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성수의 지세地勢
임실군은 전라북도 14개 시·군 가운데 하나로 도의 동남부 중앙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남원시와 장수군, 북쪽으로 진안군과 완주군, 서쪽으로 정읍시, 남쪽으로는 순창군 등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면적은 596.92㎢로이며, 행정구역은 1읍(임실) 11개 면(강진·관 촌·오수·삼계·지사·성수·신평·신덕·운암·청웅·덕치)으로 나뉘져 있다.
섬진3지맥(성수지맥)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동부권 중 산간지 로 서쪽과 남쪽으로 뻗어내린 서너 가닥의 산줄기가 군 전체를 덮다시피 하고 있으며 그 사이의 골짜기로 섬진강의 본류本流와 오수천獒樹川이 흐른다. 다만 임실군의 동부에는 단 층선斷層線이 지나며 북북서 ― 남남동으로 전주에서 남원까지 큰 골짜기가 지나고 그 선을 따라 관촌·임실·오수·삼계 등지에 분지가 발달되어 있다. 지세는 체 로 동부와 북서부, 중남부와 서남부는 중앙이 높고 동남쪽이 낮으며 북동쪽은 높지 만 평지로 이루어져 진안고원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서쪽 완주군과 정읍시와의 접경은 섬진3지맥(성수지맥)의 가장자리로서 비교적 낮은데 거의 전 지역이 해발 150m 내외의 높지 않은 지 를 이루고 있다.
임실의 주요 산으로는 진안 접경의 성수산(875.9m), 장수 접경의 태산(666.3m), 완주 접경의 갈미봉(541.5m)·옥녀봉(578.7m)·경각산(659.6m)·오봉산(513.2m), 정 읍 접경의 묵방산(538m), 순창 접경의 회문산(830m), 남원, 순창 접경의 두류봉(545.4 m) 등이 시·군 간 경계를 이루며 솟아 있고 군내의 산으로 나래산(544.1m)· 필봉산 (583m)·백련산(754m)·백이산(580.3m)·임실고덕산(619m)·응봉(608.5m)·지초 봉(569.9m)·원통산(603.5m)·치마산(568.5m) 등이 위치하고 있다.
임실군의 수계는 전체가 섬진강수계로 섬진강의 본류인 오원천과 지류인 오수천 의 두 개 유역권으로 나뉘는데 임실 고덕산 ― 응봉 ― 원통산으로 이어지는 섬진3 지맥(성수지맥)이 유역을 나눈다. 오원천은 관촌면에서 구신천, 신평면에서 임실천 과 지장천을 합친 후 섬진강 댐으로 들어가는데 댐으로 직접 유입되는 하천으로 석보천과 옥녀동천이 있다. 유역인 관촌면·신평면·임실읍·청웅면 등에는 작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오수천은 장수군 산서면 태산과 개동산에서 발원한다.
성수면에서 내려오는 둔남천을 합치고 오수면에서 율천, 삼계면의 어은천, 후곡천 등을 합치고 순창동계를 거쳐 섬진강에 합류한다.
섬진강의 상류로부터 82.4km 지점에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인 섬진강댐이 있다.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와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사이에 막은 이 댐은 섬진강 의 물길을 동진강으로 돌려 전북 서부지역인 정읍·김제·부안 일원과 계화도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발전, 생활용수공급, 홍수 예방을 목적으로 1961년 8월에 공 사를 착공하여 1965년 12월에 완공되었다.
풍수지리상으로 보는 성수산
중세中世와 근대近代의 문을 연 군왕君王 터 성수산은 그동안 군사적 요충지 으며 신라 말 선사 도선大禪師 道詵은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했다. 성수산은 비행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참으로 절묘한 구도構圖를 발견하게 된다.
백두대간 장수 취산에서 갈려 나온 금남호남정맥 팔공산 준령이 치달아와 우뚝 멈춘 성수산을 중심으로 세 가닥의 힘찬 맥이 뻗어나고 있다. 남동 방향으로 백두대간 지리산 천왕봉으로 맥이 통하고 서남쪽으로는 임실읍 두만산과 극락재를 휘어 감다가 강진면의 백련산과 운암면의 나래산으로 뻗어 나갔다. 동북쪽으로는 금남호남정맥 진안군 마이산, 부귀산을 거쳐 주화산(모래재 북쪽 0.5km 지점)에 이르는데 이곳은 금강·만경강·섬진강의 분수령으로 북쪽으로 금남정맥, 남쪽으 로 호남정맥을 나뉜다.
우리나라 풍수지리계의 태두泰頭이자 가大家인 신라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하필 이면 전국의 많은 산 중에 왜 성수산을 찾아 그 주봉 아래 암자를 지었을까. 도선 道詵은 신라 흥덕왕興德王~효공왕孝恭王(827~898) 때의 승僧이다. 충 일천일백 년 전의 인물이다. 『고려사高麗史』 등 여러 자료에 따르면 나이 열다섯에 중이 되어 월류산月遊山 화엄사에서 공부하여 바로 의大義에 통하니 수많은 불학도佛學徒들이 신神으로 추앙을 했다고 한다. 도선본비道詵本碑에서 보면 불교 신자들이 그를 불佛 이 아닌 신神으로 추앙했다는 목에서 도선道詵의 실체를 발견하는 듯하다. 그는 헌강왕의 초청을 받아 한때 궁중에서 왕사王師 노릇도 했지만 주로 전국의 명산을 구름처럼 떠돌며 수도 행각을 했다. 이렇게 그가 전국의 산천을 두루 답사했다는 사실에서 또 그가 불佛보다 신神으로 추앙되었다는 사실에서 그의 풍수지리에 한 혜안을 보아야 할 것이다. 도선道詵의 풍수지이론風水地理論은 지리양왕설地理㐮旺說 과 산천순역설山川順逆說 및 비보설碑補說로 집약되었다. 곧 ‘지리는 곳에 따라 양왕㐮 旺이 있고 순역(順·逆)이 있음으로 왕처旺處를 택하여 거주해야 한다.’고 했다. 그 리고 양처㐮處와 역처逆處를 인위적으로 도와서 보충碑補해야 한다고 설파說破하며 일종의 비기碑記를 완성했다. 고려시 에 성행하여 요즘 문자로 베스트셀러가 되었 던 ‘도선비기道詵秘記’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비기秘記는 그 후 숱한 사이비 비기秘記와 예언에서 같은 것을 낳게 하여 민심을 현혹게 하는 사례도 빚었고 우리가 잘 듣고 있는 정감록鄭鑑錄 비결이라는 것도 결국은 도선비기의 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여튼 도선의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과 풍수상지법風水上地法은 고려와 조선을 통해 크게 향을 준 학설學說임에 틀림이 없다. 신라 효공왕孝恭王 등 역 歷代 군왕君王이 왕사王師라 칭稱하고 선각국사先覺國師라 추봉했던 도선이 하필이면 임 실 성수산에 발길을 멈췄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곳 산천이 그의 풍수상風水上 지법상地法上 하나의 이상형理想型이었기 때문이다.
도선이 성수산 명당明堂에 발길을 멈춘 것은 당 當代 복福을 위한 묘墓 를 쓰거나 별장別莊을 짓기 위한 것 은 아니었다. 그는 팔공산八公山을 주봉主峰으로 삼는 이곳 일 가 전 략요충戰略要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성수산 중턱 향로봉香爐奉이 바로 구룡九龍 용주지지龍珠之地라고 깨달았다.
이곳은 아홉 마리의 용이 용 구슬을 들고 도열하는 형국形局, 즉 삼정승三政丞 육판서六判書가 왕王 앞에서 조례朝禮하는 형국形局임을 알았다.(도선이 살던 때는 삼정승 육판서가 없음으로 이 목은 후세의 사람들이 전설로 가미한 듯하다.) 따라서 이곳 향로봉에서 수도를 하는 것은 곧 왕가를 이룩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豫言이 나올 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또한 현존의 상이암上耳庵 앞에는 작은 바위산이 있는데 이를 용龍이 좋아하는 여의주로 표현되며 주변에서 깎아지른 듯한 아홉 곳의 강한 산줄기 는 마치 아홉 마리의 용과 같아 이 용들이 강한 기氣를 발發하여 용트림하며 여의주 를 물려고 하는 형국으로서 도선국사가 정말로 그런 예언을 하 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만 그 후에 고려 태조대왕건과 다시 475년이 지난 다음 조선국을 세운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를 드려 왕이 되었다는 전설인지 사실史實인지가 전해 지고 있으며 그들의 친필이라는 삼청동三淸洞과 환희담歡喜潭의 석비石碑가 현존하고 있다. 필자는 이곳에서 받은 강한 인식은 이러한 전설이나 도선의 예언이 아니라 이곳 팔공산 줄기가 군사상의 요로要路다는 점이다.
지학이 통달했던 도선이 이곳을 발견했고 역전歷戰의 장군將軍들인 왕건王建과 이 성계李成桂가 이곳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군사상 필요에서 중요시했으며 그러한 염 원念願으로 개국전설開國傳說이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충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 나라 역사歷史에서 고 를 청산하고 중세를 열어놓은 군왕과 이번엔 중세를 마감하 고 근세의 막을 올린 군왕이 이곳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성수산은 한반도 제일의 왕처王處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벽봉碧峰 최중두崔重斗가 펴낸 『풍수지리학원론(風水地理學原論)』의 부록附錄으로 펴낸 『선사유산록(先師遊山錄)』의 임실任實 부분 비결을 보면 여러 명혈名穴이 소개되어 있는데 ‘예컨 북사십리상이암동구北四十里上耳庵洞口에 명당이 있는데 자봉귀소형雌鳳歸巢形이다. 어미雌 새鳳가 둥지로 돌아가는 형국이라 했으니 이름부터가 천하명당 임을 풍긴다. 과연 이곳은 용호龍虎가 중중重重히 회포懷抱한다.’ 했고 여기에 묘墓를 쓰면 백자천손百子千孫하고 문과오 文科五代하며 무과武科 300人 중 명장名將 오인五人이 나서 부귀가 천지에 동행한다고 설명한다. 그곳이 어디일까? 근천스럽도록 가 난하고 이름조차 없는 나그네 심정으로 그 혈穴을 송곳으로 꼭 찍어내고 싶다고 필자는 표현하고 있다.
북사십리(北四十里)에 선여등공형(仙女登空形)의 명당(明堂)이 있는바 이 역시 용호 (龍虎)가 회포(懷抱)한다. 선여(仙女)가 하늘에 오르는 형국인 데다 용호(龍虎)가 얼싸안 고 있으니 천하명당(天下明堂)이 분명하다. 북사십리(北四十里)엔 명당이 또 있다. 이번 엔 연꽃 모양인 연화형(蓮花形)이 있다. 북삼십리(北三十里)에도 명당이 있다. 이는 군신 회조형(群臣會朝形)으로 임금 앞에 여러 신하가 조례(朝禮)를 하는 형국이니 바로 왕혈 (王穴)이다. 이 설명은 성수면의 성수산 줄기를 가리킨다고 한다. 성수산은 산세(山勢)가 그토록 지기(地氣)와 생기(生氣)가 넘쳐 있으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실제로 훌륭한 인 물(人物)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이다. (이봉섭 선생의 글 중에서)
청정 성수의 자연
성수면은 임실·장수·진안의 경계가 되는 곳에 삼군봉三郡峯인 갈미봉(861m)을 기점으로 북으로는 성수산聖壽山과 고덕산高德山을 이어가는 성수지맥, 남으로는 태산靈台山과 오봉산五峯山을 이어가는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구름재에서 서쪽 판이봉(803.5m)을 지나는 산줄기 하나가 흘러내리는데 이 산줄기에 의해 성수면의 양 하천인 둔남천과 성수천으로 물줄기가 나눠진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장수長水 취산(靈鷲山 1,075.6m)에서 분기된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이 장안산(長安山, 1,236.9m)과 금강錦江의 발원지發源地 신무산(神舞山 896. 8m)을 지나 팔공산(八公山, 1,151m)에서 서쪽으로 지맥 하나를 내려놓고, 진안과 장수의 경계를 타고 북쪽 성수산(聖壽山 1,059.2m)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팔공산에서 분기된 지맥은 서쪽으로 뻗어나가다 마령치馬靈峙에서 섬진3 지맥(성수지맥)과 남원의 고리봉까지 이어지는 섬진2지맥(개동지맥)으로 나눠지는 데, 여기서 북쪽 섬진3지맥(성수지맥)을 타고 진행하면 임실·장수·진안 경계인 삼군봉三郡峯인 갈미봉(861m)에 이르게 된다. 갈뫼봉으로도 불리는 이 봉우리가 성 수면 둘레산의 시작점이 된다.
성수면 북쪽 둘레산은 갈미봉에서 북쪽으로 진안과의 경계인 섬진3지맥(성수지 맥)을 타고 나간다. 구름재 쪽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지나고 이르는 봉우리가 905 m고지이다. 이 봉우리는 임실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그저 이름 없이 성수산의 일부가 되고 있다.
상이암上耳庵을 좌측에 두고 863m고지를 지난 능선 왼편으로 큰 바위가 눈에 띄 는데 락없는 사자 얼굴 모양으로 고려·조선 두 왕조의 건국설화가 깃든 상이암 을 지키는 수호신인 양 무엇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고 그 바로 앞에는 수령 백 년이 넘어 보이는 철쭉이 자리하고 있다. 이어 안부鞍部에 내려서면 상이암 쪽에서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로 넘어가는 지장치다. 성수산 등산로의 분기점으로 이곳에서 능 선을 타고 오르면 임실의 주산 성수산(聖壽山 875.9m)에 서게 된다.
둘레산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헬기장을 거치고 연꽃 모양의 암봉인 연화봉(805m)에 이르는데 상이암 쪽에서 올라오는 또 다른 등산로 의 분기점이다. 이어 서낭정이 위쪽에 있는 장군봉(683m)으로 올라서게 되는데 봉 우리 조금 못 미친 곳의 능선에는 흔치 않은 흰색 철쭉 몇 그루가 자생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어 사근이에서 진안 백운으로 넘는 꼬부랑재와 갈골에서 분토동으로 넘는 매 봉재를 지나 매봉(475m)을 거치고 수철리 북쪽 임도에서 남계리로 넘는 서낭댕이 재를 지나 점안산(520.5m)에 다다른다. 여기서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470m고지를 지나고 498m고지 조금 못 미친 지점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30번 국도를 건너 는데 이곳이 운치(큰재)다. 이어 주걱봉(507m)을 지나 남서쪽 방향으로 진행하면 서 진안군과의 경계를 벗어나 임실군 관내로 들어온다. 삼봉산 분기점을 지난 둘레 산은 구암재를 건너뛰는데 태평리에서 관촌면 구암리를 잇는 고개다. 이어 496m고 지와 선동재를 거치고 경사가 급한 암봉인 되 봉(506m)과 느지내 평전을 지나면 임실 고덕산高德山에 다다른다.
임실 고덕산은 급경사의 바위산으로 촛 모양의 바위와 통천문 등 수많은 기암 괴석이 눈길을 끈다. 둘레산은 정상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을 타고 내려온 다. 삼봉리 신덕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나고 가마명당이 있다고 전하는 가마봉 (459m)을 거쳐 홍산터 쪽에서 관촌면 운수리 고덕으로 넘어가는 큰두목재를 지나 는데 홍산터는 옛날에 홍산군수가 나왔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 하며 북쪽 424m고지를 지나고 도인저수지 북쪽에 있는 신흥촌에서 운수리 고덕으로 넘어가 는 작은두목재를 거친다. 금당치로 내려가는 409m고지에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 어 깃 봉(352.2m)과 281m고지로 이어진다. 그리고 국도 17호선에서 동쪽으로 방 향을 틀어 성수육교 밑을 통과하고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333m고지·367m고 지·384m고지·428.1m고지·362m고지를 거친 후 말치馬峙에서 방향을 틀어 성수 지맥을 벗어난다. 그리고 동쪽으로 방향을 꺾어 판이를 지나고 국도 17호선을 넘어 남쪽 둘레산에 이어진다.
한편 섬진3지맥(성수지맥)은 말치에서 봉화산(467.6m)과 응봉(609.8m)을 거친 후, 무제봉(558m)·지초봉(569.9m)·원통산(603.5m)·무량산(586.4m)을 지나 순창 군 적성면 평남리 구남마을의 어은정까지 이어지며 여맥을 다한다.
한편 성수면 남쪽 둘레길은 갈미봉에서 서남쪽으로 내려 무골재를 지나고 차 일봉(채알봉 615m)을 지난다. 차일봉 전후에는 판이에서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로 넘어가는 박달재와 구수재가 있다. 나발봉(561m)을 지나고 태산(666.3m)에 닿는다.
이어 당재를 지나고 오봉산(625m)과 중재를 거쳐 507m고지를 통과한 후 지방도 721호인 아침재[朝峙]를 넘는다. 한치를 지나 남쪽으로 방향을 틀고 옥녀봉(473m) 과 덕재산(483.8m)을 지나 466m고지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408m고 지와 수류봉(335m)을 거치고 306m고지에서 내려서 국도 17호선을 건넌다.
성수聖壽의 마을 유래
역사 문화의 보고寶庫 성수
『임실군지』(1997년 발행)에 기록된 자료에서 살펴보면 성수면의 면적은 58㎢로 서 임실군의 10%를 차지하며 그 중 산림이 77%로 산악이 중첩된 반면 농경지는 13%로 협소하다. 동쪽은 체로 높고 험하며 서남쪽은 약간 낮은 편이다. 해발 200 m 내외의 중산간지 로 농업이 주종을 이룬다. 성수산과 오봉산이 노령산맥의 주 봉으로 소분지小盆地를 형성하고 있고 성남제와 오봉제는 수자원이 풍부하여 성수 면·오수면·지사면·장수 산서면 등 4개 면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또한 자연환경이 수려하고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등산객과 낚시 동호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가 배출된 충효의 고장이기도 하다. 팔공산에서부터 이어온 성수산을 주봉으로 촌락이 형성된 이래 조선시대에는 상동 면과 하동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고종 32년(1895)에 행정구역 개편 시 2개 면 을 통합하여 성수면으로 정하였다. 성수면은 지리적으로 임실군의 동쪽에 위치하 고 있음으로 상동上東 하동下東을 합해 동면東面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성수면에 위 치한 성수산은 임실의 명산이며 해발 876m로 산세가 좋아 사철을 두고 경관을 자 랑하며 왕방계곡과 함께 상이암 계곡의 자연휴양림은 전국에서도 으뜸으로 큰 몫 을 담당하고 있다. 2011년 6월 말 현재 성수면의 가구는 865세 이며 인구는 1,840 명이고 그 중 남자는 935명이며 여자는 905명으로 나타나 있다.
성수의 관문인 도인리道引里
450여 년 전 설薛씨가 정착하여 살게 되었으며 연이어 송宋씨, 양 梁씨들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도인리道引里는 비슬琵瑟·당당堂堂·후촌后村·양지陽地·신흥촌新興村으로 이루어졌으 며 성수면의 북쪽에 위치하고 임 실읍 금성리와 인접해 있는 지역이다. 비슬琵瑟마을은 어디선가 아름다운 비파소리가 울려 퍼져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도인리는 상동면 도인과 상북면 비슬을 합하여 고종 32년(1895)에 성수면으 로 개편되어 도인리가 되었다. 그 후 행정 분리로 당당마을이라 하게 되었다. 후촌 마을은 양지뜸(양지촌) 뒷말(후촌) 홍산터(검바우) 사기점(신흥촌)으로 마을이 이 루어졌다. 갈마리 교차로에서 도인리로 들어가면 첫 마을이 비슬마을이며 그 다음 마을이 당당마을이다. 다시 그곳에서 올라가면 양지촌이며 후촌은 양지촌 건너편 에 있다. 다시 양지촌 위로 올라가면 저수지를 지나 신흥촌이 있고 행정리 상후 촌·양지촌·신흥촌 3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후촌은 면 소재지 뒤에 있다 하여 후 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효자·효부가 많이 나와 왕으로부터 상을 받은 일이 많았다고 한다. 양지마 을은 여산송씨가 성이며 다음이 양 씨·설씨가 살고 있다. 양지리 중촌마 을 은행정이 옆으로 도인리를 넘어가 는 도로가 있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도 인제가 있고 신흥촌은 도인제 상부와 북부 쪽으로 마을이 있다. 부모 공양을 잘하기에 고종高宗께서 효성이 지극한 김치태에게 내린 정려가 있고 삼국시 부터 명당을 찾아 썼던 고분군이 있다. 후촌마을 뒷산을 고지산이라고 부르며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6·25후 동네 청년들이 토굴을 파고 근무하던 토 굴 터가 지금도 현존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후촌마을 앞 정자나무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신흥촌은 서당골이 있고 서당 터(김상 씨 집)라 불리는 지명도 있다. 이 마을에는 도인천이 흐르고 도인저수지·외얏골 저수지· 도요지(사기 가마터, 사기점 터)가 있던 곳이다. 주요 성씨는 薛·宋·梁·李·金· 沈씨가 살고 있다. 신흥촌에는 연자방앗간과 디딜방앗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 지고 양지촌에 정미소가 있었다. 큰 비석골에는 금광인 채석장이 있었는데 지금도 현존하고 있다. 익산―광양 간 고속도로가 나면서 도인리 앞으로 임실로 들어오는 인터체인지가 들어섰다.
근대 학원學院의 중심지 양지리陽地里
양지리는 돌고개(석현石峴)·학당學堂·동청東廳·가마소(부동釜洞)·구엉말(곡촌曲村)·중촌中村 은행정(행촌香村)마을로 되어 있다.
이 마을은 약 400여 년 전 풍산심씨와 남원양씨들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남원양씨와 풍산심씨들의 집성촌이고 전씨·박씨 등이 두루 모여 마을을 이루 어 살고 있다. 1850년경에는 상동上洞이라고 불 다. 이 마을에 서당을 세워 많은 유림들을 배출했다고 해서 배움의 터 학당學堂이라고 했다. 1927년에 면사무소와 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면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 후 마을이 성수면의 중앙 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행정구역 개편 당시 중촌中村이라고 개칭하게 되었다. 학당은 1578년에 김천일 현감에 의하여 공립서당인 관서당館書堂이 세워졌다. 1580 년에 가정재可貞齋를 설립하 던 곳이고 조선 말 진소학교와 또 1946년에는 성수 중학원을 세워 성수는 물론 임실지역 교육 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곳이다. 이러한 연유로 현재의 지명을 학당學堂으로 부르고 있다. 양지陽地리 들[坪]은 농토 가 기름지고 평야지 로서 비교적 소득이 높은 지역이어서 주민들의 생활이 윤택 한 편이다. 면사무소 뒤를 새들, 개울 건너는 양지들로 부른다. 옛날에는 은행나무 가 많았고 서당이 있어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동청은 마을에 가정재가 있었는데 『운수지』에 의하면 1580년 임실 현감인 김천 일이 군郡의 동서東西에 각각 관서당인 가정재(유포리 : 지금의 양지리)와 용암서당 (청웅구고)을 세워 이 지방 유학 진흥에 힘썼다고 전한다. 김제 사람인 지관학을 초빙하여 좀 더 높은 학문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설형·노충민·정도 지·김민안·심수인 등 많은 유생들이 배출되었으며 조선 1626년 인조 4년에 책임 을 맡을 만한 장의 적임자가 없어 가정재可貞齋를 폐지하고 그 자리에는 풍산심수인 의 재실인 반매당伴梅堂이 세워졌다고 한다. 성수는 예부터 서재들이 많아 이 지역 의 교육열을 알 수 있다. 부동은 가마솥 부釜라 해서 풍수지리상 가마솥에 끓는 물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온천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여 군으로부터 예산 을 세워 시추를 하기도 하였다. 곡촌마을은 동청마을 뒤쪽으로 북쪽 산 아래에 있 다. 중촌은 심씨와 김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다. 면사무소 뒤를 새들이라고 하 고 양지들이라고도 부른다. 남쪽에는 덜밑이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전하고 서당도 있었다고 한다. 천동으로 가려면 냇물을 건너야 하는데 신행 가마가 노다리를 건 너다 빠져서 새색시가 죽었다는 각시소가 있었다고 한다. 부동 가마소 동쪽 연못을 금동제라고 한다. 학당의 옛 소충사 사당은 1957년에 조성하였으나 2002년 8월 15 일 오봉리로 이건하고 현재는 정자만 남아 있다. 그 자리에 2009년에 보건소가 들 어서 있고 성수교회가 있다. 석현石峴을 돌고개라고 한다. 신촌 17번 국도에서 30번 국도 오른쪽으로 들어오면 휘어진 곳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곳이 석현마 을이다. 석현교를 넘어가면 만나는 들 이름은 사양들·부수 들·사지방들(사지봉들)이라고 부른다. 한편 구곡에서 신촌으로 내려오는 골짜기에 큰 길이 있는데 이 길은 경남 함양·산청에서 장수 지지리 골짜기를 넘어와 장수·번암·산서·지사 면 관기를 거쳐 한치재를 넘고 구곡을 거쳐 신촌으로 빠지면 전주로 가는 길과 연결되는 통 별로의 길이 된다. 통 별 로는 유생들이 한양 가는 길로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석현마을에는 1960년에 창건한 석성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전주-광양 간 도로가 나면서 없어졌다.
정재 선생의 출생지 삼봉리三峯里
1592년경 임진왜란 때 전주유씨全州柳氏와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마을을 형성했으며 전주이씨, 동래정씨, 김해김씨, 경주김씨들이 살고 있다. 마을 앞산에 세 개의 산봉 우리가 있으며 산 아래로 신덕, 죽전, 금동 세 마을을 합하여 삼봉리라 한다. 이 마을은 산간 지역으로 자연마 을이 구성되어 있으며 원삼 봉에 이석용 의병장의 생가 가 있으며 신덕마을 입구에 황사목재와 둥질봉이 있고 이곳을 돌아가면 신덕마을 이 있다. 삼봉저수지의 상 수목인 신덕마을 입구에 길을 내면서 황사黃巳목이 끊어졌다고 한다. 삼봉리는 구 암리재·느진애재·고덕리재·황사목재와 함께 마당바위·무너미재·송곳바위가 있다. 삼봉리 신덕마을 뒤로 임실 고덕산이라 부르는 높은 산이 있는데 이 산은 높이가 619m이며 고덕산의 모산母山인 성수산은 임실의 지붕이라고도 한다. 삼봉 산은 높이가 529m이고 그 아래가 피아골이다. 고덕산의 남쪽으로 마을 안 골짜기 는 피아골 또는 피은골·명당골로도 불리어진다. 난리가 날 때마다 그 골짜기에 들어가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있는 골짜기 의 이름으로는당산날·시암골· 죽전·진박골이 있는데 모두 고덕 산 자락 골짜기의 이름이다. 삼봉 리에서는 진사가 네 명이나 배출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마을 의 남쪽 산에 두리봉이 있는데 이 곳은 가뭄이 들면 두리봉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저수지는 삼봉제 세동제가 있다. 금동金洞의 본래 이름은 쇠동이다. 마을 모양이 가늘다 하여 세동細洞으로 불러 오다가 해방이 되면서 금동 金洞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지금은 저수지 안으로 들어가 그 흔적이 없어졌지만 삼봉리 앞들을 평전들이라고 했다. 정유재란 때 이곳에서 왜군들과 싸 움이 크게 있었다. 그 당시 전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삼봉에서 첫 봉 아래 밭뜸 끝 쪽으로 봉죽암峰竹庵이라는 절터가 있었는데 오랫동안 유지하다가 60여 년 전에 폐사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암자는 절터와 우물, 건물의 석축과 초석, 기와 편들이 그 로 남아 있다고 한다. 정재 이석용 선생 유허비와 심종원모자 열효비가 있고 효자박기래 부처정려가 있다. 유적으로 30년 전에 이곳에서 돌로 만든 고름장이(고 려장) 모습을 드러냈는데 지금은 흙 속에 묻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구 한말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여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임실을 비롯하여 진안·장수·남원 곡성 멀리는 함양까지 3년여 동안 의병활동을 하다가 순국하신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 의병장義兵長의 출생지이기도 한다.
바위 이름이 많고 아름다운 태평리太坪里
이성계가 성수산 상이암에 다녀가면서 수철리를 지나 운재를 넘어 가기 전 이 마을 에 들러 쉬었다 하여 왕촌大王村이라고 한다. 태평리는 볕 바위(양암陽岩), 매바위(응암鷹岩), 운재(왕촌大王村), 배 바위(주암舟岩) 작은 운재, 도화동桃花洞 등 여섯 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양암은 1500년경 진주소씨晉州蘇氏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마을을 빙 둘러 산이 병풍처럼 서 있는데 그 중 마을 앞쪽으로 커다란 바위가 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제일 먼저 이 바위에 비친다 하여 마을 이름이 양암陽岩이 다. 지세가 험하지만 농토가 비옥하다. 고덕산과 삼봉산 줄기에 이루어진 마을이름 에는 바위 암岩 자가 많이 들어 있다. 매바위·개골바위·배바위·생이바위·왕바 위·지추바위·등 바위 이름이 많다. 전주이씨·함양박씨들의 집성촌이다. 작은 진재골(도화동으로 가는 길)·큰 진재골·웃터골·소노골은 양암 동쪽의 와우형 골짜기를 말한다. 삼봉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삼봉리고개라 한다. 도화동桃花洞은 도 화낙지桃花落地이다. 매바위는 일명 바위백이라고도 한다. 매바위 앞산은 황새골이 라고 부른다. 매가 방울소리를 울리며 황새를 잡아먹으려고 가면 방울소리를 듣고 황새가 큰 날개를 펼쳐 달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지명이 황새골鸛鳥谷이다. 황새 골은 마치 황새가 깃을 펼치고 있는 형국이다. 지금도 마을 위로 방울을 단 매의 형상인 바위가 있다. 이 마을은 협계태씨峽溪太氏 집성촌이다. 운垈雲왕촌은 고 려 중엽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연 가 깊은 마을이다. 전주최씨가 처음 이곳에 들어와 정착을 하면서 마을을 이 루었다. 그 후 여산송씨礪山宋氏가 들어오고 전田씨, 남원윤씨南原尹氏 가 점차적으로 들어왔다. 마을 지 명은 이성계 장군이 황산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개경으로 회군하던 중 아침에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이곳에 구름이 맴돌면서 머물러 있었으므로 운垈雲이라는 이름을 붙 다고 한다. 비록 지 가 높기는 하지만 양지이고 전주최씨와 여산송씨의 집성촌이다. 왕리는 제비집(연소燕巢) 형국이다. 마을 뒷산 깃 봉을 중심으로 삼봉이 솟아 있고 산 능선이 마을 전체에 빙 둘러 있으며 고지가 높아 마치 처마 끝에 제비집이 매달려 있는 것과 같다. 마을 앞쪽으 로 길 옆에 큰 짐 바위가 버티고 있다. 풍수설을 적용한다면 마을 앞산이 사두巳頭 형상으로 머리가 마을로 향해 있어 마치 뱀이 제비를 잡아먹으려는 형국이다. 그리 하여 뱀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마을 앞 바위(짐 )에다 수령이 오래된 튼실한 나무로 큰 새를 조각하여 솟 를 만들어 세워 놓았다고 한다. 이는 마을의 재앙을 막고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며 정월보름이면 제물을 놓고 굿을 치는 풍습이 있었지 만 지금은 사라지고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와 전설이 되어 가고 있다.
배바위는 마을을 둘러싼 산봉우리들이 마치 배의 형국이다. 예전에는 마을 앞에 큰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배는 물이 있어야 뜨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호수를 만들 었다고 한다. 주암마을을 높은 곳에서 보면 마을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배의 모습 과 같다고 해서 주암舟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보통 배바위골로 부른다. 마을 북쪽에는 애달이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애달이골 위에는 주걱봉이 있고 마 을 동남쪽에는 계란봉이라고 해서 그곳에는 줄바위가 있다고 한다. 마을 남쪽에는 지주골蜘蛛谷이 있고 큰 재를 넘으면 진안군 백운면이다. 2005년 10월 19일에 제막 한 운현전적의혼추모비雲峴戰蹟義魂追慕碑가 운재에 세워져 있다.
山 水 氣가 맑은 성수산자락 성수리聖壽里
성수리聖壽里는 수철水鐵마을과 사근리寺近里·새터·텃골·지암芝岩·갈골로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조선 초엽에 김해김씨들이 들어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그 후 안동권씨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성수리는 성수산 아래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팔공산 지맥을 이루고 있어 산세가 빼어나며 물과 계곡이 좋아 경승지로도 손꼽힌다. 또한 성수리는 산중이면서도 평지와 같다 하여 이 마을을 ‘산중도방’ 이 라고도 하는데 김해김씨·옥천조씨· 해주오씨·전주최씨들이 살고 있다. 한편 현 재 성수산 자연휴양림 교육관 건물 자리가 최초의 천주교 공소가 있던 터이다. 신 유박해(1800년) 때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터를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무렵 그 당시 다섯 가구가 살면 서 천주교 맥을 이어 왔는데 6·25때 빨치산들이 불태워 소실되었다. 그 후 지금의 성 수리마을로 들어와 다시 공소 를 지어 현재까지 미사를 보 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 마 을은 천주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지암芝岩은 지금 성남저수지 아랫마을로 지추(투구꽃·지우초)가 많았다고 한다. 지추바위라는 지명으로 불려지고 있다. 조선 중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남평문씨南平文氏와 임천조씨林川趙氏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최근에 암자 성지사가 들어섰는데 웅전에는 석가모니가 모셔져 있고 주지는 송암松庵 이강윤李康潤 처사 다. 저수지 위쪽에서 왼편으로 2km쯤 가면 갈골이 있다. 갈골葛谷은 협계태씨峽溪太氏가 들어와 정착을 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그 후 진원박씨珍原朴氏박홍현朴弘賢 이 순천에서 구 한 말 구국운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쫓기어 숨어 들어와 이곳에서 은거를 하였다. 그 후손들이 오봉리 평지마을로 내려와 서너 집이 현재 살고 있다. 갈골은 그릇을 구웠던 사기 터가 3개소나 있다.
성수리의 유래를 이성계와 연 계하여 조명을 해 본다면 이성 계는 안개 속에서 헤매었던 왕 방리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실 묻지 않아도 가히 알 수 있다는 말은 오직 탁 트인 길을 불을 보 듯 훤하게 볼 수 있는 사람, 즉 도를 한 사람만이 가까스로 조심스럽게 내놓을 말이라는 점을 익히 깨달았다. 그는 이런 실수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심심산중에서 다시 기억을 더듬어 기어이 도선암을 다시 찾아 나서 게 되었고 문을 모르는 휘하 장졸들은 그저 원수의 뜻이라 어쩔 수 없이 그 로 따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휘하의 군졸들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 하면 팔공산 도선암은 고려의 태조와도 접한 관계가 있었을 뿐 아니라 팔공산이란 이름 은 이미 도참을 제 로 공부하여 알 만한 사람에게는 다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만 원수가 이처럼 애써 찾는 정확한 의중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장졸들은 섣불리 이를 알아차린 듯한 태도를 취할 수도 없었던지라 너 나 없이 그저 뒤만 따를 뿐이었다. 계절은 이미 가을로 접어들었는데 땅은 아직도 여름 기운이 가시지 않아 일어나는 안개는 밤부터 새벽까지 짙게 깔려 있다가 차츰 해가 중천으로 오르면 어김없이 걷히는 법이다. 때에 반나절이 지나 태양이 은빛을 발하는 시점에서 그 빛을 타고 다시 도선암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성계의 일행들은 그날 오후 새참때쯤 도선암 입구에 이르 다. 비로소 이성계는 약간의 피로를 느끼며 부하 장수를 향해 “황산에서 여기까지가 몇 리나 될꼬?” 하고 물었다. 그러자 어느 장수 하나가 엉겁결에 “수천 리數千里나 되는 듯하옵니다.”라고 답을 했다. 수천리는 이때부터 불러왔는데 오늘날에는 수철리水鐵里라고 적고 있으 니 아마 멀다는 뜻을 피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어 이해는 되나 그래도 애당초로 돌아 가 역사 따라 지명 따라 그 로 적는 것도 또한 무방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천혜의 계곡을 자랑하는 왕방리枉訪理
조선 초엽인 1470년경 화전민들이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왕방마을과 원증마을 그리고 판마을로 이루어졌는데 소재지에서 7km정도의 깊은 계곡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왕방리는 골짜기마다 민가가 살고 있어 휴양지로서 인구가 늘어나 는 곳이기도 하다. 이성계의 회군로回軍路를 보면 왕방리는 성수산 도선암을 찾아가 다 안개로 인하여 방황하 고 이로 인하여 이곳에서 쉬어갔다 하여 왕방리枉訪里라 는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여산송씨와 남양홍씨가 주를 이루어 살고 있다. 수몰의 아픔이 있는 오봉저수지는 1985년에 준공한 15만 4천 평의 전형적인 계곡 형 저수지로 오봉산과 태산 준령에서 유입되는 저수지로 수원이 풍부하고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춘 곳이다. 진재석 시혜비는 오봉리 저수지를 넘어 원 왕방 마을 모정을 올라가는 앞 정원에 높이 103cm 폭 38cm 두께 12cm의 규격으로 세웠 다. 진재석晋在碩 시혜비는 왕방리 주민들이 乙丑年(1925) 12월에 세운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전참봉진재석시혜불망비前參奉晉在碩施惠不忘碑’라고 새 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전촌쾌활감석하기全村快活 感碩何己’라고 새겨져 있다.
오봉리 저수지를 넘어 원왕방마을 입구인 조치 삼거리에 박진서 시혜비가 위치 하고 있다. 이 비석은 당초 저수지로 수몰되기 전 당시 마을 어귀에 있었는데 이곳 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박진서朴鎭瑞시혜비는 높이 94cm, 폭 36cm, 두께 10cm의 규격으로 조치마을 주민들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비석의 전면에는 관의관박공 진서시혜비官議官朴公鎭瑞施惠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너무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고 글자의 형태만 남아 있다. 현재 비석이 서 있는 곳 뒤편의 산은 지금도 박진서 후손의 산이라고 한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둔학정遯壑亭은 왕방리에서 원증마을로 가는 길 2km 정도의 중간 지점에 있다. ‘둔학정遯壑亭’은 원래 단종 때 충신 송경원(宋慶元1419~1510)이 임실 신안 ‘백이산伯夷山’ 아래 창건하 던 것을 그의 후손들이 己卯(1939)년 8월 18일 庚午 未時에 상량문上梁文을 올려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송경원은 여산 인으로 호號가 둔학遯壑이며 군수 치선致善의 아들이다. 1455년 전라도사全羅都事로 재직 중 단종이 수양 군에 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벼슬 을 그만두고 두문불출하다가 1457년 단종이 죽자 임실 백 이산 아래에 은거하며 그곳 에서 일생을 마쳤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내부는 둔학정 편액과 경차둔학敬次遯壑, 둔학정기遯壑亭記 등 4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맞은 편 언덕에 여산송씨 재실과 둔학 송 선생 유적비가 있으며 집안에는 둔학 선생 실기가 전하고 있다고 한다. 왕방리를 지나 원증마을 앞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400 m쯤 가다가 다시 계곡으로 200여m쯤 올라 가다가 우측 골짜기로 오르면 방독을 채취하던 곳이 있다. 도쟁이골 방독채석장은 과거에 방독과 기와 신 너와지붕으 로 쓸 돌을 채취 하던 곳으로 수요가 많을 때에는 도시로 모두 팔려 나갔으며 시 의 변화에 따라 연탄보일러가 나온 후로는 온돌방이 없어지고 보일러 방이 확 산되어 채석을 중단하였다. 이곳은 깊숙이 들어가 있었기에 도장방 또는 도장골이 라고 하다가 도쟁이골로 변화되어 부르고 있다.
마을을 조사하는 과정에 왕방사지 절터에서 수습한 망새 와편 1점을 분석한 결 과 연 가 순치順治 육년六秊 기축己丑으로 적혀 있어 1649년으로 판단된다. 글자 내 용을 보아 시주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곳 주민의 말에 의하면 이 곳에 절이 있을 당시 쌀을 씻으면 쌀 씻은 물이 흘러 오봉리까지 내려갔다는 설화 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역사적 기록을 보면 왕방사지는 임실 현에서 이십 리二十里 정도 떨어져 있고 심원사와 상이암은 임실 현에서 직선거리로 삼십 리三十里가 떨어 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번 조사로 왕방리의 심원사와 왕방사지 그리고 상이암 이 현지 조사와 기록으로 위치가 밝혀진 것으로 본다. 성수산 주변으로 암자와 사 지가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방리는 오봉저수지 댐을 막으면서 수몰민 이 생겼고 지금 남은 주민들은 외지로 떠나지 않고 산비탈에 집을 지어 왕방마을을 형성하며 살고 있다. 왕방분교가 수몰되면서 지금의 분교 자리로 옮겨 신축을 했지 만 3년 정도 지탱하다가 더 이상 학생이 없어 폐교가 되었다. 왕방모정은 너와집으 로 되어 있다. 수몰 당시 마을 주민들이 원형 그 로 현재 자리에 옮겨 놓았다. 역사적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너와지붕 형태의 정자다.
다섯 봉우리가 어우러진 오봉리五峰里
오봉리는 조치朝峙·효촌孝村· 평지平地마을로 이루어져 마을 뒤 로 다섯 개의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어 오봉리다. 지사면 관기에서 하룻밤을 묵은 이성계는 아침밥 을 일찍 먹고 군사들을 독려해 팔 공산 도선암을 찾아 길 떠날 채비 를 서둘 다. 편안한 휴식으로 병사들의 피로와 노독은 거의 풀려 움직임이 활발했다. 더욱 반가운 일은 원수인 자 신을 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져 창졸간에 지켜야 할 예의 이상의 그 어떤 깊은 신뢰를 주는 분위기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안정 된 분위기가 느껴지자 이 시점에서 자신이 팔공산 도선암을 애써 찾는 이유를 여러 군사들에게 장황한 설로 자세한 설명까지 하지 않더라도 강 귀띔은 해주어야 하 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었다. 그러나 이를 즉시 말하지 않고 망설이는 참에 마침 길을 안내하던 비장이 “합하, 오늘의 행군은 마땅히 저 고개를 넘어 만마 관을 거쳐 전라 감 으로 입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아니다. 내 개선의 광을 안고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지나쳐 서는 아니 될 곳이 있으니 그곳이 곧 팔공산 도선암道詵庵이다.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팔공산 도선암으로 가자.”라고 말하였다. 군사들은 이 말에 의아해 하면서도 도원수의 명령이라 그 로 따를 수밖에 없어 관기리마을 뒤에 있는 재를 넘어 팔공 산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따라서 도선암을 향하여 넘어가는 고개 이름을 이성계 가 아침에 넘어서 아침재(조치朝峙)라고 불러 지금까지 이름이 변하지 않고 있다. 효촌孝村은 300여 년 전 장수황씨·남원윤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 선 중엽 윤두표尹斗杓라는 사람이 효성이 지극하여 전라감사 김만길金萬吉의 상주로 숙종 왕의 정려 은전을 받아 효자문을 세운 후 효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석용 의병장과 28명의 의병들이 모셔진 소충사가 있다. 평지마을平地은 조선 중엽 강화 노씨江華魯氏들이 들어와 정착하였으며 앞 들이 넓고 평탄하여 평지라고 부르게 되 었다. 회남산 중턱에 구천사 암자가 있어 기도 도량으로 신도들이 찾아오고 있다.
맑은 물이 풍부한 삼청리三淸里
삼청리는 천동泉洞과 구곡九谷마을로 형성되어 있다.(여산송씨 족보에는 九曲으 로 되어 있어 뜻이 조금 다르다.) 1630년 조선 중엽 여산송씨·전주이씨·동래정씨 가 이곳에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천동은 저수지 위로 내천內泉 외천外泉의 유래가 된 샘이 있어 시암골이라 한다. 1630년경 도선선사가 이 마을 귀목나무 아 래에 쉬면서 여러 곳에 샘이 많으며 물이 맑고 깨끗하다 하여 천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천동시암은 원래 들 가운데 있었으며 위, 아래 동네 사람들이 모두 식수로 사용하였다. 이곳은 내川가 없고 산골이라 흐르는 물이 없어 인근 마을에서도 이곳 의 물을 떠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 주민들의 원에 의하여 경지정리를 하면 서 시암은 묻히고 그 신 상 수도시설을 해서 식수로 사용 하고 있다.
천동은 1785년(정조 9년) 효 정의 은전을 받기도 한 효자이고 문장가인 수암睡庵 최식崔湜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천동마을에는 삼청루가 있었는데 오래되어 없어지고 최근에 그곳에 정자를 지어 사용하고 있으며 정자를 감싸고 있는 노거수는 수령이 약 250년쯤 된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이 없지만 도요지(사기와 옹기) 터가 운동재 뒤편에 있으며 천동저수지 는 일제강점기에 막았다. 아홉골九谷이라고 부르는 유래는 크고 작은 산들이 마을 을 빙 둘러 있는데 열 개의 골짜기가 있어 열골이라 했었다. 그런데 지사면으로 한 개의 골짜기를 주어 아홉골이 되었다. 여산송씨 족보에 가록된 자료를 보면 구곡은 한자로 구곡九曲이라 적혀 있어 이는 아홉 번 굽어진 긴 골짜기란 뜻의 구곡이라 해석 할 수 있다. 한편 한치寒峙는 지 사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이 고개는 통 별로統營別路로 이 름이 알려져 있다. 경상도 서 부권의 산청·함양 등지의 유 생들이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다닐 때 전주를 경유하여 가는 길 중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한다. 삼청리의 계곡은 감나무골·갈골·농골·놋점골·웃터골·회초골·쇠막골·만 비내골·옥녀봉(일명 무주봉이라 함.)이 있다. 옛길로는 한치寒峙와 더불어 외얏골 이 있고 하천의 발원지는 구곡샘으로 한치 중턱에 있다. 앞에서 말한 천동에 있는 노거수는 약 25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1972년 내무부에서 발간한 『보호수保護樹』 지에 따르면 수령이 100년 이상 된 나무들은 개 한 마을의 전설과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당제목堂祭木·신목神木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기도 한다고 설 명하고 있어 천동의 노거수는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고대 교통의 중심지로 산성이 있는 월평리月坪里
월평리는 삼국시대에 형성된 마을로 추정되며 지형이 반달형이요, 들이 넓다 하여 월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월평리月坪里는 성저城底·월굴月屈·신촌新村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성저는 마을 뒷산에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옛 산성이 있 어 고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 던 곳으로 유명하다.
『운수지雲水誌』에 의하면 월평리 산성月坪里 山城은 ‘재동면성저리후봉상유고성주회 불과이리성고불과일장중유고정전운삼한시소창이장곡물운(在東面城底里後峯上有古城周回不過二里城高不過一丈中有古井傳云三韓時所剏以藏穀物云)’이라고 기록되 어 있다. 이로써 삼한시 의 고성지古城址라고도 하며 임진왜란 때 호남지방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군량미를 저장하기 위해 쌓은 합미성合米城이라고도 한다. 고적 자료에 의하면 삼한시 의 산성으로 그 둘레가 400간(720m)이나 되었다고 기록되 어 있다.
수월마을은 구곡九谷들에 서 물이 마을 언덕을 넘어 왔다고 하여 수월水越 또는 무내미(물넘이)라고 한다. 구곡의 한치 중턱에서 근 원이 되어 흐르는 작은 물 줄기와 천동마을 앞 저수 지에서 내려오는 물이 세 갈 래로 흘러 무내미 뒤로 흐른다. 이 물은 무내미를 거쳐 성저까지 내려가 아랫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있는 중요한 용수이다. 그 당시는 수월水越이라는 의미를 알지 못하고 다르게 해석을 했으나 오늘날에는 저수지 물이 무내미까지 흘러가 농사를 짓기 때문에 선인들은 일찍 이 그 뜻을 헤아려 수월이라는 지명을 붙인 것이다.
신촌新村은 조선시 ·호남의 거유와 상인들이 한양 가는 길목으로 육로를 이용할 때 이곳에서 쉬어가는 곳이기도 하며 그나마 몇 호 안 되는 곳에 조선 말경 큰 불이 나서 마을이 완전히 전소가 되어 새로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에 철도가 생기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철도공사를 하면서 인부들 의 식사를 맡아 제공하는 집이 하나, 둘 늘어가면서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고 하며 또한 신촌에는 그 당시 장간도 있어 화승 총구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서북쪽 삽치 계곡에 넓은 바위가 많다 하여 너벙바위 또는 너른바위라고 부르기도 했다. 신촌新村이란 지명은 일제강점기 일본식 촌村자를 붙여 신촌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신촌마을 앞 건너편에는 역사와 문화의 향을 느낄 수 있는 육우정六愚亭이 있다. 일명 봉남정鳳南亭이라고도 하며, 병풍을 두른 듯한 바위와 봉황소鳳凰沼가 있을 뿐 아니라 북쪽에 고덕산 삼봉三峰, 동쪽에는 청계구곡淸溪九曲 남쪽에는 계봉桂峰, 서쪽 에는 구치龜峙가 각각 가로 놓여 있어 원경遠景 역시 가히 일품이다. 월굴은 뒷산이 높아 달이 뜨면 굴절이 되어 한참 후에야 볼 수 있다고 해서 월굴 이라 했다고 한다. 성저마을 앞 냇가 쪽으로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 마을 주민들도 언제 심어졌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냇가 쪽에 뿌리를 내리고 장구한 세월을 증명하듯 한 자리에서 시절이 오고 감을 보여 주고 있다. 오랜 세월을 걸쳐 마을에 풍년 및 안녕을 기원했던 노거수는 조상들의 미풍양속 계승과 아울러 아름다운 국토경관 조성은 물론 지역주민들의 정서함양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신촌마을에는 임실 쪽 으로 가는 길목에 삽치가 있고 둔남천을 따라 흐르는 곳에 사지방 보가 있다.
계수나무 터와 명당이 많은 봉강리鳳岡里
봉강리峰崗里는 계월桂月과 덕치德峙마을로 형성되어 있 는데 계월은 또다시 구舊계 월과신新계월로 나뉘어져 있 다. 계월마을은 조선 중엽 여 산송씨와 전주최씨가 정착하 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처 음에는 제월濟月이라 하였으나 그 후 지세가 둥근달과 같고 마을 형세가 계수나무와 같다 하여 계월桂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 후부터 마을 사람들의 자손들 얼굴표정이 달처럼 밝고 명랑해졌다고 한다. 한편 신계월마을 중앙에 세워진 비비정飛飛亭은 이 마을에 살았던 최창열 선생에 의하여 1930년 3월에 세웠다. 비비정은 간재 전우艮齋 田愚가 쓴 이건기移建記가 걸려 있으며 이건기의 내용은 원래 선조 6년(1573) 창주첨사昌州僉使 최 길崔永吉이 삼례역 남쪽에 세웠던 것을 길의 10세손 창열滄烈이 1930년 이곳 계월촌으로 옮겨 세웠다고 기록하였다. 비비정飛飛亭 원기原記는 우암尤菴 송시 열宋時烈이 쓰고 비비정 중건기는 직각直閣 서준보徐俊輔가 지었다고 한다.
구계월마을 안에는 오래된 노거수가 있는데 이 노거수는 여산송씨礪山宋氏가 약 350년쯤 이곳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심었다고 하는데 노거수의 흉고는 4.3m, 높이 는 약 17m 정도이다. 이 나무는 마을 안 중심지에 있으며 최근에 지은 정자가 느티 나무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이한 것은 가지와 가지가 연결되어 연리지 로 이어져 있다 정자 바로 옆 에 여산송씨 계양재桂陽齋가 있다.
덕치德峙마을은 경주김씨慶州金氏와 진주강씨晋州姜氏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지사면只沙面으로 넘어가는 육로가 마 을 앞을 지나 큰 재를 넘어야 하므로 주민들은 이 재를 덕치德峙라 부르고 있다. 덕치마을에는 골짜기가 많아 농 토가 부분 골짜기에 위치하여 농사짓는 데 애로가 있으며 강릉류씨와 경주김씨 의 선산이 많아 선산 입구 큰 바위에 두 성씨의 묘동 암각서가 남아 있다. 마을 위쪽으로 삼마동三馬洞, 삼호三虎, 삼박골三博谷은 세 마리의 말과 세 마리의 호랑이, 세 명의 큰 벼슬자리라 하여 풍수지리설로 명당자리라고 하는데 일찍이 누군가 묘 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명당자리로서 크게 발복을 했는지는 모른다는 주민 심종순 씨의 말이다. 이 산 주변에는 회심염불터·승날바위·목탁·목당골· 바랑재·승늉재·승요물(제물을 차려놓고 제를 지내는 곳)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 곳 지명은 중승僧자가 많고 절에서 쓰는 용어가 많은 것으로 보아 일찍이 이 근방 에 절터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산 고개를 넘어가면 지사면 금평리가 나온다.
오령류지 형국의 오류리五柳里
오류리는 판大板마을과 함께 형성되어 법정리를 이루고 있으며 1570년경 조선 선조 때 경남 함양에서 진주강씨晋州姜氏가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뒷산의 산세가 오령류지五嶺柳枝 형으로 되어 있다 하여 오류리라 하였다. 즉 다섯 개 산맥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오류마을은 진주강씨 집성촌 이다. 경주김씨·강릉유씨가 주를 이루며 살았는데 후에 여러 성씨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오류리는 기차역이 있어서 일찍이 여러 형태의 문화가 발달되었으며 성수 면 내는 물론 진안 등지에서 나오는 임산물 수송의 요지로 마을이 한 때는 융성하다. 지금은 철도 개량사업으로 임실역에서부터 판마을까지 터널이 만들어져 기차가 터널로 통과하기에 역사驛舍와 철로가 폐쇄되었으며 그곳에 현재는 정부 지원 아래 전라북도 동부권고추주식회사가 2011년에 문을 열었다.
오류에서 오수 방향으로 2km정도 가면 판이다. 판은 창녕성씨昌寧成氏가 정 착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 서쪽 골짜기와 앞들이 넓고 평평하다 하여 판大板이라 부르게 되었다. 성수면과 오수면의 경계 지점으로서 맨 끝 마을이다. 오래 전부터 복숭아 과수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현 농의 선구적 역할을 다해 부촌으 로 탈바꿈되었다. 마을 뒤 산속으로 새로 뚫린 기차 터널이 만들어져 임실역에서 이곳까지 터널의 길이가 약 5km정도이다. 오류리에는 강주 처 함안조씨 정려비 가 있고 김계룡의 모자 열․효비가 있다. 열녀와 효자가 배출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효에 한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한편 오류역에서 임실역 방향으로 월굴리 중간(황새바우)인 약 1.5km 지점에 한국전쟁 때 열차 폭파사건이 있었다. 1950년 10월 그때 당시 계월 쪽에 주둔해 있던 빨치산들이 폭격을 하여 열차가 뒹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여수에서 출발한 기차 는 약 5량 정도로 기관차 바로 뒤에는 여수에서 해물을 싣고 임실 등지에 팔려고 탑승한 민간상인들이었고 다음은 식당 다음은 미군 등을 위하여 위로공연을 하기 위한 연예인들이었다고 한다. 이때 계월 쪽에 있던 빨치산들이 아군의 정보를 얻어 출동하여 기차를 향해 폭격을 했다고 한다. 기차의 머리 부분과 바로 뒤의 화차는 폭격으로 넘어지고 이때 다른 3량은 연결 고리 핀이 빠져 거꾸로 오수 방향으로 굴러갔다고 한다. 굴러간 3칸은 오수역을 지나 다시 용정리 부근까지 다다랐을 때 철로의 고저가 약간 높은 관계로 정차 후 다시 오수역 쪽으로 올 때 오수역에서는 이를 정지시키려고 주민들이 보관하고 있는 덕석(멍석)을 가져다 철로 위에 몇 겹 을 깔아 화차를 오수역에서 정지시켰다는 오수 사람들의 증언을 들었다. 이때 미군 일부 중상자는 헬기로 광주까지 후송시키고 사고현장과 오수역에서 죽은 민간인은 가족들이 인수해 가고 미군 일부는 오수 북방산 공동묘지에 안장시켰다는 것이다. 한편 진동수 씨의 증언에 따르면 기차 폭격으로 인하여 기관사 양해룡과 이름은 모르지만 이씨李氏 성을 가진 사람 두 명이 죽었으며 현장에서 죽은 미군들의 시체 는 포에 싸가지고 오수 쪽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그때 당시 진동수 씨는 임실역에 서 근무했다.
성수의 주요 산
임실의 지붕인 성수산聖壽山
성수산은 임실군 성수면과 진안군 백운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 방향의 금남호남정맥 줄기에는 이름이 같은 진안 성수면이 자리잡고 있어 혼선하는 사람 이 적지 않다. 성수산은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해발 876m로 고려와 조선의 건국 설화가 얽혀 있는 성스러운 명산으로 정상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여 사방으로 전망이 빼어난 곳이다. 또한 험준한 산세는 두 왕조의 건국설화뿐만 아니라 동학의 지도자 김개남 접주가 상이암에서 당시 임실현감 민충식을 동학에 입도하게 한 곳 도 성수산이다. 또한 구 한말 이석용(李錫庸 : 1878∼1914) 의병장이 의병을 모의하 고 준비한 곳도 성수산 상이암으로 역사적 의미가 큰 명산이며 한국전쟁 때는 수난 의 애환이 서린 산이다.
고려 때 풍수지리에 통달한 도선국사道詵國師는 성수산을 둘러보고 “천자봉조지 상天子奉朝地像……”이라, 천자를 맞이할 성지로 손색이 없다고 탄복하고 송도로 올 라가 초야에 묻혀 있던 왕건王建에게 성수산에서 백일기도를 권한다. 성수산으로 내려온 왕건은 백일기도 끝에 고려 건국의 업을 성취할 수 있는 계시를 받고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여 ‘환희담歡喜潭’이라 쓴 글씨를 바위에 새기고 암자를 지어 ‘도선암道詵庵’이라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도 무학대사無學大師의 권고로 성수산에서 기도를 드 렸으며, 남원 운봉에서 왜구를 섬멸하고 개선 길에 무학대사를 그리며 성수산 상이 암에 들 다. 그는 꿈에 용이 나타나 세 번이나 몸을 씻어 주는 발룡 몽發龍大夢을 꾼다. 그리고 산·물·기氣 세 가지가 맑다는 뜻으로 ‘삼청동三淸洞’이라 쓴 친필을 돌에 새겼다. 또한 그가 과거 이곳에서 기도를 할 때 하늘에서 외치는 세 차례의 성수만세聖壽萬歲 소리가 들렸다고 하며 왕으로서 손을 귀 위에까지 올렸다 하여 도선암을 상이암上耳庵으로 고쳐 불 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삼청동 비각은 어필각 御筆閣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는 근 에 들어와 전주이씨 종중에서 세운 것이다.
상이암上耳庵과 삼청동비三淸洞碑
『상이암 사적기』에 의하면 상이암은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가야선사가 창 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조선 태조 3년(1,394) 각여선사覺如禪師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1894년 동학혁명 때 방화로 불탔으나 1909년 김 원 선사에 의해 재건되었다. 그 후 1950년 한국전쟁 때에 다시 소실되었는데 1958년에 법당과 산신각 등을 당시 양 창현 군수의 지원으로 다시 세워 사용하 고 현재의 법당(무량수전 : 無量壽殿)과 요사채는 군郡의 지원으로 최근에 세워졌다. 절 입구의 큰 바위를 지나면 법당 앞에 수백 년 된 편백나무가 자리잡고 있고 우측의 어필각에는 이태조 친필인 ‘삼청동三淸洞’ 비가 세워져 있다. 이처럼 천년 고찰임을 말해 주듯이 고목들이 즐비하고 구룡지 지九龍之地라 말하듯 아홉 곳의 강하게 내려오는 산줄기가 암자를 응시하고 법당 앞 의 여의주로 표현하는 바위산을 물려고 하는 것과 같기도 하여 성수산의 구룡九龍이 상이암을 군신君臣처럼 빙 둘러 감싸안고 있다.
상이암上耳庵 부도浮屠
혜월당 부도는 평평한 부정형의 자연석을 놓고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원형 의 석에 항아리 모양의 몸체를 올리고 8각의 옥개석을 얹었다. 상륜부에는 복 발·보륜·보개를 차례로 놓고 보주를 얹었으며 몸체에 혜월당慧月堂이라 새겨 부 도의 주인을 밝혔다. 높이 194cm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형식과 구조, 조각 등의 수법이 뛰어나 1986년 9월 8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두곡당 부도는 석종石鐘 형 부도로 역시 평평한 부정형의 자연석 위에 8각의 석 을 놓고 종 모양의 탑신을 올린 후 그 위에 보주를 얹었다. 높이 126cm에 화강암으 로 만들어졌으며 몸체에 두곡당杜谷堂이라 새겼다. 혜월당 부도와 함께 1995년 6월 20일 전라북도지방유형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방형옥개석 부도 또한 전라 북도 유형문화재 150호로 두곡당 부도와 함께 지정되어 있다. 이 부도 중 두곡당 부도는 당초 상이암 입구 300m 전방에 있었으나 도난의 우려가 있어 상이암 경내 로 2002년 9월 옮겨왔다.
성수산 자연휴양림
성수산 자연휴양림은 성수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휴양림으로 낙엽송과 편백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수산 계곡은 예전에 사람이 드나들기 힘들 정도로 외 진 곳이었는데 지금은 도로가 뚫려 접근성이 좋아졌다. 원시림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 하나로 각종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가족단위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주차장과 어린이 놀이터, 그리고 200여 명이 숙박할 수 있는 휴식공간이 있다.
이곳 휴양림은 독림가인 임실 지사 출신 김한태옹이 수십 년 전부터 사재를 털어 조성하여 관리하여 오다가 노령으로 인하여 전주 종교단체인 북문교회에 매각함으 로써 지금은 교회 시설물로 관리되고 있다.
성수산의 등산로
산행코스
1코스 휴양림주차장에서 출발하여 → 임도3거리 → 구름재임도 → 구름재분기점을 거쳐 → 905m고지를 지나고 → 성수산(875.9m)에 이르는 코스다. (산행거리 6.9km, 소요시간 4시간)
2코스 휴양림주차장을 출발하여 → 임도3거리에서 좌측 계곡 입구로 들어서 → 연화봉 (805m)을 거치고 → 성수산에 이르는 코스다. (산행거리 3.5km, 소요시간 2시간)
3코스 휴양림주차장을 출발하여 → 임도3거리에서 → 좌측 계곡 입구로 들어서 → 지장치분기점을 거쳐 → 성수산에 이르는 코스다. (산행거리 3.7km, 소요시간 2시간)
4코스 휴양림주차장을 출발하여 → 휴양림 본관을 거쳐 → 임도분기점을 지나 → 암봉(연화봉 805m)을 거쳐 → 성수산에 이르는 코스다. (산행거리 4.1km 소요시간 3시간)
5코스 휴양림주차장에서 → 본관을 거쳐 → 임도분기점에서 → 임도구간을 걸어 → 전망 와 상이암 입구 → 임도 3거리까지에 이르는 코스다. (산행거리 3km 소요시간 2시간)
8봉으로 이루어진 고덕산高德山
임실 고덕산(619m)은 성수면 삼봉리 신덕마을 뒷산으로 관촌면과 경계에 위치하 고 있다. 고덕산을 임실 소재지에서 볼 때 회산이라고 불리며 스릴과 조망이 빼어 난 8개의 바위 봉우리가 연이어져 있는 숨은 명산이다. 1~7개의 봉우리는 관촌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봉인 8번째 봉우리만이 관촌면과 성수면의 경계에 있다.
숙종肅宗 원년에 펴낸 『임실군지任實郡誌』의 전신인 『운수지雲水誌』의 형승조形勝條에 ‘고달산高達山이라 개칭하 는데 이 산은 임실읍의 동북방에 위치하여 마치 강한 지세를 진압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풍수지리상 8개의 기암괴 석의 봉우리가 연이어져 임실의 안녕을 위해 지세를 알맞게 억제하고 있다 한다. 임진란 때는 이 산의 큰 덕으로 백성들의 희생이 적었다고 믿어 이후 고달산高達山 이 고덕산高德山으로 이름이 변한 것으로 그리고 호남정맥 임실 신덕면과 완주 구이 면 경계의 옥녀봉에서 북쪽으로 가지친 산줄기에도 이름이 같은 전주 고덕산(603 m)이 있어 혹자들은 혼동을 한다.
또한 고덕산은 임실에서 바라볼 때 화산으로서 임실에는 좋은 의미의 산이 아니기에 임실읍 동쪽에 나무를 많이 심어 고덕산이 보이지 않게 하였다는 숲정이가 있고 화산(고덕산)의 액을 막기 위하여 세운 절이 운수사이며 운수사의 미륵불도 고덕산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현재의 고덕산은 전국에서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명산으로서 등산 기점은 주로 관촌면 운수리 고덕마을에서 시작한다. 빼어난 바윗길을 묘미 있게 빠져 정상에 오르면 북쪽의 내동산(887.4m)이 유난히 돋보이고 전망바위·통천문·촛 바위 등 특이한 바위들이 산꾼들을 사로잡는다. 또 정상 남서쪽 밑으로는 넓은 마당바위가 있어 쉬어가기 좋은 장소가 되고 있다. 정상에서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면 덕봉사가 나오는데 웅전 뒤편 동굴 속의 약수가 일품이다. 성수면 쪽에서 오르려면 삼봉리 신덕마을 맨 끝집 입구에서 출발하는 코스가 있다.
산행코스 운수리 고덕마을 주차장 → 1암봉巖奉 → 8암봉(정상) → 마당바위 → 덕봉사 → 고덕마을 주차장 (소요시간 3시간)
봉화대가 있는 영태산 靈台山
장수군 산서면과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태산(靈台山 666.3m)으로도 불린다. 이 산은 장수 쪽에서 더 유명하여 장수팔경長水八景의 하나로 태 월靈台迎月로 불려 왔다. 『장수군지長水郡誌』에는 태산을 노승이 목탁을 치고 염불하는 형상으로 마 치 자식의 장래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애끓는 자태 같은 산이라 했다. 또 다섯 마리 용이 기는 듯한 다섯 개의 봉우리가 앉아 있고 일곱 개 봉우리가 이어져 칠봉이 꿈틀거린다고 예찬하였다. 장수 사람들은 이 산을 장수 5악五嶽 중 하나로 서쪽을 방위하는 백제장군으로 추앙해 왔다. 산행은 주로 장수군 산서 쪽을 들머리로 하고 있는데 서쪽의 오봉산(五峯山 625m)과 칠봉산까지 아우르는 산행코스가 좋다. 사 방이 탁 트여서 오봉저수지·성수산·팔공산·그리고 산서의 들녘까지 한눈에 조 망된다. 정상에 봉화 가 있다.
세 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진 삼봉산三峰山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라 삼봉산(529.4m)이라 하며 삼봉천을 사이에 두고 고덕산과 동서로 마주하고 있다. 삼봉산은 많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난리 때 이 산으로 피난가면 살아남는다 하여 피은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한다. 또 이 산 북편에 투구 모양을 한 봉우리는 있는데 옛날에 장군이 투구를 벗어놓은 자리라 하여 투구봉 으로 불리고 그 아래 골짜기는 말에게 먹일 풀을 뜯던 곳이라 하여 망태골, 투구봉 위쪽 골짜기에는 말에게 여물을 주던 구수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구수골, 그리고 건너 편 북쪽의 산 중턱에는 말이 죽어 묻었던 자리라 하여 말무덤馬墓으로 불린다. 삼봉산 가운데 봉우리 아래에는 화전을 일구었던 자리가 있다. 절터골이라 불리는 곳으로 주 민들에 의하면 봉죽암峯竹庵이란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삼봉 산 주변의 죽전(밭뜸)에는 의병장 이석용李錫庸의 생가가 있고 원삼봉리 아래의 두리 봉(308m)과 검바위에서 옛적에 기우제를 지냈다는 무제날등이 있다.
성수의 작은 산봉우리 깃대봉(352.2m) ① 도인리 신흥촌 서쪽 산으로 임실읍 금성리와 경계를 이룬다. 피리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태봉(303m) 도인리 당당이 동남쪽에 있는 산이다.
개동산(327m) 도인리 후촌 동쪽 산이다.
옥녀봉(473m) 봉강리 계월 동쪽에 있다. 지사면 안하리와 경계를 이룬다.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이라 한다.
덕재산(483.8m) 봉강리 덕재마을 동쪽에 있는데 과거 로 역할을 하던 고갯길이 있는데 지사면 금평리와 경계를 이룬다.
수류봉(335m) 봉강리 덕재 남쪽에 있다. 오수면 군평리와 경계를 이룬다.
경비내산(340m) 봉강리 신계월 동쪽에 있는 산이다.
몰무산 봉강리 신계월 서남쪽에 있는 산이다.
봉비산(287m) 봉강리 중앙에 있는 산이다. 봉황이 나는 모양이라 한다.
셋보산(233.3m) 봉강리 덕치 서쪽에 있는 산이다.
돼대봉(506m) 삼봉리 죽전 북쪽에 있다. 관촌면 운수리와 경계를 이룬다.
가마봉(459m) 삼봉리 신덕 서북쪽으로 고덕산 남쪽에 있다. 관촌면 운수리와 경계를 이룬다. 가마명당이 있다고 전해온다.
두리봉(308m) 삼봉리 원삼봉 남쪽에 있는 산이다.
무제날등(283m) 삼봉리 검바위의 북쪽에 있다. 기우제를 지냈다고 전해온다.
복호산(349m) 삼청리 구곡 남쪽에 있는 산이다. 호랑이가 엎드린 형국이라 한다.
저바라기산 삼청리 외천 동쪽에 있는 산이다. 성수산의 상이암을 바라본다 한다.
매봉(431.2m) ① 아침재 북서쪽에 있는 산이다. 삼청리와 오봉리 경계에 있다.
솥봉 삼청리와 양지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솥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갈미봉(861m) 임실·장수·진안 3군의 경계로 성수면 동쪽 끝단으로 구름재 동쪽에 있다. 갈모봉으로도 불린다.
연화봉(805m) 성수산 서쪽 편에 있다.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와 경계를 이룬다. 날카로운 바위가 뾰쪽뾰쪽 솟아 연꽃을 닮았다 하여 연화봉이라 불린다.
장군봉(683m) 성수산 자연휴양림 북쪽에 있다.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와 경계를 이룬다.
매봉(475m) ② 성수리 갈골 북쪽에 있다.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와 경계를 이룬다.
마치재날망(362m) 오류리 판마을 뒷산 서남쪽에 있는 고개이다.
새까끔산 오류리 북당골 남쪽에 있는 산이다.
송장날(312m) 오봉리 조치 북쪽으로 오봉저수지에 깊숙이 뻗어내린 날등이다.
문바우산(363m) 오봉저수지 제방 북쪽이 있는 산이다.
면화봉(343.9m) 오봉리 효촌 남쪽에 있는 산으로, 안산이라고도 한다.
작두바우산(303m) 오봉리 효촌 동쪽 산이다.
노적봉(385m) 오봉리 조치 서쪽에 있다.
매봉(431.2m) 오봉리 아침재 북서쪽에 있는 산이다.
호두날 오봉리 아침재 북서쪽에 있는 산이다.
차일봉(615m, 채알봉) 왕방리 판이 남쪽에 있다.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와 경계를 이룬다. 박달재와 구수재를 양쪽에 끼고 있다.
나발봉(561m) 왕방리 판이 남쪽으로 산과 구수재 사이에 있다.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와 경계를 이룬다.
오봉산(625m) 왕방리 원증이 남쪽에 있다.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와 경계를 이룬다. 당재와 중재를 양쪽에 끼고 있다. 오봉귀소혈이 있다고 전해온다.
대판이봉(803.5m) 왕방리 판이의 북쪽으로 구름재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산줄기에 있다.
안창봉(647m) 왕방리 판이봉과 사근이 중간 지점에 있다.
깃대봉(597m) ② 왕방리 불당골 북쪽에 있다. 일제강점기 측량을 하면서 깃 를 꽂아 놓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봉우리가 많다.
멍덕봉(507m) 왕방리 원왕방 동북쪽에 있다. 멍덕봉(507m)과 배바우를 연결하는 줄을 매고 당겼을 때 배바우가 뜨면 왕방리의 여산송씨들이 발복한다는 얘기가 전한다.
당앞산 왕방리 안산 동쪽에 있는 산이다.
도재이산 왕방리 원증이 북쪽에 있는 산이다.
된양지산 왕방이 서쪽에 있는 산이다.
섬바우산 왕방리 원증이 동쪽에 있는 산이다
안산 왕방리 남쪽에 있는 산이다.
진산 왕방리 안산 남쪽에 있는 산이다.
성산 월평리 성밑 북쪽에 있는 산이다.
장구봉 월평리 신촌 서쪽에 있는 산이다.
점안산(520.5m) 태평리 주암 서쪽에 있다.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와 경계를 이룬다.
주걱봉(507m) 태평리 주암 북쪽에 있다.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와 경계를 이룬다. 밥주걱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계란봉 태평리 주암 동남쪽에 있는 산이다.
두리봉 태평리 양암 서북쪽에 있는 산이다.
배바우안산 태평리 주암 남쪽에 있는 산이다.
줄바우 채계산 태평리 계란봉 동쪽에 있는 산이다. 바위가 늘어서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연이 많은 고갯峙길
한국의 지명 중에서 고개를 나타내는 고유어로 고개와 재가 있다. 한자로는 령嶺, 현峴, 치峙 등으로 표기되는데 산으로 가로막힌 두 지역을 사람이나 물자가 자유롭게 이동할 필요성에 의해 고개가 생겨났다. 또 험준한 산악지 에 있는 고개는 군사적 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하여 국경 검문소 등을 설치해 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토목 공사를 통해 터널을 건설하거나 산을 깎아내는 등의 방 법을 동원하여 과거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또 교통수단의 발달 로 많은 고개가 그 역할을 상실하여 일부를 제외하고는 인적이 거의 끊어졌고 산짐 승들의 이동로나 간혹 등산객들의 산행 길로 변모되었다.
군 간郡間 고갯길
지장치 성수리 상이암에서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원신암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고개 정상에서 성수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분기점이 된다.
꼬부랑재 성수리 사근이 쪽에서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 주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매봉재 성수리 갈골에서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 분토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서낭댕이재 성수리 갈골에서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 원남계로 넘어가는 고개다.
박달재 왕방리 판이에서 차일봉(채알봉) 동쪽 안부를 넘어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하동 고로 넘어가는 고개다. 큰 박달나무가 있었다 한다.
구수재(구소치) 왕방리 판이에서 차일봉 서쪽 능선을 넘어 장수군 산서면 백운리 상동고로 넘 어가는 고개다. 지형이 비둘기집 형국이라 하며 장수 산서 장을 보기 위해 장날이 면 백여 명이 넘나들던 고개였다 한다.
영무골재(영미치) 왕방리 판이에서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상동고로 넘어가는 고개다. 풀짐과 나뭇짐을 지고 넘던 고개였다 한다.
수문이고개 왕방리 물푸리골(수청동)에서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강촌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넙덕굴재(삼밧굴재) 왕방리 판이 아래쪽에서 태산을 넘어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삼밧굴로 넘어가는 고개다.
당재 왕방리 물푸리골에서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초장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중재 왕방리 원왕방에서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초장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대운이재(큰재) 태평리 운에서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 오정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운은 이성 계가 상이암으로 백일기도를 갈 때 구름이 맴돌며 머물 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고 이성계가 이 마을과 마이산을 넘어 등극하였다는 의미로 마을 앞에 왕령촌비 大王嶺村碑를 세웠다 한다. 국도 30호선이 개설되었다. 한편 백운으로 넘어가는 길 우측에 운현전적의혼추모비雲峴戰蹟義魂追慕碑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구 한 말 성수 삼봉리 출신인 정재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를 추모하는 비碑로 이곳에서 일본군 과 싸우다가 17명이나 되는 의병들이 일본군의 총에 맞아 순직했다. 2005년 10월 19일 성수면민들의 뜻을 모아 세운 추모비가 있는 곳이다.
솔터고개(솟터고개) 태평리 운에서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 원남계로 넘어가는 고개다.
면 간面間 고갯길
큰두목재 도인리 홍산터에서 관촌면 운수리 고덕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작은두목재 도인리 신흥촌(사기촌)에서 관촌면 운수리 고덕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신흥촌의 옛 지명은 사기촌으로 그릇을 굽던 곳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지명이 바뀌었다. 북 쪽 매봉산 아래에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쇠골고개 도인리 쇠옹골에서 관촌면 금성리 중금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개금실재 봉강리 덕재에서 지사면 군평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안하재 봉강리 신계월에서 지사면 안하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질마재 봉강리 덕재에서 둔남면 군평리 상군곡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두벅치고개 삼봉리 세동(금동)에서 관촌면 운수리 고덕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뱀바우고개(양암고개) 삼봉리 원삼봉에서 태평리 양암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배너미고개(느지목재) 삼봉리 신덕에서 관촌면 운수리 선동(선바우)로 넘어가는 고개다. 되 봉을 사이에 두고 선동재와 이웃해 있다.
선동재 삼봉리 신덕에서 관촌면 운수리 선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되대재로도 불린다.
구암리재(1) 삼봉리 신덕(양지삼봉)에서 관촌면 운수리 구암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지금은 임도가 개설되어 있다.
한치(큰재) 삼청리 구곡에서 지사면 안하리와 관기리 중간의 한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재를 넘으면 장수와 번암을 거쳐 지지리 골짜기를 거쳐 백운산 자락을 경유하여 경남 함양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또한 지사면 안하리 구역에 한치재 중간지점에 서 우측으로 가면 덕수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물이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며 이곳 에도 골짜기가 깊어 도적들이 많아 도적골도 있는 곳이다.
말치 성수면을 통하는 4차선 국도가 생기기 전 임실에서 오수로 가는 옛길이며 자동 차가 다닐 수 있는 유일한 큰 길이었다. 한편 오류리 판마을에서 임실읍 곡리 를 거쳐 임실읍으로 통하는 육로로도 사용하였다.
안경재(앵경뒷재) 오류리 원오류에서 임실읍 감성리 감성굴로 넘어가는 고개다.
아침재(조치) 오봉리 조치에서 지사면 관기리 장군바우로 넘어가는 고개다.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을 거둔 후 성수산 상이암으로 갈 때 관기리에서 잠을 자고 병사들과 함께 아침 일찍 이 고개를 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하며 조치(朝峙)라고 한자로 표기해서 부르기도 한다. 721호 지방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구암리재(2) 태평리 주암(배바우)에서 관촌면 운수리 구암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마을 간里間 고갯길
삽치颯峙 현재의 임실역에서 오수로 넘어가는 국도 17호선으로 임실읍 갈마리와 성수면 도인리의 접경 고개이다. 이곳은 조선시 통 별로統營別路라고 부르던 큰 고갯길 로 전주에서 경상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또한 삼례에서 전주를 경유 관촌과 임실 오수 남원과 운봉 진주 사천 통 까지 이어지는 로 다. 현재의 임 실역을 지나 삽치를 넘어 신촌에 이르고 다시 성수면 구곡마을을 경유하여 한치 재를 넘으면 지사면 관기리가 나온다. 다시 장수군 산서와 번암을 거쳐 지지리 골 짝을 지나 백운산 자락으로 넘으면 경남 함양 땅으로 당하게 되니 이 길이 남 중부를 이어준다. 삽치颯峙란 바람이 센 고개라는 말이다. 성수에서 임실이나 전주 로 가기 위하여 고개를 올라올 때 고개 정상에 닿으면 서북쪽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오기에 이곳을 삽치라고 한다. 주변에는 과거 도둑 떼들이 성행하던 때 도둑들 의 은신처인 도적골이 있는데 이곳에 임실군 공동묘지를 조성하여 어려운 사람들 이 묘를 쓰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불경재 도인리 신흥촌과 양지리 은행정이 사이에 있는 고개다. 복치명당이 있다고 전하며 지방도 721호선이 개설되었다.
돌고개 도인리 당당마을과 양지촌 사이에 있는 고개다.
백구동고개 도인리 후촌과 양지리 은행정이 사이에 있는 고개다.
계월고개 봉강리 구계월과 신계월 사이에 있는 고개다.
목너머고개 봉강리 덕재에서 셋보뜰로 넘어가는 고개다.
서낭굴고개 봉강리 구계월과 삼청리 구곡 사이에 있는 고개다.
성남이재 봉강리 덕재에서 모가울로 넘어가는 고개다.
아래삼박굴재 봉강리 아래삼바굴에서 작은산직촌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대밭재(세동고개) 삼봉리 세동(금동)과 원삼봉 사이에 있는 고개다.
도화동고개 ① 삼봉리 죽전(밭뜸)과 태평리 도화동 사이에 있는 고개다.
소남재이고개 삼봉리 세동에서 소남재이로 넘어가는 고개다.
삼봉고개 삼봉리 원삼봉과 태평리 양암 사이에 있는 고개다.
황새목재 삼봉리 죽전과 신덕 사이에 있는 고개다.
대산이고개 삼청리 천동과 양지리 부동 사이에 있는 고개다.
동산이고개 삼청리 삼청제 서쪽 동산이들에서 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등청재 삼청리 구곡과 봉강리 계월 사이에 있는 고개다.
몰골이고개 삼청리 천동과 오봉리 효촌 사이에 있는 고개다.
구름재 성수리 상이암과 왕방리 판이 사이에 있는 고개다.
너머도정이고개 성수리 수철과 왕방리 원증이 사이에 있는 고개다.
노리목고개 성수리 수철에서 갈골로 넘어가는 고개다.
북재 성수리 수철과 왕방리 원왕방 사이에 있는 고개다.
까끔골재 양지리 은행정이(행촌)와 도인리 신흥촌(사기점) 사이에 있는 고개다.
뒷골고개 양지리 학당에서 동남쪽의 뒷골로 넘어가는 고개다.
회초골고개 양지리 학당과 삼청리 천동 사이에 있는 고개다.
횟구덩재 양지리 학당 서쪽 횟구덩골에서 삼청리 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더고리재 왕방리 원왕방과 오봉리 조치 사이에 있는 고개다.
가래논골재 태평리 양암에서 가래논골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도화동고개 ② 태평리 도화동과 양암 사이에 있는 고개다.
신촌고개 태평리 양암과 삼봉리 세동 사이에 있는 고개다.
양천리고개 태평리 양암에서 매바위 남쪽 양천지들로 넘어가는 고개다.
진재 태평리 도화동에서 매바우로 내려가는 긴 고개다.
성수면의 임도林道
상대선 성수리 상이암 입구에서 시작하여 왕방리 판마을까지 이어지는 임도로 1986년 착공하여 구름재를 통하여 1988년에 완공한 연장 5,500m의 임도이다.
도고선 성수면 도인리 신흥촌에서 관촌면 고덕리 구간의 임도이다. 1992년에 개설한 임 도로 1,540m이다.
상이암선 성수리 갈골에서 시작하여 상이암 입구까지의 임도이며 1985년에 착공하여 1993 년에 완공된 임도로 연장 7,100m이다.
삼운선 성수면 삼봉리에서 관촌면 운수리 구간의 임도이다. 연장 1,000m로 1994년도에 개설한 임도이다.
왕대선 왕방마을에서 판마을까지 이어지는 임도로 1996년에 착공하여 1997년에 완공 한 5,410m의 임도이다.
관삼선 성수면 삼청리에서 지사면 관기리 한치를 넘는 임도이며 1996년에 착공하여 199 8년에 완공한 임도로 연장 2,600m이다.
봉삼선 성수면 삼청리에서 봉강리 구간의 임도이며 1997년에 착공하여 1999년에 완공한 임도로 연장 5,880m이다.
태성선 성수리와 태평리를 잇는 임도로 2001년에 착공하여 2003년에 완공한 임도이며 연장 2,480m이다.
성수면의 하천수계는 오수천獒樹川의 지류인 둔남천屯南川과 성수천聖壽川, 삼봉천 三峯川 그리고 섬진강 본류인 오원천으로 흘러드는 도인천道引川의 수계권으로 나뉜 다. 그러나 부분은 오수천 수계권이며 서북쪽 일부지역이 오원천의 지류인 도인 천은 임실읍 금성리 앞에서 여러 지류가 합류되고 용은마을 앞과 관촌 용산리를 거쳐 신평면 창인리에서 오원천과 합류하여 섬진강으로 흐른다.
상이암에서 발원한 둔남천屯南川
성수산의 상이암 북쪽 골짜기에서 시작되어 성수리 52번지 선에서 둔남천이란 이름을 얻는다. 사근이를 지나 수철리에서 수천천을 합치고 성남저수지로 들어간다. 갈골천과 매골천이 직접 저수지로 들어와 합쳐진다. 성수교 아래에서 운재 쪽에서 흘러드는 운천을 합치는데 운천에는 주암천·양지천·태평천 등을 안 은 도화천·그리고 양암천이 합쳐져서 들어온다. 이어 제1오봉교 아래쪽에서 오봉 저수지를 거친 성수천을 합쳐 몸집을 불리고 양지리 은행정이 아래쪽에서 삼봉천 을 합쳐 다시 한 번 몸집을 불린다. 그리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오수천에 합쳐지 면서 역할을 접는다. 지방2급 하천으로 길이 17km, 유역면적 74.19㎢이다.
대판이에서 발원한 성수천聖壽川
구름재 남쪽으로 안창이골 상류에서 물길이 시작된다. 왕방리 1번지 선에서 성수천이란 이름을 얻고 서진하며 2개소의 사방댐을 거친다. 판이 위쪽 300여m 지점에는 높이 4m정도의 각시폭포가 나타나고 그 위쪽 산자락에는 수백 년 된 노 송 한 그루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대판이를 지난 물길은 물푸리골을 거쳐 불당골에서 흘러드는 원증천을 합친 후 원증이를 돌아 절골과 훈도골을 좌측에 두고 나아가는데 미선재들을 휘감고 도는 곳에 여산송씨 재실과 둔학정遯壑亭이 있다.
물길은 왕방리 원왕방에서 오봉저수지로 흘러드는데 왕방리는 이성계가 황산첩에서 승을 거둔 후 아침재를 넘어 상이암(옛 도선암)으로 갈 때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로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곳이라 하여 그르칠 왕枉 자에 찾을 방訪 자을 붙여 왕방리枉訪里라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북치소류지를 거쳐 흘러드는 북재천과 아침재에서 흘러내리는 조치천이 오봉저 수지로 직접 흘러든다. 저수지를 떠난 물길은 제2오봉교와 소충교를 지나고 오봉 리 효천 부근에서 둔남천에 합쳐지며 역할을 접는다. 지방2급 하천으로 길이 8km, 유역면적 15.37㎢이다.
고덕산에서 발원한 삼양천三陽川
삼봉리 위쪽 구암리재 남쪽 골짜기인 안골이 유로 시점이다. 사방댐을 지나 삼봉 리 1번지 선에서 삼봉천이란 이름을 얻고 삼양저수지를 거쳐 양지리 은행정이 아 래에서 둔남천에 합쳐진다. 지방2급 하천으로 길이 4km, 유역면적 5.61㎢이다.
홍산터에서 모아지는 도인천道引川
도인리 신흥촌의 북동쪽 작은두목재 아래에서 시작되어 도인저수지로 흘러든다. 양지촌과 당당리를 거치고 임실읍 두곡리 임실역 부근에서 오원천의 지천인 임실 천에 합쳐진다. 길이 4km, 유역면적 4.52㎢이다.
성수의 작은 하천 수철천 수철리 동쪽 윗골(성수리 132번지 선)에서 물길이 시작되어 둔남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919m²이다. 갈골천 성수리 갈골 동쪽 골짜기인 큰골(성수리 산62번지 선)에서 시작되어 성남저수지로 유입된다. 하천 연장 1,800m이다. 매골천 성수리 갈골 북쪽 골짜기(성수리 190번지 선)가 시점이다. 갈골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750m이다. 대운천 태평리 주암 북쪽 507m봉의 서남쪽 골짜기(태평리 198-1번지 선)가 시점이다. 매바위 부근에서 둔남천에 합쳐진다. 하천연장 2,725m이다. 매바우(306m)는 매 형상의 바위로 건너편에 있는 황새바우의 황새를 노리는 형국이라 한다. 주암천 태평리 주암 운치(태평리 198-1번지 선) 아래에서 시작되어 운천에 합쳐진다. 하천연장 759m이다. 양지천 삼봉산 동쪽 골짜기(태평리 263-3번지 선)가 시점이다. 운천에 합쳐진다. 하천연장 950m이다. 도화천 삼봉산 남쪽 골짜기(태평리 산195-2번지 선)가 시점이다. 도화동을 거치고 소류지인 도화제에 머물 다 운천에 합쳐진다. 도화동은 도화낙지명당이 있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도화제 아래에는 상주바위와 상여바위, 그리고 멍석 두세 장을 깔 수 있을 정도의 넓은 마당바위가 있다. 하천 연장 1,050m이다. 태평천 태평리 운 아래쪽 골짜기(태평리 287번지 선)가 시점이다. 도화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1,150m이다. 양암천 태평리 양암 동쪽 골짜기(태평리 867번지 선)가 시점이다. 둔남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970m이다. 원증천 왕방리 불당골 동쪽 골짜기(왕방리 산26번지 선)가 시점이다. 성수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1,050m이다. 북재천 왕방리 북재 아래쪽 북치제(왕방리 812 부근)에서 시작되어 오봉저수지로 흘러든다. 하천 연장 561m이다. 조치천 오봉리 조치 아래쪽(오봉리 산81-1 부근)에서 시작되어 오봉저수지로 흘러든다. 하천 연장 1,050m이다. 효촌천 오봉리 효촌 동쪽 골짜기에 있는 효촌제(오봉리 산23-2번지 선)에서 출발하여 제 2오봉교 아래에서 성수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600m이다. 고동천 양지리 곡촌의 북쪽 골짜기(양지리 산18번지 선)가 시점이다. 삼봉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900m이다. 신촌천 월평리 신촌 신촌제(월평리 839-1번지 선)에서 출발하여 신촌의 소충교 부근에서 둔남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1,270m이다. 삼월천 삼청리 구곡 동쪽 골짜기(삼청리 8번지 선)에서 출발하여 구곡을 거치고 월평교 위쪽 성산촌에서 둔남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3,908m이다. 수월천 월평리 물넘이 동남쪽 수월제 위쪽(월평리 산49-2번지 선)에서 출발하여 물넘이 북쪽에서 삼월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1,214m이다. 천동천 삼청리 천동(삼청리 420번지 선)에서 출발하여 천동제를 거치고 월평리에서 삼월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1,187m이다. 구계천 봉강리 구계월 동쪽 골짜기(봉강리 산15번지 선)가 시점이다. 구계월을 거쳐 오류교 상류에서에서 둔남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1,500m이다. 신계천 봉강리 신계월 동쪽 옥녀봉 자락(봉강 70번지 선)에서 출발한다. 신계월을 거치고 봉강리 부근에서 구계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750m이다. 동적천 옥녀봉 서남쪽 골짜기(봉강리 20번지 선)가 시점이다. 오덕교 하류에서 둔남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1,833m이다. 덕재천 봉강리 질마재(봉강리 산126번지 선)에서 시작된다. 덕재를 거쳐 봉강리에서 동적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1,843m이다. 오류천 오류리 원오류 서쪽 골짜기(오류리 산31번지 선)에서 시작된다. 원오류에서 국도 17호선을 건너서 둔남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1,000m이다. 대판천 오류리 판이 북쪽 골짜기(오류리 산49번지 선)에서 시작된다. 하말보로 들어와 둔남천에 합쳐진다. 하천 연장 800m이다. 쑥골천 도인리 홍산터(도인리 10번지 선)에서 시작되어 도인저수지로 들어간다. 하천 연 장 850m이다. 두목천 도인리 신흥촌 북서쪽 작은두목재 아래(도인리 841번지 선)에서 시작되어 도인저수지로 들어간다. 하천 연장 600m이다. 신흥천 도인리 신흥촌 북쪽 골짜기(도인리 산43번지 선)에서 시작되어 신흥촌을 거치고 도인저수지로 들어간다. 하천 연장 526m이다.
왕방계곡의 청정수 오봉저수지
왕방저수지로도 불리며 성수면 오봉리와 왕방리에 걸쳐 있다. 구름재에서 발원하는 성수천과 소하천인 원증천·북재천·조치천이 주 수원이다. 몽리면적 690ha, 유역면적 1,308ha, 만수면적 47ha, 저수량 423천㎥이다. 제방길이 290m에 높이 29m의 흙댐이다. 성수면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도수터널을 뚫어 지사면과 장수군 산서면 일원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오봉저수지에는 ‘배바우’라는 배 모양 바위가 물이 잠겨 있다. 지금도 물이 빠지면 물 위로 드러난다고 하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바위와 왕방리 뒷산인 멍덕봉(507m)에 줄을 매어 당겼을 때 배바우가 땅에서 뜨면 왕방리의 여산송씨들 이 발복한다고 한다. 또 멍덕봉이 등잔 형국으로 아래에 있는 왕방리가 등잔 밑이 라 하여 자손들이 크게 되지 못한다고 알려져 이사를 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진 다.
상이암에서 흐르다가 멈춘 성남저수지
성수면 성수리와 태평리에 걸쳐 있다. 상이암 쪽에서 발원하는 둔남천과 소하천인 수천천·갈골천이 주 수원이다. 몽리면적 242ha, 유역면적 1,016ha, 만수면적 13ha, 저수량 784천 톤이다. 제방길이 140m, 높이 23.3m의 흙댐이다.
이곳 저수지는 성수들을 적시고 오수 봉천 지구와 하류지역인 오산까지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주요 저수지이다.
홍산터에서 모아지는 도인저수지
성수면 도인리 신흥촌 아래에 있다. 소하천인 쑥골천·두목천·신흥천이 주 수 원이다. 몽리면적 45ha·유역면적 136ha·만수면적 6ha·저수량 128천 톤이다. 제 방높이 97m, 폭 9.8m의 흙댐이다.
고덕산에서 시작된 삼양저수지
성수면 삼봉리 원삼봉 서편에 있다. 고덕산과 삼봉산 자락이 주 수원이다. 몽리면적 55ha, 유역면적 265ha, 만수면적 5ha, 저수량 196천 톤이다. 제방길이 147m, 높이 11.1m의 흙댐이다.
성수면의 작은 저수지 애곡제 성수면 도인리 당당이 뒤쪽(북쪽) 골짜기에 있다. 1944년에 준공되었다. 몽리면적 0.5ha·유역면적 0.4ha·만수면적 0.23ha·저수량 1.8천 톤이다. 제방길이 59m, 높이 4m의 흙댐이다. 외야제 성수면 도인리 양지촌과 당당이 중간 지점에서 남동쪽 골짜기에 있다. 1944년에 준공되었으며 몽리면적 2.5ha·유역면적 2.1ha·만수면적 0.4ha·저수량 8.9천 톤 이다. 제방길이 68m, 높이 4m의 흙댐이다. 신흥제 성수면 도인리 신흥촌와 양지리 은행정이 중간에 있다. 1960년에 준공되었으며 몽리면적 2.5ha·유역면적 2.2ha·만수면적 0.27ha·저수량 6.9천 톤이다. 제방길 이 53m, 높이 4m의 흙댐이다. 부동제 성수면 양지리 부동과 천동의 중간 길가에 있다. 1944년에 준공되었으며 몽리면적 1.5ha·유역면적 1.3ha·만수면적 0.4ha·저수량 5.3천 톤이다. 제방길이 50m, 높이 4m의 흙댐이다. 삼봉제 성수면 삼봉리 밭뜸 동쪽 골짜기에 있다. 포강이라고도 하며 물레방아가 있었 다고 한다. 1944년에 준공되었는데 몽리면적 3.7ha·유역면적 3.3ha·만수면적 0.1 5ha·저수량 3.2천 톤이다. 제방길이 70m, 높이 6m의 흙댐이다. 금동제 성수면 삼봉리 금동에 있다. 1944년에 준공되었으며 몽리면적 2.0ha·유역면적 1.8ha·만수면적 0.68ha·저수량 3.6천 톤이다. 제방길이 79m, 높이 4m의 흙댐이다. 도화제 성수면 태평리 도화동에 있다. 1944년에 준공되었으며 몽리면적 2.0ha·유역면 적 1.7ha·만수면적 0.88ha·저수량 13.6천 톤이다. 제방길이 71m, 높이 5m의 흙댐 이다. 대덕제 성수면 성수리 성수산자연휴양림 주차장 북서쪽 골짜기에 있다. 1969년에 준공되었으며 몽리면적 2.8ha·유역면적 2.2ha·만수면적 0.51ha·저수량 10천 톤이다. 제방길이 56m, 높이 6m의 흙댐이다. 북치제 성수면 왕방리와 북재 사이의 길가에 있다. 1969년에 준공되었으며 몽리면적 1.2 ha·유역면적 0.8ha·만수면적 0.4ha·저수량 10천 톤이다. 제방길이 73m, 높이 6 m의 흙댐이다. 조치제 성수면 오봉리 조치마을과 아침재 중간의 좌측 골짜기에 있다. 1960년에 준공되었으며 몽리면적 1.5ka·유역면적 1.2ha·만수면적 0.6ha·저수량 5.3천 톤이다. 제방길이 50m, 높이 4m의 흙댐이다. 효촌제 성수면 오봉리 효촌 동쪽 골짜기에 있다. 1943년에 준공되었으며 몽리면적이 3.0 ha·유역면적 2.4ha·만수면적 0.74ha·저수량 10.7천 톤이다. 제방길이 78m, 높이 6m의 흙댐이다. 삼청제 성수면 삼청리 구곡 북쪽에 있다. 1942년에 준공되었으며 몽리면적 15.0ha·유역면적 14.2ha·만수면적 1.20ha·저수량 53.3천 톤이다. 제방길이 100m, 높이 8m의 흙댐이다. 천동제 성수면 삼청리 천동 서쪽에 있다. 1944년에 준공되었으며 몽리면적 7.0ha·유역면 적 6.5ha·만수면적 0.76ha·저수량 27.9천 톤이다. 제방길이 97m, 높이 6m의 흙댐 이다. 구곡제 성수면 삼청리 구곡 동남쪽 골짜기에 있다. 한치재에서 물길이 흘러든다. 1958년 에 준공되었으며 몽리면적 3.5ha·유역면적 3.2ha·만수면적 0.40ha·저수량 12.4 천 톤이다. 제방길이 74m, 높이 6m의 흙댐이다. 신촌제 성수면 월평리에 있다. 1944년에 준공되었다. 몽리면적 1.5ha·유역면적 1.3ha·만수면적 0.56ha·저수량 5.3천 톤, 제방길이 84m, 높이 5m의 흙댐이다. 수월제 성수면 월평리에 있다. 1944년에 준공되었다. 몽리면적 4.4ha·유역면적 3.9ha·만수면적 0.60ha·저수량 14.9천 톤·제방길이 91m·높이 4m의 흙댐이다. 계곡제 성수면 봉강리 덕재 동쪽 골짜기에 있다. 덕재산 줄기가 주 수원이다. 1969년에 준공되었으며 몽리면적 4.4ha·유역면적 3.9ha·만수면적 0.80ha·저수량 15.5천 톤이다. 제방길이 77m, 높이 6m의 흙댐이다.
생명수의 역할을 한 작은 보洑
둔남천 수계(14개소) 수천·사지·성수·유천·오암·성남·하배 ·석현·신정·석천·월평·월굴·오류·하말보
삼봉천 수계(3개소) 사지·성수·양지
도인천 수계(3개소) 도인1·도인2·슬
고속도로高速道路
전주―광양 간 고속도로(고속국도 27호선)가 성수면의 서쪽 지역을 지난다. 도인리 에 임실IC가 설치되어 원활한 교통체계를 구축하였으며 고속도로는 성수면 석현·신 촌·구곡·계월·덕치마을을 통과하는 고속도로이다. 이 고속도로는 임실군 발전은 물론 전라북도 동부권 전 지역에 큰 발전의 구심점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주요도 로이다.
일반국도一般國道
국도 17호선 전남 여수에서 경기 용인을 잇는 국도다. 남원·오수·성수·임실·관촌을 거쳐 전주를 지나간다. 이 도로는 전주―광양 간 고속도로를 연결하고 있으며 성수면 서부지역을 흐르는 둔남천을 따라 판·오류리·월굴·성저·신촌을 통과한다. 멀리는 진안군 백운면으로도 연결된다.
국도 30호선 전북 부안과 구광역시를 연결하는 도로다. 정읍시 신태인·태인·칠보를 거쳐 서 임실군 강진으로 들어선다. 임실읍을 지나 갈마육교에서 국도 17호선에 합쳐졌 다가 성수면 월평리 신촌에서 분기되어 성수 소재지를 통과하고 운재를 지나 진 안군 백운면으로 넘어간다. 이 도로는 전주 광양 간 고속도로와 연결되며 진안 서 부지역 사람들이 통행하는 중요한 도로다.
지방도
지방도 721호선 국도 19호선에서 분기되어 남원시 보절면과 장수군 산서면을 지나고 아침재朝峙를 넘어 성수면으로 들어온다. 오봉저수지를 지나 효촌 삼거리에서 국도 30호선에 이어진다. 성수면 소재지인 양지리 학당과 도인리 신흥촌을 거쳐서 진안군 성수면 좌산리까지 이어진다.
지방도 742호선 도인리 신흥촌에서 임실읍 갈마육교까지 이어진다. 도인리의 양지촌과 당당이를 지난다.
군도郡道
10호선 오봉리 조치에서 삼청리 구곡·봉강리 구계월·오류리를 거쳐 임실읍 정월리까 지 이어진다. 총 연장 10.6km이다.
14호선 오봉리 조치마을에서 왕방리의 원왕방·원증이·판이를 거치고 구름재에서 상이암·수천리·지암을 지나 국도30호선에 이어진다. 총 연장 14.2km이다.
35호선 태평리 243-32번지상의 국도 30호선에서 시작하여 운과 도화동을 지나고, 삼봉리 밭뜸·양지리 부동·삼청리 구곡을 거치고 한치재를 넘어 지사면 계산리까지 이어진다. 총 연장 14.2km이다.
면도面道
왕수선(성수 103호) 수철리에서 북재를 넘어 왕방리 원왕방까지 이어지는 도로다. 총 연장 4.2km이다.
태구선(성수 104호) 태평리 주암 서쪽 국도 30호선에서 시작하여 관촌면 운수리 구암 경계까지 이어지는 도로다. 총 연장 0.4km이다.
리도(里道 : 13개 노선, 24.9km)
학후선 (은행정이~양지촌 1.3km) 평신선 (평지~신덕 2.8km) 신수선 (신촌~수월 2.8km) 석비선 (석현~비슬 2.9km) 월감선 (월평~감성 1.3km) 평천선 (평지~천동 2.4km) 대운선 (운 0.7km) 태도선 (태평리~도화 1.5km) 주암선 (태평리~주암 1.5km) 월구선 (수월~구곡 1.8km) 태삼선 (태평리~삼봉리 1.5km) 오안선 (봉강~계월 2.0km) 오덕선 (오류리~봉강리 2.4km)
농로(農路 : 12개 노선, 23.8km)
오대선 (원오류~월굴이 4.5km) 봉덕선 (신계월~덕재 2.6) 조구선 (조치~구곡 2.3km) 평원선 (오봉리~원삼봉 1.2km) 태성선 (태평리~성수리 2.1km) 신구선 (신촌~구곡 1.1km) 신부선 (신촌~부동 1.8km) 원암선 (원중이~성수리 1.6km) 지북선 (지암~북치 0.8km) 상갈선 (수철리~갈골 3.7km) 봉월선 (구계월~월평 0.8km) 덕재선 (봉강리 1.3km)
국가 철도鐵道
전라선(익산 - 여수)의 임실역과 봉천역 사이의 임실터널 구간(임실읍 갈마육 교 부근 ~ 오류리 판이)이 성수면 서부지역을 지난다. 익산에서 여수까지 총 185. 8km이다. 지금은 전라선 복선전철화사업이 지난 2002년부터 착공하여 2012년 초 에 완공되었다.
행정의 중심 성수면사무소
백제시대에는 운수현의 일부 고 고려시 에는 남원부 관 할의 임실현이었다. 조선 초기 에는 임실현에 속하였으며 태 종 13년에는 임실군의 상동上東 과 하동下東면이었다. 일제강점 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에 성수면이라고 정하고 11개 법정리를 관할하였으며 1972년에 21개 행정리와 57개 반을 편성하여 오늘에 이르 고 있다.
『임실군지』에서 살펴보면 성수면의 면적은 58㎢로 임실군의 10%를 차지하며 산 림이 77%로 산악이 중첩된 반면 농경지는 13%로 협소하고 동쪽은 체로 높고 험 하며 서남쪽은 약간 낮은 편이다. 해발 200m 내외의 중산간지 로 농업이 주종을 이룬다. 성수산과 오봉산이 노령산맥의 주봉으로 소분지小盆地를 형성하고 있고 성 남제와 오봉제는 수자원이 풍부하여 성수면·오수면·지사면·장수 산서면 등 4개 면의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또한 자연환경이 수려하고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등산객과 낚시 동호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이석용 의병장과 28의 사가 배출된 충효의 고장이기도 하다. 팔공산에서부터 이어온 성수산을 주봉으로 하여 성수면은 지리적으로 임실군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음으로 상동上東 하동下東을 합해 동면東面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성수면에 위치한 성수산은 임실의 명산이며 해 발 876m로 산세가 좋아 사철을 두고 경관을 자랑하며 휴양림으로서도 큰 몫을 담당 하고 있다. 면사무소 청사는 당초 양지리 267-10번지에 위치하 는데 1990년에 1억 5천만 원을 들여 연 건평 481㎡로 철근콘크리트 2층 구조로 현 위치에 건립하였다.
2011년 7월 말 현재 성수면의 가구는 865세 이며 인구는 1,840명이고 그 중 남자는 935명, 여자는 905명으로 나타나 있다. 역 면장으로는 1919년 초 홍순양 면장 이후 1923년 심택순·1934년 양기현·1938년 이 중·5 송주행·이두옥·심길 순·홍한표·윤만석·10 조남희·성금동·김형곤·김상수·성금동, 윤재학·이 금철·이병환·이현우·한양교·20이진현·이기정·유문규·송기태·노두상· 이강연·이상노·유창원·28이형남·정인희·심형만·김웅식·전도술·조재 수·34 최성미·송존섭·김학성·37 정회석으로 이어지고 있다.
치안의 중심 성수파출소
성수파출소는 양지리 692-3 번지에 위치하며 연혁은 1909 년 1월 주재소로 발족되어 일 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과 더불 어 1945년 8월 15일 임실경찰 서 성수지서로 개칭되었다.
성수지서는 1948년 2·26사 건으로 건물이 소실되고 다시 건물을 지어 사용하였으나 1950년 12월에 6·25사변으로 인하여 다시 건물이 소실 되었다. 그 후인 1956년 8월 25일 새로운 청사를 지어 업무를 보다가 1991년 11월 5일 현 청사를 지어 사용하여 왔다. 성수지서는 1994년 12월 1일 성수파출소로 명 칭이 변경되어 사용하다가 국가의 시책에 따라 2003년 8월 1일자로 파출소가 통합 되어 명칭을 지구 로 변경하는 과정에 성수파출소는 오수지구 에 편입되고 성수 치안센터로 명칭을 바꾸어 1인의 근무자로 하여금 민원만 해결하는 업무를 수행하 고 있다.
한국전쟁과 성수지서 이야기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2·26사건 내용을 보면 미군정의 남한 민중들의 염원 을 묵살하고 남한 점령 정책에 한 항의의 표시이기도 했다. 이 사건은 제주도 4·3항쟁과 더불어 여순사건 그리고 전국 곳곳에 발생한 최 의 민족사적 비극이 었다. 성수에서는 나라가 불안정할 때 좌익·우익으로 나눠지면서 양민들이 회초 골에서 거사를 하여 2·26사건 때 지서를 불태웠다. 2월 26일 지서가 소실되었다. 지서를 불태운 사람은 주민들이었다. 좌익 사람들이 주민들을 강제로 모아 청년들 에게 창을 들게 하고 주민들과 청년들이 합류하여 지서를 파괴하는 데 동조하게 했다. 주민들은 강요에 못 이겨 살기 위해 참여했다. 지서 방화에 동조하지 않고 도망을 하거나 숨어 있던 주민들은 잡혀 끌려와 몰매를 맞았다. 지서에서 주동자를 찾아내라고 고문받다가 기절하면 주전자 물에 고춧가루를 풀어 코에다 붓곤 했다 고 한다. 그 당시 오봉리 평지삼거리(지금 박형주 씨 집터)에 살았던 이○○씨는 2·26사건 주동자 다. 이○○ 씨는 서울로 피신하여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동료가 수소문하여 찾아가 융숭한 접을 잘 받고 돌아와서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 당시 바로 체포되어 구형무소에서 징역 살다가 죽었다. 오봉리 평지 출생이신 박칠순(74) 씨의 증언이다. 그 당시 주민들을 동원해서 지서 앞에 보루 를 쌓게 했다. 보루 는 총을 보관하고 망을 보는 역할을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 인민군들을 쫓으면서 경찰들이 마구 총을 쏘 아 주민들도 피해를 보았다. 인민군들은 지금의 왕방리 북당골로 도망을 했다. 그 당시 성수면에 8사단이 들어와 인민군 소탕작전이 전개되었다. 경찰들은 마을 주민 들이 인민군들에게 동조했다고 줄줄이 묶어 구 면사무소로 끌고 가서 조사했다. 조사 가 끝나면 하천 건너편 작은 안터로 끌고가 총살했다고 한다. 그 당시 유행어가 있다. 집 밖으로 놀러 나가면 어른들은 ‘노랑 콩 맞을래’라는 은어가 있었는데 노랑콩은 총 알이다. 지서에서는 날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2·26사건 내용을 보면 미군정의 남한 민중들의 염원을 묵살하고 남한 점령 정책에 한 항의의 표시이기도 했다. 이 사건은 제주도 4·3항쟁과 더불어 여순사건 그리고 전국 곳곳에 발생한 최 의 민족사적 비극이 었다. 성수에서는 나라가 불안정할 때 좌익·우익으로 나눠지면서 양민들이 회초 골에서 거사하여 2·26사건 때 지서를 불태웠다.
6·25때 인민군들이 남한 어린이들에게 가르친 노래
①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국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 위에 역력히 비춰주는 거룩한 자국 아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② 빛나는 새 조선에 맑은 앞길이 새 희망도 넘쳐흘러 기세도 높은 우리들은 조선소년 조국의 아들 딸 가슴 펴고 내달려라 김 장군 따라 깃발을 흔들어라 소년단 깃발을 외쳐라 노래하자 소년단 만만세
③ 태백산맥 눈 내린다 총을 메어라 출진이다 눈보라는 밀림이나 마음속에 피 끓는다 높은 산을 넘어 넘어 눈에 묻혀 사라진 기를 들고 빨치산은 령을 내린다, 원수를 찾아 령을 내린다.
④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음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우리의 깃발을 복수의 끓는 피 용솟음친다. 반동테러에 쓰러진 동무 원수를 찾아서 떨치는 총칼 무찔러 나가자 인민유격대
이 노래는 성수면 오봉리 평지가 고향이신 77세 박칠순 할머니가 어렸을 때 배웠던 것을 기억하여 옮긴 것이며 이 노래 외에도 몇 곡을 배웠다고 한다.
인민군들은 아이들을 모아서 노래를 가르치다가 미군의 폭격기를 피해서 도화동 산속 제각(지금의 윤씨 재실 추모재)까지 끌고 갔다. 가지 않으려고 도망하거나 숨으면 기어코 찾아내어 때리며 끌고 가서 노래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 당시 박칠 순 씨는 12세 다며 기억을 더듬어 가사를 찾았다. 인민군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자 박칠순 씨네 도장(광)을 뒤졌다. 그러나 먹을 만한 것이 나오지 않자 외양간에 매어 둔 큰 소를 몰고 왕방리 북당골로 들어가 잡아서 먹었다고 한다. 박월봉(사망, 박칠 순씨 아버지) 씨는 군과 경찰이 인민군 토벌작전에 사용할 탄환 짐을 지고 왕방리 로 들어갔는데 3일 동안 내려오지 않자 가족들은 인민군들이 죽 을거라고 했는데 사흘이 지나서 해거름에 소뼈와 고기를 주워 지게에 짊어지고 내려왔다고 한다. 소고기는 박칠순 씨네 소 다고 한다. 그 당시 왕방리 북당골에는 인근 마을 주민 들을 몰아다 수없이 죽 다고 했다. 빨치산들이 잡으러 오면 낮에는 미리 산으로 피신하고 있다가 저녁에 조용해지면 다시 내려오곤 했다. 박칠순 씨는 어린 시절 오봉리 평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당시의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지역경제의 중심 임실농협 성수지점
성수농협은 1965년 11월 25일 11개 이동조합을 합병하여 성수농협을 설립했다. 1972년 7월 15일 임실군조합으로부터 비료업무를 이관받았고 1973년 8월 15일 임 실군조합으로부터 업무 전반을 이관받았다. 그 후 1974년 10월 27일 종합시설을 준공하고 이어 단위농협으로 운영하여 왔다.
그 후 농촌의 인구감소 에 따른 조합원 감소로 인 하여 합병의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1999년 2월 20일 임실농협에 흡수 합병되어 임실농협성수지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7년 2월 28일에는 임실농협성수지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재에 이르며 조합원 수는 584명이다.
역대 조합장은 초대에 조남희(1969. 6. 15.)씨이며, 2 박춘근(1972. 2. 19.) 3 이강섭(1975. 6. 9.), 4 이강섭(1978. 6. 10.) 5 이강섭(1981. 6. 10.)씨가 하였으 며, 6 최규선(1985. 5. 13.), 7 박용운(1988. 6. 1.) 8 박용운(1990. 2. 23.), 9 박용운(1994. 2. 24.), 10 박용운(1998. 2. 24.)씨가(4 ) 운 해 오다가 합병 후 임실농협 조합장에 이재근(1998. 3. 9) 씨 는데 임기를 마친 후 다시 이재근(2002. 3. 9.) 조합장이 재선되었으며 다음은 박양현(2006. 3. 9.) 조합장이 선출되어 임기 를 마치고 다시 이재근(2010. 3. 9.) 조합장이 당선되어 재직 중이다. 임실농협 성수 지점의 농업 관련 작목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소통의 주역 성수우체국
정보통신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중앙행정기관으로 일제강점기 침탈당해온 우편 업무는 1945년 8·15해방 후 미 군정청 체신국에 의해 재개되었고 1948년 8월 정부 수립 후 체신부가 발족되면서 통신주권이 회복되었다. 1961년부터 전파에 관한 사 무를 함께 관장해왔으며 이후 1982년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발족되면서 통신업무가 분리되었다. 1983년에는 체신예금·보험 관련 업무가 신설되었으며 점차 정보통신 의 가치가 중요시되는 시 적 흐름에 따라 1994년 12월 23일 정보통신부로 개편되 어 기존의 우편업무는 물론 정보통신 전반의 업무까지 통합 관장하게 되었다.
성수우체국은 사설우체국으로서 1964년 12월 22일 개국하여 초 심병 (沈炳大) 국장이 운영하면서 1965년 10월 5일 전신전화 업무를 개시했다. 1971년 9월 27일 전화교환 업무를 개시하면서 타지에서 전화가 오면 받을 수 있고 전화를 할 수도 있었다. 당시 소재지 권에서는 개인의 전화가 있었지만 마을단위에는 전화가 없어 힘이 들었고 그 후 마을단위에 한 씩 전화가 가설되면서 농촌에서도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이때 수신된 전화는 마을 스피커를 통해 전화받으라고 방송을 하면 일을 하다가도 전화를 받으러 왔었다. 1987년 6월 2일 전화광역화로 교환업무가 폐지되고 디지털 시 로 앞서 가면서 교환원 없이도 바로 전화를 집에서도 할 수 있도록 발전하였다. 1990년 2월 19일 온라인 업무가 개시되면서 공과금 및 각종 업무를 취급하였다. 편지를 배달하는 업무도 그 전에는 성수우체국에 싣고 온 편지 를 관내에서 배달했지만 20 00년 7월 1일부터 집배 광역 화(집배원임실우체국근무) 사업에 의하여 임실우체국 으로 이관됨에 따라 집배업 무를 임실우체국에서 주관 하고 있다. 제1 심병 국 장은 정년퇴임을 하고 2003년 1월 1일자로 제2 심희정(沈歖靜) 국장이 발령되어 우체국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농가소득의 길잡이 농업인상담소
임실군 농업기술센터 성수상담소는 1975년 1월에 임실군농촌지도소 성수지소를 설치한 데서 시작되었다. 최초 이 춘 지소장 외 두 명이 근무하면서 성수면 농촌지 도사업을 현지에서 직접 지도에 임했다. 본 건물은 성수면 양지리 1083-228번지인 과거 시장이 있었던 곳에 1977년 3월 28일 문을 열었으며 그동안 4H활동과 농촌계 몽운동을 실천하면서 농촌에 꿈을 심어주고 주요 소득작물 재배로 소득을 얻을 수 있도록 지도에 힘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농시설재배 교육과 농촌경제 지도사업을 펼치면서 농촌을 이어나갈 후계자들을 육성하였다. 그러나 1989년 4월 6일 농촌지 도소 성수지소를 폐지하고 지도소 본소에 통합하여 지도사업을 운영하였으나 현실 에 맞지 않는 안이한 정책으로 일관되어 이를 다시 환원할 수밖에 없었기에 1992년 4월 임실군농촌지도소 성수농민상담소라고 명칭을 바꾸어 설치함으로써 상담소장 한 명을 배치하여 지소 폐지에 따른 농촌농업인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있다.
농업인상담소 주요 업무는 농업인 상담 및 현지순회 농업기술 지도와 농업인 교 육 및 학습단체 조직 육성·유관기관 및 농업인단체 업무 협조·시범사업 상농 가 추천 및 사업추진 지도·기상재해 등으로 인한 농․축산물 피해 예방 및 재해 시 신속한 처·기타 성수지역의 농촌지도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다. 현재는 2006 년 5월 임실군 농업기술센터 각 지소 운 조례를 제정하여 명실공히 면단위 농촌 지도행정을 모두 맡아 하고 있다.
농업인상담소 주요 업무 ▪ 농업인 상담 및 현지순회 농업기술 지도 ▪ 농업인 교육 및 학습단체 조직 육성 ▪ 유관기관 및 농업인단체 업무 협조 ▪ 시범사업 상농가 추천 및 사업추진 지도 ▪ 기상재해 등으로 인한 농․축산물 피해 예방 및 재해 시 신속한 대처 ▪ 기타 성수지역의 농촌지도사업 전개 등이다.
건강지킴이 보건지소와 진료소
보건지소는 1967년 3월 27 일 성수면 양지리 781-1번지 에 처음으로 세워져 면민들 의 복지증진에 크게 기여하 여 오다가 노령인구 증가와 이에 따른 수요가 증 되고 또한 건물의 노후화와 장소 협소로 양지리 1083번지에 새로운 건물을 지어 2009년 2월 20일 이전했다. 면민들의 건강을 돌보는 보건지소는 맞춤형 보건사업으로 건강증진사업은 물론 예방의약 및 방역사업을 주 업무로 하 고 있다. 따라서 정부의 복지정책 확 와 국민건강증진의 일환으로 1982년 10월 1일에 오봉리와 1983년 3월 1일에 오류리에 보건진료소를 개설하여 진료를 하다가 보건지소와의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오봉진료소는 1997년 7월 30일자로 폐쇄하 고 현재 오류보건진료소만 운영하고 있는데 관할 구역은 오류·판·계월, 덕 치·성저·월굴·수월마을로 많은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역사가 깊은 성수신용협동조합
『임실군지』(1997년 발행)에 의하면 성수신용협동조합은 1975년 9월 10일 조합원 42명이 2백1십만 원의 자산으로 조합을 창립하였다. 낙농을 하면서 양복점을 경 하던 백한기 씨가 지정환 신부와 심상봉 목사를 초빙하여 성수교회에서 신협소개 교육을 한 것이 이 지역에 신 협운동이 알려지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건이 무르 익지 않아 부진하던 중 1975 년 봄 윤재희 상무가 협동조 합교육 연구원 교육을 마치고 돌아와서 독자적인 신협을 준 비하기 시작하였다. 초 이사장에 백한기 씨와 부이사장에 송기전 씨·이사에 홍한표·김경구·이기열·임 종식·윤재희·감사에 이기방·송주봉·홍윤표 씨가 선임되고 실무책임은 윤재희 씨가 맡았다.
그 당시 백한기 씨는 자신의 양복점 2층을 사무실로 제공하 고, 그 후에는 이기 열 씨가 사무실을 제공하였다. 또한 심상봉 목사가 성수교회로 부임해 온 후 마을 을 순회하며 신협 소개 교육에 힘쓴 결과 많은 사람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1976년 2월 동부신협에 가입되어 있던 28명의 출자금 60여만 원이 통합되면서 재무부 인가 기준이 확보되어 동년 4월 7일 재무부인가 7-60호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 이후로 조합원과 자산이 계속 늘어나 조합원은 1995년 672명이며 자산이 21억 원이 넘게 증가하였다. 성수신용협동조합은 지역사회 개발과 의료사업 등을 통한 조합원들의 복지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