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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임실의 정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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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임실의 정자 (2013)
◈ 19. 학정서원(鶴亭書院) - 청웅면 구고리
청웅면 구고리 574번지 원동마을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학정서원(鶴亭書院)은 본군 사림(士林)들의 공의(公議)와 기호유림(畿湖儒林)들의 동조로 선조 33년(庚子年, 1600)에 청웅면 구고리 남쪽 압구정(鴨鷗亭)에 인덕정(仁德亭)박번(朴蕃)과 수심재(收心齋)박훈(朴薰)을 모시는 사우(祠宇)로 창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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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웅면 구고리 574번지 원동마을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학정서원(鶴亭書院)은 본군 사림(士林)들의 공의(公議)와 기호유림(畿湖儒林)들의 동조로 선조 33년(庚子年, 1600)에 청웅면 구고리 남쪽 압구정(鴨鷗亭)에 인덕정(仁德亭)박번(朴蕃)과 수심재(收心齋)박훈(朴薰)을 모시는 사우(祠宇)로 창건되었다. 광해군 13년(신유년, 1621)에 압구정 북쪽 주천동(酒泉洞)에 옮겨 지었는데, 이 때 선조 11년(무인년, 1578)년부터 선조 14년(신사년, 1581)년까지 임실현감을 지낸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경재(敬齋) 홍붕(洪鵬)을 추배(追配)하여 서원의 전모(全模)를 갖추었다.
 
이후 30여 년간을 유지해 왔으나, 불행하게 화재를 당하여 소실되자, 효종7년( 병신년, 1656)에 구고리 원동마을로 다시 이건하고, 학정서원의 사액(賜額)을 예조(禮曹)에 청원하였다. 조정에서는 김건재(金健齋)의 원호(院號)가 다른 곳에 사액되어 있어 첩액(疉額)할 수 없으나 사액의 예(禮)로 향사(享祀)토록 하고 관제물(官祭物)로 현감이 제주(祭主)가 되어 향사 하라는 하교(下敎)가 내렸다. 이에 같은 해에 운암(雲巖) 이흥발(李興浡)이 추배되고, 孝宗 10년 己亥(1659)에 운학(雲壑) 조평(趙平)이 추배되었다. 그리고 철종6년 乙酉(1855)에 취정(翠庭) 김원근(金元根) 선생을 추배하였으나 그 뒤 고종 5년 戊辰(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면서 단을 세워 7位의 위패를 매안(埋安)하고 매년 3월 3일에 향사를 127년간 지내왔다. 그 후 1995년 乙亥에 본군 사림들의 공의(公議)로 본 서원 복원사업을 전개하여 후손들의 헌성금과 행정의 지원을 받아 1998년에 준공을 하였다. 학정서원 정문에는 1995년 이건당시 세운 가로 33cm, 세로 123cm의 ‘鶴亭書院’이라고 세로글씨로 새겨져 있고, 출입문에는 가로 124cm, 세로 39cm의 경앙문(景仰門)이란 편액이 세워져있다. 또한 서원 외부에는 2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개요 - 2014.11 자료 추가】
 
 
 
 
 

1. 1. 鶴亭書院重修記

鶴亭書院卽健齋金先生諱千鎰仁德亭朴先生諱蕃收
心齋朴先生諱薰敬齋洪先生諱鵬雲巖李先生諱興浡
雲壑趙先生諱平翠庭金先生諱元根七賢妥靈之所也
彼七君子忠孝根天 其高風偉蹟 邃學實德 映曜於史乘
膾炙于口碑 不必殫記而自有知者知之矣 但世叔道衰
芬苾之所 不幸累經毁修 宣祖三十三年庚子 創健于本
縣九臯之南 迓鷗亭 光海十三年辛酉 移建于其北酒泉
洞 回祿爲災 孝宗七年丙申 又移建于鳴鶴亭 當時雖未
蒙賜額之允 而自朝家已有一依賜額之例之敎 至高宗戊
辰 又以其時之故而毁撤之 自創建年代計之 則二百六
十九年事也 自此以後 神位則埋安于地 陟降失所設壇
而歲一享之 于今一百二十餘年于玆耳 其於雲仍追慕
之誠 士林景仰之忱 爲如何哉 往在甲戌 一鄕士林 與其
雲仍謀 復院宇于舊墟 乃靑雄面九臯里院洞也 醵出誠
金而備蓄之 又以主倅李瀅魯之誠力 挑得政府之援金
鳩材募工 經之營之 不幾月而落之 廟貌一新 輪焉奐焉
革如飛如 地名院洞 實非偶然 斯院也 將與周圍八景 長
在於錦江繡山之間矣 今此之役 豈非斯文之一幸也耶
斯文也 前而倡之後而推之者 則實其儒林代表韓演洙
雲仍代表朴昌燮趙鍾來洪淳亨李眞禾諸斯文之工居
多 而事鉅力有未逮 今日所復者 惟院宇一棟而已 然繼
以其誠其力 則周墻整園增築堂齋之擧 將次第而成就
之不難矣 猗歟盛哉
余在館一日 趙友基周 偕洪三杓甫見訪 託不佞以記其
始末 不佞非所敢 請愈勤 余方在典禮之任 當此倫序傷
敗之日 如斯之事 足爲勅典敦禮振世警俗之活敎育也
故 不敢終辭而爲之記焉
檀紀四千三百二十九年 歲丙子八月下澣
成均館典禮硏究委員 梁鴻烈謹記
後學唐城 洪奎杓謹書
 
 
학정서원(鶴亭書院) 중수기(重修記)
 
학정서원(鶴亭書院)은 곧 건재(健齋) 김선생(金先生) 휘(諱) 천일(千鎰), 인덕정(仁德亭) 박선생(朴先生) 휘(諱) 번(蕃), 수심재(收心齋) 박선생(朴先生) 휘(諱) 훈(薰), 경재(敬齋) 홍선생(洪先生) 휘(諱) 붕(鵬), 운암(雲巖) 이선생(李先生) 휘(諱) 흥발(興浡), 운학(雲壑) 조선생(趙先生) 휘(諱) 평(平), 취정(翠庭) 김선생(金先生) 휘(諱) 원근(元根)의 칠현(七賢) 영령을 모신 서원이다. 저 일곱 분 군자(君子)는 충효(忠孝)가 근천(根天)하신 분이다. 그 고상하고 훌륭한 기풍과 자취, 그리고 심오한 학문과 튼실한 도덕은 역사에 밝혀졌고 비석에도 회자되고 있으니 꼭 다 기록하지 않아도 자연히 아는 사람을 알 것이다.
다만 세상이 말세라서 제사 모시는 서원(書院)이 불행하게도 누차 훼철(毁撤)당하고 또 중수(重修)하는 것을 겪었다. 선조(宣祖) 33년 경자(庚子)에 본현(本縣) 구고(九臯) 남쪽에 아구정(迓鷗亭)을 창건(創健)하였고, 광해(光海) 13년 신유(辛酉)에 그 북쪽 주천동(酒泉洞)에 이건(移建)했는데 화재의 재앙을 당했고, 효종(孝宗) 7년 병신(丙申)에 또 명구정(鳴鶴亭)에 이건했는데 당시 비록 사액(賜額)을 윤허(允許)받지는 못했으나, 조정에서 이미 사액지례(賜額之例)에 의하여 윤허한다는 하교(下敎)가 있었고, 고종(高宗) 무진(戊辰)에 또 그 시대의 연고로 훼철(毁撤)당하게 되었으니 창건 연대를 계산하면 269년이 된 셈이다.
이후로 신주(神主)는 땅에 매안(埋安)하고 서원 유허지에 단(壇)을 마련하고 해마다 한번 제향을 올린 지 지금 120여년이 되었으니 그 후손이 추모(追慕)하는 정성과 사람(士林)이 경앙(景仰)하는 정성이 어떠했겠는가. 지난 갑술(甲戌)년 마을 사림(士林)이 그 후손과 의논하여 원우(院宇)를 옛 서원 터 에 복원(復院)하기로 하였으니 바로 청웅면(靑雄面) 구고리(九臯里) 원동(院洞)이다.
성금(誠金)을 갹출하여 비축(備蓄)하고, 또 주쉬(主倅) 이형노(李瀅魯)가 정성과 힘으로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냈다. 재목(材木)을 마련하고 공인(工人)을 모집하여 서원을 거의 1개월도 안 되어 낙성하였다. 모습은 한결 새로웠고 크고 화려하여 새가 나는 듯 날렵했다. 지명을 ‘원동(院洞)’이라 한 것은 우연히 지은 것이 아니다. 이 서원이 장차 주위의 팔경(八景)과 금수강산(錦繡江山)에 오래 존재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공사가 아마도 사문(斯文)에게만 다행한 것은 아니다. 사문이 앞에서 주창하고 뒤에서 밀어주었는데 실제는 그 유림대표(儒林代表) 한연수(韓演洙), 후손대표 박창섭(朴昌燮)·조종래(趙鍾來)·홍순형(洪淳亨)·이진화(李眞禾) 여러 사문께서 공사를 많이 했다. 그러나 공사는 방대하고 힘은 미치지 못해서 현재 복원한 것은 원우(院宇) 일동(一棟) 뿐이다. 하지만 정성과 힘을 계속 쏟는다면 담장을 치고 동산을 정돈하고 당재(堂齋)를 증축(增築)하는 일에 대해서는 앞으로 차제에 무난히 성취하게 될 것이다.
아름답고 성대하도다. 내가 하루는 성균관에 있었는데 친구 조기주(趙基周)가 홍삼표(洪三杓)와 함께 찾아와서 나에게 학정서원을 중수한 시말(始末)을 기록해 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감히 못한다고 했는데 부탁을 더욱 강하게 했다. 내가 마침 전례연구위원(典禮硏究委員)의 직임을 맡고 있어서 윤리가 무너지는 세상에 이 기문을 쓴다면 족히 전례(典禮)가 도탑워지고 세속(世俗)을 바로잡는 교육이 활성화되기 때문에 감히 사양 못하고 기문을 적었노라.
 
단기(檀紀) 4329년 병자(丙子) 8월 하순에, 성균관전례연구위원(成均館典禮硏究委員) 양홍열( 梁鴻烈)은 삼가 짓고, 후학(後學) 당성(唐城) 홍규표(洪奎杓)는 삼가 씀.
 
 
 

2. 2. 鶴亭書院重建上樑文

述夫
首健是邦之祠迓鷗鳴鶴酒泉三遷其地
創始穆陵之歲庚子辛酉丙申四歷百年
忍言洪陵戊辰之混撤
久謀多士神宮之重新
龜蓍合吉
日月呈祥
恭惟文烈公健齋金先生
彦陽華冑
一翁嫡傳
天人性命黙契精通河西金文正重加敬服
義理事物體認明白眉岩柳文節亦極賞之
鶴鳴九皐聲聞于天上
朝擧遺逸超遷至持平
來莅是土
銳意興學
去弊施仁民歌兩穗五袴
築堂起院士詠菁莪述蛾
逮壬辰島夷敢侵君上蒙塵生靈魚肉
激忠憤義旅倡起水原直衝讐虜潰逃
追至晉陽十萬豼貅蟻附而城陷
爲念宗社一片忠赤身翻而江投
王獎崇褒千秋靑史
士侑芬苾百世宗師
若朴仁德先生
咸陽之世
薦敎授蒙孝綽稧
學靜菴登賢良科
朴收心先生
仁德從(?)弟
亦孝旌同師靜菴
中司馬著己卯錄
洪敬齋先生
系出南陽
孝廬墓學篤性理
高尙志風韻維新
李雲巖先生
牧隱之后
篤孝友義嚴華夷
累除官尙志不就
趙雲壑先生
咸安世閥
篤聖學聘招絡繹
幷不應樂道安貧
金翠庭先生
淸陰之裔
位崇品出宰是城
興禮俗大賑飢戶
俱以忠孝經明施仁遺愛
優爲叔世衛道興慕後人
同堂配餟俱得事合禮當
同壁東西奚論年德先後
久爲廢墟草掬而茂
幾興行路躊躇之嗟
有侐神宇之奐輪
喜睹山川之增色
豈止一時之觀美
允爲百世之良規
爲擧虹樑
齊唱巴曲
 
兒郎偉抛樑東
斗滿山高霽月紅
灑落胸襟從可想
千秋後學仰淸風
 
兒郎偉抛樑西
伊尹峴外白雲底
無心出峀鳥飛倦
誰識斯間巖下棲
 
兒郎偉抛樑南
九臯川水碧於藍
一名孝禮緣何事
野鴨墮流供旨甘
 
兒郎偉抛樑北
鷹峰落落孤松立
歲寒心約不相違
願與此君知己托
 
兒郎偉抛樑上
天宇昭日垂萬狀
大公至正一無私
福善禍淫或不爽
 
兒郎偉抛樑下
一道寒泉流不舍
挹彼靑波釀此醽
精禋百世薦香斝
 
伏願上樑之後
棟宇維新
礎柱益固
洋洋絃誦儒風大興
濟濟衿紳鄕俗丕變
鳶飛魚躍天地之化流行
山高水長生生之風可仰
檀紀四千三百二十八年 時乙亥仲秋節
後學居昌愼思範 謹述 唐城洪奎杓謹書
 
 
학정서원(鶴亭書院) 중건(重建) 상량문(上樑文)
 
찬술(撰述)하노라.
이 사당은 처음 아구(迓鷗)에 건립하여 주천(酒泉)·명구(鳴鶴)로 세 번 옮겼으니, 선조(宣祖) 경자(庚子)년 아구(迓鷗)에 창건하여 광해(光海) 신유(辛酉)년 주천동(酒泉洞), 효종(孝宗) 병신(丙申)년 명구정(鳴鶴亭)에 옮기기까지 100년을 네 번 지났다. 고종(高宗) 무진(戊辰)년 훼철당한 것을 차마 말하겠는가. 오랫동안 도모하여 많은 선비가 중건한 서원이기 때문이다. 거북의 시초가 길일(吉日)을 정하니 날이 좋은 날이었다.
삼가 생각건대 문열공(文烈公) 건재(健齋) 김선생(金先生)은 언양(彦陽) 김씨 자손이니 한 노옹이 적손(嫡孫)으로 전했도다. 천인(天人)·성명(性命)은 묵계(黙契)히 정통(精通)했으니 김하서(金河西) 문정공(文正公)께서 거듭거듭 경복(敬服)하였고, 의리(義理)·사물(事物)은 체인(體認)을 명백(明白)히 했으니 유미암(柳眉岩) 문절공(文節公)께서 극히 탄상하셨다. 학(鶴)이 구고(九臯)에서 우니 소리가 하늘까지 들리자, 조정에서 유일(遺逸)로 천거하고 품계를 초월하여 관직이 지평(持平)에까지 이르렀도다. 이곳에 부임하게 되어서는 마음을 가다듬고 학문을 부흥하고, 폐단을 없애고 어진 정치를 베푸니 백성은 양수(兩穗)·오고(五袴)를 노래하고, 집을 지어 서원을 건립하니 선비는 청아(菁莪)·술의(述蛾)를 읊조렸도다. 임진(壬辰)년 도이(島夷)가 감히 군상(君上)을 침범해오고 백성은 어육(魚肉)으로 살상 당하자, 충분(忠憤)이 격분하여 의병을 수원에서 일으켜 곧 오랑캐를 진격하여 무너뜨렸도다. 그러나 진양(晉陽)에 십만 오랑캐가 추격해오자, 아군(我軍)은 위축되고 성(城)이 함락되었다. 하지만 종사(宗社)를 생각하는 일편단심으로 몸을 날려 강(江)에 투신했도다. 임금이 높은 벼슬로 기리고 칭찬하여 천추토록 역사에 기록되었고 선비들이 제사하여 백세토록 종사(宗師)로 삼았도다.
또 인덕정(仁德亭) 박번(朴蕃)선생은 함양(咸陽) 박씨로, 교수(敎授)를 천거 받았고 효도하여 정려(旌閭)을 받았으며 조정암(趙靜菴)에게 수학하여 현량과(賢良科)에 합격했다.
수심재(收心齋) 박훈(朴薰)선생은 인덕정(仁德亭)의 종제(從弟)이다. 또한 효도하여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조정암(趙靜菴)을 사사(師事)하였으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기묘록(己卯錄)에 기록되었다.
경재(敬齋) 홍붕(洪鵬)선생은 남양(南陽)의 계통에서 배출했다. 시묘(侍墓)하여 효도하고 성리학(性理學)에 독실했으며 지취(志趣)가 고상하고 풍치가 새로웠다.
운암(雲巖) 이흥발(李興浡)선생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효도(孝道)와 우애(友愛)에 독실하고 중화(中華)·오랑캐의 의(義)를 엄히 지켰으며 관직에 누차 제수(除授)받았으나 뜻을 숭상하기에 취임하지 않았다.
운학(雲壑) 조평(趙平)선생은 함안(咸安) 조씨(趙氏)의 문벌(門閥)이다. 경학(經學)을 깊이 연구하여 연이어 초빙을 받았으나 모두 불응하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였다.
취정(翠庭) 김원근(金元根)선생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후예(後裔)이다. 높은 품계(品階)로서 수령으로 나갔으니 예속(禮俗)을 부흥하고 기민(饑民)을 많이 구휼하였다.
모두 충효(忠孝)와 경명(經明)으로 인애(仁愛)를 끼치고 족히 말세에 도(道)를 지켰으니 후인(後人)이 추모하였다. 같은 서원에 배향(配享)하니 모두 제례(祭禮)로 모시기 합당하고, 동쪽 서쪽 같은 벽(壁)에 모시니 어찌 나이와 덕(德)에 대해 선후(先後)를 논하랴. 오래도록 폐허되어 잡초 움켜쥐니 무성한데 얼마나 많은 행인이 주저하며 탄식했을까. 서원이 크고 환히 의젓하게 있으니 더 빛나는 산천(山川)을 기쁜 마음으로 보겠노라. 어찌 한 시대 아름다운 외관(外觀)에 그치랴. 진실로 백대토록 좋은 가르침이 될 것이다. 무지개 들보를 들어 올려 일제히 파곡(巴曲)을 매기노라.
 
여영차 들보를 동쪽에 던지니
높은 두만산(斗滿山)에 비 개지자 월홍(月紅)꽃이 피었네
씻은 듯이 깨끗한 흉금(胸襟)을 추종하여 회상할 만하니
천추토록 후학(後學)은 청아(淸雅)한 풍취(風趣) 앙모하리
 
여영차 들보를 서쪽에 던지니
이윤(伊尹)이 고개 넘어 백운(白雲) 밑에 있구나
무심히 산을 빠져나와 느리게 날아가는 새를
누가 알랴. 이곳 바위 밑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여영차 들보를 남쪽에 던지니
구고(九臯)에 냇물이 쪽빛 보다 푸르네
일명 효(孝)와 예(禮)는 어디에서 연유한 일일까
들오리가 떨어뜨린 물을 함께 맛보는 것에서라네
 
여영차 들보를 북쪽에 던지니
응봉(鷹峰)에는 쓸쓸히 고송(孤松)이 서있네
새한(歲寒)에도 약속한 마음 어기지 않았으니
이 임금과 지기(知己)를 의탁하기 바라노라
 
여영차 들보를 위에 던지니
하늘에 해가 만상(萬狀)을 비추고 있더라
지극히 공명하고 정대하여 한 점 사심(私心)이 없어야 하는데
선인이 복 받고 악인이 화 입는다는 것 혹 분명하지 않더라
 
여영차 들보를 아래에 던지니
한 길에 차가운 샘물 쉼 없이 흘러가네.
저 푸른 물 길러다가 이리 좋은 술을 빚어
정결하게 제사를 백대토록 술잔에 바치려네
 
삼가 바라건대 상량을 올린 이후에
기둥과 지붕을 엮어 새롭게 하고
주춧돌과 기둥을 더 견고히 하려네
낭랑히 글을 읽으니 유풍(儒風)이 크게 부흥하고
즐비한 선비가 있어 마을풍속이 그게 변화했노라
솔개가 날고 물고기는 뛰니 천지(天地)가 교화(敎化)하여 흘러가고
산은 높고 물은 오래 흘러 생생(生生)하는 기풍(氣風)을 믿을만하네
 
단기(檀紀) 4328년 을해(乙亥) 중추절(仲秋節)에 후학(後學) 거창(居昌) 신사범(愼思範)은 삼가 찬술(撰述)하고, 당성(唐城) 홍규표(洪奎杓)는 삼가 씀.
【향토】 임실의 정자 (2013)
• 18. 압구정(鴨鷗亭) - 청웅면 구고리
• 19. 학정서원(鶴亭書院) - 청웅면 구고리
• 20. 돈학정(遯壑亭) - 성수면 왕방리
(2018.07.16.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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