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9 ~ 1714]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1663년(현종 4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된 뒤, 호조 참의를 거쳐 1701년에 좌찬성, 1709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유명하였으나,
송시열에게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을 청하였다가 야유의 글을 받고 1681년 송시열의 덕행과 학문의 결함을 지적하여 사이가 멀어졌다.
그 후 서인이 강건파와 온건파로 갈라지고, 온건을 주장하는 소론의 우두머리로 받들어져
송시열의 노론과 크게 대립하였다. 이 때부터 그는 이산(泥山)에 머물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