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금강산 장경봉 아래에 있는 큰 절.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은 신라 법흥왕 때 창건하였다는 설과 진흥왕 때인 551년 고구려의 승려 혜량(惠亮)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773년 율사 진표(眞表)가 고쳐 지었고, 970년 화재로 불에 탄 뒤 12년 동안 폐허로 있다가 982년 선사 회정(懷正)이 토지 150결을 보시받아 다시 지었다.
1343년 고려 사람으로 원나라 순제(順帝)의 왕후가 된 기씨(奇氏)가 황제와 태자를 위하여 금 1,000 정과 공인들을 보내 퇴락한 대웅보전·사성전·명부전 등 낡은 건물을 고쳐 짓게 하였다. 1458년에는 세조가 이 절에 행차하여 대웅전을 고치도록 명하고 토지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1477년 화재가 발생하여 모두 불타 버림에 따라, 1483년 나라에서 금 3,000관과 백미 500석을 지원받아 일청(一淸)이 다시 지었다. 1537년 다시 불타 1545년 일청이 또 다시 짓고, 1728년과 1791년에도 누각을 새로 짓거나 낡은 건물을 고쳤으며, 1842년 부원군 조만영(趙萬永)이 금 250관을 보시하여 300여 칸의 대찰로 증축되었다. 1863년에는 세도 정치로 기세를 떨치던 호조 판서 김병기(金炳冀)가 왕에게 청하여 공명첩(空名帖) 500장을 발행하여 팔고, 자신이 1,200냥을 보시하여 보수하였다.
이 절은 8·15 광복 이전까지는 6전(殿)·7각(閣)·2루(樓)·2문(門) 외에 부속 암자로 장경암·안양암·지장암·영원암 등을 가진,
금강산 4대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모두 불타 버려 지금은 옛 건물의 축대와 이율곡의 글을 새긴 비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문화재로는 기왕후가 절을 새로 지을 때 비로나자불을 비롯하여, 53위의 불상, 1만 5,000위의 보살상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