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면 삼은리 산49번지 월촌 마을 북쪽 도로변 입구에 위치해 있다. 오괴정(五槐亭)은 명종 즉위년(1545)에 해주오씨 오양손이 처음 지었다. 오양손은 김광필의 문인으로 기묘사화를 피해 이곳에 은거하고, 정자 주변에 5그루의 괴목을 심었다. 이에 오괴정(五槐亭)이란 명칭이 있게 되었는데 편액의 글씨는 미상이다.
오괴정(五槐亭)은 팔작지붕 아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자 전체를 빙 둘러 난간을 둘렀고, 가운데에 환도실(環堵室)을 꾸몄으며, 4귀에 추녀 받침이 있다. 오괴정의 사방 기둥에는 주련이 16개가 걸려 있고, 오괴정 안에는 사제당 안처순(思齋堂 安處順)의 글과 중창기 등 8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후 오괴정은 철종7년(1856)에 중창되었고, 그 뒤 '임술년(1922)'에 중건되었다. 오괴정이 있는 마을에는 해주오씨 집성촌으로 과거에는 마을이 매우 컸으나 이농현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 지금은 아주 작은 마을로 변하였다. 오괴정은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67호로 지정받아 관리되고 있다. 【개요 - 2014.11 자료 추가】
洞僻但聞鳥 溪深且看魚 掛榻無佳客 獨披案上書 敬庵
마을 외지니 새소리만 들리고, 洞僻但聞鳥 시내 깊으니 물고기만 보이네. 溪深且看魚 반가운 손이 없어 의자 걸어놓고, 掛榻無佳客 홀로 책상 위에 책을 펼쳐보노라. 獨披案上書
경암(敬庵)
靑坡對麋鹿 白日夢羲農 世業惟殘春 生涯只短筇 笙傳依檻竹 絃奏隔溪松 蘊也何爲者 年年此躡蹤
畎畋靑山下 茅茨綠水邊 百年從地僻 萬事任天然 槐密淸陰合 臺高暑氣蠲 向來詩酒樂 徠與俗人傳 砭齋 崔蘊
청파(靑坡)에서 미록(麋鹿)을 대하고, 靑坡對麋鹿 대낮에 복희(宓羲)·신농(神農)을 꿈꾸네. 白日夢羲農 세업(世業)은 남은 책뿐이고, 世業惟殘春(卷) 생애는 짧은 지팡이 뿐이네. 生涯只短筇 생황소리는 난간에 대나무에서 전해오고, 笙傳依檻竹 비파소리는 시내 건너 솔숲에서 연주하네. 絃奏隔溪松 최온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蘊也何爲者 해마다 이곳을 찾아오는가. 年年此躡蹤
밭이랑은 청산 아래에 있고, 畎畝靑山下 띠 집은 푸른 물가에 있네. 茅茨綠水邊 백년토록 외진 지방에 살기에, 百年從地僻 만사는 천연(天然)에 맡겼노라. 萬事任天然 홰나무 울창하여 맑은 그늘 좋고, 槐密淸陰合 집이 높아서 무더위가 덜하더라. 臺高暑氣蠲 접때에 시와 술을 즐겼던 일은, 向來詩酒樂 속인(俗人)에게 전하지 말게나. 休與俗人傳
폄재(砭齋) 최온(崔蘊)
粤在 靖陵己卯 士林之斬伐也 極矣 遯庵吳公 翩然高擧七百里而南 爲卜居龍城之磊 谿 手植五槐而亭其陰 逍遙而終其世 淸風高節 足以廉貪而立懦矣 兵燹之 餘 亭爲墟 槐樵斮殆盡 後裔之相顧 興嘆者 又屢百載 培其由蘖 童童如 蓋 復其舊亭 如翬斯飛 以記問于余 噫天下之種柳者何限 而必稱淵明先 生 天下之賞梅者甚衆 而必稱和靖處 士 天下之愛蓮者無數 而必稱濂溪夫 子 天下之植槐者亦不爲不多 而人至今 膾炙而不厭者 前有王氏之三 後有吳 門之五而已 以此觀之 賢人所過之地 一草一 木亦皆有精彩矣 公以金寒暄爲師 以金思齋奇服亝爲友 經明行修 蔚 然有重望 若使展其所蘊 可以扶植士 林 功光斯文 而北門禍焰 玉石俱焚 公乃 因樹爲屋 戢景藏采 所扶植者無過五 槐而止 此固志士之所太息者也 雖然不 食于先者 必報于後 吾將見孫枝子葉 日月繁茂滿庭之陰 罔專美於王氏之 家矣 吾以是祝 玄黓閹茂莫春者碧梧山人 金甯漢 記
오괴정기(五槐亭記)
아아, 중종(中宗) 기묘(己卯: 1519)년 사림(士林)의 참벌(斬伐)이 극도에 달했다. 돈암(遯庵) 오공(吳公)은 멀리 700 리 남쪽 용성(龍城:南原)의 뇌계(磊谿)에 가서 복거(卜居)하였다. 그리고 손수 5그루 홰나무를 심고 그 음지에 정자를 짓고 배회하면서 생을 마쳤으니 깨끗한 풍범과 고상한 절조는 탐하는 사람을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사람을 붙들어 세우기에 충분했다. 왜란(倭亂)으로 인해 정자는 폐허가 되고 홰나무는 땔나무로 베어가서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서로 돌아보고 탄식한 지가 또 수백 년이 되었다. 하지만 홰나무의 그루터기를 북돋아주자, 무성하기가 일산처럼 수북이 자랐다. 그리고 옛 정자를 복구하니 꿩이 나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기문(記文)을 나에게 물으러왔다. 아, 천하에 버드나무를 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도 반드시 연명선생(淵明先生)만 일컫고, 천하에 매화를 감상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데도 반드시 화정처사(和靖處士)만 일컫고, 천하에 연꽃을 아끼는 사람이 셀 수 없는데도 반드시 염계부자(濂溪夫子)만 일컫고, 천하에 홰나무를 심는 사람도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전대에 왕씨(王氏)의 세 그루와 후대에 오씨(吳氏) 문중(門中)의 다섯 그루가 있어서, 사람들이 지금까지 회자하여 싫어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로써 본다면 현인(賢人)이 지나가는 곳에 한 포기 풀과 한 그루 나무도 모두 청채(精彩)가 있었던 것이다. 공(公)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스승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복제(服亝) 기준(奇遵)을 벗으로 삼았다. 그래서 경전(經傳)에 밝고 행실이 닦여져서 울연(蔚然)한 중망(重望)이 있었다. 게다가 만약 그 품은 뜻을 다 펼쳤더라면 사림(士林)을 부식(扶植)해서 공이 사문(斯文)에서 빛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북문(北門)의 화염(禍焰)으로 옥석(玉石)이 모두 타버리자, 공(公)은 이에 나무를 가지고 집을 지어 햇빛을 차단하고 심은 것은 불과 5그루 홰나무에 그쳤다. 대개 이 일은 진실로 지사(志士)라면 크게 탄식할 일이다. 비록 그러하나 ‘선대에서 벼슬을 못했다면 반드시 후손에게 갚아준다,’는 말이 있다. 나는 앞으로 자손들이 날로 달로 번성해서 뜰에 자손이 번성한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세상에서는 왕씨(王氏) 집안만 오로지 아름답다고 일컫는 일이 없을 것이니 나는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임술(壬戌)년 모춘(莫春) 벽오산인(碧梧山人) 김영한(金甯漢)은 기(記)한다.
詩讚敬梓 書訓肯搆 皆繼守先業之義也 卽此五 槐亭 惟我九世祖參奉公遊憩之所 而遺址存 焉 後昆豈無敬梓肯搆之心乎 噫 公以靜庵私淑 己卯禍後 自號遯庵 自京南下卜居于府北四十 里許磊溪 築壇結亭 手植槐檜 扁之以五槐 盖寓 王晉公三槐之意也 當時凌霄之幹 滿庭之蔭 榮 茂焉扶䟽焉 傳稱其邁種餘蔭 當報於後云 歷數 世代 果有驗矣 八世祖木隱公 明廟朝中司 馬 薦孝陵參奉 弟判官公 明廟朝又中司馬 判 官子典籍公 對朝貢策爲文科壯元 七世祖敬 庵公 宣廟朝中司馬 六世祖養靜公 以遺逸 拜憲府監察 適値昏朝 退居邱園 道學文章 標準 於世 與崔砭齋李天默張龍溪柳南澗諸賢 每當 良辰佳節 會于此亭 或設鄕飮禮 或講經傳義 酬 唱詩律 積成卷帙 而盡入於辛巳回祿 獨於砭齋 遺集 只傳數首律 樹木亦萎於壬辰兵燹 而數株 叢生 猶有餘蘖 豈不慨恨哉 其後龍岡公學諭公 蔚山公 克趾前烈 又有十餘生進 種德食報 有如 是矣 芳陰依舊 苔砌尙存 士林莊誦 行路齎嗟 而 況雲仍之感愴爲如何哉 重修之役 經紀者屢世 而未果 昨年夏聚族而謀 不多日而成 幾百年風 打雨泐之跡 赳聳於一朝 江山可以復識 樹木更 加愛惜 花石之誡 敢與諸宗講之 而景與事之賁 飾 恭俟大方家銘焉 系之以詩曰 結亭仍古額 復見當時容 棟樑依舊屹 景物更新濃 猗猗階下竹 鬱鬱澗邊松 先賢今仰慕 迨愴感遺踪 幽幽綠樹山下 鑿鑿白石溪邊 百年千年僻處 二槐三槐蔚然 淸趣宜乎嘯咏 塵憂可以消蠲 美哉美哉此亭 勿剪勿伐永傳 崇禎紀元後四丙辰二月下浣 裔孫 元翊 謹識
오괴정중창기(五槐亭重刱記)
시경(詩經)에서는 “가래나무를 공경하라.”라는 것을 칭찬했다. 그리고 서전(書傳)에서는 “긍구(肯搆)하라.”라는 것을 가르쳤다. 모두 선대의 유업을 계승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바로 이 ‘오괴정(五槐亭)’은 우리 9대조 참봉공(參奉公)께서 휴식하셨던 장소이다. 그러나 유허지[遺址]로 남아있으니 후손이 어찌 ‘가래나무를 공경’하는 마음과 ‘선대를 이어 집을 지으려’는 마음이 없겠는가. 아아, 공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사숙(私淑)으로 삼아 공부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이후에 자호(自號)를 돈암(遯庵)이라 짓고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남원(南原) 북쪽으로 40 리 뢰계(磊溪)라는 곳에 복거(卜居)하였다. 단(壇)을 쌓고 정자를 짓고 손수 홰나무·노송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편액을 ‘오괴(五槐)’라 내걸었으니 대개 북송(北宋) 때 왕진공(王晉公)이 세 그루 홰나무를 심은 뜻을 본받은 것이다. 당시에는 나뭇가지가 무성하여 하늘도 찌를 것 같았고 뜰에는 울창한 그늘이 가득했다. 그래서 ‘힘써 덕을 심으면 여음(餘蔭)이 의당 후손에게 갚아준다.’라는 칭송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몇 세대(世代)가 지나자, 과연 증험(證驗)이 있었다. 8대조 목은공(木隱公)은 명종(明宗)년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천거(薦擧)되었다. 그의 아우인 판관공(判官公)은 명종(明宗)년간에 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판관(判官)의 자(子)인 전적공(典籍公)은 대조공책(對朝貢策)으로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했다. 7대조 경암공(敬庵公)은 선조(宣祖)년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6대조 양정공(養靜公)은 유일(遺逸)로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제배(除拜)되었다. 그러나 마침 혼조(昏朝: 광해군)를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살았다. 이렇듯 도학(道學)·문장(文章)은 당세에 표준(標準)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폄재(砭齋) 최온(崔蘊)·이천묵(李天默)·장용계(張龍溪)·유남간(柳南澗) 제현(諸賢)들과 매번 양신(良辰)과 가절(佳節)에 ‘오괴정’에 모여서, 혹여 향음례(鄕飮禮)를 치르기도 하고 혹여 경전(經傳)의 의(義)를 강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시율(詩律)을 지어 주고받아서 모은 원고가 권질(卷帙)이 되었다. 그러나 신사(辛巳)년 화재에 모두 불에 타버리고 유독 폄재(砭齋)의 유집(遺集) 중에 몇 수(首) 시율(詩律)만 전해지고 있다. 수목(樹木) 또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말라죽고 몇 그루 나무에만 더부룩하게 남은 움이 돋았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그 이후에 용강공(龍岡公)·학유공(學諭公)·울산공(蔚山公)께서 선열(先烈)을 이었고 또 10여명 생원(生員)·진사(進士)를 배출했으니 덕을 심어서 보답을 받은 것이 이와 같음이 있었다. 꽃다운 녹음은 의구(依舊)하고 이끼 낀 섬돌도 아직도 남아있었다. 그래서 사림(士林)들이 장송(莊誦)하고 길 가는 행인도 안타까워 혀를 차는데, 하물며 후손의 마음 아파하는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중수(重修)하려는 공사는 여러 대를 거처 경영했었으나 결과적으로 못했다가, 작년여름 종족(宗族)이 모여서 모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짧은 기간에 완성하였다. 몇 백 년 비바람에 폐허된 자취가 하루아침에 헌걸차게 중수되었다. 그래서 강산(江山)도 다시 기록할 수 있었고 수목(樹木)도 더욱 아끼게 되었다. 화초와 돌을 소중하게 하는 것은 감히 제종(諸宗)과 강구하겠지만 경치와 일을 수식하는 것은 삼가 대방가(大方家)의 명(銘)을 기다린다. 그리고 시(詩)를 덧붙인다.
정자를 얽고 옛 편액 내거니, 結亭仍古額 다시 당시 모습 볼 수 있네. 復見當時容 동량(棟樑)은 예전처럼 우뚝하고, 棟樑依舊屹 경물(景物)도 새롭고 산뜻하네. 景物更新濃 섬돌아래 대나무 숲 무성하고, 猗猗階下竹 시냇가에 소나무는 울창하여라. 鬱鬱澗邊松 선현(先賢)을 지금 우러러 추모하니, 先賢今仰慕 남긴 자취에 감회가 울적하네. 迨愴感遺踪 녹수(綠樹)는 산 아래 유유(幽幽)하고, 幽幽綠樹山下 백석(白石)은 시냇가에 착착(鑿鑿)하네. 鑿鑿白石溪邊 백 년 천년 외진 곳에, 百年千年僻處 홰나무 다섯 그루 우거졌네. 二槐三槐蔚然 깨끗한 아취(雅趣)는 읊어야 만이, 淸趣宜乎嘯咏 풍진세상 근심을 씻을 수 있네. 塵憂可以消蠲 아름답고 아름답다, 이 정자여, 美哉美哉此亭 꺾지도 베지도 말고 길이 전하세. 勿剪勿伐永傳
숭정(崇禎) 기원(紀元) 이후 4번째 병진(丙辰) 2월 하완(下浣)에 예손(裔孫) 원익(元翊)은 근지(謹識)하노라.
昔我先祖遯庵公 値己卯禍 自京南 遁于帶方之磊溪 手植五槐而作亭 徜徉乎泉聲岳色之間以自靖焉 歲 久而亭圮 族曾大夫諱元翊 建茅亭以 守其址 雲仍恨其湫隘 常齎志經營 矣 歲辛酉秋 詢謀僉同 鳩財集工 諸族 丈命不肖 幹其役 粤明年夏告落 不 肖乃以一言諗之曰 建亭非難 永世嗣葺 爲難 苟有秉彛之性者 孰無慕先之 誠 誠力所到 無事不成 且經曰 先世有 美而不傳 是不仁也 遭士禍自靖之美 蹟 惟此亭焉已 若恬視此亭之成 毁而不用誠力者 是忘先美而不傳 也 可不懼哉 僉曰此可以驚策來者 矣 遂記之云爾 壬戌秋七月旣望日 後孫 龜善 謹識
오괴정중건기(五槐亭重建記)
옛 우리 선조(先祖)이신 돈암공(遯庵公)께서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하여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대방(帶方: 南原) 뇌계(磊溪)에 몸을 은둔하였다. 그리고 손수 다섯 그루 홰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어, 물소리와 산색이 좋은 곳에서 소요하면서 자정(自靖)하다가 생을 마쳤다. 세월이 오래되어 정자가 허물어지자, 족증대부(族曾大夫)이신 휘(諱) 원익(元翊)께서 모정(茅亭)을 건립하고 그 터를 지키셨다. 그러나 후손들은 그 초라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늘 중건(重建)할 의향을 가지고 있었다. 신유(辛酉)년 가을 함께 자문하고 의논하여 재정(財政)을 꾸리고 장인(匠人)을 모집했다. 그리고 여러 종족 어른들이 불초(不肖)에게 그 공역(工役)을 주관하도록 명하였고, 마침내 이듬해인 여름 낙성(落成)을 고하였다. 불초가 이내 일언(一言)을 아뢰노라. 정자를 짓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영세토록 이어 수리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다. 진실로 떳떳한 본성을 가진 자라면 누군들 선대를 앙모하려는 정성이 없겠는가. 정성이 미치는 곳에 무슨 일이든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또 경전(經傳)에 말하기를 “선대의 아름다운 일이 있는데 전하지 않는 것은 불인(不仁)하다.”라고 하였다. 기묘사화를 당하여 자정(自靖)하신 아름다운 자취는 오직 이 정자뿐인데 만약 정자가 무너지는 것을 방관하고 정성을 쏟아 중건하지 않는다면 이는 선대의 아름다운 자취를 망각하고 전하지 아니한 것이니 두렵지 않겠는가. 모두 말하기를 ‘이는 후손에게 경책(驚策)을 줄만한 일입니다.’하기에, 마침내 기록했을 뿐이다.
임술(壬戌)년 가을 7월 16일 후손 귀선(龜善)은 삼가 쓴다.
顧梓人之引繩墨者 誨之亭曰 亭三區奧室于 中軒入外 閒敞于楹檻之際 而毋渠渠爾而毋燿 燿爾 念昔我祖嘉遯于斯也 豈無嘉卉異樹 可以 娛樂神情盤桓托意之物事無所取 而以槐題亭者 蓋 偶然也 旣不擇嘉卉異樹者而寓意焉 亦何嘗 黜嘉卉異樹而必以槐者乎 此事存澹泊中遺 意 述我祖業可也 食享以槪傳猶戒之 況敢逆探祖 先意妄以偶然爲槪 而且著之爲繼述云謂哉 嗚呼 讀吾祖依檻無心坐之句則知之矣 世之稱淵明菊者 由處士而顯菊 不由菊而顯處士 彼殖物固未嘗要 人之顯 然人之遇而寓意焉者 非賢人亦不能顯乎 物 然則槐之爲王晉公遇而兆三公之顯者 其爲榮 而 遇吾祖而爲歛退之隱者 未必爲辱也 隱顯雖在所 遇之時不同 而榮辱固不能終晦於人與物之美迹 焉 則槐之遇吾祖 豈不偶然 而吾祖之寓於亭 亭 之寓於槐 獨不偶然乎 傳曰 君子寓物而不寓於 物 方其寓物也 何必虛星以爲精冬以取火者云乎 哉 今日滿山蒼翠松栢皆槐也 連階蔥鬱楡與 榎亦槐也 若以古槐之閱兵燹 而易以爲楡榎者爲疚 則此未可與論偶然之義也 此義陶處士見之 故欲辯己忘言之句 與依檻無心之意 眞異世 而同符焉 亭之墟而建者凡再 皆不華美而樸素 則庶幾守吾祖淸介之遺韻 而合乎栢題之 詩意哉 裔孫 範善 謹識 壬戌三月下浣
오괴정중수기(五槐亭重修記)
생각건대 재인(梓人)으로서 먹줄을 긋는 사람이 정자에 대해 일러주기를, ‘정자가 세 칸이면 온돌방[奧室]이 중헌(中軒)이고 밖에서 들어왔을 때 기둥과 난간 사이에 탁 트여야하니 너무 크게도 말고 번쩍번쩍하지도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옛적 우리할아버지께서 이곳에 은거(隱居)할 적에 아름다운 꽃과 기이한 나무가 정신을 즐겁게 해주고 반환(盤桓)하면서 마음을 맡길만한 곳도 없는데도, 어찌 ‘괴(槐)’라고 정자를 표제(標題)했을까를 생각해보니 대개 우연이었다. 이미 아름다운 꽃과 기이한 나무가 있는 곳을 선택해서 그 곳에 마음을 붙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또한 어찌 일찍이 아름다운 꽃과 기이한 나무를 뽑아내고 굳이 괴(槐)를 심는 일을 했겠는가. 이 일은 ‘담박(澹泊)한 마음을 남긴 뜻이니, 우리할아버지의 가업을 계술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한 시(詩)에 그 뜻이 있다. 제향(祭享)을 올려 대략 전하는 것도 오히려 조심스러운데 하물며 감히 선대의 뜻을 억측하여 망년되게 ‘우연이러니’ 하고 대강을 말하고 그리고 또 ‘드러내서 계술(繼述)했다.’라고 말하겠는가. 오호라, 우리할아버지께서 저술하신 ‘난간에 의지해서 무심코 앉아있다.’라는 글귀를 읽어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세상에서는 연명(淵明)이 국화를 사랑했다고 일컫는다. 하지만 국화는 처사(處士)를 말미암아 드러난 것이지, 처사가 국화를 말미암아 현달한 것은 아니다. 저 식물(殖物)은 진실로 사람에게 드러나게 해주기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식물을 만나고 그리고 사람이 뜻을 붙인 것이니 현인(賢人)이 아니라면 또한 사물을 드러나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홰나무가 왕진공(王晉公)을 만나서 삼공(三公)으로서 현달한다는 길조(吉兆)가 된 것은, 그에게는 영광이지만, 우리 할아버지를 만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게 된 것도 꼭 그에게 욕(辱)된 것은 아니다. 은(隱)·현(顯)이라는 것은 비록 만나는 시기(時機)가 같지는 않으나, 영(榮)·욕(辱)은 진실로 인(人)·물(物)의 아름다운 자취를 끝내 드러내거나 감추거나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홰나무가 우리할아버지를 만난 것이 어찌 우연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할아버지가 정자에 뜻을 붙이고 정자가 홰나무에 뜻을 붙인 것도 유독 우연이 아니겠는가. 전(傳)에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물(物)을 의탁하지, 물(物)에 의탁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물(物)을 의탁할 적에 뭐 꼭 허성(虛星)이 정(精)하여 겨울에 화(火)를 취(取)한 것이라고 말했겠는가. 오늘날 산에 가득한 푸른 소나무·잣나무는 모두 홰나무이며 계단을 연이어 울창한 느릅나무·개오동나무도 홰나무이다. 만약 오래된 홰나무가 난리를 겪은 뒤로 병이 들어 느릅나무 ·개오동나무로 변했다면 이는 우연한 뜻으로 논할만한 것이 아니다. 이 뜻은 도연명처사가 시(詩)에 보였다. 그러므로 ‘변론을 하고자하나 이미 말을 잊었다.’는 글귀는, ‘난간에 의지해서 무심코 앉아있다.’라는 의미와는 참으로 다른 세대이면서 부합하는 의미이다. 정자가 허물어져 다시 건립한 것이 무릇 두 번째인데 모두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게 지었다. 그렇다면 거의 우리할아버지의 청렴하신 유운(遺韻)을 지킨 것이고 그리고 ‘백(栢)’이라 제영(題詠)한 시(詩)의 의미와도 부합한 것 같다.
예손(裔孫) 범선(範善)은 삼가 씀 임술(壬戌) 3월 하완(下浣).
午睡矇濃近水亭 傍簾啼鳥喚人醒 覺來依檻無心坐 惟有槐陰綠滿庭
원운(原韻)
물 근처 정자에서 낮잠을 푹 자노라니, 午睡矇濃近水亭 문발 곁에 새가 울어서 사람을 깨우네. 傍簾啼鳥喚人醒 깨어나 난간에 기대어 무심코 앉았으니, 覺來依檻無心坐 오로지 홰나무 녹음만 뜰에 가득하더라. 惟有槐陰綠滿庭
愛君淸致結斯亭 棲止年來任醉醒 繁茂五槐惟德符 應須歸視滿陰庭 思齋堂 安處順
그대의 맑은 청취를 사랑하여 정자를 얽어, 愛君淸致結斯亭 깃들어 지낸지 일 년 마음대로 취하고 깼네. 棲止年來任醉醒 무성한 오괴(五槐)는 오직 덕에 부합하여, 繁茂五槐惟德符 분명 돌아간 뒤에도 뜰에 그늘 가득하리라. 應須歸視滿陰庭
사당(思齊堂) 안처순(安處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