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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대야성 전투(大耶城戰鬪)
대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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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성 전투 (大耶城戰鬪)
삼국 시대에 대야성을 둘러싸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싸움. (642년)
▣ 지식지도
◈ 지식지도
대야성 전투 (大耶城戰鬪) 합천군 642년 신라 후백제 1018년 920년 647년 565년 김유신 태종 무열왕 김품석 견훤 김인문 문명 왕후 문무왕 소정방 진덕 여왕 진흥왕 요석 공주 죽죽 당항성 대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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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의 간 근/현대 소설 김동인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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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년 (2) 백과 김품석 (2) 백과 대야성 (2) 백과 태종 무열왕 (2) 백과
▣ 백과사전
삼국 시대에 대야성을 둘러싸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싸움.
 
640년대에 들어와 신라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백제의 의자왕은 642년 7월에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서쪽 지역에 있는 미후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또 8월에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와 중국이 통하는 길의 거점인 당항성을 공격하였으며, 윤충 장군에게 명해 대야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따라서 대야성 싸움은 백제의 공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이 때 대야성은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비장인 검일의 아내를 빼앗은 적이 있었다. 이에 앙심을 품고 있던 검일은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이와 내통하여 창고에 불을 질렀다. 이 때문에 신라군의 사기가 떨어져 마침내 김품석의 보좌관인 아찬과 서천의 주장에 따라 항복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군이 항복하며 나온 신라군을 모조리 잡아죽이자, 비로소 백제군과 검일에게 속은 것을 안 김품석은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자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의 보좌관인 죽죽과 용석은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다. 한편, 신라의 백성 중 남녀 1,000명이 사로잡혀 백제의 서쪽 지방으로 옮겨져 노예가 되었다.
 
대야성 싸움의 승리로 의자왕은 윤충에게 말 20필과 곡식 1,000석을 하사하였으며, 신라의 죽죽과 용석에게도 각각 급찬과 대나마의 벼슬을 내렸다.
 
한편, 대야성 싸움의 패배로 압량까지 후퇴하게 된 신라는 흐트러진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먼저 압량에 주를 설치하고 군주로 김유신을 임명하였고, 김춘추를 고구려로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압량의 성주로 임명된 김유신은 648년(진덕 여왕 2)에 대야성 밖으로 백제 군사를 유인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이 때 사로잡힌 백제군 중에 장군 8명과 대야성 싸움 때 죽은 김품석 부부의 시신을 교환하였다. 그 공으로 김유신은 이찬의 벼슬을 받고 '상주 행군 대총관'이 되었다. 한편, 김춘추는 고구려를 설득하는 일에는 실패하였지만 대신에 당나라의 태종 을 설득시켜 20만 명의 구원군을 데려 올 수가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싸움은 잠시나마 백제가 신라를 압도했지만 신라가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국력을 키우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김유신은 군권을 장악하고 김춘추는 외교권을 장악하여 나중에 두 사람이 연합하여 삼국 통일을 이룩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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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