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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노수신(盧守愼)
노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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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수신 (盧守愼)
[1515 ~ 1590] 조선 시대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 호는 소재· 이재· 암실 ·여봉 노인이고, 시호는 문의(文懿)·문간(文簡)이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노수신 (盧守愼) 교종 서인 문경시 직지사 희양산 1589년 정여립 휴정 이연경 선조 성혼 영규 이이 정철 조광조 박순 이자 김세필 지증 봉암사 팔봉서원 기축옥사 기묘사화 임진왜란
▣ 원문/전문 (인기순, 1~10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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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만필 18절 甲辰漫筆 18節 총서 윤국형(尹國馨)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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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4) 백과 광해군 (3) 백과 류성룡 (2) 백과 을사사화 (2) 백과 이순신 (2) 백과 이이 (2) 백과 이자 (2) 백과 임진왜란 (2) 백과 조광조 (2) 백과
▣ 백과사전
[1515 ~ 1590] 조선 시대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 호는 소재· 이재· 암실 ·여봉 노인이고, 시호는 문의(文懿)·문간(文簡)이다.
 
1531년에 당시 성리학자로 이름 높던 이연경의 딸과 혼인하였고, 장인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서산 대사로 더 잘 알려진 승려 휴정과 사귀면서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1544년에 3년마다 실시되는 과거 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 수찬 등의 벼슬을 지냈다. 1544년에 시강원 사서 벼슬에 올랐으며, 같은 해에 사가 독서를 하였다. 사가 독서란 재능이 뛰어난 학자에게 일종의 유급 휴가를 주어 학문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당시 정치계는 왕실의 외척들인 윤씨 일파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들 내부에서도 대립이 생겨 대윤과 소윤으로 다시 파벌이 갈리었다. 대윤에 속하는 노수신은 인종이 왕위에 오른 초기에 정언 벼슬을 지내면서 소윤에 속하는 이기를 탄핵하여 파면시키기도 하였다.
 
1545년에 명종이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문정 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그의 동생인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이 정권을 잡은 뒤,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을사사화라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윤임 등은 죽음을 당하였지만, 노수신은 소윤파의 윤춘년과의 친분 덕으로 죽임을 면하고 이조 좌랑 벼슬에서 파면당하여 순천으로 귀양갔다. 이어서 양재역 벽서 사건에 관련되어 죄가 더해져서 진도로 옮겨져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진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노수신은 이황과 김인후· 이항· 기대승 같은 학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주자 의 '인심 도심설'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가 귀양살이를 하던 당시 진도에서는 혼례를 치르는 풍속이 없어서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강제로 빼앗아 오곤 하였는데, 노수신이 예법으로 가르쳐서 이런 야만적인 풍습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 때 진도의 군수로 있던 홍인록이란 사람이 노수신을 심하게 박대하였으나, 나중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중요한 벼슬을 하면서 홍인록이 간관들로부터 규탄을 받게 되자, 오히려 그를 옹호하는 너그러움을 보였다.
 
1565년에 귀양지를 다시 괴산으로 옮겼다가 선조가 왕위에 오른 해인 1567년에 귀양에서 풀려난 즉시 교리 벼슬에 등용되었다. 이어서 대사간· 부제학· 대사헌 ·이조 판서· 대제학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1573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우의정으로 있을 때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는데, 대상을 치른 뒤에 곧바로 검은 갓을 쓰기가 미안하다고 생각하여 흰 옷에 흰 갓을 쓰고 다녔다. 대상 은 죽은 지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이것을 다른 사람들이 본받아서 따라함으로써 나중에는 담제를 지내기 전에는 흰 옷과 흰 갓을 쓰도록 제도화되었다. 담제란 대상을 치른 그 다음 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1578년에는 좌의정에 올랐으며, 1585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1588년에는 영의정 자리를 사직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다음 해에 정여립이 반역을 꾀한 사건으로 기축 옥사가 일어나자 노수신은 정여립을 추천하였다는 관계로 탄핵을 받아 파면당하였다.
 
정여립은 벼슬길에서 소외당한 데 불만을 품고 고향에 내려가서 사람들을 모아 무력을 기르는 한편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왕위를 빼앗으려는 반역을 꾀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인 과 서인이 세력 다툼을 벌여서 동인에 속하는 1,000여 명이 화를 입은 사건을 기축 옥사라고 한다.
 
노수신은 기축 옥사가 일어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 으로 선비 집단의 존경과, 특히 선조로부터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입었던 노수신은 죽은 뒤에 충주의 팔봉 서원과 상주의 도남 서원·봉산 서원, 괴산의 화암 서원, 진도 의 봉암사 등에서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선조의 묘에 위패를 함께 두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정여립을 추천하였다는 이유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13권 8책으로 이루어진 《소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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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