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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고성군 (高城郡)
강원도 북부 동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군. 휴전선이 북부 일대에 걸쳐 있다. 지형은 서쪽에 금강산, 향로봉, 무산을 잇는 험한 태백산 줄기가 뻗어 있고, 해안으로 가파른 비탈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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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금강산 건봉사·심곡사를 찾아서
삼팔선으로 분단된 금수강산에도 봄이 찾아오니 남한에 몸을 둔 우리들의 감회는 자못 착찹함을 금할 수 없다. 북괴에 의해 우리의 많은 문화재는 어찌 되었으며, 특히 불교의 많은 사암(寺庵)은 어찌 되어 있는지? 이제 북한의 유명한 사암(寺庵)을 지상(紙上)으로나마 순례(巡禮), 언젠가는 되찾아야 할 그리운 북녘땅에 우리들의 마음과 몸을 쉬게 하여. 통일된 조국의 재건(再建)을 꾀하는 경륜(經綸)을 설계할 정신적인 터전을 불교에서 찾을 날이 올 것을 믿는다.
건봉사(乾鳳寺) 금강산(金剛山) 절(寺) 정태혁(鄭泰爀) # 심곡사
北韓 寺庵 紙上巡禮記
① 金剛山 乾鳳寺·深谷寺를 찾아서
鄭泰爀 (哲博·東國大佛教大教授)
 
 
1
 
삼팔선으로 분단된 금수강산에도 봄이 찾아오니 남한에 몸을 둔 우리들의 감회는 자못 착찹함을 금할 수 없다.
 
북괴에 의해 우리의 많은 문화재는 어찌 되었으며, 특히 불교의 많은 사암(寺庵)은 어찌 되어 있는지? 이제 북한의 유명한 사암(寺庵)을 지상(紙上)으로나마 순례(巡禮), 언젠가는 되찾아야 할 그리운 북녘땅에 우리들의 마음과 몸을 쉬게 하여. 통일된 조국의 재건(再建)을 꾀하는 경륜(經綸)을 설계할 정신적인 터전을 불교에서 찾을 날이 올 것을 믿는다.
 
우리들 조상의 넋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한결같이 통일조국의 영광된 날을 기다리고 있는 북녘 땅에, 그 많은 사암(寺庵)에 안치되어 있는 외로운 영혼들을 달래고 영겁(永劫)을 손 안에 넣고 시(時)∙공(空)을 초월하여 일체중생(一切衆生)을 구제하겠다는 불보살(佛菩薩)의 부동신(不動身)이 북녘의 싸늘한 하늘 아래서도 앞날을 점치고 있다.
 
북한에는 금강산과 묘향산을 비롯하여 많은 이름난 큰 산에는 많은 사찰 및 암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 수도(修道)하는 승려들은 공산치하(共産治下)에서 종교 신앙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불교(佛敎)도 그들의 이용물이 되고 있다. 사암(寺庵)은 이제 수도(修道)의 도장이 아닌 것이다.
 
1946년 3월에 발표된 토지개혁(土地改革)에 의하여 사원(寺院) 소유지는 모두 무상으로 몰수당했고, 승려들은 수도생활이나 포교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6∙25 동란 전에는 그럭저럭 승려들이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북괴군(軍)에게 징집되고, 사찰이 자유투사들을 은신처가 되지 못하도록 심한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었다.
 
물론 불공을 드리려고 산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으며, 식량배급을 받기 위해서는 협동농장에 강제로 편입되어야 했다. 승려들도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말라"는 원칙을 적용하여 강제 노동에로 내몰렸다. 그리하여 사찰에는 공산정권(共産政權)으로부터 파견된 관리인이 자기의 별장처럼 승려를 대신하여 들어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58년에서 1960년까지 진행된 소위 중앙당(中央黨) 집중지도(集中指導)를 계기로 하여, 북한의 사원(寺院)들은 점차로 불교와는 인연이 없는 일반 사업에 사용되기 시작, 1961년 이후에는 석왕사(釋王寺)를 비롯한 몇개의 고적으로서 가치가 있는 명찰(名刹)에는 불상(佛像)을 비롯한 불교 표식이 거의 제거되고 말았고, 사암(寺庵) 건조물은 휴양소.정양소(靜養所)∙지질탐사대나 식물채집자(植物採集者)들의 숙박소로 되고. 심지어는 임업사업(林業事業)을 위한 숙사(宿舍)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불교라는 종교단체가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북괴는 정책적으로 불교도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불교도연맹(佛敎徒聯盟)이라는 어용단체를 만들어 그들을 이용하여 유물사상(唯物思想)에로 전향시키려고 가진 간계를 쓰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 신앙생활의 실질적인 움직임은 전무(全無)하다고 하겠다.
 
▶ 금강산(金剛山) 건봉사(乾鳳寺) 대웅전(大雄殿)의 전경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북한 지역에도 인간이 살고 있다. 인간(人間)이 살고 있는 한 인간 본심의 발로가 없을 수 없으니, 종교에 대한 정신적인 의지처를 희구하는 일은 영구히 지속될 것이다. 또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구한 정신문화 속에 용해되어 있는 불교의 신앙은 주민들의 마음에 한가닥의 가냘픈 등불이 되고 있다. 그 불빛은 영원히 소멸(消滅)되지 않고 그들을 희망의 동산으로 인도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농촌이나 산간벽지에 사는 노인층에서는 불교를 믿고 극락세계를 희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으며, 그들은 명절날이 되어 사암(寺庵)으로 불공을 드리러 가지는 못하지만 생활 속에 뿌리깊게 박힌 불교적 신앙은 여러 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북한의 불교계(佛敎界)를 살펴볼 때에 우리들은 더욱 더 북한의 명(名) 사암(寺庵)이 그리워진다.
 
 
2
 
이제 북한의 사암(寺庵)을 지상(紙上)으로나마 순례하려 함에 있어서 먼저 건봉사(乾鳳寺)의 본말사(本末寺)를 찾기로 한다. 왜냐하면 서울에서 부터 출발하여 3∙8선쪽으로 올라가는 순례행(巡禮行)을 하면 지금은 6∙25 때 없어진 명찰(名刹)로서 대본산(大本山)이었던 고성군(高城郡) 간성면(杆城面)의 건봉사(乾鳳寺)를 찾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건봉사(乾鳳寺)는 전후(戰後)에 행정구역상으로는 3∙8 이남으로 되어 있으므로 없어진 사지(寺址)에 새로 절을 세웠기는 했지만 옛 모습을 되새겨 보고 싶은 것이다.
 
고진령(古鎭嶺)을 기어올라가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입목(立木)이 울창하여 푸른 색을 자랑하는 속에 한 큰 바위가 반공(半空)에 우뚝 솟아 있고, 그 암상(岩上)에 천연석(天然石)으로 된 석봉(石鳳)만이 있다. 이것을 사람들이 봉암(鳳岩)이라고 칭하는 것이니, 건봉사(乾鳳寺)라는 절 이름이 됐다고 한다.
 
이 건봉사(乾鳳寺)는 신라시대에는 원각사(圓覺寺)라고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서봉사(西鳳寺)라고 하였다. 서봉사(西鳳寺)라고 한 것은 서방(西方)에 봉암(鳳岩)이 있다는 뜻이고, 건봉사(乾鳳寺)라 함은 건방(乾方)에 봉암(鳳岩)이 있다는 뜻이다. 그 뿐만 아니라 봉암(鳳岩)의 옆에 봉암암(鳳岩庵)이라는 암자가 있어 주각(晝閣)의 첨단(簷端)이 녹음(綠陰) 속에서 은근히 보이던 옛 모습이 그립다. 여기서 조금 가면 보림암(普琳岩)이라는 명소(名所)가 보인다. 영상(嶺上)을 반쯤 올라와 다리도 쉴겸 해서 넓은 바위를 찾아 몸을 펴고 잠시 쉬면서 석간수(石間水)로 목을 추기면 앞에는 괴이한 암석(岩石)이 많이 눈에 보인다. 저것은 수좌암(首座岩)이고, 저것은 부인암(婦人岩)이고, 저것은 군수암(郡守岩)이고, 저것은 통인암(通引岩)인 것이다. 수좌승(首座僧)이 부인을 업고 도망을 가는 형상인데, 전설에 의하면 군수가 부인을 잃고 낙망(落望)해 서 있던 곳이라고 한다.
 
이런 전설은 아마도 옛날에 불교를 배척하고 승려를 멸시하던 시대에 승(僧)을 비판한 말이 전해진 것인듯 싶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어느덧 영상(嶺上)에 오른다. 석전천년난도지(石轉千年難到地)요 수장일척가마척(手長一尺可摩尺)이라더니 손이 조금만 길었으면 하늘을 만질 듯하다.
 
여기서 돌아서서 동쪽을 향하여 한번 굽어보면 거진항(巨津港)이 보이며, 고성(高城)의 명소(名所)로 유명한 화진호(花津湖)가 눈 아래에 나타나 절경(絶景)을 펼쳐준다. 산 뒤에 들이 있고 들 위에 또 산(山)이 있어, 산색(山色)과 야색(野色)이 서로 엇갈려 비춰준다.
 
시간이 바뻐 행보(行步)를 재촉하면 제이천(第二川)에 당도한다. 이 강물은 건봉사(乾鳳寺)의 정계(定界)를 이룬 냇물이다. 일제 시대에 영산(嶺山)까지를 건봉사(乾鳳寺) 소유로 하고 그 밑은 모두 동경대학(東京大學) 연습림(演習林)을 만들어 버렸을 때에 그때의 주지(住持) 이운파(李雲坡) 스님이 제소(提訴)하여 회복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가 그 다음에 온 이대련(李大蓮) 스님이 회복한 곡절을 새삼 되새기게 하는 곳이다.
 
 
3
 
여기에서 다시 인제(麟蹄)지방 서화면(瑞和面) 가전리(加田里)에 있는 심곡사(深谷寺)를 찾기로 한다. 가전리(加田里)에서 숙박하고 1킬로미터쯤 되는 대령(大嶺)을 넘으면 월산리(月山里)에 이른다, 이 월산리(月山里)는 양구군(楊口郡) 내에서도 유명한 곳으로 양구해안(楊口亥安)이라고 이름이 나있어 사방(四方)으로 큰 산이 둘러 있는 천연산성(天然山城)인 곳이다. 산성(山城)을 이루고 있는 동구 안은 직경 2리 쯤 되고 둘레가 10리나 되는 평원(平原)이 펼쳐져 있다. 옛날에 한 국도(國都)가 되었던 곳이라고도 한다.
 
다시 행로(行路)를 재촉하면 석산령(石山嶺)에 당도한다. 산마루를 올려다보면 높이 창공(蒼空)을 이은 듯하고, 이 마루를 또 넘고 큰 령(嶺) 두개를 더 넘어가면 심곡사(深谷寺)로 간다. 기운을 차려 영상(嶺上)을 향해 기어 올라가면 활엽수가 빽빽한 사이에 진달래꽃과 철쭉꽃이 만발하여 푸른 산에 붉은 연지로 마구 단장한 것 같으니, 서울에서 보는 춘색(春色)보다 경치가 더하다. 여기서 한참을 쉬고는 또 행로(行路)를 바삐하면 팔랑리(八郞里)에 이른다.
 
여기서 심곡사(深谷寺)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팔랑리(八郞里)란 동리 이름은 그 옛날 동리에서 부인이 있어, 네 젖통을 가졌는데 그 부인이 8남(男)을 낳았고 재산도 충족한 바, 8남(男)을 모두 잘 키워 동월(同月) 동일(同日) 동시(同時)에 장가를 들게 하니 그때에 신랑이 여덟이라, 이 일이 기이하다고 하여 팔랑리(八郞里)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설명을 듣고 팔랑(八郞)이 살던 가옥(家屋)을 바라보면 과연 동리 가운데에 한 부자집 같은 큰 기와집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다시 출발하여 작은 냇물을 건너 수림(樹林) 속으로 뻗은 좁은 길을 들어가면 심곡사(深谷寺) 입구이다. "심곡사(深谷寺) 산림(山林) 정계(定界)"라는 표말이 있다. 이 근처에 어떤 옛 사지(寺址)나 고적(古蹟)이 있는가 살펴보면 석부도(石浮屠)를 찾게 된다.
 
경운당탑(慶雲堂塔) ∙ 설경당탑(雪境堂塔) ∙ 송암당탑(松岩堂塔) ∙ 서파당탑(西波堂塔) ∙ 청암당탑(靑岩堂塔) ∙ 허당봉골탑(虛堂封骨塔) ∙ 월암당탑(月岩堂塔) ∙ 청신여법련탑(淸信女法蓮塔) ∙ 청신여설매탑(淸信女雪梅塔) ∙ 청신여일섬탑(淸信女日暹塔) ∙ 청신여무명탑(淸信女無名塔)이다. 이것만으로도 이 심곡사(深谷寺)가 얼마나 오래된 고찰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백호치(白虎峙)를 넘어 응천교(應天橋)를 올라서면 만수청장(萬秀靑嶂)이 푸른 숲 사이에 심곡사(深谷寺)의 주각(晝閣)이 보인다. 백수자(柏樹子)는 선리(禪理)를 보이는지 묵묵히 서 있고 도솔산(兜率山) 내원암(內院庵)이라고 쓴 편액(扁額)이 고인(古人)의 신심(信心)을 보이고, 쇠잔(衰殘)한 4층 석탑이 고색(古色)을 자랑한다. 석계(石階)를 올라가서 불전(佛前)에 삼배(三拜)한 후에 마루에 올라 앉아 땀을 씻고 청계수(淸溪水)를 찾아가서 옥수(玉水)에 발을 씻으면 모골(毛骨)이 서늘하고 상량(爽涼)한 품이 익화등선(우화등선(羽化登仙)할 듯하다. 영겁(永劫)을 주름잡는 불지(佛智)가 어서 발로(發露)해서 어두운 안개를 씻어 휘광천지(輝光天地)로 만들기를 기원하면서 도솔산(兜率山)을 쳐다보니 준수(俊秀)한 일고봉(一高峯)이 운무중(雲霧(?)中)에 종립(從(?)立)하여 그 웅장한 모습은 심곡사(深谷寺)의 주산(主山)이 될 만하다. 여기서 하루를 묵고 심곡사(深谷寺) 고지(古址)는 그 다음 날 찾는다.
 
날씨가 화창하면 온 산(山)이 꽃냄새와 풀냄새로 뒤덮인 것 같다. 아침을 먹고 제1차로 심곡사(深谷寺) 고지(古址)에 이르게 되는데 심곡사(深谷寺)는 본래 7,80년 전 내원암(內院庵)을 중수(重修)할 때에 땅 속에서 나온 개와(盖瓦)를 벗겨내고 상량문(上樑文)을 보니, 맥국시대(貊國時代)에 창립(刱立)하였다고 씌었더라는 곳이다. 그런데 그것이 몇백년전에 화재(火災)를 입었던 바, 현재는 이 옛 터에 법당(法堂)을 세우고 대웅전(大雄殿)과 산신각(山神閣)을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월봉암(月峯庵) 고지(古址)로 가면 옛 심곡사(深谷寺)의 속암(屬庵)이던 월봉암(月峯庵)의 터가 퇴폐(頹廢)된 채 그대로 있어 곧바로 선경암(仙鏡庵) 옛터를 찾게 된다. 이곳도 심곡사(深谷寺)와 같은 시대에 창립(刱立)되었는데, 약 100년 전에 큰 도둑이 들어와서 십물(什物)을 탈취해 간 후 빈번히 잠입하므로 사승(寺僧)이 부지할 수 없어 폐허로 된 곳이다.
 
해안면(亥安面) 내에 건봉사(乾鳳寺)와 옥천암(玉泉庵) ∙ 운수암(雲水庵) ∙ 문수암(文殊庵)의 옛터가 있고, 양구읍리(楊口邑吏) 부근에 청량사(淸凉寺) 옛터가 있는데, 이 각 사암(寺庵)이 모두 심곡사(深谷寺)의 속사(屬寺)라는 전설이 있다.
 
여기서부터 3리쯤 되는 도솔산(兜率山) 상봉(上峯)에 올라가면 중앙에 용담(龍潭)이라는 연못이 둘이 있는데, 이 연못의 이름을 두타쌍소(頭陀雙沼)라고 한다. 두 연못의 물빛이 맑지 않고 진흙물과 같은지라 사람들은 "팥죽소(沼)"라고도 한다. 연못의 깊이는 몇백척인지 알 수 없지만 지방 촌민(村民)들이 날이 가물면 개를 그 연못에 던지는데, 그 때에 그 개를 가지고 가서 던지는 사람의 허리에 쇠바(牛索)를 매고 수십명이 잡아다리고서야 개를 던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개를 가진 자가 못가에 가면 물에 끌려 들어가서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개만 연못에 넣으면 수일 내에 큰 비가 온다는 곳이다.
 
또한 이곳에는 제봉(祭峯)이라는 곳이 있는데, 봉우리 위에 돌로 제단을 축조, 제단(祭壇)의 사용은 가뭄이 심할 때에 군수가 기우제(祈雨祭)를 행하는 곳이라고 한다. 이제 심곡사(深谷寺)의 연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심곡사(深谷寺)는 도솔산(兜率山) 밑에 있었던 신라 때의 고찰(古刹)인 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립(刱立)하였는데, 고려 광종(光宗) 8년 기미(己未)에 화재(火災)로 인해서 수백간(數百間) 범자(梵字)가 회퇴(灰堆)로 화하여 그후 다시 광종(光宗) 9년에 사승(寺僧) 도민(道敏) ∙ 지현(智賢) 등이 중창(重刱)하였으며, 이조 숙종(肅宗) 43년 정유(丁酉)에 심곡사(深谷寺)가 재난(災難)을 입고 이조 경종(景宗) 원년(元年) 신축(辛丑)에 사승(寺僧) 예세(禮洗) ∙ 각심(覺心) ∙ 청원(淸元) ∙ 법능(法能) 등이 내원암(內院庵)만을 중창(重刱)하였다고 한다.
 
심곡사(深谷寺)는 이와 같이 840년만에 그 자취가 없어지고 말았지만 그 터전까지도 이제는 잊혀지고 말게 되었다.
 
3∙8선에 묶여서 옛 터전을 찾는 사람도 없고 옛 터에는 油油한 쑥대와 잡풀만이 우거지고 짐승들이 가끔 찾아 무엇을 찾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 북한 1977년 5월호(통권 제65호)
건봉사(乾鳳寺) 금강산(金剛山) 절(寺) 정태혁(鄭泰爀) # 심곡사
【문화】1. 금강산 건봉사·심곡사를 찾아서
(게재일: 2024.05.08. (최종: 2024.05.08. 23:09))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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