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7 ~ 1572] 조선 선조 때의 성리학자. 호는 고봉(高峯)이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558년에 문과 에 급제하여 선조 때에는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어 독학으로 공부하여 중국 고전에도 능하였다.
32세 때
이황,
김인후 등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연구한 끝에, 대학자들도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내놓아 스승들을 놀라게 하였다. 특히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는 유명한데, 이것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변론 후 이황은 그의 학식을 존중하여 대등한 입장에서 대하였는데, 이 논변의 왕복서한은 《양 선생 사칠이기왕복설(兩先生四七理氣往復說)》 2권에 남아 있다.
또 서예에도 능했으며 사후 90년(선조 23)에는 생전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 3등(光國功臣三等)에 추록(追錄)되었고 덕원군(德原君)․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주요저서에는 《
고봉집(高峰集)》 《주자문록(朱子文錄)》 《논사록(論思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