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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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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정벌 (對馬島征伐(遠征))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한 일.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대마도 정벌은 좁게는 세종 때인 1419년 6월에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정벌한 일을 말한다. 그러나 넓게는 이보다 앞서 있었던 고려 창왕 때와 조선 태조 때의 정벌까지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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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한 일.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해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왜구란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 와 중국 연안에서 활동한 일본인의 해적 집단을 말한다. 대마도 정벌은 좁게는 세종 때인 1419년 6월에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정벌한 일을 말한다. 그러나 넓게는 이보다 앞서 있었던 고려 창왕 때와 조선 태조 때의 정벌까지 포함한다.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의 해협에 위치하여 중개 역할을 하는 특수한 사정도 있거니와, 원래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하여 식량을 외부에서 충당해서 생활하여야 하므로, 고려 말부터 우리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하의 예를 갖추어 해마다 예물을 바치고 그 대가로 쌀 등 곡식을 받아 갔으며, 조정에서도 그들을 달래기 위하여 대마도를 우대하여 주었다.
 
그러나 대마도에 기근이 심할 때면 그들은 해적으로 돌변하여 해안을 약탈하므로 조정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였다. 왜구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약 70년간 우리 나라 해안 여러 곳에 침입하여 곡식을 빼앗고 사람을 해쳤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골칫거리 중의 하나였다. 특히 고려 말에 약 40년간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의 피해가 매우 심하였다. 고려는 왜구가 다시는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사절을 파견하고, 성곽 공사를 했으며 군사를 늘였다. 뿐만 아니라 화기를 개발하는 등 대책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끝내 왜구를 몰아 내지 못하였다.
 
쉬지 않고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자 왜구들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하였다. 고려는 대마도 정벌을 위해서 군사를 늘이고 전함을 건조하는 등 조직과 군비를 강화하였다.
 
조선도 군사를 늘이고 세종 대왕 때에는 총 72군데에 829척의 전함과 5만 169명의 기선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화기는 1377년 최무선화통도감을 설치하여 20여 종을 제조하였고, 후에 화포를 전함에 배치하여 왜구를 무찔렀다. 나세· 최무선 등의 진포 싸움과 정지의 남해 대첩이 대표적인 싸움이었다.
 
이러한 화약과 화기는 태종 때에 최무선의 아들인 최해산이 군기주부가 되어, 이를 더욱 개발하고 대마도 정벌에 사용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첫번째의 대마도 정벌은 1389년박위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우왕이 재위한 14년 동안 378회나 침입하였고, 그 왜구의 소굴이 대마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박위는 대마도에 도착하여 왜선 300여 척과 가까운 언덕에 있는 관사와 민가를 다 불태웠다. 또 박위는 뒤이어 도착한 원수 김종연 등과 함께 왜구를 공격하여 고려인 100여 명을 되찾아 돌아왔다. 이 대마도 정벌은 왜구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창왕은 박위의 공을 칭찬하고 큰 상을 내렸으며, 그 후 공양왕 때는 왜구가 훨씬 줄어들었다.
 
조선의 대마도 정벌은 두 차례 있었다.
 
1396년 태조는 왜구의 피해와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왜구의 사절이 왕래하는 것을 환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왜구를 소탕하고 변경의 방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절·향화왜인·홍리왜인이 자주 왕래가 있다고 해서 왜구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393년부터 1397년까지 모두 53회나 침입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1396년 8월 9일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 는 120척으로 동래· 기장·동평성을 함락시키고 배 16척을 빼앗아 갔으며, 많은 군인들을 죽였다. 또 같은 달 18일에는 통야포에, 23일에는 영해성을 침략하였으며, 11월에도 5회나 침입하는 등, 1396년 한 해에 13회나 침입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강력한 대응책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에 태조 는 12월 3일 우정승 김사형을 5도병마도통처치사에 임명하고, 남재를 도병마사, 신극공을 병마사, 이무를 도체찰사로 삼아 5도의 병선을 보아 이키섬과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 정벌은 반드시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조선 최초의 대마도 정벌이었다는 데 의의가 크다.
 
왜구의 침입을 근절시키고 이들을 평화적 내왕자로 만든 것은 1419년의 기해 동정 이었다. 기해 동정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왜구가 지금의 충청 남도 서천군 동문 도둔리 비인현 도두음곶을 침입하였기 때문이다.
 
1419년 5월 5일 왜선 39척이 명나라에 식량을 빼앗으러 가는 도중 이 곳에 침입한 사건이다. 이 때 왜구는 병선 7척을 불태우고 비인현을 습격하여 곡식을 빼앗아 갔다. 이 싸움에서 도두음곶 만호 김성길은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아군의 대부분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자못 컸다.
 
같은 달 12일에는 왜선 7척이 해주로 침입하여 곡식 을 빼앗아 갔다. 13일에는 황해도 조전절제사 이사검 등이 병선 5척으로 왜구를 소탕하러 갔다가 해주 연평곶에서 왜적의 배 38척에 포위되어 식량을 요구당하는 등 대규모의 왜구가 연안을 소란하게 하자, 태종은 14일 대신 회의를 열어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종무를 3군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이숙무·황상을 중군 절제사로, 유습을 좌군 도절제사로, 박초·박실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경상·전라·충청의 3도의 병선 200척과 기선 군정을 거느려 왜구가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또 6월 8일에 각 도 병선을 모두 견내량에 모이도록 하는 한편, 영의정 유정현을 3군 도통사로 삼아 경상도에 가서 총감독하게 하였다. 또 대마도 정벌에 앞서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왜인에 대한 조처를 취하였다. 즉, 대마도주의 사신을 함길도로 보내고, 흉악한 왜인 21명을 죽였으며, 경상도에 거주하던 왜인 591명을 포로로 하여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이 때에 죽은 자와 자살한 자가 136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준비를 마친 다음 이종무는 9절제사를 거느리고 정벌길에 올랐다. 이 때 동원된 병선은 227척이며, 병사 1만 7,000여 명으로 65일간의 식량을 준비하여 마산포를 출발하게 하여 대마도로 진격시켰다. 당시 일본에서는 규슈의 제후(諸侯)를 총동원하여 대마도를 방어하게 하였으므로, 원정군은 대마도 전체를 토벌할 수 없었으나,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그 해 6월에 되돌아왔다. 이 해가 기해년이었으므로 이 정벌을 일명 기해 동정이라고도 한다.
 
기해 동정은 왜구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능동적으로 변한 것을 의미하며, 또 강력한 무력의 시위로 왜구들에게 위협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3일 왜구가 다시 침입하였으므로, 다시 정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하지 않았다. 대마도주는 1420년 정월 시응계도를 보내 항복하겠다고 했으나 후에 이를 뒤집음으로, 같은 해 11월 항복하지 않으면 다시 정벌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왜구가 귀순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다시 예전처럼 통상하겠다고 애원해 왔기 때문에 태도를 바꾸어 이를 허락하였다. 이는 왜구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해 동정은 왜구를 종식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기해 동정 후 왜구가 근절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계기로 하여 대마도를 비롯한 서부 일본 각지의 도적들이 차츰 평화롭게 왕래하게 되었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있던 3차례에 걸친 대마도 정벌은 왕조을 달리하면서까지 그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국가의 근심을 덜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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