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명칭으로서 정루(亭樓)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누정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누(樓)·정(亭)·당(堂)·대(臺)·각(閣)·헌(軒) 등을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누각은 누관(樓觀)이라고도 하며, 대개 높은 언덕이나 돌 혹은 흙으로 쌓아올린 대 위에 세우기 때문에 대각(臺閣) 또는 누대(樓臺)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평창의 청심대(淸心臺)는 그곳의 대 자체만을 뜻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건립된 누정까지를 가리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라는 누정명(樓亭名)이 적혀 있지 않음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누각에 비하여 정자는 작은 건물로서, 역시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놀거나 휴식할 장소로서 산수 좋은 높은 곳에 세우는데 정각(亭閣) 또는 정사(亭榭)라고도 한다. 사(榭) 또한 높은 언덕, 혹은 대 위에 건립한 집으로 정자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누정은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마을 속의 살림집과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한 남성위주의 유람이나 휴식공간으로 가옥 외에 특별히 지은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방이 없이 마루만 있고 사방이 두루 보이도록 막힘이 없이 탁 트였으며,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건립한 것이 특색이다.
누정은 또한 정자라는 점에서 충청남도 이남에 많이 분포한 모정(茅亭)과 비슷하지만, 모정은 주로 농경지를 배경으로 한 정자로서, 편액이나 현판은 물론 자체의 고유한 명칭이 없이 주로 농군들의 휴식소로 간편하게 지은 집이라는 점이 누정과 다르다.
한편, 누정 중에는 한두 칸 정도의 방이 있는 경우도 있다. 광주(光州)의 환벽당(環碧堂)과 같이 ‘―당’ 이라고 하는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누정의 기능이 다양화되면서 강학소(講學所)나 재실(齋室)의 기능을 하는 방을 둔 누정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역시 방보다는 마루를 위주로 한 구조로서 누정의 특색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누정이라 하면 이와 같은 건물까지도 일컫는 개념으로 통용된다.
【향토】추모정은 지사면 소재지인 방계마을 앞 동산에 위치해 있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목조 팔작 기와지붕으로 전주최씨 종중에서 연촌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960년에 건립하였다. 정자 내에는 甲辰(1964)년 5월에 서흥 김규태가 짓고, 홍주 이환용이 쓴 추모정기와, 1961년 1월에 종중대표 최규재가 짓고, 최용호가 쓴 미담을 칭찬하는 포미기(褒美記)가 있다.
【문화】화현읍 지현리에 ‘육송정’이라고 있다. 여섯 육 자, 소나무 송 자, 육송정. 이 집에는 오래된 정자가 하나 있는데 판서가 하나 나면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판서가 또 하나 나면 또 하나 심고, 이내 여섯 그루가 되어 ‘육송정’이다. 육판서가 이 댁에서 났다는 얘기가 된다. 예산 송씨네 ‘육송정’에서 선비들이 모여서 글을 지었다고 한다.(完)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향토】영벽정(暎碧亭)은 관촌면 덕천리 사선대 입구 산자락에 있다. 팔작지붕 아래 정면 2칸, 측면 2칸의 구조로 1935년에 지었으며, 영벽정기 등 9개의 현판이 있다. 누각 왼쪽에는 1989년도에 후손들이 청주인 한동석이 찬(撰)을 하고 김해인 김호균이 글씨를 써서 세운 ‘영벽정기적비’가 있고, 그 뒤편 바위에 영벽정을 창건한 기념으로 단기 4268년(1935) 乙亥 7월에 창건자 명단을 새긴 암각서가 있다.
【향토】덕치면 물우리 섬진강변에 세워진 월파정(月波亭)은 조선식 건축양식으로 정교한 조각과 우아한 선, 화려한 단청이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선경(仙境)을 빚어놓고 있다. 특히 섬진강 맑은 물이 급류로 흐르다가 바위 사이를 감돌아 월파정 아래에 이르면 소(沼)가 되어 유유자적하며, 강기슭의 기암괴석과 천 년 묵은 낙락장송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연산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