거제로 들어가서 앞으로 전라 땅으로 침범하려 하니, 경은 삼도의 수군을 합하여 적을 섬멸하라"
 
150
는 것이었다.
 
151
오후에 우수사위 우후(이정충)을 불러 활을 쏘았다.
 
152
초저녁에 사도첨사(김완)가 전선 세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153
이경복(李景福) ∙ 노윤발(盧潤發) ∙ 윤백년(尹百年) 등이 도망군을 싣고 뭍으로 옮겨가는 배 여덟 척을 붙잡아 왔다.
 
154
저녁에 가랑비가 내리더니 얼마 안가 그쳤다.
 
155
2월 초2일 (신해) 맑다. [양력 3월 23일]
156
아침에 도망군을 실어 내던 사람들의 죄를 처벌했다.
 
157
사도첨사가 와서 전하기를 낙안이 파면됐다고 했다.
 
158
느지막이 활터 정자로 올라갔다.
 
159
동궁에게 올린 달본(신본)의 회답이 내려왔다.
 
160
각 관포에 공문을 써 보냈다.
 
161
활 열 순을 쏘았다.
 
162
바람이 잔잔하지 못했다.
 
163
사도첨사가 기한에 미치지 않았으므로 허물을 따졌다.
 
164
2월 초3일 (임자) 맑다. [양력 3월 24일]
165
새벽꿈에 눈 하나가 먼 말을 보았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166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에 올라서 활을 쏘았다.
 
167
광풍이 세게 일었다.
 
168
우조방장(어영담)이 왔는데, 역적들의 소식을 들으니 걱정되며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169
우우후가 빚진 물건을 여러 장수에게 보냈다.
 
170
원식 ∙ 원전이 와서 상경한다고 보고했다.
 
171
면천공문 한 장을, 원식이 남해에게 쇠붙이를 바치고서, 받아 갔다.
 
172
날이 저물어 막사로 내려왔다.
 
173
2월 4일 (계축)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25일]
174
아침밥을 먹은 뒤에 순천부사 ∙ 우조방장을 불러 와서 이야기했다.
 
175
저녁나절에 본영 전선 ∙ 거북함이 들어왔다.
 
176
조카 봉(菶)과 이설(李渫) ∙ 이언량(李彦良) ∙ 이상록(李尙祿) 등이 강돌천(姜乭千)을 데리고 왔다.
 
177
동궁의 달본을 가지고 내려 왔다. 우찬성 정탁(鄭琢)의 편지도 왔다. 각 관포에 공문을 써 보냈다.
 
178
순천에서 와서 보고하기를, 무군사(撫軍司)의 공문에 따른 순찰사의 공문에는 진중에서 시험을 보게하는 장달을 올린 것이 몹시 나쁘니까 그 허물을 캐물어야 한다고 했다. 참으로 우습다.
 
179
조카 봉(菶)이 오는 편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 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도 다행이다.
 
180
2월 초5일 (갑인) 맑다. [양력 3월 26일]
181
꿈에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첩첩인 산마루로 올라가니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동서로 뻗쳐 있고, 산마루 위에는 평평한 곳이 있기로 거기에 자리잡으려다가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으니 우스웠다.
 
182
아침에 군기시에서 받아온 흑각궁 백 장을 낱낱이 헤아려 서명하고 화피(활 만드는데 쓰는 벚나무 껍질) 여든아홉 장도 셈하여 서명했다.
 
183
발포만호(황정록) ∙ 우수사의 우후가 와서 보고, 같이 식사했다.
 
184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순창과 광주 색리들의 죄를 벌주었다.
 
185
우조방장 및 우우후 ∙ 여도만호 등은 활을 쏘았다.
 
186
원수(권율)의 회답 공문이 왔는데, 유격 심유경이 벌써 화친을 결 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사한 꾀와 교묘한 계책을 헤아릴 수 없다. 전에도 놈들의 꾀에 빠졌었는데 또 이처럼 빠지려드니 한탄스럽다.
 
187
저녁에 날씨가 찌는 것 같아 마치 초여름 같다.
 
188
밤 아홉 시에 비가 내렸다.
 
189
2월 6일 (을묘) 비가 내렸다. 오후에 맑게 개었다. [양력 3월 27일]
190
순천부사 ∙ 조방장 ∙ 웅천현감 ∙ 사도첨사가 와서 봤다.
 
191
어두울 무렵 흥양에서 김방제(金邦濟)가 왔다. 누르고 향기로운 것(柚子?)을 서른 개 가져 왔는데 새로 캔 것 같았다.
 
192
2월 7일 (병진) 맑은데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28일]
193
아침에 우조방장이 와서 보고 또 부지휘선에 타고 싶다고 했다.
 
194
어머니와 홍군우(洪君遇) ∙ 이숙도(李叔道) ∙ 강인중(姜仁仲) 등에게 문안편지를 조카 분(芬)이 가는 편에 부쳤다. 조카 봉은 분(芬)과 같이 떠나는데 봉은 나주로 가고 분(芬)은 온양으로 갔다. 마음이 섭섭하다.
 
195
각 배에 솟장(所志) 이백 여 장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196
고성현령(조응도)이 보고에,
 
197
"적선 쉰 여 척이 춘원포(고성군 광도면 예승리 끄승개)에 이르렀다"
 
198
고 했다. 삼천포권관과 가배량권관 제만춘(諸萬春)이 와서 서울 소식을 말했다.
 
199
이경복(李景福)을 격군 붙잡아올 일로 내보냈다.
 
200
오늘 군대를 개편하고, 격군을 각 배에 옮겨 태웠다.
 
201
방답첨사에게 죄인을 잡아오라고 전령했다.
 
202
낙안군수의 편지가 왔는데, 새 군수 김준계(金俊繼)가 내려왔다고 하므로 그에게도 붙잡아 오라고 전령했다.
 
203
보성의 전선 두 척이 들어왔다.
 
204
소비포권관(이영남)이 와서 봤다.
 
205
2월 8일 (정사) 맑다. [양력 3월 29일]
206
샛바람이 세게 불고 날씨는 몹시 추워 무척 걱정된다.
 
207
봉과 분(芬) 등이 배를 타고 떠났으니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208
아침에 순천부사가 와서 말하기를,
 
209
"고성 땅 소소포(召所浦:마암면 두호리)에 적선 쉰 여 척이 들어왔다"
 
210
고 했다. 그래서 곧 제만 춘을 불러 지형이 편리한지를 물었다.
 
211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고 공문을 써 보냈다.
 
212
경상우병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져 와서 저희 장수 방지기(房人)를 면천하는 일을 말했다.
 
213
진주에 피란해 있는 전좌랑 이유함(李惟 )이 와서 이야기하고서 저녁에 돌아왔다.
 
214
바다에 달이 밝아 잠이 오지 않는다.
 
215
순천부사와 우조방장이 와서 이야기하다가 밤 열 시쯤에 헤어졌다.
 
216
변존서(卞存緖)가 당포에 가서 꿩 일곱 마리를 사냥해 왔다.
 
217
2월 9일 (무오) 맑다. [양력 3월 30일]
218
새벽에 우후가 배 두세 척을 거느리고 소비포 뒤쪽에 띠풀을 베러 나갔다.
 
219
아침에 고성현령이 왔다. 돼지머리도 가져왔다. 그 편에 당항포에 적선이 드나들었는지를 물었다. 또 백성들이 굶어서 서로 잡아 먹는다고 하니, 앞으로 어찌하면 살 수 있을 것 인지도 물었다.
 
220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활 열 순을 쏘았다.
 
221
이유함(李惟 )이 왔다가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그의 자(字)를 물으니, 여실(汝實)이라 했다.
 
222
순천부사 ∙ 우조방장 ∙ 우후 ∙ 사도첨사 ∙ 여도만호 ∙ 녹도만호 ∙ 강진현감 ∙ 사천현감 ∙ 하동현 감 ∙ 소비포권관도 왔다.
 
223
저물무렵에 보성군수가 들어왔다. 무군사의 편지를 가져 왔는데, 시위할 긴창을 수십 자루를 만들 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224
이 날 동궁이 문책하는데 대한 답을 써 보냈다.
 
225
2월 초10일 (기미) 가랑비와 센바람이 종일 그치지 않았다. [양력 3월 31일]
226
오후에 조방장과 순천부사가 와서 저녁때까지 이야기하며 적을 토벌할 일을 논의했다.
 
227
2월 11일 (경신) 맑다. [양력 4월 1일]
228
아침에 미조항첨사(김승룡)가 왔다. 술 석 잔을 권하고서 보냈다.
 
229
종사관의 공문 세 통을 써 보냈다.
 
230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니, 경상우수사(원균)가 와서 봤다. 술 열 잔을 마시니 취하여 미친 말을 많이 했다. 우습다. 우조방장도 왔다. 같이 취했다. 저물어서 활 세 순을 쏘았다.
 
231
2월 12일 (신유) 맑다. [양력 4월 2일]
232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조카 분(芬)의 편지에 선전관 송경령(宋慶 )이 수군을 살펴볼 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233
오전 열 시쯤에 적도(거제시 둔덕면)로 진을 옮겼다.
 
234
오후 두 시쯤에 선전관(송경령)이 진에 도착했다.
 
235
임금의 분부(有旨) 두 통과 비밀문서 한 통, 모두 세 통을 가지고 왔는데, 한 통에는
 
236
"명나라 군사 십만 명과 은 삼백 냥이 온다"
 
237
고 하였고, 한 통에는
 
238
"흉적들의 뜻이 호남지방에 있으니, 힘을 다하여 파수보며, 형세를 보아 무찌르라"
 
239
고 하였으며, 비밀문서에는
 
240
"일년이 지나도록 해상에서 근로하는 것을 임금님께서 잊지 못하니, 공로를 세운 장병들이 아직도 상을 받지 못한 자가 있거던 적어 올리라"
 
241
는 것이 적혀 있었다. 또 그에게서 서울에서 여러 가지 소식과 역적 들의 일을 들었다.
 
242
영의정(류성룡)의 편지도 왔다. 임금님께서 밤낮으로 근심하며 분주하시다니, 감개무량하다.
 
243
2월 13일 (임술) 맑고 따뜻하다. [양력 4월 3일]
244
아침에 영의정에게 회답편지를 썼다.
 
245
식사를 한 뒤에 선전관(송경령)을 불러 다시 이야기했다.
 
246
저녁나절에 작별을 하고서는 종일 배에 머물렀다. 오후 네 시쯤에 소비포만호(이영남) ∙ 사량만호(이여염) ∙ 영등포만호(우치적)가 왔다.
 
247
오후 여섯 시쯤에 첫나발을 불자 출항하여 한산도로 돌아올 때, 경상우수사의 군관 제홍록(諸弘祿)이 삼봉(고성군 삼산면 삼봉리)에서 와서 말하기를,
 
248
"적선 여덟 척이 들어와 춘원포(春元浦)에 정박하였으므로, 들이칠 만하다"
 
249
고 했다. 그래서 곧 나대용을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에게 보내어 상의케 하면서 전하게 한 말은,
 
250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치다가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우려가 있으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서 무찔러야 한다"
 
251
는 것이었다. 미조항첨사 ∙ 순천부사 ∙ 조방장이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박영남(朴永男) ∙ 송덕일(宋德馹)이 되돌아갔다.
 
252
2월 14일 (계해) 맑고 따뜻하며 바람도 잔잔했다. [양력 4월 4일]
253
경상도의 남해 ∙ 하동 ∙ 사천 ∙ 고성 등지에는 송희립(宋希立) ∙ 변존서(卞存緖) ∙ 류황(柳滉) ∙ 노윤발(盧閏發) 등을, 우도에는 변유헌(卞有憲) ∙ 나대용(羅大用) 등을 점검하여 내어 보냈다.
 
254
본영 군량미 스무 섬을 실어 왔다.
 
255
정종(鄭宗) ∙ 배춘복(裵春福)도 왔다. 방답첨사와 첨지 배경남(裵慶男)이 왔다.
 
256
장언춘(張彦春)을 천민에서 면하게하는 공문을 만들어 주었다.
 
257
흥양현감이 들어왔다.
 
258
2월 15일 (갑자) 맑다. [양력 4월 5일]
259
새벽에 거북함 두 척과 보성의 배 한 척을 멍에나무(駕木) 치는 곳으로 가서 초저녁에 실어 오게 했다.
 
260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 터 정자로 올라가서 좌조방장의 늦게 온 죄를 신문했다.
 
261
흥양배의 부정을 조사해 보니, 허술한 일이 많았다.
 
262
또 순천부사 ∙ 우 조방장 ∙ 우수사의 우후 ∙ 발포만호 ∙ 여도만호 ∙ 강진현감 등이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263
날이 저물 때에 순찰사(이정암)의 공문 내용에,
 
264
"조도어사 박홍로(朴弘老)의 계본에서 순천 ∙ 광양 ∙ 두치 등지에 복병을 두고 파수보게 해달라는 주문을 바친 바, 수군과 수령을 아울러 이동시키는 일이 합당하지 않다는 대답이 내려왔다"
 
265
는 공문이 내려왔다.
 
266
2월 16일 (을축) 맑다. [양력 4월 6일]
267
아침에 흥양현감 ∙ 순천부사가 왔다. 흥양이 암행어사(柳夢寅)의 비밀 장계초안을 가져 왔는데 임실현감 이몽상(李夢祥) ∙ 무장현감 이충길(李忠吉) ∙ 영암군수 김성헌(金聲憲) ∙ 낙안군수 신호(申浩)를 파면하고, 순천에는 탐관오리의 우두머리를 논난하고, 나머지 담양부사(李景老) ∙ 진원현감(趙公瑾) ∙ 나주목사(李用純) ∙ 장성부사(李貴) ∙ 창평현령 백유항(白惟恒) 등 수령의 악행은 덮어 주고 포상하도록 상신한다.
 
268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니, 나랏일이 이러고서야 매사가 잘 될 수가 없다.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또 그 가운데에는 수군 가족에 대한 징발과 네 장정 속에서 두 장정이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일을 심히 비난하였으니, 암행어사 류몽인(柳夢寅)은 나라의 위급함은 생각하지도 않고, 쓸데 없이 눈앞의 임시 방편의 일에만 힘쓰고 있다.
 
269
남쪽 지방의 종작없는 말만 듣고서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악무목에 대한 진회의 짓거리와 다를 바가 없다.
 
270
나라를 위하여 심히 통탄할 일이다.
 
271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순천부사 ∙ 흥양현감 ∙ 우조방장 ∙ 우수사우후 ∙ 사도첨사 ∙ 발포만호 ∙ 여도만호 ∙ 녹도만호 ∙ 강진현감 ∙ 광양현감 등과 활 열두 순을 쏘았다.
 
272
순천감목관이 진에 왔다가 돌아갔다.
 
273
우수사가 당포에 이르렀다고 했다.
 
274
2월 17일 (병인) 맑다. [양력 4월 7일]
275
따뜻하기가 초여름 같다. 아침에 지휘선에 연기 그을리는 일 때 문에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각 처에 공문을 써 보냈다.
 
276
오전 열 시쯤에 우수사가 들어왔다.
 
277
우두머리 군관 정홍수와 도훈도를 군령으로 곤장 아흔 대를 쳤다.
 
278
이홍명(李弘明) 및 임희진(林希璡)의 손자도 왔다. 대로총통(竹銃筒)을 만들어 왔기에 시험으로 쏘아 보니, 소리는 비슷한데, 별로 쓰일 데가 없다. 우습다.
 
279
우수사가 거느린 전선이 다만 스무 척이니, 더욱 한스럽다.
 
280
순천부사 ∙ 우조방장이 와서 활 다섯 순을 쏘았다.
 
281
2월 18일 (정묘) 맑다. [양력 4월 8일]
282
아침에 배 첨지가 왔다. 가리포 이응표(李應彪)가 왔다.
 
283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해남현감 위대기(魏大器)에게 명령을 거역한 죄를 벌주었다.
 
284
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와서 알현한 뒤에 활 두어 순을 쏘았다.
 
285
오후에 우수사가 왔다. 때마침 수사 원균(元均)이 와서 심하게 취했기 때문에 한두번 밖에 못했다.
 
286
초저녁에 가랑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왔다.
 
287
2월 19일 (무진) 가랑비가 종일 왔다. 날씨가 찌는 듯했다. [양력 4월 9일]
288
활터 정자에 올라가 혼자 앉아 있는데, 우조방장과 순천부사가 오고 이홍명(李弘明)도 왔다.
 
289
조금 있다가 손충갑(孫忠甲)이 왔다고 보고하기에 불러 들여서 그 왜적을 토벌하던 일을 물었더니, 감개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종일 이야기했다.
 
290
저물어서 숙소로 내려왔다.
 
291
변존서(卞存緖)가 본영으로 갔다.
 
292
2월 20일 (기사) 안개같은 이슬비가 걷히지 않았다. [양력 4월 120일]
293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우조방장과 첨지 배경남(裵慶男)이 와서 이야기했다.
 
294
울(蔚)이 우수사 영감의 배에 갔다가 몹시 취해서 돌아왔다.
 
295
2월 21일 (경오) 맑고 따뜻하다. [양력 4월 11일]
296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297
순천부사와 우조방장 어영담(魚泳潭) 영감이 와서, 견내량에 복병한 곳을 가서 살펴봤더라고 보고했다.
 
298
청주 의병장 이봉(李逢)이 순변사에게 가서 육지의 사정을 자세히 일러 주고서 우 영감은 청주영감의 아제이다. 해질녘에 돌아갔다.
 
299
오후 여섯 시쯤에 벽방의 척후장(諸漢國)이 와서 구화역(통영시 광도면 노산리) 앞바다에 왜선 여덟 척이 와서 대었다고 했다. 그래서 배에서 내려 삼도에 전령하기를, 진격할 약속을 내리고서 원균(元均)의 군관 제홍록(諸弘祿)의 보고가 오기를 기다렸다.
 
300
2월 22일 (신미) [양력 4월 12일]
301
밤 한 시가 막 넘자 제홍록(諸弘祿)이 와서 말하는데,
 
302
"왜선 열 척은 구화역에 이르렀고, 여섯 척은 춘원포(春原浦)에 이르렀다"
 
303
고 했다. 또 이미 날이 새어 미처 따라 잡지 못했다고 하므로, 다시 정찰이나 하라고 명령하고서 보냈다.
 
304
아침에 순천부사 ∙ 우
 
305
2월 28일 (정축) 맑다. [양력 4월 18일]
306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종사관(정경달)과 종일 이야기했다.
 
307
장흥부사(황세득)가 들어왔다.
 
308
우수사를 처벌했다.
 
309
2월 29일 (무인) 맑다. [양력 4월 19일]
310
아침에 종사관과 같이 식사를 하고, 또 전별의 술을 마시며 종일 이야기했다. 장흥부사도 함께 했다.
 
311
벽방의 척후장 제한국(諸漢國)의 긴급보고 내용에,
 
312
"적선 열여섯 척이 소소포로 들어 왔다"
 
313
고 하므로 각 도에 전령하여 알리도록 했다.
 
 

3. 갑오년 3월 (1594년 3월)

315
3월 초1일 (기묘) 맑다. [양력 4월 20일]
316
망궐례를 드렸다. 활터 정자로 곧바로 올라가 검모포만호에게 캐묻고서 만호에게 곤장치고, 도훈도를 처형했다.
 
317
종사관(정경달)이 돌아왔다.
 
318
막 어두울 녘에 출항하려할 때, 벽방척후장 제한국(諸漢國)이 보고하기를,
 
319
"왜선이 이미 도망가버렸다."
 
320
고 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321
초저녁에 장흥의 2호선이 실수로 불을 내어 다 타버렸다.
 
322
3월 초2일 (경진) 맑다. [양력 4월 21일]
323
아침에 방답 ∙ 순천 ∙ 우조방장이 왔다.
 
324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좌조방장 ∙ 우조방장 ∙ 순천부사 ∙ 방답첨사와 활을 쏘았다.
 
325
이 날 저녁에 장흥이 와서 이야기했다.
 
326
초저녁에 강진의 모종으로 쌓아 둔 곳에 실수로 불을 내어 모두 다 타버렸다.
 
327
3월 초3일 (신사) 맑다. [양력 4월 22일]
328
아침에 전문(명절하례로 임금께 올리는 글월)을 절하여 보내고 곧 활터 정자에 앉았다.
 
329
경상우후 이의득이 와서 말하기를,
 
330
"수군이 많이 잡아 오지 못했다고 그의 수사(원균)에게서 매를 맞고, 또 발바닥까지 맞을 뻔했다."
 
331
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332
저녁나절에 순천부사 ∙ 좌조방장 ∙ 우조방장 ∙ 방답첨사 ∙ 가리포 첨사 ∙ 좌수사 우후 ∙ 우수사 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333
오후 여섯 시쯤에 벽방척후장(제한국)이 보고한 내용에,
 
334
"왜선 여섯 척이 오리량(마산시 합포구 구산면 고리량) ∙ 당항포 등지에 정박 해 있다"
 
335
고 한다. 그래서 곧 배를 소집시키라고 전령하고, 대군을 흉도 앞바다에 진치고 정예선 서른 척을 우조방장(어영담)이 거느리고 적을 무찌르도록 했다.
 
336
초저녁에 배를 움직여 지도에 이르렀다가 새벽 두 시쯤에 출항했다.
 
337
3월 초4일 (임오) 맑다. [양력 4월 23일]
338
밤 두 시쯤에 출항했다. 진해 앞바다에 이르러 왜선 여섯 척을 뒤쫓아 잡아 불태워 버렸고, 돝섬(猪島: 마산시 합포구 구산면 저도. 용두산 해발 203m)에서 두 척을 불태워 버렸다.
 
339
또 소소강에 열네 척이 들어왔다고 하므로, 조방장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에게나가 토벌하도록 전령했다.
 
340
고성땅 아잠포(阿自音浦:고성군 동해면 당거리)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341
3월 초5일 (계미) 맑다. [양력 4월 24일]
342
겸사복(윤붕)을 당항포로 보내어 적선을 쳐부수고 불태웠는지를 탐문케 하였더니, 우조방장 어영담(魚泳潭)이 긴급보고한 내용에
 
343
"적들이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겁내어 밤을 틈타서 도망했으므로 빈 배 열일곱 척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344
고 했다. 경상우수사(원균)의 보고도 같은 내용이었다.
 
345
우수사가 와서 볼 적에 비가 많이 퍼붓고바람도 몹시 불었다. 바로 자기 배로 돌아갔다.
 
346
이 날 아침 순변사에게서도 토벌을 독려하는 공문이 왔다.
 
347
우조 방장과 순천 ∙ 방답 ∙ 배 첨사도 와서 서로 이야기하는 동안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배에 이르자, 여러 장수들은 각각 돌아 갔다.
 
348
저녁에 광양의 새 배가 들어왔다.
 
349
3월 초6일 (갑신) 맑다. [양력 4월 25일]
350
새벽에 망군이 보니, 적선 마흔 척 남짓이 청슬(거제시 사등면 지석리)로 건넜다고 했다. 당항포 왜선 스무한 척은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긴급보고를 했다.
 
351
저녁나절에 거제로 향하는데 맞바람이 거슬러 불어 간신히 흉도에 도착하니, 남해현감이 보고하되,
 
352
"명나라 군사 두 명과 왜놈 여덟 명이 패문을 가지고 왔기에 그 패문과 명나라 군사 두 명을 보낸다."
 
353
고 했다. 그 패문을 가져다 보니,
 
354
"명나라 도사부(都司府) 담종인이 적을 치지 말라."
 
355
는 것이다. 나는 몸이 몹시 괴로워서 앉고 눕기 조차 불편하다.
 
356
저녁에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명나라 군사를 만나 보고서 보냈다.
 
357
3월 초7일 (을유) 맑다. [양력 4월 26일]
358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꼼짝하기 조차 어렵다. 그래서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패문을 지어라고 하였더니 지어 놓은 글이 꼴이 아니다.
 
359
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손의갑(孫義甲)으로 하여금 작성했는데도 그것마저 못 마땅하다. 나는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 앉아 글을 짓고, 정사립(鄭思立)에게 이를 쓰게 하여 보냈다.
 
360
오후 두 시쯤에 출항하여 밤 열 시쯤 한산도 진중에 이르렀다.
 
361
3월 초8일 (병술) 맑다. [양력 4월 27일]
362
병세는 별로 차도가 없다. 기운이 더욱 축이 나서 종일 아팠다.
 
363
3월 초9일 (정해) 맑다. [양력 4월 28일]
364
기운이 좀 나은 듯 하므로 따뜻한 방으로 옮겨 누웠다. 아프긴 해도 다른 증세는 없다.
 
365
3월 초10일 (무자) 맑다. [양력 4월 29일]
366
병세는 차츰 나아지는 것 같은데, 열기는 치올라 그저 찬 것만 마시고 싶은 생각 뿐이다.
 
367
저녁에 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368
3월 11일 (기축) 종일 큰 비가 왔다. [양력 4월 30일]
369
어두울 무렵에는 개였다. 병세가 아주 많이 나아졌고 열도 또 한 내리니 참으로 다행이다.
 
370
3월 12일 (경인)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5월 1일]
371
몸이 매우 불편하다.
 
372
영의정에게 편지를 썼다.
 
373
장계를 정서하는 일을 마쳤다는 말을 들었다.
 
374
3월 13일 (신묘) 맑다. [양력 5월 2일]
375
아침에 장계를 봉해 올렸다.
 
376
몸은 차츰 나아지는 것 같으나, 기력이 매우 고달프다. 그대로 회(薈)와 송두남을 내어 보냈다.
 
377
오후에 원균(元均) 수사가 왔다. 그의 잘못된 일을 말했다. 그래서 장계를 도로 가져 와서 원사진(元士震)과 이응원(李應元) 등 거짓으로 왜인 노릇한 놈을 목잘라 바친 일을 고쳐서 보냈다.
 
378
3월 14일 (임진) 비가 내렸다. [양력 5월 3일]
379
몸은 나은 듯하지만, 머리가 무겁고 기분이 좋지 않다.
 
380
저녁에 광양현감(송전) ∙ 강진현감(류해) ∙ 첨지 배경남(裵慶男) 같이 갔다.
 
381
소문에, '충청수사(구사직)가 이미 신장(薪場)에 왔다'고 한다. 종일 몸이 불편했다.
 
382
3월 15일 (계사) 비는 그쳤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5월 4일]
383
미조항첨사가 돌아갔다. 종일 신음했다.
 
384
3월 16일 (갑오) 맑다. [양력 5월 5일]
385
몸이 매우 불편하다.
 
386
우수사가 와서 봤다.
 
387
충청수사가 전선 아홉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388
3월 17일 (을미) 맑다. [양력 5월 6일]
389
몸이 회복되지 않는다.
 
390
변유헌(卞有憲)은 본영으로 돌아가고 순천도 돌아갔다.
 
391
해남현감(위대기)는 새 현감과 교대하는 일로 나가고, 황득중 등은 복병에 관한 일로 거제도로 갔다.
 
392
탐후선이 들어왔다.
 
393
3월 18일 (병신) 맑다. [양력 5월 7일]
394
몸이 몹시 불쾌하다.
 
395
남해현감 기효근(奇孝謹) ∙ 보성군수(김득광) ∙ 소비포권관 이영남(李英男) ∙ 적량첨사 고여우(高汝友)가 와서 봤다.
 
396
기효근(奇孝謹)은 파종 때문에 돌아갔다.
 
397
보성군수는 말을 하려 했다가 사정을 말하지 않고 돌아갔다.
 
398
낙안 유위장(留衛將)과 향소(鄕所) 등을 잡아 가두었다.
 
399
3월 19일 (정유) 맑다. [양력 5월 8일]
400
몸이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401
3월 20일 (무술) 맑다. [양력 5월 9일]
402
몸이 불편하다.
 
403
3월 21일 (기해) 맑다. [양력 5월 10일]
404
몸이 불편하다.
 
405
명단을 작성하는 관리로 여도만호(김인영) ∙ 남도포만호(강응표) ∙ 소비포권관 이영남(李英男)을 뽑아 담당시켰다.
 
406
3월 22일 (경자) 맑다. [양력 5월 11일]
407
몸이 약간 나아진 것 같다. 원수의 공문이 왔는데,
 
408
"명나라 지휘 담종인의 자문(중국과 왕래하던 문서)과 왜장의 서계(書契:일본과 왕래하던 문서)를 조파총이 가지고 간다"
 
409
고 하였다.
 
410
3월 23일 (신축) 맑다. [양력 5월 12일]
411
기운이 여전히 불쾌하다.
 
412
방답첨사(이순신) ∙ 흥양현감(배흥립) ∙ 조방장(어영담)이 와서 봤다.
 
413
견내량이 미역 쉰세 동을 캐어 왔다.
 
414
발포만호(황정록)도 와서 봤다.
 
415
3월 24일 (임인) 맑다. [양력 5월 13일]
416
몸이 조금 나아진 것 같다. 미역 예순 동을 캐 왔다.
 
417
정사립(鄭思立)이 왜놈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왔다.
 
418
3월 25일 (계묘) 맑다. [양력 5월 14일]
419
흥양현감과 보성군수가 나갔다.
 
420
사로잡혔던 아이(希順)가 왜의 진중에서 명나라 장수(담종인)의 가지고 왔던 자인데, 흥양으로 보냈다.
 
421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에 올라갔는데 몸이 몹시 불편 하여 일찍 숙소로 내려왔다.
 
422
저녁에 아우 여필 ∙ 아들 회(薈) ∙ 변존서(卞存緖) ∙ 신경황이 와서 어머니 안부를 자세히 들었다. 다만 선산이 모두 산불에 탔는데, 아무도 끄지 못했다고 한다. 몹시 가슴 아프다.
 
423
3월 26일 (갑진) 맑다. [양력 5월 15일]
424
따뜻하기가 여름 날씨 같다.
 
425
조방장 ∙ 방답첨사가 와서 왔다. 발포 만호가 휴가를 받아 돌아갔다.
 
426
저녁나절에 마량첨사 ∙ 사량만호 ∙ 사도첨사 ∙ 소비포가 아울러 와서 봤다. 경상우후(이의득) ∙ 영등포만호(우치적)도 왔다가 창신도로 돌아가 겠다고 했다.
 
427
3월 27일 (을사) 흐리되 비는 아니 오다. [양력 5월 16일]
428
우수사가 와서 봤다.
 
429
몸이 좀 나은 것 같다. 초저녁에 비가 왔다.
 
430
봉(菶)이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하다고 한다.
 
431
3월 28일 (병오)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5월 17일]
432
조카 봉(菶)의 병세가 더 악화되었다. 몹시도 걱정된다.
 
433
3월 29일 (정미) 맑다. [양력 5월 18일]
434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였다.
 
435
웅천현감 ∙ 하동현감 ∙ 소비포권관 등이 와서 봤다. 장흥부사 ∙ 방답첨사도 와서 봤다.
 
436
저녁에 여필과 봉(菶)이 같이 돌아갔다. 봉(菶)은 중병이 들어 돌아 갔으니 밤새도록 걱정으로 새웠다.
 
437
어두워서 방충서와 조서방의 사위 김함(金 )이 왔다.
 
438
3월 30일 (무신) 맑다. [양력 5월 19일]
439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충청군관 ∙ 도훈도를 처벌하고 낙안유위장 ∙ 도병방 등을 처벌했다.
 
440
저녁나절에 삼가현감 고상안(高尙顔)이 와서 봤다. 저녁에야 숙소로 내려왔다.
 
 

4. 갑오년 4월 (1594년 4월)

442
4월 초1일 (기유) 맑다. [양력 5월 20일]
443
매일 먹는 밥인데도 밥을 먹지 못했다.
 
444
장흥부사(황세득) ∙ 진도 군수(김만수) ∙ 녹도만호(송여종)이 여제(악질병에 걸려 죽은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려고 아뢰고 돌아갔다.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445
4월 초2일 (경술) 맑다. [양력 5월 21일]
446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갔다. 삼가현감과 충청수사 와 같이 종일 이야기했다. 조카 해가 들어왔다.
 
447
4월 초3일 (신해) 맑다. [양력 5월 22일]
448
오늘 여제를 지냈다.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 천여든 동이를 먹였다. 우수사와 충청수사도 같이 앉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날이 저물어서야 숙소로 내려왔다.
 
449
4월 초4일 (임자) 흐렸다가 어둘녘에 비가 왔다. [양력 5월 23일]
450
아침에 원수의 군관 송홍득(宋弘得)과 변홍달(卞弘達)이 새로 급제한 홍패(과거 합격증)를 가지고 왔다.
 
451
경상우병사의 군관 박창령(朴昌齡)의 아들 박의영(朴義英)이 와서 그의 장수의 안부를 전했다.
 
452
식사를 한 뒤에 삼가현감이 왔다. 저녁나절에 활터정 자로 올라가니 장흥부사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종일 오손도손 이야기하였다.
 
453
4월 초5일 (계축) 흐리다. [양력 5월 24일]
454
새벽에 최천보(崔天寶)가 죽었다.
 
455
4월 초6일 (갑인) 맑다. [양력 5월 25일]
456
별시(別試: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丙年마다 보이던 문무 시험)를 보는 시험장소를 개설하였다. 시험관은 나와 우수사(이억기) ∙ 충청수사(구사직)이요, 참시관(시험감독관)은 장흥부사(황세득) ∙ 고성현령(조응도) ∙ 삼가현감(고상안) ∙ 웅천현감(이운룡)을 시험을 감독하게 하였다.
 
457
4월 초7일 (을묘) 맑다. [양력 5월 26일]
458
일찍 모여 시험을 받았다.
 
459
4월 초8일 (병진) 맑다. [양력 5월 27일]
460
몸이 불편한 채 시험장으로 올라갔다.
 
461
4월 초9일 (정사) 맑다. [양력 5월 28일]
462
시험을 마치고 방을 내어 붙였다. 큰 비가 왔다.
 
463
조방장 어영담(魚泳潭)이 세상을 떠났다. 통탄함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으랴!
 
464
4월 초10일 (무오) 흐리다. [양력 5월 29일]
465
순무어사(각지의 군대와 백성을 순찰하려고 파견되는 중앙관리) 서성이 진에 온다는 기별이 먼저 왔다.
 
466
4월 11일 (기미) 맑다. [양력 5월 30일]
467
순무어사가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문안하는 배를 내어 보냈다.
 
468
4월 12일 (경신) 맑다. [양력 5월 31일]
469
순무어사 서성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 우수사(이억기) ∙ 경상 수사(원균) ∙ 충청수사(구사직)가 함께 왔다.
 
470
술이 세 순배 돌자, 경상수사 원균은 짐짓 술취한 척하고 미친 듯이 날뛰며, 억지 소리를 해대니, 순무어사도 무척 괴이쩍어 했다. 삼가현감이 돌아갔다.
 
471
4월 13일 (신유) 맑다. [양력 6월 1일]
472
순무어사가 전쟁연습하는 것을 보고싶어 한다. 그래서, 죽도(통영시 한산면) 바다 가운데로 나가서 연습했다. 선전관 원사표(元士彪) ∙ 금오랑 김제남(金悌男)이 충청수사(구사직)를 잡아갈 일로 왔다.
 
473
4월 14일 (임술) 맑다. [양력 6월 2일]
474
김제남과 함께 자세한 말을 했다. 저녁나절에 순무어사의 배로 가서 군사 기밀을 자세히 의논했다. 잠시후에 우수사가 오고, 순천부사 ∙ 방답첨사 ∙ 사도첨사도 아울러 왔다. 나는 하직하고 배로 돌아왔다.
 
475
4월 15일 (계해) 맑다. [양력 6월 3일]
476
충청수사(구사직)가 선전관(원사표) ∙ 금오랑(김제남) ∙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왔다. 충청수사 우경(虞卿) 구사직(具思稷)과 작별했다.
 
477
4월 16일 (갑자) 맑다. [양력 6월 4일]
478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갔다. 밀려 쌓인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479
경상수사(원균)의 군관 고경운(高景雲)과 도훈도 및 변고(變故)에 대비하는 색리 ∙ 영리를 잡아다가, 지휘에 응하지 않고 적변도 빨리 보고하지 않은 죄로 곤장을 쳤다.
 
480
저녁에 송두남(宋斗南)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481
장계에 따라 낱낱이 하교한 대로 시행했다.
 
482
4월 17일 (을축) 맑다. [양력 6월 5일]
483
저녁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484
거제현령(안위)가 급히 와서 보고한 내용에,
 
485
"왜선 백 여 척이 본토(日本)에서 처음 나와서 절영도(折影島)로 향한다."
 
486
고 했다. 저물 무렵에 거제에 살다가 사로잡혔던 남녀 열여섯 명이 도망하여 돌아왔다.
 
487
4월 18일 (병인) 맑다. [양력 6월 6일]
488
새벽에 도망쳐 돌아온 사람이 있는 곳에 가서 적정을 자세히 물으니, 대마도 평의지(宗義智)는 웅천땅 입암(진해시 웅천동 제덕리)에 있고, 평행장(小西行長)은 웅포에 있다고 한다.
 
489
충청도 신임 수사(李純信) ∙ 순천부사 및 우수사우후(李廷忠)가 왔다.
 
490
저녁나절에 거제현령(안위)도 왔다.
 
491
저녁에 비가 내리더니 밤새도록 세차게 왔다.
 
492
4월 19일 (정묘)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7일]
493
첨지 김경로(金敬老)가 원수부에서 와서 적을 토벌할 대책을 논의하고서 그대로 한 배에서 잤다.
 
494
4월 20일 (무진) 종일 가랑비가 걷히지 않았다. [양력 6월 8일]
495
우수사 ∙ 충청수사 ∙ 장흥부사 ∙ 마량첨사(강응표)가 와서 바둑을 두고, 군사에 관한 일도 의논했다.
 
496
4월 21일 (기사) 비가 오락가락 했다. [양력 6월 9일]
497
혼자 봉창 아래 앉아 있으도 저녁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방답첨사가 충청수사로 되어 중기(重記)를 수정하는 일로 아뢰고 돌아갔다.
 
498
저녁에 김성숙(金惺叔)과 곤양의 이광악(李光岳)이 와서 봤다.
 
499
저물녁에 흥양이 들어 왔다.
 
500
본영 탐후선도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참으로 다행이다.
 
501
4월 22일 (경오) 맑다. [양력 6월 10일]
502
바람이 시원하여 가을 날씨 같다. 첨지 김경로가 다시 돌아왔다.
 
503
장계를 봉하고, 또 조총을 동궁에게 줄 긴 창과 더불어 봉해 올렸다.
 
504
장흥부사가 왔다. 저녁에 흥양현감도 왔다.
 
505
4월 23일 (신미) 맑다. [양력 6월 11일]
506
아침에 순천부사(권준) ∙ 흥양현감(배흥립)이 왔다.
 
507
저녁나절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이 술을 가지고 왔다. 장흥부사도 왔다. 임치첨사(홍견)도 같이 왔다. 곤양이 몹시 취해서 미친 소리를 마구 해대니 우습다. 나도 잠깐 취했다.
 
508
4월 24일 (임신) 맑다. [양력 6월 12일]
509
아침에 서울 편지를 썼다.
 
510
저녁나절에 영암군수(박홍장) ∙ 마량 첨사(강응표)가 와서 봤다. 순천부사가 아뢰고 돌아갔다.
 
511
각 항목의 장계를 봉해 보냈다. 경상우수사가 있는 곳에 순찰사 종사관이 왔다고 한다.
 
512
4월 25일 (계유) 맑다. [양력 6월 13일]
513
꼭두새벽부터 몸이 불편하여 종일 괴로워했다. 아침에 보성군수가 와서 봤다. 밤새도록 앉아서 앓았다.
 
514
4월 26일 (갑술) 맑다. [양력 6월 14일]
515
통증이 극히 심하여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곤양군수가 아뢰고 돌아갔다.
 
516
4월 27일 (을해) 맑다. [양력 6월 15일]
517
통증이 잠깐 덜하다. 숙소로 내려갔다.
 
518
4월 28일 (병자) 맑다. [양력 6월 16일]
519
기력과 아픈 증세가 많이 덜했다. 경상수사(원균)과 좌랑 이유함(李惟 )이 와서 봤다.
 
520
울(蔚)이 들어왔다.
 
521
4월 29일 (정축) 맑다. [양력 6월 17일]
522
기운이 상쾌해진 것 같다. 아들 면이 들어왔다. 곧 고을의 종 넷과 관의 종이 들어왔다.
 
523
오늘 우도에서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을 먹였다.
 
 

5. 갑오년 5월 (1594년 5월)

525
5월 초1일 (무인) 맑다. [양력 6월 18일]
526
아침밥을 먹은 뒤에 활터 정자의 방에 올라가니 날씨가 무척 맑고 시원했다. 종일 땀이 비오듯이 흐르더니, 좀 나아진 것 같다.
 
527
아침에 아들 면과 집안 계집 종 넷, 관 계집 종 네 명이 병을 간호하러 들어왔다. 덕이(德)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내일 돌려 보내라고 일렀다.
 
528
5월 초2일 (기묘) 맑다. [양력 6월 19일]
529
새벽에 회는 계집 종 등과 더불어 어머니 생신에 상차려 드릴 일로 돌아갔다.
 
530
우수사(이억기) ∙ 흥양현감(배흥립) ∙ 사도첨사(김완) ∙ 소근첨사(박윤)이 와서 봤다.
 
531
몸이 차츰 나아져 갔다.
 
532
5월 초3일 (경진) 맑다. [양력 6월 20일]
533
흥양현감이 휴가를 얻어 돌아갔다.
 
534
저녁나절에 장흥부사와 발포 만호가 와서 봤다.
 
535
군량명세서와 공명고신(이름이 안 적힌 사령장) 삼백 여 장(丈)과 임금의 분부 두 통이 내려왔다.
 
536
5월 초4일 (신사) 거센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리는데 종일 그치지 않았다. 밤새도록 더 심하게 내렸다. [양력 6월 21일]
537
경상우수사의 군관이 와서 고하기를,
 
538
"왜적 세 명이 중선(中船)을 타고 추도(통영시 산양면)에 온 것을 만나 잡아 왔다."
 
539
고 했다. 이를 추문(推問)한 뒤에 압송할 일로 일러 보냈다.
 
540
저녁에 공대원(孔大元)에게 물으니, 왜적들이 바람을 따라 배를 몰고 본토(日本)로 향하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회오리 바람을 만나 배를 조 종할 수가 없어 떠 다니다가 이 섬에 닿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간사한 사람의 말이니 믿을 수 없다.
 
541
이설(李渫) ∙ 이상록(李尙祿)이 돌아갔다.
 
542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543
5월 초5일 (임오) 비바람이 세게 불어쳤다. [양력 6월 22일]
544
지붕이 세 겹이나 말리어 조각 조각 높이 날려가고, 빗발은 삼대 같이 내려 몸을 가누지 못했다. 우습다.
 
545
사도첨사가 와서 문안하고 돌아갔다. 큰 비바람이 오후 두 시쯤에야 조금 멈추었다.
 
546
발포만호(황정록)가 떡을 만들어 보내 왔다.
 
547
탐후선이 들어 왔다. 어머니가 평안하심을 알았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548
5월 초6일 (계미) 흐렸다가 저녁나절에 개이다. [양력 6월 23일]
549
사도 ∙ 보성 ∙ 낙안 ∙ 소근 등이 와서 봤다.
 
550
오후에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왜놈 세 명을 잡아 왔기에 문초를 해 보니, 이랬다 저랬다 만번이나 속이므로 수사 원균(元均)으로 하여금 목을 베고 보고케 했다.
 
551
우수사도 왔다. 술을 세 순배 돌렸다가 상을 물리고 돌아갔다.
 
552
5월 7일 (갑신) 맑다. [양력 6월 24일]
553
기운이 편안한 것 같다. 침 열여섯 군데를 맞았다.
 
554
5월 8일 (을유) 맑다. [양력 6월 25일]
555
원수의 군관 변응각(邊應慤)이 원수의 공문과 장계 초본과 임금의 분부(有旨)를 가지고 왔다.
 
556
"수군을 거제로 진격시켜 적이 무서워 도망가도록 하라"
 
557
는 것이었다. 경상수사와 전라우수사를 불어 의논했다. 충청수사가 들어왔다.
 
558
밤에 큰 비가 왔다.
 
559
5월 9일 (병술)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26일]
560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아득하여 술취한 듯,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561
5월 10일 (정해)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27일]
562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 보니, 우리의 많은 배들이 바다에 가득차 있다. 적이 비록 쳐들어 온다 해도 섬멸할만하다.
 
563
저녁나절에 우우후(李廷忠)과 충청수사(李純信)이 와서 두 사람이 장기를 두었다. 원수의 군관 변응각도 같이 점심을 먹었다.
 
564
보성군수(金得光)가 저물 무렵에 왔다.
 
565
비가 종일 걷히지 않았다. 아들 회(薈)가 바다로 나간 것이 걱정된다.
 
566
소비포권관이 약품을 보내 왔다.
 
567
5월 11일 (무자) 비가 저녁 때까지 내렸다. [양력 6월 28일]
568
3월부터 밀려 쌓인 공문을 낱낱이 적어서 내려줬다.
 
569
저녁에 낙안군수(金俊繼)가 와서 이야기했다. 큰 비가 퍼붓듯이 내려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570
5월 12일 (기축) 큰 비가 종일 내리다가 저녁이 되서 야 조금 그쳤다. [양력 6월 29일]
571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봤다.
 
572
5월 13일 (경인) 맑다. [양력 6월 30일]
573
이 날 검모포만호의 보고에,
 
574
"경상우수사 소속의 보자기들이 격군을 싣고 도망가다가 현장에서 붙들렸는데, 많은 보자기들이 원 수사가 있는 곳에 숨어 있었다"
 
575
고 한다. 그래서 사복들을 보내어 잡아 오게 하였더니, 원균(元均) 수사가 도리어 사복(司僕) 들을 묶어서 가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군관 노윤발을 보내어 이를 풀어 주게 했다.
 
576
밤 열시쯤에 비가 왔다.
 
577
5월 14일 (신묘)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7월 1일]
578
충청수사(이순신) ∙ 낙안군수(김준계) ∙ 임치현감(홍견) ∙ 목포만호(田希光) 등이 와서 봤다.
 
579
영리(營吏)에게 시켜 종정도(벼슬이름을 품계와 종별을 따라 그려 놓고 윷놀이 하듯이 말을 쓰는 놀이)를 그렸다.
 
580
5월 15일 (임진)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7월 2일]
581
아전에게 시켜 종정도를 그렸다.
 
582
5월 16일 (계사)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양력 7월 3일]
583
저녁에는 큰 비가 밤새도록 내려 지붕이 새어서 마른 데가 없다. 각 배의 사람들이 거처가 매우 괴로울 것이 염려된다.
 
584
곤양군수(이광악)가 편지를 보내고 겸하여 사명당 유정이 진진 안으로 왕래하면서 문답한 초기(草記: 각 관청에서 업무상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을 사실만 간단히 적어 올리던 글)를 보내 왔기로 보니, 분통함을 이길 길이 없다.
 
585
5월 17일 (갑오)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양력 7월 4일]
586
바다의 안개가 캄캄하여 눈앞을 분간할 수 없는데, 저녁내 그치지 않았다.
 
587
5월 18일 (을미)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7월 5일]
588
미조항첨사(金勝龍)가 와서 봤다. 저녁에 상주포권관이 와서 봤다.
 
589
저녁에 보성현감이 돌아갔다.
 
590
5월 19일 (병신) 맑다. 장마비가 잠깐 걷혔다. [양력 7월 6일]
591
마음이 몹시 상쾌했다. 아들 회와 면과 계집 종 등이 돌아갔다. 그때때, 바람이 순탄치 않았다. 이날 송희립과 회가 같이 착량에 가서 노루를 잡을 적에 비바람이 몹시 일고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 자욱했다. 초저녁에 돌아왔는데도 활짝 걷히지 않았다.
 
592
5월 20일 (정유) 비가 오고 또 거센 바람이 조금 그 쳤다. [양력 7월 7일]
593
웅천현감(이운룡)과 소비포권관(이영남)이 와서 봤다.
 
594
온종일 홀로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민다. 호남의 관찰사들이 나라를 저버리는 것에 더 많이 유감스럽다.
 
595
5월 21일 (무술) 비가 내렸다. [양력 7월 8일]
596
웅천현감 ∙ 소비포권관이 와서 종정도를 했다.
 
597
거제 장문포에서 적에게 사로잡혔던 변사안(卞師顔)이 도망쳐 와서 하는 말이, 적의 형세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했다.
 
598
센 바람이 밤낮으로 불었다.
 
599
5월 22일 (기해) 비오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7월 9일]
600
오는 29일이 장모의 제삿날이다. 아들 회와 면을 내보냈다. 계집 종들도 내 보냈다.
 
601
순찰사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또 순변사에게도 편지를 써 보냈다. 황득중(黃得中) ∙ 박주하(朴注河) ∙ 오수(吳水) 등은 격군을 잡아 올 일로 내 보냈다.
 
602
5월 23일 (경자) 비왔다. [양력 7월 10일]
603
웅천현감 ∙ 소비포권관이 왔다.
 
604
저녁나절에 해남현감(위대기)이 와서 술과 안주를 바치므로, 충청수사(李純信)를 청하여 왔다. 밤 열 시쯤에 헤어졌다.
 
605
5월 24일 (신축) 잠시 맑다가 저녁에 비가 내렸다. [양력 7월 11일]
606
웅천 ∙ 소비포가 와서 종정도를 놀았다. 해남도 왔다.
 
607
오후에 우수사와 충청수사가 와서 종일 이야기했다.
 
608
구사직(具思稷)에 대한 장계를 가져 갔던 진무가 들어왔다.
 
609
조카 해가 들어왔다.
 
610
5월 25일 (임인) 비가 내렸다. [양력 7월 12일]
611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하고서 돌아갔다. 소비포도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612
비가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전쟁하는 군사들의 마음이야 오죽 답답하랴.
 
613
조카 해가 돌아갔다.
 
614
5월 26일 (계묘) 걷히기도 하고 비오기도 하였다.. [양력 7월 13일]
615
마루에 앉았는데 서쪽 벽이 무너져 있었다. 바라지 창으로 들어 오는 바람을 다시 쐬니 기분을 맑게 하여 무척 좋았다. 과녁판을 정자 앞으로 옮겨 놓았다.
 
616
오늘 이인원(李仁元)과 토병 스무세 명을 본영으로 보내어 보리를 거두어 들이라고 일러 보냈다.
 
617
5월 27일 (갑진) 맑다가 비오기더 했다. [양력 7월 14일]
618
사도첨사가 충청수사 ∙ 발포만호 ∙ 여도만호 ∙ 녹도만호와 함께 활을 쏘았다. 이 날 소비포권관이 누워서 앓았다고 했다.
 
619
5월 28일 (을사) 잠깐 개이다. [양력 7월 15일]
620
사도첨사 ∙ 여도만호가 와서 활을 쏘겠다고 여쭈었다. 그래서 우수사 ∙ 충청수사를 청해 와서 활쏘고, 취하여 종일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621
광양 4호선의 부정사실을 조사했다.
 
622
5월 29일 (병오) 아침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엿다. [양력 7월 16일]
623
장모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624
저녁에 진도군수(金萬壽)가 아뢰고 돌아갔다. 웅천현감(李雲龍) ∙ 거제현령(安衛) ∙ 적량첨사(高汝友)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625
저물녁에 정사립(鄭思立)이 보고하는데,
 
626
"남해 사람이 배를 가지고 와서 순천 격군을 싣고 간다"
 
627
고 했다. 그래서 잡아서 가두었다.
 
628
5월 30일 (정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7월 17일]
629
아침에 왜놈들과 도망가자고 꾄 광양 1호선 군사와 경상도 보 자기 세 명을 처벌했다.
 
630
경상우후가 와서 봤다. 충청수사가 왔다.
 
 

6. 갑오년 6월 (1594년 6월)

 
632
6월 초1일 (무신) 맑다. [양력 7월 18일]
633
아침에 배 첨사(배경남)와 같이 밥을 먹었다.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634
저녁나절에 활을 쏘았다.
 
635
6월 초2일 (기유) 맑다. [양력 7월 19일]
636
아침에 배 첨사(배경남)와 같이 밥을 먹었다. 충청수사도 왔다.
 
637
저녁나절에 우수사(이억기)의 진으로 갔더니, 강진현감(류해)이 술을 바쳤다. 활 두어 순을 쏘았다. 경상수사 원균(元均)도 왔다.
 
638
나는 곧 몸이 불편하여 돌아가 누워서 충청수사와 첨사 문길(門吉) 배경남(裵慶男)이 내기 장기두는 것을 구경했다.
 
639
6월 3일 (경술) 초복이다. 아침에 맑더니 오후에 소 나기가 퍼부어 종일 밤까지 그치지 않았다. [양력 7월 20일]
640
바닷물 빛조차 흐리니, 근래에 드문 일이다. 충청수사 ∙ 첨사 배경남(裵慶男)이 와서 바둑을 두었다.
 
641
6월 4일 (신해) 맑다. [양력 7월 21일]
642
충청수사 ∙ 미조항첨사와 웅천현감이 와서 보기에 종정도를 놀게 했다.
 
643
저녁에 겸사복이 임금의 분부(有旨)를 가지고 왔다. 그 사연에 이르기를,
 
644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니, 다음부터는 전날의 버릇을 버려라."
 
645
는 것이다. 통탄하기 그지없다. 이는 원균(元均)이 술에 취하여 망발한 때문이다.
 
646
6월 5일 (임자) 맑다. [양력 7월 22일]
647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사도첨사 ∙ 여도만호 ∙ 녹도만호가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648
밤 열 시쯤에 급창(관청의 심부름하는 종) 김산(金山)과 그 처자 등 세 명이 유행병으로 죽었다. 세 해나 눈앞에 두고 미덥게 부리던 사람인데, 하루 저녁에 죽어가다니, 참으로 슬프다. 무우밭을 갈았다.
 
649
송희립 ∙ 낙안군수 ∙ 흥양현감 ∙ 보성군수가 군량을 독촉할 일로 나갔다.
 
650
6월 6일 (계축) 맑다. [양력 7월 23일]
651
충청수사 ∙ 여도만호와 함께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경상우후가 와서 봤다.
 
652
소나기가 왔다.
 
653
6월 7일 (갑인) 맑다. [양력 7월 24일]
654
충청수사 ∙ 첨사 배경남(裵慶男)이 와서 이야기했다.
 
655
남해군관과 색리 등의 죄를 처벌했다.
 
656
송덕일(宋德馹)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임금의 분부(有旨)가 들어온다고 했다.
 
657
오늘 무우씨 두 되 다섯 홉을 부침했다.
 
658
6월 8일 (을묘) 맑으며 물쿠었다. [양력 7월 25일]
659
우우후가 왔다. 충청수사와 다 함께 활 스무 순을 쏘았다.
 
660
저녁에 종 한경(漢京)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심을 알았다. 참으로 기쁘고도 다행이다.
 
661
미조항첨사가 아뢰고 돌아갔다. 회령포만호(민정붕)가 진에 왔다. 전공(戰功)에 따라 포상하는 관교(官敎: 敎旨)도 왔다.
 
662
6월 9일 (병진) 맑다. [양력 7월 26일]
663
충청수사 ∙ 우우후가 와서 활을 쏘았다. 우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664
밤이 깊은데 피리소리 가득한 바다, 거문고를 타며 장수를 기리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665
6월 10일 (정사) 맑으며, 물쿠다. [양력 7월 27일]
666
활 다섯 순을 쏘았다.
 
667
6월 11일 (무오) 맑으며,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 [양력 7월 28일]
668
아침에 아들 울(蔚)이 본영으로 갔다. 작별하는 회포가 씁쓸하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다. 저녁나절에 바람이 몹시 사나와지며 걱정이 더욱 무거워졌다.
 
669
충청수사가 와서 활을 쏘고 그대로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달빛 아래 같이 이야기할 때 옥피리 소리가 처량했다. 앉아서 오래도 록 있다가 헤어졌다.
 
670
6월 12일 (기미) 바람이 세게 불었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7월 29일]
671
가뭄이 너무 심하다. 농사의 근심이 더욱 염려스럽다.
 
672
이 날 어둘 무렵에 본영의 배 격군 일곱 놈이 도망갔다.
 
673
6월 13일 (경신) 바람이 몹시 불고 더위는 찌는 듯하다. [양력 7월 30일]
 
674
6월 14일 (신유) 더위와 가뭄이 너무 심하다. [양력 7월 31일]
675
바다의 섬도 찌는 듯하다. 농사일이 아주 걱정된다.
 
676
충청수사 ∙ 사도첨사 ∙ 여도만호 ∙ 녹도만호와 함께 활 스무 순을 쏘았다. 충청 수사가 가장 잘 맞혔다. 이 날 경상수사는 활꾼을 거느리고 우수 사가 있는 곳으로 왔다가 크게 지고 돌아갔다고 했다.
 
677
6월 15일 (임술) 맑더니 오후에 비가 내렸다. [양력 8월 1일]
678
신경황(申景滉)이 영의정(류성룡)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라를 근심함이 이보다 더한 이가 없을 것이다.
 
679
지사 윤우신(尹又新)이 죽었다니, 애석할 따름이다.
 
680
순천부사 ∙ 보성군수가 달려와 보고하는데,
 
681
"명나라 총병관장 홍유가 호선(號船)을 타고 백 여 명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거쳐 벌써 진도 벽파정(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이르렀다."
 
682
고 했다. 날짜로 짚어보면 오늘이나 내일에 이르를 것이지만, 바람이 맞불어 맘대로 배를 부리지 못한 것이 닷새째이다. 이 날 밤 소나기가 흡족하게 내렸다. 어찌 하늘이 백성을 살리려는게 아니겠는가.
 
683
아들의 편지가 왔는데, 잘 돌아갔다고 했다. 또 아내의 편지에는 면(葂)이 더위를 먹어 심하게 앓았다고 했다. 괴롭고 답답하다.
 
684
6월 16일 (계해) 아침에 비오다가 저녁에 개었다. [양력 8월 2일]
685
충청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686
6월 17일 (갑자) 맑다. [양력 8월 3일]
687
저녁나절에 우수사 ∙ 충청수사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688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으나, 면은 많이 아프다고 했다. 몹시 걱정된다.
 
689
6월 18일 (을축) 맑다. [양력 8월 4일]
690
아침에 원수의 군관 조추년(趙秋年)이 전령을 가지고 왔다.
 
691
원수가 두치(하동읍 두곡리)에 이르러 광양현감(송전)이 수군 중에 복병을 뽑을 적에 사사로운 정을 썼다
 
692
말을 들었다. 그래서 군관을 보내어 그 까닭을 물으니, 놀라운 일이다.
 
693
원수가 그 서처남 조대항(曺大恒)의 말을 듣고 이렇게도 사사로이 행하니 통탄스럽기 그지 없다. 이 날 경상우수사가 청했는데 가지 않았다.
 
694
6월 19일 (병인) 맑다. [양력 8월 5일]
695
원수의 군관과 배응록(裵應祿)이 원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변존서(卞存緖) ∙ 윤사공(尹思恭) ∙ 하천수(河千壽) 등이 들어왔다. 충청수사가 와 보고서 그 어머니 병환 때문에 곧 그의 사처(私處)로 돌아갔다.
 
696
6월 20일 (정묘) 맑다. [양력 8월 6일]
697
충청수사가 와서 보고 활을 쏘았다. 박치공(朴致恭)이 와서 말하고 서울로 갔다. 마량첨사도 왔다.
 
698
저녁에 영등포만호는 본포(영등포)에 물러나 있었던 죄를 다스렸다.
 
699
탐후선 이인원(李仁元)이 들어왔다.
 
700
6월 21일 (무진) 맑다. [양력 8월 7일]
701
충청수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마량첨사가 와서 봤다.
 
702
명나라 장수(장홍유)가 바닷길로 벌써 벽파정에 이르렀다고 한 것은 잘못 전한 것이라고 했다.
 
703
6월 22일 (기사) 맑다. [양력 8월 8일]
704
할머님의 제삿날이라 나가지 않았다.
 
705
오늘 불꽃과 같은 삼복 더위가 전보다 더하여 큰 섬이 찌는 듯하여 사람이 견디기가 여 간 어렵지 않다.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하여 식사를 두 끼니나 먹지 않았다. 초저녁에 소나기가 내렸다.
 
706
6월 23일 (경오) 맑더니 저녁나절에 소나기가 왔다. [양력 8월 9일]
707
순천부사 ∙ 충청수사 ∙ 우우후 ∙ 가리포첨사가 아울러 와서 봤다.
 
708
우후(이몽구)가 군량 독촉하는 일로 나갔다가 견내량에서 왜놈을 사로잡았다.
 
709
왜적의 동태를 캐묻고, 또 무엇을 잘하는지 물었더 니, 염초굽는 일과 총쏘기를 다 잘한다고 했다.
 
710
6월 24일 (신미) 맑다. [양력 8월 10일]
711
순천부사 ∙ 충청수사가 와서 활 스무 순을 쏘았다.
 
712
6월 25일 (임신) 맑다. [양력 8월 11일]
713
충청수사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이여념(李汝恬)도 와서 활을 쏘았다.
 
714
종사관(정경달)을 모시는 아전이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는 데, 조도어사의 말이 몹시 놀라왔다. 부채를 봉하여 보냈다.
 
715
6월 26일 (계유) 맑다. [양력 8월 12일]
716
충청수사 ∙ 순천부사 ∙ 사도첨사 ∙ 여도만호 ∙ 고성현령 등이 활을 쏘았다.
 
717
일찍 김양간(金良幹)에게 단오날의 진상물을 봉해 올렸다. 마량 ∙ 영등포가 여기 왔다가 곧 돌아갔다.
 
718
6월 27일 (갑술) 맑다. [양력 8월 13일]
719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720
6월 28일 (을해) 맑다. 더위가 찌는 듯하다. [양력 8월 14일]
721
나라제삿날(明宗 祭日)이라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722
진무성(陳 武晟)이 벽방산의 망보는 곳의 부정사실을 조사하고 와서 적선은 없더라고 보고했다.
 
723
6월 29일 (병자) 맑다. [양력 8월 15일]
724
순천부사가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왔다. 우수사 ∙ 충청수사와 같이 와서 활을 쏘았다. 윤동구(尹東耈)의 아버지가 와서 봤다.
 
725
울(蔚)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7. 갑오년 7월 (1594년 7월)

727
7월 초1일 (정축) 맑다. [양력 8월 16일]
728
배응록(裵應祿)이 원수에게서 들어 왔다. 원수가 뉘우치는 말을 하고서 보냈다는 것이다. 우습다.
 
729
이 날이 나라제삿날(仁宗 祭日)이라 홀로 종일 앉있었다.
 
730
저녁에 충청수사가 여기 와서 서로 이야기했다.
 
731
7월 초2일 (무인) 맑다. [양력 8월 17일]
732
늦더위가 찌는 듯하다. 이 날 순천의 도청(원을 보좌하는 아전)과 색리 ∙ 광양의 색리 등의 죄를 다스렸다.
 
733
좌도 사수들의 활쏘기를 시험하고, 적의 장물을 나누어 줬다.
 
734
저녁나절에 순천부사 ∙ 충 청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배 첨지가 휴가를 받아 갔다.
 
735
노윤발(盧潤發)에게 흥양군관 이심(李深)과 병선색리 ∙ 괄군색리 등을 붙잡아 올 일로 전령을 주어 내보냈다.
 
736
7월 초3일 (기묘) 맑다. [양력 8월 18일]
737
충청수사 ∙ 순천부사가 활을 쏘았다.
 
738
웅천현감 이운룡(李雲龍)이 휴가를 신고하고 미조항으로 돌아갔다.
 
739
음란한 계집을 처벌했다. 각 배에서 여러번 양식을 훔친 사람들을 처형했다.
 
740
저녁에 새로 지은 다락으로 나가 보았다.
 
741
7월 4일 (경진) 맑다. [양력 8월 19일]
742
충청수사가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은 뒤에 마량첨사 ∙ 소비포권 관도 와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743
왜적 다섯 명과 도망병 한 명을 아울러 처형했다.
 
744
충청수사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745
옥과의 계원유사 조응복(曺應福)에게 참봉의 직첩을 주어 보냈다.
 
746
7월 5일 (신사) 맑다. [양력 8월 20일]
747
새벽에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심을 알았다. 참으로 다행이다.
 
748
심약(審藥: 궁중에 바치는 약재를 감시하기 위하여 각 도에 파견하는 종9품의 벼슬인데, 전의감 혜민서의 의원중에서 뽑음)이 내려왔는데 매우 용렬하니 한심스럽다.
 
749
우수사 ∙ 충청수사가 같이 왔다. 여도만호는 술을 가져와 같이 마셨다. 활 열여 순을 쏘았다. 너무 취해서 수루에 올랐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750
7월 6일 (임오) 종일 궂은비 오다. [양력 8월 21일]
751
몸이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752
큰 도둑 세 놈을 최귀석(崔貴石)이 잡아 왔다. 또 박춘양(朴春陽) 등을 보내어 그 괴수를 잡아 왼쪽 귀를 잘라서 왔다.
 
753
아침에 정원명(鄭元溟) 등을 격군을 정비하지 않은 일로 이를 잡아 가두었다.
 
754
저녁에 보성군수가 들어온다고 했다.
 
755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756
밤 11시 쯤에 소나기가 퍼부었다. 빗발이 삼대 같아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치밀었다.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757
7월 7일 (계미) 저녁에 비가 뿌렸다. [양력 8월 22일]
758
충청수사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심하다고 아뢰고 모이지 못했다.
 
759
우수사는 순천부사 ∙ 사도첨사 ∙ 가리포첨사 ∙ 발포만호 ∙ 녹도만호가 함께 활을 쏘았다.
 
760
이영남(李英男)이 배를 거느리고 올 일로 곤양으로 간다고 아뢰고 돌아갔다.
 
761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고성 보인(保人)을 문초했다. 보성이 왔다.
 
762
7월 8일 (갑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8월 23일]
763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곤하여 장수들을 보지 않았다. 각 고을에 공문을 적어 보냈다.
 
764
오후에 충청수사에게 가서 봤다.
 
765
저녁에 고성 사람으로 사로잡혔다가 도망해 온 사람을 직접 문초했다.
 
766
광양의 송전(宋銓)이 그의 지휘관인 병사의 편지를 이곳에 가지고 왔다. 낙안과 충청우후가 온다고 했다.
 
767
7월 9일 (을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8월 24일]
768
아침에 충청우후(원유남)가 교서에 숙배하였다.
 
769
저녁나절에 순천 ∙ 낙안 ∙ 보성의 군관과 색리들이 격군을 소홀히 하고 또 기일을 어긴 죄를 처벌했다.
 
770
가리포 ∙ 임치 ∙ 소근포 ∙ 마량첨사 및 고성현령이 아울러 왔다.
 
771
낙안의 군량 벼 이백 섬을 받아서 나누었다.
 
772
7월 10일 (병술) 아침에 맑다가 저녁에 비가 조금 내렸다. [양력 8월 25일]
773
아침에 낙안의 겨냥 벼 찧은 것과 광양 벼 백 섬을 되었다.
 
774
신홍헌(申弘憲)이 들어왔다.
 
775
저녁나절에 송전(宋筌)과 군관이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776
아침에 아들 면의 병이 중태에 빠졌다는 말을 들었다. 또 피를 토하는 증세까지 있다고 하므로, 울(蔚)과 심약 신경황 ∙ 정사립 ∙ 배응록(裵應祿)을 아울러 내보냈다.
 
777
7월 11일 (정해) 궂은비가 내렸다. [양력 8월 26일]
778
바람이 세게 불고 종일 그치지 않았다.
 
779
울(蔚)이 가는 길이 고되고 힘들 것이 많이 염려되고, 또 면의 병이 어떠한지 궁금 하다.
 
780
장계를 손수 초잡아 고쳐 주었다.
 
781
경상순무(서성)의 공문이 왔는데, 원수사가 불평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782
오후에 군관들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봉학(奉鶴)도 같이 활을 쏘았다.
 
783
윤언침(尹彦 )이 점고 받으러 왔기에 점심을 먹여 도로 보냈다.
 
784
저물무렵에 비바람이 몹시 치더니 밤 내내 계속 되었다.
 
785
충청 수사가 와서 봤다.
 
786
7월 12일 (무자) 맑다. [양력 8월 27일]
787
아침에 소근첨사가 와서 보고 화살 쉰네 개를 만들어 바쳤다. 공문을 적어서 나누어 주었다.
 
788
충청수사는 순천 ∙ 사도 ∙ 발포 ∙ 충 청우후와 아울러 와서 활을 쏘았다.
 
789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기에 어머니의 평안하심은 알았으나, 면의 병세는 중하여 몹시도 애타지만 어찌하랴.
 
790
영의정 류성룡이 죽었다는 부고가 순변사가 있는 곳에 왔다고 한다. 이는 류 정승을 미워하는 자들이 반드시 말을 만들어 비방하는 말일 것이다. 이런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791
이 날 어둘 무렵에 마음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을 제대로 걷잡을 수 없다. 염려가 더욱 답답하여 밤이 깊어 가도 잠들지 못했다. 류 정승이 만약 어찌 되었다면 나랏일을 어찌하랴! 어찌하랴!
 
792
7월 13일 (기축) 비가 내렸다. [양력 8월 28일]
793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떨까하고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았더니, 임금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다 좋았다. 마음이 좀 놓인다.
 
794
또 류 정승의 점을 친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은 괘가 나왔다. 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 왔다.무척 좋았다.
 
795
저녁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있는 마음을 가눌 길 없다.
 
796
저녁나절에 송전(宋筌)이 돌아가는데, 소금 한 휘를 주어 보냈다.
 
797
오후에 마량첨사와 순천이 와서 보고 어두워서 되돌아갔다.
 
798
비가 올 것인가 개일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뿜어 내는 것과 같은 괘가 나왔다. 앞으로 비가 많이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799
초저녁에 발포 탐후선이 편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
 
800
7월 14일 (경인) 비가 내렸다. [양력 8월 29일]
801
어제 저녁부터 빗발이 삼대 같았다. 지붕이 새어 마른 곳이 없다. 간신히 밤을 지냈다. 점괘를 얻은 그대로이니 참으로 묘하다.
 
802
충청수사와 순천부사를 청해 와서 장기를 두게 하고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근심이 뱃속에 있으니, 어찌 조금인들 편안하랴! 함께 점심을 먹고 저녁에 수루 위로 걸어 나가 몇 바퀴나 어설렁거리다가 돌아왔다.
 
803
탐후선이 오지 않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804
자정에 비가 또 내렸다.
 
805
7월 15일 (신묘) 비가 내렸다.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8월 30일]
806
조카 해 ∙ 종경이 들어와서 아들 면의 병이 차도가 있다는 소식을 자세히 들으니 기쁘기 그지없다.
 
807
조카 분(芬)의 편지에, 또 아산 고향의 선산이 아무 탈 없고, 가묘도 편안하며, 어머니께서도 편안하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808
이흥종(李興宗)이 환자하는 일로 매를 맞다가 숨졌다고 했다. 놀랍다. 그 삼촌(충청수사 李純信)이 처음 이를 듣고서 비통한 나머지, 그 어머니도 듣고 병세가 더욱 위중해졌다고 한다.
 
809
활 열 여 순을 쏜 뒤에 수루에 올라가서 이리저리 거닐 적에, 박주사리(朴注沙里)가 급히 와서 명나라 장수의 배가 이미 본영 앞에 이르러 이리로 온다고 했다. 그래서 곧 삼도에 전령하여 진을 죽도(통영시 한산면)로 옮겼다. 밤을 지냈다.
 
810
7월 16일 (임진) 흐리고 바람이 차겁다. [양력 8월 31일]
811
늦은 아침부터 큰 비가 내리더니 종일 퍼붓듯이 왔다.
 
812
경상수사 원균(元均) ∙ 충청수사 ∙ 우수사가 모두 와서 봤다.
 
813
소비포가 소의 다리 등을 보내 왔다.
 
814
명나라 장수가 삼천진(사천시 삼천포)에 이르러 머물러 묵는다고 했다.
 
815
여도만호가 먼저 왔다. 저녁에 본진으로 돌아왔다.
 
816
7월 17일 (계사) 맑다. [양력 9월 1일]
817
새벽에 포구로 나가 진을 쳤다.
 
818
오전 열 시쯤에 명나라 장수 파총 장홍유(張鴻儒)가 병호선(兵號船) 다섯 척을 거느리고 돛을 달고 들어와서 곧장 영문에 이르러서는 육지에 내려서 이야기하자고 청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수사들과 함께 활터 정자에 올라가서 올라오기를 청했더니, 파총이 배에서 내려 곧 왔다. 이들과 같이 앉아서 먼저 바닷길 만리 먼 길을 어렵다 않으시고 여기까지 오신데 대하여 감사함을 비길 길이 없다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819
"작년 7 월 절강에서 배를 타고 요동에 이르니, 요동사람들이 말하기를, 바닷길에는 돌섬과 암초가 많고, 또 앞으로 강화가 이루어질 것이니 갈 필요가 없다고 억지로 말리는데도 그대로 요동에 머물면서 시랑(侍郞) 손광(孫鑛)과 총병(總兵) 양문(楊文)에게 보고하고, 올 3월초에 출항하여 들어왔으니, 무에 수고라고 할 것이 있는가"
 
820
했다. 나는 차를 마시라고 청하고 또 술잔을 권하니 감개무량하다. 또 적의 형세를 이야기하느라고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821
7월 18일 (갑오) 맑다. [양력 9월 2일]
822
다락 위로 올라가자고 청하여 점심을 먹은 뒤에 나가 앉아 술을 서너 차례 권했다. 대체로 내년 봄에 배를 거느리고 곧장 제주에 이르러, 공히 우리 수군과 합세하여 으시대면서 추악 한 적들을 무찌르자고 성의있게 이야기했다. 초저녁에 헤어졌다.
 
823
7월 19일 (을미) 맑다. [양력 9월 3일]
824
아침에 환영 예물 단자를 올리니, 감사해 마지 못하겠다면서 주시는 물건이 매우 풍성했다. 충청수사도 드렸다.
 
825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예물을 주는데 몇몇은 나와 같았다. 점심을 먹은 뒤에 경상 원수사가 혼자서 술 한 잔을 올리는데, 상은 무척 어지럽건만 한가지라도 아래쪽 힘쓸 것이 없었다. 우습고 우스웠다. 또 자(字)와 호(別號)를 물으니, 써서 주는데, 자는 중문(仲文)이요, 호(軒號)는 수천(秀川)이라고 했다. 촛불을 밝히고 다시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826
비가 많이 올듯하여 배로 내려가 잤다.
 
827
7월 20일 (병신) 맑다. [양력 9월 4일]
828
아침에 통역관이 와서 전하여 말하기를,
 
829
"명나라 장수(장홍유)가 남원에 있는 총병 유정(劉綎)이 있는 곳에는 가지 않고 곧장 돌아가라"
 
830
고 했다. 나는 명나라 장수에게 간절히 말을 전하기를,
 
831
"처음에 파총(장홍유)이 남원으로 온다는 소식이 이미 총병관 유정에게 전해졌으니, 만약 가지 않는다면, 그 중간에 남의 말들이 있을 것이므로, 바라건대 가서 만나 보고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832
고 하였다. 그러니 파총이 나의 말을 전해 듣고, 과연 옳다고 하며,
 
833
"내 말을 타고 혼자 가서 만나 본 뒤에 군산으로 가서 배를 타겠다."
 
834
고 했다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하고서 파총이 내 배로 내려와서 조용히 이야기 하고, 이별의 잔을 권했다. 파총이 일곱 잔을 마신 뒤 홋줄을 풀 고 함께 포구 밖으로 나가 두번 세번 애달픈 뜻으로 송별하였다.
 
835
그리고 경수(景修:이억기) ∙ 충청수사 ∙ 순천부사 ∙ 발포만호 ∙ 사도첨사와 같이 사인암(舍人巖)으로 올라가 취하며 이야기하고서 돌아왔다.
 
836
7월 21일 (정유) 맑다. [양력 9월 5일]
837
아침에 원수에게 명나라 장수와의 문답 내용을 공문을 만들어 내 보냈다.
 
838
저녁나절에 마량첨사 ∙ 소비포첨사가 와서 봤다. 발포만호가 복병 내보내는 일로 와서 아뢰고 갔다.
 
839
저녁에 수루로 올라 있는데, 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840
오후에 흥양의 군량선이 들어왔다. 그래서 색리와 배 주인에게 발바닥을 호되게 때렸다.
 
841
저녁에 소비포가 와서 보고는 하는 말이, 기한에 대지 못 했다고 해서 수사 원균(元均)에게 곤장 서른 대를 맞았다고 했다. 몹시 해괴한 일이다.
 
842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군량 스무 섬을 꾸어 갔다.
 
843
7월 22일 (무술) 맑다. [양력 9월 6일]
844
아침에 장계초고를 수정했다. 임치첨사와 목포만호가 와서 봤다.
 
845
저녁나절에 사량만호와 영등포만호이 와서 봤다.
 
846
오후에 충청 수사 ∙ 순천부사 ∙ 충청우후 ∙ 이영남(李英男)이 함께 활을 쏘았다.
 
847
저물 무렵 수루에 올라가 밤이 되어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848
7월 23일 (기해) 맑다. [양력 9월 7일]
849
충청수사가 우수사 ∙ 가리포첨사와 같이 와서 봤다. 활을 쏘았다.
 
850
조카 해(荄)가 돌아갔다. 목년(木年)이 들어 왔다.
 
851
7월 24일 (경자) 맑다. [양력 9월 8일]
852
여러 가지 장계를 직접 봉했다. 영의정(류성룡)과 심병판(심충겸) ∙ 윤판서(윤근수) 앞으로 보냈다.
 
853
저녁에 활 일곱 순을 쏘았다.
 
854
7월 25일 (신축) 맑다. [양력 9월 9일]
855
아침에 하천수에게 장계를 지니게 하여 내보냈다.
 
856
아침 식사를 하고서 충청수사 ∙ 순천부사 등과 함께 우수사에게로 가서 활 열 순을 쏘았다.
 
857
몹시 취하여 돌아왔는데 밤새도록 토해냈다.
 
858
7월 26일 (임인) 맑다. [양력 9월 10일]
859
각 고을에 공문을 써 보냈다. 밥을 먹은 뒤에 수루 위로 옮겨 앉았다. 순천과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860
저녁나절에 녹도만호가 도망병 여덟 명을 잡아 왔다. 그래서 그 중 주모자 세 명을 처형하고 그 나머지는 곤장을 쳤다.
 
861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아들들의 편지를 보니, 어머니께서 편안하시고 면(葂)의 병도 나아 진다고 한다. 허씨 댁이 병이 점점 더해졌다고 한다. 걱정이다. 유홍(兪弘)과 윤근수(尹根壽)가 세상을 떠나고 윤돈(尹敦:1551~1612)이 종사관으로 내려 온다고 한다.
 
862
신천기(申天機)도 들어왔다. 어둘 무렵 신제운(申霽雲)이 와서 봤다. 노윤발(盧潤發)이 흥양의 색리와 감관을 붙잡아 들어왔다.
 
863
7월 27일 (계묘)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양력 9월 11일]
864
밤 꿈에 머리를 풀고 곡을 했다. 이 조짐은 매우 좋은 것이라고 한다.
 
865
이 날 충청수사 ∙ 순천부사와 함께 수루 위에서 활을 쏘았다. 충청수사가 과하주(여름을 지내도 시어지지 않는 약주)를 가지고 왔다. 나는 몸이 불편하여 조금 마셨다. 역시 좋아지지 않았다.
 
866
7월 28일 (갑진) 맑다. [양력 9월 12일]
867
흥양의 색리들의 죄를 다스렸다. 신제운이 주부의 직첩을 받고 서 갔다. 저녁나절에 수루에 올라가 벽 바르는 일을 감독했다. 의능이 와서 그 일을 맡았다. 저물 무렵에 숙소로 내려 왔다.
 
868
7월 29일 (을사) 종일 가랑비가 왔다. [양력 9월 13일]
869
바람기는 없었다. 순천부사와 충청수사가 바둑을 두는데, 구경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낙안군수도 와서 같이 했다. 이 날 밤 신음했는데 아침까지 했다.
 
 

8. 갑오년 8월 (1594년 8월)

871
8월 초1일 (병오) 비오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9월 14일]
872
몸이 몹시 불편하다. 수루의 방으로 옮겨 앉았다가 곧 뒷동 헌방으로 돌아왔다.
 
873
저녁에 낙안군수(金俊繼)가 강집(姜緝)을 데려다가 군량 독촉하는 일로 군율에 따라 문초하고 내어 보냈다.
 
874
비가 종일 내리더니 밤까지 왔다.
 
875
8월 초2일 (정미)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양력 9월 15일]
876
초하루 한밤중에 꿈을 꾸었는데, 부안사람(李舜臣의 첩)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따져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다. 그래서 꿈이지만 내쫓아버렸다. 몸이 나은 것 같다.
 
877
저녁나절에 수루 위로 옮겨 앉아 충청수사 ∙ 순천부사 및 마량첨사와 함께 이야기 하며 새로 빚은 술을 몇 잔 마셨다.
 
878
비가 종일 내렸다.
 
879
송희립(宋希立)이 와서 아뢰기를, "흥양의 훈도도 작은 배를 타고 도망갔다" 고 했다.
 
880
8월 초3일 (무신) 아침에는 흐렸으나 저물녁에야 개었다. [양력 9월 16일]
881
충청수사와 함께 활 서너 순을 쏘았다. 수루(戍樓)의 방을 도배했다.
 
882
8월 초4일 (기유) 아침에비가 뿌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9월 17일]
883
충청수사 및 순천부사 ∙ 발포만호 등이 와서 활을 쏘았다. 수루의 방의 도배를 마쳤다.
 
884
경상수사의 군관과 색리들이 명나라 장수를 접대할 때에 여자들에게 떡과 음식물을 머리에 이고 오게 한 죄를 처벌했다.
 
885
화살장이 박옥래(朴玉來)가 와서 대를 가져 갔다.
 
886
이종호(李宗浩)가 흥양에 안수지(安守智) 등을 잡아 오려고 갔다.
 
887
8월 5일 (경술) 아침에 흐렸다. [양력 9월 18일]
888
밥을 먹은 뒤에 충청수사 ∙ 순천부사와 같이 활을 쏘았다.
 
889
오후에 경상수사 원균(元均)에게로 갔더니, 우수사가 이미 먼저 와 있었다. 서로 이야기하다가 한 시간쯤이나 지나서 돌아왔다.
 
890
이 날 웅천현감 ∙ 소비포권관 ∙ 영등포만호 및 윤동구(尹東耈) 등이 선봉장으로서 여기에 왔다.
 
891
8월 6일 (신해) 아침에 맑다가 저물녁에 비가 내렸다. [양력 9월 19일]
892
충청수사와 함께 활 열 순을 쏘았다.
 
893
저녁에 장흥부사가 들어 왔다. 보성군수가 나갔다.
 
894
탐후선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는 편안하시고 아들 면은 차츰 나아진다고 한다.
 
895
고성현령과 사도 첨사 ∙ 적도만호가 아울러 왔다가 갔다. 이 날 밤 수루의 방에서 잤다.
 
896
8월 7일 (임자)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9월 20일]
 
897
8월 8일 (계축)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9월 21일]
898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들어왔다.
 
899
8월 9일 (갑인) 비가 내렸다. [양력 9월 22일]
900
우수사 및 조방장 정응운(丁應運) ∙ 충청수사 ∙ 순천부사 ∙ 사도첨 사가 같이 이야기했다.
 
901
8월 10일 (을묘)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9월 23일]
902
충청수사 및 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이 날 장계초고를 수정했다.
 
903
8월 11일 (병진) 종일 비가 많이 내렸다. [양력 9월 24일]
904
이 날 밤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폭우가 쏟아졌다. 지붕이 세 겹 이나 벋겨져 삼대 같이 비가 샜다. 밤새도록 앉아서 새벽을 맞았 다. 양 창문은 모두 바람에 깨져 다 젖었다.
 
905
8월 12일 (정사)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9월 25일]
906
저녁나절에 충청수사 및 순천부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웅천현감 ∙ 소비포권관도 와서 활을 쏘았다.
 
907
아침에 원수의 군관 심준(沈俊)이 여기 왔다. 그 전령에, 군사 약속을 직접 만나서 논의하자고 하므로 오는 17일에 사천으로 나가 기다리겠다고 했다.
 
908
8월 13일 (무오) 맑다. [양력 9월 26일]
909
아침에 심준(沈俊)이 돌아갔다. 노윤발(盧潤發)도 돌아갔다.
 
910
오전 열 시쯤에 배에서 내려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견내량으로 가서, 별도로 날랜 장수들을 뽑아 춘원포(春原浦: 통영시 광도면 끄승개) 등지로 가서, 적을 엿보아 무찌르게 할 일을 사도첨사에게 전령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사람을 보내고 그대로 머물러 잤다.
 
911
달빛은 비단결 같고 바람 없어 잔잔하여 해(荄)를 시켜 피리를 불게 했다. 밤이 깊어서야 그만 뒀다.
 
912
8월 14일 (기미) 아침에 흐리다가 저물녁에 비가 왔다. [양력 9월 27일]
913
사도첨사 ∙ 소비포권관 ∙ 웅천현감 등이 달려 와서 보고한 내용에,
 
914
"왜선 한 척이 춘원포(春原浦)에 정박해 있으므로 불의에 엄습하였더니, 왜놈들은 배를 버리고 도망쳐 달아나기에, 우리 나라 남녀 열다섯 명을 빼앗아 돌아오고, 적의 배도 빼앗아 왔다."
 
915
고 했다. 오후 두 시쯤에 진으로 돌아왔다.
 
916
8월 15일 (경신) 맑다. [양력 9월 28일]
917
식사를 한 뒤에 출항하여, 경상수사 원균(元均)과 함께 월명포(통영시 산양면 수월리)에 이르러 잤다.
 
918
8월 16일 (신유) 맑다. [양력 9월 29일]
919
새벽에 출항하여 소비포에 이르러 정박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돛을 올려서 사천 선창((船滄: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이르니, 기직남(奇直男)이 곤양군수(이광악)와 함께 와 있었다. 그대로 머물러 잤다.
 
920
8월 17일 (임술) 흐리다가 저물 무렵에 비가 왔다. [양력 9월 30일]
921
원수가 오정에 사천에 이르러 군관을 보내어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래서 곤양의 말을 타고 원수가 머물고 있는 사천현감(기직남)이 맞아주는 곳으로 나아갔다.
 
922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 간의 예를 마치고, 그대로 함께 이야기하니 오해가 많이 풀리는 빛이다.
 
923
원균(元均) 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 수사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우습다. 술을 가지고 마시자고 청했다. 여덟 순을 돌리니 원수가 몹시 취하여 상을 물리고 헤어져 숙소로 돌아오니, 박종남(朴宗男)과 윤담(尹潭)이 와서 봤다.
 
924
8월 18일 (계해)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10월 1일]
925
식사를 한 뒤에 원수가 청하므로 나아가 이야기했다. 또 조촐한 술잔치를 벌였는데 잔뜩 취해서 아뢰고 돌아왔다. 경상수사 원균(元均)은 취해 일어나지도 못하고 드러누워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만 곤양군수(이광악) ∙ 거제현령(안위) ∙ 소비포권관(이영남) 등과 함께 배를 돌려 삼천포 앞에 이르러 잤다.
 
926
8월 19일 (갑자) 맑다. 저녁에 잠깐 비가 왔다. [양력 10월 2일]
927
새벽에 사량(통영시 사량면) 뒷쪽에 이르니,원균(元均) 수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칡을 예순 동이나 캐니, 원균(元均) 수사가 그제야 왔다.
 
928
늦게 출항하여 당포(통영시 산양면 삼덕리)에 이르러 잤다.
 
929
8월 20일 (을축) 맑다. [양력 10월 3일]
930
느지막이 출항하여 진(한산도)에 이르렀다. 우수사(이억기)와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와서 보고는 정은 곧 돌아갔다. 우수사 및 장흥부사 ∙ 사도첨사 ∙ 가리포첨사 ∙ 충청우후와 함께 활을 쏘았다.
 
931
저녁에 피리를 불고 노래했다.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미안스러운 일이 많았다.
 
932
충청수사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흥양으로 곧장 도로 돌아갔다.
 
933
8월 21일 (병인) 맑다. [양력 10월 4일]
934
외가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935
곤양군수 ∙ 사도첨사 ∙ 마량첨사 ∙ 남도만호 ∙ 영등포만호 ∙ 회령포만호 ∙ 소비포권관가 아울러 왔다. 양정언(梁廷彦)이 와서 봤다.
 
936
8월 22일 (정묘) 맑다. [양력 10월 5일]
937
나라제삿날(成宗貞顯王后 尹氏)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938
경상 우우후가 와서 봤다. 낙안군수 ∙ 사도첨사도 왔다가 갔다. 저녁에 곤양군수 ∙ 거제현령 ∙ 소비포권관 ∙ 영등포만호가 와서 이야기하고 밤이 깊어서 돌아갔다.
 
939
8월 23일 (무진) 맑다. [양력 10월 6일]
940
아침에 공문 초안을 잡았다. 밥을 먹은 뒤에 활터정자로 옮겨 앉았다. 공문을 적어 보냈다. 그대로 활을 쏘았다. 바람이 몹시 험악하게 불었다. 장흥부사 ∙ 녹도만호가 같이 왔다.
 
941
저물 무렵에 곤양군수과 웅천현감 ∙ 영등포만호 ∙ 거제현령 ∙ 소비 포권관도 왔다. 초저녁에 헤어져 돌아갔다.
 
942
8월 24일 (기사) 맑다. [양력 10월 7일]
943
각 고을에 수군을 징발하는 일로 박언춘(朴彦春) ∙ 김륜(金倫) ∙ 신경황(申景潢)을 내어 보냈다.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이 돌아갔다.
 
944
저물 무렵에 소비포가 와서 봤다.
 
945
8월 25일 (경오) 맑다. [양력 10월 8일]
946
아침에 곤양군수 ∙ 소비포권관을 불러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사도첨사가 휴가를 받아 갔다. 9월 초7일에 돌아오도록 일러 보냈다. 현덕린(玄德麟)이 제 집으로 돌아갔다. 신천기(申天紀)도 곡식을 바칠 일로 돌아갔다.
 
947
저녁나절에 흥양이 돌아왔다. 활 터정자로 내려가 활 여섯 순을 쏘았다. 정원명(鄭元明)이 들어왔다고 했다.
 
948
8월 26일 (신미) 맑다. [양력 10월 9일]
949
아침에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써 보냈다.
 
950
흥양 보자기 막동이란 자가 장흥의 군사 서른 명을 몰래 그의 배에 싣고 도망간 죄로 처형하여 효수했다.
 
951
저녁나절에 내려가 활터정자에 앉아서 활을 쏘았다. 충청우후도 와서 같이 쏘았다.
 
952
8월 27일 (임신) 맑다. [양력 10월 10일]
953
우수사는 가리포첨사 ∙ 장흥부사 ∙ 임치첨사 ∙ 우후 및 충청우후가 와서 활을 쏘는데, 흥양현감은 술을 바쳤다.
 
954
아침에 아들 울(蔚)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회를 내보냈다.
 
955
8월 28일 (계유) 밤 두시쯤부터 비는 조금 오다가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10월 11일]
956
비는 아침 여섯 시께 개었으나, 바람은 종일 세게 불고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아들 회가 잘 갔는지 아닌지 몰라서 몹시 염려된다.
 
957
진도군수(김만수)가 와서 봤다. 그 편에 원수의 장계로 해서 문책 하는 글이 내려 왔는데, 대체로 장계를 낸 것에 잘못 풀이한 때 문이었다.
 
958
8월 29일 (갑술) 맑으나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10월 12일]
959
아침에 마량첨사 ∙ 소비포권관이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활터정자로 옮겨 앉았다. 공문을 적어 보냈다.
 
960
도양장의 머슴 박돌이의 죄를 다스렸다. 도둑 세 놈중에 장손에게 곤장 백 대를 치고 얼굴에 도둑 자를 새겼다.
 
961
해남현감이 들어왔다. 의병장 성응지(成應祉)가 죽었다니, 참으로 슬프다.
 
962
8월 그믐날 (을해) [양력 10월 13일]
963
맑고 바람조차 없다. 해남현감 현즙(玄楫)이 와서 봤다.
 
964
저녁나절에 우수사(이억기) 및 장흥부사(황세득)가 와서 봤다.
 
965
저물 무렵 충청우후(원유남) ∙ 웅천현감(이운룡) ∙ 거제현령(안위) ∙ 소비포권관(이영남)도 왔다. 허정은도 왔다.
 
966
이 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몹시 위독하다고 했다. 벌써 죽고 사는 것이 결딴이 났는지 모르겠다. 나라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은 생각이 미칠 수 없다. 그러나 아들 셋 ∙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꼬! 쓰리고 아프구나.
 
967
김양간(金良幹)이 서울에서 영의정의 편지와 심충겸(沈忠謙:병조판서)의 편지를 이곳에 가지고 왔다. 분개한 뜻이 많이 적혀 있다고 했다.
 
968
원균 수사의 하는 일이 매우 해괴하다. 나더러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하니, 천년을 두고서 한탄할 일이다.
 
969
곤양군수가 병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보지 못하고 보냈으니 너무 너무 섭섭하다.
 
970
밤 열시쯤부터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못잤다.
 
 

9. 갑오년 9월 (1594년 9월)

972
9월 초1일 (병자) 맑다. [양력 10월 14일]
973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촛불을 밝힌 채 이리 저리 뒤척였다. 이른 아침에 손씻고 고요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보니, 중이 환속하는 것과 같고,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다. 또 병세가 덜해질지 어떤지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들을 조짐이었다.
 
974
순무 사서성(1558~1631)의 공문과 장계초고가 들어왔다.
 
975
9월 초2일 (정축) 맑다. [양력 10월 15일]
976
아침에 웅천현감 ∙ 소비포권관이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977
저녁나절에 낙안군수가 와서 봤다.
 
978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좀 나아졌다고 하나, 원기가 몹시 약하다고 하니 염려스럽다.
 
979
9월 초3일 (무인) 비가 조금 내렸다. [양력 10월 16일]
980
새벽에 임금의 비밀분부(有旨)가 들어왔는데,
 
981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병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
 
982
고 하였다. 세 해 동안이나 바다에 나와 있는데 그럴 리가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죽음으로써 원수를 갚을 뜻을 결심하고 나날을 보내지마는, 적이 험고한 곳에 웅거하여 있으니, 경솔히 나아가 칠 수도 없다. 하물며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983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라 일은 어지럽건만 안으로 건질 길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랴! 밤 열시쯤에 흥양현감이 내가 혼자 앉아 있음을 알고 들어와서 자정까지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984
9월 초4일 (기묘) 맑다. [양력 10월 17일]
985
아침에 흥양현감이 와서 봤다. 밥을 먹은 뒤에 소비포권관도 왔다.
 
986
저녁나절에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래서 활터 정자로 내려가 앉아 활을 쏘았다.
 
987
원균(元均) 수사가 아홉 푼을 져 술이 취해서 갔다. 피리를 불게하다가 밤이 깊어 헤어졌다. 또 미안한 일이 있었다. 우습다.
 
988
여도만호가 들어왔다.
 
989
9월 초5일 (경진) 맑다. [양력 10월 18일]
990
닭이 운 뒤에 머리가 가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 이를 긁게 했다. 바람이 고르지 않아 나가지 않았다.
 
991
충청수사가 들어왔다.
 
992
9월 초6일 (신사) 맑고 바람이 잔잔하다. [양력 10월 19일]
993
아침에 충청수사 및 우후 ∙ 마량첨사와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활터정자로 옮겨 앉아 활을 쏘았다.
 
994
이 날 저녁 종 효대(孝代) ∙ 개남(介南)이 어머니의 평안하시다는 편지를 가지고 왔다. 기쁘고 다행함을 어디다 비기랴!
 
995
방필순(方必淳)이 세상을 떠나고 방필순이 그 가족을 데리고 우리집으로 온다고 한 말을 들었다. 우습다.
 
996
밤 열시쯤에 복춘(福春)이 왔다.
 
997
저물녘에 김경로(金敬老)가 우도(右道)에 이르렀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998
9월 7일 (임오) 맑다. [양력 10월 20일]
999
아침에 순천부사의 편지가 왔는데, 순찰사(홍세공)가 초열흘 쯤에 본부(순천)에 도착된다고 했다. 좌의정(윤두수:1533~1661)도 도착된다고 했다 심히 불행한 일이다. 순천부사가 진에 있을 때 거제로 사냥을 보냈던 바, 그들은 남김없이 다 잡았다는데, 그 사정을 전혀 보고하지 않은 것이 몹시 해괴하다. 그래서 편지를 보낼 때에 그것을 지적하여 보냈다.
 
1000
9월 8일 (계미) 맑다. [양력 10월 21일]
1001
장흥부사(황세득)을 헌관(獻官)으로 삼고, 흥양현감(배흥립)을 전사(典祀)로 삼아서 초아흐레날 둑제를 지내려고 입재(入齋)시켰다. 첨지 김경로가 여기 왔다.
 
1002
9월 초9일 (갑신) 맑다. 저물녘에 비가 오다가 그쳤다. [양력 10월 22일]
1003
여러 장수들이 활을 쏘았다. 삼도가 아울러 모였는데, 원균(元均) 수사는 병으로 오지 않았다. 첨지 김경로도 같이 쏘고서 경상으로 돌아가 잤다.
 
1004
9월 초10일 (을유) 맑고 바람도 잔잔하다. [양력 10월 23일]
1005
사도첨사가 활쏘기 대회를 열었는데, 우수사도 모였다.
 
1006
김경숙(金敬叔)이 창신도로 되돌아갔다.
 
1007
9월 11일 (병술) 맑다. [양력 10월 24일]
1008
일찌기 수루 위로 나갔다.
 
1009
남평(南平)의 색리와 순천의 격군으로서 세 번이나 양식을 훔친 자를 처형했다.
 
1010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1011
저녁나절에 충청 수사가 와서 봤다.
 
1012
소비포권관은 달빛을 따라 본포로 돌아갔는데, 까닭은 원수사가 몹시 모함하려는 때문이었다.
 
1013
9월 12일 (정해) 맑다. [양력 10월 25일]
1014
일찌기 김암(金岩)이 방에 왔다.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의 종놈이 돌아가는 길에 편지답장을 써 보냈다.
 
1015
우수사 ∙ 충청수사가 함께 왔다. 장흥부사가 술을 내어 함께 이야기하다가 몹시 취해서 헤어졌다.
 
1016
9월 13일 (무자) 맑고 따뜻하다. [양력 10월 26일]
1017
어제 취한 술이 깨지 않아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1018
아침에 충 청우후가 와서 봤다. 또 조도어사 윤경립(尹敬立)의 장계 두 통을 보니, 하나는 진도군수를 파면해 달라는 것이고, 하나는 수륙 양군이 서로 침해하지 말라는 것과 수령들을 전쟁에 보내지 말라는 것이니, 그 뜻은 자못 임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019
저녁에 하천수가 장계 회답과 홍패(과거 합격자 명단) 아흔일곱 장을 가지고 왔다. 영의정 편지도 가져 왔다.
 
1020
9월 14일 (기축) 맑다. [양력 10월 27일]
1021
흥양현감이 술을 바쳤다. 우수사 ∙ 충청수사가 같이 활을 쏘았다. 방답첨사가 공사례를 했다.
 
1022
9월 15일 (경인) 맑다. [양력 10월 28일]
1023
일찌기 충청수사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망궐례를 했다. 우수사는 약속을 하고도 병을 핑게하니 한탄스럽다. 새로 합격한 사람들에게 홍패를 나누어 주었다.
 
1024
남원 도병방과 향소 등을 잡아 가두었다.
 
1025
충청우후(원유남)가 본도로 돌아갔다.
 
1026
종 경(京)이 들어왔다.
 
1027
9월 16일 (신묘) 맑다. [양력 10월 29일]
1028
충청수사 및 순천과 함께 이야기했다. 이 날 밤 꿈에 아들을 보았는데, 경의 어미가 아들을 낳을 징조다.
 
1029
9월 17일 (임진) 맑고 따뜻하다. [양력 10월 30일]
1030
충청수사 ∙ 순천부사 ∙ 사도첨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1031
우후 이몽구가 둔전에 마당질하는 일로 나갔다. 효대(孝代) 등이 나갔다.
 
1032
9월 18일 (계사) 맑고 지나치도록 따뜻하다. [양력 10월 31일]
1033
충청수사 및 흥양현감과 함께 종일 활을 쏘고서 헤어졌다.
 
1034
저물 무렵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왔다.
 
1035
이수원(李壽元) 및 담화(曇花)가 들어왔다. 복춘(福春)이 들어왔다.
 
1036
이 날 밤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을 못 이루었다.
 
1037
9월 19일 (갑오)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11월 1일]
1038
흥양현감 ∙ 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해남현감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흥양현감 ∙ 순천부사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1039
9월 20일 (을미) 새벽에 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비가 잠깐 들었다. [양력 11월 2일]
1040
홀로 앉아 간 밤의 꿈을 기억해 봤다. 꿈에 바다 가운데 외딴 섬이 달려 오다가 눈 앞에 와서 주춤 섰는데,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은 우뚝 서서 끝내 그것을 구경하니, 참으로 장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애걸하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나는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다. 이것은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다.
 
1041
충청수사와 흥양현감이 왔다. 거제현령도 와서 보고 곧 돌아갔다.
 
1042
체찰사의 공문에 수군에게 군량을 받아 들여 계속 대라고 했다. 잡아 가두었던 친족과 이웃을 다 풀어 주었다고 했다.
 
1043
9월 21일 (병신) 맑다. [양력 11월 3일]
1044
아침에 활터정자에 나가 앉아 공문을 처리하여 주고, 저녁나절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 순천부사 ∙ 충청수사가 종일 이야기 했다.
 
1045
어둘 무렵 여러 장수들이 뛰어넘기를 하게 하고, 또 사병 들로 하여금 씨름을 하게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1046
9월 22일 (정유) [양력 11월 4일]
1047
아침에 활터 정자에 앉았다. 우수사 ∙ 장흥부사 ∙ 경상우후가 와 서 명령을 듣고서 갔다.
 
1048
원수의 비밀서류가 왔는데, 27일에는 꼭 군사들을 출동시키라는 것이었다.
 
1049
9월 23일 (무술) 맑으나 바람이 사나왔다. [양력 11월 5일]
1050
아침에 활터 정자에 올라가 공문을 써 보냈다.
 
1051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군사기밀을 논의하고 갔다.
 
1052
낙안의 군사 열한 명과 방답의 수군 마흔다섯 명을 점고했다. 고성 사람들이 연명으로 하소연하였다. 진주 강운(姜雲)의 죄를 다스렸다. 보성에서 데려온 소관(召官) 황천석(黃千錫)을 끝까지 추궁했다. 광주에 가두었던 창평현 색리 김의동(金義同)을 사형하 라는 전령을 내보냈다.
 
1053
저녁에 충청수사와 마량첨사가 와서 봤다. 깊은 방이 들어서야 돌아갔다.
 
1054
초저녁에 복춘(復春)이 와서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다가 닭이 운 뒤에야 돌아갔다.
 
1055
9월 24일 (기해) 맑고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11월 6일]
1056
아침에 대청에 앉아서 공무를 봤다. 아침식사를 하는데 충청수사와 같이 먹었다.
 
1057
오늘 더그레(號衣: 각 영문의 군사와 馬上才의 軍이 입는 세 자 락 난 웃옷)을 나누는데, 전라좌도는 누른 옷 아홉 벌, 전라우도는 붉은 옷 열 벌, 경상도에는 검은 옷 네 벌이었다.
 
1058
9월 25일 (경자) 맑으며, 바람이 조금 잤다. [양력 11월 7일]
1059
첨지 김경로는 군사 일흔 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1060
저녁에 첨지 박종남(朴宗男)은 군사 육백 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1061
조붕(趙鵬)도 와서 같이 자면서 밤에 모여 앉아 이야기했다.
 
1062
9월 26일 (신축) 맑다. [양력 11월 8일]
1063
새벽에 곽재우(郭再祐) ∙ 김덕령(金德齡) 등이 견내량(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이르렀으므로 박춘양(朴春陽)을 보내어 건너온 까닭을 물었더니, 수군과 합세할 일로 원수(권율)가 전령하였다고 하였다.
 
1064
9월 27일 (임인) 아침에 맑더니 저물녘에 잠깐 비가 내렸다. [양력 11월 9일]
1065
아침에 출항하여 포구에 나가자 여러 배들도 일제히 출항하여 적도(거제시 둔덕면) 앞바다에 대었다. 그러니 첨지 곽재우(郭再祐) ∙ 충용 김덕령(金德齡) ∙ 별장 한명련(韓明璉) ∙ 주몽룡(朱夢龍) 등이 와서 약속하고 각각 원하는 곳으로 갈라 보냈다.
 
1066
저녁에 병사 선거이(宣居怡)가 배에 이르렀으므로 본영의 배를 타게 했다.
 
1067
저물무렵 체찰사의 군관 이천문(李天文) ∙ 림득의(林得義) ∙ 이홍사(李弘嗣) ∙ 이충길(李忠吉) ∙ 강중룡(姜仲龍) ∙ 최여해(崔汝諧) ∙ 한덕비(韓德備) ∙ 이안겸(李安謙) ∙ 박진남(朴振男) 등이 왔다.
 
1068
밤에 잠깐 비가 내렸다.
 
1069
9월 28일 (계묘) 흐리다. [양력 11월 10일]
1070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치는 일로 길흉을 점쳤 더니, 길한 것이 많았다. 첫 점은 활이 살을 얻은 것과 같고, 다 시 치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
 
1071
바람이 고르지 않았다.
 
1072
흉도 안바다에 진을 치고 잤다.
 
1073
9월 29일 (갑진) 맑다. [양력 11월 11일]
1074
출항하여 장문포(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앞바다로 마구 쳐들어 가니, 적의 무리는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나오지 않는다.
 
1075
누각을 높이 양쪽 봉우리에는 진지를 쌓고서 항전하러 나오지 않는다. 선봉의 적선 두 척을 무찔렀더니, 뭍으로 내려가 도망가버렸다. 빈 배들만 쳐부수고 불태웠다.
 
1076
칠천량에서 밤을 지냈다.
 
 

10. 갑오년 10월 (1594년 10월)

1078
10월 초1일 (을사) [양력 11월 12일]
1079
새벽에 출항하여 장문포에 이르렀다. 경상우수사와 잔라우수사가 장문포 앞바다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충청수사와 및 선봉의 여러 장수들과 함께 곧장 영등포로 들어가니, 흉악한 적들은 바닷가에 배를 대어 놓고 한 놈도 나와서 항전하지 않았다.
 
1080
해질 무렵에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와서, 사도의 2호선이 뭍에 배를 매려할 즈음에, 적의 작은 배가 곧장 들어와 불을 던지는데, 불은 일어나지 않고 꺼졌지만, 매우 분통하다. 우수사의 군관 및 경상우수사의 군관은 그들의 실수를 간단히 꾸짖었지만, 사도의 군관에게는 그 죄를 무겁게 시행했다.
 
1081
밤 열시쯤에 칠천량으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1082
10월 초2일 (병오) 맑다. [양력 11월 13일]
1083
다만 선봉선 서른 척으로 하여금 장문포의 적정을 가서 보고 오게 했다.
 
1084
10월 초3일 (정미) 맑다. [양력 11월 14일]
1085
몸소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일찌감치 장문포로 가서 종일 싸우려는데, 적의 무리들은 두려워 항전하러 나오지 않았다.
 
1086
날이 저물어 칠천량으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1087
10월 초4일 (무신) 맑다. [양력 11월 15일]
1088
곽재우(郭再祐) ∙ 김덕령(金德齡) 등과 함께 약속하고서, 군사 수 백 명을 뽑아 뭍에 내려, 산을 오르게 하고, 선봉을 먼저 장문포로 보내어 들락날락 하면서 싸움을 걸게 했다.
 
1089
저녁나절에 중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수륙이 서로 호응하니, 적의 무리들은 갈팡 질팡하며 기세를 잃고 동서로 바삐 달아났다.
 
1090
육군은 적이 칼을 휘드르는 것을 보고는 곧 배로 내려왔다. 돌아와 칠천량에 진을 쳤다.
 
1091
선전관 이계명(李繼命)이 표신과 선유교서를 가지고 왔다. 안에는 임금님이 하사하신 잘(貂皮: 담비의 털가죽)이 있었다.
 
1092
10월 초5일 (기유)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11월 16일]
1093
장계초고를 초잡았다.
 
1094
10월 초6일 (경술) 맑다. [양력 11월 17일]
1095
일찍 선봉으로 하여금 장문포 적의 소굴로 보내었더니, 왜놈들이 패문을 써서 땅에 꽂았는데, 그 글은,
 
1096
"일본은 명나라와 화친을 의논할 것이니, 서로 싸울 것이 없다."
 
1097
는 것이다. 왜놈 한 명이 칠 천도 산기스락에서 와서 투항하고자 하므로, 곤양군수가 잡아 배에 싣고 왔다. 물어보니, 영등포 왜적이었다.
 
1098
흉도로 진을 옮겼다.
 
1099
10월 초7일 (신해) 맑다. [양력 11월 18일]
1100
병사 선거이(宣居怡) ∙ 곽재우(郭再祐) ∙ 김덕령(金德齡) 등이 나갔다.
 
1101
띠풀 백여든세동을 베었다.
 
1102
10월 초8일 (임자) 맑고 바람조차 없다. [양력 11월 19일]
1103
아침에 출항하여 장문포 적의 소굴에 이르니, 적들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군대의 위세만 보인 뒤에 흉도로 되돌아왔다가 그대로 출항하여 한산도에 일제히 이르니, 밤은 벌써 자정이 되었다.
 
1104
흉도에서 띠풀 이백예순 동을 베었다.
 
1105
10월 초9일 (계축) 맑다. [양력 11월 20일]
1106
아침에 정자로 내려 오니 첨지 김경로 ∙ 첨지 박종남 ∙ 조방장 김응함 ∙ 조방장 한명달(韓命達) ∙ 진주목사 배설(裵楔) ∙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이 아울러 와서 아뢰고 돌아갔다. 김과 박은 종일 활을 쏘았다. 박자윤(朴子胤)은 마룻방에서 자고 춘복(春福)이 함께 잤다. 김성숙(金惺叔)은 배로 내려가 잤다.
 
1107
남해현령 ∙ 하동현감 ∙ 사천현감 ∙ 고성현령이 아뢰고 돌아갔다.
 
1108
10월 10일 (갑인) 맑다. [양력 11월 21일]
1109
아침에 나가 장계초고를 수정했다. 박자윤(朴子胤)과 곤양군수는 그대로 머물고 떠나지 않았으며, 흥양현감 ∙ 보성군수 ∙ 장흥부 사는 아뢰고 돌아갔다.
 
1110
이 날 밤 두 가지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1111
울(蔚)과 변존서(卞存緖) ∙ 유□(有憲?) 및 정립(廷立)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1112
10월 11일 (을묘) 맑다. [양력 11월 22일]
1113
아침에 몸이 불편했다.
 
1114
아침에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공문을 처리하였다. 일찍 잘방으로 들어갔다.
 
1115
10월 12일 (병진) 맑다. [양력 11월 23일]
1116
아침에 장계초고를 수정하였다.
 
1117
저녁나절에 우수사와 충청수사가 여기에 왔다.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적을 토벌한 일을 스스로 직접 장계를 올리고자 했다. 그래서 공문을 만들어 와서 주었다.
 
1118
비변사의 공문에 따르면, 원수가 쥐가죽으로 만든 남바위(耳掩: 귀가리개)를 전라좌도에 열다섯 개, 전라우도에 열 개, 경상도에 열 개, 충청도에 다섯 개를 나누어 보냈다.
 
1119
10월13일 (정사) 맑다. [양력11월24일]
1120
아침에 아전을 불러 장계초안을 지었다.
 
1121
저녁나절에 충청수사를 내보냈다. 본도우수사가 충청수사를 와서 보고도 나를 보지 않고 돌아갔다. 술이 몹시 취한 까닭이었다.
 
1122
종사관(정경달)이 벌써 사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천 1호선을 내어 보냈다.
 
1123
10월 14일 (무오) 맑다. [양력 11월 25일]
1124
새벽꿈에, 왜적들이 항복하여 육혈포(六穴砲) 다섯 자루를 바치고, 환도도 바치며, 말을 전하는 자는 김서신(金書信)이라고 하는 데, 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1125
10월 15일 (기미) 맑다. [양력 11월 26일]
1126
박춘양(朴春陽)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1127
10월 16일 (경신) 맑다. [양력 11월 27일]
1128
순무사 서성이 해질 무렵에 이곳에 왔다. 우수사 ∙ 원균(元均) 수사와 함께 같은 이야기를 했다.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1129
10월 17일 (신유) 맑다. [양력 11월 28일]
1130
아침에 사람을 어사가 있는 곳으로 보냈더니, 아침을 먹은 뒤에 당도한다고 했다.
 
1131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왔다. 어사도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경상수사 원균(元均)의 속이는 말을 많이 했다. 몹시도 해괴하다.
 
1132
원균(元均)도 왔다. 그 흉악하고도 패악한 꼴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아침에 종사관이 들어왔다.
 
1133
10월 18일 (임술) 맑다. [양력 11월 29일]
1134
아침에 바람이 세게 불다가 저녁나절에 그쳤다. 어사에게로 갔더 니, 이미 원수사에게 갔다고 했다. 그곳에 갔더니 조금 있다가 술이 나왔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종사관이 교서에 숙배례를 행하고서, 서로 인사했다.
 
1135
10월 19일 (계해) 바람이 고르지 못했다. [양력 11월 30일]
1136
대청으로 나가 앉았다가 저녁나절에 돌아와 수루의 방으로 들어 갔다. 어사가 우수사한테 가서 종일 술마시며 이야기했다고 하였다.
 
1137
아침에 종사관과 이야기했다.
 
1138
저녁에 종 억지(億只) 등을 좨쳐서 왔다.
 
1139
박언춘(朴彦春)도 왔다.
 
1140
10월 20일 (갑자) 아침에 흐렸다. [양력 12월 1일]
1141
저녁나절에 순무어사가 나갔다. 작별한 뒤에 대청으로 올라 앉 았있으니 우수사가 와서 아뢰고 돌아갔다. 공문 작성 때문에 나갔다고 생각된다. 밤 열시쯤에 비가 조금 내렸다.
 
1142
10월 21일 (을축) 맑다가 조금 흐렸다. [양력 12월 2일]
1143
종사관 ∙ 우후 ∙ 발포만호가 나갔다.
 
1144
투항해 온 왜놈 세 명이 원균(元均) 수사에게서 왔기로 문초하였다.
 
1145
영등포만호가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그에게 어린 아이가 있다고 했다. 데려 오도록 일러 보냈다.
 
1146
밤에 비가 조금 내렸다.
 
1147
10월 22일 (병인) 흐렸다. [양력 12월 3일]
1148
의능(宜能) ∙ 이적(李迪)이 나갔다.
 
1149
초저녁에 영등포만호가 그 아이를 데리고 왔다. 심부름이나 시키고자 머물러 두었다.
 
1150
10월 23일 (정묘) 맑다. [양력 12월 4일]
1151
그 아이가 아프다고 했다.
 
1152
종 억(億)의 죄와 애환(愛還) ∙ 정말동(丁唜同)의 죄를 다스렸다.
 
1153
저녁에 그 아이를 본디 있던 곳으로 보냈다.
 
1154
10월 24일 (무진) 맑다. [양력 12월 5일]
1155
우우후를 불러서 활을 쏘았다. 금갑도만호도 왔다.
 
1156
10월 25일 (기사) 맑으며 하늬바람이 세게 일었다. [양력 12월 6일]
1157
저녁나절에 그쳤다. 몸이 불편하여 방을 나가지 않았다.
 
1158
남도포만호(강응표) ∙ 거제현령이 왔다. 영등포만호(조계종)도 와서 한참 이야기하는 적에, 전 낙안군수 첨지 신호(申浩)가 와서, 체찰사(윤두수)의 공문 ∙ 목화 ∙ 벙거지 및 정목(正木) 한 동을 가지고 왔다. 그와 같이 이야기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물러갔다.
 
1159
순천부사 권준이 잡혀 갈 때에도 보러 왔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1160
10월 26일 (경오) 맑다. [양력 12월 7일]
1161
빙부(方震)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1162
첨지 신호(申浩)에게서 들으니, 김상용(金尙容)이 이랑(吏郞)이 되어 서울로 갈 때에 남원부내에 들어가 자면서 체찰사를 보지 않고 갔다고 했다. 시절이 이러하니 참으로 해괴하다.
 
1163
체찰사가 밤에 순변사의 숙소로 갔다가 밤이 깊어서 돌아와 그의 숙소로 왔다고 했다. 체모가 이럴 수가 있는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164
종 한경(漢京)이 본영으로 갔다.
 
1165
오후 여섯 시께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1166
10월 27일 (신미) 아침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12월 8일]
1167
미조항첨사(성윤문)가 와서 교서에 숙배하고, 그대로 그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뢰고 돌아갔다.
 
1168
10월 28일 (임신) 맑다. [양력 12월 9일]
1169
대청에 앉아서 공무를 봤다. 금갑만호 ∙ 이진만호가 와서 봤다. 식사를 한 뒤에 우우후 ∙ 경상우후가 와서 목화를 받아 갔다.
 
1170
저물 무렵에 잠자는 방에 들어갔다.
 
1171
10월 29일 (계유) 맑다. [양력 12월 10일]
1172
하늬바람이 몹시도 살을 에듯이 차겁다.
 
1173
10월 30일 (갑술) 맑다. [양력 12월 11일]
1174
적을 수색하여 토벌하라고 군사를 들여 보내고 싶었으나, 경상도엔 전선이 없어서 다른 배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1175
자정에 아들 회가 들어왔다.
 
 

11. 갑오년 11월 (1594년 11월)

 
1177
11월 초1일 (을해) [양력 12월 12일]
1178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1179
11월 초2일 (병자) 맑다. [양력 12월 13일]
1180
전라좌도에서는 사도첨사(김완)를, 전라우도에서는 우후 이정충을, 경상도에서는 미조항첨사 성윤문(成允文)을 장수로 정하여 적을 수색 ∙ 토벌하게 들여 보냈다.
 
1181
11월 초3일 (정축) 맑다. [양력 12월 14일]
1182
김천석(金天碩)이 비변사의 공문을 가지고 와서 투항해 온 야에몬(也汝文) 등 세 명을 데리고 진에 이르렀다.
 
1183
수색토벌하러 나갔다 오니 벌써 밤 열 시쯤이었다.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1184
11월 초4일 (무인) 맑다. [양력 12월 15일]
1185
투항해 온 왜놈들의 사정을 들었다.
 
1186
전문(箋文)을 가지고 갈 유생이 들어왔다.
 
1187
11월 초5일 (기묘)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양력 12월 16일]
1188
송한련(宋漢連)이 대구 열 마리를 잡아왔다.
 
1189
순변사(이일)가 그의 군관으로 하여금 투항해 온 왜놈 열세 명을 잡아 보냈다.
 
1190
밤새도록 비가 많이 내렸다.
 
1191
11월 초6일 (경진) 흐리고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양력 12월 17일]
1192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이정충(李廷忠)도 왔다. 첨지 신호(申浩)와 함께 이야기했다.
 
1193
송희립(宋希立)이 사냥하러 나갔다.
 
1194
11월 초7일 (신사)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12월 18일]
1195
아침에 대청으로 나갔다. 항복해온 왜놈 열일곱 놈을 남해로 보냈다.
 
1196
저녁나절에 금갑도만호 ∙ 사도첨사 ∙ 여도만호 ∙ 영등포 만호가 아울러 왔다.
 
1197
이 날 오정때에 첨지 신호는 원수가 되돌아와서는 수군에 머물러 있다더라고 보고했다.
 
1198
11월 초8일 (임오) 새벽에 잠깐 비가 뿌리더니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12월 19일]
1199
배 만들 목재를 운반해 왔다.
 
1200
새벽 꿈에, 영의정이 이상한 모양을 차려 입었고, 나는 관을 벗은 채 함께 민종각(閔宗慤)의 집으로 가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깨었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1201
11월 초9일 (계미) 맑으나 바람이 고르지 못했다. [양력 12월 20일]
1202
11월 10일 (갑신) 맑다. [양력 12월 21일]
1203
이희남(李喜男)이 들어왔다. 조카 뇌도 영문에 왔다고 했다.
 
1204
11월 11일 (을유) [양력 12월 22일]
1205
동짓날이라 11월중임에도 새벽에 망궐례를 드린 뒤에 군사들에게 죽을 먹였다.
 
1206
우우후와 정담수(鄭聃壽)가 와서 보고나서 돌아갔다.
 
1207
11월 12일 (병술) 맑다. [양력 12월 23일]
1208
일찍 대청으로 나가 순천 색리 정승서(鄭承緖)와 역자가 남원에 서 폐해를 끼쳤기로 벌주었다.
 
1209
첨지 신호에게 작별의 술을 대접 했다.
 
1210
또 견내량에서 경계선을 넘어 고기를 잡은 사람 스무네 명을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1211
11월 13일 (정해) 맑다. [양력 12월 24일]
1212
바람이 차차 자니 날도 따뜻했다.
 
1213
첨지 신호와 아들 회(薈)가 이희남(李喜男) ∙ 김숙현(金叔賢)과 함께 본영으로 갔다. 종 한경(漢京)도 은진 김정휘(金廷輝) 집에 다녀 오게 일렀다.
 
1214
장계도 내보냈다.
 
1215
원수가 방어사의 군관으로 하여금 투항해 온 왜놈 열네 명을 데리고 왔다.
 
1216
저녁에 윤련(尹連)이 그 누이의 편지를 가져 왔는데, 망발이 많다. 우습다. 버리고자 하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까닭이 있다. 버려진 세 아이가 마침내 의지할 곳이 없게 된 때문이다.
 
1217
열닷샛 날은 아버지 제삿날이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1218
밤에 달빛이 한 낮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1219
11월 14일 (무자) 맑다. [양력 12월 25일]
1220
아침에 우병사(김응서)가 투항해 온 왜놈 일곱 명을 자기 군관을 시켜 데리고 왔다. 그래서 곧 남해현으로 보냈다.
 
1221
이함(李 )이 남해에서 왔다.
 
1222
11월 15일 (기축) 맑고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양력 12월 26일]
1223
음양의 조화가 질서를 잃은 것 같으니 그야말로 재난이다. 오늘은 아버님의 제삿날이므로 나가지 않고, 홀로 앉아 있으니, 슬픈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1224
저물무렵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순천의 교생이 교서의 등본을 가져 왔다. 또 아들 울(蔚) 등의 편지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상주의 사촌 누이 편지와 그 아들 윤엽(尹曄)이 본영에 이르렀다. 편지를 보냈는데, 그걸 읽어보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영의정의 편지도 왔다.
 
1225
11월 16일 (경인) 맑으나, 바람기가 제법 쌀쌀하다. [양력 12월 27일]
1226
밥을 먹은 뒤에 대청에 앉았다. 우우후 ∙ 여도만호 ∙ 회령포만호 ∙ 사도첨사 ∙ 녹도만호 ∙ 금갑도만호 ∙ 영등포만호 ∙ 전 어란진만호 ∙ 정담수 등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1227
저녁나절에는 날씨가 무척 따뜻해졌다.
 
1228
11월 17일 (신묘) 맑고 따뜻하다. [양력 12월 28일]
1229
서리가 눈처럼 쌓였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나절에 산들바람이 종일 불었다. 밤 열 시쯤에 조카 뇌와 아들 울(蔚)이 들어왔다. 한밤에 미친 듯 바람에 세게 불었다.
 
1230
11월 18일 (임진) 맑다. [양력 12월 29일]
1231
바람이 저녁내 세게 불더니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1232
11월 19일 (계사) 맑다. [양력 12월 30일]
1233
바람이 세게 불며,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1234
11월 20일 (갑오) 맑다. [양력 12월 31일]
1235
아침에 바람이 잤다. 대청으로 나갔다. 조금 있으니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바람이 밤까지 세게 불었다.
 
1236
11월 21일 (을미) 맑다. [양력 1월 1일]
1237
아침에 바람이 잤다. 조카 뇌가 나갔다. 그리고 이설(李渫)이 포폄하는 장계를 가지고 갔다. 종 금선(金善) ∙ 우년(禹年) ∙ 이향(離鄕) ∙ 수석(水石) ∙ 행보(行寶) 등도 나갔다. 김교성(金敎誠) ∙ 신경황(申景潢)이 나갔다. 남도포만호 ∙ 녹도만호가 나갔다.
 
1238
11월 22일 (병신) 맑다. [양력 1월 2일]
1239
아침에 회령포로 나갔다. 날씨는 무척 따뜻했다.
 
1240
우우후(李廷忠)와 정담수(鄭聃壽)가 와서 봤다. 활 다섯 순을 쏘았다.
 
1241
왜놈의 옷감으로 무명 열 필을 가져 갔다.
 
1242
11월 23일 (정유) 맑고 따뜻했다. [양력 1월 3일]
1243
흥양 군량과 순천 군량 등을 받아들였다.
 
1244
저녁나절에 이경복(李景福)이 자기 소실(妾)과 함께 들어 왔다. 순변사 등이 비난을 받는다고 하였다.
 
1245
11월 24일 (무술) 맑다. [양력 1월 4일]
1246
따사롭기가 확실히 봄날 같다. 대청으로 나가서 공문을 적어 보냈다.
 
1247
11월 25일 (기해) 흐렸다. [양력 1월 5일]
1248
새벽꿈에, 이일(李鎰: 순변사)과 만나 내가 많은 말을 하며,
 
1249
"이같이 나라가 위태하고 혼란한 날을 당하여,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뱃심 좋게 음탕한 계집을 끼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성밖 여염집에 거처하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또 수군 각고을과 포구에 배정된 육전의 병기를 독촉하기에만 겨를이 없으니, 이 또한 무슨 이치요?"
 
1250
라고 하니, 순변사가 말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하품하며 기지개켜다 깨고 보니 한 바탕 꿈이었다.
 
1251
식사를 한 뒤에 대청에 앉아 공문을 적어 주었다.
 
1252
조금 뒤에 우우후와 금갑도만호가 왔다. 피리를 듣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1253
11월 26일 (경자) 소한. 맑고 따뜻하다. [양력 1월 6일]
1254
방에 앉아 있으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이 날 메주를 열 말을 쑤었다.
 
1255
11월 27일 (신축) 맑다. [양력 1월 7일]
1256
밥을 먹은 뒤에 대청으로 나가 앉아 있다가 좌도 ∙ 우도로 갈라 보낸 투항해 온 왜놈들을 모조리 와서 모았다. 그래서 총쏘는 연습을 시켰다.
 
1257
우우후 ∙ 거제현령 ∙ 사도첨사 ∙ 여도만호가 아울러 왔다.
 
1258
11월 28일 (임인) 맑다. [양력 1월 8일]
 
1259
(** 11월 28일 맨 뒷장(제3책 52장)에 나오는 자료로서 13 장에 걸쳐 적혀 있다. 먼저 그 첫장에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260
도망하기는 어렵습니다.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주춧돌 같은 인재 없으니, 거듭하여 배들을 덮어 그로 하여금 안전치 못합니다. 안으로는 방책을 세울만 한 기둥 재목 같은 인재 없으니, 기계를 고치고 다루며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였습니다. 나를 알고 저를 알면 백번 싸워도 다 이기고, 나를 알고 저를 모르 면 이기고 지는 것이 반반이며, 나를 모르고 저도 모르면 싸워봐야 반드시 지게 됩니다. 이것은 만고의 바뀌지 않는 진리입니다.
 
1261
(** 이 다음 장부터는 글 쓴 내용이 많이 고쳐 적혀 있다.)
1262
하나, 영남의 좌우 연해에 많은 적들이 가득하고, 저돌적인 침범이 근심됨이 반드시 아침 저녁 - 코앞에 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일으킨지 3년이나 되어 공사간에 재물이 다 없어지고, 학질 등의 병이 극성이어서 사망으로 거의 다 없어짐이 육지나 바다가 똑 같이 되버렸습니다. 대총 유정은 이미 군사를 철수시켜 고국으로 되돌아가니 위급한 세력의 급박함이 호흡하는 순간에 달려 있어 온갖 생각을 해도 지킬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1263
또 하나, 영남의 좌우 연해에 많은 적들이 가득하고, 저돌적인 침범이 근심됨이 반드시 아침 저녁 - 코앞에 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일으킨지 3년이나 되어 공사간에 재물이 다 없어지고, 학질 등의 병이 극성이어서 사망으로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호남의 한 도에 의뢰하였으나, 호남에도 큰 난리가 일어나, 전쟁으로 화재를 입은 땅이 더욱 심하며, 이때부터 닥칠 앞 군량과 군사를 의뢰할 곳이 전혀 없습니다. 날마다 줄어드니, 급히 모음만 같지 못하고, 곳곳의 잡색 군사 육로의 요해지를 끊어 막거나 혹 수군을 합세하여 곧바로 적진에 쳐들어 갔습니다.
 
1264
하나, 영남의 우도의 적세는 전과 같이 별로 다른 흔적이 없고, 다만 다시 그 형상을 보니, 굶은 빛이 많이 있는데, 그 뜻은 반드시 가을 곡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으며, 우리 나라가 미리 방어 해 놓고 있어야 하는 데 극히 두려워하는 자는 수군이요, 수군으로서 전쟁에 임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 모이기도 하고 흩 어지기도 하면서 옮겨 다니며 얻어 먹는 무리도 가난하게 되었 습니다. 그러나 군대가 양식을 보지 못하여 질병이 또 일고, 사망이 서로 줄을 이었으니, 여러 장수가 이에 갖추고자 공문을 원수(元帥)와 관찰사에게 돌리고 계략도 베풀 명령도 없습니다. 온갖 생각을 해보지만, 방어하여 지킬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수군의 한 가지 일이 세력이 파산되어 이 한 몸 만번 죽음도 달게 받을진대, 이 나라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수군은 사소한 군량일지라도 연 해의 여러 고을에 쌓여 있어도 관찰사와 원수가 군관을 파견하여 곳간을 뒤지어 조사해 실어 가도 저는 다른 도 먼 바다에 있으니 아무런 조치를 하지 못하였으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만약 달리 수군을 보내어 어사가 모든 수군의 일을 구 제할 수 있을 것 같아 망령되이 장계합니다. 그러나 만약 옳지 않다면 영남의 순무어사가 명령을 한 날에 겸하여 불러 모을 군 사는 오로지 물러만 갈 것입니다.
 
1265
하나, 순변사 이일(李鎰) 그 집에 있어 적들이 가까운 곳에 있 다는 것 듣고 일시에 달려와 모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해의 수군의 원 소속 병사들이 일시의 편안이 거의 내버려 두게 되어 그 고을에서 독려한다면 순변사가 연해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잡아 오지 않는 것이 일일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습니까.
 
1266
하나, 정경달(丁景達)이 종사관이 되어 다음을 다하여 감독하고 공문에, 도 안의 일이 본디부터 관찰사가 주재하고 통제하여 둔 전치는 일을 검사받게 하는 것은 실로 그 본디 임무가 아닙니다. 하물며 다른 도의 바다에 진을 치고 멀이 있으니 이 또한 검사하면서 지을 수도 없고 이 뒤로는 일체 검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제 함양군수가 되었다고 하니 민망함니다. 추수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대로 눌러 있으면서 검사하도록 장계합니다.
 
1267
하나, 파총 장홍유(張鴻儒)가 이 달 17일 진에 도착하여 우리 수군의 위세를 보고 탄복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내년 봄 산동 ∙ 천진 등에서 비호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곧바로 제주도로 경유해서 한 산도로 와서 합세하여 함께 적들을 토벌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비록 깊이 믿을 건 못되지만, 그 정황은 익히 보아온즉 빈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 3일 머물러 있으니, 송(宋) ∙ 이(李)의 옹폐(壅蔽: 어른의 총명을 막아서 가림)함이 많이 유감스럽습니다.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못 이루고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했던고, 제우치던 곽자의 그리웁구나. 긴 한숨 거듭하니 눈물만 주룩주룩 흐르는구나. 나라는 어지럽건만 바로잡을 이 그 누구뇨. 몇 해를 배를 타며 해놓은 일들도 홀로 생각하니 임만 속이고. 수십년 뱃전에서 해놓은 일들도 이제와 돌아보니 임만 속였네.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긴 한숨 거듭하니 눈물만 주룩주룩 흐르는구나.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바로잡아 세울이 아무도 없네.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했던고, 제우치던 곽자의 그리웁구나. 쓸개가 찢기는 듯 아픈 이 마음 살을 에는 양 쓰린 이 가슴 나라가 태평한지 200년이요 문물의 화려함은 3000 이라네. 몇 해를 원수 막이 꾀 뿐인걸.
 
1268
앞에서 나온 것과 본영의 것을 가져와 모으니, 하얀 접는 부채(白貼扇) 358 자루, 보통보다 달리 만든 부채(別扇) 453 자루에서 7월 10일 순변사에게 15 자루를 보냈다.
 
1269
기름친 부채(油扇) 590 자루에서 7월 10일 순변사에게 10 자루를 보냈다.
 
1270
옻칠한 부채(漆扇) 58 자루에서 5 자루를 순변사에게 보내고, 일반부채(扇扇) 50 자루에 서 10 자루를 순변사에게 보내고, 갈모(笠帽) 40개, 손칼(刀子) 323 자루, 육장부(六丈付) 2개, 들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壯油紙) 5 권, 기름 먹인 종이(注油紙) 5 권을 본영으로 가져 왔다.
 
1271
들기름 먹인 종이(壯油紙)와 기름 먹인 종이(注油紙)는 앞의 것과 같다.
 
1272
수은을 빼낸 금(火金) 70은 이미 명나라 장수에게 주었다.
 
1273
흥양에서 대대로 사는 종 매마(每馬) ∙ 대준(大俊) ∙ 영세(永世) ∙ 방죽(方竹) ∙ 영로(永老)가 큰 대(大竹) 23개, 중치 대(中竹) 23개를 7 월 4일에 만들려고 옥지(玉只)가 받아 갔다.
 
1274
크고 작은 대 93개를 7월 27일 옥지(玉只)가 만들려고 받아 갔다.
 
1275
큰 대화살(大竹箭) 65 개를 만들어 바쳤다.
 
1276
중치 대화살(中竹箭) 40개와 22개를 9월 5일에 무재(武才)가 바쳤다.
 
1277
6월 6일 삶은 대(熟竹)로서 약간 무거운 것이 50개, 상품(上品竹) 11개, 약간 가벼운 대(輕竹) 53개가 좋은 품질이다.
 
1278
가볍고 작은 대(輕小竹) 48개에서 30개를 충청병사에게 보냈다.
 
1279
큰 대 78개를 군관 등에게 주었다.
 
1280
다음 중치대(次中竹) 44개를 우수사에게 보냈다.
 
1281
좋지 않은 대(下下竹)는 26개다.
 
1282
본영(여수)의 전선 7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5 척을 정비하여 왔고, 전에 만든 2 척에서 의병에 1 척, 개조한 것이 1 척이다.
1283
순천에는 10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 전에 만든 것이 1 척, 본영의 배 1 척 방답의 배 5 척이다.
1284
흥양에는 10 척에서 그 현(縣)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2 척, 본영의 배 1 척, 사도의 배 5 척이다.
1285
낙안에는 3 척에서 그 군(郡)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1 척, 본영의 배가 1 척이다.
1286
광양에는 4 척에서 그 현(縣)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1 척, 본영의 배가 1 척이다.
1287
보성에는 8 척에서 그 군(郡)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2 척, 녹도가 2 척, 발포가 2 척이다.
1288
방답에는 4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4 척이다.
1289
여도에는 3 척에 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이다.
1290
발포에는 3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이다.
1291
사도에는 4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4 척이다.
1292
녹도에는 3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이다.
 
1293
도양장 논의 벼가 20섬 13말 5되 이고 아울러서 13섬 14말 8되와 콩 1섬 7말을 지었다.
 
1294
1594년 1월 21일에 싸움에 나갈 수군(奔赴水軍) 21 명을 내 보고, 팔결군(八結軍) 16 명을 도로 보냈다.
 
1295
5월 3일 곳간 뒤지어 조사하 니, 군량이 349섬 14말 4□, 나무를 팔아서 들인 쌀 8십□□ 모두 432섬 14말 4되에서 지금 보내온 것이 65섬 12말 4되가 있다.
 
1296
명나라 장수 장홍유(張鴻儒)의 자(字)는 중문(仲文)이고 호는 수천(秀川)이며 □강성 영파부(折江省寧波府)에 살며, 머슴은 주증(周 曾) ∙ 구덕(丘德)이고, 같이 온 기패관은 장도관(張覩 ) ∙ 반준(潘俊) ∙ 주봉(周鳳)이다.
 
 

12. 12월 기록에 없음

【원문】갑오년 (1594년)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일기〕
▪ 분류 : 고전 수필
▪ 최근 3개월 조회수 : 3203
- 전체 순위 : 3 위 (1 등급)
- 분류 순위 : 1 위 / 96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8)
• (8) 날개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난중일기(亂中日記) [제목]
 
  이순신(李舜臣) [저자]
 
  일기(日記)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 기본
◈ 참조
  1594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백과사전 으로 가기
▣ 인용 디렉터리
☞ [인물] 이순신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고전 수필 카탈로그   목차 (총 : 7권)     이전 3권 다음 한글 
◈ 난중일기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