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방리에서 원증마을로 가는 길 2km정도 중간지점에 가다보면 여산 송씨 재실이 있고 그 앞 왼쪽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임실에서는 제일 아름답고 산수가 빼어난 왕방계곡 입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볼 때도 임실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로 평가된다. 정자 아래로는 작은 하천을 이루는데 이 냇물은 오염원이 없는 대판마을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유유히 흐르다가 왕방저수지에 모여서 터널을 통하여 지사와 산서 그리고 오수까지 농업용수로 공급되고 있다. ‘돈학정(遯壑亭)’은 원래 단종 때 충신 송경원(宋慶元:1419~1510)이 임실 신안 ‘백이산(伯夷山)’ 아래 창건하였는데, 그의 후손들이 己卯(1939)년 8월 18일 경오(庚午) 미시(未時)에 상량문(上梁文)을 올리고 현 위치로 옮겼다. 송경원은 여산 인으로 호(號)가 돈학(遯壑)이며 군수 선정의 아들이다. 1455년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로 재직하던 중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두문불출 하였다. 그리고 1457년 단종이 죽자 임실 백이산 아래에 은거하며,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2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내부는 돈학정 편액과 경차돈학(敬次遯壑), 돈학정기(遯壑亭記)등 4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맞은편 언덕에 여산 송씨 재실과 돈학 송선생 유적비가 있으며, 집안에는 돈학 선생 실기가 전하고 있다고 한다. 【개요 - 2014.11 자료 추가】
伯夷山者自斗滿分一枝 轉西立北 不五里巋然而 立 峰巒不鉅不邃 體勢端正 余旣敬其名 又愛洞府 寬敞林樾淸暎 卽其北而搆三架小亭 誅茅而簷 累 百而砌 交竹而牖 山杏杜鵑 不勞封植 採苓求供筍 蕨 以養形骸 皆山之助也 客有勸余扁之 余曰君平 之言曰 生我名者 殺我身 名之不足貴 自古已然 我 何爲是 無已則遯乎 客曰子之止於止 以是山也則 盍取諸山而必以遯乎 曰吾語子 我生不辰 復無意 斯世 將投老邱壑 以畢餘命 則一箇遯【疑有缺】豈非吾 之實乎 且夫伯夷 西周人也 地則相去幾千餘里 世 之相後幾千餘年 山以是名造物者 似非偶然意而 不高而倂崇華 又不勝而敵匡虛 以天下九州之 大 無所於處 乃在海東之一隅 惟士人知之 而山經 不載 版圖旣荒焉 以余觀之 雖謂此山亦遯似乎可 矣 雖然吾不敢以吾之遯 浼及於山 如柳柳州之愚 愚溪谷也 只欲證山之靈而盟吾之遯 固守靡改 生 爲山中人 死爲山中鬼焉 亦何負於山哉 客唯唯而 退 遂書
遯壑二字于亭之壁云爾
돈학기(遯壑記)
백이산(伯夷山)은 두만(斗滿)에서 한 가지가 나뉘어 서쪽으로 돌다가 북으로 뻗어간 지 5리가 안되어 우뚝하게 봉우리가 솟았는데 크지 않고 깊지 않으면서 체세(體勢)가 단정하였다. 나는 백이산의 이름을 공경하였고, 또 그 동부(洞府)가 넓게 트이고 숲이 맑게 비추는 것을 사랑하여 그 터에 세 칸의 조그만 누정을 지었다. 띠를 베어 처마를 만들고 돌을 포개어 섬돌을 만들었으며 대나무를 교차하여 창문을 만들었다. 살구나무와 진달래는 애써 심지 않아도 자라고, 냉이를 캐고 죽순이나 고사리를 구해 몸을 공양하는 것은 모두 산의 도움이다. 객이 내게 편액하기를 권했다. 내가 말하기를 “군평(君平)의 말에 ‘내 이름을 드날리는 자는 내 몸을 죽이는 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름이 귀하게 될 수 없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다. 내가 어찌 이런 일을 하겠는가. 그만둘 수 없다면 ‘둔(遯)’이라고는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객이 말하기를 “그대는 그칠 곳에 그친 것을 이 산(山)으로서 하였으니, 어찌 산에서 취하지 않고 반드시 둔(遯)에서 하는가.” 하니, 말하기를 “내 그대에게 말하리라. 내가 좋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 했기에, 다시는 이 세상에 뜻을 펼 생각이 없고, 장차 늙도록 산골에서 남은 생명을 마치고자 하여, 한 글자 둔(遯)에 뜻을 두려는 것이, 이 어찌 나의 실상이 아니겠는가. 또한 저 백이(伯夷)는 서주(西周) 사람이다. 땅은 거리가 몇 천 리 나 되고 세대는 뒤로 몇 천 여년이 지났다. 돈학(遯壑)이라 이름을 붙인 것은 조물주의 우연한 뜻이 아니다. 높지도 않은데 높고 화려한 봉우리를 아우르고, 뛰어난 승경은 아닌데 넓고 공허한 들을 마주하고 있다. 천하의 구주(九州)와 같이 넓은 곳에도 없는 곳이, 해동(海東) 한 구석에 있다는 것을, 오직 사인(士人)들만이 알 뿐이다. ‘산해경(山海經)에도 기록되지 않았고, 판도(版圖)에는 이미 황폐하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비록 이 산에 또한 둔(遯)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비록 그러하나 나는 감히 나의 ‘둔’으로써 산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한다. 마치 유주자사(柳州刺使) 유종원(柳宗元)이 우계곡(愚溪谷)에서 한 것과 같다. 단지 산신령께 증험을 받아 나의 둔(遯)을 맹세코 고치지 않고 고수하게 되면 살아서는 산사람이 되고, 죽어서는 산속의 혼이 될 것이니 또한 어찌 산을 저버리는 것이 되겠는가.” 하니, 객이 ‘예예’하고 물러갔다. 드디어 ‘돈학(遯壑)’ 두 글자를 누정의 벽에 적었노라.
星霜愈久感尤深...鎭碩 謹稿
遯壑亭昔在雲水之西 伯夷山下 卽我先祖府君遯 壑先生藏修之室也 而年代寢邈 頹圮已久矣 今此 後孫柱南主榮 是庸爲懼 乃以府君易簀之四百三 十一年庚辰 移建于本郡東 聖壽山明德峰下 是亦 府君幽宅之下也 恐未知府君之靈 豈不陟降於斯 也哉 嗚呼府君以蔭仕 全羅都事 當端廟遜位之 際 其自靖孤節 可與生六臣 同歸一轍 而已悉於諸 賢贊揚之文 不肖无狀 何敢疊床哉 噫 今亭之制 未 知其增減於舊規之如何 亭之景 則有猶不下於舊 墟者 龍進一峯 屹然如頹 波之砥柱而在前 五鳳喬 岳 儼然若千刃之氣像而居南 且泉甘而土肥 上下 水田 抵旱而樂歲 左右果林 弄秋光而洞天飛紅中 有一帶 激澗百折 過檻下而匯 纓可濯而胸次灑然 斯可以碩人考槃之地也 今又永慕齋 在亭之東數 武許 而飣豆相望 齋是府君墳菴也 皆如是 則捨舊 墟而就此移建 恐未有不可耶 嗚呼 目今江山變革 俯仰之懷 滿目薾然矣 入斯齋登斯亭之諸宗 豈徒 苟恭府君而止而已乎哉 其將以府君之心爲心 講 府君之書 守府君之義 使府君平日廉頑立懦之道 毋至永墜於地 則府君洋洋如在之靈 亦必莞爾矣 若爾則其所以與衛府君者必矣 且惟吾來裔善繼 而修葺 則水不廢地不荒矣 盍相勉之哉 自昨春訖 于今夏 亭旣落成 僉宗要余 以記其事 顧玆不文 何 敢承當 辭不獲已 而譜撮其大略 俾來世考信焉 府 君諱慶元 遯壑其自號也 盖此亭之終始竣役 乃是 僉宗 同誠同力之中 尤以助力者 原浩在浩柱永道 洙柱元柱行東珍柱弘也 歲庚辰淸和節十三代孫 鎭哲 泣血謹記
돈학정 이건기[遯壑亭移建記]
돈학정은 옛적 운수(雲水: 임실)의 서쪽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있으니 바로 우리 선조(先祖) 돈학선생께서 장수(藏修) 즉 학문하던 집인데 연대가 오래되고 허물어진 지가 오래되었다. 이번에 후손 주남(柱南)·주영(柱榮)이 이를 위태롭게 여겨 부군께서 돌아가신지 4백 31년 만인 경진(庚辰)년에 임실군 동쪽 성수산(聖壽山) 명덕봉(明德峰) 아래에 이건하였으니 이 또한 부군의 무덤 아래에 위치해있다. 알지 못하겠지만 부군의 영령이 어찌 이곳을 왕래하시지 않겠는가. 오호라. 부군께서는 음직(蔭職)으로 전라도(全羅道) 도사(都事)로서 단종(端宗)께서 왕위를 물려주실 때를 당하여 스스로 외로운 절개를 지켰으니, 생육신과 더불어 한 길을 갔을 뿐이다. 여러 현인들의 찬양하는 글에 모두 실려 있는데, 불초한 후손은 글 솜씨가 없는지라 어찌 감히 겹쳐서 기록하겠는가. 아, 지금 만들어진 누정의 규모가 옛적보다 더 좋고 더 나쁜 점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정의 경치는 아직까지 옛 터보다 못하지 않은 것이 있다. 용맥이 나아가 한 봉우리가 우뚝 솟은 것이 마치 황하(黃河)의 거센 물결에도 흔들리지 않은 지주(砥柱)와도 같이 앞에 있고, 오봉(五鳳)의 교악(喬嶽)이 엄연한 것이 마치 천길 기상과도 같은데 남쪽에 있다. 또 샘물은 달고 땅은 비옥하여 위 아래로 수전(水田)이 있어 가뭄에도 풍년이 들고, 좌우의 과실 숲은 가을빛을 희롱하여 동천(洞天)이 모두 붉은데 한줄기 맑은 시냇물이 백번 꺾여 난간 아래로 지나가며 돈다. 갓끈을 씻을 만하며 가슴속이 시원하니 이는 가히 현인들이 소요할 수 있는 장소이다. 지금 또한 영모재(永慕齋)가 동쪽으로 두어 걸음 거리에 있기에 제사 지내면 서로 바라다 보이는 재실이 부군의 사당(祠堂)이다. 모두 이와 같다면 옛터를 버리고 여기에 이건(移建)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한 것이 있지 않겠는가. 오호라, 현재 강산(江山)은 변했다. 우러러 보고 내려다보는 회포가 눈에 가득 들어와서, 이 재실에 오르고 이 누정에 오르는 여러 종인들이 어찌 다만 구차하게 부군을 사모하는 것에 그치겠는가. 그 장차 부군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고 부군의 글을 강론하고 부군의 의리를 지켜서 부군의 평일 ‘탐욕스런 자도 청렴케 하고 나약한 자도 굳세게’ 하였던 도를 길이 땅에 실추하지 않게 한다면 부군의 양양하게 계신 같은 영령 또한 빙그레 웃으시리라. 그렇다면 그 부군을 더불어 지키는 것이 지극할 것이다. 또한 오직 우리 후손들은 잘 계승하고 잘 수리하면 물은 막히자 않고 흐를 것이고 땅은 황폐하지 않고 비옥할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작년 봄부터 이번 여름까지 공사하여 낙성하고, 여러 종인들이 내게 그 일을 기록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나의 부족한 문장력으로 어찌 감히 쓸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서 그 대략을 모아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고신(考信)할 바가 있게 하였다. 부군의 휘는 경원(慶元)이며, 돈학(遯壑)은 그 자호이다. 대개 이 정자를 시종일관 완공을 마친 것은 여러 종족들이 정성을 다하고 힘을 합하였는데 더욱 조력한 사람은 원호(原浩)·재호(在浩)·주영(柱永)·도수(道洙)·주원(柱元)·주행(柱行)·동진(東珍)·주홍(柱弘)이다.
경진(庚辰)년 청화절(淸和節:4월) 13대손 진철(鎭哲)이 울면서 삼가 기록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