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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소설(現代小說)의 귀추(歸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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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7.19
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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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小說[현대소설]의 歸趨[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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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創作[창작]32人集[인집]을 中心[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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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편이 넘는 작품 가운데서 나는 李泰俊[이태준]씨의 「農軍[농군]」에 이르러 비로소 감동을 가지고 읽을 수가 있었다. 또한 그것뿐으로 다시 예술을 대하는 듯한 감흥을 깨닫지 못한채 全[전]작품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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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문단의 기성과 신진이 총동원된 이달 창작에서 내가 얻은 바의 커다란 적막과 조그만 즐거움을 체험한 경로의 피력이 이달 창작의 비평이 될 줄은 나역시 의외의 일이다. 「農軍[농군]」은 泰俊[태준]이 처녀작을 쓸때부터 가지고 나왔던 어느 세계가 이 작품에 와서 하나의 절정에 도달하였다는 감을 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그것은 泰俊[태준]의 全[전]작품을 일관한 기본색조요, 連綿[연면]된 전통이리라. 허나 이것을 사상이라고까지 말하기엔 너무나 분위기에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분위기라고만 해두기엔 또한 기분은 뿌리깊고 그 뿌리가 박힌 토양은 광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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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발표된 「寧越令監[영월영감]」에 표현된 悲哀[비애], 멀리는 「꽃나무는 심어 놓고」에 나타난 간얄핀 그러나 切切[절절]한 哀愁[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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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감정이 유래하는 곳을 사람들은 돌아볼 틈을 가지고 있지 아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득 오래 잊었던 고향을 회상할 때 피어오르는 향수처럼 우리의 마음을 소년 때의 순수함으로 돌려 보내는 이 애수와 비애의 깊은 유래를 또한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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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열차가 북으로! 북으로! 달리는 찻간 속의 풍경은 그리 꽃다운 바가 되지 아니한다. 그러나 이 雜然[잡연]한 풍경, 유쾌하지 않은 내음새 속에 우리는 먼 촌락의 團樂[단락]한 面影[면영]을 봄도 또한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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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장면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의 줄거리나 소재는 죽음도 신기하지 않고 특이하지도 않다. 그러나 놀라울 만치 진실하다. 진실이란 대체 어떤 것인지?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오늘날의 진실인지 모르나, 그러나 좌우간 이 소설에 나타난 생활과 이야기와 감정과 사상은 절박할 만치 진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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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행열차의 슬픈 그림자가 혹은 그 속에 담겨 가는 주인공 일가의 애처러운 모양이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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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대는 興隆[흥융]하는 생활과 인간을 생각할 필요는 있어도 減[감]해 가는 생활과 인간을 돌아볼 여유는 없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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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국경을 지나 비로소 異域[이역]의 가을 새벽을 깨닫는 젊은 여인의 불안과 두려움에 떨치는 손목을 잡아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賞讃[상찬]할 장면이 우리의 가슴에 喚起[환기]하는 감정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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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수와 비애!가 한가지로 현대에 무관한 감정임을 새삼스러히 루루하여 무엇하랴. 정열과 의지만이 오로지 내일을 위하여 필요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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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만치 진실하고 切切[절절]한 감정이 무가치해야 한다는 이유가 또 무엇이냐. 이 장면은 단지 泰俊[태준]이 예전부터 길러 내려오는 자기의 전통을 완성하는데 그치고 말 것인가? 문제는 이 장면이 우리 同時人[동시인]의 가슴 속에 숨겨진 어떤 애수와 비애를 그리는데 한 절정이라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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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처롭고 슬픈 감정이 아름답고 絢爛[현란]함을 속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로 비극이란 往往[왕왕]히 용기의 원천이 되는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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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보편에 가까운 이런 감정에 부딪혀 봄이 없이 목전의 이익만으로 고귀한 企劃[기획] 가운데 용감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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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이 소설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훌륭한 점은 애수와 비애의 감정이 悲愴[비창]에 가까워 비극의 장대함을 방불케 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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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軍[농군]」의 하반부를 차지한 水路開鑿[수로개착]의 곤란한 공사는 한겨례의 수난사의 운명을 상징한 회화의 소재일 수가 있다. 이 장면에서 소위 생산적인 건강미를 운운한다면 그는 실로 속된 鑑識家[감식가]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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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 성과가 막대한 空虛[공허], 거대한 徒勞[도로]에 끝난다 할지라도 그대로 그것을 계속할 수 밖에 없도록 운명이 결정된 인간은 비극적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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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의 개통이 그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지고 오리라고 믿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賭[도]하여 공사에 열중하는 移住民[이주민]들의 面影[면영]은 바라보기에 가슴이 메이는 데가 있다. 소박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肺腑[폐부]를 찌르는 슬픔에 사모친 이러한 회화를 그릴 수 있는 작가는 필시 우수한 시인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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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단편일망정 이 소설을 꿰뚫고 있는 것은 분명히 크나큰 비극을 속에다 감춘 敍事詩[서사시]의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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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泰俊[태준]의 예술에 비로소 크다고 형용할 수 있는 고귀한 요소를 부가한 기념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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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소설가적인 ‘태’를 보이려는 소설, 散文家[산문가]인 척하는 수단을 일삼는 기풍이 一世[일세]를 横行[횡행]하는 때 이 소설은 推奬[추장]될 충분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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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川邊風景[천변풍경]」으로부터 泰遠[태원]의 文學[문학]은 묘사되는 세계의 특이함과 풍요함에 가치를 두어 왔다. 그러나 특이함이란 것은 新奇[신기]와 더불어 이내 평범해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면 작가는 다시 더 특이하고 신기한 세계의 발견에 종사하면 그만이냐 하면 일이 예술에 관한한 그렇지 못한 게 또한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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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측량과 달라 영역을 넓혀 간다는 게 그리 중대한 가치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한 작품, 한 작품마다 혹 한해 한해마다 새 세계 개척이나 영토 확장에 급급하면 작가와 독자가 한가지로 분망할 따름이고 예술가로서의 작가의 정신이 뿌리박을 수가 없다. 모종을 자주 하는 나무와 같다 할까? 정신적 근원의 충실뿐 아니라, 묘사되는 세계를 요리하는 예술적 풍요라 하는 것도 자연 바라기 어려움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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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愚氓[우맹]」의 실패로부터 다시 「川邊風景[천변풍경]」의 경지로 돌아간 작가에게 우리가 기대한 것은 당연히 얼마나 작가가 자기 전통을 배양할 수 있었는가? 바꾸어 말하면 정신적 성장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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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에 따라선「골목안」속에서 「川邊風景[천변풍경]」이상의 것을 발견하기 어려울지 모르나 그렇게 一作[일작]마다 新[신]! 新[신]! 하고 새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작가에 대한 과중한 요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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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순회극단처럼 독자 앞에 나타날 적마다 새 藝題[예제]를 들고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골목안」이 「川邊風景[천변풍경]」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題材[제재]를 취했다는 데 조금도 불만히 생각하는 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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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골목안」에서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얼마나 泰遠[태원]이 세태 작가의 域[역]을 넘었는가 하는 데 있었다. 바꿔 말하면 「川邊風景[천변풍경]」에서 우리가 인정한 가치 이상의 것, 즉 정신적 가치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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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와 같이 「川邊風景[천변풍경]」은 작자의 우수한 描寫力[묘사력]뿐만 아니라 그려진 세계가 或種[혹종]의 감동을 환기할 수 있다는 것으로 우리와의 정신적 교섭을 가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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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립지에 고인 물처럼 근대화 해 가는 새 京城[경성] 가운데서 餘命[여명]을 남기고 있는 낡은 경성, 없어저 가는 경성의 자태가 사람의 마음을 끌었고, 그 안에 들은 물고기 같은 舊京城[구경성] 市民[시민]의 생활이 우리로 하여금 시대의 변천, 인간의 운명을 생각케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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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저 가는 것의 아름다움, 이 순간을 최후로 다시 회고할 수 없는 운명이 사람의 마음 가운데 일으키는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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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泰遠[태원]은 泰俊[태준]과 더불어 허무러지는 전통의 세계의 자태를 충실히 그렸고, 그것이 또한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동감한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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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遠[태원]의 작품 가운데 등장하는 廣橋川邊[광교천변]이란 하나의 독립한 세계에도 비길 수 있는 생명있는 유기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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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태작가란 풍속 묘사에 쾌락을 발견하고 恥部[치부] 폭로를 향락하는 사람이다. 泰俊[태준]과 같이 순수하고 길지 못하나 泰遠[태원]에겐 그만치 영역의 넓음이 있어 얼른 사람들은 泰遠[태원]의 문학정신의 정체란 것을 포착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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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골목안」은 泰遠[태원]이 이러한 결함을 상당히 脱却[탈각]한 작품이다. 이러한 기도가 「골목안」으로 하여금 順伊[순이]의 일가를 중심으로 한 소설을 구성시킨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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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 여급이 되어 一家[일가]를 먹여 살려야 하는 順伊[순이], 동생을 공부 시켜야 하는 順伊[순이], 그는 불쌍한 여자다. 그러나 조금도 신기한 인간은 아니다. 여급이나 기생에 항용 볼 수 있는 비극적 身元[신원]이다. 그 동생의 연애 역시 여급이나 기생을 누이로 갖게 된 여자의 흔히 당할 수 있는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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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골목안」사람들의 참말의 비극을 一身[일신]에 모으고 있는 사람은 그의 아버지다. 順伊[순이]의 일가가 이 인간을 발견함에 이르러 작자는 세태소설의 域[역]을 뛰어넘을 용기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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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인물은 泰俊[태준]의 「福德房[복덕방]」이나 「寧越令監[영월영감]」과 조금도 다른 인물이 아니다. 泰遠[태원]의 「順伊[순이]아버지」의 발견은 이렇게 보면 새 발견이 아니나, 그러나 이 소설의 최후의 장면은 참말로 아름다운 繪畫[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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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형회에 모인 유복한 부형들을 상대로 그가 일생동안 꿈꾸었던 행복의 全[전]유토피아를 거짓말을 빌려 이야기할 때 눈물을 禁[금]키 어려웁다. 자기의 全[전]희망을 거짓말을 빌려 이야기하는 노인의 심정! 이것은 滅[멸]해 가는 인간의 아름다운 엘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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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골목안」一篇[일편]을 이 엘레지와 더불어 가치를 평가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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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순수해지는 泰遠[태원]을! 그러나 「文章[문장]」増刊[증간]에 실린 「崔老人傳抄綠[최노인전초록]」는 「골목안」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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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골목안」에 주의할 점 하나는 여급 順伊[순이]가 요새 많이 등장하는 다른 여급들과 전연 성격이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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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伊[순이]는 말이 여급이지 모두 기생에 가까웁다. 인테리가 빠에서 상대하는 여급이 아니라 낡은 세계의 희생자로서의 여자! 이것은 또한 우리가 모르는 여급의 별다른 한 타잎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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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揆元[이규원]씨의 「슬픈 點景[점경]」이 역시 泰遠[태원]의 「崔老人傳抄綠[최노인전초록]」과 같이 舊韓國[구한국] 장교출신의 교원을 그려 낡은 세계의 비극을 이야기하려 하였으나 성공치 못하였다. 다른사람이 사용한 제재에 똑같이 다른 사람이 이미 사용했던 방법을 적용하여 무엇을 기도한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어느 정도로 성공했다 치더라도 신인의 감히 취할바 태도가 아니다. 하물며 이 소설과 같이 실패하고만대서야 무슨 말이 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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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우리들에게 가장 매력있고 언제나 흥미의 초점이 되는 것은 현대며 현대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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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대하여 현대정신을 가지고 結抗[결항]하는 同時代人[동시대인]의 고투 가운데서 우리는 제 자신의 영상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혹은 고투로부터 진로를 그 가운데 기대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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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雪野[한설야]의 「술집」은 비록 그 소설 가운데서 커다란 감동을 깨닫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나는 그 峻烈[준열]한 현대성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역작 「泥寧[이녕]」에서 출발한 雪野[설야]의 새로운 모색의 연장이 이 「술집」이다. 나는 작가의 근엄하고 성실한 사색에 거듭 경의를 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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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람이 마지 못하여 술잔을 들 때까지의 경로는 다양할 것이다. 마치 모든 마약의 중독자가 최초엔 제각기 불가피한 원인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술이란 것도 여러가지 원인으로 사람을 자극하고 흥분시킬 임무를 띠고 잔 가운데 따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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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술집」이 題名[제명]처럼 어떤 한사람이 술을 먹게 되는 경로를 그린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술집」이란 題名[제명]이 이 소설에 알맞지 않은 감조차 있다. 그러나 흙탕물 같이 혼탁하고 질펀하여 참기 어렵게 齷齪[악착]한 일상생활에서 주인공 ‘한민’이 욕구한 것은 술이 아니라 그러나 술취한 것 같은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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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이고 도취다. 일상적인, 실로 너무나 일상적인 혼탁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또한 그 벗어날려는 의식이 한없는 重荷[중하]가 된 현대 청년의 지향할 바 모르는 상태의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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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술집을 주인공 한민과 더불어 작자가 건강의 나머지 건강을 죽이려는 장소로써 택하였다면 그 건강이란 주인공이나 작자에 있어선 泥寧[이녕]의 세계를 알고 거기서 헤여 나려는 정신의 건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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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 또 이 건강은 정신의 건강한 사람이 가지고 있지 못한 육체의 건강이기도 한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세계 자체가 가지고 있는 건강 그것이다. 이 건강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인공 ‘한민’은 일상생활에서 패배하는 것이며, 정신의 건강이 도리어 重荷[중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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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술집」이란 요컨대 육체의 건강이나 정신의 건강이 다 같이 필요 이상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소모하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한 다같이 건강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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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人[인]에겐 정신이, 정신의 人[인]에겐 육체가. 이리하여 건강의 偏在[편재]가 오늘날의 모든 고민의 심연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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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의 생각은 이러할지 모르나 「술집」의 즉 흥분과 도취가 무슨 의의가 있는가. 여기에 작자는 대답코자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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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泥寧[이녕]」에서 시작하여 작자는 생활의 명철한 관찰자로서 혹은 일상성의 현명한 이해자로써 일찌기 馬車[마차]말처럼 앞으로만 내닫던 정신을 달래어 하나의 지혜로운 의지로 훈련시키는 사업에 종사하고 있지 아니한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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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一例[일례]로는 그의 소설이 점점 아름다워지고 밀도를 가해 가고 있는데서도 볼 수 있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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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우간 雪野[설야]는 현대작가 중 가장 곤란한 企圖[기도]에 종사하고 있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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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비하여 南天[남천]은 별다른 방향을 가기 시작하지 아니했는가 한다. 소설 「鐵嶺[철령]까지」같은 데서 사람은 일종 감상에 가까운 휴매니즘을 이상한 눈으로 보았을지 모르나 南天[남천]이 그 분위기에 그대로 만족할지는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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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간다」에서도 그런 의도는 보았거니와, 「길우에서」는 技師[기사]란 새로운 인물에게 어떤 특이한 흥미를 寄[기]하고 있음을 直覺[직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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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가 그런 인물에서 세대의 차이를 느끼면서, 동시에 어떻게 그 인물을, 그 세계를 이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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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해가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 인물, 그 세계에 동화할 수 없음은 명약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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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느 때까지나 일정한 거리감을 가지고 대해 갈 것인가, 비록 그 거리가 불가피한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작가의 입장이 낡어간다면 그 인물과 세계에 용해되지 아니하면서, 동시에 그 세계와 작자의 세계를 한 곳에 통일할 무슨 광대한 세계의 준비를 무엇으로 하겠는가? 이것은 현대작가의 공통된 과제리라. 문제를 끌어내면 枚擧[매거]키 어려우나 기사의 성격이 불분명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조되는 주인공의 성격은 더욱 명확치 않어 이러한 테마를 작자가 어떠한 각도에서 세웠는지 알기 어려운 점이 있다. 「길우에서」는 스켓취라 긴 말을 아니하겠으나 인물과 사건을 영롱히 써 내지 못함은 이 작자가 장래 극복해 나가야 할 결함이다.
 
 
64
玄民[현민]의 「나비」는 「어떤 夫婦[부부]」이래 애정과 연애를 그려온 玄民[현민]의 작품 중의 白眉[백미]일 뿐 아니라 금월 창작 중에 가장 技倆[기량]이 우수한 작품의 하나이다. 이러한 기술적 성공은 작자에 있어서 이 문제에 관한 어떤 관념의 성숙과 무관계일 수는 없다. 사실「나비」에 와서 비로소 玄民[현민]은 애정의 현대적 관념을 성숙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 소설도 또한 「나비」에 이르러 연애의 현대윤리를 발견했다 할 수 있다.
 
65
그것은 생활이 연애보다도 귀하다는 관념이다. 이것은 곧 사회 행동이 애정보다 중하다는 관념의 한 변형이다. 이 변형 가운데는 주지한 바와 같이 한 시대의 경과가 밑을 바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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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전]시대는 사회가 연애의 기회를 주고, 애정을 촉발하고, 또한 相愛[상애]의 무대가 되면서 동시에 최후에 가선 엄격히 그것에의 열중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와선 적어도 생활이란 것이 사회에 대신하였다. 「愛難[애난]의 記錄[기록]」의 여주인공과 「나비」의 여주인공은 이 사실의 훌륭한 대조다. 「나비」의 히로인이 여러 고비의 위기를 넘고 오히려 안전할 수 있음은 남편에의 정절이나 애정때문이라기보다 차라리 자기의 생활, 단순히 먹기 위한 의미의 생활만이 아니라 질서로서의 생활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여급이 우리 앞에 건전하고 명쾌한 생활인으로, 직업여성으로 나타남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67
이러한 생활에의 충실이 가저 오는 명쾌한 의식 때문에 프롤라에겐 한강요리점에서 금광쟁이의 유혹을 벗어 나오는 장면에서 보는 바와 같은 날카로운 理智[이지]의 작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68
이러한 점은 玄民[현민]의 前作[전작]「離婚[이혼]」의 남주인공이 결혼까지 하려던 여자를 끝에 가서 박차 버리고 다시 자기에게로 冷然[냉연]히 돌아가는 점과 공통한 데가 있다.
 
69
그러나 「離婚[이혼]」보다 「나비」가 더 명쾌하고 성공한 이유는 무엇보다 이 자기의 생활이란 것이, 전자에 있어서보다 명확하고 단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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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離婚[이혼]」에선 생활 속에 일상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무슨 사상적 혹은 정신적인 의미까지가 막연히 잠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한시대 前[전] 玄民[현민]의 작품에서 본다면 「愛難[애난]의 記錄[기록]」등에서 보던 바와 같은 사회의 명령같은 것이 잠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비」의 프롤라의 생활이란 명백하고 단순한 일상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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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생활의 사회적인 의미가 언제나 소설을 실패시킨다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의 마음과 생활 속에 있는 그러한 日常性[일상성]과 非日常性[비일상성]의 분열과 상극은 그로 하여금 항상 단호한 理智[이지]의 행사를 불가능케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불문에 부치고 소설이 성공적으로 구성될 리가 없다.
 
72
「離婚[이혼]」은 玄民[현민]의 일종 과도적인 작품일지도 모른다.
 
73
이런 의미에서 프롤라의 理智[이지]의 기초가 된 것은 생활의 윤리, 직업의 윤리다.
 
74
우리는 다 같이 市井[시정]을 취재로 한다고 하여 玄民[현민]을 곧 세태작가로 돌릴 수 없는 이유를 여기에 두지 아니할 수 없다.「나비」는 분명히 생활의 윤리, 직업의 윤리, 일상적 질서의 理智[이지]를 우리 현대소설 가운데 齊來[제래]한 공적을 차지한다. 그러나 또한 그 때문에 바꾸어 말하면 「金講師[김강사]와 T教授[교수]」에서 전형적으로 볼수 있는 非日常性[비일상성]의 理智[이지]의 결백한 洗滌[세척]때문에 실로 나는 이 작품을 취하지 아니한다.
 
75
그러나 교묘히 성공한 작품임은 사실이다. 구태어 蛇足[사족]을 加[가]하자면 일상성의 理智[이지]로부터는 예술세계에서 인간들의 자태와 행위를 美化[미화]하는 고귀한 정열은 나오지 아니한다. 왜냐 하면 非日常的[비일상적]인 理智[이지] 때문에 일어나는 애정의 부자유는 슬프고 또한 아름다워 비극이 될 수 있으나 단순한 일상적인 생활속의 애정의 비애는 아름다웁지도 또한 비극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거기엔 실로 유토피아가 없기 때문이다.
 
76
여기에 비하면 鄭人澤[정인택]씨의 「迷路[미로]」는 글자대로 애정에도 생활에도 또한 그 이상의 것에도 자신을 缺[결]한 사람들의 방황하는 그림자의 묘사에 그첬다. 그러나 「動搖[동요]」엔 자기가 지키고 살아 가려고 한던 어느 고귀하다 생각하는 것을 위하여 여급인 처와의 생활로부터 탈출한 남자의 심리적 동요가 이야기 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헤어진 처를 계속해서 사랑하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자신이 아직 고귀한 것을 길러 나갈 力量[역량]의 부족에 있어 그 동요가 그치기 어려움을 능히 추측키에 족하다. 그러나 앨써 일찍암치 안정한 입장을 정해 버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평범한 사실에다 자기의 큰 과제를 짜(織)넣는 성실을 유지할 일이다.
 
77
소설로는 후자가 전자보다 좋았다. 그러나 성격이나 심리에 명확한 인상을 방해하는 이러한 문장이나 스타일은 이상 더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78
이만하면 현대작가가 새삼스럽게 애정이나 연애의 문제를 취급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연애가 반드시 영원한 테마라서가 아니라 대부분의 지식인이 사회에서 개인으로 돌아온 금일 衣食[의식]과 더불어 언제나 최대의 私事[사사]인 애정의 문제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요, 커다란 私事[사사]는 또한 어느 때나 커다란 사회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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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연애의 현대적인 윤리 가운데 새 시대의 윤리의 片鱗[편린]이 표출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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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永壽[김영수]씨의 「喪章[상장]」이 또한 이런 의미에선 기억할 만하다. 改嫁[개가]하는 친구의 미망인을 작자는 그리 비난하지 않었다. 물론 아직 젊은 여인으로서의 자연한 욕구도 인정할 것이다. 작가는 또한 그 여인에게 濃厚[농후]히 남어 있는 죽은 남편에 대한 애정과 자식들에 대한 정을 친절히 記述[기술]하여 改嫁[개가]의 중요한 동기를 생활상 욕구에 두려하였다. ‘나’라는 주인공에게 보낸 ‘한성옥’이란 여인의 최후 편지의 목적은 専[전]혀 이러한 사정을 밝히자는 데 있었을 것이다. ‘한성옥’이란 여자는 영원히 죽었거니 잊어달라는 편지의 최후나, 그 편지를 들고 죽은 친구의 유서를 책상에서 뽑아 버리는 장면이나, 모두 산 인간의 생활의 준엄한 욕구엔 죽은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도 살릴 길이 없는 애처러움의 정을 표현하여 상당히 切切[절절]한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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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부러 ‘나’라는 제 3자를 통하여 ‘한성옥’이란 여인의 운명을 측면으로 표현할 필요는 특별히 없지 않었을까? 이 소설의 휴매니스틱한 감상성이 흘러 있는 것은 ‘나’라는 제 3자를 중심으로 작품이 구성된 곳에서 오는 결과의 하나라 할 수 있고, 반대로 그러한 감상성때문에 소설이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82
젊은 여자의 자연한 욕구와, 생활의 준엄한 욕구가 한데 어울려 한 여자의 운명을 풍랑 가운데 뜬 배(舟)처럼 흔들어 나가는데 항상 소설의 흥미는 달려 있는 것이다.
 
83
技巧[기교]를 弄[농]하지 않고 공명정대히 주제와 정면에서 맞서는 태도가 젊은 작가들에게 필요하다.
 
84
鄭飛石[정비석]씨의 「秘密[비밀]」은 애정의 세계를 좀더 순수히 심리적으로 그리려는데 예리한 맛은 있으나 이상의 작가들과 같이 연애를 산 생활과 연결시키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순수하다는 것은 애정의 세계가 생활의 기초를 갖지 아니했다는 의미일 것이며, 작품으로선 사건이 없고 주제가 명확치 않고 서정시와 비슷한 분위기를 두 남녀의 대화 가운데 나타나는 심리의 변화를 통하여 표현하려 하지 않었을까? 이 소설에서 취한다면 역시 이 한 점일 것이다.
 
85
이런 의미에선 蔡萬植[채만식]씨의 「班點[반점]」이 氏[씨]의 작품으로선 희귀하게 순수하고, 깨끗하고, 구조가 째인 작품이다. 어떤 과거를 가진 젊은 여자의 복잡한 심리와 성격을 그리어 모든 점에서 독자를 납득시키는 好短篇[호단편]이다. 더욱이 기교에 있어 이 소설은 氏[씨]의 어느 단편보다도 一層[일층] 단편적인 佳作[가작]이다.
 
86
그러나 桂鎔黙氏[계용묵씨]의 「夫婦[부부]」는 부부간에 오고 가는 이러한 類[류]의 데리케이트한 심리[이런 것은 남녀간의 애정생활을 묘사함에 지극히 증요한 것이다] 같은 데는 일체로 유의치 않고 평범한 戯畵[희화]를 그리는데 그첬다. 俗惡[속악]한 石版風俗畵[석판풍속화]를 보는 듯하여 유쾌치 아니한 작품이다.
 
87
여기에 비하여 朴魯甲氏[박노갑씨]의 「春顔[춘안]」은 더한층 상식으로 더렵혀진 凡作[범작]이다. 시집 가고자 하는 適年[적년] 여성을 그리려면 자라는 화초와 같이 여인을 자연으로 볼 수 있는 직관력과 風俗史家[풍속사가]과 같이 그 여인의 주위를 묘사하는 능력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유감이나 「春顔[춘안]」에선 이 양자가 모두 결여되었었다.
 
88
오직 나이 먹은 여자면 의례히 시집 가고자 하느니라는 상식이 이 작품의 밑을 바치는 유일한 支柱[지주]다.
 
89
朴榮濬氏[박영준씨]의 「義手[의수]」가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를 실망시키는 작품이다.
 
90
그런데 이 新人諸君[신인제군]들보다 문제는 宋影[송영], 嚴興燮[엄흥섭], 民村[민촌] 같은 이들이 이러한 창작 코스를 걷고 있다는데 있다. 宋影氏 [송영씨]의 「女僧[여승], 嚴氏[엄씨]의 「黎明[여명]」, 民村[민촌]의 「野生花[야생화]」등 세 작품에서 우리는 문학보다도 더 많이 상식만을 볼 수 있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닐 듯싶다.
 
91
더구나 「黎明[여명]」에 이르러서는 실로 두장 이상을 읽기 어려울 만치 문학청년적 독선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 소설에는 반성을 모르는 예술가의 典型[전형]이 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그것을 理想化[이상화]하였다. 예술가는 상인보다는 훌륭하다! 이런 관념은 문학서를 1,2册[책] 읽은 소년들이 항용 품는 것이나, 작가라고 이름을 부칠 만한 사람들에겐 자기를 보는데 다른 관념이 필요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런 작가에게선 예술은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어째서 작자는 이 소설 가운데 이러한 문제를 깨닫지 안했을지? 어째서 10년이나 소설을 쓴 작가의 손에 이만치도 소설이 아닌 소설이 씌여지는지? 이해하기 괴로운 일이다. 원컨데 어째서 게으름뱅이 예술가, 자기의 생활과 예술에 대하여 일체의 반성을 잃은 작가의 생활을 理想化[이상화]를 하게까지 되는지? 작자는 三思[삼사]해 주기 바란다.
 
 
92
「女僧[여승]」이나 「野生花[야생화]」에 있는 것은 이보다는 명확한 관념이다. 헌대 그것이 상식이다. 상식이란 누구나 얼른 긍정할 수 있는 관념이란 데 장점이 있으나 그것이 누구나 얼른 긍정하는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에선 관념의 자격이 없다.
 
93
거기에서 모색과 탐구와 思考[사고]가 시작되는 것이다.
 
94
일상으로 생활의 外部[외부]를 얽어 매고 있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생활의 내부를 꿰뚫고 있는 것은 상식이 아니다. 그러면 무어냐? 이것을 알아내는대 문학은 철학과 더불어 思考[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과 상식이 맞붙을 때는 문학이 결과하는 대신 市井人[시정인]의 處世哲學[처세철학]이 나온다. 그런 것은 문학이 아니래도 그야말로 모든 市井人[시정인]이 다 아는 상식이다.
 
95
아마도 경향문학 시대의 경향이 退潮[퇴조]한 후 사상성 대신에 상식이 작품 가운데 군림한 듯한데, 문학이 필요한 것은 명확한 사상성이 결여한 데라도 상식을 믿는 것은 아니다. 사상을 가지고 작품 가운데 들어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상식으론 이러한 것임에 불구하고 진상은 어떠한 것이냐 하는 상식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하는 게 언제나 문학의 출발점이고 思考[사고]의 시초다. 思考[사고]없이 문학은 없다.
 
 
96
어느 때 베토벤은 ‘내가 만일 전술가였다면 반드시 나폴레옹을 격파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한다. 주지와 같이 베토벤은 교향악 「皇帝[황제]」의 작자다. 항간에 전하는 교향악 「皇帝[황제]」에 관한 여러가지 일화를 생각할제 베토벤의 이러한 말이 어떤 의미로 말해졌는지 알기 어려우나 적어도 베토벤이 자기를 황제 나폴레옹에 못지 않은 거인이라 생각하는 데서 나온 말이라는 것은 상상키 어렵지 않다.
 
97
과연 베토벤이 나폴레옹에 필적할 거인인지 아닌지는 우리와 더불어 논할 바가 아니지만, 나폴레옹이 劍[검]을 가지고 정복하지 못한 것을 펜을 가지고 정복하겠다던 발자크라든가, 일순에 그의 위대함을 직각한 괴테라든가 白馬[백마]를 탄 세계정신의 면모를 敵將[적장]의 몸에서 발견한 헤겔이라든가는 모두 나폴레옹을 敵國[적국]의 포로라고 밖에 생각지 못한 영국의 商人精神[상인정신]에 비하면 무한히 위대한 바가 있었다.
 
98
센트헤레나의 나폴레옹을 한사람의 포로로 밖에 보지 못하는 것은 算盤[산반]을 튀기는 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비속한 商人根性[상인근성]일 따름이다. 그의 비극에서 인간을 보는 것은 문화의 혼과 예술가 뿐이다. 인간은 평범한 육체인 동시에 위대한 정신이다. 거기에서 운명이 만들어지지 않는가?
 
99
모스코 遠征[원정]에서 센트헤레나에 이르는 수년간은 실로 비극 「나폴레옹」의 클라이막쓰인 동시에, 장군 나폴레옹, 황제 나폴레옹를 비로소 영웅 나폴레옹으로 만드는 부분이다. 여기에 비로소 운명이 나타난다.
 
100
이 ‘運命[운명]’에서 소설 「皇帝[황제]」의 작자 孝石[효석]이 나폴레옹을 그린 것은 나는 시인다운 일이라 생각한다. 거기엔 우리들과 같은 인간 보나팔트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한사람의 인간을 알려면은 특별히 센트헤레나의 나폴레옹을 알 필요는 없다. 비록 모든 인간과 같이 어린 때의 고향과 연애와 자녀들과를 회상하면서 다른 어떤 인간에게도 없던 거대하고 찬란한 영화때문에 일층 깊은 고독을 느끼는 인간에게 운명의 준엄성은 신이 마련했던 이상의 가혹한 맛을 깨닫게 하였을 것이다.
 
101
그러나 모든 비극에 있어서와 같이 이 준엄하고 가혹한 운명감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적 위대의 최절정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비극은 또한 언제나 인간적 위대에 대한 인간들의 끊임없는 동경때문에 씌여지는 것이 아닐까?
 
102
사실 소설 「皇帝[황제]」에서 우리는 영웅 나폴레옹이 신이 아니었던 증거, 전능하였으나 인간이었던 면밀한 증언을 듣는다.
 
103
그러나 영국의 俗吏[속리]와 같이 그를 一個[일개]의 포로, 一個[일개]의 평범한 불란서인으로 그리는데 그첬다면 예술은 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한 姿態[자태]에의 一戯畵[일희화]를 얻을 따름이다.
 
104
인간이면서 또한 신에 가까웁다는 의미에서 수많은 사람이 말하듯, 그는 근대사회가 낳은 유일한 희랍인일지도 모른다. 나는 소설 「皇帝[황제]」의 작자가 나폴레옹을 단순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숨어 있는 인간적 위대성에 대한 동경과 신앙을 촉발시켜 그린 정신을 찬양하고 싶다.
 
105
나폴레옹일망정 센트헤레나에선 우리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모스코를 칠 때, 알프스를 넘을 때, 어찌 우리들과 어깨를 겨눌 평범한 인간일까? 그는 天來[천래]의 帝王[제왕]이였다. 그러나 또한 그는 인간이였다.
 
106
“앞으로!” “앞으로!” “우익은 돌격!”
 
107
死[사]의 직전, 의식을 잃어버리고도 이렇게 절규한 그일망정 사랑하고 懊惱[오뇌]하고 고독에 운 인간이였다.
 
 
108
「皇帝[황제]」는 이달 창작 중 異色[이색]의 力作[역작]일 뿐 아니라, 인간적 위대성에 대한 아름다운 로맨티시즘이 높게 물결치는 작품이었다. 여기에 비하여 안회남씨의 「鬪鶏[투계]」는 무지한 인간의 평범한 심리를 熟爛[숙란]에 가까운 필치로 그린 佳作[가작]이고 능란한 소설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작가가 미숙한 사상을 자꾸만 피력하는 것은 보기 싫은 일이지만 부단히 사상을 피하는 태도는 더욱 답답한 일이다. 작가가 대상에 충실함에 자기의 일체를 그 속에 버리고 만다면 얼마나 공허한 일이냐? 능란한 소설과 훌륭한 소설은 어디까지나 별개의 것이다.
 
109
金東里氏[김동리씨]의 「찔레꽃」이 또한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러한 경지를 넘지 않고 있다. 좋은 소질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大成[대성]을 위하여서는 한고비의 비약이 필요하다.
 
 
110
이밖에 春園[춘원]의 「꿈」이 있으나 餘技[여기]에 지나지 않고, 단지 바다나 구름을 묘사하는데 격조 있는 문장이 약간 흥미 있을 따름이다. 蔡萬植氏[채만식씨]의 「南植[남식]이」,「班點[반점]」 두편 소설 중에 「班點[반점]」은 氏[씨]의 단편으로 휘귀하게 起承轉結[기승전결]의 격이 째인 佳品[가품]일 따름이며 「南植[남식]이」── 이는 정직히 말하여 유쾌치 않은 작품이었다. 발삿에 끼인 때를 후벼 숭늉에 푸는 장면이라든가, 그것을 마시고 “오늘 아침 숭늉이 구수해 조쿤”하는 장면에 이르러서 아연하였다. 이러한 장면은 인간의 獸性[수성]의 표현도 아니오, 증오의 표현도 아니요, 그저 추악할 따름이다.
 
111
문학은 최악의 경우일지라도 인간의 마음 가운데 숨어 있다가 발로되는 선한 심정의 옹호자일 듯싶다.
 
112
田榮澤氏[전영택씨]의 「첫미듬」, 方仁根氏[방인근씨]의 「가슴에 심은 花草[화초]」등 아직 이야기할 작품을 따지려면 없지 않으나,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어떤 의미에서이고 우리 신문학 건설에 끼친 이분들의 공로에 대한 예의를 위하여 무언의 辯[변]으로 지나침이 옳은 일일까 한다.
 
 
113
끝으로 금월 창작에 상당히 동원된 新人諸氏[신인제씨]에 대하여 一言[일언]을 寄[기]하고 이 稿[고]를 마감코저 한다. 근간 성행하는 新世代論[신세대론]에 대하여 이분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수 없으나 금번 창작을 통독하고 얻은 감상은 무엇보다 신인들의 현재 수준이나 업적이 특별히 논의될 만큼한 대상이 되기에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114
문학에 대하여 얼마나한 성의를 가졌는지, 시대에 대하여 과연 무슨 의욕을 가지고 있는지가 알기 어려웠다.
 
115
金東里[김동리], 鄭飛石[정비석], 金永壽[김영수] 三氏[삼씨]가 금월 창작 중의 신인으로선 그중 높은 수준이라 말할 수가 있다. 부진하고 게으른 중견작가보다 우수한 점이 있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즐거웠다. 그러나 우리가 신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이런 점이 아니다. 그들은 의연히 중견의 기량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면 기술 이외에 그들에게 무엇이 있는가? 유감된 일이나 그들은 우리가 새시대의 아들로 괄목할 새로운 내용은 아니 갖고 있었다.
 
116
뿐만 아니라 「朝光[조광]」과 「文章[문장] 임시증간」에 두편씩 소설을 쓴 金沼葉[김소엽]씨 같은 이는 모처럼의 好機會[호기회]를 무료히 버린감이 있음은 섭섭했다. 「초라한 風景[풍경]」(朝光[조광]) 같은 것은 반은 잘라 버려야 될 소설이고, 「破綻[파탄]」(文章増刊[문장증간])은 더 생각하지 않으면 문학이 아니되는 세계다. 기술적 노력과 사색, 이 두 요소에 충실함이 없이 어떻게 소설을 두편씩 썼는지 반성할 일이다. 이름이 활자가 되는 것만으론 작가가 되지는 않는다.
 
117
朴榮濬氏[박영준씨]의 「義手[의수]」도 평범하고 상식적이다. 좋은 소질을 가진 작가로 한층 더 근면하지 아니하면 진보하기 어렵다.
 
118
朴魯甲氏[박노갑씨]의 「春顔[춘안]」은 먼저도 언급했거니와 다시 한번 視力[시력]을 琢磨[탁마]할 필요가 있다. 섬세한 것을 看做[간주]하는 습관과 상식을 넘어서 존재하는 인간심리의 복잡성을 평범화 하는 결함은 시정되어야 한다.
 
119
李根榮氏[이근영씨]의 「理髪師[이발사]」는 순박한 분위기와 사건 운행의 자연성을 취할 만하다.
 
120
이발사의 성격도 무난하게 묘사되어 있고, 허나 작품을 통하여 작자의 정신을 찾으려고 할제 空寞[공막]함을 금할 수가 없다.
 
121
「朝光[조광]」에 실린 石仁海氏[석인해씨]의 「愛怨境[애원경]」은 소설이 아니고, 郭夏信氏[곽하신씨]의 「나그네」,「마냥모」2편은 才氣[재기]는 인정할 수 있으나 노력하지 않으면 비평하고 싶지 않은 작품이다.
 
122
두 작품 중 「마냥모」가 나으나 尙虛[상허]의 選後言[선후언]에도 있는 것처럼 입심이 농해보자는 악취미는 버림이 좋다. 죽은 裕貞[유정]이 이런 취미로 재능을 희생한 작가다. 작자의 三思[삼사]와 아울러 노력을 빈다.
 
123
이밖에 「鑛業朝鮮[광업조선]」에 실린 李周洪氏[이주홍씨]의 「碑閣[비각]있는 외딴 집」은 순탄히 씌어졌으나 날카로움이 없고 내용이 空疎[공소]하다. 신인은 아니나 생각난 김에 말하자면 李石薰氏[이석훈씨]의 희곡 「晩秋[만추]」(文章増刊[문장증간])과 소설 「晩春譜[만춘보]」(農業朝鮮[농업조선]) 역시 예리한 맛도 내용의 무게도 없는 凡作[범작]이다.
 
124
요컨대 노력해서 없앨 수 있는 결함을 태연히 노출하고 있는 심사를 알 수 없다.
 
 
125
붓을 놓으려 함에 이달 창작에 「文章[문장]」증간이 기여한 바의 공헌을 잊을 수 없고, 또한 어느 달보다 많은 작품을 짧은 지면에 평해감에, 불충분하고 미급한 점을 謝[사]하지 않을 수 없다.
 
126
더욱이 참고를 위하여 一言[일언]해 두는 것은 이달 창작을 평해 가면서 품었던 나의 비평 태도를 피력해 두련다.
 
127
그것은 중견 이상의 작자에겐 기술보다도 주제, 내용, 정신을, 신인들에겐 내용보다도 기술을 중시했던 것이다.
 
128
소설을 직업으로 하여 10년이 넘는 사람들에게 새삼스레히 기술을 이야기한다는 게 우스운 일이요, 신인들로선 무엇보다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다.
 
 
129
(1939.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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