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은 청웅면 구고리의 동쪽 천변에 있다. 구고리 평지마을 앞 박훈, 박번의 효자각으로부터 동쪽으로 200m 지점 더 가면 압구정이 나온다. 압구정은 팔작지붕아래 겹치마를 두르고 정면3칸, 측면2칸으로 되어 있는데, 상량문(上樑文)에 ‘정묘(丁卯) 구월이십팔일 병인(九月二十八日丙寅)’으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1867년도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압구정의 연혁을 보면 효자 인덕정 박번은 병드신 아버지를 위해 구고 천에 나아가 기도한 뒤 물오리를 얻어 부친을 쾌유케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 후손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자를 짓고 ‘압구정(狎鷗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6.25전쟁 때에는 국군이 수복한 후 청웅 초등학교 교사(校舍)로도 사용하였다고도 한다. 정자의 마루는 5겹의 단단한 소나무로 놓아져 있고, 중건기를 비롯하여 2개의 현판이 있다. 정면의 압구정(狎鷗亭)이란 편액의 낙관을 보면 성재(惺齋)라고 적혀있다. 평창군수를 지낸 성재는 전서(篆書)의 대가로 이 지방 설송과 효산 등도 그에게 배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그 옆에는 작은 규모(52×21)의 압구정(狎鷗亭)이란 편액을 또 걸어놓았다. 【개요 - 2014.11 자료 추가】
昔李贊皇公 置庄于平泉 其譏子 孫曰 經始平泉 追先志也 又曰 留 此林居 貽厥後代鬻平泉者 非吾 子孫也 以一樹一石與人者 非佳 子弟也 歐陽永叔爲之跋 而其譏 近乎愚 以其患得患失之不足 爲 後昆道也 夫子孫之念祖先所遺 者 克紹而勿墜 詩言 桑梓之恭敬 書稱 作室之肯搆 有足以觀感者 矣 雲水之西九臯 古有狎鷗亭 世傳 以爲仁德亭收心齋兩先生 拓其祖敎授公退休之遺址 而 爲講學杖屐之所也 距今三百餘 年 屢閱兵燹滄桑之劫 扁楣紀蹟 磨滅而莫之徵 破瓦頹垣 盡化爲 野田榛蕪 欲求其彷彿 而無餘存 者 晜仍綿衍世以趾美稱常有志 於重建 而原憲之病 未之遑 過 之者指點而彷徨 曾余題旌閭 序云 亭榭古而沙鷗散者 指此而 興歎也 歲戊戌春原居後孫 懼夫 愈久而愈失其傳 乃協心倡議 鳩 略干財力 因廢址仍舊額 而作小 亭二間 蔭之以茅 取省其工而昭 其儉也 雖無欂櫨節稅之華 雲林 泉石之勝 挹而盡有之 至若春溪 藍碧秋月練素 鷗鳥之散者復集 或忘機而親人 或群飛而作聲 有 如燕雀之訪舊主而賀新成物之 感遇 亦豈偶然也哉 盖是亭之追 先貽後 與平泉者略同 而其成毁得 喪之不同 何也 贊皇 好珍怪而遺 之以富奢 二公 擇其窮僻 而遺之 以貧儉 此其所以異也 然則安貧 而尙儉 非傳家法之大要領乎 余 以同祖之晩生 南來四年之間 目 見是亭之廢而復興 不勝愴欣 遂 爲之記 又次歐陽公題韓魏公狎 鷗亭元韻 以揚之曰
數笏茅亭成一日 登斯曠感昔猶今 靑氈只有遺淸白 恰似沙鷗庶性心 戊戌梧秋下浣 始淳謹識 宗有司 鼎鎬 準根 爀根 廷斗 ■■ 宗憲
압구정(鴨鷗亭) 중건기(重建記)
옛 이 찬황공(李贊皇公)이 별장(別莊)을 평천(平泉)에 건립했다. 그 자손이 기롱(譏弄)하여 말하기를 “평천(平泉)에 별장을 건립하여 선대의 뜻을 추모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별장주인은 이 숲에 살다가 그 후손에게 끼쳐주어 평천장을 남에게 팔도록 하였으니 우리 자손을 그르게 한 것이고, 후손은 한 그루 나무 한 개 돌을 남에게 증여하니 훌륭한 자제(子弟)가 아니다.” 하였다. 구양(歐陽) 영숙(永叔)이 그 때문에 발문(跋文)을 썼다. “우(愚)에 가까운 일이다. 그 얻을 것을 걱정하고 잃을 것을 걱정하니 후손을 위한 도(道)라고 하기에 부족하다.” 라고 기롱하였다. 저 자손은 선조가 끼쳐준 것을 능히 이어받아 실추시키지 말아야 한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끼쳐주신 뽕나무 가래나무도 공경해야 한다.” 하였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부모가 집터를 잡아 놓으면 자손이 계승하여 건립한다.” 하였으니, 보고 감동하는 것이 족하다고 하겠다. 운수(雲水) 서쪽 구고(九臯)에 옛 압구정(狎鷗亭)이 있었다. 인덕정(仁德亭)·수심재(收心齋) 두 분 선생께서 그의 선조(先祖) 교수공(敎授公)이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셨던 유허지(유墟址)를 대대로 전해 받아서 그 곳에서 강학(講學)하고 생활한 셈이다. 지금 300여년이 되었는데 여러 번 왜란(倭亂)으로 창상(滄桑)을 겪어 편미(扁楣)에 기록된 글자가 마멸되어 읽을 수 없고 기와는 깨지고 담장은 무너져 모두 들과 밭이 되어 묶고 황폐하여 그 방불(彷彿)한 모습을 찾으려했지만 남은 것이 없다. 후손이 세월이 지나면서 아름다운 자취에 늘 중건(重建)할 뜻만 있었지, 원헌(原憲) 같이 가난해서 겨를을 내지 못했고, 지나는 사람이 집터를 가리키고 배회할 뿐이었다. 일찍이 내가 정려서(旌閭序)에, “정사(亭榭)는 오래전에 있었고 모래밭 갈매기는 날아가고 없다.” 라고 적었으니 압구정을 가리켜 탄식한 말이다. 무술(戊戌)년 원래 집터에 거처하던 후손은 ‘세월이 오래 지날수록 더욱 그 전하는 것을 잃는다.’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합심하고 의논해서 약간 재력(財力)을 모아 폐허된 집터에 옛 편액 그대로 걸어 소정(小亭) 두 칸을 지었다. 띠로 햇볕을 가린 것은 그 공사를 줄이려는 것을 취한 것이고 그 검소함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비록 박노(欂櫨: 기둥 위 도리) 마디가 화려하다거나 구름 숲 샘 돌의 빼어난 경치는 없으나 끌어당겨 다 갖추어져있다. 봄에 시냇물이 파랗게 흐르고 가을에 달이 하얗게 뜨며 기러기가 날아갔다가 다시 모여, 혹은 기심(機心)을 망각하고는 사람과 친하기도 하고 혹 때지어 날아가면서 우짖는 모습이, 마치 재비나 참새가 옛 주인을 방문해서 새해를 맞이하여 하례인사를 하 듯 하니 또한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대개 이 정자는 선대를 추모하고 후손에게 끼쳐주려는 취지는 당(唐)나라 이덕유(李德裕)의 평천장(平泉莊)과 대략 같지만, 그 짓고 허물어지는 것이 같지 않은 것은 왜인가. 찬황공(贊皇公)은 진귀하고 기이한 것을 좋아하여 후손에게 부귀와 사치를 끼쳐주었는데 두 분 공(公)은 그 외진 곳을 가려서 안빈(安貧)하고 절검(節儉)하는 것을 후손에게 끼쳐준 이 점이 다른 이유이다. 그렇다면 안빈하여 검소하게 사는 가법(家法)의 큰 요령을 전해준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같은 선조(先祖)이지만 후대에 태어났다. 남쪽에 와서 4년 동안 이 정자가 폐허되고 다시 중건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마음 아프고 기뻐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어서 마침내 기문을 쓴다. 또 구양공(歐陽公)이 한위공(韓魏公)이 제(題)한 압구정(狎鷗亭) 원운(元韻)을 차운하여 아래와 같이 기렸다.
두 칸 모정(茅亭)을 하루 만에 낙성하고 數笏茅亭成一日 이에 올라와 보는 감회는 고금이 같더라 登斯曠感昔猶今 푸른 모포로 청백(淸白)을 끼쳤을 뿐인데 靑氈只有遺淸白 거의 모래밭 갈매기 마음처럼 깨끗하더라 恰似沙鷗庶性心
무술(戊戌) 오추(梧秋: 음력 7월) 하순에 시순(始淳)은 삼가 기록함 종유사(宗有司): 정호(鼎鎬)·준군(準根)·혁근(爀根)·정두(廷斗)·■■·종헌(宗憲)
鴨鷗亭 蓋古有而今無也 亦因 其成毁得喪之理否 惟我 先祖敎授公 始居雲鄕 擇其佳 麗之境 而搆亭於九皐之南芝 山之下 爲杖屨遊賞之所 雲林 泉石之勝 盖可挹焉 取韓魏公 狎鷗亭義爲扁額 卽休退之境 也曁其經仁德亭收心齋兩先 生 承其祖杖屨之跡 而爲講學 之所 則物之成得 燦乎其時矣 偶被己卯黨禍 且經龍蛇兵燹 距今三百餘年 紀蹟莫之徵 頹 垣破瓦 盡化爲野田蓁蕪 則毁 喪亦有時歟 但尋常路人指點 謂 朴氏古亭臺之趾而已 甚可 齎歎 乃者今春 與族叔爀根氏 同心協議 倡建二間屋子於古 址 因揭舊額 宛復見於羹墻之 儀也 父兄長老咸曰樂哉 每年 修葺等節 自門中成規 噫先賢 警咳 尙可尊慕 況先祖杖屨講 學之地耶 亭之成毁 在於時之 顯晦也 詩所云 維桑維梓必恭 敬 止非是之謂歟 請書此式 修 雍睦之萬一云 繼以四律
狎可爲亭主曰翁 日相其謀同精神應白天心月 淸水南風底性恰如鳴矣 秪今追慕 跡氣像猶存 覽物中
戊戌四月下澣後孫■…■
함양박씨 압구정 중건기(咸陽朴氏鴨鷗亭重建記)
압구정(鴨鷗亭)은 대개 옛날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으니 또한 지었다가 무너지고 얻었다가 잃는 이치 때문인가. 우리 선조(先祖) 교수공(敎授公)은 비로소 고향에서 살았는데 그 수려한 지경(地境)을 가려서 살았다. 그리고 구고(九皐)의 남쪽 지산(芝山) 아래에 정자를 얽어 짓고, 경치를 구경하고 산보하는 장소로 삼았으니 구름 숲 샘 돌 등 경치도 만끽할만했다. 한위공(韓魏公)의 압구정(狎鷗亭) 의(義)를 취하여 편액을 붙인 것은, 곧 공이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던 곳이기 때문이고, 이어 인덕정(仁德亭)·수심재(收心齋) 두 선생이 그 조상이 은거했던 장소를 이어받아 강학(講學)하는 장소로 삼았으니 물(物)이 계기를 얻어 이루어지고 그 적절한 시기에 빛난 것이다. 뜻밖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고 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지 지금 300여년이 되어 기록된 문적(文蹟)을 찾을 방법이 없다. 담장은 무너지고 기와는 깨져서 모두 들판과 밭이 되어 묶어 황폐했으니 무너져서 잃은 것도 때가 있어서인가. 다만 평소 길 가는 사람이 ‘저 곳이 박씨(朴氏)의 옛 정자 집터이다.’고 말할 뿐이니 매우 탄식할만한 하다. 이에 금년 봄 족숙(族叔) 혁근(爀根)씨와 합심 의논하여 두 칸 집을 옛 터에 지었고, 인하여 옛 편액을 걸었으니 완연히 가신 분의 모습을 다시 추모할 수 있었고, 부형(父兄)과 장노(長老)들이 모두 즐거워 하셨고, 매년 수리하는 절차도 문중(門中)에서 법규(法規)를 만들었다. 아, 선현(先賢)의 가르침도 오히려 존모(尊慕)할 수 있는데 더구나 선조(先祖)께서 은거하여 강학(講學)하셨던 곳이랴. 정자가 지어지고 정자가 무너지는 것은 시대의 치란(治亂)에 달려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부모가 끼쳐주신 뽕나무 가래나무는 반드시 공경하라.”하였으니 다만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공경하고 화목한 마음을 만분의 일이나마 기문에 쓰고, 이어서 사율(四律) 시를 읊겠노라.
*이하 시(詩)는 글자가 마멸되어 생략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