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9 ~ 1572]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서예가, 학자이다. 자(字)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기묘사화 때 갇힌 죄없는 사람들을 석방할 것을 주장하다가
김안로의 미움을 받고 쫓겨났다. 명종의 고명대신으로 그의 유명을 받들어 하성군(훗날의 선조)을 옹립했다.
1553년(명종 8년) 함경도 도순변사로 출정하여 북방여진족의 반란을 진무했다.
1555년 호남에 왜구들이 쳐들어와 해안가의 군현이 함락되자,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을묘왜변을 진압하고 왜구를 격퇴시킨 공으로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늘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로 정사에 임하여 명재상으로 칭송받았다. 사림파의 급진적 개혁에 반대하였고, 신진 사림(훗날의 동인)과 기성 사림(훗날의 서인)의 분쟁을 조정하다가 신진사림의 정적(政敵)으로 지목되어
이이,
기대승 등의 공격을 받았다. 이이와 심하게 갈등하던 그는 이이의 인격을 의심하는 발언을 하여 그와 척을 지게 된다. 죽기 직전 붕당의 폐단이 나라의 혼란이 되리라는 유언을 올렸다가 이이의 공격을 받았으나,
유성룡 등이 그를 변호하여 처벌을 면했다.
이연경과
조광조의 문인이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