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9년(현종 10년)에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무찔러 이긴 전투. 우리 나라 3대첩의 하나이다.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 오는 거란에 대해 강경하게 맞서서 북진 정책을 계속 추진하는 한편, 중국의 송과 친교를 맺어 문물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 소손녕을 앞세운 거란의 제1차 침입이 있었다. 이 때
서희가 혼자 적진으로 들어가 담판을 벌여 이들을 물리쳤다. 서희는 고려가 앞으로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거란을 배척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거란군을 스스로 물러가게 하고, 압록강 동쪽의 땅을 얻어 그 곳에 강동 6주를 설치하였다.
그렇지만 강동 6주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거란은 고려에서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세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 거란의 성종이 제2차 침입을 시도하여 개경을 함락시켰으나 별 소득 없이 철수하였다.
거란은 제2차 침입 후 고려에 대하여 사대의 예를 갖출 것과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고려가 이를 거절하자,
1018년 소배압을 앞세워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이 때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한 20만 8,000명의 대군이 맞서 싸웠다. 거란군은 흥화진을 통하여 침입을 시도하였으나 그 곳에서 패배하였다. 자주(慈州)에서는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지만 서경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병력의 손실이 커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거란으로 회군하던 중 청천강 유역의 연주·위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 판관
김종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