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판서가 되어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등과 모의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시켰다. 이 사건을 주도한 공로로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숭선군(崇善君)에 봉해졌으며, 자품은 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그 해 삼의정이 병약해 그가 우찬성의 지위로 사은사에 선발되어 다시 명나라에 갔다. 그러나 1546년 공무를 마치고 귀국 도중 영평부(永平府)에서 돌연 병사하였다. 시호를 처음에는 소이(昭夷)라 했다가, 문정왕후가 좋지 않다고 하여 문충(文忠)으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