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엽 이후 우리 나라와 중국 연안에서 약탈을 일삼던 일본 해적.
왜구의 약탈 행위는 일찍이 삼국 시대부터 있어 왔으나, 이들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여·원(麗元) 연합군이 일본 원정에 실패한 고려 후기부터였다.
왜구는 1350년대를 전후한 충정왕 때부터 그 규모가 커져서 점차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의 연안으로 그 약탈 무대를 넓혀 황해도, 평안도까지도 노략질을 하였다.
왜구의 구성원은 몰락한 지방 호족, 무사와 연해의 빈민 또는 밀무역 집단으로 이루어졌고, 약탈 대상물은 주로 식량이었으나 육지로 올라와서는 재물을 빼앗거나 사람을 해쳐 농촌 사회를 파괴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왕릉을 파헤쳐 문화재를 훔쳐 가기도 하였다.
공민왕 집권내내 왜구가 수없이 출몰하여 피해가 극심했으나 집권초기에는 반원정책으로 원과 갈등하며 북방수비에 군사력을 집중하던 시기였기에 왜구의 약탈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고려의 방어가 소홀하자 왜구들은 삼남지역을 누비고 다니며 약탈과 양민학살을 자행하여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져갔다. 고려조정이 왜구침입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된 시기는 홍건적의 2차침입을 물리친 후였다. 고려의 본격적인 반격의 전환점이 된 것은
홍산대첩(1376)의 승리였으며, 이후
진포해전(1380)에서 처음으로 화포를 전투에 이용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관음포 대첩(1383)에서 승리하여 큰 자신감을 얻은 고려는
대마도 정벌(1389)을 감행하여 성공함으로써 왜구에 대해 공세적인 우위에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