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성수
성수면聖壽面은 임실군任實郡의 동쪽 5km지점에 17번 국도와 30번 국도가 통과하고 있는 지역이며 금남호남정맥에서 가지친 성수지맥 상의 삽치颯峙를 힘겹게 오르내리던 전라선 철도는 사라지고 오직 터널로만 통과하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최근에 개통된 전주∼광양 간 고속도로가 성수면을 통과함으로써 호남의 교통 중심지를 이루는 길목의 역할을 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산세를 보면 해발 876m의 성수산과 오봉산이 금남호남정맥에서 가지 친 섬진3지맥(성수지맥)의 주봉으로서 오수천의 발원지가 되고 부분 지역은 해발 200m 내외의 소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성수산이 있어 수자원이 풍부하기에 성남제와 오봉제 등 두 곳에 규모의 저수지가 만들어져 성수면과 오수면 지사면과 장수군 산서면 일부까지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는 중요한 지역이기도 하다.
전체 면적은 58.49㎢로 임실군의 10%를 점유하고 있으며 산림이 4,804.3ha(77%)로 산악이 중첩되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반면에 농경지는 협소하여 827ha(13%)로 소규모 농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전주에서 32km 지점에 있는 성수면은 삼국시대 백제의 운수현에 속하다가 고려시대에는 남원부에 조선시대에는 상동면과 하동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고종 32년(1895인) 조선 말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성수면으로 통합되어 현재는 11개 법정리에 21개 행정리 그리고 45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성수면은 1260년경 풍산심씨와 김해김씨가 정착하여 터를 잡은 것으로 전해지며 현재의 인구는 850여 가구에 1,860명에 이르고 있다. 부분 농업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면민들은 쌀농사에 주력하고 있으나 일부 축산 농가는 축산업 중에서도 젖소를 많이 키워 소득이 높고 임실치즈의 조합원으로 많은 농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로써 축산 농가들은 축산의 필수적 과제인 자급사료 확보를 위한 조사료 생산에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를 달성하고자 겨울철 노는 땅을 이용하여 전 농토에 조사료포를 조성 푸른 들판을 가꾸고 있다.
성수산聖壽山은 임실군을 대표하는 상징적 주산으로서 임실의 지붕이라고도 부르는 영산이다.
고대 역사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성수산은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안내로 고려태조대왕건이 등극하기 전 기도를 하던 곳이고 도선국사가 암자를 세웠기에 도선암이라 이름 지어 불렀다고 한다. 그 후 고려 말 이성계는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인도로 도선암道詵庵에서 기도를 하고 조선을 개국하였다고 하며 그 뒤 고려 말 태조 이성계로 하여금 기도를 마친 뒤 “성수만세”하고 만세를 부른 후 도선암을 “상이암上耳庵”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왕건이 썼다는 “환희담歡喜潭”이라는 글씨와 태조 이성계의 친필이라고 하는 “삼청동三淸洞”비의 글씨는 어필御筆로 불리어져 전주이씨 종중에서 비각을 세우고 보존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태조 이성계가 건국을 하기 위하여 기도를 하였다는 기도터가 지금도 관광객을 부르고 있지만 등산로가 미비하여 불편을 느끼고 있는 것도 문제로 남아 있다.
특히 암자 앞의 바위를 여의주로 보고 암자 주위의 산 지맥이 아홉 마리의 용으로 비유하여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구룡九龍이 여의주를 물려고 힘을 발하는 형상으로 보아져 상이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에 이곳이 명당 중의 명당으로 불려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곳 상이암은 기도를 드리면 소원성취가 이루어지는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특히 바위에 많이 새겨진 암각서는 조선 후기에 관찰사나 부사, 현감 등이 이곳을 방문하여 시주도 하고 기도를 하여 그 이름을 새긴 것으로 지금도 선명한 글씨들이 상이암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성수산 주변의 마을 형성과 유래를 들어보면 이 지역은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조치·왕방·수철·왕리가 있고 상이암과 관련된 지명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2006년에 발행한 『동학농민혁명사』 일지에서 보면 1894년 음력 10월 14일 저녁 김 개남 부사가 남원을 출발하여 임실에 도착하는데 현감 민충식이 환대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민 준의 조카인 민충식은 김개남이 상이암에 있을 때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고 결의형제를 맺은 곳이라고 한다.
또한 정재 이석용 의병장이 의병을 창의하기 위하여 참모들과 이곳에서 모의를 하였다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성수산이 6 25때 지리산과 회문산 다음으로 격전지 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로서 앞으로 행정기관이 주축이 되어 종합 적인 고증과 개발의 필요성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임실군민의날 표적인 문화축제의 하나인 ‘소충사선문화제’는 충·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정기적인 기념행사로서 임실군이 ‘충효의 고장’ 이다 라고 하는 용어 자체가 성수면에서 그동안 충신과 효자·효부가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다.
고려와 조선 건국 설화가 있는 성수산聖壽山
성수산은 임실군의 주산이며 성수면과 진안군 백운면의 경계를 이루고 해발 876m가 되는 높은 산이다. 금남호남정맥 팔공산에서 가지친 섬진3지맥(성수지맥)에 속하며 남쪽 산줄기는 금남호남정맥에서 가지친 섬진2지맥(개동지맥)상의 남원 보 절면과 산동면 경계에 만행산 천황봉萬行山 天皇峰을 이루었다. 성수면은 상동면上東面과 하동면下東面이 합한 면面으로 이때에 면 이름을 성수면이라고 한 것은 유래 깊은 성수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산정山頂의 600m에 상이암이 세워졌는데 이 절은 신라 때 세운 것이라고 하며 여러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 곳이다.
고려조高麗祖 때 국사國師 접을 받았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이 산을 두루 살펴보고 나서 가로되 “천자봉조지상天子奉朝之像에 상봉象峰이 별립別立하니 차차출현次次出現이라. 차산흥칙가흥此山興則家興이요, 차산망칙가망此山亡則家亡이라.” 하여 크게 탄복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다시 풀이해서 천자天子를 맞이할 성지聖地로서 손색이 없다는 도선국사道詵國師의 말이다.
도선 국사는 송도로 올라가 초야에 묻혀 있던 왕건에게 성수산에 대한 설명과 아울러 백일기도 하면 대망을 성취할 것이니 꼭 이를 이행토록 권한 즉 왕건이 기꺼이 이를 수락하고 도선과 더불어 이곳에 와서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하는 전설 내용이 상이암사적부원적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왕건은 도선국사가 가르치는 대로 백일기도를 했으나 특별한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골짜기에 내려가 바위에서 흐르는 맑은 물에 목욕재계하고 연 3일을 기도하였더니 이상하게도 관음의 계시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바로 그 계시로 고려 건국의 망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왕건은 기쁨을 가눌 길 없어 환희담歡喜潭이라 일필휘지하고, 도선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곳의 암자를 도선암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후일에 이것이 ‘상이암’이고 성수산에는 ‘환희담’과 더불어 상이암 사적이 기록되어 함께 전해지고 있으며 이 설화는 당나라 문헌인 『당일선사기(唐一禪師記)』에 적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 왕건의 건국 설화에 이어 조선 건국의 태조 이성계도 이 성수산에 건국설화를 곁들이고 있다. 그 무렵 국사國師 격인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이성계 장군으로 하여금 성수산의 정기를 터득하고 백일기도를 종용했다는 것이다. 때마침 이성계는 고려말 6년(1380) 9월 정왜원수征倭元帥로 출정하여 남원에서 왜구를 섬멸하는 대첩을 거두고 개선 길에 무학대사의 가르침을 결행하게 되었는데 이성계는 발용의 몽을 이곳 성수산에서 꾸고 조선 건국의 망을 품었다는 설화를 남긴 곳이다. 그 꿈인즉 용이 나타나 이성계의 몸을 세 번 씻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 꿈은 그가 운봉 황산전투에 출전 전후 서까래 셋을 지었는데 꿈과 함께 필시 두전관승인 해必是頭戰冠昇人大海의 용상龍床에 드는 대몽大夢이었던 것이다. 이 대몽을 얻은 이성계 또한 왕건이 환희담歡喜潭이라 친필親筆했듯이 그곳에 삼청동三淸洞이라 명명하고 이를 돌에 새겼다. 결국 이성계도 이곳 성수산의 정취를 터득 조선조 건국朝鮮祖建國의 업을 성취한 것이다. 그 후 이성계의 뜻에 따라 이 암자의 이름을 상이암上耳庵이라 개명하고 후손들로 하여금 이곳에 어필각을 지어 그 안에 삼청동 비를 보관하다. 이렇듯 성수산은 명산 중의 명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숲 또한 울창하고 산허리를 타고 흐르는 계곡의 물 또한 맑아 가히 청량수라 칭할 만하다.
여기서 성수면 왕마을 출신인 최영진崔永珎의 글 중에 성수산과 상이암에 대한 내용을 보면 성수산을 보고 신라 말新羅末의 대선사大禪師 도선道詵은 말하기를 “성수산聖壽山은 장풍득수藏風得水라.”하였다. 이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뜻이다.
“성수산 중턱의 향로봉香露峯은 풍수상風水相 지법地法의 대가大家이신 도선道詵 대선사大禪師가 발견한 구용용주지지九龍龍珠之地다.”라고 하였으며 일천 년 전一千年前 도선암道詵庵의 주춧돌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신라의 선사 도선은 하필이면 성수산을 찾아 그 주봉 아래 암자를 지었을까. 도선은 풍수 지리계의 태두泰頭이자 대가大家다. 흥덕왕~효공왕(827~898년)에 이어지는 고려사에서 보면 나이 15세에 승僧이 되어 화엄사華嚴寺에서 대의大義를 열어 불학도佛學徒들로부터 신神으로 통했다.
그는 현갈왕의 초청을 받아 한때 궁중 왕사王師 노릇도 했지만 주로 전국의 명산을 구름처럼 떠돌며 수도행각修道行脚을 했다. 도선은 풍수이론風水理論 지리이왕설地理裏旺說 산천순설山川順說 및 비도설說로 집약集約되었다. 지리地理는 곳에 따라 이왕裏旺이 있고 순처順處가 있음으로 왕처旺處가 순처順處를 택하여 거주居住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순처順處와 유처遊處를 인위적人爲的으로 도와서 보충補充해야 한다고 일종一種의 비기秘記를 완성했다. 정감록비결鄭鑑錄秘結도 결국 도선비기道詵秘記의 영향影響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도선道詵의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과 풍상지법風相地法은 고려高麗와 조선조朝鮮祖를 통해서 크게 영향을 준 학설임이 틀림없다. 신라 효도왕 등 역대 군왕君王이 왕사王師라 하여 선각국사先覺國師라고 추봉推捧했던 도선道詵이 성수산聖壽山에 두말할 것도 없이 이곳 산천山川에 풍수상風水相 지법상地法相 하나의 이상형이었기 때문이다. 왕건王建이 이곳에서 목욕沐浴을 하고 환희담歡喜潭이라고 석각石刻하여 현재現在에도 보존保存되고 있다.
이어 조선朝鮮 창업주創業主인 이성계李成桂에게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왕건王建과 같은 방식으로 기도祈禱를 종용慫慂하고 한편 이성계는 등극하기 전 젊은 시절 전국 각지 명산 천에서 기도를 드렸으며 이때 지리산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려고 했는데 지리산 신령님으로부터 거절拒絶을 당當하고 도선산(道詵山 : 聖壽山)으로 들어와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 후 이성계는 고려장수로서 남원 운봉 전투에 출전 왜군을 물리친 후 승리의 쾌감을 안고 무학대사를 그리며 회군하는 길에 군사들과 함께 과거 기도를 드렸던 곳 도선암을 찾아가기 위하여 현재 지사면 관기마을 장군바위 주변 민가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아침 일찍 일어나 발길을 옮기는데 조반시朝飯時에 넘어온 재를 지금의 조치朝峙라고 하였으며 역로歷路한 곳을 왕방리枉訪里라고 이름 지어 현재에도 부르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어린 시절 무학대사의 안내로 도선암道詵庵:上耳庵으로 들어와 백일기도를 하였으며 최종일最終日 삼경三更에 상공上空에서 신수神授 성수만세삼창聖壽萬歲三唱을 천청天聽하여 수명어천상락受命於天上洛하여 남면南面 칭찬稱讚하였다.
삼청동三淸洞에 이어 이때부터 그 암자庵子를 上耳庵(上字는 임금 上字이다.)이라 하고 산 이름을 성수산聖壽山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성수산을 상이암산上耳庵山이라고도 부른다. 삼청동三淸洞이란 ‘물과 공기와 마음이 맑다.’ 라고 하여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며 태조 이성계가 썼다고 전해지는 어필御筆이 지금도 남아 있어 관리되고 있다.
구한말 정재 이석용 의병장의 활동지
정재 이석용 선생은 1878년(고종15) 음력 11월 29일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죽전에서 아버지 화산봉선華山鳳善과 어머니 조양임씨兆陽林氏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자는 경항敬恒이며 호는 정재(靜齋 또는 靜菴)요 아명이 갑술甲戌이었다. 17세 되던 1894년(고종 31)에 부령김씨扶寧金氏에 장가들었는데 그해 동학란이 일어나고 청 일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틈타 일제침략이 시작되었다. 정재 이석용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제자백가』에 능통하는데 그의 학문에는 특히 장인인 겸재 임관술謙齋 林觀述의 향이 컸다.
구한말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이석용 선생은 당대의 석학들을 두루 찾아보고 구국救國의 방책이 무엇인가를 물었으니 그가 만났던 인물로서는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심석 송병순心石 宋秉珣, 입재 송근수立齋 宋近洙, 송사 기우만松沙 奇寓萬, 간재 전우艮齋 田愚,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그리고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선생 등이었다.
1905년(광무9) 이석용 선생이 28세 되던 해 마침내 을사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많은 우국지사들이 서울에 모여들어 조약 철폐를 주장하였으나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이석용 선생도 이때 상경하여 미국공사에게 서한을 보내고 일제 침략을 통렬히 규탄하였다.
그는 서한에서 이석용은 ‘천일天日은 위에 있고 신명神明은 곁에 있으며 만국공법이 삼엄하게 밝은데 저 간악한 왜노倭奴가 어찌 감히 우리 오백 년의 당당한 예의지국을 늑탈하겠는가.’ 라고 갈파하였다. 그러나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일으켜 세울 대책이 없었다. 이런 상황 아래서는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 길은 오로지 의병뿐이라고 믿었다. 그때 3월 마침 최익현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태인 종성리(泰仁 宗聖里 :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임병찬의 처소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의병에 동참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그해 윤 4월 20일에 최익현은 순창에서 스스로 의병군을 해산하게 되었다. 그 후 이석용 선생은 스스로의 힘과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고향 임실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준비에 착수하였으니 그때 나이 29세 이다. 그는 이때부터 1년 동안 임실을 비롯하여 장수·진안·남원·순창·곡성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의병을 규합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우리 정부를 비롯 일본 정부와 세계열강들을 향하여 격문·통고문·규탄문·건의문 등을 발송하고 전국의 동포들에게도 이 나라의 주권을 되찾자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1907년 8월 한국군 해산을 계기로 전국에 의병전쟁이 벌어지자 젊은 이석용 선생은 준비했던 의병궐기의 기회가 온 것으로 판단하고 8월 26일에 먼저 아버지에게 하직 인사를 올린 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하여 집을 떠났다.
정재 이석용李錫庸 의병장은 전해산(全海山 : 전기홍 : 全基泓) 의병장과 더불어 호남 의병의 두 거성이다. 임진왜란 때나 한말 일제 침략기에는 필히 호남의 자력 自力과 인력人力 없이는 국난을 이겨낼 방도가 없었다고 하니 호남 의병의 활약상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연원이요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재 이석용 선생은 29세 젊은 나이에 의병장이 되고 많은 의병을 이끌며 2년여 동안 임실을 비롯하여 장수·진안·남원·곡성·함양 등을 누비며 활동 중에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일제 침략군의 토벌작전에 못 이겨 1909년 3월 6일 일단 해산했으나 다시는 의병을 규합하지 못하였다. 그 후 일제의 무단통치하에서 다시 임자년 겨울에 비밀결사대를 결성 광복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투옥되었으며 재판을 받은 결과 사형언도를 받고 1914년 4월 4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때 나이 겨우 36세의 아까운 젊음을 나라를 위해 바쳤으니 그 순국정신을 기려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서훈하였다.
이상과 같이 정재 이석용 의병장은 성수면과 임실군의 상징이며 성수면에서 태어났음은 면민들의 자랑이요 임실군민들의 자랑으로 군민 모두에게 자긍심을 높여 주시는 분이다.
팔경八景의 향기를 지니고 있는 성수
성수면聖壽面의 팔경八景을 말한다면 ⑴ 상이암·⑵ 왕방계곡·⑶ 자연휴양림· ⑷ 소충사·⑸ 육우정·⑹ 월평리산성·⑺ 판폭포(각시소)·⑻ 도화동계곡을 말한다. 따라서 성수면에 산재되어 각 문중 중심으로 관리되고 있는 많은 문화유산은 어느 곳보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특히 여섯 노인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월평리 육우정六愚亭과 선조 6년(1573)에 창주첨사昌洲僉使 전주인全州人 최영길崔永吉이 삼례 비비정에 세웠던 것을 10세손 최창렬崔滄烈이 계월桂月로 옮겨 지었다는 비비정飛飛亭이 있으며 왕방리의 둔학정을 비롯하여 오류정·청룡정·부연정·은행정·거암정·덕양정이 있고 효열비는 11개소에 이른다. 성수지역에서 선정을 베풀었던 사람들의 시혜불망비는 5개소에 이르고 각 성씨들의 재실로는 천동리의 모송재 등 16개소가 후손들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다. 또한 임실을 대표하는 ‘소충사’와 ‘운현 전적의혼추모비雲峴戰蹟義魂追慕碑’ 또한 정재 이석용선생의 생가와 유허비가 있어 사적지로서 보존적 가치가 높으며 이로써 성수면은 다른 어느 지역과 비교가 안되게 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그동안 忠과 孝를 바탕으로 선조들의 풍요로운 삶을 증명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현대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성수면민은 성수산을 비롯하여 오봉산·삼봉산·덕재산·고덕산과 함께 산 좋고 물 맑은 청정지역에서 옛것을 거울삼아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많은 출향인사들이 학계와 재계에서 성공을 거두고 전국 각지에서 고향 성수를 생각하며 활동하고 있기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성수가 낳은 정인관 시인의 고향사랑 뜻을 모은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솔잎 향기 푸르른 팔공산 정기 받아 성수산 자락에 상동과 하동에 한마을 이루어 산세 좋고 인심 좋아 천년만년 사노라니 그 이름도 거룩한 성수 큰 마을에 밝은 동해가 당사실로 비치니 온 누리 향기 속에 축복 넘치는 큰 여울이어라
봄 빛살에 진달래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오색단풍 화려한 가슴에 상이암의 평화소리 조선 태조의 일필휘지 삼청동 연연하니 장엄하도다. 의병대장 이석용 장군의 기세 여기 모셨노라. 이십팔 의사들의 위대한 영혼들 숭고한 충효의 정신 이어받은 성수사람들 보아라.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소충사의 성스러움 즈믄 해 넘도록 유구한 터전 닦았음이어라
금 빛살 부서지는 명당자리 당당 효자 효부 넘쳐나는 후촌 조선 말엽 중앙지로 빛나니 중촌 유림 선비 배출시킨 배움의 터전 학당 저 바래기산 기세가 넘치는 삼봉 산 줄기 늘어져 금이 나온다니 금동 병풍방위 해바라기되어 양암 큰 구름 굽이 돌고돌아 대운
백일기도 속에 신의 계시가 있어 성수 이태조 임금께서 쉬어 갔다는 왕방 아침마다 고개를 넘나들며 살았으니 조치 효성이 지극하여 왕으로부터 교지받은 효촌 수평진 땅 자운영 꽃향기 속에 평지 도선선사의 말씀 샘물이 으뜸이라 천동
아홉 골짜기마다 산세가 장관이라 구곡 오일장 보러가다 쉬어 한마을을 이루니 신촌 반달 모양의 고덕산에 달빛이 넘치니 월평 밝은 달 속에 계수나무와 자손들이 살아 계월 고개 넘고 넘으며 덕담을 나누었다는 덕치 산마루 다섯 굽이 버들가지 흐드러지니 오류 동쪽 산골 들판 끝자락에 대판
싱그러운 수려강산 골짜기마다 생명수 넘쳐나고 만세 삼창, 그 우렁찬 기개에 성스러운 스물한 개 마을 흙은 농민의 생명이려니 천수만수 누릴 때까지 영원하소서, 축복의 땅 성수여.
성수산의 자연환경
성수산은 백두대간 장수 취산에서 분기된 금남호남정맥 팔공산에서 가지친 섬진3지맥(성수지맥)으로 임실의 상징적인 산이다. 임실의 지붕이라고 할 수 있는 성수산은 군민의 노래의 첫 마디에서 ‘성수산 줄기차게 뛰어난 정기 밝아온 새아침에 넘치는 기쁨’이라고 되어 있듯이 임실의 희망이요 기氣를 뿜어주는 곳이기도 하다. 해발 876m의 높이에 주변에는 10여km 정도의 왕방계곡과 상이암계곡이 있어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만물이 살아 숨쉬는 태고의 신비를 지니고 있다. 수많은 생명체들이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 움직이고 계곡마다 특성을 지니고 있는 성수산은 고려의 발상과 조선500년사의 발상지인 상이암을 비롯하여 곳곳에 많은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고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올 무렵 박해가 심하여 많은 신자들이 성수산에 숨어 들어와 살았기에 천주교의 공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높고 울창한 성수산은 최근에 등산객들의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특히 상이암 가는 길 중간에 휴양림이 조성되어 있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국난극복과 성수
성수산은 고려 태조대왕건이 도선국사의 안내로 기도를 드렸던 곳이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안내로 상이암에서 기도를 드렸던 곳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 말 장수로서 황산벌(남원운봉) 전투에 참여하여 일본군의 ‘아지발도’군대를 대파시키고 회군하다가 무학대사를 그리며 군사들과 함께 상이암에 들렸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또한 조선 말기인 1894년 김개남 장군이 남원을 출발하여 민충식 현감의 환영을 받으며 동학에 입도하고 결의형제까지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1907년에는 이 고장 출신 정재 이석용 의병장은 성수산 골짜기인 상이암에서 의병을 모아 창의倡義할 것을 모의謀議하고 출전 계획을 세웠던 곳이다. 한편 성수면은 의로운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석용 의병진에 가담한 사람들이 많았고 천동마을과 양지마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야간을 이용하여 횃불을 들고 3·1독립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 후 6·25를 전후하여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군경 묘지가 조성되었으며 군경묘지는 면민들이 주축이 되어 관리를 하였다. 1957년 양지리에 세웠던 소충사는 의병장 이석용을 주벽으로 하여 28의사를 배향한 사당이 었으며 1983년에 성역화사업으로 현재 위치에 소충사가 건립되어 매년 소충제례위원회 주관으로 제사를 올리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임실군 농민운동의 주역들이 이곳 출신이고 수십 년의 농민운동으로 농촌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한 ‘임실군농민회’의 최초 발상지이기도 하다.
근대 교육의 중심지 성수
성수면은 1897년 심진표 선생이 일찍이 진소학교를 가정재 자리에 세워 학생들을 가르쳐 오다가 조선 말 이석용 의병들이 일본인 교사 스즈끼를 살해함에 따라 진학교를 임실로 옮겼다고 한다. 이로써 임실군에서는 맨 먼저 교육의 씨를 뿌렸던 곳이 성수면이다. 8·15광복 후에는 고 심희만 선생이 사립 중학원을 세워 성수면은 물론 인근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배움의 길을 찾도록 하였다. 성수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인 1928년 3월 29일에 인가를 받아 그해 6월 1일 개교되었고 1965년 3월 1일 왕방분교가 설립인가를 받았다. 1955년 12월 25일 성남초등학교가 설립되었고 1972년에 성수중학교를 세워 운영했다. 그러나 학생 수의 감소로 성남초등학교와 왕방분교는 폐교되고 현재 성수초등학교와 성수중학교만 남아 있다.
종교의 발달과 변화
주요 종교의 시대별 번성기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에는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고 조선시대에는 유교문화가 꽃을 피웠으며 지금은 기독교 문화가 널리 퍼져 있다. 이에 따른 실태를 조사한 결과 성수면은 고려 때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상이암을 비롯하여 왕방사지·심원사지·봉죽암·전가사지와 많은 불당이 있었으며 현재는 상이암과 구천사 그리고 성지사만 남아 있다. 1900년에 임실천주교가 성수산 현재 휴양림 자리에 공소를 세웠다가 수철마을로 이전하였으며 기독교는 1932년 6월 15일에 처음 세워진 오류교회와 성수교회 월평교회가 현존하고 있다. 또한 이원영 선생이 아버지인 정재 이석용 선생의 추모사업과 병행하여 창건한 요강교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말았다.
성수의 대표 문화유산
이 지역의 표적인 금석문으로는 상이암上耳庵 경내에 어필과 어필각이 있는데 이는 태조 이성계가 썼다는 ‘삼청동三淸洞’이란 글씨를 들 수 있다. 태조 이성계가 썼다는 기록이 『상이암 사적기寺蹟記』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학자들의 견해가 달라 아직까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소충사昭忠祠 경내의 28의사 기적비와 호남창의 동맹단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인 조의단吊義壇비 28수와 북극성을 표현한 천문비 등 많은 사적비가 있다. 곳곳에 효자효열비, 암각서가 많으며 선비의 고장인 성수면은 정자 문화의 발달로 비비정·육우정·둔학정이 있다. 그리고 문중마다 재실, 문중 별 묘동 표지석 곳곳에 편액과 현판 등 성수산 주변의 역사문화는 그 로 보존되어 전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육우정에는 편액과 현판이 많이 보존되고 있으며 다른 이름의 편액 하나는 ‘봉남정鳳南亭’이라 걸려 있는데 이는 당대의 명필인 심농心農 조기석趙沂錫 선생의 글씨이다.
마을 형성과 기관·사회단체
성수면은 11개 법정리와 21개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양지리 학당마을에 행정의 중심축인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파출소·우체국·농협성수지소·농민상담소·성수신용협동조합이 있으며 학교는 성수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다. 사회단체는 고향사랑회·소충제례위원회·의용소방 ·방범 ·체육회·노인회·바르게살기협의회·새마을협의회·새마을부녀회·농촌지도자회·생활개선회·농업경인회·두레풍물단 등이 있다. 이로써 고향 사랑회와 체육회가 주관이 되어 매년 4월 28일을 성수 면민의 날로 정하고 재경, 재전향우 회원들이 함께한 면민의 날을 성대하게 거행하고 있다. 또한 농업경 인회 주관으로 어버이날을 전후하여 성수면 노인위안잔치를 매년 베풀었으며 두레풍물단은 복지회관 2층에 농악 전수관을 조성하고 많은 회원들이 참여하여 농악을 즐기고 있다. 성수는 물론 군 단위 행사마다 두레풍물단이 출전하여 공연을 함으로써 성수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고 있다.
소충제례위원회에서는 매년 칠월칠석날 소충제례행사를 주관하여 오다가 지금은 군민의날을 기하여 제례행사를 시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