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에 있은 세 번에 걸친 거란족의 침입.
거란은 본래 몽고 지방의 시라무룬강 유역에 살던 유목 민족이었다. 916년에 예뤼 아바오지가 나와 여러 부족을 통일하였으며,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켰다.
태종 때 나라 이름을 요(遼)라 고쳐 세력을 떨쳤다. 고려에서는 송나라와 국교를 맺는 한편, 요가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이고, 문화적으로 야만 민족이라 하여 이를 배척하면서 적극적으로 북진 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자 중국 대륙으로 세력을 펴려던 거란은 먼저 뒤탈을 없애기 위해 고려를 치려 하였다.
993년(성종 12년)에 거란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송나라와 관계를 끊을 것과 청천강 이북의 땅을 떼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때 고려에서는 많은 신하들이 땅을 떼어 주고 화평할 것을 주장했으나,
서희는 이에 반대하고 혼자서 적진에 들어가 소손녕을 설득하여 강화를 맺었다. 이로써 고려는 오히려 여진을 몰아 내고
강동 6주를 설치함으로써 국경이 압록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뒤 고려는 거란과 국교를 맺었으나, 여전히 친송 정책 을 펴 나갔다. 그러자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다시 침입해 왔다(
1010년, 현종 1년). 고려에서는
양규가 흥화진에서 이를 맞아 싸웠으나, 개경이 함락되어
현종의 친조(몸소 거란왕을 찾아 봄)를 조건으로 다시 강화하게 되었다.
거란이 물러간 뒤, 현종은 병을 핑계삼아 거란에 가지 않을 뿐 아니라 군비를 더욱 강화하여 그들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에 거란은 강동 6 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3차로 침입해 왔다(
1018년). 고려에서는
강감찬이 이를 맞아 귀주에서 거란군을 전멸시켰는데, 그것이 우리 나라 3대첩의 하나인
귀주 대첩이다(
1019년, 현종 10년).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뒤 고려에서는 강감찬의 건의로 개경의 주위에 나성을 쌓고, 덕종 때에는 압록강 입구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 장성을 쌓았다. 그리고 문화 전통 의 우수성을 내세워 7대 실록을 편찬했으며, 대장경을 만들어 국민들의 호국 정신을 드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