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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839년 ◈
◇ 입당구법순례행기(839년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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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圓仁(엔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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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卷) 제(第) 1
2
 - 개성사년(開成四年)
 
 
 

839년 4월

 

4월 1일 (음)

5
- 신라인 수수가 바다를 건널 방안을 제시하다
 
6
四月一日。天晴。雲氣趍騷。未時。節下已下登陸岸。祀祠天神地祇。不久之頃雨下。艮風稍切。波浪猛涌。諸船踊騰。小澳多船。數有相觸。驚怕殊多。留學僧為送叡山。在楚州分付音信書四通黑角如意一柄。轉付記傳留學生長岑宿禰歸國既了。官人祭祀之後。共議渡海。新羅水手申云。自此北行一日。於密州管([□@考]管下池本有內字)東岸。有大([□@考]大東本作人今從下文)珠山。今得南風。更到彼山。修理船。即從彼山渡海。甚可平善。節下應之。而諸官人不肯。
 
 
7
4월 1일, 날씨는 맑았으나 하늘에는 구름이 어지럽게 흘러 다녔다. 오후 2시경에 대사 이하 관인들이 육지에 올라가 천신(天神)과 지신(地神)註 880에게 제사지냈다. 오래지 않아 비가 내렸다. 동북풍이 점차 세차게 불고 파도가 사납게 솟아올라 여러 배가 아래 위로 요동쳤다. 조그만 항구에 많은 배가 정박해 있어, 서로 자주 부딪혔으므로 놀랍고 두렵기가 더욱 더했다. 유학승 註 881이 예산(叡山)에 보내기 위해 초주에서 부탁한 서찰 4통과 흑각여의(黑角如意)註 882 註 883 1자루를 기전(紀傳) 유학생註 884 장잠숙녜(長岑宿祢)註 885에게 맡겨 귀국하여 전해주도록 하였다. 관인들이 제사를 지낸 후에 함께 바다를 건널 일을 의논했다.신라인 수수가 말하기를
 
8
“여기서 북쪽으로 하루를 가면 밀주 註 886 관내의 동쪽 연안에 대주산(大珠山)註 887이 있다. 지금 남풍을 얻는다면 곧 그 산에 도착해 배를 수리하고 즉시 그 산으로부터 바다를 건너면 반드시 무사할 것이다.”
 
9
라 하였다. 대사는 그 방법에 따르고자 했으나 여러 관인들은 수긍하지 않았다.
 
 
10
註) 880 중국 고대의 신앙 형태는 천지 어디에나 신이 깃든다고 보고 여기에 제사를 지냈다. 당대에는 국가적 제사로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가 있었다.〔《당육전(唐六典)》권4 사부랑중원외랑조〕(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30쪽).
11
註) 881 원재(圓載)를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5쪽).
12
註) 882 물소의 뿔로 만든 여의주
13
註) 883 견당사에 배속된 문장생(文章生)으로서 준판관의 지위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92쪽).
14
小野勝年은 ‘紀傳留學生(기전유학생)’으로 고쳐 문장(文章) 유학생이라 하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1, 법장관, 1964~69, 1989복간, 475쪽〕(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31쪽).
15
註) 884 장잠숙녜는 제2선의 船頭인 長岑高名을 지칭한다. 일본에서 紀傳博士는 대동 3년(808)에 설치되었다가 승화 원년(834)에 문장박사가 설치됨에 따라 폐지되었다. 圓仁이 圓載로부터 부탁받은 일을 다시 장잠고명에게 부탁한 것은 원인이 당에 잔류할 결이 굳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16
註) 885 산동성(山東省) 제성현(諸城縣)의 치소이다. 관내를 흐르는 밀수에서 온 이름이다. 당대에는 하남도에 속해 있었으며 제성(諸城), 보당(輔唐), 고밀(高密), 거(莒) 등 4현을 관장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6쪽).
17
註) 886 산동성 膠縣 남쪽에 있는 산으로,海州와 膠州의 중간에 위치한다. 대주산 아래에는 신라인들이 운영하는 선박 수리소가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그 일대에는 신라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신라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8
註) 887 산동성 교현(膠縣) 남쪽에 있는 산으로, 해주(海州)와 교주(膠州)의 중간에 위치하여 당시 항해 선박의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6쪽).
 
 

 
 

4월 2일 (음)

20
- 바다를 건널 방도를 논의하다
 
21
二日風變西南。節下喚集諸船官人。重議進發。令申意謀。第二船頭長岑宿禰申云。其大珠山。計當新羅正西。若到彼進發。災禍難量。加以。彼新羅與張寶亮。興亂相戰。得西風。及乾坤風定。著賊境。案舊例。自明州進發之船。為吹著新羅境。又從揚子江。進發之船。又著新羅。今此度九箇船。北行既遠。知近賊。況更向大珠山。專入賊地。所以自此渡海。不用向大珠山去。五箇之船同此議。節下未入意。敵論多端。戌時。從第一船遺書狀。報判官已下。其狀偁。第二三五七九等船。隨船首情願。從此渡海。右([□@考]右東本作石恐非)奉處分。具如前者。隨狀轉報既了。夜頭風吹。南北不定。
 
 
22
[4월] 2일, 바람이 서남풍으로 바뀌었다. 대사가 여러 선박의 관인들을 불러 모아 출항 문제를 거듭 의논하고 의견을 개진하게 했다. 제2선의 선두 장잠 판관이 말하기를
 
23
“대주산은 헤아려 보건대 신라의 정서쪽에 해당한다. 만약 그곳에 이르렀다가 출발한다면 재난을 헤아리기 어렵다. 더욱이 신라에는 장보고(張寶高)註 888 註 889가 난을 일으켜 서로 싸우고 있는 판국인데註 890, 서풍과 북서풍 혹은 남서풍이 불면 틀림없이 적지(賊地)註 891에 도착할 것이다. 옛 사례를 살펴보면, 명주(明州)에서 출발한 배는 바람에 떠밀려 신라 땅에 다다랐고 양자강에서 출발한 배 또한 신라에 도착했다. 지금 이번의 9척의 배는 이미 북쪽으로 멀리 왔다. 적경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다시대주산으로 향하는 것은 오로지 적지에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바다를 건너야지, 대주산으로 향해 가서는 안된다.”
 
24
라 하였다.註 892 5척의 배가 이 의견과 같았으나 대사는 아직 동의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논의가 이루어졌다. 오후 8시경에 제1선에서 서장을 보내 판관 이하에게 알렸다. 그 서장에 이르기를
 
25
“제2, 3, 5, 7, 9선 등의 배는 선두의 생각에 따라 이곳으로부터 바다를 건너라. 이것은 대사의 처분을 받들어 위와 같이 작성한 것이다.”
 
26
라 하였다. 서장에 따라 다른 배에도 그러한 사실을 알렸다. 밤이 되자 바람이 남쪽에서 불다가 북쪽에서 불기도 하여 풍향이 일정하지 않았다.
 
 
27
註) 888 그의 행적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번천문집》, 《신당서》 등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장보고는 젊은 나이에 입당하여 서주 武寧軍에서 軍中小將으로 출세하였다가 후에 신라로 돌아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무역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딸을 왕비로 들이려는 일로 왕실과 마찰을 일으켜 841년에 염장에게 피살되었다.
28
註) 889 신라인이다. 장보고는 궁복(弓福)이라고도 한다. 장보고에 관한 사실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통감(東國通鑑)》,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전하고 있다. 앞의 한국측 사료에는 궁파(弓巴)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와 중국측 자료에서는 장보고(張保皐)로 나타나고 있다. 장보고의 본래 출신은 청해진이다. 당에 건너가 30세에 무녕군절도사(武寧軍節度使)의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828년 청해진 대사가 되어 황해, 동남중국해, 일본 연해안과 무역을 하였다. 신무왕의 등극에 공이 있어 감의군사가 되었고 뒤이어 문성왕때는 진해장군이 되었다. 그 뒤 중앙정부의 정쟁에 말려 염장에 의해 살해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478쪽).
29
註) 890 서기 839년 장보고(張保皐)가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우징(祐徵, 神武王)을 즉위시킨 정변을 말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93쪽).
30
註) 891 신라를 가리킨다. 신라와 일본은 혜공왕 15년(779)을 기점으로 양국 간의 공식적인 국교가 단절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신라 땅을 적지라 칭하였다.
31
註) 892 여기서 신라를 ‘적지(賊地)’라고 한 것은 당시 악화되어 있던 신라와 일본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전쟁 당시 일본은 백제를 지원하기 위하여 원병을 보냈으나 금강(錦江)에서 일본 수군이 전선 400여 척을 잃고 대패했고 백제도 결국 망했다. 이후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한때 회복되기도 했으나 8세기 중엽 발해를 사이에 두고 긴장이 높아져서, 결국 799년을 끝으로 국가 간의 교통은 끊어졌고 다만 민간인의 왕래만 있었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93쪽).
 
 

 
 

4월 3일 (음)

33
- 다른 배로 옮겨 타라는 통보를 받다
 
34
三日第一船昨夜處分之狀。令長判官等五船頭署名。第二船署史生名。餘四船不列署名。得金正南書偁。第二三五七九等船([□@考]船東本無)。從此過海。宜遷駕第七八船者。
 
 
35
[4월] 3일, 제1선에서 어제 밤에 처분한 서장에 장잠 판관 등 5명의 선두가 서명하도록 했다. 제2선은 사생(史生)의 이름도 적었으나 나머지 4척에서는 서명을 열거하지 않았다. 김정남이 보낸 서찰을 받았다. 이르기를
 
36
“제2, 3, 5, 7, 9선 등의 배는 이곳에서부터 바다를 건넙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제6선이나 제8선에 옮겨 타십시오”
 
37
라 하였다.
 
 

 
 

4월 4일 (음)

39
- 제8선으로 옮겨 타다
 
40
四日卯時。請益僧。及惟正。惟曉。丁雄滿。為相隨相公往密州留住。下第二船。遷駕第八船。西風不變。第八船頭伴宿禰。報相公請處分。蒙相公判。宜依僧等情願者。第二船頭長岑宿禰。詣相公船。重聞渡海之事。其意猶依先議。相公宣云。夜看風色。々々不變。明日早朝。從此過海。如有風變。便向密州堺耳者。
 
 
41
[4월] 4일, 오전 6시경에 청익승 註 893과 유정, 유효, 정웅만은 상공註 894을 따라 밀주로 가서 당에 머물러 있기 위하여 제2선에서 내려 제8선으로 옮겨 탔다. 서풍은 바뀌지 않았다. 제8선의 선두 반숙녜(伴宿祢)가 상공에게 보고하여 처분을 청하였다. 상공의 결정을 받아보니 이르기를
 
42
“마땅히 승려 등이 원하는 대로 하라”
 
43
고 했다. 제2선의 선두 장잠숙녜가 상공의 배에 찾아가 거듭 바다 건너는 사안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의 의견은 앞서 논의한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상공이 말하기를
 
44
“밤에 바람의 상태를 봐야겠다. 바람이 바뀌지 않으면 내일 아침 일찍 이곳에서 바다를 건너겠지만, 만약 바람이 변한다면 곧 밀주 땅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45
고 하였다.
 
 
46
註) 893 이 책의 저자인 圓仁 자신을 말한다.
47
註) 894 양주대도독부도독 이상공을 줄인 말이다. 이덕유를 말한다. 이곳에 부인하기 전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재직하였다. 개성 2년 5월에서 개성 5년 7월까지 양주도독 및 회남절도사를 맡고 있었다(《신당서》권 180)(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162쪽).
 
 

 
 

4월 5일 (음)

49
- 숙성촌에서 불법 체류 사실이 발각되다
 
50
五日平明。信風不改。第一船牒偁。第一四六八等船。為換作船調度。先擬往密州界。修理船。從彼過海。今信風吹。因扶弱補脫。從此過海。轉報諸船者。請益僧。先在楚州。與新羅譯語[A19]金正南共謀。到密州界。留住人家。朝貢船發。隱居山裏。便向天台。兼往長安。節下不逆斯謀。今諸船從此過海。不隨節下往密州界之議。加以。信風連日不變。所以第一船只隨從此過海之說。解纜擬發。仍所求得法門一簏。兩部曼㭟羅壇樣等([□@考]等東本作寺今從池本)盛皮大箱一合。寄付第八船頭伴宿禰。兼付隨身物。請益僧。惟正。惟曉。水手丁雄滿四人。下船留住岸上。節下賜金廿大兩。諸人臨別。莫不惆悵。比至辰時。九箇船上([□@考]上東本無今從池本)帆進發。任風指東北直行。登岸望見。白帆綿連。行在海裏。僧等四人。留住山岸。為齋時。尋水入深澗。不久之間。有聞多人聲。驚恠望見。有一船到泊船處。拾([□@考]拾東本作合今從池本)有餘人。下矴停住。從船處來。問僧等在此之由。僧等答云。僧等本是新羅人。先住楚州。為往密州。有相議之由。暫駕朝使船隨相來。朝貢使船。今日過海。所以下船留此(云々)。船人等云。吾等從密州來。船裏載炭。向楚州去。本是新羅人。々數十有餘。和尚等今在此深山。絕无人家。亦當今无船往密州。夜頭宿住否。為復尋村里行。如久在此。不知風雨。隱居何處。僧等在此絕澗。忽逢斯等。不知所為。所賷隨身物。乃至食物。惣與船人。不留一物。更恐謂有金物。同心煞害。便噵向村里去。船人等語云([□@考]云下東本有從云二字恐衍)。從此南行。踰一重山。廿餘里。方到村里。今交一人送去。便將一人。相從進行。石巖峻嶮。下谿登嶺。未知人心好惡。疑慮无極。涉浦過泥。申時。到宿城村新羅人宅。暫憇息。使噵新羅僧從密州來此之意。僧等答云。新羅僧慶元。惠溢。教惠等。乘便船來。到此間。一兩日宿住。請勾當垂愍交住。爰村老([□@考]老池本作長)王良書云。和尚到此處。自稱新羅人。見其言語。非新羅語。亦非大唐語。見噵日本國朝貢使船。泊山東候風。恐和尚是官客([□@考]客下東本有從字恐衍)。從本國船上。逃來是村。不敢交官客住。請示以實。示報([□@考]報東本削之)莫作妄語。只今此村有州牒。兼押衙使下。有三四人。在此探候。更恐見和尚。楚捉入州(云々)思慮之會。海州四縣都遊將下子巡軍中張亮。張茂等三人。帶弓箭來問。從何處來。僧等擬以實答。還恐人稱有罪過楚捉。即作方便設謀。便書([□@考]書字虫損不明殘畫似書故補之)答之。僧等實是本國船上來。緣病暫下船。夜宿不覺船發。雇人到此。請差使人送去(云々)。爰軍中等。的然事由。僧([□@考]僧恐依字僧依時誤)將僧等。往村長王良家。任軍中請具錄留却之由與押衙。僧等便作狀交報。其狀偁。日本國朝貢使九箇船。泊東海山東嶋裏候風。此僧緣腹病兼患脚氣。以當月三日下船。傔從僧二人。行者一人。相隨下船。尋水登山裏。日夜將理未及平損。朝貢使船。為有信風。昨夜([□@考]夜下恐脫發去二字)早朝到船處。覓之不見矣。留却絕岸惆悵之際。載炭船一隻來。有十人在。具問事由。便教村里。僧等強雇一人。從山裏來。到宿城村。所將隨身物及([□@考]及東本作帔)衣服鉢盂錭鋺([□@考]錭鋺恐銅鐃見下文)文書澡瓶。及錢七百餘。笠子等。如今擬往本國船處。駕船歸國。請差使人送。爰子巡軍中等。更加別狀遣。報押衙都遊奕所。入夜自亥時雷鳴洪雨。大風切吹。雷電之聲。不可聽聞。麤雨惡風。不可相當。比及丑時。雷雨竝息。風色有變。早朝訪問。多噵北風。
 
 
51
[4월] 5일, 날이 밝을 무렵에도 신풍(信風)註 895은 변하지 않았다. 제1선에서 보내온 첩문에 이르기를
 
52
“제1, 4, 6, 8선 등의 배는 배의 조절 장치를 교체하기 위해 먼저 밀주 땅에 가서 배를 수리하여 그곳에서 바다를 건너고자 하였다. 그런데 지금 신풍이 불기 때문에 배의 약한 부분을 덧대고 떨어져나간 부분을 보강하여 이곳에서 바다를 건넌다. 여러 배에 차례로 이 사실을 알려라.”
 
53
고 했다. 청익승은 앞서 초주에 있을 때 신라어 통역 김정남과 더불어 모의하기를, 밀주 땅에 도착하면 민가에 머물러 있다가 조공선이 출발하고 나면 산속에 숨어 있다가 천태로 향하고 아울러 장안으로 갈 생각이었다. 대사는 이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 지금 여러 배가 이곳에서 바다를 건너기로 하고, 대사가 밀주 땅으로 가려고 하는 의론을 따르지 않았다. 게다가 신풍이 몇 일째 변하지 않기 때문에 제1선도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부터 바다를 건너자는 주장에 따라 닻줄을 풀고 출발할 예정이었다. 이런 까닭에 구하여 얻은 법문 1상자註 896와 양부만다라 및 단양(壇樣)註 897 등을 큰 가죽상자 하나에 넣어 제8선의 선두 반숙녜(伴宿祢)에게 맡기고 겸하여 개인 휴대품도 부탁했다. 청익승과 유정, 유효, 수수 정웅만 등 4명은 배에서 내려 해안 언덕에 남았다. 대사가 금 2대냥을 주었다. 여러 사람들이 우리와 작별할 때 슬프고 섭섭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54
오전 8시경이 되어 9척의 배가 돛을 올리고 출발했다. 바람에 힘입어 동북쪽을 향해 곧바로 나아갔다. 언덕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흰 돛이 연이어 바다에 떠가고 있었다. 청익승 등 4명은 바닷가의 산 언덕에 머물러 있다가 재를 들 시간이 되어 물을 찾아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오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놀랍고 괴이하여 바라보니 배 한 척이 정박지에 도착했다. 사람은 모두 10여 명인데 그곳에 닻을 내리고 머물러 정박했다. 그들이 배가 정박한 곳으로부터 와서 승려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물었다. 청익승 등이 대답하기를
 
55
“저희 승려들은 본래 신라인입니다. 일찍이 초주에 살았는데, 밀주에 가서 의논할 일이 있어 잠시 일본 조공사의 배를 타고 따라 왔습니다. 그런데 조공사의 배가 오늘 아침에 이곳에서 바다를 건너갔기 때문에 배에서 내려 이곳에 남게 되었습니다.”
 
56
운운하였다. 뱃사람들이 말하기를
 
57
“우리는 밀주에서 왔습니다. 배에 석탄을 싣고 초주로 향해 가는 중입니다. 우리도 본래 신라 사람인데, 사람의 수는 10여 명입니다. 스님 등이 있는 이 깊은 산에는 민가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지금 밀주로 가는 배도 응당 없을 것입니다. 밤에 이곳에 머물러 숙발할 것입니까? 아니면 다시 마을을 찾아갈 것입니까? 만약 이곳에 오래 있으면 비바람이 칠지도 모르는데 어느 곳에 은거할 것입니까?”
 
58
라 하였다.
 
59
우리 승려들은 인적이 끊어진 골짜기에서 갑자기 이들을 만나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가지고 있던 휴대품과 먹을 식량까지 모두 그 뱃사람들에게 주어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더욱이 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합심하여 우리를 죽일까 두려웠다.註 898그래서 마을로 가겠다고 말했다. 뱃사람들이 말하기를
 
60
“여기서 남쪽으로 가서 산 하나를 넘어 20여 리를 가면 곧 마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 사람을 딸려 보내 그대들을 데려다 주겠습니다.”
 
61
하였다. 곧 한 사람이 인솔하고 우리는 그를 따라갔다. 산은 암석으로 되어 험준하였다. 계곡으로 내려갔다가 등성이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좋은지 나쁜지 몰라 의심과 염려가 끝이 없었다. 개펄을 건너고 진흙탕을 지나 오후 4시경에 숙성촌(宿城村)註 899 註 900의 신라인의 집에 도착해 잠시 휴식했다. 문득 사람들이 신라승이 밀주로부터 여기에 온 의도를 말하게 했다. 우리 승려 등이 대답하기를
 
62
“신라 승려 경원(慶元), 혜일(惠溢), 교혜(敎惠) 등은 조공사 배에 편승해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하루 이틀 정도 이곳에서 머물고자 합니다. 청하건대 돌봐주시고 불쌍하게 여겨 머물러 있게 해주기 바랍니다.”
 
63
고 하였다. 이에 촌로(村老)註 901 註 902인 왕량(王良)이 글로 써서 말하기를
 
64
“스님이 이곳에 도착해 스스로 신라 사람이라 하나 그 말을 들어보니 신라 말도 아니고 또한 당나라 말도 아닙니다. 소문을 듣건대 일본국 조공사의 배가 산의 동쪽註 903에 정박해 바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데, 스님은 아마 조공사의 관객(官客)註 904으로 본국 배로부터 도망쳐온 것 같습니다. 이 마을은 함부로 관객을 머물게 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사실대로 말하고 망언을 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마을에는 주에서 공문이 내려와 있고 압아(押衙)註 905 註 906의 부하 서너 명이 이곳에서 탐색하고 있습니다. 아마 스님을 보면 붙잡아 주의 관청으로 끌고 갈까 두렵습니다.”
 
65
운운하였다.
 
66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에 해주 관내 4현註 907의 도유혁사(都遊奕使)註 908 註 909 휘하의 자순군중(子巡軍中)註 910인 장량(張亮), 장무(張茂) 등 3명이 활과 화살을 휴대하고 와서 묻기를
 
67
“어느 곳에서 왔는가?”
 
68
라 했다. 승려 등이 생각하기를, 사실대로 답하면 오히려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죄와 허물이 있다고 하여 붙잡아갈까 두려웠다. 그런 즉 임시방편으로 꾀를 내어 거짓으로 답하기를
 
69
“우리 승려들은 사실 일본국의 배를 타고 왔습니다. 병이 들어 잠시 배에서 내려 육지에서 밤을 지내다가 배가 출발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고용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바라건대 사인(使人)을 파견해 보내 주십시오.”
 
70
운운하였다. 이에 군중 등이 사유를 분명히 알자 곧 승려 등을 데리고 촌장 왕량의 집으로 갔다. 군중이 우리가 떨어져 남아있게 된 사유를 자세히 기록하여 압아에게 제출하라는 요청에 따라 곧 우리 승려 등은 서장을 작성해 보고했다.
 
71
그 서장에 이르기를
 
72
“일본국 조공사의 9척의 배가 동해산 동쪽 섬에 정박하여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복통과 각기병(脚氣病)註 911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이 달 3일 배에서 내렸다. 이때 시종 승려 2명과 행자(行者)註 912 1명도 따라 내렸다. 물을 찾아 산으로 올라가 밤낮으로 병을 치료註 913했으나 아직 병이 완전히 낫지 않았다. 그런데 조공사의 배는 신풍이 있었기 때문에 어젯밤에 출발해서 가버렸다. 아침 일찍 배 있던 곳에 이르러 배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인적이 끊어진 해안에 떨어져 남게 되어 실망하여 슬퍼하고 있을 때. 목탄을 실은 배 한 척이 왔는데 10명이 타고 있었다. 사유를 상세히 묻고는 곧 마을을 가르쳐 주었다. 승려 등은 억지로 한 사람을 고용해 산으로부터 숙성촌에 도착했다. 가지고 있는 개인 휴대품은 피(帔)註 914, 의복, 발우, 동완(銅鋺)註 915, 문서, 물병, 돈 700여 문, 삿갓 등이다. 지금 본국의 배가 있는 곳으로 가서 배를 타고 귀국할 생각이다. 바라건대 사인을 파견해 보내 달라.”
 
73
고 했다. 이에 자순군중 등은 다시 별도로 서장을 더하여 압아도유혁소(押衙都遊奕所)註 916에 보내 보고했다.
 
74
밤이 되어 오후 10시경부터 천둥이 치고 큰 비가 내렸으며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천둥치는 소리는 귀가 멍멍할 정도였고 거칠게 내리는 비와 거센 바람은 비길 만한 것이 없었다. 새벽 2시경에 이르러 천둥과 비가 모두 잠잠해지고 풍향도 바뀌었다. 이른 아침에 찾아가 물으니 많은 사람들이 북풍이라 하였다.
 
 
75
註) 895 일정한 방향으로 부는 바람. 순풍과 같은 의미이다.
76
註) 896 원문의 ‘簏(녹)’은 대나무로 만든 상자를 말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95쪽).
77
註) 897 戒壇의 모양을 그린 그림
78
註) 898 원인은 처음부터 이 악의 없고 친절한 신라 목탄 운송업자들을 의심하여 속이고 있다. 그 자신이 ‘본래 신라인’이라고 한 것이나,(혹시 신라 이주민의 후예인지는 모르지만) 가진 물품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주었다고 한 것 등이 그 예라 하겠다. 이러다보니 의구심은 비약하여 자기들을 살해할지도 모른다고 하기까지에 이른다. 더욱이 신라인에 대한 의심이 가득한 일기 내용은 악의에 찬 일본의 엔닌 전기작가들에 의하여 수없이 악용되어왔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자각대사전》에 보면 갑자기 해적 10명이 나타나 수신물을 약탈하려 하니 대사 등은 가진 것을 다 주었다. 마지막에 냄비까지 주었더니 받지 아니하고 마침내 자비심을 일으켜 마을로 안내하였다고 쓰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은 엔닌이 이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은 엔닌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저항주의로 임했기 때문이라고 찬양하고 있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35~136쪽).
79
註) 899 지금의 연운항시 雲台山 줄기인 숙성산 기슭에 있는 마을로, 지금도 그 자리에 숙성촌이 있다.
80
註) 900 운태산의 줄기인 숙성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신라인이 소금을 생산하고 있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490쪽).
81
註) 901 당대 촌락의 대표를 村正 또는 村長이라 하였다. 촌장은 촌락 내의 非違에 대한 감시와 농사 및 호구, 부역 등에 관한 업무를 맡았는데, 여기서의 村老는 아마 촌장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리고 촌로 王良은 재당신라인으로 보인다.
82
註) 902 촌장(村長), 촌정(村正)을 말한다. 당대의 인보 제도에 의하면 마을에 촌정 1인을 둔다고 한다. 촌로는 당령에 나오지 않지만 마을의 연장자로 덕망이 있는 자를 뜻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491쪽).
83
註) 903 동해산의 동쪽의 뜻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36쪽).
84
註) 904 공사를 수행하기 위한 여행객이라 뜻이 통상적이나, 외국 사절에게도 이 말이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일본 견당사절단에 대한 호칭이다.
85
註) 905 절도사와 각 鎭 그리고 주와 현에 소속된 하급 무관으로, 그 지방의 경찰 임무와 아울러 民事에도 관여하였다.
86
註) 906 압아(押衙)이다. 군진에서 파견된 지방의 수비관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491쪽).
87
註) 907 해주가 관할하는 朐山縣, 東海縣, 沭陽縣, 懷仁縣 등 4개의 현을 지칭한다.
88
註) 908 유혁은 巡邏의 뜻으로, 도유혁사는 병졸을 이끌고 관내를 순찰하는 고급 무관이다.
89
註) 909 도유혁사사학(都遊奕使使下)를 말한다. 유혁은 순라의 뜻이다. 유혁사는 병을 거느리고 순시하는 자를 말한다. 장하는 유혁사 장의 부하라는 말이다. (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493쪽).
90
註) 910 《신당서》 백관지에 의하면, 절도사와 관찰사 하에는 각각 관내를 순시하고 감찰하는 巡官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자순군중은 순관 소속으로 관내를 순시 감찰하는 군졸이다.
91
註) 911 다리가 마비되어 저리고 부어 걷기가 곤란한 병이다.
92
註) 912 재가 불도 수행자로서, 여기서는 정웅만을 가리킨다.
93
註) 913 원문 ‘평손(平損)’의 손(損)은 감한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치료한다는 뜻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37쪽).
94
註) 914 소매가 없이 어깨에 걸치는 여름용 옷을 이름이다.
95
註) 915 주물로 제작한 구리로 만든 식기
96
註) 916 경비군의 본부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97쪽).
 
 

 
 

4월 6일 (음)

98
- 내일 숙성촌을 떠나기로 하다
 
99
六日天晴。縣家都使來請狀。依昨樣作狀。與之。子巡將等。差夫二人。遣泊船處。令看彼船發未。但緣使者遲來。不可得發去。子巡將張亮云。今差夫一人。將和尚隨身衣服。到第二舶處。到山南即覓驢駄去。在此无處借賃驢馬者。晚頭。縣都使來云。余今日旦行。明日在山南。作䭦飩。兼雇驢。待和尚來。須明日早朝。但喫粥早來。齋時已前。到彼空飯。語了即去。少時。押衙差州司衙官李順把狀走來。其狀偁。彼九隻船發未。專到那嶋裏。看定虛實。星夜交人報來者。子巡張亮。據看船使說。便作船已發。竝不見之狀。差人報示於押衙所。
 
 
100
[4월] 6일, 날씨가 맑았다. 현의 도사(都使)註 917 註 918가 와서 서장을 청하였다. 어제 양식에 의거하여 서장을 작성해 그에게 주었다. 자순군장(子巡軍將)註 919 등이 인부 두 사람을 뽑아 배가 정박해 있던 곳으로 보내 그 배가 출발했는지 아직 떠나지 않았는지 살펴보게 했다. 그런데 사신이 늦게 왔으므로 출발할 수 없었다. 자순군장 장량이 말하기를
 
101
“지금 인부 한 사람을 뽑아 스님은 휴대품과 의복을 가지고 제2선이 있는 곳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산의 남쪽에 도착하면 당나귀를 구하여 타고 가십시오. 여기서는 당나귀나 말을 빌릴 곳이 없습니다.”
 
102
라 하였다.
 
103
저녁 무렵에 현의 도사가 와서 말하기를
 
104
“나는 오늘 바로 떠납니다. 내일 산 남쪽에서 박돈(䭦飥)註 920을 만들고 겸하여 당나귀를 빌려놓고 스님이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모름지기 내일 이른 아침에 죽만 먹고 일찌감치 오십시오. 재를 들기 이전에 그 곳에 도착하여 공반(空飯)을 드십시오.”
 
105
라는 말을 마치고 곧 떠났다. 잠시 뒤에 압아가 보낸 주사(州司)의 아관(衙官)註 921 註 922 이순(李順)이 서장을 가지고 달려왔다. 그 서장에 이르기를
 
106
“그 9척의 배가 출발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반드시 그 섬에 가서 살펴보고 허실을 분명히 하라. 밤일지라도 사람을 보내 보고하라.”
 
107
고 했다. 자순군장 장량은 배를 살펴본 사인의 말에 의거하여
 
108
“배는 이미 출발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109
라는 서장을 작성해 사람을 보내 압아소에 보고했다.
 
 
110
註) 917 당대의 현에는 원래 도사라는 직책이 없다. 여기서의 도사는 아마 현의 하급 관리를 그렇게 칭한 것으로 보인다.
111
註) 918 절도도사(節度都使)라하여 수개의 절도사를 관장한 직책이다. 당말에는 병마사의 상위에 도병마사가 있어 어느 것의 약칭인지 확실하지 않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497쪽).
112
註) 919 자순(子巡)보다 상위직인 자순군장(子巡軍將)을 말한다. 장량의 군직은 글 가운데에 자순군중, 자순, 자순장 등으로 나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497쪽).
113
註) 920 떡의 일종이다. 라이샤워는 부돈을 국수라 하였다(《엔닌의 일기》, 107쪽).
114
註) 921 자사가 절도사나 團練使를 겸임할 경우에 배치된 속관으로, 압아와 마찬가지로 본래는 무관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히 압아소의 관원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115
註) 922 아관(牙官)이다. 자사가 절도사나 단련사를 겸하고 있을 경우 설치한 속관으로 본래는 군직이다. 여기에 아관은 압아소의 관리를 지칭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498쪽).
 
 

 
 

4월 7일 (음)

117
- 현청으로 가다
 
118
七日卯時。子巡軍中張亮等二人。雇夫令荷隨身物。將僧等去。天暗雲氣。從山裏行。越兩重石山。涉取鹽處。泥深路遠。巳時。到縣家都使宅齋。々後。騎驢一頭。傔從等竝步行。少時有一軍中迎來[A20]云。押衙緣和尚等遲來。殊差使人催來。未時。到興國寺。々人等云。押衙在此。不得待遲來。只今發去。寺主煎茶。便雇驢三頭。騎之發去。驢一頭行廿里。功錢五十文。三頭計百五十文。行廿里。到心淨寺。是即尼寺。押衙在此。便入寺相看。具陳事由。押衙官位姓名。海州押衙兼左二將十將四縣都遊奕使。勾當蕃客朝議郎試左金吾衛張實。啜茶之後。便向縣家去。更雇驢一頭。從尼寺到縣廿里。晚頭到縣。到押司錄事王岸家宿。驢功與錢廿文。一人行百里百廿文。
 
 
119
[4월] 7일, 오전 6시경에 자순군중 장량 등 두 사람이 인부를 고용하여 개인 휴대품을 등에 지게하고 우리 승려 등을 인솔해 갔다. 날씨는 어둡고 구름이 끼어 있었다. 산을 따라 가다가 2개의 돌산을 넘고 염전을 건너갔다. 진흙탕은 깊고 길은 멀었다. 오전 10시경 현의 도사 집에 도착해 재를 들었다. 재를 마친 후 나는 당나귀 1마리를 빌려 타고, 시종 등은 모두 걸어갔다. 잠시 후에 군졸 1명이 마중을 나왔다. 말하기를
 
120
“압아는 스님 등이 늦게 오기 때문에 특별히 사인을 보내 재촉해서 오라고 했습니다.”
 
121
라 하였다. 오후 2시경 흥국사(興國寺)註 923에 도착했다. 절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122
“압아는 여기 있다가 오는 것이 늦어지기에 기다릴 수가 없어 방금 떠났다.”
 
123
고 했다. 절의 주지가 차를 끓여주었다. 당나귀 3마리를 빌려 그것을 타고 출발해 갔다. 당나귀 1마리로 20리를 가는데 드는 삯은 50문이다. 3마리를 합하면 150문이다. 20리를 가서 심정사(心淨寺)에 도착했다. 이곳은 곧 비구니 절이다. 압아는 이곳에 있었다. 곧 절로 들어가 만나 뵙고 사유를 자세히 말했다. 압아의 관위와 성명은,해주압아(海州押衙) 겸 좌이장십장(左二將十將)註 924 註 925 사현도유혁사(四縣都遊奕使) 구당번객(勾當蕃客)註 926 註 927 조의랑(朝議郞)註 928 시좌금오위(試左金吾衛)註 929 註 930 장실(張實)이다. 차를 마신 후 곧 현의 관청으로 갔다. 다시 당나귀 1마리를 빌렸다. 비구니 절에서 현까지는 20리이다. 저녁 무렵 현에 도착해 압사녹사(押司錄事)註 931 註 932 왕안(王岸)의 집에 이르러 묵었다. 당나귀를 빌린 삯으로 20문을 주었다. 한 사람이 100리를 타고 가면 삯은 120문이다.
 
 
124
註) 923 《대청일통지》 권27을 통해서 해주의 거평산(巨平山) 동북쪽에 있었으며 원화 2년(807)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00쪽).
125
註) 924 二將은 알 수 없으나, 十將은 절도사 휘하의 하급 군관이다.
126
註) 925 십장(十將)은 절도십장(節度十將), 주병십장(主兵十將) 등으로 절도사 막하의 하급 장교이다. 좌이장은 알 수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02쪽).
127
註) 926 외국인에 관한 제반 업무를 담당하는 관직으로, 해주에는 신라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설치되지 않았을까 한다.
128
註) 927 구당이라는 말은 담당한다는 뜻이다. 외국인의 접촉과 관련된 관리를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02쪽).
129
註) 928 정6품의 문산관이다.
130
註) 929 試는 정식으로 임명받지 않은 試官이란 뜻이고, 금오위는 당의 친위대인 六衛 가운데 하나이다.
131
註) 930 금오위는 당 친위대 가운데 하나이다. 좌우로 나누어 경사, 궁궐의 순찰, 경비 등을 맡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02쪽).
132
註) 931 당나라 제도에 의하면, 押司 즉 司는 주에서만 사용되고 현에는 없었다. 그러나 司는 일반 관리의 범칭으로 사용되기도 하므로 압사녹사는 현의 서기직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133
註) 932 당제는 주에 녹사참군사(錄事參軍事), 녹사(錄事)를 둔다. 현에도 녹사를 두는 것으로 되어 있다. (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03쪽).
 
 

 
 

4월 8일 (음)

135
- 제2선이 정박한 곳에 이르다
 
136
八日早朝。喫粥之後。押衙入縣。少時歸來。縣令通直郎守令李夷甫。縣並([□@考]並字有疑恐尉)登仕郎前試太常寺奉禮郎攝並([□@考]並字有疑恐尉)崔君原。主簿將仕郎守主簿李登。縣尉文林郎尉花達。捕賊官文林郎尉陸僚等相隨。押衙來看。共僧等語話。主人與縣令等。設酒食喫飯即歸。押衙及僧等。齋後出王錄事宅。向舶處。押衙與八箇軍中。排比小船。駕之同發。縣令李夷甫。以新麵二斗寄張押衙獻州刺史。第二船。在前路小海。押衙噵。此縣是東岸。州在西岸。良判官緣病來上舶船。從此小海西岸有海龍王廟。良判官只今於此廟裏安置。今擬往彼良判官處。令相看(云々)。上帆直行。從舶邊直過。僧等且欲上舶。押衙不肯。未時。到海龍王廟。相看良岑判官。粟([□@考]粟下池本有田字)錄事。紀通事。神參軍等。具陳留任之由。兼話辛苦之事。判官等聞之。或惆悵。或歡來。此間其和錄事。病在舶上。法相請益戒明法師。并新羅譯語道玄等。同在舶上。乍到得相看。押衙云。三僧入州。略看大夫。便合穩便。僧等三人相隨。押衙入州去。從神廟西行三許里([□@考]許里池本作里許)。到州門前。押衙及將等。先入內報。少時喚僧等。且入至刺史前。著椅子令座。問拋却之由。令押衙申。刺史姓顏名措。粗解佛教。向僧等自說。語話之後。便歸神廟。刺史顏大夫。差一軍將。令相送僧等三人及行者。暫住海龍王廟。從東海山宿城村。至東海縣。一百餘里。惣是山路。或駕或步。一日得到。從六日始。東北風吹。累日不改。恐彼九隻船。逢雷雨惡風之後不得過海歟。憂悵在懷。僧等為求佛法。起謀數度。未遂斯意。臨歸國時。苦設留却之謀事亦不應遂彼探覓也。左右盡議。不可得留。官家嚴撿。不免一介。仍擬駕第二舶歸本國。先在揚州楚([□@考]州楚東本作楚揚)州。覓得法門并諸資物。留在第八船。臨留却所將隨身之物。胡洪嶋至州之會。竝皆與他。空手([□@考]手東本作年今從池本)駕船。但增歎息。是皆為未遂求法耳。
 
 
137
[4월] 8일, 이른 아침에 죽을 먹은 후 압아가 현에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되돌아왔다. 현령 통직랑(通直郞)註 933 수현령(守縣令)註 934 註 935 이이보(李夷甫), 현승(縣丞)註 936 등사랑(登仕郞)註 937 전시태상시봉례랑(前試太常寺奉禮郞) 섭승(攝丞)註 938 註 939 최군원(崔君原), 주부(主簿)註 940장사랑 수주부(守主簿)註 941 이등(李登), 현위(縣尉)註 942 문림랑(文林郞)註 943 위화달(尉花達), 포적관(捕賊官)註 944 註 945 문림랑(文林郞)註 946 위육료(尉陸僚) 등이 압아를 따라와 승려들과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인註 947이 현령 등에게 술과 음식을 차려주니 식사를 하고 곧 돌아갔다. 압아와 우리 승려 등은 재를 마친 뒤 왕 녹사 집에서 나와 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압아는 8명의 군졸과 함께 작은 배를 정비하여 그것을 타고 함께 출발했다. 현령 이이보가 햇밀가루 2말을 장압아에게 맡겨 주의 자사에게 바치도록 부탁했다.
 
138
제2선은 앞길의 작은 만에 있었다. 압아가 말하기를
 
139
“이 현은 곧 동쪽 연안에 있고 해주는 서쪽 연안에 있다. 양잠(良岑) 판관註 948은 병 때문에 아직 배에 타지 못하고 있다. 이 조그만 만의 서쪽 해안에 해룡왕묘(海龍王廟)註 949가 있는데, 양잠 판관은 지금 그 사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지금 양잠 판관이 있는 곳에 가서 서로 만나볼 수 있게 할 생각이다.”
 
140
운운하였다. 돛을 올리고 곧바로 나아가 제2선 언저리를 따라서 곧장 지나갔다. 승려 등이 잠시 그 배에 올라가보고 싶었으나 압아는 동의하지 않았다.
 
141
오후 2시경에 해룡왕묘에 도착하여 양잠 판관, 속전(粟田) 녹사, 기(紀) 통사,註 950 신(神) 참군註 951 등을 만나 머물러 있게 된 사유를 자세히 말했다. 아울러 고생한 이야기를 했다. 판관 등은 그 이야기를 듣고 슬퍼하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온 것을 기뻐했다. 그 무렵에 화기(和氣) 녹사註 952는 병이 나서 배 위에 있었고, 법상종 청익승인 계명법사(戒明法師)와 신라어 통역 도현(道玄) 등도 함께 배 위에 있었다. 후일에 문득 거기에 가서 만나볼 수 있었다. 압아가 말하기를
 
142
“세 명의 승려는 주에 들어가 대부註 953를 잠깐 만나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143
고 하였다. 우리들 승려 3명은 압아를 따라 주에 들어갔다. 신묘에서 서쪽으로 3리 정도를 가서 주 관청의 문 앞에 도착했다. 압아와 군장 등이 먼저 안에 들어가 보고했다. 잠시 후에 승려 등을 불렀으므로 또한 안으로 들어가 자사 앞에 이르렀다. 의자에 앉아서 우리를 앉게 하고, 뒤떨어져 남게 된 사유를 물었으므로 압아로 하여금 그 사정을 아뢰게 했다. 자사의 성은 안(顔)이고 이름은 조(措)이다. 불교를 대충 이해하고 있었는데, 승려 등을 향해 불교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서로 대화를 나눈 후에 곧 신묘로 되돌아왔다. 자사인 안대부 註 954가 군장 1명을 파견해 승려 3명과 행자를 호송해 주었다.
 
144
잠시 해룡왕묘에 머물렀다. 동해산 숙성촌에서 동해현에 이르기까지는 100리 정도였는데 모두 산길이었다. 타고 가기도 하고 혹은 걸어가기도 하여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6일부터 불기 시작한 동북풍은 며칠 동안 풍향이 바뀌지 않았다. 9척의 배가 천둥과 폭우 그리고 세찬 바람을 만난 후에 바다를 건너지 못하지는 않았을까 걱정과 탄식이 마음에 가득하다. 우리 승려 등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 여러 차례 꾀를 내었으나 아직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절단이 귀국할 즈음에 떨어져 남을 모의를 힘들게 도모했으나 역시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들키고 말았다. 좌우에서 온갖 논의를 다했으나 머무르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관가에서 엄하게 조사하여 조그만 일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래서 제2선을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앞서 양주와 초주에 있을 때 구해서 얻었던 법문과 여러 물건들은 제8선에 그냥 두었다. 배에서 내려 떨어져 남고자 할 때 가지고 있던 개인 휴대품은 호홍도(胡洪島)에서 주(州)에 이르는 사이에 모두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빈손으로 배를 타게 되니 다만 탄식이 더할 뿐이다. 이는 모두 아직 구법의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145
註) 933 문산관질(文散官秩)의 종6품 아래의 벼슬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00쪽).
146
註) 934 통직랑은 문산계 從6品下인데, 동해현은 上縣이기 때문에 종6품상으로 보임해야 한다. 그래서 현령 이이보를 守縣令이라 하였다.
147
註) 935 문산관 종6품하이다. 동해현은 상현(上縣)이기 때문에 현령도 종6품상이여야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07쪽).
148
註) 936 현의 행정 차관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00쪽).
149
현의 차관으로 종8품하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43쪽).
150
註) 937 정9품 아래의 문산관(文散官)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00쪽).
151
註) 938 攝은 보조하다 혹은 대신하다 라는 뜻으로, 현승은 從8品下로서 보임되는데 登仕郞 곧 종9품상인 사람이 縣丞의 직책을 대행하였으므로 攝丞이라 표기하였다.
152
註) 939 등사랑은 문산관 정9품하이며 태상시봉례랑은 종9품상이다. 섭(攝)은 임시의 뜻으로 9품의 대우를 받는 사람이 현승의 직을 맡고 있어서 섭이라고 한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07쪽).
153
註) 940 현의 제3위에 해당하는 서무 주임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00쪽).
154
註) 941 장사랑은 문산계 종9품하인데 현의 주부는 정9품하가 보임되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守主簿라 하였다.
155
註) 942 현의 제4위에 해당하는 경찰관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00쪽).
156
註) 943 현위는 정9품하이며 문림랑은 문산관 종9품상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43쪽).
157
註) 944 《구당서》와 《신당서》 등에 보이지 않는 관직이지만 中唐 이후 현 관원으로 새로 추가된 관직으로 보인다.
158
註) 945 당 직관에는 없지만 중기 이후의 지방관제로 추측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08쪽).
159
註) 946 종9품의 문산관(文散官)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00쪽).
160
註) 947 녹사 왕애(王岸)를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08쪽).
161
註) 948 요시미네노 나가마쓰[良岑長松]를 말한다. 후지와라노 도요나미[藤原豊並]가 죽은 뒤 그를 대신해 제2선의 선장이 되었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43쪽).
162
註) 949 용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00쪽).
163
불교 경전에서는 여러 용의 으뜸을 용왕 또는 용신이라 부른다. 용왕은 팔부중(八部衆)의 하나로 불법을 수호하고 그 영험은 매우 크다고 믿고 있다. 이에 따라 서진(西晋)의 축법호(竺法護)의 번역이라 전해지는 《해룡왕경》이 많이 읽혔다. 그런데 묘(廟)라고 한 것으로 보면 이 해룡왕묘는 도교와 불교가 서로 습합(習合)된 곳이라고도 생각된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43쪽).
164
註) 950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권5 승화 3년 윤5월 신사조에 나오는 기춘주(紀春主)를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09쪽).
165
註) 951 참군은 당의 錄事參軍事의 약칭인데, 여기서는 견당사절단의 녹사를 참군으로 표기한 듯하다. 한편 참군 神某의 행적은 미상이다.
166
註) 952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권5 승화 3년 2월 무인조의 화기숙녜익웅(和氣宿禰益雄)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11쪽).
167
註) 953 주(州)의 장관(刺史)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01쪽).
168
고관에 대한 존칭이다. 자사의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자사는 하현(下縣)이라 해도 그 계위는 정4품하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44쪽).
169
註) 954 고급 관리에 대한 존칭이다. 여기서는 해주자사 안조를 가리킨다.
 
 

 
 

4월 9일 (음)

171
- 북동풍이 불다
 
172
九日。風猶艮隅。夜頭風受西方。
 
 
173
[4월] 9일, 바람은 여전히 북동풍이었다. 밤에는 바람이 서쪽에서 불었다.
 
 

 
 

4월 10일 (음)

175
- 제2박에 승선하다
 
176
十日。亦西起。未時。良岑判官。出廟上船。僧等相隨。上舶相看戒明法師及道玄闍梨等。粟([□@考]粟下池本有田字)錄事。紀通事。為有勾當事。未上船。
 
 
177
[4월] 10일, 바람은 역시 서쪽에서 불었다. 오후 2시경에 양잠 판관이 사당에서 나와 배에 올랐다. 우리 승려 등도 뒤따라 배에 올라가 계명법사와 도현스님註 955 등을 만나 보았다.속전 녹사와 기(紀) 통사는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 배에 타지 않았다.
 
 
178
註) 955 신라인 통역관 도현을 말한다. 지금 일본 오쓰에 있는 온죠사 소장의 국보 《당인시권(唐人詩卷)》에 나오는 ‘진서노석도현상(鎭西老釋道玄上)’의 도현과 같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도현은 엔닌뿐만 아니라 일본 천태종 5세 좌주였던 엔진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듯하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46쪽).
 
 

 
 

4월 11일 (음)

180
- 항해 도중에 해안에 기착하다
 
181
十一日。卯時粟([□@考]粟下池本有田字)錄事等。駕舶便發。上帆直行。西南風吹。擬到海縣西。為風所扇。直著淺濱。下帆搖櫓。逾至淺處。下棹衡路跓。終日辛苦。僅到縣。潮落舶居泥上。不得搖動。夜頭停住。上舶語云。今日從宿城村。有狀報偁。本國九隻船數內。第三船。流著密州大珠山。申時。押衙及縣令等兩人。來宿城村。覓本([□@考]本池本作求)和尚。却歸船處。但其一船。流著萊州界。任流到密州大珠山。其八隻船。海中相失。不知所去(云々)。亥時。曳纜擬出。亦不得浮去。
 
 
182
[4월] 11일, 오전 6시경에 속전(粟田) 녹사 등이 배에 타자 즉시 출발하여 돛을 올리고 똑바로 갔다. 서남풍이 불어 동해현 서쪽에 다다를 생각이었으나, 바람에 떠밀려 곧바로 얕은 해변에 닿았다. 돛을 내리고 노를 저었으나 더욱 더 얕은 곳에 이르렀다. 삿대를 내려 물길을 가늠하려고 멈추었다. 하루 종일 고생하여 겨우 현에 도착했다. 조수가 빠져나가자 배가 진흙 위에 얹혀 움직일 수 없었다. 밤에 그곳에서 정박해 머물렀다. 어떤 사람이 배에 올라와 말하기를 오늘 숙성촌에서 서신이 왔는데 그 서장에 이르기를
 
183
“본국의 배 9척 중에서 제3선은 떠밀려 밀주 대주산에 도착했다. 오후 4시경에 압아와 현령 두 사람이 숙성촌에 와서, 본국 스님을 찾아내 배가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다만 배 1척은 내주(萊州)註 956 경내에 표착했다가 이리 저리 떠밀려 밀주 대주산에 도착했다. 다른 8척의 배는 바다 가운데에서 서로 잃어버려 그 행방을 알지 못한다.”
 
184
운운하였다. 밤 10시경에 닻줄을 끌며 개펄에서 나오고자 하였으나, 역시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185
註) 956 산동반도 북부에 있는 州로, 掖縣, 昌陽縣, 卽墨縣, 膠水縣 등 4현을 관할하였다.
 
 

 
 

4월 12일 (음)

187
- 풍향이 일정치 않아 출항하지 못하다
 
188
十二日平旦。風東西不定。舶未浮去。又從縣有狀。報良岑判官等偁。朝貢使船內第三船。流著當縣界。先日便發者。未見正狀。風變不定。
 
 
189
[4월] 12일, 날이 밝을 무렵 바람이 동쪽에서 불다가 서쪽에서 부는 등 일정치 않았다. 배를 아직도 띄울 수가 없었다. 또 현에서 서장이 와서 양잠 판관 등에게 알려 이르기를
 
190
“조공선 가운데 제3선은 우리 현의 경내에 표착했는데, 전일에 출발한 것이다.”
 
191
하였다. 아직 정식 서장을 보지 못했다. 바람 방향이 자주 변하여 일정하지 않다.
 
 

 
 

4월 13일 (음)

193
- 수수 1명이 사망하다
 
194
十三日早朝。潮生擬發。緣風不定。進退多端。午後風起。西南轉成西風。未時。潮生。舶自浮流東行。上帆進發。從東海縣前。指東發行。上艇解除。兼禮住吉大神。始乃渡海。風吹稍切。入海不久。水手一人。從先臥病。申終死去。裹之以席。推落海裏。隨波流却。海色稍清。夜頭風切。直指行。
 
 
195
[4월] 13일, 이른 아침에 조수가 밀려와 출발하고자 했으나 바람이 일정하지 않아 나갔다 들어오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오후 1시경에 서남쪽에서 바람이 불다가 바뀌어서 서풍이 되었다. 오후 2시경에 조수가 생겨 저절로 떠서 동쪽으로 갔다. 돛을 올리고 출발해 동해현 앞 쪽에서 동쪽을 향해 갔다. 거룻배를 타고 해제(解除)하였다. 아울러 주길대신에게 예배하고 비로소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바람이 점점 세차게 불었다. 바다로 들어온 지 오래지 않아, 전부터 병이 들어 누워 있던 수수 1명이 오후 5시경에 죽어버렸다. 그것을 거적에 싸서 바다로 밀어 떨어뜨리니 파도를 따라 흘러갔다. 바다 색깔이 조금 맑아졌다. 밤에 바람이 계속 불었으므로 똑바로 나아갔다.
 
 

 
 

4월 14일 (음)

197
- 용왕에게 제사지내다
 
198
十四日平明。海還白濁。風途不變。望見四方。山嶋不見。比至午時風止。海色淺綠。未時。南風吹。側帆向丑。戌時。為得順風。依灌頂經設五穀供。祠五方龍王。誦經及陁羅尼。風變西南。夜半。風變正西。隨風轉舳。
 
 
199
[4월] 14일, 날이 밝을 무렵 바다가 다시 뿌옇게 흐려졌다. 바람 부는 방향은 바뀌지 않았다. 사방을 멀리 바라보아도 산이나 섬은 보이지 않았다. 11시가 될 무렵에 바람이 그치고 바다의 색깔은 엷은 녹색이 되었다. 오후 2시경에 남풍이 불어 돛을 비스듬히 기울여 배가 북북동쪽으로 향해 가도록 했다. 오후 8시경에 순풍을 얻기 위하여 《관정경(灌頂經)》註 957 註 958에 의거하여 오곡(五穀) 공양을 마련하여 오방(五方)의 용왕註 959에게 제사지내고 불경과 다라니註 960를 독송하였다. 바람이 서남풍으로 바뀌었다가 밤중에는 정서풍으로 변하였다. 바람에 따라서 뱃머리를 전환시켰다.
 
 
200
註) 957 大灌頂經 혹은 大灌頂神呪經이라고도 한다. 東晉의 帛尸梨密多羅가 역출한 것으로 12권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제9권에 灌頂召五方龍王攝疫毒神呪上品經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 부분에 의거하여 용왕에게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201
註) 958 동진 전기에 구차국의 백시리밀다(帛尸梨密多羅)가 번역하였다고 전하지만 확실하지 않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19쪽).
202
註) 959 동방의 청룡왕(靑龍王), 남방의 적룡왕(赤龍王), 서방의 백룡왕(白龍王), 북방의 흑룡왕(黑龍王), 중앙의 황룡신왕(黃龍新王)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20쪽).
203
註) 960 총지(總持) 또는 능지(能持) 등으로 번역되며 선법(善法)을 지녀 망실하지 않는 염혜(念慧)의 힘을 말한다. 따라서 본래의 일종의 기억술을 가리켰으나 그 형식이 주문을 염송하는 것과 같아서 뒤에 와서 주(呪)를 일러 모두 다라니라고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20쪽).
 
 

 
 

4월 15일 (음)

205
- 동북쪽으로 항해하다
 
206
十五日。平明。海水紺色。風起正西。指日出處而行。巳時風止。未時。東南風吹。側帆北行。水手一人。病苦死去。落却海裏。申時。令卜部占風。不多宜。但占前路。雖新羅堺([□@考]堺池本作界)。應无驚恠(云々)。舶上官人。為息逆風。同共發願。祈乞順風。見日沒處當大櫂正中。入夜祭五穀供。誦般若灌頂等經。祈神歸佛。乞順風。子時。風轉西南。不久變正西。見月沒處。當艫柂倉之後。
 
 
207
[4월] 15일, 날이 밝을 무렵에 바닷물이 짙푸른 색이었다. 바람이 정서쪽에서 불어, 해가 뜨는 쪽을 향해 나아갔다. 오전 10시경에 바람이 그쳤다. 오후 2시경에 동남풍이 불었으므로 돛을 비스듬히 기울여 북쪽으로 나아갔다. 수수 1명이 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었다. 사체를 바다에 떨어뜨렸다. 오후 4시경에 복부(卜部)註 961 註 962로 하여금 바람을 점치게 했더니 마땅치 않은 점이 많았다. 또한 앞 길에 대하여 점을 치니
 
208
“비록 신라 땅이라 할지라도 놀라고 괴이하게 여길 것은 없다.”
 
209
운운하였다. 배 위의 관인들은 역풍을 멈추도록 하기 위해 모두 함께 발원하여 순풍이 불기를 빌었다. 해가 지는 곳을 보니 대도(大櫂)註 963의 꼭 중간에 해당하였다. 밤이 되어 오곡을 공양하며 제사지내고 《반야경(般若經)》註 964 註 965과 《관정경》 등의 경전을 독송하며 신에게 빌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순풍 불기를 빌었다. 밤 12시 무렵에 바람이 서남풍으로 바뀌었다가 오래지 않아 정서풍으로 변하였다. 달이 지는 곳을 보니 선미의 타창(柂倉)註 966 뒤쪽에 해당되었다.
 
 
210
註) 961 귀갑 등을 가지고 길흉화복을 점치는 사람이다. 神衹官에 소속된 관원으로 보통 음양사 등과 함께 견당사절단에 참여하였다.
211
註) 962 견당사선에는 음양사, 주신 등과 함께 복부도 승선하였다. 복부는 신기관(神祇官)에 예속되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22쪽).
212
註) 963 배 중앙에 설치된 큰 노. 뱃머리와 배 꼬리에는 小櫂가 설치되어 있었다.
213
註) 964 大乘最勝의 지혜를 설파한 경전이다. 일반적으로 《대반야바라밀다경》, 《마하반야경》, 《인왕반야경》 등이 널리 독송된다.
214
註) 965 반야는 혜, 지혜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이 경은 대승최승(大乘最勝)의 지혜를 설파한 경전이다. 《대반야바라밀다경》, 《마하반야경》, 《인왕반야경》 등이 널리 독송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22쪽).
215
註) 966 선미에서 키잡이가 키를 조종하는 작은방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22쪽).
 
 

 
 

4월 16일 (음)

217
- 안개 속에서 항해하다
 
218
十六日。平明。雲霧雨氣。四方不見。論風不同。或云西風。或云西南風。或云南風。望見晨日。當於舳([□@考]舳東本作舶)小櫂腋門。便知向東北去。側帆而行。或疑是南風歟。上天雖晴。海上四方。重霧塞滿。不得通見。今日始主水司。以水倉水。充舶上人。官人已下。每人日([□@考]池本作日每人)二升。傔從已下。水手已上。日每人一升半。午未之後。見風色。多依東南。指子側行。霧晴天雲。於艮坎坤。有凝雲塞。請益僧違和不多好。不喫飯漿。入夜洪雨。辛苦無極。
 
 
219
[4월] 16일, 날이 밝을 무렵 구름과 안개가 끼고 비가 올 듯하여 사방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의 방향에 대한 논의가 제각각으로 달랐다. 어떤 사람은 서풍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서남풍이라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남풍이라 하였다. 아침 해를 멀리 바라보니 뱃머리의 작은 노를 설치한 옆문 방향에 해당되었다. 그런 즉 배는 동북쪽을 향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돛을 비스듬히 기울여 나아갔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남풍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늘은 비록 개었으나 바다 위는 사방으로 안개가 꽉 차서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오늘 처음으로 주수사(主水司)註 967가 물 탱크의 물을 배 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관인 이하는 한 사람당 하루에 2되, 시종 이하 수수 이상에게는 한 사람당 하루에 1되 반이었다. 낮 12시경에서 오후 2시경 이후까지 바람 부는 것을 살펴보니 동남풍에 많이 의존했다. 북쪽을 향해 돛을 옆으로 하여 나아갔다. 안개는 걷혔으나 하늘에 구름이 끼었다. 동북쪽, 정북쪽, 서남쪽에 구름이 모여들어 꽉 차 있다. 청익승註 968은 심신의 조화를 잃어 상태가 썩 좋지 않아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밤이 되자 비가 내려 고생이 극심했다.
 
 
220
註) 967 주수사는 원래 천자에게 올리는 湯水 등을 관장하는 관리였으나, 여기서는 선박의 식수를 맡아 관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221
註) 968 청익법사는 원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1卷, 鈴木學術財團, 1964, 524쪽).
 
 

 
 

4월 17일 (음)

223
- 등주 모평현 도촌에 도착하다.
 
224
十七日早朝雨止。雲霧重。云不知向何方行。海色淺綠。不見白日。行迷方隅。或云向西北行。或云向正北行。或云前路見嶋。進行數尅。海波似淺。下繩量之。但有八尋。欲下矴停。不知去陸遠近。有人云。今見海淺。不如沈石暫住。且待霧霽。方定進止。眾咸隨之。下矴繫留。僅見霧下有白波擊激。仍見黑物。乃知是嶋。髴未分明。不久霧氣微霽。嶋體分明。未知何國境。便下艇。差射手二人。水手五人。遣令尋陸地。問其處名。霧氣稍晴。北方山嶋相連。自東南始。至于西南。綿連不絕。或云。是新羅國南邊。令卜部占之。稱大唐國。後噵新羅。事在兩盈。未得定知。持疑之際。所遣水手射手等。將唐人二人來。便噵登州牟平縣唐陽陶村之南邊。去縣百六十里。去州三百里。從此東有新羅國。得好風。兩三日得到(云々)。船舶上官人。賜酒及綿。便作帖報州縣。緣天未晴。望見山頭未得顯然。東風吹。日暮霧彌暗。
 
 
225
[4월] 17일, 이른 아침에 비가 그쳤다. 구름과 안개가 두껍게 끼어 있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바다 색깔이 옅은 녹색이고,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가는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226
“서북쪽을 향해 가고 있다.”
 
227
말하고, 어떤 사람은
 
228
“정북쪽을 향해 가고 있다.”
 
229
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230
“앞쪽에 섬이 보인다.”
 
231
라 하였다. 몇 시간을 나아가니 바다의 파도가 얕은 곳에서 이는 것 같았다. 끈을 내려 그 깊이를 재어 보니 단지 8심(尋)이었다. 닻을 내리고 머물고자 하여도 육지와의 거리가 먼지 가까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232
“지금 보니 바다의 깊이가 얕다. 닻돌을 내려 잠시 머물며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다가 바야흐로 갈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233
고 했다. 모두 그 의견에 따라 닻을 내리고 머물렀다. 안개 아래로 흰 물결이 서로 부딪히는 것을 겨우 볼 수 있었다. 이어 검은 물체가 보였는데, 곧 그것이 섬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안개가 조금 걷히자 섬의 형체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어느 나라 땅인지 알지 못했다. 곧 거룻배를 내려 사수 2명과 수수 5명을 뽑아 보내 육지를 찾아가 그곳의 이름을 물어보게 했다. 안개가 점차 걷혀 맑아지니 북쪽에 산과 섬이 서로 이어져 있었는데, 동남쪽에서부터 서남쪽까지 연이어 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234
“이곳은 신라국의 남쪽 언저리이다.”
 
235
라 하였다. 복부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하니 이르기를
 
236
“당나라이다.”
 
237
라 하였다. 그러다가 뒤에 신라라고 말했다. 두 가지 답 사이에 걸쳐 있어 아직 분명히 알 수 없었다. 의심을 품고 있을 때 앞서 보낸 사수와 수수가 당나라 사람 2명을 데리고 왔다. 곧 말하기를
 
238
“이곳은등주(登州) 모평현(牟平縣) 당양향(唐陽鄕) 도촌(陶村)의 남쪽이다. 현과는 160리 떨어져 있고 주와는 300리 떨어져 있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에 신라국이 있는데, 순풍을 만나면 2, 3일 안에 도달할 수 있다.”
 
239
운운하였다. 배 위의 관인들이 술과 면(綿)을 주었다. 곧 첩문을 작성해 주와 현에 보고하였다. 날씨가 맑아지지 않았으므로 산꼭대기는 멀리 바라보이지만 아직 뚜렷하지 않았다. 동풍이 불었다. 해질 무렵에 안개가 더욱 어둡게 끼었다.
 
 

 
 

4월 17일 (음)

241
-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다
 
242
十八日。改食法。日每人糒一升。水一升。東風不變。又此州但有粟。其粳米最貴(云々)。請益僧。為早到本國。遂果近年所發諸願。令卜部祈禱神等。火珠一箇。祭([□@考]祭池本作奉)施於住吉大神。水精念珠一串。施於海龍王。剃刀一柄。施於主舶之神。以祈平歸本國。
 
 
243
[4월] 18일, 식사 규정을 바꾸어 하루에 한 사람당 말린 밥(糒)註 969 1되와 물 1되로 하였다. 동풍은 변하지 않았다. 또 이 주(州)註 970에는 다만 좁쌀만 있고 맵쌀은 매우 귀하다고 한다.청익승은 일찍 본국에 도착하여 근년에 발원한 여러 가지를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복부로 하여금 신(神) 등에게 기도하게 했다. 화주(火珠)註 971 1개를 주길대신에게 받들어 올려 제사지내고, 수정염주 1개를 해룡왕에게 바치고, 체도(剃刀) 1자루를 배의 주신(主神)에게 바쳐 본국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했다.
 
 
244
註) 969 찹살을 쪄서 말린 것으로, 옛날부터 병사의 식량이나 여행용 식량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245
註) 970 등주를 가리킨다. 등주는 蓬萊縣, 牟平縣, 文登縣, 黃縣 등의 4현을 관할하였다.
246
註) 971 인도·페르시아 등지에서 주로 산출되는 옥으로 수정을 갈아서 만든다고 한다.
 
 

 
247
권(卷) 제(第) 2
248
 - 개성사년(開成四年)
 
 
 

4월 19일 (음)

250
- 소촌포에 정박하다
 
251
([□@考]開成四年四月)十九日平明。天晴。北風吹。舉矴南出。未時風止。搖櫓指西南行。申時。到邵村浦下矴繫住。當於陶村之西南。擬入於澳。逆潮遄流不能進行。
 
 
252
개성 4년(839) 4월 19일, 날이 밝을 무렵 날씨가 맑고 북풍이 불었다. 닻을 끌어 올리고 남쪽으로 나아갔다. 오후 2시경에 바람이 그쳤으므로 노를 저어 서남쪽을 향해 갔다. 오후 4시경 소촌포(邵村浦)註 001에 도착해 닻을 내리고 밧줄로 배를 묶고 머물렀다. 이곳은 도촌(陶村)註 002의 서남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조그만 만(灣)으로 들어가려 했으나註 003 역류하는 조수가 세차게 흘러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253
註) 001 산동성(山東省) 모평현(牟平縣) 유산구(乳山口) 서남쪽 해안에 소촌(邵村)이라는 지명이 있다. 소촌포(邵村浦)는 그 지역의 해안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쪽).
254
註) 002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이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소촌포의 동북쪽에 있는 촌락으로 보인다.
255
註) 003 해안 내의 물 근처의 지점을 말하는 것으로, 강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쪽).
 
 

 
 

4월 20일 (음)

257
- 장보고의 정변 소식을 듣다
 
258
廿日早朝。新羅人乘小船來。便聞張寶亮。與新羅王子。同心罰得新羅國便令其王子作新羅國王子既了。南風稍切。緣潮逆遄不得定住。東西往復。搖振殊甚。
 
 
259
[4월] 20일, 이른 아침에 신라인이 작은 배를 타고 왔다. 문득 듣건대
 
260
“장보고(張寶高)註 004가 신라 왕자와 합심하여 신라국을 징벌하고 곧 그 왕자를 신라국의 왕자註 005로 삼았다.註 006 註 007
 
261
고 하였다. 남풍이 다소 세차게 불고 역류하는 조수의 물결이 거셌기 때문에 한 곳에 가만히 머물 수가 없었다. 동서로 왔다 갔다 하여 요동이 매우 심했다.註 008
 
 
262
註) 004 신라인이다. 장보고는 궁복(弓福)이라고도 한다. 장보고에 관한 사실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통감(東國通鑑)》,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전하고 있다. 앞의 한국측 사료에는 궁파(弓巴)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와 중국측 자료에서는 장보고(張保皐)로 나타나고 있다. 장보고의 본래 출신은 청해진이다. 당에 건너가 30세에 무녕군절도사(武寧軍節度使)의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828년 청해진 대사가 되어 황해, 동남중국해, 일본 연해안과 무역을 하였다. 신무왕의 등극에 공이 있어 감의군사가 되었고 뒤이어 문성왕때는 진해장군이 되었다. 그 뒤 중앙정부의 정쟁에 말려 염장에 의해 살해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一卷, 鈴木學術財團, 1964)
263
註) 005 여기에서 왕자는 구어(口語)로, 왕과 동일한 말이다. 4월 24일조에 보이는 신라의 왕자도 동일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5쪽).
264
註) 006 金祐徵 즉 신무왕을 말한다. 김우징의 아버지 김균정은 흥덕왕이 죽은 후 金悌隆과의 왕위 쟁탈전에서 패하여 피살되자 그의 아들인 김우징이 청해진에 망명해 후일을 도모하였다. 그때 마침 金明이 희강왕을 살해하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김우징은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김명)을 내쫒고 즉위하였다. 이가 곧 신무왕이다.
265
註) 007 우징(祐徵, 839), 즉 신무왕(神武王)을 가리킨다. 우징은 김균정(金均貞)의 아들이다. 흥덕왕(826~835)이 죽은 후, 아버지인 균정은 희강왕(僖康王, 제륭)과의 왕위 쟁탈전에서 살해되었기 때문에, 청해진(완도)으로 망명했다. 그런데 마침 김명(金明, 훗날 민애왕)이 희강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에 반대해 우징은 장보고 등의 원조를 받아, 달벌구(대구)에서 싸워서 김명의 군대를 격파시키고 왕위에 즉위하였다. 때는 서기 839년 정월 19일이다(《삼국사기》 권10) 원인은 장보고와 서로 본 적은 없지만, 이미 대재부(大宰府)를 출발할 때 축전태수(筑前太守) 小野岑守의 소개장을 얻었다(2월 17일조) 장보고는 일본에 건너갔는데, 대재부의 관리와 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인도 돌아올 때 만약 우리나라 연해를 항해하였다면 저들의 신세처럼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항해했던 신라국 내의 뉴스에 대해서는 특히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무왕의 재위는 짧았는데 즉위한 해 7월 23일에 사망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5쪽).
266
註) 008 이것과 같은 날 내용을 근거로 원인은 《일본국승화5년입당구법목록》을 작성하고 있다. 《입당구법성교목록(入唐求法聖敎目錄)》의 날짜가 올바르다고 한다면 이것을 작성한 것은 항해 중의 일이 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5~6쪽).
 
 

 
 

4월 21일 (음)

268
- 남풍이 세차게 불다
 
269
廿一日雲霧。午後南風切吹。
 
 
270
[4월] 21일, 구름과 안개가 끼었다. 오후에 남풍이 세차게 불었다.
 
 

 
 

4월 22일 (음)

272
- 협초 한 사람이 죽다
 
273
廿二日雲雨。申時。挾抄一人死却。載艇移置嶋裏。
 
 
274
[4월] 22일, 구름이 끼고 비가 왔다. 오후 4시경에 협초(挾抄)註 009 註 010 한 사람이 죽어, 거룻배에 싣고 섬으로 옮겨 안치했다.
 
 
275
註) 009 배의 키를 조종하는 선원으로, 梢工이라고도 한다.
276
註) 010 협초(挾抄)는 지휘자이다. 초공(梢工, 뱃사공)과 같은 말이다. 협(挾)은 정확하게는 나무 끝에 만들어야만 한다. 초(杪)는 초(梢)와 같은 뜻으로, 나무의 끝을 가리킨다. 특별히 장대의 의미도 있고 키(柁)의 끝을 가리키기도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7~8쪽).
 
 

 
 

4월 23일 (음)

278
- 남풍이 불다
 
279
廿三日。雲氣南風。
 
 
280
[4월] 23일, 구름이 끼고 남풍이 불었다.
 
 

 
 

4월 24일 (음)

282
- 당 관리가 선박을 둘러보고 가다
 
283
廿四日霧雨。此泊舶之處結纜。々斷。風吹浪高。近日下八箇纜。其三箇纜矴竝斷落。所餘之纜甚少。設逢暴風。不能繫住。憂怕無極。
284
廿四([□@考]四或五誤)日。西風吹。暮際騎馬人來於北岸。從舶上差新羅譯語道玄。令迎。道玄却來云。來者是押衙之判官。在於當縣聞噵。本國使船。泊此日久。所以來擬相看。緣夜歸去。不得相看。明日專詣於舶上。更令新羅人。留於岸上。傳語於道玄。轉為官人令申來由。便聞本國朝貢使。駕新羅船五隻。流著萊明([□@考]明恐州字)廬山之邊。餘之四隻。不知所去。雖聞是事。未詳是第幾之船。又聞大唐天子。為新羅王子賜王位。差使擬遣新羅排比其船。兼賜祿了。
 
 
285
[4월] 24일, 안개가 끼고 비가 왔다. 이 배가 정박한 곳에 매어 놓았던 밧줄註 011이 끊어졌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았다. 요 며칠 사이에 8개의 닻줄을 내렸는데, 그중에 3개의 닻줄이 끊어져 닻과 함께 바다로 떨어졌다. 남아 있는 밧줄은 아주 적어, 만약 폭풍을 만나면 배를 묶어두고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걱정과 두려움이 이를 데 없다.
 
286
서풍이 불었다.註 012 해질 무렵에 말을 탄 사람이 북쪽 해안에서 왔다. 배에서는 신라어 통역 도현(道玄)을 보내 맞이하게 했다. 도현이 돌아와
 
287
“왔던 사람은 바로 이 현의 압아의 판관(判官)註 013 註 014이다. 말하는 것을 들으니 ‘일본국 사절단 배가 이 곳에 오래도록 머물고 있으므로 만나볼 생각으로 왔으나, 밤이 되어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겠다. 내일 반드시 배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288
라 말했다. 다시 신라인을 보내 해안에 머물게 하고 도현을 통해 본국 관인에게 이곳에 오게 된 연유를 말하게 했다. 문득 그들의 말을 들으니
 
289
“본국 조공사가 신라선 5척을 타고 내주(萊州) 여산(廬山)註 015 부근에 떠밀려 도착했는데, 나머지 4척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290
고 하였다. 비록 이러한 사실을 들었으나 아직 그것이 몇 번째 배인지 상세히 알 수 없다. 또 듣건대
 
291
“당나라 천자가 신라 왕자註 016에게 왕위를 내리기 위해註 017 사절을 신라에 보내고자註 018 하여 그 배를 정비하고 있다. 아울러 녹(祿)을 내려 주었다”
 
292
고 하였다.
 
 
293
註) 011 배를 매는 밧줄이다. 여기에서는 배를 연결하고 정지시키기 위해 닻에 붙인 밧줄을 가리키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8쪽).
294
註) 012 원문은 “24일 서풍이 불었다”이다. 전의 문장과 중복해서 날짜를 기재하고 있는 것은 연문(衍文)으로, 문장의 미정리 때문이라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0쪽).
295
註) 013 당나라 제도에서의 판관은 절도사와 관찰사 등의 막료로서 副使에 버금가는 고관이었으나, 말기로 갈수록 그 지위가 하락하였다. 여기서의 판관은 압아 밑에서 사무를 관장하는 속관 정도로 이해된다.
296
註) 014 여기에서 말하는 판관(判官)은 압아(押衙)의 밑에서 사무 등을 관장하는 속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제도에서 판관은 절도사(節度使)·관찰사(觀察使)·단련사(團練使)·방어사(防禦使) 등의 막료로서 부사(副使)와 비슷한 관인으로, 이를테면 고급사무관을 가리킨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 군진(軍鎭)에도 설치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0쪽).
297
註) 015 초본에서는 내명(萊明) 여산(廬山)이라고 한다. 내주(萊州) 여산(廬山)이라고 해야 한다. 여산은 산동성(山東省) 제성현(諸城縣)·동황현(同黃縣) 등에 같은 이름의 산이 있다. 그러나 모두 내지(內地)이고, 관할도 달라서 해변과는 무관하다. 비교적 해안 근처로 조건에 맞는 곳이 모평현 동쪽 약 10리에 있는 여산이다. 여(廬)는 노(盧)인데 서로 음이 같고, 황해에 접하고 있다. 개성 4년 2월 27일조에도 모평현 동반리에 여산사가 있다고 하는데, 이 절도 아마 여산과 관련해서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등주(登州)의 관할 범위에는 내주(萊州)가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1쪽).
298
註) 016 여기서 왕자는 구어(口語)로, 왕과 동일한 말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5쪽).
299
원문의 賜王位(사왕위)는 신라왕의 책봉을 말한다. 아마도 신무왕이 즉위한 뒤 당이 책봉사를 신라로 파견하려던 계획과 관련된 소식을 들은 것 같다. 같은 해 6월 28일의 일기에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당 양국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 사료로 귀중하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61쪽).
300
註) 017 당 조정에서 신라 신무왕을 책봉하기 위한 冊立使 파견 사실을 말해주는 기사이다.
301
註) 018 당나라가 신라왕을 책봉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신무왕이 즉위한 후 당나라에서는 일찍 사절을 파견했는데, 신라가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에게 노비를 보냈던 것은 《책부원귀》·《삼국사기》 등에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는 이 해(839) 7월의 일이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보다 먼저 당에서 책립사(冊立使)를 파견할 계획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인은 그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같은 해 6월 28일조에 의하면 정사(正使)인 청주병마사(靑州兵馬使) 오자진(吳子陳), 부사(副使) 최모씨, 판관(判官) 왕모씨 이하 30여명이 단원이었다고 한다. 본 내용은 당·신라 양국 관계의 다른 사료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기사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1쪽).
 
 

 
 

4월 25일 (음)

303
- 소촌포를 나와 운항하다
 
304
廿五日。風吹不定。霧氣未晴。午時。昨日後岸歸去押衙之判官寄王教言。贈與於官人酒魚等。王教言。亦自獻酒餅等來。官人賜綿等。此舶([□@考]舶或泊字)多有潛磯。每當浪漂斷纜。沈矴五六度矣。未後。搖櫓向乳山去。出邵村浦。從海裏行。未及半途。暗霧儵起。四方俱昏。不知何方之風。不知向何方行。拋矴停住。風浪相競。搖動辛苦。通夜無息。
 
 
305
[4월] 25일, 바람 부는 방향이 일정치 않고, 안개가 끼어 맑지 않다. 12시경 어제 해안을 뒤로 하고 되돌아간 압아 판관이 왕교언(王敎言) 편에 술과 생선을 부쳐 보냈다. 왕교언 역시 스스로 술과 떡을 해 와 바쳤으므로 관인이 그에게 면(綿) 등을 주었다. 정박해 있는 이 곳은 암초가 많아 파도에 떠다닐 때마다 닻줄이 끊겨 닻을 빠뜨린 것이 5, 6차례였다. 오후 3시경에 노를 저어 유산(乳山)註 019 註 020을 향해 갔다. 소촌포 註 021에서 나와 바다로 나와 항해했다. 갈 길의 절반도 채 이르지 못하여 짙은 안개가 갑자기 피어올라 사방이 온통 어두워졌다. 그래서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부는지, 배가 어느 쪽으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닻을 내리고 정박해 머물렀으나 풍랑은 서로 다투듯이 일어남에 배가 흔들려 고생이 심했다. 그러한 것이 밤새 그치지 않았다.
 
 
306
註) 019 산동성 海陽縣의 동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부근에 乳山河, 乳山口, 乳山寨 등이 있다.
307
註) 020 유산(乳山)은 산동성 해양현의 동북쪽에 해당한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권137 등주부(登州府)조에 “유산은 영해주(寧海州) 서남쪽 160리에 있다”고 한다. 지금 근처에 흐르는 물은 유산하(乳山河)라 하고, 부근에 유산구(乳山口), 유산채(乳山寨) 등도 존재하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3쪽).
308
註) 021 산동성(山東省) 모평현(牟平縣) 유산구(乳山口) 서남쪽 해안에 소촌(邵村)이라는 지명이 있다. 소촌포(邵村浦)는 그 지역의 해안으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4쪽).
 
 

 
 

4월 26일 (음)

310
- 압아에게 생료를 요청하다
 
311
廿六日。早朝雲霧微霽。望見乳山。近在西方。風起東北。懸帆而行。巳時。到乳山西浦。泊舶停住。山嶋相衛。如垣周圍。其乳山之體。峻峰高穎。頂上如鋒。山根自嶺下而指六方。於澳西邊。亦有石山。巖峰竝嶺。高秀半天。東之與北。雖有山連。而猶斜耳。未時。新羅人卅餘。騎馬乘驢來云。押衙。潮落擬來相看。所以先來候迎。就中有一百姓云。昨日從廬山來。見本國朝貢船九隻俱到廬山。人物無損。其官人等。惣上陸地。作幕屋在。從容候風(云々)。不久之間。押衙駕新羅船來。下船登岸。多有娘子。朝貢使判官。差新羅譯語道玄。遣令通事由。[A1]已後。粟錄事下舶。到押衙處相看。兼作帖請食粮。先在東海縣。但過海之粮。此舶過海。逆風却歸。流著此間。事須不可在此喫過海粮。仍請生料(云々)。押衙取狀云。更報州家。取處分。晚頭歸宅。終日東北風吹。
 
 
312
[4월] 26일, 이른 아침에 구름과 안개가 조금 걷혔다. 유산을 멀리 바라보니 서쪽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람이 동남쪽에서 불었으므로 돛을 올리고 나아갔다. 오전 10시경에 유산의 서쪽 포구에 도착해 배를 정박시키고 머물렀다. 산과 섬들이 서로 감싸듯이 담장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유산의 모양은 험준하고 높이 솟아 정상은 마치 칼날과 같았고, 산줄기는 산봉우리에서 여섯 방향註 022으로 뻗어 내렸다.註 023 포구의 서쪽 언저리에도 역시 돌산이 있는데, 바위 봉우리가 모두 산의 능선을 이루고 빼어나 우뚝 솟아 하늘을 반으로 나누었다. 동쪽과 북쪽에도 비록 모두 산이 이어져 있으나 다소 비스듬했다.
 
313
오후 2시경에 신라인 30여 명이 말과 나귀를 타고 와서 말하기를
 
314
“압아는 조수(潮水)가 빠지면 와서 만나보려고 한다. 그래서 마중하기 위해 미리 와서 기다린다.”
 
315
고 했다. 그중에 한 백성이 말하기를
 
316
“어제 여산으로부터 왔는데, 일본국 조공선 9척이 모두 여산에 도착한 것을 보았다. 사람이나 물건은 상한 것이 없었다. 그 배의 관인 등은 모두 육지에 올라가 천막집을 짓고 조용히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317
운운하였다.
 
318
오래지 않아 압아가 신라선을 타고 와서 배에서 내려 해안에 올라갔다. 거기에는 낭자(娘子)註 024 註 025들이 많이 있었다. 조공사 판관이 신라어 통역 도현을 보내 이곳에 온 사유를 말하도록 했다. 오전 11시경註 026 속(粟) 녹사가 배에서 내려 압아의 처소에 가서 만나보았다. 겸하여 첩문을 작성해 식량을 청하기를
 
319
“앞서 동해현에 있을 때 단지 바다를 건너는데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준비했다. 이 배는 바다를 건너려 하였으나 역풍을 만나 되밀려서 이곳에 표착했다. 이러한 사정이니 이곳에 있으면서 바다를 건널 때 먹을 식량을 먹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생료(生料)註 027 註 028를 청한다.”
 
320
운운하였다. 압아가 서장을 받아 보고 말하기를
 
321
“다시 주 관청에 보고하여 처분을 받겠다.”
 
322
고 하였다.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갔다. 하루 종일 동북풍이 불었다.
 
 
323
註) 022 남북 상하의 여섯 방향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108쪽).
324
註) 023 유산구 서쪽의 타산(垜山)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이 산에 대해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타산은 해양현 동쪽 20리에 있다”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쪽).
325
註) 024 젊은 여성에 대한 존칭으로, 여기서는 유산포 인근에 살던 재당 신라 여인들을 말한다. 한편 일본학자 今西龍은 이들을 遊女라 하였으나(《신라사연구》 336쪽) 적절한 해석이 아니다.
326
註) 025 낭자(娘子)는 아내 또는 부인을 부르는 칭호로 사용된다. 후에 존칭이 되었지만, 당나라 때에는 존비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였다. 다만 이미 양귀비를 낭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존칭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광명자(光明子)를 등삼랑(藤三娘)으로 부르는 것 또한 똑같은 것이다. 한편 今西龍은 이곳에 보이는 낭자를 단순한 처녀가 아니라 신라의 기생(遊女)라고 해석하고 있다(《新羅史硏究》 336쪽). 실은 당나라 때에도 창기(娼妓)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었다(《通俗編》권18 稱謂.)(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5~16쪽).
327
註) 026 원문의 ‘사후(巳後)’는 ‘이후(已後)’의 잘못이라 생각된다. 일본 조공사선은 이미 사시(巳時, 오전 10시경)에 유산의 서포에 도착하였고 미시(未時, 오후 2시경)에 말과 나귀를 타고 온 신라인 30여 명을 만나 압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그러니 아와다 녹사는 ‘그 뒤’에 압아를 만나러 간 것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163쪽).
328
註) 027 오래 보관하기에는 부적합한 신선한 음식을 말한다.
329
註) 028 생료(生料)는 빨리 요리해서 먹는 음식물을 뜻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6쪽).
 
 

 
 

4월 27일 (음)

331
- 흐리고 비가 내리다
 
332
廿七日。陰雨北風。
 
 
333
[4월] 27일, 흐리고 비가 내렸고 북풍이 불었다.
 
 

 
 

4월 28일 (음)

335
- 압아가 와서 견당선 관인을 만나다
 
336
廿八日天晴。押衙來與官人相看。
 
 
337
[4월] 28일, 날씨가 맑았다. 압아가 와서 관인을 만나보았다.
 
 

 
 

4월 29일 (음)

339
- 도현을 통해 당 체류 가능성을 타진하다
 
340
廿九日。北風吹。令新羅譯語道玄作謀。留在此間。可穩便否。道玄與新羅人。商量其事。却來云。留住之事。可穩便。
 
 
341
[4월] 29일, 註 029북풍이 불었다. 신라어 통역 도현으로 하여금 이곳에 머무르려는 모의가 가능할지 어떨지 상의해보도록 했다.註 030 도현이 신라인과 그 일을 의논하고 돌아와 말하기를
 
342
“머물러 있는 일이 가능할 것 같다.”
 
343
고 했다.
 
 
344
註) 029 이 달은 작은 달이기 때문에 이 날(경신)은 월 말에 해당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7쪽).
345
註) 030 한 번 귀환을 결정했지만, 이곳에서 원인은 다시 순례 구법의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신라인을 중개해 몰래 모의를 시작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2卷, 鈴木學術財團, 1964, 17쪽).
【원문】입당구법순례행기(83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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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4년 10월 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