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3거두(손천민(孫天民)-청주에서 처형, 손병희(孫秉熙)-일본에 망명, 김연국(金演局)-서울에서 복역)가 탄압으로 수난을 당하고 있을 때, 동학의 기반을 이용하여
송병준과 같이
일진회(一進會)를 조직, 친일활동을 하던 이용구는 1906년
손병희가 귀국하여 천도교 중앙총부를 설립하자, 순수 교단화(敎團化)에 반대, 정치적으로 친일 정책을 표방하다가 손병희에 의해 제명처분을 당했다.
이에 이용구는
김연국 등과 함께 천도교에서 이탈, 시천교를 설립했다. 교단의 이름은 천도교 주문 "시천주(待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에서 따왔으며, 교의 자체도 천도교와 별차이가 없다.
한때 천도교를 앞지를 정도로 교세를 떨치기도 했으나, 한일합방에 앞서는 등 친일 매국행동으로 민중의 신망을 잃음으로써 차츰 교세가 약화, 이용구의 죽음과 함께 사그라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