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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唐) 무종(武宗) 회창사년(會昌四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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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昌四年歲次甲子二月。越州軍事押衙姓潘。因使進藥。將圓載闍梨書來。書云。緣衣糧罄盡。遣弟子僧仁好等兩人。往本國。請衣糧去者。潘押衙云。載上人。欲得入城來請得越州牒。付余。令進中書門下。余近日專候方便。入中書送牒。宰相批破。不許入奏。例上人事不成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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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창 4년 세차 갑자 2월, 월주(越州)註 098의 군사압아(軍事押衙)註 099로서 성이 반씨(潘氏)인 사람이 약註 100을 진상하는 심부름을 하였는데, 원재스님의 서신을 가지고 왔다. 서신에서 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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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과 양식이 모두 떨어졌으므로 제자승 인호(仁好) 등 두 사람을 본국으로 보내 옷과 양식을 청하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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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상인(上人)은 경성에 들어오고자 하여, 월주의 첩문을 얻기를 청하여 나에게 부탁하여 중서문하註 101에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근래에 오로지 그 방법을 찾아 중서성에 들어가 첩문을 전달하였으나, 재상은 그것을 심의하여 기각註 102하고註 103 상주(上奏)하는 항목에 넣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인이 부탁한 일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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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98 월주(越州)는 절강성 소흥현이다. 건원 원년(758) 이곳에 절강동도절도사가 설치되었고, 월주(越州)·목주(睦州)구주(衢州)·무주(婺州)·태주(台州)·명주(明州)·처주(處州)·온주(溫州) 8주를 관할했다. 그 후 절도사를 폐지하고 건중 원년(780) 절강동도부 단련관찰사를 설치했는데, 머지않아 폐지했다. 따라서 회창 시대(481~487)에는 이곳에 절도사 또는 관찰사가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경운 2년(711)에 설치된 월주도독부가 있는데, 월주부는 동중 연간(847~860)에도 존속한 사실을 보아 여기에서 군사압아라고 하는 것은 월주도독부 소속의 군사와 관련된 관직을 가리키고 있다. 당말이 되면 지방행정도 군정적 성격을 띠게 되어 군사압아와 같은 무관이 월주에 머물러 있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5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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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99 회창 시대에는 월주에 절도사 또는 관찰사가 없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군사압아(軍事押衙)는 월주도독부 소속의 군사와 관련된 관직을 가리키고 있다. 당말이 되면 지방행정도 군정적 성격을 띠게 되어 군사압아와 같은 무관이 월주에 머물러 있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5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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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0 《신당서》 지리지에서는 월주가 바치는 토산물로 단초, 석밀, 석영 등이 있다 하고, 《원화군현지》에는 자당(蔗糖)을 헌물로 바쳤다고 한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이 지방의 토산물로 우여당(禹餘糖)을 들고 있는데, 《회계속지(會稽續志)》권4 약석조에는 우여당 외에 운모, 자석역, 후박, 백급 등 18종을 나열하고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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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1 중서문하(中書門下)는 내각(內閣)에 해당한다. 《신당서》 권47 백관지에 따르면, 문하성은 국정을 심의하고, 중서성은 이것을 기안하는 관청이다. 그리고 문하성과 중서성의 장관들이 모여서 협의하는 곳이 정사당인데, 이것이 현종 시대에 중서문하로 고쳐졌다. 중서문하는 중서에도 문하에도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최고기관(내각)으로서 재상들이 이곳에서 협의를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54~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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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2 원문 비파(枇破)는 주청한 문서를 심의하여 기각하는 것이다. 상주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4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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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03 관서에서 백성들이 주청한 문서를 심의하고, 이것을 부결해서 상주(上奏)의 예로 수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4卷, 鈴木學術財團, 1969,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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