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용(李錫庸)은 字가 경항(敬恒)이며, 호가 정재(靜齋)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화산 봉선(華山 鳳善)이며, 어머니는 조양임씨(兆陽林氏)이다. 그는 1878년(고종 15년) 음력 11월 29일 지금의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죽전마을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이석용(李錫庸) 존영
그의 아버지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다니면서 치성을 드렸는데 어느 날 밤 폭우가 쏟아지며 번갯불이 왼쪽 다리를 내리치는 꿈을 꾸고 그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날의 일진(日辰)이 갑술(甲戌)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명(兒名)을 갑술(甲戌)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범상치 않아 옛 충신열사(忠臣烈士)의 수절한 이야기를 들을 적에는 비분강개하였으며 때로는 현연(泫然)히 눈물을 흘리고 무언가 생각에 빠져 있기도 하였다. 또한 총명하여 10세 미만으로 문리(文理)에 통하여 사람들을 놀라게하였으며 17, 18세에 이미 학문이 크게 진보되었다고 한다.
그해 그는 부안김씨에게 장가드니 그의 부인은 겸재 관술(謙齋 觀述)의 딸이다. 그는 장인 겸재의 높은 학덕에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1895년(고종 32년) 8월 왜적들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다음 조선의 조정을 친일내각으로 구성하여 국권(國權)을 탈취하고자 혈안이 되어 자기의 세력을 부식(扶植)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를 지켜본 그는 비분(悲憤)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세정(世情)을 살피고 더 높은 학식을 넓혀 구국의 방책을 얻기 위해 당대에 석학(碩學)이자 志士로 이름 있는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심석 송병순(心石 宋秉珣), 입재 송근수(立齋 宋近洙),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간재 전우(艮齋 田愚), 운람 정봉현(雲籃 鄭鳳鉉), 최계남(崔溪南), 허남려(許南藜), 애산 정재규(艾山 鄭載圭), 면우 곽종석(勉宇 郭鍾錫),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등을 두루 찾아 학문을 논하고 또한 구국이념에 공감하였다.
이해 11월 왜적들이 지금까지 전통적 풍습으로 내려오던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그는 “하늘이 동방예의지국을 버리는구나!” 라 말하고, 전고(前古)에 듣지도 못한 8월 국모시해의 참사를 아울러 생각할 때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1905년(광무 9년) 그의 나이 28세, 왜적은 고종황제를 위협하고 몇몇 친일대신(親日大臣)들을 앞잡이로 하여 소위 ‘을사5조약(乙巳五條約)’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국권은 이름 뿐 일본의 보호감독 아래 들게 되어 실제적으로는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소식이 전국에 전해지자 당시의 우국지사(憂國志士)들은 서울로 올라가 대한문(大漢門) 앞 광장에 짚자리를 깔고 5조약의 체결을 무효화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도 이때 여기에 참석하여 다른 우국지사들과 뜻을 함께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곳에 모여 호소하는 우국지사들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해산시켰다. 이때 일본의 그와 같은 행위를 보고 의분에 넘쳐, 우국지사 가운데에는 비운(悲運)에 처한 우리나라를 온 국민이 결속하여 회복할 것을 호소하며 자결(自決)한 사람도 있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과 싸워 그들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때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여 침탈의 야욕을 더욱 노골화하고 있었다.
1906년(광무 10년) 그는 미국공사에 서한을 보내 왜적의 간계로 망국에 직면하고 있는 한국의 실정을 만국공회가 있을 때 호소하여 위기에서 구원해 주기를 요청한 바 있다. 그 서한의 한 대목에 ‘천일(天日)은 위에 있고 신명(神明)은 곁에 있으며, 만국공법이 삼엄하게 밝은데, 간악한 왜노(倭奴)가 어찌 감히 우리 5백 년의 당당한 예의지국을 늑탈(勒奪)하겠는가?’ 하고 갈파(喝破)하였다.
그러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형편에 어떠한 묘책도 없었으니 오직 의병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때마침 면암 최익현이 거의(擧義)하려고 정읍군 태인면 종성리의 임병찬 처소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그해 3월 면암을 찾아 기의(起義)에 동참할 것을 약속하고 이에 일익이 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윤 4월 20일 순창에서 패전하여 면암 등이 체포되고 의군이 해산되자 그는 장차 자력에 의한 의병활동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석용은 자신의 고향인 임실 지방을 본거지로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과 싸울 준비를 하였다. 이때 나이 29세의 청년이었다.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1년 동안은 거사준비를 위하여 바쁘게 활동하였다. 그는 전주, 임실, 장수, 진안, 남원, 순창, 곡성, 거창, 함양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부지런히 동지를 규합하였다. 한편 그는 당시의 정부를 비롯하여 일본정부 앞으로 규탄문을 발송하고 전국의 동포에게 민족의 주권을 되찾자는 격문, 건의문, 호소문 등을 발송하였다.
광무 11년(1907년) 일본과 친일 대신들은 고종을 위협하여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주게 하였다. 마침내 순종이 왕위에 오르자 우리나라의 주권은 뿌리째 일본의 손아귀에 들게 되었고 순종은 허수아비와 같은 임금 자리만을 지켜야 했다. 즉 친일적인 대신들과 이토오히로부미는 각본에 따라 이해 7월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왜인들로 하여금 조선정부 요직의 고문을 맡게하는 등 모든 정책결정에 관여하게 하였다. 이에 의분을 참지 못한 그는 의병거의를 서둘렀다.
이해 8월 26일 그는 아버지 앞에 다음과 같이 하직 인사를 고하였다.
“지금 오랑캐 놈들이 도성 안에 가득 차 있어 임금과 신하는 처소를 잃어버린 지경에 이르렀사오며, 단군(檀君), 기자(箕子)가 베푼 풍교(風敎)는 요원(遙遠)해지고, 요순(堯舜)의 도학(道學)은 땅에 떨어졌사오니, 무릇 혈기 있는 사람이면 어찌 누구인들 역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을 생각이 없겠사옵니까? 다만 대의(大義)를 만천하에 펼치고자 하는 것이 원이오나 성공 여부는 예측할 바가 못 됩니다 … 감히 충성도 해보지 못하고 또한 효도도 해보지 못하였사온데 부모님 슬하를 떠나게 되오니 가련하오나 … 대의(大義)로써 은혜를 저버림은 어찌 인정상 차마 할 바이겠습니까. 두어 해를 지나지 않아서 돌아와 뵙게 될 것이온 즉 어린아이들이나 돌보아 주시고 행여 조석 간에 너무 기다리심으로써 화기를 손상시키지 마시옵기를 원하옵니다.”
아버지는 그의 하직인사를 듣고 ‘(나는)네가 본시 큰 뜻이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오늘에 어찌 억지로 말리겠느냐! 마땅히 모든 것을 조심해서 선영에게 욕이 되지 않게 할지니라.’ 하였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거의(擧義)에 대한 허락과 격려를 받았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고 모두 감격하였다. 그는 부모 곁을 떠나 다음 날 임실군 성수면(聖壽面) 상이암(上耳庵)에서 이미 규합된 의병동지 간부들과 만나 깊숙한 숲 속으로 들어가 하루 종일 거사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리고 모여 있던 의병들에게 ‘옛날부터 호걸들이 친척을 버리고 고향을 떠날 적에는 대개 다 장래의 영달을 희망하였거니와 나로 말하면 한갓 선비일 따름이라. 다만 대의를 만천하에 펴 보자는 것이지 성공 여부를 따질 바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라고 말한 뒤 다음과 같은 격중가(激衆歌)를 지어 의병들에게 부르게 하였다.
가을바람 소슬(秋風蕭瑟)하니 영웅(英雄)이 때를 만남(得意時)이라
장사(壯士)가 없을 소냐(업실 손야)? 구름같이(갓치) 모여(모야)든다
어화 우리 장사(壯士)들아 격중가(激衆歌)를 불러 보세(불러 보새)
한양성중(漢陽城中) 바라보니(바래보니) 원수(寃讎) 놈이 왜(倭)놈이요
원수(寃讎) 놈이 간신(奸臣)이라 삼천리(三千里) 우리 강산(江山)
오백년(五百年) 우리 종사(宗祀) 어찌(엇지)할까(가) 아마도 의병(義兵)을 일으켜(이러낵켜)
왜(倭)놈을 쫓아(쪼차)내고 간신(奸臣)을 타살(打殺)하여(야)
우리 금상(今上:임금) 봉안(奉安)하고 우리 백성 보전(百姓保全)하여
삼각산(三角山)이 숫돌 되고 한강수(漢江水) 띠 되도록
즐(질)기고 놀아 보세(새) 우리 대한(大韓) 만만세(萬萬歲)
그가 지은 <격중가>는 의병들의 사기를 십분 드높일 수 있었다. 또한 전의도 고무시킬 수 있었다. 다음날 야음을 틈타 총포와 철환을 삼봉에서 황사현으로 옮겼다. 그러나 용담에 있는 총과 탄환을 미처 운반해오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리하여 그 틈을 이용하여 이튿날 28일 선영을 찾아 고별제를 지내고 제문(祭文)을 지어 거사할 큰 뜻을 선영(先靈)에게 삼가 告하였다. 거사의 전야 9월 1일 삼봉 촌 부근의 종친들이 모여 문중 노인들이 그에게 타이르기를
“예로부터 독자는 부모를 봉양하도록 국법으로도 정하여 왔거늘, 하물며 그대는 삼대독자의 지중한 몸으로 국난을 구하러 죽음의 길을 가고자 하니 대의를 세우는 것도 좋지만 몸을 보전하여 가문을 이어감이 어떠한가?”
라 권하였으니 난세를 바로잡아 국권을 되찾고자 충의심에 불탄 그는 이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자세를 고쳐 정중히 말하기를
“세도에 아첨하여 만고의 국적(國賊)이 되는 것은 의기남아(義氣男兒)로서 취할 바 아니오니 이때 일어서지 않으면 언제 또 기회가 오겠습니까? 평생에 길러 온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모아 이 한 몸 국난(國難)에 던지고자 결심한 지 이미 오래이오니 부디 말리지 마시옵소서.”
하니 이와 같은 그의 비장한 각오에 모였던 종친들은 더 이상 말을 못한 채 숙연할 뿐이었다.
9월 2일 그는 참모들을 불러 의거를 논의하고 의병대의 이름을 ‘의병창의동맹(義兵倡義同盟)’이라 하였다. 그리고 모인 참모들에게
“옛날부터 兵을 일으키되 의로운 거사가 아니면 성사하지 못하고, 꾀하는 사람들이 청렴하지 못하면 오히려 화를 입고, 매사를 신중히 심사숙고하지 않으면 대사를 그르치기 쉬우니 그대 동지들은 이것을 가슴에 깊이 새겨 잠시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고 훈시하였다. 한편 그는 자신이 이끄는 의병단이 거의하기 전 가족들이 일본에게 장차 박해 당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가족들을 남원 오산리 학당촌(현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에 이주시켰다. 이곳에는 정재의 여동생(권진규의 자부)이 살고 있어 권진규(權晋奎 1860~1910)의 주선으로 이곳에 거처를 옮기고 수십 회의 왕래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사실이 왜경에 알려져 권진규의 가족들은 임실로 피신하였고 가옥은 왜경이 불을 질러 많은 자료가 소실되고 이로 인해 51세로 사망했다(淸蓮齋遺集 및 진규의 손자-권희철의 증언). 그리고 가산(家産) 등도 모두 이웃 친척들에게 뜻대로 사용하도록 하고 농작물은 마을 장정들에게 맡기었다.
가족과 가산을 정리한 그는 일단 9월 4일 운현(雲峴 : 지금의 대운 재)의 절정(絶頂)에 처음으로 진을 쳤다. 그날 밤 진안 석전리(石田里)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그 수가 20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마을 노인들은 그를 보자 “이제야 의병다운 의병을 볼 수 있겠구나.” 하면서 그의 의병모집을 적극 찬동하였다.
9월 5일 그는 의병들을 이끌고 백암리(白岩里 : 현 진안군 백운면 소재)를 출발, 홍도령(虹度嶺 : 장수군 산서면 백운리 홍적골)에 이르러 진을 가다듬은 뒤 격문(檄文)으로 대의(大義)를 들어 효유(曉諭)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장수 배룡리(排龍里)로 들어갔다. 당시 친일파인 일진회에 속해있던 자들이 장수 향교의 토지를 몰래 팔아먹었다는 풍문을 그곳에서 듣고 이른 새벽, 들어가 그들을 붙잡으려 하였으나 이미 낌새를 차리고 모두 남원으로 도망가고 없었다.
그는 이날 밤 진을 옮겨 6일 새벽 진안군 백운면 대전리(大田里)에 이르러 아침 식사를 풍족하게 한 뒤 조양촌(朝陽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선교사로 와 있던 미국인들이 그의 의병들을 환영해 주었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의병을 모으는 한편 방(榜)을 붙여 민심을 안정하게 하였다. 10일 마령면 좌포리(佐浦里)에서 일찍 조반을 마치고 백지곡(白芝谷)에 진을 친 뒤 임실, 관촌(館村)을 기습하였으나 이를 미리 탐지한 왜경들이 모조리 전주로 도망쳐서 허탕을 쳤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곳 저곳으로 진을 옮겨 가면서 의병활동을 진행하는 가운데 사방 열읍(列邑)에 격문을 띄우고, 마침내 9월 12일을 기하여 그 동안 모집하였던 모든 의병들을 마이산 남쪽 용암(龍岩)에 모이게 하고, 나무를 벌채(伐採)하여 단(壇)을 쌓은 뒤 ‘호남의병 창의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이라 크게 써서 깃발을 걸게 하였다. 이 제단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는 각각 기치(旗幟)를 세우게 하고, 기폭(旗幅)에는 ‘정기가(精氣歌), 단심가(丹心歌)는 문천상(文天祥)이 순절한 시시(柴市)와 정몽주(鄭夢周)가 절사(絶死)한 선죽교(善竹橋)와 함께 비춰 충렬(忠烈)의 소거를 같이 하네(竹橋柴市烈同聲).’라고 써 꽂아놓게 하였다. 이 자리에 모인 의병들에게는 의병창의(義兵倡義)라 수건에 써 머리에 동여매게 하였다.
이때 모인 의병은 모두 5백여 명에 달하였으며, 부근의 부모 형제와 장정들이 모여 주위 산봉우리에서 파수를 보았으니 이날의 거사를 성원하기 위해 모여든 민중들의 수까지 합하면 천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5백여 명의 의병을 정렬시켜 놓으니 그 우렁찬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왜병들이 그 광경을 하루 동안 계속하여 먼발치로 지켜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고천제(告天祭)가 끝나자 모든 의병들은 환호를 울리면서 그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의병대장에 추대된 그는 단상에 올라 먼저 엄숙하게 ‘동맹작사(同盟酌辭)’를 지어 낭독하였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굳게 맹세한 뒤, 다시 의병들이 지켜야할 약속인 ‘의진 약속(義陣 約束)’ 14개 조항과 ‘의령 십조(義令 十條)’라는 또 하나의 군규(軍規)를 제시하였다. 한편 그는 동맹의 결의를 다시 한 번 굳건히 하고 거사의 명분을 천지신명에게 밝히고자 서사문(誓師文)을 지어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서사문은 마치 제갈공명이 중원을 쳐들어갈 때 지은 출사표와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사문을 장엄하게 낭독한 뒤 그는 8도에 격문(檄文)을 보내 자신들의 의병거사를 널리 알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저지른 죄상(罪狀) 10조목(10條目)을 의병들에게 발표하였다.
이때 그의 의병 통솔 조직은 다음과 같다.
의병장(義兵將) 이석용(李錫庸) 선봉(先鋒) 박만화(朴萬華), 최덕일(崔德逸), 송판구(宋判九) 중군(中軍) 여주목(呂柱穆), 김운서(金雲瑞), 김성학(金成學) 후군(後軍) 김사범(金士範), 윤명선(尹明善), 전성학(全成鶴) 참모(參謀) 전해산(全海山), 한사국(韓士國), 이광삼(李光三) 총지휘(總指麾) 박갑쇠(朴甲釗), 곽자의(郭子儀), 임종문(林宗文) 연락(連絡) 홍윤무(洪允武), 박성무(朴成武), 윤병준(尹秉俊) 도로부장(道路副長) 김사원(金士元), 김공실(金公實), 김성율(金成慄) 보급(補給) 한규정(韓圭井), 박금동(朴金東), 박문국(朴文局) 운량(運糧) 오기열(吳琪烈), 조영국(趙榮國), 김학문(金學文) 기실(記室) 전해산(全海山), 한사국(韓士國)
의병 창의를 위한 고천제(告天祭)를 비롯한 모든 출동 준비행사, 곧 궐기대회가 모두 끝난 이튿날 9월 13일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진안 마령면 반월리에 이르러 아침을 마친 뒤 진안읍을 습격하기 위해 그의 의병대는 먼저 진안읍 앞산에 있는 우화정(羽化亭)에 본진(本陣)을 쳤다. 그 때 진안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때를 놓칠세라 집중 포화를 빠른 속도로 일제히 쏘아대니 왜적들은 손쓸 틈도 없이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하다가 왜군의 헌병대장 호리구찌겐지로는 왼팔에 총탄을 맞아 부러졌고 다른 왜병들은 옷마저 제대로 입지 못한 채 전주로 도망쳐 버렸다.
의병들은 왜병들이 남기고 간 군복, 양총, 장부, 이토히로부미가 내린 수첩, 돈, 기타 전리품을 많이 거두었으니 무려 20짐이나 되었다고 한다. 왜놈들이 진안에 들어와서 행정을 제 마음대로 한 지가 1년이 됨으로 그 동안의 문부(文簿)가 산더미 같고 가죽 끈이 수천 건이었다. 그는 읍민들을 불러 모아 놓고 왜놈들로부터 빼앗은 가죽 끈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왜놈들이 장차 이것으로 그대들의 부모와 처자를 묶어 갈 것이다.” 하니 뭇 사람이 모두 놀라며 그것들을 불 속에 던져 소각하였다.
또 우편물 취급소를 부수고 통역의 집에 있는 왜놈의 물건을 소각하고 전선을 끊어 버렸다. 이러는 동안 본대는 일진회를 비롯하여 왜놈들에게 아첨한 놈들을 잡아다가 엄중히 다스리고 양민들을 위로한 뒤 철수하였다. 의병들은 군율이 잘 시행되어 양민에게는 털끝만치도 피해가 없었으며, 격문을 만들어 사방으로 전달하였으므로 감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4일 아침 가치(歌峙)에 당도하여 술과 고기로 호군(犒軍)하고, 용담(龍潭) 심원사(深源寺)에 한참 주둔하다가 진을 옮겨 숭암사(崇巖寺)에 주둔하면서 의병장으로 호남, 영남, 호서를 누비며 활동하는 김동신(金東臣)의 의진이 가까운 운일암(雲日巖 현 진안군 주천면 소재)계곡에 둔(屯)을 치고 있었으므로 거기에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김동신의 의진이 떠난 뒤라 만나지 못하고 사령이 돌아왔다.
15일 김동신으로부터 사람을 보내 협진하자는 청이 왔다. 그는 자기의 의진도 형세가 고단함을 걱정하고 있던 터라 허락하였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재를 넘으니 또 김동신이 사람을 보내왔으므로 마침내 운장산 아래 대벌평(大筏坪)에서 진영을 합했는데 그 때 마침 정천(程川)에 왜놈이 이르렀다는 정보가 들어와 김동신의 군사가 이 말을 듣자 당황하여 겁을 내는 기색이었다. 그는 김동신 의진과 더불어 대사를 경영할 수 없음을 알고 빨리 대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선 진을 칠 장소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굳이 떠나자고 청했다. 그리하여 밤의 어둠을 타고 흐린 달빛에 산비탈의 나무를 휘어잡고 올라 운장산을 넘어 내원사(內源寺)로 들어갔다.
16일 새벽 일찍 일어나 두 부대가 진을 따로 하여 분담할 것을 김동신 대장에게 제안하니 불응하며 주인이 손인 자기를 왜 괄시하느냐고 힐책하였다. 그런데 합군하는데 대장을 누구로 추대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다. 용담 출신의 허(許)․양(梁) 두 사람이 김동신을 대장으로 추대할 것을 그에게 건의하였으나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유인 즉 진안에서 대패한 왜병들이 그냥 있지는 않을 것이며, 필경 전주에서 원군을 얻어 몇 배의 병력으로 반격해 올 것인데, 김동신이 그 사정을 모르고 가벼이 생각하여 함부로 군권(軍權)을 빼앗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즉 김동신은 허․양 두 사람을 부추겨 자신이 대장이 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말하기를
“만약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가면 호남 의병의 기세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대적할 곳이 많으면 힘이 분산되는지라 저놈들이 반드시 불리할 것이며, 진을 따로 하면 사방으로 횡행하여 군사를 수합할 수 있지만 진을 합치면 형세가 이 산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허울만 좋을 뿐이지 실속으로는 도리어 화가 되어 이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동일자 김동신 일기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이 부분은 좀 더 연구와 검토가 필요함을 느낀다.>
고 하였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 점괘(占卦)를 뽑아보니 ‘백수청산고자과처(白水靑山孤子寡妻)’라 나왔다. 이 점괘가 마음에 걸리어 그는 남몰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김동신과 의견이 피차 분분하여 반나절이 지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그는 자신의 의병을 지휘하여 “사세가 이미 급해졌다. 홀로 환난을 면할 수 없으니 그대들은 힘을 다하라.”고 말한 뒤 그의 군사가 적진에 나아가 왜놈 10여 명을 격살하였다.
이 때 김동신의 의병들은 겁이 나서 싸우지도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으나 그의 의병들은 힘을 다하여 싸웠으므로 처음에는 왜적들이 죽음을 피하기에 겨를이 없더니 의군 측에 원호하는 세력이 없음을 눈치채고 일제히 반격을 해 탄환이 비 오듯 하니 의군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 형세를 본 선봉장이자 포장(砲將)인 박만화(朴萬華)가 분을 억제하지 못하여 적에게 접근하여 왜병 두 명을 사살하고 적의 흉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나이 어린 동자(童子)의병 박철규(朴哲圭)와 허천석(許天錫)도 아깝게 전사하였다. 용감한 그들 총각 군사는 몸이 날래어 싸움마다 항상 앞장서고 기민한 행동으로 종종 왜병들을 현혹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싸움으로 군졸은 흩어지고 무기를 모두 잃는 고배를 마셨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골짜기 속으로 몸을 숨기어 피난해 온 마을 사람들과 섞였다가 왜놈이 수색할 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몸을 솟구쳐 험준한 산으로 올라가는데 육척(六尺) 단신을 숨길 곳이 없었다고 그는 그 때의 심정을 기록해 놓았다. 이 때 비로소 몸이 적에게 노출되므로 총탄이 좌우에 비 오듯 쏟아지는데 탄환이 다리와 볼기에 부딪쳤으나 멀리에서 날아온 탄환인지라 살을 뚫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산을 넘어 敗將의 몰골로 흩어졌던 군사들을 만났다. 그들은 서로 붙들고 울면서 “이 대장의 명을 듣지 않아 이런 참패를 당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한탄하였다. 이때 김동신의 의병들도 서로 마음이 이반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17일 최덕일이 마음 맞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와서 이 대장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말하였다.
18일 패장의 몸으로 잠깐 고향에 들르니 친구들이 와서 위로해 주었는데 참으로 면목이 없었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밤에 노동(蘆洞)을 지나다가 시 한 수를 지었다. 20일 칠봉(七峯)을 넘어 가는 길에 어머니를 뵙고 울었다. 아내가 부친 편지에 丁씨 집안으로 시집간 누이가 보낸 필낭(筆囊)을 아울러 받았다. 하직 인사를 하고 말씀하시기를
“나라를 위해 나선 사람은 감히 제 집을 위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옵고 모자의 은혜가 지극히 간절하오나 君臣의 의가 지엄하오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것만은 경홀(輕忽)히 할 수 없사옵니다.”
라고 하였다.
21일 그는 종적을 감추어 남원의 항곡(港谷)에 들렸다가 23일 장수 가현(嘉峴)에 들르니 박성수(朴聖洙 : 이대장의 부하)의 노친이 과실을 가지고 와서 서로 손을 붙들고 반겼다. 압계(鴨溪 : 지금의 산서면 학전리 압곡)의 대장간에서 양총을 수리하도록 사람을 보냈더니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24일 새벽 율천(栗川)을 출발하여 복령(複嶺)을 넘어 덕산에 들렸더니 산중의 부로(父老)들이 술을 가지고 와서 환영해 주었다.
25일 관 포수 10명이 절을 하며 말하기를 “휘하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하면서 돼지고기 등 음식을 대접하고 십리를 따라 온지라 그는 만나기를 후일에 미루고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시(魚柴)에 들르니 김동신의 산졸(散卒)들 약간 명이 오래 유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개나 닭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바로 거기를 떠나 26일 아침에 중현(中峴)에 이르러 정상에 진을 치고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함양의 백운산 아래에 캄캄한 밤을 횃불로 행군하였다.
27일 내동(內洞)의 뒤 골짜기에서 쉬는데 마을 형편이 쓸쓸하여 차마 밥을 시켜 먹지 못하고 해가 저물 무렵에 들러 자고 새벽에 발행하였다.
28일 운봉(雲峰)의 부곡(釜谷)에서 호군하고 왜적들의 동향을 들었으며, 마을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다. 밤에는 30리를 행군하여 백장암(百丈庵 : 지금의 남원시 산내면 소재)에 들렀다.
29일 들은즉 왜적들이 함양으로부터 인월(引月) 장터를 지나는데 그 수가 더욱 많았다 한다. 그런데 우리 군사는 총이 겨우 10자루, 창이 4자루로 20명에 불과하였다. 그믐날 새벽에 일어나 지리산 장자동(長子洞)에 들어왔는데 아직 날도 새기 전에 기꺼이 밥을 대접 받았다.
10월 초하루 광봉(光峰)의 절정에 단진(團陣)을 치고 있는데 아랫 마을 부인들이 광주리에 음식을 담아와 배불리 먹고 떠나는 이 대장을 향해 멀리 절하며 성공을 빌었다.
2일 십리 정도 가다가 큰 비를 만났는데 달궁(達宮)에서 점심을 먹고 심원 산막에서 잠을 자는데 밤새 눈이와 뜰을 덮었다.
3일 막료들과 상의하면서 말하기를
“본디 우리가 여기를 멀다 하지 않고 온 것은 이 산중에 고광순(高光洵) 의장의 부하였던 남은 무리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인데, 그 행적을 볼 수 없으니 빨리 임실로 돌아가 구병(舊兵)을 불러 모으도록 해야겠다.”
고 하였다. 안개 속에 구례 산동의 토실(土室)에서 점심을 먹고 밤에 원촌(院村 : 지금의 구례군 산동면)을 지나면서 구례읍의 소식을 들으니 이미 왜적들이 성내에 도사리고 있다고 하였다.
4일 새벽 맥령(麥嶺)을 넘어 대암봉(大巖峯)에서 쉬다가 곡성 압록 나루를 배로 건너 동리사(洞裏寺 : 지금의 태안사)로 간다고 여러 사람이 듣도록 일러 놓고 가만히 통명산(通名山)속의 서봉리(棲鳳里 지금의 鳳鳥里)로 들어갔다.
5일 장님의 퉁소 부는 사람이 있어 군사들이 그를 위로하기 위해 연주하게 했는데 조금 있다가 물리치도록 하였다. 지금 나라와 부모를 생각한다면 음악을 들을 때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6일 통명의 준령을 넘어 낮 한때를 쉬고 있는데, 뇌우(雷雨)가 여름비같이 쏟아져 파수병의 옷이 다 젖었다. 이 때에 지은 시가 끝이 결락된 채 남아있다. 이렇게 때론 전과를 올리고 때론 패배를 맛보아 잔병을 이끌고 운장산, 지리산, 백운산, 통명산 등지로 의진을 옮겨 가면서 다시 의병을 규합하고 한편으로는 수리 수합하였다. 이때 이석용 의진의 무기 수리에 대하여 살펴보면 놀랄 만한 일이 있다. 앞서 말한 이 대장의 의령 10조의 제7출품기 《무기의 관리》에 ‘우리는 모든 무기를 소중히 간직하며, 우리 손으로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한 대목이 있다. 그는 말로만 그렇게 내세운 것이 아니라 재래식(在來式) 화승총(火繩銃)을 전부 개조하여 격침으로 뇌관을 타격하여 격발시키는 편리한 양총과 같은 형식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1908년(융희 2년) 4월 30일 왜적의 남부수비관구 사령관이 내부 경무국장에게 보낸 통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진안 수비대장이 4월 21일 대촌 부근 전투에서 노획한 총기에 관하여 4월 26일 보고한 것이다.
1. 화승총을 개조하여 관타식(管打式)으로 하였다.
2. 개조방법은 화승협 … 와 여히 개조하여 총신의 우측 밀단에 있는 도화구에 발화약을 장치하고 방아쇠를 잡아당기면 제 2도의 격이 화약을 때려 발화하도록 개조하였다.
3. 발화약은 황색의 분말로 … 충돌하면 즉시 발화한다. (일본에서 투환(投丸)에 사용…)
4. 이 총의 식은 사용상 화승총에 비하여 훨씬 간편한 것으로 이 적단은 모두 이를 개조하여 화승은 일체 휴대하고 있지 않다.
5. 부장 최덕일이 휴대한 하물 중에 있던 양총에 사용하는 약협(藥挾)에 개전(改塡)한 것은 서양의 성냥을 이용하여 뇌관의 대용으로 삼고 있다.
6. 이상의 공법 및 작업은 이석용의 부장 최덕일, 윤정오의 꾀에서 나온 것 같다.(이 두 사람은 총공사(銃工師) 포로의 말에 의하면 총기를 수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위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운장산 아래서 비록 패전은 하였으나 10명의 왜적을 격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의병들에게 많은 양총과 재래식일지라도 상당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편리하게 조작할 수 있는 개량된 소총을 고루 갖추고 있었음을 웅변해 준다.
10월 7일 사촌(沙村)에 이르러 좌정하여 쉬고 저녁에 회화정(檜花亭 : 지금의 순창군 적성면 괴정리)에 들러 환대를 받았다.
8일 새벽 구미(龜尾 : 지금의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를 출발하여 눈 같은 서리를 밟고 만수탄(萬壽灘)을 건너 입석(立石)에서 밥을 먹었다.
풍문에 의하면 광주 의병들은 정읍의 내장사(內藏寺)로 들어가고, 용담에서 남은 군졸들은 장성 백양사(白羊寺)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막료들의 의향에 따라 마이산(馬里山) 속의 지름길로 노령(蘆嶺)을 지나 남정동(南亭洞)에 이르렀다. 이때 선발대가 먹을 것을 요청하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먹을 것을 풍성하게 준비하여 대접하였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교활하여 한편으로 한 사람을 시켜 왜적에게 의병들이 저희 마을에 있다는 정보를 제공하였다. 왜병들은 노령으로 가려다가 이 정보를 듣고 기뻐하며 정탐군을 보내 의병진을 엿보게 하는 한편 사방을 에워싸고 의병들의 출발을 기다려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파수병들은 왜군이 접근하고 있는 동태를 감지하지 못했다.
해가 저물어 의진을 노촌(老村)으로 옮기려고 행군할 때 시골 사냥꾼 차림의 사람들이 오른쪽 골짜기에서 황급히 달려 내려왔다. 의병들은 깜짝 놀라 그 곳에 왜군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왼쪽 길을 택하여 화암리(華岩里) 뒷산 위로 올라갔다. 그때 갑자기 ‘왜적이 왔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야 그는 방금 앞에서 보았던 사냥꾼 모양의 사람들이 왜적의 하수인들이었음을 알고 자신들이 속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의병들은 야전(野戰)에는 익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왜군의 급습에 대항할 수 없었다. 포성이 여기저기서 느닷없이 일어나고 총탄이 몸을 따라 날아오니 의진은 놀라 무너져 서로 흩어져 골짜기로 돌아가는데 골짜기도 역시 험난하여 갈 수도 없고, 왜적들은 사방에서 일제히 공격해 오니 남정리에서 대포를 지고 오던 짐꾼들은 엎어지고 선봉 안관서(安寬瑞) 혼자 총 한 발을 쏠 뿐이었다. 그는 비 오듯 하는 총탄을 피해 송림 사이에 간신히 누웠으나 몸을 가릴 수 없었다. 숨을 죽이고 한참 동안 누워 있는데, 두 명의 왜병이 숲을 돌고 있었다. 그때 그는 왜병을 보았으나 왜병은 그를 보지 못했다. 그는 하늘의 도움이라 생각하였다. 해가 지고 밤이 되어서야 왜적의 포위망이 풀렸다. 의복을 가다듬고 부하들을 찾아 산정에 이르니 안선봉(안관서를 말함)은 적의 탄환에 맞아 손이 터지고 눈이 상하여 유혈이 낭자하였다. 그는 탄식하며, “하늘이 나를 해치는 구나!” 하였다. 그는 여기서 또 한 번 패배의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다.
9일 새벽 길가 집에 이르러 권도(權道)로 주인도 부르지 않고, 곧 사랑채에 들어가 머물기를 청하였다. 안선봉은 먹지 못하므로 그도 역시 수저를 놓아 버리니 모두 눈물을 머금었다. 천치현(天雉峴)을 넘는데 쫓는 사람이 곧 이르게 되었으나 마침 안개가 일어나 산 속을 잠행하는 것 같았다. 잡방산(雜芳山)의 김씨 집에 들어가 안선봉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하고 노촌(老村)으로 새로 이사 온 처갓집에 이르러 장인 겸재(謙齋)를 뵈었다.
10일 겸재는 그에게 당부하기를 “이제부터 산간으로 피신하라.”고 하였다. 그는 장인께 인사하고 떠나는데 도중에 한 사람이 호암리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튿날 왜적들이 싸움터를 둘러보고 갔는데 의병들의 무기류는 떨어뜨린 것이 없고, 한 의병이 부상하여 있으므로 왜병이 총을 쏘아 죽였다는 것이다. 또 의병 10여 명은 아침에 장암리를 출발하여 산으로 올라간 뒤 향방을 모른다고 하였다. 그는 부하의 시신을 거두려고 하였으나 묘책이 없어 몸소 가려 하였으나 모두 위험하다 하며 “격분하여 살신(殺身)하면 일에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왜적의 탐정꾼들이 가까이 있을 터이니 천천히 형편을 보아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말하므로 그만두었다.
11일 닭이 울 무렵 잡방산(雜芳山)의 김씨에게 사례하고 안선봉을 억지로 일으켜 거지 행색으로 꾸며 여러 사람과 함께 가면 괴이하게 생각할 것이므로 길을 나누어 가기로 하고 손을 잡고 작별을 하였다. 순창의 복흥(福興)을 거쳐 산중 길로 광주에 도착하여 기송사(奇松沙, 宇萬)를 만나 의병의 일을 논의하였다. 이때 기성재(奇省齋, 參衍)가 의병을 일으켜 영광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았다.
12일 이른 아침 광주를 떠나려 하는데 기송사가 만류하고 명술(明述)이 굳이 만류하며 “형이 만약 하루만 이 곳에 더 머물면 군사 약간 명은 모집 할 수 있다.”고 하여 광주에서 하루를 더 머물기로 하였다. 저녁이 되었을 때 겨우 두 명의 의병만 모아졌을 뿐, 별 소득이 없었다.
13일 기송사가 그에게 “나도 역시 편안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형세다.”고 하면서 노자를 주었다. 그는 기송사에게 “기각(掎角)의 형세를 만들어 주시면 큰일에 이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하고 광주를 떠나 다시 되돌아 복흥 사창(社倉)에 들려 동지들과 만나 밤이 깊도록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다 취침하였다.
14일 한나절 내 비가 옴으로 무료하여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을 펴 보고 있는데 그 집 아이 종이 밖에서 돌아와 “사람 수십 명이 총을 메고 마을 뒤를 지나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필시 회암에서 흩어진 부하 병사들이라 생각하고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15일 석탄현(石炭峴 : 지금 정읍시 산내면과 칠보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옆에 석탄사가 있음)을 넘어 태인(泰仁) 고현내(古顯內 : 지금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의 김진사 댁에서 유숙하는데 장성의 才士 宋滄 또한 흔연히 대해 주어 정담을 나누었다.
16일 詩山(지금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의 新祠(새로 마련한 사당)에 나아가 勉庵 崔益鉉의 영정에 배례하였다. 마침 임주서(林注書) 응철(應喆 : 임병찬의 아들)이 왔으므로 동행하여 그의 아버지 임낙안(林樂安)을 찾아 도중에 능교(菱橋)에서 잤다.
17일 비를 무릅쓰고 종석산(鍾石山) 위 임낙안을 만나 인사하고 문답하였다. 충분한 토론을 하고 나서 임낙안이 말하기를 “군중(軍中, 의병진)의 급선무는 바로 軍糧을 확보하는 일인데 지금 왜적들이 바쁘게 곡식을 무역(貿易)해 가니 겨울이나 봄을 넘지 않아서 남쪽지방의 양곡이 다 떨어질 형세요, 무엇보다 먼저 포구(浦口)의 시장을 부숴 버려야 하오. 그러한 연후에야 큰 일을 이룰 것이오.”라 하였다. 그는 이 임낙안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19일 눈비가 조금 개이므로 새벽에 일어나 시 한 수를 지었다. 임낙안과 작별하고 갈담(葛潭 : 지금 임실군 강진) 장터를 지나다가 학산(鶴山)의진의 패전 소식을 듣고 남원 목동(木洞 : 지금 임실군 삼계면 덕계리)을 밤중에 들려 허간(許 榦) 형을 찾았다.
20일 오수를 지나 오산(五山 : 지금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봉동(鳳洞)에 들려 어머니와 누이를 뵙고, 21일 정상백(丁象伯)과 함께 오봉산(五鳳山) 북쪽 원증리(元增里)로 가서 부인 김씨를 만나 갓 낳은 딸을 생면하고 서당에 다니는 아들 원영(元泳)에게 부지런히 공부하라 당부하였다. 용담 패전 때 대장을 찾지 못했던 부하 산졸들을 만나 그동안의 경과 정실을 들었다.
25일 눈이 내리는 기회를 타 오산에 들려 부인과 아이를 데리고 사당동(書堂洞)으로 가 양(梁) 형이 마련해 준 단칸방에서 살게 하였다.
27일 운현(雲峴, 구름재)에 이르니 원근의 부하 산졸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모두 모이게 되었다. 대장이 무사함을 보고 모두 기뻐했다. 구암(龜岩)에 의진을 머물게 하고 밤에 진안으로 들어가 요족한 집에 겨울 군복을 부탁하였더니 모두 잘 들어주었다.
11월 10일 옛 병사들이 많이 와서 더욱 군세가 커졌다. 김운서(金雲瑞)는 전주에서 피신해 와서 순창 패전의 내용을 자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밤에 성산(城山 : 지금 장수군 산서면 봉서리와 남원시 보절면 성남리와의 경계에 있는 옛날의 거녕산성)의 영월암(映月庵)에 올라 유숙하였다. 그 뒤 산서 월곡(月谷), 장수 가현(嘉峴), 홍지동, 성수산 등지에서 군복을 청색으로 염색하고 무기를 수집 수리하며, 의병을 모병, 충원하여 군용을 재정비하는 등 병력 충실에 노력하였다.
15일 장수 필덕리(弼德里)에 이르러 부하였던 박성수가 왜적에게 체포되었으나 신색이 변치 않고 당당하게 처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학력 있는 사람이더니 과연 그랬구나.” 하며 칭찬하였다. 그런데 왜적들은 박성수의 당질 경훈(慶訓)까지 잡아갔으니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6일 김중군이 모병한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팔성암(八聖庵 : 지금 장수군 장수면 팔공산 소재)의 방은 냉돌이고 날씨는 차가우니 시 한 수를 지었다.
17일 눈이 많이 와서 길 눈이 쌓였는데 암자에는 양식이 얼마 남지 않아 부득이 대책을 논의한 바 김중군이 궐기하여 장수읍을 습격한 즉, 왜병이 놀라 나오므로 송선봉이 단발에 왜적 한 명을 거꾸러뜨렸다. 의병들은 이미 손가락이 얼어 총을 조작할 수 없었다. 부득이 포위망을 풀어주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니 왜병들은 남원으로 도주하였다. 그 뒤 추위 때문에 병난 군사를 치료하기도 하고 또 무기를 거두어들이며 수리하였다. 그 동안 눈으로 길이 막혀 왜적들은 공격해 오지 못하였다.
12월 1일 옛 부하 병졸들이 찾아왔다. 2일 활고촌(活古村)에서 총 몇 정을 얻었다.
3일 이평해(李平海) 의병단의 패배를 듣고 도중에 그 패잔병 몇 명을 만났는데 그들이 이진(李陣)의 군안(軍案 : 軍籍)을 그에게 바쳤다. 그들을 수합하고 원리(苑里)에 들어가 크게 호군하도록 하였다.
7일 전주 상관에서 총을 거둬들이고, 9일 회침리(繪枕里) 일진회 괴수의 집에 불을 질렀다. 11일 남원 산실(山室)에 남은 무기를 보관하고, 13일 목동(木洞)에서 군자금과 군수물자를 조달하고 총포를 거두었다. 14일 순창 동심리(同心里)에서 군복을 수리하고 염색하였는데 솜씨도 좋으려니와 성심껏 해 주었다.
15일 밤 40리 길을 행군하여 학산에 들러 쉬고, 16일 오령(吳令 : 산청 고을을 지낸 吳榮錫)에게서 밤에 양총과 화약을 얻었으며, 군수 금품도 적지 않게 받았다.
17일 월명리(月明里)를 들렀다가 밤에 영촌(嶺村, 잿말)의 이씨(李氏) 집에서 하루 군용을 얻었다. 18일 추위를 무릅쓰고 군량과 야금(冶金) 기구를 챙겨 백련산(白蓮山) 의운리(依雲里, 지금의 이윤리)에 들어가 19일 크게 대장간을 설치하고 무기를 개조하며 수리하였다. 4열로 파수병을 배치하고 주둔하는데, 원근에서 풍문을 듣고 호응해 오는 자가 날로 수십을 헤아릴 수 있었다.
20일 송선봉이 서창(西倉) 등지를 돌고, 김중군이 운암 강을 돌아 군수물자를 거두어 싣고 왔다. 21일 군용이 매우 왕성하여 장차 정비한 총을 시험하려고 하는데 마침 비와 눈이 오는지라 진행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저녁 무렵 왜적들이 선근리(지금의 선거리)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22일 새벽에 군용을 정비하고 재를 넘어 강진면 두봉리(지금의 청웅면 두복리)에 내려가는데 탐정꾼이 왜적들의 동태를 보고 잘 알고 있는 터라 정병을 골라 적을 현혹시키기 위한 복병을 골짜기에 배치하였다. 과연 왜적들이 골짜기 입구로 들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왜적들이 길을 바꾸어 가운데 골짜기로 들어간지라 망보는 파수꾼들이 왜적들의 가는 길을 잘못 짚어 위 골짜기를 가리키므로 복병들이 그 쪽으로 옮긴 것이다. 왜적들은 아무 장애 없이 상봉 꼭대기에 直上할 수 있었으므로 의병의 복병을 내려보고 발포하니 복병은 손 쓸 방도가 없고 파수 보는 의병도 모두 무너졌다. 그도 허둥지둥 산을 내려오다가 따르는 군졸이 적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전사하니 그는 ‘아! 사람의 계략이 잘못된 것인가? 처시(處時)가 불리한 것인가?’ 하고 탄식하였다.
25일 그는 몸소 정병 12명을 거느리고 진안 戊戌村에 사는 진안 일진회의 거특(巨慝 : 간특한 놈들의 우두머리)한 놈과 의병의 반적(叛賊)한 놈을 총살하고 한 놈은 목을 베었다. 왜적에게 잡혀갔던 삼종형은 이미 몸을 빼어 떠나고 없었다.
26일 오산에 들어가 호군하고, 27일 왜적들이 동화시(지금의 산서면 동고지 장터)에 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도 총이 젖어 공격하지 못했다.
28일 사주봉(四柱峯)을 넘어 정씨 묘각에 들러 묘지기의 지공을 받고 또 정씨 문중에서 군수금품을 보내와 그 의에 호응함에 감복하였다. 그날 밤 오산에서 부력(富力)의 정도에 따라 원조를 받았다. 29일 밤에 오수역을 지나면서 시 한 수를 지었다.
1908년(융희 2년) 정월 1일 남원 노봉(露峰 : 지금의 남원시 사매면 노봉리)에서 군사들이 쉬는데, 취하여 노는 것이 평일과 같았다. 그는 나라를 걱정할 뿐이었다. 왜적들이 삼봉(성수면 삼봉리)에 들어왔다는데, 그의 일가친척들은 모두 집을 비우고 한 집도 남아 있는 이가 없고 이웃에 사는 朴文國의 집에 총과 칼이 있다 하여 의병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에 진안읍에 구금되어 말로 할 수 없는 곤욕을 당하였는데, 끝까지 굴하지 않아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박장(朴丈)의 거룩한 죽음을 평하여 “본디 학문의 힘이 있어서 어려움에 임하여 좌절하지 않고 능히 이와 같다.”고 하면서 “아! 한 사람의 화가 만인에게 미치는구나.” 하고 탄식하였다.
5일 그의 어머니의 생신날이었는데, 그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이날 그는 서창(西倉 : 지금의 강진면 백련리 신기마을)에 들어가 구옥과(具玉果 : 옥과 현감을 지낸 사람) 집에서 양총 두 정을 얻었으나 탄환이 없어 섭섭했다.
11일 재를 넘어 전주 공동(公洞)에 들어가 총을 거두고, 12일 아침 김중군이 가짜 의병 입곱 명을 잡아 오고 아울러 무기를 빼앗아 왔다.
13일 대로에 왜놈의 기병이 가는 것을 보고도 미처 복병을 배치하지 못해 공격하지 못했다.
14일 깊은 골짜기에서 결진하고 행오를 정돈하고 파수꾼을 배치하여 행군을 했다. 김중군을 부장으로 삼고, 尹明善을 중군으로 삼아 군사 등을 떠들지 못하게 하고 세심정(洗心亭)에 이르러 중촌에서 유숙했다.
15일 장성 의장이 일진회 때문에 잡힌 몸이 되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16일 임실 왜적들이 뒤를 쫓았으나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놀라 도망하였다.
17일 사촌에 들렀는데 남원의 왜적들에게 원군을 청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18일 한결같이 푸른 군복을 입은 일진이 갑자기 마을 밖에 이르러 발포하니 사졸들이 놀라 흩어졌다. 두 명의 초병이 포위되었으나 천행으로 무사하였고 총탄이 사방에서 비오듯 하여 짐을 가지고 갈 수 없어 문서와 무기류를 거의 잃었다. 왜병이 한 명 죽고 마을 사람 두 명이 죽었다. 19일 옥산(지금의 지사면), 계월(桂月)에서, 20일은 도봉(관촌면)에서 흩어졌던 의병을 규합하였다.
23일 동화시(산서면)에서 백성을 괴롭힌 놈을 매로 치죄하고 사촌(지금의 남원시 보절면 사촌리)에 들어가 왜적에게 정보를 알린 유(劉)家의 죄를 세어 불을 놓고 파수를 명령대로 보지 않은 마을 책임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유실한 무기와 복장 등을 환수하였다.
24일 최덕일(崔德逸)을 포군장(砲軍將)으로 삼았다. 26일 임낙안이 전주에 구인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29일 그의 군세가 회복되었다. 효간의 이연산(李連山)의 집에 들렀다가 30일 불현(佛峴)을 넘어 애현산(艾峴山) 절 마을에서 비를 피했다.
2월 1일 학산(鶴山)에 이르러 구졸(舊卒)들을 불러 모으고, 양의진(梁義陣 : 梁春泳이 이끄는 義陣)의 敗卒들이 거곡(巨谷) 등지에 잠복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4일 군사를 이끌고 둔덕방(지금의 오수면 둔기리)에 들렸더니, 李氏 일문이 모두 모여 사촌의 패전한 연유를 힐문(詰問)하니 그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고 그 때의 심정을 기록하고 있다. 오수에 이르러 순검의 집에 불을 지르고 가짜 의병 한 명을 총살하였다.
9일 정탐꾼이 와서 고하기를 순검들이 양총을 가지고 죽림촌에서 사냥을 한다고 하였다. 부장과 선봉이 함께 그 뒤를 밟아 쫓아가니 순검들이 이미 풍문을 듣고 도망하였다. 파수병이 下洞에 들어가니 방재마을 사람이 왜놈들에게 점심을 먹이고 있었다. 정탐꾼을 데리고 있음을 염려하여 산 뒤에서 발포하여 한 놈을 쓰러뜨렸다. 포병 혼자서는 접전할 수 없음으로 산 위로 은신하여 죽림으로 달아나니 의병들이 이미 듣고 쫓아와서 발포하니 왜놈들은 놀라 재를 넘어 도망했다.
12일 운봉 황산을 해질 무렵 지나면서 태조 이성계(太祖 李星桂)의 대첩비를 참배하고 13일 밤 인월 장터 경내에 인민들이 보라는 게시문을 붙이고, 함양 땅으로 들어갔다. 15일 상내동에 들어가 자기황(自起黃) 세 병을 얻었는데 당시에는 금지된 물건이다. “어떤 연유로 내 손에 들어왔을까?” 하고 그는 감탄하였다.
17일 양(梁)의장이 태인에서 왔다. “외롭고 위태로운 행로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얻었으니 다행함을 어떻게 비유하랴.” 하고 그는 반겼다. 그날 밤 장수읍을 치려고 탐사해 보니 왜적이 많고 이미 기밀이 누설되어 퇴진하고 말았다.
18일 이방리(梨芳里)에 몰래 결진하고 있는데 왜적의 정탐군이 의병진을 엿보고 갔는데 해질 무렵 왜적들이 흰옷을 입고 오므로 망 보는 군사들이 그들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의군 중으로 총탄이 비 오듯 하니 의진이 무너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저녁에 散兵을 수습하고 싸움터를 보니 의병 세 명이 전사하였으니 그는 “하늘이 어찌 이에 이르게 하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20일 덕산(德山)에서 결진하였다. 한 무부(巫夫)가 담력이 있어 명하여 초장(哨長)을 삼았는데 모두 마음에 불평이 있었다. ‘종전에 우리나라 인물이 거의 문지(聞知)에 국한되어 이를 쓰지 못한 것은 그것을 증험한 것이다.’ 하고 그의 소감을 기록하고 있다. 그날 밤 읍 근처를 돌아다니는데 한 사람이 그에게 알리기를 이석용을 잡은 자는 천금으로 왜놈들이 상을 준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21일 지장동(智藏洞)에서 주둔하는데 태인에서 떨어져 나온 병사(兵士)들이 근경(近境)에서 약탈한다는 말을 듣고 그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저들이 힘으로써 하니 우리는 덕으로써 해야 하는데 도리어 덕이 저들만 같지 못하니 어찌 패하지 아니할 수 있을까?”
라고 하였다. 이때 왜적의 두목 횡전청송(橫全靑宋)이 그의 부하들을 격려하며 말하기를 ‘이 대장은 덕이 두텁고 커서 민심을 얻었으므로 힘으로써 다투기는 어려우니 너희들은 삼가 가벼이 침노하지 말라.’ 고 하였다. 또 우리 측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공(李公 : 이석용을 가리킴)은 반드시 장차 우리를 살릴 것이니 우리들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왜추(倭酋)의 이 간사스런 말에 대하여 ‘아! 이는 참으로 강적이로구나 가벼이 할 수 없도다.’ 라고 하였다.
22일 구암(龜巖)에 복병하고 있는데 전주 왜적들이 총을 메고 지나가므로 일제히 사격하였으나 사정거리가 멀어 죽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왜적들은 복장을 벗고 도망갔다. 마침 왜 기병 일대가 남원으로 가려다가 두려워하여 도로 전주로 돌아갔다. 24일 양 의장과 작별하였다.
3월 2일 왜적들이 어동(漁洞) 동지에 들렸으므로 그의 의진은 목을 잡아 결진하고 들어오기를 기다렸으나 왜적들은 들어오지 못하였다. 평장점(坪場店)으로 이진하였는데 그곳에는 왜군 지휘관 국지(菊池) 대좌의 의병들에 대한 권고문이 붙어 있었다.
사세(事勢)의 판국(版局)을 그릇되게 믿고 창의하여 무기를 들고 그 뜻을 세움은 옳다. 내가 남원 사촌(沙村)의 싸움에서 이석용의 주머니 속 문서를 읽어보고 느낌이 깊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결정되었으니(중간 탈락) 국사(國士)를 헛되이 죽게 한다면 부끄러울 바요, 또한 대한국을 위하여 조금도 공될 것이 없으니 속히 뜻을 돌이켜 귀순하여 (중간 탈락) 2천만 민중을 구한 즉 아군은 후히 대우…(운운)(탈락)
3일 덕현(德峴)에서 호군하는데 종일 비가 와 정탐 소식이 불통하였다. 전종사(全從事)가 와서 이야기하기를 “대좌국지(大佐菊池)가 남원부에 들어와서 이 대장의 일을 글로 써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 사람은 두려우나 그 글은 아깝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5일 그는 새벽 일찍 일어나 노친(老親)의 생신(生辰)임을 생각하여 시를 지었다. 이날 낮때에 탐정꾼이 고하기를 진안 시동(矢洞)에 왜적 토벌대가 들어왔다 하기에 그는 김선봉을 급파하였더니 왜적 한 명을 포살하고 돌아왔다. 송선봉이 병 중이므로 김성학으로 대신하고, 김사범을 중군으로 삼았다.
9일 계월(桂月) 후곡(後谷)에서 옛 친구가 연환(鉛丸) 몇 되를 그에게 보내주었다. 10일, 노산(蘆山) 절정에서 사방을 관망하니 적이 오는지라 정성현을 우포장으로 삼고, 최덕일이 이를 보좌하며, 윤명선을 우선봉으로 삼고 김성학이 이를 보좌케 하였다.
11일 석현(石峴)에 이르러 三坊 영수원으로 백성에게 세금을 독촉한 놈을 잡아다가 매로 중치(重治)하고 그 집에 불을 질렀다.
12일 석문동(石門洞)에 들렀는데, 경무청(警務廳)의 통사(通詞 : 통역)들이 사구시(沙邱市)에 염탐하러 왔다는 보고를 받고 군사를 보냈더니 4명을 죽였다. 그는 그들 중 한 명은 억울한 사람이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기록하고 있다.
14일 흰옷 입은 왜적 토벌대들이 마을에 들어오므로 의병진에서 발포하여 모두 도망하였다. 최포장이 실기하였기로 매로 벌하였다. 마근현(마근담)에 복병하였으나 왜병들은 오지 않고 왜적들의 군수품을 빼앗아 의병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불살랐다.
17일 활구지(活口地) 산중에서 대오를 정비하여 수류산(殊流山)에서 저녁을 먹고, 밤중에 의진을 3대로 나누어 임실읍을 습격하는데 부하들에게 왜적 외에는 한 가지 물건도 손상하지 말라고 엄명하였다. 세 번의 북소리에 일제히 사격하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왜의 기병대장이 쓰러지고 두 명의 왜적을 죽이니 여타는 도망하여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부하가 불을 지르려 했으나 그는 부모지향(父母之鄕)이라 하여 제지하였다.
21일 퍼부은 듯이 비가 오므로 왜적들은 의군이 곤경에 있음을 알고 뒤를 밟아 침투해 오고 있었다. 파수병들이 갑자기 왜군들을 보자 놀라 도망하므로 의군이 모두 황급히 산상으로 올라가 총을 쏘려 하나 화약이 비에 젖어 불발이라 김중군이 연 세발을 쏘고 나서 군사를 거느리고 퇴각하였다.
22일 따르는 군사는 겨우 16명이며, 운현(雲峴 : 지금의 성수면 대왕마을)에 이르러 통곡하며 보니 전사자가 16명이며, 포로 된 의병이 두 명이고, 부상자가 세 명이다. (기록은 16명이나 그 후 17명의 묘소가 조성되어 관리하여 오고 있었으며 지금은 17위를 현재 임실군 성수면의 소충사에 옮겨 배향하고 있다.) 그때에 최 포장이 총탄에 맞으면서도 적에게 총 두 발을 쏘아대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왜놈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는다.” 하고 패도를 빼 목과 배를 찌르고 눈을 부릅뜨며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 패전으로 이석용 그 자신도 전사하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27일 낮 관촌역에서 김중군이 왜적 한 명을 죽이고 지화(紙貨)를 빼앗았으며 문경달(文景達)이 상관(上關)에서 왜적을 쫓아 그 복장을 빼앗았다. 또 전화통을 부수고 왕방리(旺芳里)에 들어가 왜놈에게 붙은 자를 인근 마을에 조리돌림을 하고 총살하였다.
4월 4일 지현(芝峴)의 유종사(柳從事)가 일전에 전주 병정 30명이 모두 양총을 가지고 이석용 의진에 참가하기 위하여 여러 날을 기다리다가 패보를 듣고 한숨을 쉬며 떠났다고 하니 그는 또한 자기를 책망하였다.
18일 남원읍을 지나 19일 곡성 동산정(東山亭)을 거쳐 백곡(白谷)에 들러 술과 고기로 호군 대접을 받았는데, 하 백곡 사람이 왜적에게 보고하므로 달빛에 지당(池塘)을 지나 갈곡(葛谷)에 이르렀다.
22일 준령을 넘어 장항촌(獐項村)에 들러 점심을 서둘러 먹었다. 부로(父老)들이 찾아와 운현 싸움에 공이 죽었다고 하기에 우리도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하며 술을 권하며 그를 위로하였다.
28일 운현(雲峴)의 패전한 곳의 가시덤불을 베고 그곳에 삼척단(三尺壇)을 만들어 ‘조사단(弔死壇)’이라 이름하고 돼지 한 마리를 제물로 올리고 전망장사(戰亡壯士)들의 합제(合祭)를 지냈다. 그날 밤은 칠흑과 같아 비에 번개가 치니 마치 신의 영험 있음인가? 그는 통곡하며 생각하였다.
이상은 그의 《창의록(倡義錄)》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가 의병을 일으킨 지 1년 동안 때로는 오백여 명, 삼백여 명, 아주 비참한 지경에 이를 때는 십여 명을 거느리고 진안, 용담, 장수, 임실, 전주, 순창, 광주, 고성, 남원, 운봉, 함양 등지를 누비면서 왜적과 접전하여 수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부적하는 자를 응징하며 또한 타일러 개과천선케 하고 백성들의 적개심을 일깨우며 민폐를 극소화하여 백성을 위무(慰撫)하였다. 그가 창의하는 동안 그만큼 전과를 올리고 견디어 낸 것은 엄정한 군율과 무기를 개조 수리하여 쓰며, 군복을 염색하여 입는 등의 지혜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우와 선한 중에 열악한 장비로 월등한 전투력을 가진 왜군과 싸우는데 의병의 희생자도 많았다. 그러던 가운데 1908년(융희 2년) 10월 일본은 만여 명에 달하는 소위 ‘호남의병토벌대’를 편성하고, 이들을 요지에 파견하여 의병의 토벌작전에 나섰던 것이다.
이들은 소위 제 1차, 제 2차, 제 3차 단계를 정하고 의병들에 대한 포위 공격을 감행하니 몇 백에 불과한 수와 열악한 무기를 가진 의병들로서는 그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의 행장은 다음과 같다.
❏ 의병장(義兵將)
❀ 이 석 용 (李錫庸)
註 : 본문 41面 정재의 출생과 성장 참조
❏ 선봉(先鋒)
❀ 박 만 화 (朴萬華) 박만화는 본관이 밀양(密陽)이며 천성이 강직하고 사격과 검술에 능하였다고 전해지나 출신지는 알 수 없다.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에 <을사륵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우리 민족의 국방위기를 절감하고 국권회복 운동을 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丁未7條約>에 따라 우리 군대가 강제 해산되어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의병운동이 확산되자 그는 이석용 의진에 참여하였다. 이윽고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 용바위에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 결성되자 그는 최덕일, 송판구와 함께 선봉장으로 발탁되었다.
호남지역에서의 의병전쟁은 1907년 9월에 결성된 호남창의회맹소에서 비롯되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유림의 연합 의병으로 봉기(蜂起) 직후에는 별도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奇參衍부대를 정점으로 활동을 펴다가 후에는 여러 의진으로 분리하여 항전을 펴 나아갔다. 진안 석전리에서 2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기병한 이석용 의진은 1907년 9월 13일 첫 유격전으로 진안읍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릴 때 그는 최선봉(最先鋒)이 되어 응전(應戰)했다.
그 후 동년 9월 16일에 내원사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은 이석용 의진은 초전에 적 10명을 사살했는데 적이 우리 의진의 뒷 힘이 없는 것을 탐지하고 일제히 사격을 가해오니 우리 의진이 역전분투(力戰奮鬪)하였음에도 세궁역진(勢窮力盡)하여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에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하여 적의 뒤를 쫓아 적 두 명을 사살하고서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이석용 의진은 당시 호남지역에서 같이 활동하던 金東臣 의진과 연합하여 효과적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자 하였다. 김동신 의진은 1907년 8월 전북 무주 덕유산과 정읍 내장산으로 모인 지방 의병과 함께 기병(起兵)하여 전북과 경남서부 일대에서 의병전쟁을 폈다. 특히 김동신 부대는 다른 의병진과 자주 연합전선을 구성하였다. 이에 따라 김동신 의진은 9월 15일 의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용담군 심원사에서 일본군 47명과 종일토록 격전하여 이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석용 의진은 9월 16일 추줄산을 넘어 내원사로 들어갔다.
이때 박만화는 선봉장으로서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에 대항하여 적 십여 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오랜 유격전투로 우리 군사가 힘이 빠져있는 사이 일본 군대는 일제히 총을 발사하며 공격해 왔다. 의병들은 일본군에 맞서 결사항전(決死抗戰)하였으나 무기의 열세(劣勢)로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12券 607面, 《全北 義兵史》 下券 212面
❀ 송 판 구 (宋判九) 송판구는 임실군 운암면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운암면의 제적부를 조사하였으나 기록이 없다. 그는 1907년 9월 12일에 마이산 용 바위에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 결성될 때에 참가하여 박만화, 최덕일과 함께 선봉장이 되었다. 그 후 9월 13일에 진안읍을 습격할 때에 최선봉에서 발군(發軍)의 공훈을 세웠고, 적과 교전할 때마다 선봉에 서서 역전고투(力戰苦鬪)하였다.
특히 11월 17일에 폭설이 내려 어설픈 상황인데도 밤에 장수읍을 기습하여 일본군 수비대들이 곤히 잠들고 있는 틈을 타, 의병들이 앞뒤에서 발포하자 왜놈들이 갑자기 놀라서 뛰어나오는 것을 총을 쏘아 한 놈을 죽였다. 그 이후의 기록은 나오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6面
❀ 최 덕 일 (崔德逸) 최덕일은 이름이 용구(龍九) (전북 의병사에는 석민(錫民)이라고 기록되어 있음)이고 덕일(德逸)은 字이며 본관은 삭영(朔寧)이다. 1871년(고종 8년, 辛未 : 전북 의병사에는 1875년(고종 12년)으로 기록됨) 1월 9일에 임실에서 태어나 장성한 후 한국군대에 들어가서 신식군대의 조련을 받았다.
1907년 7월에 정미7조약이 늑결(勒結)된 다음 곧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그는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일본의 부당한 보호정치를 분쇄(粉碎)하고자 거의(擧義)할 것을 다짐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진안 마이산에서 창의(倡義)하였다. 이때에 동향 사람인 이석용(李錫庸)과 전해산(全海山)이 9월 12일에 마이산 용바위에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박만화(朴萬華), 송판구(宋判九)와 함께 선봉장이 되었다.
다음날인 9월 13일 첫 유격전으로 진안읍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으며, 9월 16일에는 진안 내원사(內院寺)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초전에는 적 십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끝내 적의 공격을 당하지 못하여 의진이 궤멸상태(潰滅狀態)에 이르러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그는 김동신(金東臣) 의진(義陣)으로 가서 활동하고 있다가 김동신의 의병들이 이반(離叛)하여 흩어지자, 최덕일은 심복 지인 한 명을 데리고 다시 이석용 의진으로 찾아와 함께 흩어진 잔병을 모아서 약 6개월 동안 풍우와 설한을 무릅쓰고 험준한 산 속을 헤매며 일진 일퇴의 유격전을 감행할 때 늘 실전(實戰)으로 이끌었다.
1908년 정월 성수면 오봉산에 진칠 때에는 포군장이 되어 활약하였으며, 그 후 그에게도 불행이 다가왔으니 1908년 3월 21일에 임실군 성수면 운현 전투에서 갑자기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분전(奮戰)하였으나 공격 중 적탄에 맞았으며, 그 순간에도 사력을 다하여 포 두 발을 쏘아 적을 공격하고 꾸짖었다. 그러나 힘이 다하여 포로가 되려는 순간 그는 “왜놈에게 잡혀죽느니 차라리 자결하자.”고 외치며 칼을 빼어 목과 배를 찔러 장렬하게 순절했다.
참패를 당한 이석용 의병장은 너무도 참담함을 억누르지 못하다가 그에 대한 만사(萬死)를 다음과 같이 지었으니 이 시에서 그의 충절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한 번도 어려운데 두 번을 찌르다니. 보배로운 핏자국이 붉다 못해 파랗구나.
대의는 드높다 천상의 저 별과 같이. 이름은 어찌 남녘 고을에만 가득하랴?
천년을 두고 청사(靑史)에 빛나리라. 황천에 가서도 역적(逆賊)을 꾸짖으리.
그대와 함께 죽지 못한 이놈이 궂은비 부슬부슬, 눈물만 짓네.
또한 그가 순국한 후에 왜병들이 그가 차던 칼과 죽은 의병들의 보따리를 가지고 가서 입이 마르도록 감탄하며 “참된 의장(義將)이다. 죽은 의병들의 보따리를 끌러보아도 싸움에 필요한 것 이외의 다른 물건은 아무것도 없으니 그 역시 참된 의병들이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銃器의 工法에 능하여 의병들이 가진 화승총을 개조하여 양총과 같이 격(擊)이 화약을 때려 발화토록 하고 성냥을 이용하여 뇌관(雷管)을 대응하는 등 모든 의병들의 무기를 편리하게 쓰도록 개조하는 데 심혈을 다하였다고 한다.
그의 묘는 순국 당시부터 운현 지주골에 17위가 함께 묻혔다가 지역 유지들의 뜻을 모아 소충사 성역화사업 일환으로 1988년 5월 18일 성수면 신촌 마을 앞에 합동묘지를 조성하여 28위를 모셨다.
이후 소충사 성역화사업과 묘지 이전 사업에 의하여 1995년 11월 20일 성수면 효촌 마을 앞 현 위치의 소충사를 건립하고 정재 이석용 의병장의 내외분 외 28의사를 합동으로 봉안(奉安)하니 우리 후손들의 효 정신이 그대로 이어져 나오고 있으며, 매년 칠월 칠석일 유족(遺族)과 面民 모두가 함께 제례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족보에 의하면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확인한 결과 1995년 6월 21일 안장(安葬)된 것으로 확인됨). 그의 孫子 京宇(경우)는 전주시 중화산동 2가 217-5번지에 살고 있다가 2004년도에 별세하였으며, 증손인 성화, 성덕, 성룡, 성진, 성만이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1977년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國家報勳處) : 1券 943面《全北義兵史》 下券 225面《朔寧崔氏 族譜》, 大田國立墓地 확인
❏ 중군(中軍)
❀ 김 성 학 (金成學) 김성학은 진안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1907년 9월 12일에 진안 용바위에서 결성된 호남창의동맹단에 여주목(呂柱穆), 金雲瑞와 같이 중군장이 되었다가 후에 宋判九 선봉장이 아파서 선봉장을 대행(代行)하였다.
1908년 3월 5일에 진안 시동(矢洞 : 지금의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에 일본군 토벌대가 들어갔다는 정보를 들은 이석용 의병장은 그에게 진격을 명하였는바, 그는 곧 습격하여 왜병 한 놈을 총살하고 돌아왔다.
이석용 의병장은 윤명선을 우선봉으로 삼아 그를 보좌하도록 하여 그 후의 유격전에서 전과를 올렸다.
1909년 3월 6일에 호남 의진이 해산된 후 그의 종적(蹤迹)은 전해진 바가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08面
❀ 김 운 서 (金雲瑞) 김운서는 본명이 김영선이며 1879년 7월 4일 충남 계룡시 두마면 두계리 46번지에서 부 김각현과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광산이다.
그는 1907년 9월 12일 이석용의 호남창의동맹단에 가입하여 여주목, 김성학과 같이 중군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장수, 진안, 임실, 남원 등지의 험준한 산골짜기를 누비면서 약 1년 반 동안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9년 3월 6일에 의진이 해산한 뒤에 그는 귀향하여 은신하고 있다가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 이석용 의병장의 지시에 따라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모금을 하였다.
그 중 특기할 사항은 1912년 10월 22일에 김필수, 박문국과 공모(共謀)하여 장수군 대진전면(지금은 산서면) 면사무소에 돌입하여 공금수금원 세 명과 면장 이순영을 구타하여 타박상을 입히고 뺨을 칼로 찌른 다음 거두어 놓은 세금 133원 70전과 면비 50원 44전, 개인소지금 28원 82전과 손금고 등을 강취(强取)하였으며, 동년 12월 17일에는 남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그의 후손인 김대균은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에 살고 있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8券 354面《全北義兵史》 下券 209面
❀ 여 주 목 (呂柱穆) 여규호(呂圭浩)라고도 하며 字가 운서(雲瑞)이고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1888년 4월 25일에 임실군 상동면 대운치(지금의 성수면 대왕리)에서 한섭(漢燮)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용력(勇力)이 뛰어난 장사였으며 직업은 의사(醫師)였다.
1907년 9월 12일에 호남창의동맹단이 결성될 때 그는 박운서, 김성학과 함께 중군장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진안읍과 장수읍을 습격하는 등 여러 차례의 교전에서 용맹을 날렸고, 1908년 5월부터 12월까지 8차례에 걸쳐 부호들로부터 군자금(軍資金)을 조달(調達)하여 충당하였으며, 1908년 말에 임실군 성수면 운현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끌려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남겼다.
바람이 쓸쓸하니 물이 거슬러 흐르고, 장사가 한 번 떠나니 다시 올 길 없어라.
1909년 3월 5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4월 27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또 다시 상소한 바 5월 21일 대심원에서도 기각되었다. 그 후 대구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날 번개같이 간수의 칼을 빼앗아 간수 세 명을 옥중에서 참살(斬殺)하였다. 그 후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손자(孫子) 은석(銀錫)이 완주군 구이면 백여리에 살고 있으며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1券 731面《全北義兵史》 下券 218面
❏ 후군(後軍)
❀ 김 사 범 (金士範) 전북 진안(鎭安) 석전리 출신으로 기록된 사람이다.
이석용(李錫庸) 의진에서 후군장(後軍將), 중군장(中軍將)으로 진안, 장수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륵약(乙巳勒約)’은 우리 민족에게 국망(國亡)의 위기를 절감하게 하였다. 특히 1907년 7월 정미7조약에 따른 군대 해산으로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의병전쟁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호남지역에서의 의병전쟁은 1907년 9월에 결성된 ‘호남창의회맹소’에서 비롯되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유림의 연합의병으로 봉기 직후에는 별도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기삼연(奇參衍) 부대를 정점으로 활동을 펴다가 후에는 여러 의진(義陣)으로 분리하여 항전을 펴 나아갔다. 진안 석전리에서 2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기병한 이석용 부대는 1907년 9월 13일 첫 유격전으로 진안읍을 습격하였고, 11월 17일에는 장수를 공략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김사범은 이석용 의병장이 거의(擧義)할 때 함께 참여하였다.
그는 처음 이석용 의진의 후군장을 맡아 대일항전을 전개하다가 1908년 3월 5일 중군장이 되었다.
그 후 같은 해 4월말까지 장수, 진안 등지에서 20여 차례 이상 항일 무장투쟁을 벌여 일본군 수비대는 물론, 친일적 행위를 일삼고 있는 일진회(一進會) 회원과 자위단장, 친일관료 등 수십 명을 처단하였다. 그 밖의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앞잡이인 일본 상인 다수를 처단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가 순국한 내용은 나오지 않으나 28의사의 기록이 있는 만큼 1908년 3월 21일 운현전투 이전에 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지만,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 아직도 전달되지 않고 있어 국가보훈처 자료에 관리번호 10401호로 기재되어 관리하고 있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12券 258面《全北義兵史》 下券 206面
❀ 윤 명 선 (尹明善) 윤명선의 인적사항은 전해진 것이 없다. 그는 1907년 9월 12일에 결성된 호남의병 창의동맹단에 가맹하여 김사범, 전성학과 함께 후군장으로 발탁되었고 그 후 1907년 말까지 후군으로서 여러 접전에서 전공을 세운 것이 인정되어 다음해 1월 14일에 중군장이 되었다. 그런데 3월 8일에 중대한 군무(軍務)를 품탈하지 않은 죄로 이석용 의병장은 크게 노(怒)하여 엄한 군율(軍律)을 시행하려다가 주위의 만류로 태형(笞刑)에 그쳤다. 이어 3월 10일에 그를 우선봉으로 삼아 김성학 선봉장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호남의진의 군기가 엄정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년 3월 17일에 임실 수류산(殊流山) 유격전에서 승리하였는데 다음날 그는 병을 얻어 돌아간 사실이 이석용 의병장의 창의일록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때 의병활동을 그만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8面
❀ 전 성 학 (全成鶴) 전성학은 진안 출신으로만 전할 뿐 다른 인적사항은 알 수 없다. 그는 이석용이 창의기병(倡義起兵)할 무렵에 동참하여 이석용이 지은 격중가를 부르면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1907년 9월 12일에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 결성되자 그는 김사범, 윤명선과 같이 후군장이 되었다. 그 후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후군장으로 의병활동을 한 것은 분명하나 기록이 없어서 그의 행적을 살필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3面
❏ 참모(參謀)
❀ 이 광 삼 (李光三) 이광삼은 1907년 9월 12일에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 결성될 때 전해산 한사국과 함께 참모(參謀)가 되었다. 다음날 9월 13일에는 진안읍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지만, 9월 16일에는 內院寺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습격을 받아 참패하여 의진이 지리멸렬(支離滅裂)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참모로서 역할을 다하여 흩어진 의병을 모아 대오(隊伍)를 정비하였다.
그 후 동년 10월 8일에 화암리(華巖里) 뒷산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참패 하였으나 11월 17일에는 장수읍을 기습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남원 사랑리 접전에서 패하고 이어 12월 22일에 두봉리 조월(斗峰里 照月)에서 적을 만나 격전하다가 그와 최일권이 장렬하게 순국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0面
❀ 전 해 산 (全海山)
註 : 본문 168面의 해산 전기홍 의병장 내용 참조
❀ 한 사 국 (韓士國) 한사국은 본관이 淸州이며 진안 출신으로 전할 뿐, 다른 인적사항은 알 수 없다. 인품이 준수하고 강개심(慷慨心)이 있었으며 문장이 아주 능했다고 한다. 1907년 9월 12일 이석용의 호남의병창의동맹단에 가입하여 全海山(全基弘), 이광삼과 함께 참모가 되었고, 전해산과 함께 진중(陣中)의 일을 기록하는 기실(記室)의 임무도 맡았다.
그 후 6개월 동안 여러 유격활동에서 참모로서 온 힘을 다하다가 1908년 3월 21일에 임실군 성수면 운현에서 유진(留陣)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16의사와 함께 순절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7面
❏ 총 지휘(總 指麾)
❀ 곽 자 의 (郭子儀) 곽자의의 인적사항에 대한 기록은 전혀 알 수 없다. 1907년 9월 12일에 호남창의동맹단이 결성되었을 때에 그는 박갑쇠, 임종문과 같이 총 지휘의 책임을 맡은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두드러진 행적이 나타나지 않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04面
❀ 박 갑 쇠 (朴甲釗) 박갑쇠는 1885년(고종 22년) 1월 23일에 지금의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8월에 이석용, 전해산 등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9월 12일에 마이산 용바위에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 결성되자 곽자의, 임종문과 같이 총 지휘의 역할을 맡았다.
그 후 9월 13일에 진안읍 습격을 비롯하여 용담,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유격활동에 참가하여 대․소를 합하여 17회의 전투를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09년 초에 박갑쇠는 임실경찰서를 습격하여 왜적 세 명을 죽이는 등, 전과를 올리는 데 수훈(樹勳)을 세웠다.
1909년 3월 6일에 이석용 의진이 해산되자 향리에 돌아가 은신생활을 하다가 1910년에 일본군 토벌대에 체포되어 압송 중 극적으로 탈출하여 적과 접전하였으나 다시 잡힐 위험에 처하자 그는 “적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는 것이 낫다.” 하고 강물에 투신하여 익사함으로써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대통령표창을, 1980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아들 규상은 임실에 살면서 독립운동 가족으로 활동하다가 별세하였으며 손자 박양현이 임실읍 이도리에 살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1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券 620~621面
❀ 임 종 문 (林宗文) 임종문은 본관이 조양(兆陽)이며 1886년(고종 23년) 3월 1일에 진안에서 태어났다. 1907년 9월 12일에 이석용이 전해산과 함께 창의기병(倡義起兵)하여 격중가를 지어 우국청년들의 충성심을 환기하며 많은 호응을 얻었을 때에, 그도 열혈 청년으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에 가담하여 박갑쇠, 곽자의와 함께 총 지휘에 임명되었다.
그 후 그는 이석용 의진의 중견간부로서 장수, 진안, 임실, 남원, 용담 등지에서 악전고투(惡戰苦鬪)의 유격전에 참전하여 1908년 9월 의진이 해산될 때까지 적과 격전하여 전공을 세우다가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 중에 체포되었다고 전하나 언제, 어느 유격전에서 체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남원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보훈처 관리번호 8007호)을 추서하였으나 후손이 없어 아직까지 전수가 안 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3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券 880面
❏ 연락(連絡)
❀ 박 성 무 (朴成武) 박성무는 이름이 동환(東煥), 성모(成模)라고도 하며 1882년 5월 12일에 임실군 성수면에서 출생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성수면의 제적부에는 기록이 없으며 당시 판결문에는 남원군 보현면 신동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1907년 8월말(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9월 4일로 기록됨)에 이석용이 창의(倡義)하던 초창기에 진안군 남면 석용리에서 의거할 때 연락책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9월 12일에 결성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에서 홍윤무, 윤병준과 함께 연락부장이 되었다. 그 후 1년 6개월 동안 유격활동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우고 1909년 3월 6일에 호남 의진이 해산된 후에는 이석용 의병장을 따라 항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사업에 주력하였다.
특히 1912년 11월 22일에 이석용 의병장과 동지 4명이 군자금 모집 계획을 세우고 김필수, 박보국, 홍윤무 등 동지 6명과 같이 화승총 6정과 도검으로 무장하고 진전면사무소에 들어가서 세금 등 공금 212원 98전 3리, 수제금고 두 점 등을 확보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3년 2월 2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34의 나이에 10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13년 3월 29일에 대구복심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형의 확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86년에는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아들 중갑(重甲)은 임실군 관촌에서 태어났고, 전주시 중노송동에서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8券 387~388面《全北義兵史》 下券 211面
❀ 윤 병 준 (尹秉俊) 윤병준은 1884년(고종 21년) 5월 9일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 57번지에서 부 윤사현과 모 김순옥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7년 정미7조약에 따라 군대가 강제 해산을 당하게 되자 전국은 다시 의병운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는 1907년 8월에 이석용과 전해산이 창의기병(倡義 起兵)하자 가담하여 거사 준비활동에 주력하여 왔고, 9월 5일에 장수군 배룡리(排龍里) 접전에 참전하였다.
그 후 9월 12일에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 결성되자 그는 홍윤무, 박성무와 함께 연락책을 맡아서 활동하였고 9월 13일에는 진안 전투 참가 16일에는 내원사 접전, 10월 8일에는 화암리 후방산전투, 11월 17일에는 장수읍 공격, 12월 22일에는 두봉리 접전, 25일에는 진안 무술촌 전투에 참전하였고 1908년 1월 18일 사촌 전투, 2월 18일에는 이방리전투, 3월 5일에는 진안 시동 전투, 14일에는 마근현 전투, 4월 25일에는 노희상산(露晞上山) 전투, 30일에는 가수리 전투 등 약 1년 반 동안 10여 차례 이상 접전에 참전하였다.
1909년 3월 6일에 의진이 해산(공훈록에는 1908년 9월에 의진이 해산되었다고 기록)한 뒤에 그는 은신생활을 계속하다가 1913년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1927년 3월 11일 고향에서 순국하였으며, 그의 묘는 현 소충사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孫子 재문(在文)이 임실군 성수면 양지리에서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9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券 786面
❀ 홍 윤 무 (洪允武) 홍윤무는 이름이 종렬(鍾烈)이고 윤무는 字이며, 호는 지산(芝山)이고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그는 1872년 1월 9일에 지금의 임실군 성수면 왕방리 342번지에서 부 홍재옥과 모 김희자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위엄이 있어서 이웃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907년 7월에 굴욕의 ‘정미7조약’이 체결되어 국운이 기울어지자 의분을 금치 못하던 중 이석용이 창의기병(倡義 起兵)한 것을 보고 이에 가담하여 9월 12일에 호남창의 동맹단이 결성될 때에 박성무, 윤병준과 함께 연락부장이 되었다.
그 후 진안, 용담, 임실 등지의 유격활동에 참가하였으며 군자금 마련에 주력하였다. 특히 1908년에 진안에 살고 있던 김관일(金寬日)이 일본군 헌병대의 밀정 노릇을 함으로 그를 살해하였으며 3, 4차례에 걸쳐 인근의 부호와 면사무소를 침입하여 군자금을 마련하여 의진에 공급하였다.
1909년 3월 6일에 이석용 의진이 해산되어 은신하고 있었는데 1912년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3년 2월 22일에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했으나, 3월 19일에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의 아들 순엽이 임실군 성수면 왕방리에서 살았으며 손자인 홍성식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613-1번지 하남금호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1977년에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9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券 976面
❏ 도로부장(道路副長)
❀ 김 공 실 (金公實, 貢實) 김공실은 1871년(고종 8년) 4월 19일에 지금의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677번지에서 父 金萬庸과 모 金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 후손들은 임실읍 신안리에서 살았었다. 선생은 의지가 강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장사다운 기풍이 있었다.
그는 1907년 9월 12일에 동지 20여 명을 규합하여 함께 호남의병창의동맹단에 가입하여 김사원, 김성율과 함께 도로부장이 되었으며 이석용이 가장 심복(心腹)하는 부하의 한 사람이었다. 그 후 1907년 9월 13일의 진안읍 습격과 동년 11월 17일의 장수읍 기습, 그리고 1908년 1월 18일의 사촌(沙村) 접전에서 용전 분투하였다.
1909년 3월 6일에 이석용 의진이 일시 해산되어 귀향 중 장수 주재소 순사에 의해 검거되었다. 일본경찰은 그에게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이석용 의병장의 행방을 신문(訊問)하였으나 끝내 묵비권을 행사하니 열 손가락의 손톱을 벗기며 자백하도록 고문하였다. 그래도 입을 꼭 다문 채 말이 없으니, 벗겨진 손톱에 못을 박는 가혹한 고문을 하였으며, 최종으로는 끈으로 상투를 묶어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고문을 하였다고 후손은 말하고 있다. 이처럼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말이 없으니 할 수 없이 석방하였으나 이튿날 숨을 거두어 순국했다.
그의 후손인 경호(敬鎬)는 임실에서 살다가 지금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156번지에서 살고 있으며, 선생의 墓는 配 林中實과 함께 성수면 삼청리에 계시다가, 전주 광양간 고속도로 신설로 인하여 2005년 6월 16일 대전국립묘지로 이장(移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대전 국립묘지에 건립된 비문은 다음과 같다.
구한말 난국에 의병되어 부르지 않아도 깃발을 들었다
이 한 몸 바쳐 바람이 되고 한 줌의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내가 타는 뜨거움으로 조국을 부르며 죽어서도 혼이 되어 섬길 조국이기에
계룡산 자락 베개 삼아 김공실 여기에 잠들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04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券 498面
❀ 김 사 원 (金士元) 김사원은 순창군 구암면 산내리(지금의 구림면) 출신이다. 그는 1907년 9월 12일에 마이산 용바위에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 결성 시에 김공실, 김성율과 함께 도로부장이 되었다.
그 후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의 험준한 준령(峻嶺)을 누비면서 여러 유격전에서 전공을 세웠다. 1909년 3월 6일에 호남의병이 해산되자 귀향하여 은신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었다는데 재판기록이 없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06面
❀ 김 성 율 (金成慄) 김성율은 본명이 상신(相臣)이며, 1886년(고종 23년) 8월 25일에 임실군 상동면 원진리에서 태어났다.(지금의 성수면 왕방리 원증마을)
그는 이석용과 전해산 등이 창의기병(倡義 起兵)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07년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 용바위에서 500여 명의 의병이 참가하여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 결성될 때 김사원, 김공실과 함께 도로부장이 되었다. 그 후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를 누비며 10여 차례의 유격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1908년 9월 6일에는 일본군 헌병대에 밀정을 하고 있던 김실일(金實日)을 잡아 죽였다.
1909년 3월 6일에 의진이 해산된 뒤에 그는 이석용 의병장을 따라 은피생활을 하다가,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더욱 의병활동이 어렵게 되자 1911~12년까지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 전주지부에서 26세의 나이에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68년에 대통령표창과, 1977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그의 후손 김옥현은 임실군 임실읍 오정리에 살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07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券 530面
❏ 보급(補給)
❀ 박 금 동 (朴金東) 박금동은 진안 출신으로만 수록되어 있을 뿐, 다른 인적사항은 알 수 없다. 1907년 9월 12일에 이석용 의병장이 이끄는 호남창의동맹단 결성 시 참여하여 그는 한규정, 박문국과 함께 보급부장이 되어 의진을 따라다니면서 보급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나 기록된 자료가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1面
❀ 박 문 국 (朴文局) 박문국은 일명 보국(甫局)이라고도 하며,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에서 1876년 2월 19일에 출생하였다.
그는 1907년 9월 12일에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 결성될 시 가맹하여 한규정, 박금동과 함께 보급책임을 맡았다. 그 후 약 6개월 동안 유격활동에 참가하다가 1908년 3월 21일에 임실군 성수면 대운 재[雲峴]에서 일본군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17명의 의사가 전사하고 두 의사가 생포될 때, 그는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그 후 동지들과 함께 험준한 산줄기를 타며 임실, 진안, 장수, 남원 등지에서 유격활동을 하였다.
1909년 3월 6일에 의진이 해산된 이후에도 그는 계속 이석용을 따랐고,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는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1912년 10월 22일에 이석용의 지시에 의하여 동지 김필주(金必珠), 김운서(金雲瑞)와 함께 무장하고 장수군 내진전면 월파리(지금의 장수군 산서면)의 면사무소에 돌입하여 공금수금원 이용구와 육동기, 면장 이순영이 저항하므로 구타하고 그들이 거둔 세금 133원 70전과 면비 50원 44전 개인소지금 28원 82전과 손금고 두 점을 빼앗았다.
또 1912년 12월 밤에는 임실에 살고 있는 강정수의 집에 가서 강에게 총격을 가하고 군자금을 강취(强取)하였는데, 강정수는 일본경찰의 앞잡이로서 학교를 경영한다하여 군민으로부터 돈을 긁어모아 사복(私服)을 취하여 원성(怨聲)이 있었던 자이다.
1914년까지 지하운동을 하다가 결국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 전주지부에서 35세의 나이에 10년 형을 선고받고 5년 7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1951년 1월 5일에 卒하였다. 그의 孫子 判岩(판암)은 성수면 오봉리에 살고 있다.
정부는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3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券 626面
❀ 한 규 정 (韓圭井) 한규정은 전북 출신으로만 전할 뿐 다른 인적사항은 찾아낼 수 없다.
그는 1907년 9월 12일에 이석용이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 시, 박금동, 박문국과 함께 보급부장이 되었다. 그 후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동지들과 함께 10여 차례의 유격활동에 참가, 보급의 소임을 다한 것은 사실이나 그 후의 종적은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7面
❏ 운량(運糧)
❀ 김 학 문 (金學文) 김학문은 남원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다른 인적사항은 알 수 없다. 그는 이석용이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할 시에 가입하여 오기열, 조영국과 같이 운량부장이 되었다.
그 후 의진의 중견간부로서 약 1년 6개월 동안 악전고투(惡戰苦鬪)하였다가 1909년 3월 6일에 의진이 해산되자 귀향하여 은신 중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7월 8일 광주 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0面
❀ 오 기 열 (吳琦烈) 오기열은 지금의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출신이다. 그는 이석용의 호남창의동맹단 결성 시 가담하여 조영국, 김학문과 함께 운량(運糧)부장을 맡았으며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의 준령(峻嶺)을 누비면서 맡은 바 책임활동을 다하였을 것이나 수록된 자료가 없다. 그는 1945년 해방이 되고 정부가 수립되면서 진안에서 제헌국회의원이 되었고, 현재 마령평지 마을 앞에 공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의 孫子 재천(在天)이 서울에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8面
❀ 조 영 국 (趙榮國) 조영국은 남원 출신으로 수록되어 있을 뿐, 다른 인적사항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1907년 9월 12일에 이석용의 호남창의동맹단 결성 시 오기열, 김학문과 함께 운량(運糧)부장이 되었다. 그 후 약1년 6개월 동안 진안, 임실, 장수, 남원 등지에서 의진의 유격활동을 도왔다.
1909년 3월 6일에 의진이 해산된 후에는 이석용 의병장 지시에 따라, 항일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1912년 말까지 활동하였다.
그는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오래도록 은둔생활을 한 것으로 본다. 그의 자손은 있다고 하나 어디에 사는지는 미상(未詳)이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4面
이상은 창의 당시 주요 직책별 구성원의 책임자들이며, 1907년 9월 12일 진안 마이산 용암에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할 시 동참하여 의병으로서 정재와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의병활동을 하였기에 그 자료를 찾아 아래와 같이 행장을 기록하였다.
❀ 김 경 섭 (金敬燮) 김경섭은 임실군 신평면 상궁리(지금의 신덕면 오궁리) 출신이다.
이석용 의진의 후 군장과 중 군장으로 전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에 체결된 을사조약은 우리의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게 하였다. 그는 1907년에 들어와 일제는 헤이그특사 사건을 기화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인 군대까지 해산시키는 등 한국의 식민지화 정책을 실화시켜갔다. 이에 민족의 무력이 상실된 것을 통분해 하던 그는 의병대열에 참여할 기회를 모색하다가 이석용 의진에 참여하였다.
호남지역 의병전쟁은 1907년 9월에 결성된 호남창의회맹소에서 비롯되었다. 이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유림들의 연합의병으로 거병 직후 때로는 별도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기삼연부대를 정점으로 활동을 펴다가 후에는 여러 의진으로 분리하여 항전을 펴 나아갔다. 그는 1908년 6월 1일에 이석용 의병장이 영솔하는 호남 의진에 가담하여 임실, 남원, 진안, 장수 등지에서 유격활동에 참가하였다.
1909년 3월 6일에 의진이 해산된 후에도 8월 20일까지 의병 30여 명과 함께 총 20정을 휴대하고 임실, 남원, 진안, 장수 등지에서 여러 차례 격전을 벌여 일본군 수비대는 물론 친일적 행위를 일삼고 있는 일진회 회원과 자위단장, 친일관료 등 수십 명을 처단하였다. 그밖에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앞잡이인 일본인 상인 다수를 처단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다가 귀가하여 은신하고 있다가 일본경찰에 피체되어 1908년 12월 17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나, 그 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나 후손이 없어 아직도 전수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10150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04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2券 143面
❀ 김 기 룡 (金基龍) 김기룡은 1884년에 순창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양윤숙 의진에 가담하여 순창일대에서 활약을 했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나아가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을사륵약’을 체결하는 통감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지배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 해산을 강행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 존망의 위기에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 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김기룡은 이같은 시기에 반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1909년 7월 양윤숙 의진에 투신하여 중군장 최산흥과 더불어 활약하였다. 최산흥은 1906년 10월 이경춘 의진에 가담하여 전북 태인, 부안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1907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이석용 의진에 참여하여 임실, 남원, 장수, 진안, 용담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하였으며, 다시 1908년 6월 양윤숙 의진의 중군장이 되어 군자금과 친일파 처단에 주력하였던 인물이다.
특히 김기룡은 최산흥 의병장 및 동지 5명과 함께 무기를 휴대하고 순창군 내 각 촌락을 돌아다니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09년 11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나 후손이 없어 아직도 전수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10197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2券 170面
❀ 김 기 만 (金基萬) 김기만은 남원군 외진전면 월곡리(장수군 산서면) 출신이다.
일제는 1907년 7월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한국의 식민지화에 혈안이 되었다. 이 같은 시기에 국망의 사태를 통감한 김기만은 전북 일대에서 일본군에 대항하여 의병전쟁을 벌이고 있던 이석용 의진에 투신하였다. 그 후 1907년 9월 13일 이석용 의진은 진안읍을 점령하고, 11월 17일에는 장수를 공략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러한 이석용 의진을 따라 임실, 남원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이는 한편, 친일적 행위를 일삼고 있는 일진회 회원과 자위단장, 친일관료 등 수십 명을 처단하였다.
특히 그는 1908년 3월 2일 이석용 의병장의 지휘 아래 의병 30여 명과 함께 화승총 20정으로 무장하고 임실군 하북면 막동마을의 친일 동장 심자윤에게 “우리는 의병인 바 금품을 내라.”고 하면서 軍자금과 군수품을 징발하였다. 또한 같은 해 5월 23일에는 남원군 주천면 목동의 친일동장으로부터 군자금을 거두었으며, 상북면 도봉동의 친일 동장으로부터도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주로 의병활동을 위한 군자금과 군수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같은 해 7월 29일 임실군 상북면 병암리의 친일동장으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8월 18일 피체되어 1909년 1월 31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나 후손이 없어 아직도 전수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10192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05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2券 166面
❀ 김 동 식 (金東植) 김동식은 자가 천식(千植)이고 호는 석정(石井)이며 다른 이름이 修信이다. 1854년(철종 5년) 1월 14일 순창에서 태어났다. (국가보훈처의 1999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편에는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생의 집안은 3대에 걸친 애국지사 가문으로 아들 김봉환(80년 애족장)은 선생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고, 손자 김기원은 경기도 안성 평택지역 3․1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
선생은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1907년 정미 7조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8월 1일에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됨으로써,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54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1907년 8월 진안 마이산에서 봉기한 이석용 의진에 가담하여 본격적인 항일의병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이때부터 각처에서 구국 항일의 의병이 봉기하였다. 그도 의분을 참지 못하였으며, 이때 임실에서 일어나 의병장이 된 이석용 의진과 녹천 高光洵 의진의 합진을 모색하다가 실패하였다.
선생은 이석용 의병장보다 나이가 많아 부형 대우를 받으며 호남지역 연합의병진인 호남창의회맹소에서 활동을 하였다. 진안을 중심으로 순창, 장수, 남원, 임실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리는 한편 진안읍과 장수읍을 탈환하여 附日輩를 처단하는 등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9월 10일에 그는 동지 수십 명과 함께 순창 우체국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리고, 지리산에서는 진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와 접전을 하였다. 그 후 10월 22일에는 이석용 의진과 합세하여 1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심원사 부근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 때를 전후하여 일본군 수비대 10여 곳을 습격하여 적군 다수를 사살하였으며, 일진회원과 친일파 주구배들을 숙청하는 등 항일전에 주력하였다. 또한 10월 말에는 고광순 의진과 함께 지리산 일대에서 부대를 재정비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끊임없는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군의 탄압과 계속된 항전으로 인한 戰力損失로 1909년 3월에 의진이 해산되었다.
아들 김봉환은 소규모 의병부대를 이끌고 1909년 9월 27일 전남 무안군 발다면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하다 피체되는 등 전남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석용 의병장의 아들 이원영의 기록에 의하면 의병이 해산된 후 이석용 의병장과 행동을 같이한 선생은 1909년 12월 27일 호남지역 의병장 고광순, 기삼연의 전사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킨지 3년이 되었지만 국권회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우리들은 어찌 하리오.”라며 주먹으로 바위를 치며 통곡하고 분함을 이기지 못해 피를 토하며 순국하였다고 전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05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券 514面, 1999年 12月 《이달의 獨立運動家》 篇
❀ 김 백 옥 (金白玉) 김백옥의 인적사항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는 이석용 의병장의 부하로 되어 있으나, 활동사실로 보아 초기에 호남 의진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3월에 남원 沙忖 접전에서 패전 이후 전해산이 전남지방으로 가서 독자적으로 창의기병할 때에 함께 간 것 같다. 그 후 전해산 의병장이 영솔하는 대동 의진에 참가하여 동지 80여 명과 함께 영암 능주, 화순, 보성, 동복, 광양, 순천, 구례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06面
❀ 김 상 칠 (金相七) 김상칠은 1883년 임실군 하북면 고동리(지금의 관촌면 고덕마을로 추정) 출신이다.
이석용 의진에 참가하여 임실과 남원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에 들어와 일제는 헤이그특사 사건을 기화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인 군대까지 해산시키는 등 한국의 식민지화정책을 실행시켜갔다. 이에 김상칠은 국권회복을 위해 기존의 의병부대에 투신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전북 일대에서 일본군에 대항하여 의병전쟁을 벌이고 있던 이석용 의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석용 의진은 진안군 석전리에서 20여 명의 의병을 모아 기병하여 1907년 9월 13일 진안읍을 기습하고 11월 17일에는 장수를 점령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 같은 이석용 의진을 따라 임실군과 남원군 일대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전투를 벌이는 한편 친일적 행위를 일삼고 있는 일진회 회원과 자위단장, 친일관료 등 수십 명을 처단하였다. 그 밖에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앞잡이인 일본인 상인 다수를 처단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특히 그는 1908년 음 1월 9일부터 이석용이 영솔하는 호남 의진과 함께 10일간 40여 명의 의병과 같이 임실, 남원 등지에서 유격활동에 따라다녔고, 총 30정, 칼 한 자루를 휴대하고 임실 및 남원군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후 귀가하여 있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0년 1월 31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나 후손이 없어 아직도 전수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10421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07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2券 271面
❀ 김 암 우 (金岩宇) 김암우는 1887년 진안군 일서면 내동리(지금의 진안군 성수면) 출신이다.
그는 1907년 음력 12월 15일에 이석용 의진에 가담하여 임실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乙巳勒約’이 체결되자 김암우는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을 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 해산으로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운동은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이 시기 호남지역에서의 의병전쟁은 1907년 9월에 결성된 호남창의회맹소에서 비롯되었다. 이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 유림의 연합의병으로 봉기 후에는 때로는 별도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기삼연 부대를 정점으로 활동을 펴다가 후에는 여러 의진으로 분리하여 대일 항전을 펴 나아갔다. 진안군 석전리에서 2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기병한 이석용 의진은 1907년 9월 12일 진안 마이산 용바위 아래서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한 후 9월 13일에 진안읍을 점령했고, 11월 17일에는 장수를 공략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김암우는 1907년 음력 12월 15일 이석용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 20여 명과 함께 임실 군내에서 일본군 수비대는 물론, 친일적 매국 매족 행위를 일삼고 있는 日進會 회원과 자위단장, 친일관료 등 수십 명을 처단하였다. 그밖에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앞잡이인 일본인 상인 다수를 처단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나 후손이 없어 아직도 전수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10489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08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2券 322面
❀ 김 필 수 (金必洙) 김필수는 김제 출신으로 재남리에 살았다고 기록되어 전할 뿐 다른 인적사항은 알 수 없다.
그는 1907년 9월 12일에 결성된 ‘호남의병창의동맹단’에 가입한 이후 1909년 3월 6일에 이석용 의진이 해산되기까지 약 1년 반 동안 계속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 후 은신하고 있다가 1910년 8월 29일에 나라를 빼앗기자 동지들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을 하기로 하고 이석용 의병장의 지시에 따라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특히 1912년 10월 22일에 박문국, 김운서와 공모한 다음 남원군 내진전면 면사무소(지금의 산서면)를 습격하여 거두어 둔 세금 133원 70전, 면 비 50원 44전, 개인 소지금 28원 82전을 털어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는 박문국, 박동환, 한일성과 함께 체포되어 주모자로 사형언도를 받았다는 판결문은 기록되어 있으나 자세한 사항은 찾을 길이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09面
❀ 김 화 서 (金化瑞) 김화서는 1877년 임실군 상북면 병암리(지금의 관촌면 병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에 들어와 일제가 헤이그특사사건을 기화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인 군대까지 해산시키자 국망의 위기감을 통감하였다. 이에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의병운동에 투신하기로 하였다.
그는 이석용이 창의하여 거사를 준비하던 1907년 9월 7일에 부하로 들어가서 3일 동안 준비활동을 도왔으며, 그로 인하여 전북 일대에서 일본군과 대항하여 의병전쟁을 벌이고 있던 이석용 의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석용 의진은 진안 석전리에서 2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기병한 뒤, 1907년 9월 13일에는 진안읍을 습격했고, 11월 17일에는 장수를 공략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 등 활발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1908년 4월까지 전라도 동북부에서 크게 활약하던 이석용 의진이 1909년 3월 6일에 해산된 후에 일단 그 대열에서 나와 사태를 관망하며 은신생활을 하다가, 일제의 한국에 대한 침략이 더욱 혹심해지자 그해 12월 20일에 재차 가담하여 여러 접전에서 분투하여 부장(副將)이 되고 부하 20여 명을 지휘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임실, 남원, 전주, 진안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 친일적 행위를 일삼고 있는 일진회 회원과 자위단장, 친일관료, 등 수십 명을 처단하였다. 특히 그는 임실군 내아를 비롯하여 각 군에서 의병활동을 지속하는 한편 각 지역에서 유격활동에 필요한 짚신과 음식물 등의 군수품을 징발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1909년 정월 이석용 의진의 부장이 되어 4월 7일에 임실군 하신덕면 경각산(신덕면 조월리 뒷산)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5월 24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지하고 있던 화승총, 화약, 탄환 등을 몰수당하고 교수형이 언도되었는데 이에 불복 항소를 제기하여 6월 24일에 대구공소원에서 유형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나 후손이 없어 아직도 전수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10320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0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2券 502面
❀ 노 병 욱 (魯炳旭) 노병욱은 1876년 5월 10일 임실군 일도면 갈마동(지금의 임실읍 갈마리)113번지에서 父 노정만과 母 공성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석용 의병장이 창의기병할 때부터 부하 의병으로 유격활동에 참가하는 한편, 군자금 모금활동에 주력하였다. 그 후 의진이 해산되자 은둔생활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3세의 나이에 1909년 8월 18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나 후손의 미확인으로 훈장을 추서받지 못하다가 2005년 8월 후손의 발견으로 국가보훈처에 훈장을 신청하였으며, 제적부상 장남 순규와 2남 원규가 있고, 순규의 장남은 종택과 2남에 종진, 3남에 종석으로 종손인 종택은 현 임실읍 갈마리에 살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0面
❀ 문 경 환 (文景煥) 문경환은 임실 출신이라고 전할 뿐이다. 그는 호남의병창의동맹단에 가입하여 1908년 3월 27일에 박운서, 중군장이 백주에 관촌역에서 왜병 한 명을 죽일 때 도주하는 왜병을 완주군 상관까지 추격하여 그놈의 복장을 빼앗고 전달문이 들어 있는 통을 부순 다음, 성수면 왕방리에 들어가서 왜놈에게 붙어 부역한 자를 잡아내어 인근에서 조리돌림을 하고 포살하였다.
그러나 후손을 알 길이 없고 다만 국가보훈처의 자료에 의하면 미 포상자로 기록되어 관리번호 10687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0面
❀ 박 성 수 (朴聖洙) 박성수는 장수군 가현(嘉峴) 출신이다.
그는 1907년(융희1년) 8월 25일에 진안에서 거의한 이석용 의진에 가담하여 9월 13일에 진안읍의 왜병들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고 16일에는 김동신 의진과 운장산 아래에서 만나 의견의 불일치로 왜적과의 전투작전에는 실패를 하였으나 왜적에게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0월 8일에는 순창군 남정동에서 박성수는 왜적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신색이 변하지 않았다.
그의 대장인 이석용은 그를 평하여 말하기를 ‘그가 학문이 있더니 역시 왜놈에게 굴하지 않고 늠늠하였구나.’ 하며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 후는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 없다. 그의 당질인 경훈도 성수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석용 의병장은 한탄을 금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33面
❀ 백 성 칠 (白成七) 백성칠은 임실군 상북면 도봉리 출신이다. 그는 이석용의 호남 의진이 결성되던 1907년 9월 12일에 입진(入陣) 이래 계속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9년 3월 6일에 호남 의진이 해산되어 집에 돌아가서 있던 중 6월 29일에 체포되어 소장하고 있던 총 일 정을 압수당했으나 수형 여부는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5面
❀ 소 팔 백 (蘇八伯) 소팔백은 1882년 10월 28일 남원군 덕과면 만적리 출신이다.
그는 1907년 11월 5일에 이석용 의진(義陣)에 참여하여 남원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고 이어 1907년 7월 정미7조약으로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때에 해산된 군인들이 대거 의병에 참여하면서 의병은 전국적인 민족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소팔백은 1907년 9월 이석용 의진인 호남창의동맹단에 참여하여 남원과 임실군 등지에서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태(笞) 10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5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5券 224面
❀ 송 진 행 (宋鎭行, 일명 允明) 송진행은 익산군 삼기면 출신이며, 인적사항은 전해진 것이 없다. 그는 이석용의 호남 의진에 가담하여, 계속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의진이 해산된 후에도 이석용이 체포되기 직전까지 항일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키 위해 조영국과 함께 진안, 장수, 임실 등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14년 5월 경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8월 22일에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6面
❀ 신 성 운 (申成雲) 신성운은 진안군 남면 백암리 출신이다. 그는 1908년 4월 15일에 이석용의 호남 의진에 들어가, 23일까지 진안 지역에서 유격활동에 참가하였다가 일단 귀가하였고, 1909년 음력 1월 26일에 재가입하여, 동지 13명과 함께 유격활동을 하다가 2월 3일에 귀가하였다. 그 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소지한 화승총은 몰수되고 광주지방재판소 전주 지부에서 11월 24일에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6面
❀ 안 관 서 (安寬瑞) 안관서에 대한 인적사항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1907년 8월 말경에 이석용이 창의기병하자 가담하여 거사준비에 참여하였고,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 결성된 이후 이석용 의병장의 심복으로 적과의 교전에서 고전분투하였다.
특히 1907년 10월 18일에 남정동에서 교활한 동민 한 놈이 일본군 수비대에게 의병들의 동정을 밀고하여, 날이 저물어갈 무렵에 화암리(華巖里) 뒷산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의병들은 응전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으며, 오병선 의병을 잃는 참패를 당했는데, 유독 그는 분전을 하여 총 한 발을 쏘는 등의 과감한 행동을 하다가 적의 대포에 맞아 손이 터지고 눈을 부상당하여 유혈이 낭자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7面
❀ 양 영 만 (梁永萬) 양영만은 1875년 남원에서 태어났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에는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대한제국군 출신의 해산 군인을 비롯하여 평민 의병부대가 거의하여 의병항쟁을 전 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켜갔다.
이와 같이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양영만은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이석용 의진에 소속되어 전남 순천 등지에서 활동을 하였다. 이석용 의병장은 1907년 8월 진안에서 거의한 후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 의진과 합진하여 고창의 병참을 습격, 무기를 확보하는 등 활동을 하였다. 또한 김동신 의진과 연합하여 용담의 심원사에서 왜적 수십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08년 기삼연 의병장의 순국 후에는 독자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남원에서 일군 장교를 격살하는 등 의세를 떨쳤다.
이와 같은 이석용 의진에서 활동하던 양영만은 박덕삼과 함께 적정탐지를 명령 받고 1909년 5월 2일 의진을 출발하여 순천, 여수, 양 군의 정찰을 마치고 5월 22일 돌산읍 주재소와 감시초병 숙사 등을 정찰하던 중 피체되었다. 그는 일본의 군경의 합동취조를 받던 중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 송림 속으로 탈출하였으나 출동한 일군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나 그의 후손이 없어 아직도 전수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950045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 14券 467面
❀ 양 준 필 (梁俊弼) 양준필의 인적사항은 자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1907년 9월 12일에 결성된 호남 의진에 가담하여 계속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 후 1909년 3월 6일에 호남 의진이 해산된 다음에는, 이석용 의병장의 지시에 의하여, 조영국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한 모금활동을 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7面
❀ 이 남 용 (李南用) 이남용은 임실군 하동면 구곡리(지금 성수면) 출신이다. 그는 1908년 2월 21일에 이석용의 호남 의진에 들어가서 10일간 화물을 지고 남원, 장수 등지를 따라다녔다. 그 후 집에 돌아와 있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09년 6월 2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22세의 나이에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후손이 없어 보훈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1面
❀ 이 병 행 (李秉行) 이병행은 임실군 상동면 삼봉리(지금 성수면) 출신으로 이석용의 3종형인 이진사의 아우이다. 일찍이 학문을 닦아 마을 서당에서 훈장을 하였다. 그는 1907년에 이석용이 창의기병하자 곧 이에 가담하여 진안, 임실 등지에서 의진을 따라다녔다. 1908년 2월 6일에는 용담군 일동면 주천리에 사는 일진회원 두 명이 의병활동에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므로, 습격하여 살해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1面
❀ 이 치 만 (李致萬) 이치만은 임실군 구고면 용구암리(지금의 청웅면) 출신이다. 그는 이순에 가까운 노령임에도 구국 항일활동을 하고자, 1907년 9월 12일에 결성된 호남 의진에 가입하여, 의진을 따라다니며 젊은 의병 못지 않게 활동하였다. 1909년 3월 6일에 의진이 해산된 이후에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구국 항일 지하운동을 추진하다가, 9월 20일경에 자택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0월 8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1面
❀ 임 국 현 (林國玄) 임국현은 1868년 10월 8일 임실군 구고면 이운리 출신이다.
그는 1907년에 들어와 일제가 헤이그특사사건을 기화로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인 군대까지 해산시키는 것을 국망 사태로 인식하고 통분해 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국권 회복을 위해 기존의 의병부대에 투신하기로 하여 이석용 부대에 가담하여 진안 석전리에서 의진 20여 명을 모집하는 한편 1907년 9월 12일 창의동맹 후 9월 13일에 진안읍을 습격하고 11월 17일에 장수를 공략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석용 부대를 따라 임실군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 친일적 행위를 일삼고 있는 일진회원과 자위단장, 친일관료 등 수십 명을 처단하였다.
그 밖에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앞잡이인 일본인 상인 다수를 처단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09년 10월 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1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 13券 414面《全北義兵史》 下券 222面
❀ 임 영 기 (任永基) 임영기는 진안군 일서면 시동(지금의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 출신이다.
그는 1908년 1월 30일에 이석용의 호남창의동맹단에 가입하여, 3월 4일까지 장수, 임실, 진안 등지에서 유격활동을 하였다. 그 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1월 22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2面
❀ 정 가 섭 (鄭家涉) 정가섭은 임실군 상동면 조치리(지금 성수면 오봉리) 출신이다. 그는 1908년 4월 경에 이석용의 호남 의진에 가입하여 약 1년 6개월 동안 의진을 따라다니며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 후 의진이 해산되어 고향 등지에서 은신하고 있다가, 1909년 9월 7일에 체포되었으나 재판 기록을 찾을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3面
❀ 정 종 섭 (鄭宗涉) 정종섭은 임실군 상동면(지금 성수면)출신이다.
그는 1908년 4월 5일에 이석용의 호남창의동맹단에 가담하여 약 1년 동안 임실, 진안, 장수, 남원, 순창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9년 3월 6일에 호남 의진이 해산된 후에 귀향하여 은둔생활을 하다가, 9월 27일에 체포되어 11월 10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3面
❀ 조 성 서 (趙成西) 조성서는 태인군 산내 일변면 수침리(지금 정읍시 산내면) 출신으로 당시 52세였다. 그는 1907년 11월 26일에 창의기병하여 호남 의진의 지대장이 된 이평해의 부하가 되어 태인, 고부 등지에서 유격활동을 하였다. 그 후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1909년 12월 1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4面
❀ 조 성 팔 (趙成八) 조성팔은 일명 東注라고도 하며, 1860년(철종 11년)에 옥구군 미면 관여산(지금의 군산시 신관동)에서 태어나서, 일찍이 익산군에 이주했다가 다시 임피군 북일면 중흥리(지금의 군산시 성산면)로 이사를 하였다.
그는 1908년경에 이석용 의병대에 가입하여 임피 지역을 거점으로 지춘경 등 수 명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다가 1909년 6월 25일 임피 주재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이 가택수색을 한 결과 격문에 의하여 그 의병장은 이학자(이석용 의병장)라는 것이 판명되었으나 그는 완강히 부인하고 실토하지 않았으며 재판 결과는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9面
❀ 차 석 록 (車錫錄) 차석록은 임실군 상북면 슬치리(지금 관촌면)출신이다. 그는 1908년 2월 25일부터 6개월간 이석용의 호남 의진의 짐을 짊어지고 따라다녔다. 그 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09년 6월 2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후손이 없어 포상을 못 받고 국가보훈청 미 포상자 내력에 기재되어 관리번호 12022호로 관리만 하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4面
❀ 최 선 경 (崔善京) 최선경은 임실군 하신덕면 애치리(지금 신덕면 월성리)출신이다. 그는 1909년 2월 10일에 이석용의 호남 의진에 가담하여, 동지 11명과 함께 임실, 진안, 전주 등지를 잠행하면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9년 3월 6일에 의진이 해산되자 집에 돌아와서 은신 생활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월 22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후손이 없어 국가 포상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국가보훈청에서 관리번호 12099번호를 부여받아 관리하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6面
❀ 최 판 준 (崔判俊) 최판준은 임실군 하북면 구암리(지금 관촌면 운수리)출신이다.
그는 이석용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 결성된 다음 날인 1907년 9월 13일, 동맹단에 가입하여 진안읍 습격에 참전하고, 이어 9월 16일의 내원사 접전 때에 의병들이 분산되어 집에 돌아와 있다가 체포되었다. 1910년 4월 1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23세 나이에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7面
❀ 한 경 서 (韓京西) 한경서는 황중룡과 함께 임실군 상동면 당동(지금 성수면 당당마을)출신이다.
그는 1907년 9월 12일 호남창의동맹단이 결성된 후부터 1909년 3월 6일 의진이 해산될 때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 후 귀가하여 은신하고 있다가 1909년 6월 26일에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소장하였던 총 두 정도 압수 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수형 상황은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7面
❀ 한 성 원 (韓聖元) 한성원은 임실 출신으로 전해질 뿐이다. 그가 이석용 호남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한 것은 분명하나 언제 가입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호남 의진이 해산한 후 이석용 의병장의 항일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모금운동에 동참하여 송진행과 함께 1912년 4월 20일까지 활동한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8面
❀ 한 수 길 (韓壽吉) 한수길은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 평지마을 출신이다.
1908년 1월 15일에 이석용의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할 시 가담하여 10여 차례의 교전에서 사경을 몇 번이나 겪었으며, 군자금 모금활동에 주력하였다.
1909년 3월 6일에 의진이 일시 해산된 후 은신생활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0년 5월 27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38세의 나이에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8面
❀ 한 주 석 (韓柱錫) 한주석은 임실군 신안면 낙촌(지금의 임실읍 신안리) 출신이다.
1907년 8월에 이석용이 창의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에 가담하여 거사 준비에 주력하였다.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의 용바위에서 호남 의진이 결성된 후 9월 13일의 진안읍 습격에 참가하였고, 9월 16일에 내원사에서 참패를 겪었다. 후에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11월 24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8面
❀ 황 성 문 (黃成文) 황성문의 인적사항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석용의 호남 의진이 결성될 때에 가담하여 계속 의진을 따라다니면서 주로 군수금 모금활동을 하였다. 1909년 3월 6일에 호남 의진이 해산된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9面
❀ 황 중 룡 (黃重龍) 황중룡은 한경서와 함께 임실군 상동면 당동(성수면 당당마을)출신이다.
그는 1907년 9월 12일 호남창의동맹단이 결성된 후부터 1909년 3월 6일 의진이 해산될 때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 후 귀가하여 은신하고 있다가 1909년 6월 26일에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소장하였던 총 두 정도 압수 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수형 상황은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7面
이상은 정재 이석용 의병장의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한 의사(義士)들을 위주로 자료를 묶어 정리하였으며 다음으로는 의병활동 중 정재 의병장의 통솔과 지휘에 관련된 각종 시와 글, 그리고 규약 등을 엮어 기록하였다.
❏ 靜齋 李錫庸 義兵將의 글과 規約
그는 자신이 의병활동을 시작한 1907년(丁未) 8월부터 의병을 해산한 1908년(무신) 4월까지 약 2년여 동안의 진중일기(陣中日記)를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창의일기(倡義日記)를 남겼다. 이 진중일기는 지금 ‘정재이선생호남창의록’에 담겨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가 의병활동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계속 각계 각층에 보내는 격문과 일본 정부에 보내는 반박문을 발송하고 옥중에서는 명상하는 시간에 많은 詩를 지어 장부의 한을 달랬다. 그의 유고를 종류별로 분류하면 격문 50통, 성명서 70통, 시 85수(만사 포함), 기타 100여 제목의 글이 있는데 한결같이 그의 우국충정을 담은 것이다. 뒤에 아들 원영이 아버지의 시와 글을 모아 1961년 《정재선생문집(齋先生 文集)》으로 간행하였다.
정재 선생의 문집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부분은 ‘정재 이선생 호남창의록’이고, 두 번째 부분은 ‘정재 선생 문집’이며, 셋째 부분은 ‘사우견문록’이고, 넷째 부분은 정재 이선생의 ‘친필’자료이며, 다섯째 부분은 ‘부록’으로 되어 있다.
첫째 부분인 ‘정재 이선생 호남창의록’은 이광호(李廣鎬)와 박인규(朴仁圭)의 서문(序文)과 조현수(趙縣洙)의 발문(跋文)이 있으며, 당시의 조정(朝廷)과 8도(道)의 백성(百姓)들에게 보낸 상주문(上奏文), 격문(檄文), 통문(通文), 연설문(演說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진중일기(陣中日記)인 ‘창의일록(倡義日錄)’이 있다. 창의일록은 1907년 8월 26일부터 다음 해인 1908년 4월 29일까지의 일기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이석용의 현실관과 항일투쟁의 면모를 상세히 알 수 있다.
두 번째 부분인 정재 선생의 문집은 그의 시문집으로 1961년 아들 원영이 편집 간행한 것이다. 고명량(高明良)의 서문(序文)과 이도형(李道衡)의 발문(跋文)이 있으며, 그의 시(詩) 70여 수를 비롯하여 소(疏), 서(書)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에 시는 그가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국가(國家)를 위해 목숨을 바쳐 원수를 갚고자 하는 애국충정(憂國衷情)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임실, 전주, 대구의 감옥에서 친지와 가족들에게 보낸 옥중결서(獄中訣書)가 있으며, 당대의 우국지사(憂國之士) 곽종석(郭鍾錫)과 전우(田愚), 기우만(奇宇萬) 등에게 보낸 서한문(書翰文)과 1909년 순종(純宗)에게 올린 ‘상저황소(上儲皇疏)’가 있다.
셋째 부분인 사우견문록은 스승과 친구들을 통해 듣고 본 바를 기록한 것이다. 이 내용은 성리학적(性理學的)인 것이 포함되어 있어 그의 철학적(哲學的)인 면(面)을 이해할 수 있다.
넷째 부분인 친필자료(親筆資料)는 그의 친필(親筆)로 된 자료(資料)들을 모아놓은 것으로 많은 부분이 낙결(落缺)되어 있으며, 앞부분의 내용(內容)과 대부분(大部分) 중복(重複)되어 있다. 다섯째 부분인 부록(附錄)은 그와 관계(關係)된 글들을 묶어 놓은 것이다.
❀ 동맹작사 (同盟酌辭)
오직 유황상제(惟皇上帝)만이 이 인류의 도덕 형태를 보고 계신다. 우리는 신명(身命)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무릇 우리 동맹(同盟)은 나라와 군부(君父)의 만세를 위하여 이 한몸 바치기로 하였다. 충성(忠誠)함은 공적(公的)인 것이요 효도(孝道)함은 사적(私的)인 것이다. 두 가지 마음을 품음이 있거들랑 신명(神明)께서 죽임을 내릴 것이다.
❀ 의진약속 (義陣約束)
❍ 우리의 창의(倡義)는 오로지 왜인(倭人)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할 뿐이니 왜인이라면 대 소인을 막론하고 보는 대로 죽이되 청(淸)나라나 서양인(西洋人)들과는 무고(無故)히 원수를 사지 말며, 신중히 대접하여 적 외에서 적이 생겨 우리 세력을 분산케 하지 말 것.
❍ 왜인(倭人)들의 상품(商品)은 그들의 사화가 아니라 실은 우리나라 재물이니 그들의 남은 것을 빼앗아 군용의 부족함을 보충하라. 오직 그들 노약부녀는 불쌍히 여길 바 있으나 사세가 우리나라 경외(境外)로 쫓아내야 하니 약간의 비용을 주어 곧 제나라로 돌아가도록 할 것.
❍ 오늘의 가장 급선무(急先務)는 모병(募兵)이며, 우리 의병들은 문벌(門閥)과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인물 본위로 뽑아 쓰되, 20세부터 40세의 장정들은 그 용맹과 재능에 따라 불러서 수용하고, 이에 불응하는 자는 군법에 의해 엄히 다스릴 것.
❍ 군중에 사람 씀은 취재하는 것 같이 하여 일기일능을 가진 자를 고루 막하(幕下)에 둔다. 궁장(弓匠 : 활 만드는 기술자), 공장(工匠), 총장(總匠), 의원(醫員), 점장이들은 방방곡곡에서 찾아 그 시술을 우리 소용에 쓸 수 있고 우리 환란을 막는데 쓰이도록 대비할 것.
❍ 집례(執禮)하고 있는 큰 상제(喪制)나 과수댁 독자나 서당의 훈장으로서 그 직분에 전심하고 있으면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모두 그대로 지켜 나가도록 하는 것은 풍속을 순화함에 관계가 있으니 삼가 가벼이 범하지 말 것.
❍ 군량이나 군자금을 운용함은 군중의 큰 정사이니 나라를 위하여 마땅히 국재를 써야 하나 오늘 저들의 강점(强占)한 바 되어 추호도 우리를 위하여 쓰지 않으므로 사세가 모름지기 부호 가에서 판출(辦出)하지 않을 수 없되 다만 마땅히 사리로 타일러 감격게 함으로써 의군을 돕도록 할 것이며, 혹 급하다 해서 거칠게 성내어 인화를 상하게 하지 말며, 일이 차라리 이루어지지 못하더라도 인심을 잃음이 없도록 할 것.
❍ 우리나라 병기는 그들이 빼앗아다가 녹여 버리니 반년도 지나지 못해 모두 없어질 터라. 사장된 무기는 차제에 수습하고 관고(官庫) 중에 있는 것도 마땅히 빨리 취해야 하나 비록 창졸간에라도 객사에 모신 전패(殿牌)에 고하여 신하의 체모를 잃지 말 것.
❍ 군복은 푸른색을 숭상한다. 夜行에 편리한 검은색은 저들과 구분이 안 되어 적으로 오인되고, 흰색은 눈에 띄어 복병할 때 방해가 된다. 하물며 청색은 우리 동국의 정색이니 사람 눈에 거슬리지 않고 혹 노랑색과 섞으면 낮의 복병 시에도 눈에 안 띄어 또한 방편으로도 마땅한 일이다.
❍ 군예(軍禮)는 간략함을 숭상한다. 번거로우면 반듯이 문란해진다. 장수 앞에는 다만 나배(羅拜)하고 식사 때는 예가 필요치 않으며 돌아볼 때는 다만 나아가 맞는다. 항상 선비들을 존경하며 마을 사람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본래의 분수와 의리를 잃지 말 것.
❍ 군중에서 가장 금물은 말다툼이니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아 항오(行伍)가 부정하게 됨이 그 이유다. 하물며 세력이 고단한 우리 의군이야 불가불 낮에는 숨고 밤에는 나타나며 몹시 애쓰며 잠행하니 혹 적을 가벼이 하여 패배에 이르러 지혜 있는 자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 것.
❍ 순검배(巡儉輩)나 일진회(一進會)는 세상이 모두 왜적에게 내응하는 것으로 지목 하니 이들을 없애지 않고서는 우리 일을 치룰 수 없으니 방장, 영수원 등 왜놈에게 종노릇 한 자는 법에 따라 중죄로 다스린다. 한 번 죄지어 깨우침을 받아 개과천선한 자는 그 수령일지라도 보호해줄 것을 허락할 것.
❍ 군사는 군율로써 다스리므로 군율이 없으면 반드시 패한다. 전승은 기세로써 되는 것이니 기세가 없으면 반드시 저상(佇想)되는 것이요, 항상 그 담력을 크게 하며 그 군진을 엄정하게 하여 겁을 품고 가벼이 도망하는 우려가 없도록 할 것.
❍ 상을 주어 여러 군사들을 격려함은 의진의 아름다움이라.왜 두목을 1인 격참한 자는 상금 백 냥이요, 왜적 1인을 사로잡은 자는 상금 십 냥이니 무릇 우리 동맹원은 이를 다 잘 알아둘 것.
❍ 횡포나 난동을 금하고 수습함은 책임이 의병에게 있으며 조금이라도 이욕에 생각이 싹튼다면 곧 문란함으로써 환란을 돋운 것이니 우리 의군에 만약 방자하게 여염집 부녀를 범하거나 어리석은 자를 속이거나 재물 있는 자의 돈을 토색한 자는 법에 의해 반드시 주살할 것이니 항상 근신하며 장수의 명령을 어기지 말 것.
❀ 서사문 (誓師文)
한편 그는 동맹의 결의를 다시 한 번 굳건히 하고 거사의 명분을 천지신명에게 밝히고자 서사문(誓師文)을 다음과 같이 지어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서사문은 마치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중원(中原)을 처들어 갈 때 지은 출사표(出師表)와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대장(李大將)은 또한 군사(軍師)로서 맹세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아! 우리 동맹(同盟) 장사(壯士)들이여 맹세하는 말을 밝히 들어라. 아! 천하가 크게 어지러우니 하루도 의군이 없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나의 이 거사는 감히 군사를 일으켜 작란(作難)하려 함이 아니오. 첫째로 道를 위하고 다음은 나라와 백성을 위함이니 공심이요 사심이 아니다. 나라 안을 돌아보건대 대의는 없어지고 어린백성과 오랑캐가 뒤섞여 사람과 짐승을 구별함이 없기를 몇 년이 되었는가. 삼강(三綱)이 밝지 못하고 사유(四維 : 禮, 義, 廉, 恥)를 펴지 못하면 우리의 도는 그치게 된다. 삼보(三輔 : 國土, 人民, 政治)를 빼앗기고 임금이 헛 자리에 옹위(擁衛)되면 우리나라는 망할 것이며 사방의 오랑캐가 이익을 다투고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심한즉 우리 백성은 상하리라. 당당한 큰 나라가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다시 남은 힘이 없으니 그 이유를 캐보면 오적(五賊)과 칠적(七賊)이 손이 맞아 세세 원수인 왜를 아비 섬기듯이 하고 신성한 임금의 눈을 가리어 우리 종사(宗祀)를 갑자기 무너뜨렸다. 오늘의 거사는 저들이 도륙(屠戮)을 당하지 아니한즉 우리는 살아서 왜놈의 종이 되고 죽어서는 부끄러운 귀신이 되어 광대한 천지에 이승이고 저승이고 용납되기 어려울 터이니 충의의 분심을 쏟을 데가 없으며 울음을 머금는 소리 그칠 때가 없도다. 우리 군사 이미 의로써 움직이니 마땅히 조금도 망념(妄念)이 섞이지 아니하여 재리(財利)에는 담담하고 주색(酒色)에는 분별있어 다만 그 기운을 북돋우고 담력을 펴며 병기를 날카롭게 하고 군사를 정예(精銳)케 조련하며, 적과 싸움에 용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쏟은 물과 같이 달리며, 성을 공략함에 용맹함이 날아 올라채기를 불꽃 같으니 동으로 가고 서로 가기를 한결같이 장령을 따름이 자식이 아비 섬김에 달리 듯하고 종시(終始) 힘을 다하여 다 함께 우리나라의 의성(義聲)이 사해에 진동케하여 종사 신령이 다행히도 다시 편안함을 얻는다면 자연히 우리 국민을 존경할 것이며, 우리 도가 빛나고 그대들이 또한 자리가 신하로서 높을 것이며, 복이 자손에게 끼칠 것이며, 나라와 더불어 기쁨과 근심을 함께 하리라. 아! 힘쓸지어다.
❀ 의령 10조 (義令 十條)
이 대장(李大將)은 戊申年(1908) 정월 12일에 의령 십조(義令 十條)라는 명목으로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군규(軍規)를 제시하였다.
제1조 : 근왕사(勤王事 : 국가와 임금에 충성할 것)우리는 왜군(倭國)과 대대로 원수인바 함께 더불어 살 수 없으니 그들이 살면 우리가 죽고, 우리가 살면 그들이 죽는지라. 마땅히 죽음으로 일대 결전을 꾀하여야 한다. 모든 충의 열사들은 피를 뿌리며 눈물을 머금고 함께 근왕병(勤王兵)에 참여하는 것이니 향리(鄕里)의 부모 형제들께서는 자제들을 대의(大義)로 타일러 주저 없이 의병에 가담토록 하여 충과 효가 겸하도록 할 지어다. 제2조 : 정명분(正名分 : 명분을 바르게 할 것)의논이 화순해야 일이 이루어지므로 명분을 바로잡음에 전심해야 한다. 근자에 국체가 엄정하지 못하고 사기가 순수하지 못하여 말로는 의거한다고 하고 꾀하는 것은 다른 데 있는 자가 혹 있는 듯하니 당당한 천하에 이러한 두 마음 먹은 사람을 용납할 것인가? 우리 동맹자는 죽어도 이들과 동사하지 말 것이며, 한결같이 살아서는 이씨의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이씨의 귀신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제3조 : 경사류(敬士類 : 선비를 존경할 것)지식인들은 곧 천지간의 원기가 되고 나라의 동량으로 의리와 강상(綱常)이 이에 힘입어 부지되므로 예로부터 현명한 군왕은 한결같이 지식인을 공경하였다. 그러나 농, 공, 상, 이서는 분수나 의리에서 본디 선비와 더불어 상대하지 못하므로 못난 사람은 어진 사람을 섬기기를 즐기지 아니 하니 더욱 상서롭지 못하게 되었다. 개화가 도리어 어긋나게 한 이래로 의관의 제도가 금제되니 재앙이 어찌 이렇게 지극함에 이르렀는가! 우리는 3대의 예법을 지켜 밖의 오랑캐의 수모를 받지 말게 하며 문득 바르게 보고 세속을 낮추어 볼 것이며 선비를 형으로 섬기며 날로 스승을 쫓아 아들을 가르칠 것이며 학문을 멸시하고 지식에 어두워 마소가 옷 입음에 이르지 않기를 바란다. 제4조 : 안민심(安民心 : 민심을 안정케 할 것)나라와 백성은 서로 의지함이 사람의 호흡과 같은지라 백성의 근심이 나라의 큰 재앙이요, 선하고 순하게 이끌면 물같이 흐르고 악하고 거스르게 이끌면 불같이 치솟으니 지극히 어리석다고 신을 어찌 믿지 않을까? 저 무례하고 간사한 왜놈들이 종자를 바꾸려고 하니 다만 그 망령됨을 볼 뿐이다. 황천(皇天)은 지극히 어질고 임금은 지극히 성스러우니 어찌 이 백성을 구렁에 밀어넣을 이치가 있겠는가? 우리 동포는 한결같이 본심을 지켜 마교(魔敎)에 물들지 말며, 왜놈들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며, 부지런히 농사짓고 직분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고 삼가 의당(義黨)의 지휘를 받아 영원히 왕화(王化)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제5조 : 접군려(接軍旅 : 의병들을 접대하도록 할 것)의병들이 가는 곳마다 가장 염려되는 것은 민폐(民弊)를 끼치는 것이다. 백성들은 일치단결하여 15호마다 이정(里正) 1인씩을 세워 규속의 책임을 맡고 매양 의군이 이르면 환영하고 장차 가족이나 부자(父子)같이 순화되어 오래 서로 보아서 군사를 먹이는 등의 절차가 예산에 적중케 하여 너무 풍성하여 재물을 손상하지 말며, 너무 절약하여 주림을 끼치지 말 것이니 군사가 주린 빛이 있으면 싸우게 할 수 없다. 이 사정을 잘 알지 못하면 거행이 게으르고 완고하기 쉬우니 이는 의병의 기동력을 상실케 하여 마침내는 대사를 방해하여 군사가 노하게 되니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천만 이를 삼가기를 바란다. 제6조 : 족군용(足軍用 : 군수를 충족시킬 것)백성들은 배불리 먹음이 제일이요, 군(軍)은 재정이 넉넉해야 하는 것이니, 군중에 전곡(錢穀)이 결핍하면 제아무리 용맹과 지혜 있는 장수라도 소용 없는 것이다. 상이 두터운 데에 용맹스런 장사가 있는 것은 자고로 그러한 것이니 옛날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 나라는 자기 나라요, 적은 자기 적이기 때문에 팔도의 의진은 아침에 의병을 일으키면 저녁에 상을 받고 남쪽에서 적을 상대하면 북쪽에서 원조를 보내어 군수(軍需)가 족하고 군세(軍勢)가 바로 크게 펼쳤으나 오늘날에는 적과 나라가 하나가 되고 관군은 흔적도 없으며, 나라 창고는 텅 비어 물건이 없으니, 창의(倡義)의 어려움이 전례가 없다. 나라 안 부호들이 마땅히 이 정세를 헤아려 재물과 양곡을 힘에 따라 보조하면 참으로 좋은 일이다. 나라가 어지러운 즈음에 수전노의 이름을 듣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짐승을 잡아 호군(犒軍)하고 창고를 기울여 의병을 돕기를 오직 날로 바라는 바이니 내 뜻을 외롭게 하지 말기를 바란다. 제7조 : 출기계(出器械 : 무기를 내게 할 것)무기가 우수하지 못하면 많은 군사로 대적할 수밖에 없는데 저 조그마한 나라가 천하에 우열을 다투는 것은 믿는 것이 다른 게 없고 무기일 뿐이다. 이 무기가 우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관청이나 민가에 모두 무기가 있는데, 자기가 쓴다고 나에게 주기를 마다한다면 그들의 눈에 띄어 다만 화를 입을 따름이다. 좋은 무기가 있으면 의진에 보내고 화약이 모자라지 않게 하기를 바란다. 제8조 : 계율령(戒律令 : 군율을 지킬 것)군사가 출동하는 데 군율(軍律)이 없어서는 대번에 반드시 패하는 것이니 평민도 마땅히 우리 의군의 군령을 잘 알아야 한다. 난병이 제멋대로 돈이나 재물을 토색질 하고 가짜 의병이 우리 의군을 팔아 어리석은 사람을 협박한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함이 없을 것이다. 왜적의 언저리에 버티고 있으면서 우리 편에 화를 전가하여 저들의 정보는 숨겨주고 우리 측 자취를 누설하는 자는 그 처자까지 죽일 것이며, 단장, 십장 등 왜적들에게 아첨하는 자, 영수원들로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내는 자들은 아울러 극형에 처할 것이나, 개심(改心)하여 행동을 바꾸는 자는 용서할 것이니 의군의 엄형에 저촉되지 말기를 바란다. 제9조 : 즙사당(蕺邪黨 : 사특한 당을 금하도록 할 것)일진회원은 삭발하고 왜놈에게 붙었으니 천만 번 죽여도 그 죄가 남는다. 다만 어리석고 무지한 자가 괴수의 선동미혹(煽動迷惑)에 연유하였다면 마땅히 용서할 수 있으니 지금부터 옛 의관(衣冠)으로 왕법(王法)을 준수하고 가시를 짊어지고 마을에 사죄한 자는 수령일 지라도 옛날과 같이 보호해 준다. 스스로 머리 깎고 도깨비가 된 자는 방에 들어가 문 닫고 반드시 머리를 밖에 내놓아 사람들의 눈에 해괴하게 보이지 말 것이며 이들이 행로에서 주식을 주고받은 자는 적과 같이 처단할 터이니 의군을 괴롭힘이 없기를 바란다. 제10조 : 정공상(定功賞 : 유공자에 대하여는 표창을 할 것)일은 마땅히 먼저 난을 평정하고 공은 마땅히 뒤에 얻어야 하는데 다만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賞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 오늘날 상(賞)공(功)과 벌(罰)죄(罪)는 참으로 시급하며 절실하다. 공사로 왜적의 대장 한 명을 죽이면 상금이 100냥이며 왜적 한 명에는 상금이 10냥이다. 틀림없이 시상할 것이니 패업을 이룬 거의한 의병들이야 천금 상을 안을 것이니 적을 섬멸함이 어찌 급하지 않겠는가? 의병이나 의병 아닌 사람을 막론하고 겨우 한 적만 참하여도 곧 수상할 것이니 장부가 본디 식언(食言)치 않을 것이므로 각기 노력하기 바란다.
❀ 왜적(倭敵)의 10가지 죄
戊申年(1908) 3월 1일 이 대장은 왜적(倭敵)의 죄 10가지를 나열하였는데 그의 뜻은 세상의 공법(公法)이란 공(功)이 있는 자는 반드시 포상(褒賞)을 하고, 죄가 있는 자는 반드시 베어 죽인다. 공은 기록할 만한 선행이 있는 자에게 돌아가는 것이고, 죄는 징계(懲戒)할 만한 악행(惡行)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지금 일본을 보니 도모하는 것이 백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기록할 만한 것이 없고, 오형(五刑)에 속한 3천 가지 죄목을 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맑고 깨끗한 견식을 가진 국내 인사들을 모아 한바탕 큰 담론을 벌여서 우리나라에 대한 견식이 좁은 만국 사람들을 깨우쳐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왜놈은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적이다. 삼척동자도 왜놈에게 죄가 있음을 알고 침을 뱉지 않은 자가 없다.
1. 요주(妖主)인 목인(睦仁)이 적의 힘을 입어 아비를 원수로 여기고 천륜(天倫)을 끊었으니 그것이 첫째 큰 죄다. 2. 적신(賊臣)인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윗사람을 죽여 권력을 빼앗고, 강한 힘을 믿어 이웃 나라를 협박하였으니 이것이 둘째 큰 죄다. 3. 몰래 흉당(凶黨)을 보내 우리 곤성(坤聖, 中殿, 명성황후)을 시해하였으니 이것이 셋째 큰 죄다. 4. 대국(大國)을 이간(離間)하고 우리를 꾀어 제위(帝位)에 오르게 하였으니 이것이 넷째 큰 죄다. 5. 폐립(廢立)을 주장하고 우리 임금의 귀를 막아 정사(政事)를 듣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다섯째 큰 죄다. 6. 슬그머니 우리 강토(疆土)를 점거하고, 인종을 바꾸었으니 이것이 여섯째 큰 죄다. 7. 우리의 전통의관(傳統 衣冠)을 찢어버리고, 우리의 조상들 분묘(墳墓)를 파헤쳤으니 이것이 일곱째 큰 죄다. 8. 우리의 재산을 약탈하고, 우리의 젊은 여자들을 사냥하니 이것이 여덟째 큰 죄다. 9. 마음대로 무력을 사용하여 우리의 의당(義黨, 義兵)을 살해하니 이것이 아홉째 큰 죄다. 10. 열국(列國)에 뇌물을 바치고, 공법(公法)에 항거하니 이것이 열째 큰 죄다.
저들이 옛날부터 군자(君子)의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굵직한 죄만을 대략 열거한 것이다. 적의 죄들은 이루 손가락을 꼽을 수 없다. 아! 평범한 사람이 한 번만 미세(微細)한 허물을 범해도 종신토록 고을에서 매장(埋藏)을 당하는데, 하물며 왜놈은 바로 해외의 만승국(萬乘國)으로 한 지방을 호령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뻔뻔스럽게 이 열 가지 큰 죄를 범했거늘, 오히려 한 하늘 밑에서 같이 사는 것을 허락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 명군 현주(明君 賢主)가 천명(天命)을 받들어 죄 진 자를 정벌하는 일이 없는 것이 애석하고, 충신 의사(忠臣義士)가 위로는 임금에게 청하고 아래로는 방백들에게 고하여 대의(大義)를 펴기를 도모하는 일도 또한 흔히 보지 못하겠다. 내가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킨 목적도 오로지 이 열 가지의 큰 죄를 다스리는 데 있다. 승패 간에 비록 부끄러움을 면할 수 없으나 충정어린 마음만은 여러 신명께서 판단할 것이다. 진실로 나라에 이익만 된다면 전신이 문드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하고야 말 것이다. 저것들은 천하에 포도주(逋逃主)가 되어 간역(姦逆)을 권장해 가르치고 있으니 정말 누구라도 주벌(誅罰)할 대상이므로 나도 더욱 성토를 늦출 수 없다. 그래서 즉시 글 한 통을 지어 대낮 큰 저잣거리에 붙여놓고자 한다. 참부역자(讒夫逆子)는 저들의 비위를 잘 맞추는 자들이니 눈을 가리고 지나가는 것이 이상치 않으나 나라 안의 남자들 중에 이 글을 대하매 눈을 부릅뜨고 싸움터로 달려가 죽음을 각오하고 몸을 피하지 않을 바른 안목(眼目)을 갖춘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정재 이석용 의병장은 1908년 4월 28일 전사한 의병들을 위해 운현에 삼척단(三尺壇)을 쌓고 돼지를 잡아 제물을 차린 후 피눈물로 축문을 지어 통곡하며 결별을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호남창의록에 나타나 있으며, 1908년 12월 9일에는 그해 3월 21일 운현 전투에서 순국하신 17의사들의 묘소인 지주골에서 제사를 올리며 결별하는 곡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17의사를 비롯 각처에서 순국하신 11의사를 포함하여 28명으로 이를 추모하는 뜻에서 28의사라고 지칭한다. 현재 소충사에 모셔진 28의사들의 비문을 보면 ‘천문도(天文圖)’의 별자리를 각 의병에 부여하여 새겨놓았고, 중앙에는 의병장 이석용을 ‘북극성’으로 표시하고 우측에 14위, 좌측에 14위를 세워 각 비문마다 ‘동방七숙, 서방七숙, 남방七숙, 북방七숙’을 상징하는 별 이름과 별자리를 새겨 28숙(宿)을 상징하는 비를 각하여 세워놓으니 이 또한 특이한 일이다. 정재 이석용 의병장은 대구 형무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의 아들 이원영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나의 시신을 월출이면 일몰하니 전남 영암 월출산 기슭 남해 바닷가 일본 땅을 향하여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리하면 내가 저승에 가서 일본을 꼭 망하게 하리라. 나는 살아서 황제를 모시지 못하였으니 전주 이왕조 땅에 ‘황극단’을 세워 선황제를 모시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1945년 해방이 되자 장남인 이원영은 1955년 5월 5일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의병활동 기념비를 세웠다가 이 비를 고쳐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주위에 김구 선생 등 5열사, 호남창의대장 이석용, 28의사를 각각 새긴 비문을 만들어 ‘황극단’이란 이름으로 현 전북대학교 내에 건립하였으나 전북대학교가 확장됨에 따라 다시 송천동 1가(지금의 어린이 회관 입구 건너편)에 옮겨 세웠다. 그리고 성수면 양지리에는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를 향사하는 ‘소충사’를 세웠고 그 앞에 28의사 비를 세워 추모하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매년 七월 七일에 정재 이석용 의병장을 비롯 28의사의 향사를 행하고 있다. 28의사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 김 동 관 (金東觀) 자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진안문화원 발행 《호남창의록》 72面의 전사한 의병들의 제문과, 임실문화원 발행 《정재 이석용 선생 문집》 280面의 28의사(義士) 제문에 수록되어 있고, 소충사 경내의 28의사 비문과 개인별 비석을 세워 의동(義童) 김동관으로만 기록되어 있기에 28의사의 한 사람으로만 알 뿐이다.
1908년 4월 28일 패군장 이석용이 삼척단(三尺壇)을 베풀어 제물을 차리고 피눈물로 축문을 지어 통곡하며 제사를 지냈다는 호남의병창의록의 내용으로 보아 김동관은 1907년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 용바위에서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할 시에 가입하여 이석용 의병장을 따라 임실, 진안, 장수, 남원 등지에서 교전에 참가하였다고 추측될 뿐이다.
그러다가 1908년 3월 21일에 임실군 성수면 운현(雲峴)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분전하다가 의동(義童)으로서 17人이 함께 순국(殉國)한 것으로 본다.
註 : 편집자의 자료에 의함.
❀ 김 사 범 (金士範)
註 : 본문 69面의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의 내용과 같음.
❀ 김 여 집 (金汝集) 김여집은 1875년(고종 12년) 10월 15일에 임실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9월 12일에 호남창의동맹단에 가입하여 이석용 의병장을 따라 6개월 동안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10여 차례의 교전에 참가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다가 1908년 3월 21일에 임실군 성수면 운현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분전하다가 동지 16명과 함께 천추의 한을 품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1券 540面《全北義兵史》 下券 208面
❀ 김 춘 화 (金春華) 자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진안문화원 발행 《호남창의록》 72面의 전사한 의병들의 제문과 임실문화원 발행 정재 이석용 선생 문집 280面의 28의사(義士) 명단에만 수록되어 있고, 소충사 경내의 28의사 비문과 개인별 비석을 세워 의졸(義卒) 김춘화로만 기록되어 있기에 28의사의 한 사람으로만 추정될 뿐이다.
1908년 4월 28일 패군장 이석용이 3척단(三尺壇)을 베풀어 제물을 차리고 피눈물로 축문을 지어 통곡하며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과, 호남창의록의 ‘知意洞(蜘蛛골)에서 장사를 지내며’ 올린 글에 의하면 ‘의병 김춘화와 박운서는 그 집에서 이미 장사를 지내서 이 반열에 있지 않으나 아울러 제사를 지내며 위로하니 아 한스럽구려.’라는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김춘화는 1907년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 용바위에서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할 때 가입하여 이석용 의병장을 따라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교전에 참가하였다고 추측되며, 그러다가 1908년 3월 21일에 임실군 성수면 운현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분전하다가 17인이 함께 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록이 없어 포상 대상자도 될 수 없는 실정이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김 치 삼 (金致三) 의병 관련 자료 중 정재 이석용 선생 문집인 호남창의록 후면에 28의사(義士) 중의 한 사람으로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며 소충사 경내의 28의사 비문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의병활동 중 임실군 성수면 운현(雲峴) 전투에서 16인과 함께 순절한 의병으로 판단되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다만 《전북 의병사》 하권 579面의 기록에는 당시 용담군(지금의 진안군) 일서면 성암리 출신이고 내용을 보면 1907년 9월 초순경에 창의거병(倡義擧兵)한 유지명이 이끄는 삼남의병대에 가입하여 약 2년간 용담, 금산, 은진 등지를 잠행(潛行)하면서 유격활동에 앞장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07년 10월 3일 밤에 그의 의진 30여 명이 심상의, 노원섭 의병대와 합세하여 금산읍을 습격하고 동지 정성일 등과 함께 선두에서 분전한 결과 일본인 오이시쿠로 외 두 명을 죽이고, 충시모 외 일곱 명과 일본에 아부하는 한국인 한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으며, 우편취급소와 세무서 건물 그리고 일본인 가옥 아홉 동을 불태우고 양총 두 정과 탄환 등을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1909년 1월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7월 23일에 전주재판부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기록으로 보아서는 이석용 의병장 휘하의 28의사 김치삼과 다른 인물로 생각된다. 만약 동일인이라면 어떻게 해서 1908년(戊申年) 3월 21일 운현 전투에서 순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까. 3월 21일에 순국한 17위의 의병들을 모셔놓고 4월 28일 이석용 의병장이 3척단(三尺壇)을 베풀어 제물을 차리고 축문을 지어 28의사들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기록에 김치삼이란 이름이 있고, 또한 소충사 경내의 비문에도 김치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이름만 있을 뿐, 이석용 의병대장과 관련된 기록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진안문화원 발행 《호남창의록》 김동주편 72面 참조)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김 학 도 (金學道) 자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진안문화원 발행 《호남창의록》 72面의 전사한 의병들의 제문과 임실문화원 발행 《정재 이석용 선생 문집》 280面의 28의사 명단에만 수록되어 있고, 소충사 경내의 28의사 비문과 개인별 비석을 세워 의동(義童) 김학도로만 기록되어 있기에 28의사의 한 사람으로만 추정될 뿐이다.
1908년 4월 28일 패군장 이석용이 3척단(三尺壇)을 베풀어 제물을 차리고 피눈물로 축문을 지어 통곡하며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을 보아 김학도는 1907년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 용바위에서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할 때에 가입하여 이석용 의병장을 따라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교전에 참가하였다고 추측된다. 그러다가 1908년 3월 21일에 임실군 성수면 운현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분전하다가 의동(義童)으로서 17인이 함께 순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註 : 편집자의 자료에 의함.
❀ 僧 덕홍(德弘)·僧 봉수(鳳洙) 봉수와 덕홍은 임실군 성수면 소재 상이암(上耳庵)의 승려(僧侶)라고 추측한다.
이석용 의병장이 거의(擧義)하자 상이암 승려들도 모두 의병에 가담하였다. 이석용 의병대장이 의병활동을 하는 동안 상이암에 자주 들려 군사를 머물게 한 주둔지가 되었다. 물론 머물러야 하룻밤이지만 큰 산을 근거지로 삼고 활동하는 의병들에게는 상이암이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이들 승려들은 유리한 몸차림으로 의병단의 중요한 기밀연락을 맡아왔다.
그러다가 1908년(융희 2년 戊申) 3월 21일 성수면 운현 싸움에서 그들 봉수, 덕홍도 다른 15의병(義兵)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들의 영혼은 지주골(蜘蛛谷) 합동묘지에 모셔져 있다가 현재는 소충사 28의사 묘역(墓域)에 안장되어 잠들어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64面
❀ 박 달 천 (朴達天) 자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진안문화원 발행 《호남창의록》 72面의 전사한 의병들의 제문(祭文)과 임실문화원발행 《정재 이석용 선생 문집》 280面의 28의사(義士) 제문에만 수록되어 있고, 소충사 경내의 28의사 비문과 개인별 비석을 세워 의졸(義卒) 박달천으로만 기록되어 있기에 28의사의 한 사람으로만 추정될 뿐이다.
1908년(무신년) 4월 28일 패군장 이석용이 3척단(三尺壇)을 베풀어 제물을 차리고 피눈물로 축문을 지어 통곡하며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으로 보아 박달천은 1907년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 용바위에서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할 시에 가입하여 이석용 의병장을 따라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교전에 참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1908년 3월 21일에 임실군 성수면 운현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분전하다가 17인이 함께 순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박 만 화 (朴萬華)
註 : 본문 64面의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의 내용과 같음.
❀ 박 운 서 (朴雲瑞) 박운서는 일명 내서(內緖)라고도 하며 본관은 密陽이다.
1866년(고종 3년) 1월 13일에 지금의 임실군 운암면 학암리에서 아버지 박중호와 어머니 이중상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학문을 닦은 선비로서 당시 국운이 기울어지는 것을 몹시 근심하다가 이석용이 창의기병(倡義起兵)하자 인근의 청년들을 규합(糾合)하여 동참하였다. 1907년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馬耳山) 용(龍)바위에서 500여 명의 의병이 모여 ‘호남의병창의 동맹단’을 결성할 때 참가하여 그는 여주목, 김성학과 함께 중군장이 되었다. 그 후 6개월 동안 진안읍 습격을 비롯하여 장수, 임실, 남원 등지를 잠행하면서 10여 차례의 접전에서 전공을 세웠고, 10월에는 용담 심원사 부근에서 적병 수 명을 사살하였다고 한다.
특히 11월 17일 장수읍을 기습하려고 할 때에 폭설이 내려 모든 의병들이 주저하는 것을 유독 그가 벌떡 일어나 기습을 주장하니, 전 의병대가 궐기하여 기습을 감행하였으므로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12월 21일에 운암강 유역의 동지들을 찾아가 군자금과 군량미를 마련하여 본대에 수송하였고, 1908년 1월 12일에는 가짜 의병 행세를 하는 반역자 7명을 잡아 무장 해제하고 무기와 소지품을 빼앗았다. 이석용의 창의록에는 1908년 3월 27일에 “박운서 중군장이 백주(白晝)에 관촌역에서 왜병을 죽이고 그 놈이 가진 돈을 빼앗은 것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앞서 3월 21일에 임실군 성수면 운현에서 유진(留陣)하고 있다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중에 일본군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총 3발을 연달아 쏘고 물러났을 뿐, 참패(慘敗)를 당하여 최덕일 포장을 비롯한 의병 16명과 함께 전사한 것으로 되어있다.
《호남창의록》(김동주 편 72面)에는 1908년 4월 28일 제사를 지낸 분들의 명단에 의졸(義卒) 박운서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호남창의록》의 ‘지의동(知意洞 : 蜘蛛골)에서 장사를 지내며’ 올린 글에 의하면 ‘의병 김춘화와 박운서는 그 집에서 이미 장사를 지내서 이 반열에 있지 않으나 아울러 제사를 지내며 위로하니 아 한스럽구려.’ 라는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박운서는 1907년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 용바위에서 의병 대열에 있었으며 3월 21일 운현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나 앞의 기록과 비교하여 보면 어떠한 기록이 정확한지가 의문으로 남을 뿐이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후손 박현상은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에 살고 있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1券 633面《全北義兵史》 下券 213面
❀ 박 인 완 (朴仁完) 자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진안문화원 발행 《호남창의록》 72面의 전사한 의병들의 제문(祭文)과 임실문화원 발행 《정재 이석용 선생 문집》 280面의 28의사 명단에만 수록되어 있고, 소충사 경내의 28의사(義士) 비문(碑文)과 개인별 비석을 세워 의졸(義卒) 박인완으로만 기록되어 있기에 28의사(義士)의 한 사람으로만 추정될 뿐이다.
1908년 4월 28일 패군장 이석용이 3척단(三尺壇)을 베풀어 제물을 차리고 피눈물로 축문(祝文)을 지어 통곡하며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으로 보아 박인완은 1907년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 용 바위에서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할 때에 가입하여 이석용 의병장을 따라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교전에 참가하였다고 추측된다. 그러다가 1908년 3월 21일에 임실군 성수면 운현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분전(奮戰)하다가 義卒로서 17인이 함께 순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박철규(朴哲圭)·허천석(許天錫) 박철규와 허천석의 인적사항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들은 동자(童子)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당시 15, 16세 미만의 소년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들이 어떻게 이석용의 호남창의동맹단에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1907년 9월 13일에 진안읍 습격에 참가하고 이어 운장산 내원사(內院寺) 부근에 유진(留陣) 중 일본군 수비대의 습격을 받아 격전하다가 이 두 소년이 박만화와 같이 애석하게도 순국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14面
❀ 서 상 열 (徐相烈) 자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진안문화원 발행 《호남창의록》 72面의 전사한 의병들에 대한 제문(祭文)과 임실문화원 발행 《정재 이석용 선생 문집》 280面의 28의사(義士) 명단에만 수록되어 있고, 소충사 경내의 28의사 비문과 개인별 비석을 세워 남원(南原)의 전망의졸(戰亡義卒) 서상열(徐相烈)로만 기록되어 있기에 28의사의 한 사람으로만 추정될 뿐이다.
1908년 4월 28일 패군장 이석용이 3척단(三尺壇)을 베풀어 제물을 차리고 피눈물로 축문을 지어 통곡하며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으로 보아 서상열은 1907년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 용바위에서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할 시에 가입하여 이석용 의병장을 따라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교전에 참가하였다고 추측되며, 순국한 내용은 나오지 않으나 호남의병창의록의 28의사 기록에 남원의 전망의졸(戰亡義卒) 서상열로 되어 있어 1908년 3월 21일 이전에 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서 성 일 (徐聖一) 서병훈(徐丙勳) 이라고도 한다. 서성일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진안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전북의병사(全北義兵史)》 하권(下券) 215面에는 임실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내용을 찾기가 어렵다.
일찍이 국운(國運)을 근심하고 있던 그는 을사조약(乙巳條約)에 이어 군대마저 해산되자 더 이상 좌시(坐視)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1907년 7월 ‘정미7조약’이 늑결(勒結)되고 이어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어 국권이 유린(蹂躪)당하자 1907년 9월 12일 ‘진안동맹회’를 조직하여 동지들을 규합하고 당시 일대에서 명성을 떨쳤던 이석용(李錫庸) 의진에 함께 참여하였다. 그 후 약 6개월 동안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유격전에 참전하였으며 1908년 3월 21일 임실군 성수면 운현 전투에서 적과 교전 중에 동지 16의사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에 대통령표창과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1券 656面《全北義兵史》 下券 215面
❀ 성 경 삼 (成景三) 성경삼의 인적사항은 기록에 나타난 것이 없다. 이석용(李錫庸) 의진에 참여하여 전북일대에서 활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경삼은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에 <을사륵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우리 민족이 국망(國亡)의 위기임을 인식하고 국권회복운동을 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된 군인들이 대거 의병 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의병운동이 확대되자 그는 이석용 의진에 투신하였다.
호남지역에서의 의병운동은 1907년 9월에 결성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서 비롯되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유림의 연합의병으로 봉기(蜂起) 직후에는 별도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기삼연(奇參衍) 의진을 정점으로 활동을 펴다가 후에는 여러 의진으로 나뉘어져 항전을 펴 나아갔다. 특히 이석용 의진은 1907년 9월 12일 마이산 용바위에서 창의(倡義)한 후 13일에는 진안읍(鎭安邑)을 점령했고, 11월 17일에는 장수(長水)를 공략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성경삼은 이석용 의진에 참여, 종군(從軍)하면서 대일항전을 전개하였고 전라북도 동북부 지역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2월 18일 의병들이 梨芳里(이방리)에 숨어 있었는데 일본군 정찰대가 이를 염탐(廉探)하여 알아내 공격해 왔다. 그리하여 이석용 의진은 이들과 격전을 치르게 되었고 이 전투에서 성경삼은 양경삼, 허윤희(허윤조라고도 함)와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12券 726面《全北義兵史》 下券 215面
❀ 양 경 삼 (楊敬三) 양경삼은 전북 의병사에는 전주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임실군 관촌면(당시 상북면) 도봉리 출신이라고도 하며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완주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1907년 8월 말에 이석용 의병장이 진안군 석전리에서 창의(倡義)하자 가담하여 이석용이 지은 격중가를 부르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1907년 9월 5일 장수 배룡리, 9월 13일에는 진안읍을 공격하고, 9월 16일에는 內院寺에서 전투를 하였으며 10월 8일에는 화암리 후방산에서 전투, 11월 17일에는 장수를 공격, 12월 22일에는 두봉리 전투, 12월 25일에는 진안 무술촌 전투에 참전하였다고 한다. 1908년 1월 18일에는 사촌, 2월 18일에는 이방리에 숨어서 유진(留陣) 중 일본군 수비대의 정찰대에 탐지(探知)되어 해질녘에 기습을 받아 의진이 응전도 못하고 무너졌는데 이때에 성경삼, 허윤희(허윤조)와 함께 적탄에 맞아 순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공훈록》 제1권 717面의 기록을 보면 1908년 1월 18일 사촌에서, 2월 18일에는 이방리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며, 3월 5일에는 진안 시동에서, 3월 14일에는 마근동, 3월 17일에는 수류산, 3월 21일 운현(대왕 재)에서, 3월 27일에는 관촌역, 4월 25일에는 노희산, 3월 30일에는 가수리에서 활약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고 하며 불행하게도 7월에 장수에서 적과 접전하던 중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전북의병사》 하권 217面의 내용과 상이(相異)하니 이 또한 밝힐 수 없어 그대로 기록할 뿐이다.
그의 손자(孫子) 세영은 임실군 관촌면 도봉리에서 살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인천시 남구 청학동 초등학교에 봉직(奉職)중이었고 청학동 3-80번지에 살고 있다고 전하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1券 717面《全北義兵史》 下券 217面
❀ 여 주 목 (呂柱穆)
註 : 본문 69面의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의 내용과 같음.
❀ 오 병 선 (吳秉善) 자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진안문화원 발행 《호남창의록》 72面의 전사한 의병들에 대한 제문(祭文)과 임실문화원 발행 《정재 이석용 선생 문집》 280面의 28義士 제문 에만 수록되어 있고, 소충사 경내의 28의사 비문과 개인별로 세운 비석에 줄리(崒里)의 피화의졸(被禍義卒) 오병선으로만 기록되어 있기에 28의사(義士)의 한 사람으로만 추정될 뿐이다.
1908년 4월 28일 패군장 이석용이 3척단(三尺壇)을 베풀어 제물을 차리고 피눈물로 축문을 지어 통곡하며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으로 보아 오병선은 1907년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 용바위에서 호남창의동맹단 결성 시에 가입하여 이석용 의병장을 따라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교전에 참가한 것으로 추측되며, 순국한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전사한 의병들에 대한 제문(祭文)내용으로 짐작만 할 뿐 자세한 내용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윤 정 오 (尹正五) 윤정오는 본관(本貫)이 파평(坡平)이며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에서 태어났다(제적부에는 청웅면 옥석리 320번지에서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1907년 ‘정미7조약’(丁未7條約)이 일제의 책동(策動)에 의해 체결되고, 이 때 교환된 비밀각서에 의해 그해 8월 1일 한국군의 해산이 강행되었다. 윤정오는 그러한 일제의 내정간섭에 통분(痛憤)함을 금치 못하고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에서 구국동지 수백 명을 규합하여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할 때 동참하였다. 이 때 같은 고향 출신인 이석용이 전해산과 더불어 의거(義擧)의 기치(旗幟)를 드높이 날리게 되자 그의 휘하(麾下)로 들어가 크고 작은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9월 13일 진안읍을 공격하여 무기 및 군수품을 노획(鹵獲)하여 의병활동 물품으로 보태었다. 9월 16일 진안 내원사에서 적과 접전하여 적 두 명을 사살하고 많은 적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전과(戰果)를 올렸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 위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고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하여 적을 남원 쪽으로 후퇴시켰다.
12월 25일에는 진안 무술촌에서 적 두 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矢洞(지금의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에서 토벌대(討伐隊)와 접전하여 적 한 명을 포살하였으며 3월 17일 수류산에서 적과 접전하여 적 세 명을 포살하였다.
윤정오는 이상의 전투에 참전하였을 뿐 아니라 임실군 석현면 유천리에 사는 한씨와 오지면 어은동(지금의 삼계면 어은리)에 사는 최씨 등 세금영수원들이 의병운동에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세금만 독촉하는 민폐(民弊)를 끼치므로 그들의 집에 방화(放火)하고 볼기를 쳐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의병 사상 특기해야 할 공로(功勞)가 있다. 이석용 의진에서는 화승총을 개조하여 양총과 비슷한 성능을 갖게 하는 기술을 개발, 사용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윤정오와 선봉부장 최덕일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왜적들의 기록에 나와 있다.
즉 1908년(융희 2년) 4월 30일에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이 내부경무국장 앞으로 낸 ‘진안 수비대장이 4월 21일에 大村부근 전투에서 노획(鹵獲)한 총기에 관한 보고’에 화승총을 개조하여 관타식(管打式)으로 하였는데 이상의 공법과 작업은 이학사의 부장 최덕일과 윤정오의 생각에서 나온 것 같으며, 그리하여 이석용 의진에서는 재래식 화승총은 쓰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의군이 장비가 우수한 왜적과 대항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윤정오는 1908년 3월 21일 동지들과 더불어 임실군 성수면 운현 전투에서 적과 접전하던 중 16의사와 함께 순국하였으며 그의 손자 윤종학은 현재 강진면 필봉리에 거주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1券 792面《全北義兵史》 下券 219面
❀ 이 광 삼 (李光三)
註 : 본문 71面의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의 내용과 같음.
❀ 정 군 삼 (鄭君三) 자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진안문화원 발행 《호남창의록》 72面의 전사한 의병들에 대한 제문(祭文)과, 임실문화원 발행 《정재 이석용선생》 문집 280面의 28의사 제문에만 수록되어 있고, 소충사 경내의 28의사 비문과 개인별로 세운 비석에 의졸 정군삼(鄭君三)으로만 기록되어 있기에 28의사의 한 사람으로만 추정될 뿐이다.
1908년(戊申年) 4월 28일 패군장 이석용이 3척단(三尺壇)을 베풀어 제물을 차리고 피눈물로 축문을 지어 통곡하며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정군삼은 1907년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 용바위에서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할 때에 가입한 것으로 보며, 이석용 의병장을 따라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교전에 참가하였다고 추정된다. 그러다가 1908년 3월 21일에 임실군 성수면 운현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분전하다가 의졸로서 정군삼을 비롯 16의사가 함께 순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註 : 편집자의 자료에 의함.
❀ 최 덕 일 (崔德逸)
註 : 본문 65面의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의 내용과 같음.
❀ 최 일 권 (崔一權) 최일권의 인적사항은 전해진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언제 이석용의 호남 의진(義陣)에 가입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진안문화원 발행 《호남 창의록》 72面의 전사한 의병들에 대한 제문(祭文)과 임실문화원 발행 《정재 이석용선생 문집》 280面의 28의사 제문에만 수록되어 있고, 소충사 경내의 28의사 비문과 개인별로 세운 비석에 순창의 전망의졸(戰亡義卒) 최일권으로만 기록되어 있기에 28의사의 한 사람으로만 추정될 뿐이다.
1907년 12월 22일에 두봉리 조월에서 적을 만나 응전하다가 이광삼 참모장과 함께 순국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26面
❀ 한 득 주 (韓得周) 자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진안문화원 발행 《호남 창의록》 72面의 전사한 의병들의 제문(祭文)과 임실문화원 발행 《정재 이석용선생 문집》 280面의 28의사 제문에만 수록되어 있고, 소충사 경내의 28의사 비문과 개인별로 세운 비석에 의졸(義卒) 한득주로만 기록되어 있기에 28의사의 한 사람으로만 추정될 뿐이다.
1908년 4월 28일 패군장 이석용이 三尺壇을 베풀어 제물을 차리고 피눈물로 축문을 지어 통곡하며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으로 보아 한득주는 1907년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 용바위에서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 시에 가입하여 이석용 의병장을 따라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교전에 참가하였다고 추측되며, 그러다가 1908년 3월 21일에 임실군 성수면 운현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분전(奮戰)하다가 의졸(義卒)로서 17人이 함께 순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한 사 국 (韓士國)
註 : 본문 72面의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의 내용과 같음.
❀ 허 윤 조 (許允照) 출신지는 미상(未詳)이나 28의사 중의 한 사람이라는 내용 외에 허윤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전북 의병사》 하권 217面의 양경삼 편과 215面의 성경삼 편에 허윤희와 함께 1908년 2월 18일에 이방리 전투에서 일본군 총탄에 맞아 순절했다는 내용이 있고, 《호남 창의록》(진안문화원 발행 : 김동주) 72面의 기록에 장수의 전망의사(戰亡義士) 허윤조와 의졸(義卒) 성경삼, 양경삼으로 기록되어 있어 허윤조(許允照)가 허윤희(許允熙)로 잘못 표기되었거나 아니면 허윤희가 허윤조로 잘못 표기되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양경삼의 내용을 보면 1907년 8월 말에 이석용이 창의(倡義)하자 가담하여 이석용이 지은 격중가를 부르며 동지를 규합하였다고 되어 있다. 9월 12일에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이 결성된 이후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지에서 유격활동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우다가 1908년 2월 18일에 이방리에서 숨어 유진(留陣) 중 일본군 수비대 소속 정찰대에 탐지(探知)되어 해질녘에 기습을 받아 의진이 응진도 못하고 무너졌다는 내용과 이 때 성경삼, 양경삼, 허윤희(조)가 함께 적탄에 맞아 순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雲峴 싸움터에서 28義士들의 祭文 정재 이석용 의병장(靜齋 李錫庸義兵將)은 1907년 9월 12일 진안 마이산 입구 용바위에서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한 후 그 이튿날부터 마령을 거쳐 진안읍을 습격하고 또 진안 내원사, 임실, 장수, 남원, 순창지역을 유진하며 희생된 11위(位)의 의사(義士)와 1908년 3월 21일 운현(雲峴)에서 전사한 17위(位)의 의사(義士)를 성수면(聖壽面) 오봉리(五峯里)와 운현(雲峴)의 지주(蜘蛛)골에 안장(安葬)한 후 1908년 4월 28일 야음을 틈타 돼지 한 마리를 제물(祭物)로 하여 제사(祭祀)를 지낸 바 있으니 내용(內容)은 아래와 같다.
성상(聖上 : 고종황제) 45년(1908) 무신(戊申) 하(夏) 4월 乙卯 삭(朔)28일 임오(壬午) 패군장(敗軍將) 이석용(李錫庸)은 삼척(三尺)의 제단(祭壇)을 베풀어 제물(祭物)을 차리고 피눈물로 축문(祝文)을 지어 통곡, 용담(龍潭)의 전망의장(戰亡義將) 박만화(朴萬華), 의동(義童) 박철규(朴哲圭)와 허천석(許天錫), 순창(淳昌)의 전망의졸(戰亡義卒) 최일권(崔一權), 두봉(斗峯)의 전망의사(戰亡義士) 이광삼(李光三), 남원(南原)의 전망의사 김사범(金士範)과 의졸 서상렬(徐相烈), 장수(長水)의 전망의사 허윤조(許允照)와 의졸 성경삼(成景三)과 의졸 양경삼(楊敬三), 줄리(崒里)의 피화의졸(被禍義卒) 오병선(吳秉善), 운현(雲峴)의 전망의장 최덕일(崔德逸)과 여주목(呂柱穆), 의사 한사국(韓士國), 의졸 윤정오(尹正五), 한득주(韓得周), 김춘화(金春華), 정군삼(鄭君三), 박운서(朴雲瑞), 김치삼(金致三), 박인완(朴仁完), 김여집(金汝集), 서성일(徐聖一), 박달천(朴達天), 의동 김동관(金東觀), 김학도(金學道), 의승(義僧) 봉수(鳳洙), 덕홍(德弘)의 영소(靈所)에 결별을 고하나이다.
아! 황천(荒天)은 인자(仁慈)하지 못하고 지신(地神)은 영험(靈驗)하지 못합니다. 인자하고 영험하다면 정의의 군사가 어찌 죽게 되었겠나이까? 사직이 복이 없고 생민이 운이 없나이다. 복이 있고 운이 있다면 정의의 군사가 어찌 병들어 죽었겠나이까? 옛날부터 패전(敗戰)의 책임은 장수(將帥)에게 있었으니 엊그제 실패한 것은 내가 실로 총명하지 못해서였나이다. 나라를 욕되게 한 죄는 머리털을 뽑는다 하더라도 속죄하기 어렵고 죽지 못한 부끄러움은 강물을 쏟는다 하더라도 씻기 어렵겠나이다. 뻔뻔스런 얼굴로 제사에 임하여 충의를 다한 넋을 위로하며 붓으로 적어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자 하나이다. 아! 우리나라의 인재는 남쪽 지방이 더 많았나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도 충의의 정신이 열렬하였습니다. 내가 처음 장수(將帥)가 되자 장사(壯士)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노련한 주먹을 휘두르고 나온 사람도 있었고, 널빤지나 삽 같은 것을 메고 나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눈과 이슬을 무릅쓰고 한데에서 생활하며 창을 베개 삼고 방패를 띠로 삼았었나이다. 밤낮으로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는데 어찌 감히 쉴 틈이 있었겠나이까? 위에서는 상을 주어 권장하는 일이 없었고 사방에는 원수들만 가득 했었나이다. 가족들과 오붓하게 지내는 것이 즐거운 일인 줄 누가 모르겠습니까마는 장부의 강직한 마음은 하고 싶은 것이 오직 정의일 뿐이었나이다. 잠시 동안이라도 우리는 정의를 놓을 수 없었으며, 직분은 비록 장수와 병졸이지만 정의는 형제와 같았나이다. 이런 형제들을 죽을 데로 몰아넣었지만 오히려 두렵거나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아, 전국을 돌아보면 정의의 깃발이 수풀처럼 서 있지만 그 행실을 살펴보면 우리 군사가 투철하게 뛰어났었나이다. 재리(財利)에 담담하기는 나약한 사람과 같고 공전(公戰)에 용맹스럽기는 맹수와 같았나이다. 크고 작은 싸움을 막론하고 열 번 싸우면 일곱 번은 패하고 세 번은 이겼었나이다. 이겼더라도 자랑하지 않았고 패하였더라도 한마음으로 뭉쳤었나이다. 늠름하게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정신을 발휘하여 우리의 정의로운 목소리를 만방에 떨쳤었나이다. 먼곳에서나 가까운 곳에서나 우리 군사를 싫어하지 않고 신명처럼 무서워하였습니다. 이처럼 큰 위엄을 가지고 적의 소굴을 무찌를 수 있었는데, 어찌 하늘의 돕는 시기가 끝내 불길(不吉)할 줄 생각하였겠나이까? 아! 슬픔을 참을 수 없나이다. 충간(忠肝)과 의골(義骨)이 가는 곳마다 산더미처럼 쌓였나이다. 아비를 잃은 자식과 남편을 여윈 아낙들의 원한에 하늘의 화기가 소연하고 자제를 잃은 부형들은 외롭기 그지없나이다. 꽃이 떨어진 춘규(春閨, 아녀자가 거처하는 방)는 눈물로 날을 보내고 보리 익은 여름 들판에는 노래로 혼을 부릅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하로 돌아가니 온 누리가 다 원통해 하고 원귀(寃鬼)가 위에 호소하니 상제(上帝)도 슬퍼하나이다. 나는 마음이 돌이 아니라 굴릴 수도 없어 울다 못해 피눈물을 흘리나이다. 좌우 손을 잃었으니 진퇴유곡(進退維谷)이나이다. 천하가 모두 오랑캐이니 쓸쓸하게 어디로 가야 되겠나이까? 아!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의기는 흩어지지 않고 충혼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응당 뇌부(雷斧, 번갯불)가 되어 저 요망한 자들의 무릎을 자르소서. 역사가(歷史家)의 눈은 우리 침사(忱士, 義士)들을 제대로 볼 것이니 장차 밝은 세상이 오면 어찌 먼저 의사들을 표창하지 않겠나이까? 의연한 박장(朴將)은 분기탱천 적을 무찔렀고, 장렬한 최장(崔將)은 적을 꾸짖고 스스로 자결하였으니, 우뚝 세운 절의(節義)는 옛날 사람에게 비하여도 양보하지 않을 만하겠나이다. 진주(晋州)와 금산(錦山)의 일과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겠나이다. 우리 의사(義士)들이 같은 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은 횡도(橫島)에서 일어났던 일과 같고, 어린 사람이 나라를 위해 적과 싸운 것은 왕기가 세운 공과 같으며, 승려가 나라를 위하여 죽은 것은 영규(靈圭)의 충성과 같다고 하겠나이다. 그 충절은 일월처럼 빛나고 산악처럼 높으며, 그 이름은 하해처럼 마르지 않고 영원히 전해질 것입니다. 저 냄새를 따라 분주하게 날며 집을 더럽히는 파리 떼처럼 왜놈에게 머리를 굽혀 나라를 더럽히면서 욕먹고 살다가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해 죽을 난신적자(亂臣賊子)와 비교하면 누가 귀중하겠나이까? 그대들이 이런 것을 안다면 나를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그대들이 떠나버렸으니 우리 일은 어찌 되겠습니까? 나는 비바람 속에 시달려 야윌대로 야위었으니 머리털이 눈처럼 희려고 합니다. 몸속에 끓는 피는 해와 함께 붉습니다. 그대들의 철천지원수는 되갚겠으며 그대들의 혈육은 앞으로 잘 보살필 것입니다. 이 약속을 어긴다면 이승이나 저승에서 어떻게 용납되겠나이까? 죽어서는 한구덩이에 묻힐 만합니다. 알아서 이미 동맹을 했으니 말입니다. 촛불처럼 밝은 영령이 곁에 있는 것 같습니다. 군사들은 모두 소복을 입고 한없이 웁니다. 초목도 슬픔을 머금고 구름과 아지랑이도 음산한 기운을 더합니다. 손을 씻고 술을 따르니 그대들은 와서 흠향하소서. 슬프고 슬픕니다. 이건 누구 때문입니까? 통탄스럽고 통탄스럽나이다. 차라리 정신을 놓아 아무것도 몰랐으면 하나이다. 아! 여러 영령들께서 어찌 원수들을 속히 씹어 나의 마음을 통쾌하게 해 주시지 않겠나이까?
❏ 지주골(蜘蛛谷)에서 장사(葬事)지내며 올린 제문(祭文) (호남 의병 창의록에는 知義洞으로 되어 있음.)
정재 이석용 의병장은 1908년 12월 9일 운현 전투에서 순국(殉國)하신 17위의 의사(義士)들이 잠들고 있는 지주(蜘蛛)골에서 별도로 제사를 지낸 바 다음과 같다.
유(維) 광무(光武) 12년(1908) 세차(歲次) 무신(戊申) 12月 임자(壬子) 삭(朔) 9日 경신(庚申) 분사인(僨事人)‥‥ 일을 실패한 이석용(李錫庸)은 운현(雲峴)에서 싸우다가 죽은 장사(壯士)들을 지주(蜘蛛)골에서 장사(葬事)지낸 다음 날 밤 제사(祭祀)지내며 곡(哭)하고 결별(訣別)하나이다. 전망의장 최덕일, 여주목, 의사 한사국, 의졸 윤정오, 정군삼, 서성일, 김치삼, 한득주, 김여집, 박달천, 박인완, 의동 김동관, 김학도, 의승 봉수, 덕홍은 이것을 아는가? 의졸 김춘화와 박운서는 그 집에서 이미 장사지내서 이 반열에 있지 않으나 아울러 제사 지내 위로하니 아, 한스럽구려. 은근스러운 말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노니. “오호라! 옛날 문왕(文王)은 영대(靈臺)를 쌓을 때 한 사람의 백골(白骨)이 나오자 의관(衣冠)을 갖추어서 장사(葬事)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그 사람의 생사에 대해 전연 모르는 처지이나 성인이 측은한 마음을 간곡히 다하여 마치 유공자에게 베풀 듯 하였다는 것이다. 후세에 초야(草野)의 필부(匹夫)가 나라의 유사 시에 위정자(爲政者)들이 아무런 대책 없이 무모하게 있는 것을 보고 분연히 일어나 의당 대의(大義)를 펴야 할 땅에서 친척(親戚)을 여의고 목숨을 던졌다면 그에 대한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은 더욱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동양 전역에 서양의 물결이 하늘 높이 치솟고 야생마의 독한 무리가 사람을 거의 다 잡아먹고 있도다. 내가 한낱 미약한 몸으로 책상을 박차고 분연히 일어났던 것은 진실로 도리(道理)와 나라가 망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었는데, 다행히 제군(諸君)들을 얻어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를 약간 신장시키고 화이(華夷)를 구별하는 법도를 밝게 보였도다. 불행하게 제군들을 잃어 갑자기 조야(朝野)에 실망을 안겨주게 되었으니 나라를 부흥시킬 기회가 없어졌도다. 혼자서 나라를 구하자고 외쳐대지만 이에 화답하는 자는 적도(賊盜)다. 패인은 운수가 나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부(祈父)가 총명치 못함은 지금만이 아니라, 옛날부터 그러하였도다. 저 푸른 하늘이시여! 나의 죄가 과연 무엇입니까? 미련해서 죽지 못하였으니 허물과 후회가 산처럼 쌓였도다. 생각하건데, 귀에 거슬리는 말일지라도 제군들의 충언을 듣고 싶지만 들을 수 있겠는가? 제군들이 처참하게 죽은 땅엔 적들의 사찰이 삼엄하도다. 시시(柴市)에서 시체를 수습하는 일도 그 아내도 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왕부가 아버지에 대해 애통해 한 것은 그 아들도 말리기 어려웠을 것이로다. 정처 없이 떠돌며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아마 하늘이 제군들의 후사를 책임짓는 것이 아니겠는가? 청산은 영험이 없고 인간은 적국과 같도다. 태양은 빛을 잃고 지하는 기나긴 밤이로다. 엄동설한에 충골(忠骨)이 얼도다. 의로운 혼은 바람에 슬퍼하고 씩씩한 넋은 추위에 놀라도다. 살고 죽는 것이 간격이 없으니 서로 다르기를 원하노라. 즐거움 괴로움을 같이하고 노래와 통곡을 함께 하고 싶으나 그렇게 할 수 없도다. 그래서 관을 사다가 몇 마디 말로써 염습을 하노라. 무덤을 쓸 땅을 고를 겨를이 없고 날짜도 길일(吉日)을 택하기 어렵도다. 수려(秀麗)한 산천, 명랑한 들판에 높은 봉분(封墳), 넓은 묘역(墓域)을 갖는 것이 어찌 숙원이 아니겠는가마는 형세가 저들에게 밀림을 당하여 뜻을 내가 펴지 못하도다. 그래서 난산총목(亂山叢木) 속에다가 자그마한 무덤을 다닥다닥 써서 영원히 길 가는 나그네들로 하여금 나라를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목숨 바친 아무 아무의 무덤이라고 가리키면서 탄식을 자아내게 하노라. 같이 죽지 못한 이 사람은 마음이 어찌 진정되겠는가? 천도가 순환하여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죽은 사람을 조상하며 금대(金臺)를 높이 쌓고 은택이 마른 뼈에 미치게 하던 것과 같은 것을 머지않아 쾌히 볼 것인지? 아니면 문왕(文王)을 기다리지 않고 일어나는 자들이 다시 나아가 이 무덤을 표시하여 능히 썩지 않게 윤색(潤色)을 하는 일이 있을 것인지? 하늘은 차마 폐허(廢墟)시키지 않고 땅도 차마 황폐시키지 않을 것인데, 어떤 초동목동들이 감히 밟아 다닐 수 있겠는가? 오호라! 변변찮은 제물이나마 제군들은 흠향해주시오.
1.4. 제4절 昭忠祠에 세워진 二十八宿와 天文碑 考察
-김 일 권(고구려문화재단)
가. 서론 : 구한말의 호남 의병장 정재 이석용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오봉리 산 130-1번지 일대에 건립된 소충사(昭忠祠)를 찾아가면 다른 곳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흥미롭고 특이한 비군(碑群)이 안장되어 있다. 소충사는 구한말 호남의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과 그를 따랐던 28의사(義士)를 향사(享祀)하는 사당이다. 이 28의사 비군(碑群)의 전면을 보면, 의병 하나하나의 이름과 함께 하늘의 28수 별자리를 각각 하나씩 배당하여 그려놓고 있다. 말하자면 의병들의 숭고한 기개와 희생을 천문의 질서 속에 안치하여 별들의 영원함처럼 이들의 뜻이 영원히 기려지기를 기원한 기념비 성격이 부여된 것을 엿볼 수 있다.
정재 선생은 고종 15년(1878) 임실군 성수면 삼봉촌에서 전주이씨의 3대 독자로 태어나 유가 경전과 역사서 및 제자백가서를 공부하는 등 전통 유학자의 길을 걷다가, 1905년 일제가 고종황제를 위협하여 을사보호조약을 강권으로 체결하자 1906년 미국공사에게 그것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냈으며, 당시 정읍 태인에 와 있던 구한말 우국지사 면암(勉庵) 최익현( 崔益鉉)을 찾아가 구국지책을 방문하는 등 일제의 폭거에 비분강개하던 중, 광무 11년(1907)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순종에게 왕위를 양위케 하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는 폭압을 보고는, 마침내 9월 12일 진안 마이산 용암에서 의병창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500여 명에 이르는 의병들과 모여든 민중들 속에서 “동맹작사(同盟酌辭)”의 고천제(告天祭)를 거행하면서 ‘호남의병창의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을 공식적으로 결성하여 의병장에 추대된 이래, 이후 1909년까지 3년간 전라북도의 진안 용담, 남원, 영광, 임실, 전주, 순창, 태인 등지에서 일제 군대를 상대로 숱한 전투를 벌이어 크고 작은 여러 차례의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8년 10월 근대적인 무기와 조직적인 군사 작전을 펼치는 일제가 1만에 이르는 호남의병 토벌대를 편성하여 토벌 작전에 나서면서 의병들의 희생이 잇따르자 그 아까운 희생을 막고자 정재 선생은 무력투쟁노선을 포기하고 1909년 3월 휘하 의병들을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1911년 3월 일본에 잠입하여 일왕 암살을 기획하였고, 1912년 겨울 다시 비밀결사대인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을 조직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1913년 10월 망명자금을 부탁한 친구의 밀고로 인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전주 경찰서로 수감되었으며, 마침내 만36세가 되던 이듬해 1914년 4월 4일 대구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고야 말았다.
나. 소충사 건립과 28수 천문비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려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고, 아들 이원영(李元泳)은 아버지 이석용과 28의사의 순절을 기리는 의병활동기념비를 전주 덕진공원에 세웠다. 이 비를 다시 고쳐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주위에 김구 선생과 5열사, 호남창의대장 이석용, 28의사를 각각 새긴 비군(碑群)을 만들어 황극단(皇極壇)이란 이름으로 덕진 어린이 공원 입구에 세웠으며, 임실 성수면 소재지에는 정재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를 향사하는 소충사를 건립하였다.
그러다 임실군은 1993년부터 성수면 오봉리 산 130-1번지 일원 20,300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10년간 소충사 확장사업을 전개하였고, 현재의 소충사 성역에 모셔진 28의사비는 원래 성수면 소재지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새로 개장한 소충사 성역의 배치를 살펴보면, 맨 윗자리에 이석용 의병장 묘를 두었고, 그 아래로 28인 의사 합장묘를 두었으며, 그 아래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사당 아래 오른편에 기념관 건물을 세웠고, 그 왼편 부지에다가 관련 비석들을 안치하였다.
소충사 28수비 전경 : 왼쪽부터 차례로 동방칠수, 북방칠수, 서방칠수, 남방칠수이며, 가운데 다른 것보다 높은 비가 북극․남극․칠요를 새긴 비이다.
다시 비석들의 배치는 사당 언덕 아래 횡으로 이석용과 28의사 각각을 새긴 29개의 작은 비석들을 열좌시켰고, 그 왼편 세로줄에는 호남의병창의동맹단(湖南義兵倡義同盟團), 28의사 기적비(紀績碑) 및 조의단(弔義壇, 이승만 대통령 휘호)의 세 비석을 크게 세워놓았다.
29개의 비석군을 자세히 살펴보면, 맨 가운데 중심부에 다른 것보다 높게 세워진 비석이 있는데 이것이 호남창의동맹단의 주역이자 의병장이었던 ‘호남(湖南) 창의대장(倡義大將) 이학사(李學士)’의 조비(弔碑)이다. 이 왼편 날개로 14개의 비군이 나열되었고, 가장 왼편부터 이십팔수(二十八宿) 별자리 중 동방칠수(東方七宿)에 해당하는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와 북방칠수(北方七宿)에 해당하는 두우녀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을 새겼으며, 그 각각에 호남 의병단에서 활약하였던 박만화(朴萬華) 의장(義將) 등 14인을 배치하였다.
오른편 날개의 14개 비군은 이십팔수 별자리 중 서방칠수(西方七宿)에 해당하는 규루위묘필자삼(奎婁胃昴畢觜參) 별자리와 남방칠수(南方七宿)에 해당하는 정귀류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을 새겼고, 마찬가지로 최덕일(崔德逸) 의장(義將)을 비롯한 14인의 이름을 병기하였다. 전체적으로 좌익 14 별자리와 우익 14 별자리가 포진한 형국이다.
그런데 중앙 비를 다시 보면 앞면에 ‘북극(北極)’이라 새겼고, 뒷면에 ‘남극(南極)’이라 새겨 지축의 남북극을 여기에 구현하려 하였으며, 다시 비석의 좁은 옆면부를 따라 ‘일월화수목금토(日月火水木金土)’의 칠요(七曜) 글자를 새겨 놓았다. 칠요는 하늘에 움직이는 일곱 개의 행성을 뜻하는데 전통 천문학에서 중요한 요체로 삼던 것이다. 그 순서는 당시에 이미 통용되었던 태양력의 일주일(一週日) 순서를 따랐다.
이로써 남북극과 칠요 행성을 상징하는 의병대장 이석용은 우주의 중심부 자리에 비유되었고, 그와 더불어 순절하였던 28인의 의병들은 하늘의 적도 주변을 주천하는 28수 별자리에 비유되었다. 28수 중심의 이런 구도는 전통 천문학의 기본 골격을 따른 것이다.
한편, 이 비석들의 봉립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을 중앙비의 뒷면에 ‘봉립위원장 전라북도 경찰국장 장동식(張東植)’이라 새겼고, 규수비(奎宿碑)의 뒷면에 ‘봉립위원 임실 심창무(沈昌茂), 정칠봉(鄭七鳳), 광주(光州) 김안천(金安千), 문승민(文承敏), 김병철(金炳轍), 조병영(曺秉永)’이라 새겼다. 비석에 새겨진 전체 구조와 글자들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표 2> 任實郡 聖壽面 昭忠祠 靜齋 李錫庸 義兵將과 二十八宿 天文碑
* 중심 북극비 * 동방칠수비 : 각 항 저 방 심 미 기 * 북방칠수비 : 두 우 녀 허 위 실 벽 * 서방칠수비 : 규 루 위 묘 필 자 삼 * 남방칠수비 : 정 귀 류 성 장 익 진
다. 二十八宿과 天文思想
이상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28수 별자리 하나하나에 의병들의 이름이 대응되어 있다. 그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28수 별자리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28수는 적도(赤道) 주변에 포진된 수많은 별들 중에서 이정표가 될 만한 28개의 별자리를 특별히 만들어 천문을 관찰하는 지표로 삼았던 별자리 체계이다. 서양 천문학이 태양이 지나는 길 위에 관찰되는 12개의 별자리를 지표로 삼아 황도(黃道) 십이궁(十二宮) 체계를 엮어낸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의 고대 천문학에서는 지구의 북극점이 가리키는 북극성을 천문의 중심으로 삼고 그 북극에서 90도 거리에 있는 지구의 적도를 주목하여 적도 주변을 도는 별자리를 천문 관측의 좌표로 삼았던 것이다. 적도 28수 별자리 체계가 완전히 정착된 것은 전한시대에 이르러서인데, 특히 한무제(141-87 BC) 시기의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서 본격적인 완성을 보게 된다.
사마천은 그 28수 별자리를 사방위로 나누어 사신도(四神圖) 각각의 이미지로 중첩시켜 이해하도록 하였다. 동방의 일곱 별자리는 청룡(靑龍) 칠수(七宿)로, 서방의 일곱 별자리는 백호(白虎) 칠수로, 남방의 일곱 별자리는 주작(朱雀) 칠수로, 북방의 일곱 별자리는 현무(玄武) 칠수로 분속하였다. 이 결과 청룡의 동방칠수(東方七宿)에는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별자리가 분속되었고, 백호의 서방칠수(西方七宿)에는 규루위묘필자삼(奎婁胃昴畢觜參) 별자리가, 주작의 남방칠수(南方七宿)에는 정귀류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 별자리가, 현무의 북방칠수(北方七宿)에는 두우녀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별자리가 분속되었다.
<표 3> 이십팔수와 사신도 및 계절 별자리 관계
그런데 28수 별자리는 하룻밤의 하늘에서 모두 동시에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계절별로 돌아가면서 일부씩 남쪽 하늘에서 차례로 관찰되기 때문에 일종의 주천(周天) 성수(星宿)로서 기능을 한다. 계절을 따라가면, 봄철에는 청룡의 동방칠수가 남쪽 하늘에 떠오르며, 여름에는 현무의 북방칠수 별자리가 관찰된다. 가을에는 백호의 서방칠수 별자리가 보이고, 겨울에는 주작의 남방칠수 별자리가 떠오른다. 얼핏 보기에 북방 현무와 남방 주작이 각기 여름과 겨울에 배당되어 있어 거꾸로 된 측면이 있는데, 이것은 하늘의 천체 운행 방향과 지상의 시간 방향이 서로 거울 대칭을 이루면서 반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빚어지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곧 방위 관점에서는 남방과 여름이 대응되고 북방과 겨울이 대응되지만, 계절의 시간축을 따라서는 여름에 북방의 현무가 대응되고, 겨울에 남방의 주작이 대응된다. 따라서 일년을 시작하면서 봄철의 청룡 별자리 다음 여름철에 현무 별자리가 이르고, 현무 다음에는 가을철 백호 별자리가, 그 다음 겨울철에는 주작 별자리가 차례로 동쪽 지평선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렇게 공간과 시간상으로 조금 다른 듯 하지만 천체의 공간적 관점에서 조망하면, 시간과 공간 곧 사계절과 사방위를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장치였음을 이해하게 된다. 28수 별자리와 사신도가 서로 결합되면서 비로소 28수 별자리가 천상과 지상의 시공간을 연결짓는 중요한 천문 원리로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전통적인 동양의 천문학과 천문사상에서는 북극성과 적도 28수 별자리가 천문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요체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로서는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28수 별자리 체계를 수록한 책으로 조선시대에는 세종대 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 1406-1465)가 편찬하였던 《천문류초(天文類抄)》 속의 <보천가(步天歌)>가 기본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이 구법(旧法) <보천가>는 고려시대부터 중요한 텍스트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다 조선 말기인 철종대에 이르러 청나라의 《연경실측신서(燕京實測新書)》와 《성도보천가(星圖步天歌)》 등을 참고하여 기존의 <보천가>를 개정 편찬한 《신법보천가(新法步天歌)》가 천문학자 이준양(李俊養)에 의해 철종 13년(1862) 관상감(觀象監)에서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19세기 후반 무렵부터는 잡과(雜科)의 시험과목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던 이 《신법보천가》가 전통 천문을 익히는 주요 교재로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근현대에 통용되는 전통 천문의 판본은 세종대의 《구법보천가》와 철종대의 《신법보천가》라는 두 책에 기대는 바가 클 것으로 짐작된다. 소충사의 28수 조의단비에 새겨진 28수 별자리도 이들에 의지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비교하여 보면 별자리 모양이 다소 다른 점들이 있어 소충사의 28수 별자리 그림이 저본으로 삼았던 모본이 과연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좀 더 고찰할 필요가 있다.
라. 28義士 弔義壇 成立과 28宿 碑
이상과 같이 천문의 요체를 표상하는 28수 별자리에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각 의병들을 각각 배당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점검할 필요가 있겠다.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각 4방 칠수가 시작되는 처음에 의장(義將)을 내세웠고 그 다음에 의사(義士)를, 그 다음에 의졸(義卒), 마지막으로 의동(義童) 혹은 의승(義僧)을 내세운 것을 알 수 있다. 곧 의병장 이석용 휘하에 활약하였던 의병들을 사방위로 나눈 다음 각 계급별로 서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동방칠수 : 의장 박만화, 의사 한사국, 의졸 한득주, 최일권, 김치삼, 김춘화, 의동 김동관 북방칠수 : 의장 여주목, 의사 이광삼, 의졸 김여집, 서상열, 서성일, 의동 김학도, 박철규 서방칠수 : 의장 최덕일, 의사 허윤조, 의졸 박달천, 박운서, 정군삼, 성경삼, 의동 허천석 남방칠수 : 의사 김사범, 의졸 윤정오, 양경삼, 박인완, 오병선, 의승 봉수, 덕홍
어떤 인물들이 포함된 것인가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1907년 9월 12일 진안 마이산 용암(龍巖)에서 의병창의를 할 당시 마련되었던 의병 조직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호남창의록》의 권수 및 해제 17쪽에 ‘창의동맹단(昌儀同盟團)’이란 이름으로 실려 있다.
선봉(先鋒) : 박만화, 최덕일, 송판구 중군(中軍) : 여주목, 박운서, 김성학 후군(後軍) : 김사범, 윤명선, 전성학 참모(參謀) : 전해산, 한사국, 이광삼 총지휘(總指麾) : 박갑쇠, 곽자의, 임종문 연락(連絡) : 홍윤무, 박성무, 윤병준 도로부장(道路副長) : 김사원, 김공실, 김성율 보급(補給) : 하규정, 박금동, 박문군 운량(運糧) : 오기열, 조영국, 김학문 기실(記室) : 전해산, 한사국
곧 초기 의병단의 선봉군에 섰던 박만화와 최덕일, 중군의 선봉 여주목, 후군의 선봉 김사범이 사방 별자리의 첫 자리에 안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07년의 의병조직과 28의사 조의단비에 안치된 명단이 서로 일치하지를 않는다.
❍ 동방칠수비 : 각 항 저 방 심 미 기
❍ 북방칠수비 : 두 우 녀 허 위 실 벽
❍ 서방칠수비 : 규 루 위 묘 필 자 삼
❍ 남방칠수비 : 정 귀 류 성 장 익 진
그러면 28의사 조의단으로 봉정된 인물들은 어떤 경위로 선정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참고되는 자료는 《호남창의록》 권1에 수록된 <전사한 의병들에 대한 제문(祭戰亡義士文)>이다.
“성상(聖上) 45년 무신년(1908) 4월 28일 패군장 이석용은 3척의 제단을 베풀어 제물을 차리고 피눈물로 축문을 지어 통곡하니, 용담의 전망(戰亡) 의장 박만화, 의동 박철규와 허천석, 순창의 전망의졸 최일권, 두봉의 전망의사 이광삼, 남원의 전망의사 김사범과 의졸 서상렬, 장수의 전망의사 허윤조와 의졸 성경삼과 의졸 양경삼, 췌리의 피화(被禍) 의졸 오병선, 운현의 전망의장 최덕일과 여주목, 의사 한사국, 의졸 윤정오․한득주․김춘화․정군삼․박운서․김치삼․박인완․김여집․서성일․박달천, 의동 김동관․김학도, 의승 봉수․덕흥의 영소(靈所)에 결별을 고하나이다.”
여기에 거열된 인물들과 소충사 28의사의 명단이 완전히 일치를 한다. 따라서 의병장 이석용이 일제와의 전투를 하다 죽어간 부하 장졸들을 기리기 위하여 1908년 4월 28일에 3척의 제단을 만들어 제사하였었는데 이것이 기초가 되어 이른바 28의사로 봉립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1907년 8월부터 1908년 4월까지 약 2년간 직접 쓴 일기인 <창의일록>을 살펴보면, 1907년 9월 16일 추졸산(酋窣山) 내원사(內源寺) 전투에서 포장(砲將) 박만화(朴萬華)와 동자(童子) 박철규(朴哲圭)와 허천석(許天錫)이 전사하였다. 1908년 3월 21일 비가 퍼붓는 운현(雲峴)의 야간 전투에서 가장 큰 패배를 당하였는데, 포장 최덕일이 자결하는 등 16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3명이 상처를 입었고 2명이 잡혀갔다.
그 뒤 4월 28일 이석용은 운현의 패전한 장소로 찾아가 가시덩굴을 베고 3척 단을 만들어 ‘조사단’이라 하고는 돼지 1마리를 잡아서 전사한 28명의 장졸들을 합제(合祭)하였다. ‘이 때 갑자기 별과 달이 깜깜하고 비와 번개가 날아 번득이니 아마도 신의 영험이리라. 나는 통곡을 하니 온 군사가 슬퍼서 견디지 못하였다.’고 이 날의 슬픈 감회를 술회하고 있다.
4월의 전망의사 제문에 거열된 인물들은 아마 전사한 순서에 따라 수록한 듯하며, 지명은 당시 전사한 곳의 이름인 듯하다. 소충사에 이들의 조사단을 세우면서는 의장(義將)과 의졸(義卒), 의동(義童)의 순서에 따라 재배치한 것이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28의사 조의단비 내역이다.
마. 昭忠祠 28수(宿) 천문비의 역사적 의의
끝으로 28인의 의병들을 천문의 28수에 비유한 것은 그 숫자가 28인이라는 데에서 쉽게 연상되기도 하지만, 의병장 이석용 본인이 이미 천문에 대해 상당한 식견이 있었던 데에서 기인되는 측면도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를 살펴보면, 《호남창의록》 권1의 1908년 7월 20일 작성된 <여러 진영에 전한 격문(傳列陣檄)>에서 이석용은 “여러 진영의 맹주들과 더불어 함께 3척 장단(將壇)에 오르기를 원한다. 북두성(北斗星)을 우러러 서울을 바라보고, 땅을 굽어보며 대중과 맹세를 하노라.” 하면서 천문과 지리의 대대적인 포국 아래 자신의 충의와 기개를 떨치려 하였다.
또한 이석용의 시와 글을 모아 아들 이원영이 1961년 3월 간행한 《정재선생문집》을 살펴보면 그가 천문역법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을유년(1885) 정월 삭일에 지은 <서양역법을 논박함>(駁西曆)에서 “대개 원회운세(元會運世)는 연월일시가 연이어 12와 30으로 한정을 하였으니, 이것이 하늘이 정한 천정상수(天定常數)인 것이며, 여러 집안에서 만고 동안 바뀌지 않은 견해이며 결론인 것”이라 하여 전통적인 천문역법의 정당성을 피력한 다음에, “근래 서양의 문물이 하늘을 뒤덮은 이후 로마의 요망스런 역법이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켜 망아지처럼 종횡무진 날뛰는 가운데 간지(干支)와 양의(兩儀), 시후(時候), 오행(五行)이 모두 이름과 순서를 잃었으며, 윤삭(閏朔)을 없애버리고 세수(歲首)를 호납(胡臘)으로 쓰고 있으니 춘추의 큰 계통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면서 전통 역법이 서양 태양력으로 바뀌는 세태를 개탄하고 있다.
그의 비판은 상당히 세밀한 데까지 이르는데, “하물며 저 서력(西曆)이 반드시 착오가 없는 것도 아니며 이른바 부족한 수가 8천년에 이르면 하루 2시간 40분이 남게 되는데 그것이 끝에 어디로 돌아가겠는가.”라 하여 서양 역법 역시 완전한 것이 아니라 계산상의 문제가 남아 있으므로 굳이 우리 계산법을 낮출 필요는 없다고 옹호하고 있다. 이런 태도 위에 “숭정 연호조차 일찍이 땅에 버렸으며, 북력(北曆)을 쓰는 것도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왔었는데 어찌 차마 서력(西曆)을 쓸 것인가?”라는 학문적 절의론을 외친다.
여기서 북력은 명나라를 대신하여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가 발전된 서양천문학을 받아들여 시헌력(時憲曆)을 반포하였는데 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북력조차 부끄러워하였다니 조선조 후기에 반청숭명의 존화이념이 얼마나 질기었는가를 엿본다.
그리고 12와 30의 상수(常數)를 갖고 시간의 주기 변화 문제를 설명하는 원회운세 이론은 북송의 유학자 소강절(邵康節)이 제시하였던 것인데, 엄밀한 의미의 천문학은 아니며 일년 12달과 한달 30일의 주기를 바탕으로 삼아 우주적인 시간관으로 확대하여간 일종의 사변적 역법 체계이다. 전통 유학을 공부하였던 이석용으로서 이에 대한 신뢰가 상당하였던 모양이다.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소강절의 시간관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 사회의 보수적 안목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된다.
이처럼 이석용이 천문에 대한 식견이 높았고, 의롭게 전사한 휘하의 28인 장졸들을 여러 차례 기렸었는데 이 뜻이 이어져 소충사의 28수 별자리 조의단으로 성립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재선생문집》의 권4 부록에는 정재 선생의 기개와 충의를 찬탄하는 후인들의 싯귀들이 실렸는데, 그 중에 천문에 관련된 이야기가 더러 보인다. 장수 장계의 유영한(柳永垾)의 시에서 ‘의로움은 북두(北斗)에 높고, 이름은 남주(南州)에 가득하네. 우리 대한인의 칭송은 천만년을 가리.’라 하였고, 전주 고사동의 최정열(崔整烈)은 ‘사당 앞 초청받은 것은 봉과 용의 돌이요, 스물여덟의 별(二十八星)은 그 이름이 다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이러한 천문시들은 이석용이 휘하의 장수 최덕일을 위하여 직접 지은 만사(輓祠)에서 ‘그대의 숭고한 빛이 북극성신(北極星辰) 위에 드리웠고, 그대의 이름이 남주(南州)의 사녀(士女) 사이에 가득하도다.’ 하였던 것처럼, 영원히 빛나는 별에다 애통한 영혼의 충절을 담아내려던 발로라 하겠다.
이런 정신을 이어간 끝에, 결국 단기 4292년(1959) 작성된 <28의사 소충사 유지책에 관한 건>에서, ‘하늘에는 별이 경염됨이 있어 이십팔수(二十八宿)요, 나라에는 의사(義士)가 있어 28인이라. 성수면 소재지에 있는 28의사 단비(壇碑)와 사우(祠宇)는 우리 임실군의 역사 전후에 없는 첫 사업으로 창설되었다.’라는 매듭으로 결말을 보게 되었다. 곧 소충사를 건립하면서 28의사 조의단에다 하늘의 적도 28수 별자리를 하나하나 응대시켜 그들의 충의가 천문의 도수처럼 영원하기를 기원하였다.
그런데 이석용의 비석에는 천문의 중심인 북극성(北極星)을 지칭하면서도 이 보다 더욱 천문의 요체가 되는 ‘북극과 남극 및 일월화수목금토’라는 지축(地軸)과 칠요(七曜)에 응대시키고 있다. 소충사의 28인 조의단비에다 천문의 질서 전체를 부여하기를 기원하였던 것이다. 만일 조선조의 왕정시대였다면 북극성이 제왕을 상징하므로 참람된다하여 불가능하였을 이야기가 여기에서는 구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해방 후 민국시대로 넘어와서 자유로운 상상력이 마음껏 발휘된 끝에 호남의병장 이석용을 북극에 대응시키고 그 휘하 전몰 의병 28인을 천문의 주천 성수인 이십팔수에 자리매김하는 천문적 드라마의 연출이 가능하였다고 하겠다. 전통 천문의 현대사회적 변용이라 이를 만하다.
역사상으로 장수들을 28수에 대응시키는 고사는 중국의 후한 광무제가 건무(建武) 원공(元功) 장수들에 부여한 것이 처음이며, 이후 수나라와 당나라에서 이런 형식을 적용한 예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소충사의 경우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소충사는 근대에 들어서도 전통 천문의 원리가 여전히 활발하게 살아있는 현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천문의 원리를 지상에서 구체적인 물상으로 투영시켜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충사의 28수 천문비들이 더욱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우리의 문화를 풍부하게 가꾼 값진 문화재로서 그 가치가 널리 알려질 수 있기를 앙망한다.
그는 이즈음, 깊이 생각한 바 이대로 투쟁을 계속하다가는 의병들의 아까운 생명만 희생될 뿐이라 판단하고 1909년 3월 6일 자기 휘하 의병들을 일단 해산하여 귀가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의병들에게 다시 모일 때에는 언제라도 죽음을 함께 하기를 거듭 다짐하였다. 그러나 의병들은 귀가할 형편이 못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던 의병단을 떠나 이제부터는 지하로 들어가 구국운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의병단을 해산한 뒤 이런 시 한 수를 썼다.
호남 땅 삼월이라 살구꽃은 흩날리는데, 나라 등진 이 내 몸은 갑옷투구 벗었다.
불여귀 소쩍새도 세상일을 알아서인지 나를 향해 끊임없이 슬피도 우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끝내 순종황제(純宗皇帝)를 폐위하고 합방(合邦)이란 미명아래 조선을 저들의 손아귀에 완전히 집어넣었다. 이것은 우리 겨레의 천추만대(千秋萬代) 씻지 못할 오욕이며 역사적 비운이었다. 이 때 그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하고 땅을 치며 통곡하였으나 그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정세는 일변하여 그전처럼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항거할 수도 없었다.
1911년 3월 그는 몇 명의 옛 동지들을 모아 비밀조직을 하였다. 그의 비밀조직은 일본(日本)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일본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는 1912년 다시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비밀 결사대를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이라고도 한다. 이 때 조직된 비밀결사대는
단장 : 이석용(李錫庸) 단원 구례 : 정찬석(鄭贊錫) 하동 : 최제학(崔濟學), 이규진(李圭鎭) 전주 : 최병심(崔秉心) 임실 : 김병주(金炳周), 최창열(崔滄烈) 진안 : 정진희(鄭鎭喜), 최자운(崔子雲), 이경하(李景夏) 곡성 : 안자정(安子精), 안영오(安潁五), 유인수(柳寅秀) 조영선(趙泳善), 조우식(趙愚植) 남원 : 김경호(金景浩), 조성민(趙成珉), 김인식(金仁植) 김학수(金學洙), 허 간(許 榦), 허 주(許 柱), 허 업(許 業)
등이다. 이 비밀결사대는 그가 의병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자기 의진의 주 활동범위 내 각 지역에 구축된 거점 조직이었다. 이 결사대의 인사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모병을 한다거나 무기와 군자금과 군수품 등을 보급하여 병력을 보충해 주고 의진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이들 단원과 이석용의 혈맹관계(血盟關係)는 그의 문집 《정재집(靜齋集)》에 실려 있는 바 그들에게 보낸 서신 내용으로 보아 긴밀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고, 일부 전해지고 있는 《불망록(弗忘錄)》의 내용에서도 군자금과 군수품 보급상황을 엿볼 수 있다.
정세가 일변하여 종전처럼 대규모의 의병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1911년 3월 몇몇 동지들과 함께 일본 동경에 잠입하여 일본천황을 암살코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912년 壬子년 겨울에 비밀결사대를 조직 동지들과 중국으로 망명하려고 결심하였던 것이다.
일본경찰과 헌병들의 거미줄 같은 경계망과 끈질긴 추적으로 말미암아 국내 투쟁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그곳의 동포들과 손잡고 항일운동을 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기 위하여 막대한 자금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비밀맹단은 ‘壬子冬密盟團’ 이라고 일컬었으나 실은 이석용이 의병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자기 의진(義陣)의 주 활동범위 내의 사람들로 각 지역에 구축한 거점조직으로서 그 명단과 행장은 아래와 같다.
❀ 김 경 호 (金景浩) 남원 사람으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그 밖의 자세한 기록은 미상(未詳)이다. 기록으로 보아 임자동밀맹단원으로 파악되나 활동 근거나 자료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2面
❀ 김 병 주 (金炳周) 김병주(호적상 仲文)는 字가 문백(文伯) (전북 의병사에는 서운(瑞雲)이라 기록되어 있음)이며, 호는 위제(危齊)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임실군 성수면 도인리 405번지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간재 전우의 문인으로 경전을 통달하고 학행이 높아 존경을 받았으며 요지에 학당을 세워 후진을 교도하여 성취한 이가 많아 세상의 사표가 되었다.
선생께서는 1911년 이석용 의병장이 의병활동을 재개하기 위하여 거점조직으로 ‘임자동밀맹단’을 조직할 때 최창열과 함께 임실지역 대표로 활동 중 군자금 모금에 진력하였다. 그는 정재 이석용 의병장이 체포된 후 고향에서 나라 걱정과 높은 학덕으로 후학들을 교육하며 생활하다가 1936년 11월 12일 별세하였으며 후손으로는 증손인 상영과 순영이 서울과 전주에 살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4面제적등본과 족보내용 발취
❀ 김 인 식 (金仁植) 김인식은 1864년 1월 24일 임실군 삼계면 후천리 440번지에서 태어났으며, 자(字)는 사흥(士興)이고, 호는 독수제(篤守齊) 또는 하석(霞石)이며, 처음의 이름은 옥경(玉經), 홍식(洪植), 복경(復經)으로 불렀다. 본관은 경주이다.
《전북의병사》와 《정재 이석용선생의 문집》, 《독수제》 문집에 의하면 정재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연재 송병선 선생의 문하생으로 을사조약 이후 변화하고 있는 일제 침략에 항상 나라 걱정과 함께 정재 의병장이 이끄는 호남의병들이 활동하는 데 물질적, 정신적 지원에 힘을 모았으며, 의병이 해산된 뒤에는 이석용이 의병활동 재개를 위해 각 지역을 대표하여 조직한 비밀 단체인 ‘임자동밀맹단’에 가입하여 김학수와 함께 당시 남원지역의 대표로 군자금 모금에 전력하였다. 정재 선생이 일경에 체포된 뒤에는 여러 곳에서 나라 걱정과 높은 학덕으로 후학들의 교육에 열중하며 생활하다가 1939년 9월 27일 향리에서 별세하셨다. 선생의 자(子)는 학순(學舜)이고 손(孫)은 영기(永基)이며 증손(曾孫)은 진억(鎭億)으로 증손은 현재 임실에서 공직에 몸담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3面《篤守齊 文集》 上卷편저자 확인에 의함.
❀ 김 학 수 (金學洙) 자(字)는 성근(聖根), 호는 노우(魯于), 본관은 경주이다.
1887년 1월 24일 지금의 임실군 삼계면 홍곡리 괘평에서 태어나 살았으며 벼슬은 참봉(參奉)이다.
이석용이 의병활동 재개를 위해 각 지역에 조직한 비밀단체인 임자동밀맹단의 남원지역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됨에 따라 국권이 피탈(被奪)되고, 이어 1907년 7월 ‘정미7조약’으로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무력투쟁인 의병전쟁이 재개되었고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민족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석용은 1907년 기삼연(奇參衍)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구성하자 종사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독자적인 의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창의동맹’을 결성하고 전해산 등을 참모로 기용하고 전북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수 차례 교전을 갖고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후 1911년 의병활동을 재개하기 위하여 거점조직으로 임자동밀맹단을 조직하고 군자금 모금에 진력하였다. 김학수는 이석용이 결성한 임자동밀맹단에 가입하여 남원지역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11년 10월에 20냥, 1912년 5월에 15냥, 9월에 5냥, 11월에 20냥을 군자금으로 제공하여 임자동밀맹단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19년 향리에 삼계보통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쓰기도 하였고, 1939년 5월 19일 고향에서 순직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233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5券 154面
❀ 안 영 오 (安潁五) 영오(穎五)는 자(字)이며 영오(永吾)로도 쓰인다. 이름은 재창(在昶), 호는 신와(愼萵)이고 1878년(고종 15년) 11월 3일에 방섭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자정의 재종형으로 같은 마을 출신인데 친형제처럼 지냈으며 기우만, 곽종석 두 스승에게 같이 배웠다. 덕행이 있어 향리의 사표(師表)가 되었고 1935년 4월 3일에 향년 58세로 별세하였다.
1941년 이석용 비문사건 때 사후(死後)인데도 그의 집은 가택수색을 당하여 서책을 뒤지고 일부는 압수해 갔다. 그 후에도 계속 감시를 받고 가택수색을 당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1面
❀ 안 자 정 (安子精) 자정은 자(字)이며 이름은 훈(壎), 초명은 재숙(在淑)인데 일본식민지시대에는 자기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라 하여 소(塑)라는 이름으로 행세하였다.
호는 분암(墳庵)이다. 본관은 순흥이며 1881년(고종 18년) 12월 8일에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에서 홍섭의 아들로 태어났다. 재주가 뛰어나 기우만과 곽종석에게 사사(私事)하여 유학자로서 고명(高明)하고 제자가 1천여 명에 달하며 스승의 파리장서(巴里長書)에 힘이 된 바 컸다.
이석용이 의병활동의 재개를 위하여 각 지역에 조직한 비밀조직인 임자동밀맹단의 곡성지역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강제체결로 국권이 피탈(被奪)되고, 이어 1907년 7월 ‘정미7조약’으로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을 재개하였고,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민족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석용은 1907년 기삼연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구성하자 종사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독자적인 의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창의동맹’을 결성하고 전해산 등을 참모로 기용하고 전북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수 차례 교전 끝에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1909년 의진을 해산하였다. 그 후 1911년 의병활동을 재개하기 위하여 거점조직으로 임자동밀맹단을 구성하고 군자금 모금에 진력하였다. 안자정은 이석용이 결성한 임자동밀맹단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13년부터 향리인 안계정사(精舍)에서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이석용의 비문사건으로 임실경찰서에 수감되어 곤혹을 치르기도 하였고 해방이 될 때까지 왜놈의 경찰에게 몇 차례나 서책의 몰수, 가택수색 등 심한 괴로움을 당하였다.
1958년 2월 12일에 향년 78세로 별세하였다. 유림들이 그의 학덕을 숭앙하여 산앙사(山仰祠)에 배향(配享)하였다. 유고로 분암집(墳庵集) 10권의 책이 있으며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1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5券 257面
❀ 유 인 수 (柳寅秀) 인수는 초명이고 이름은 병태(炳泰)이며 자(字)는 문휴(文休), 호는 청호(靑湖)이다.
본관은 선산이며 미암 회춘의 후손으로 1860년 3월 17일 곡성군 오지방(오곡면 덕산리)에서 태어나 살았으며 1927년에 별세하였다.
국권상실의 위기에 직면하자 유인수는 1908년부터 이석용 의진에 군자금을 제공하여 의병의 항일투쟁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는 1908년 9월에 15냥, 1909년 10월에 3냥, 1912년 4월에 20냥 등 총 38냥의 군자금을 지원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1912년 이석용이 의병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각 지역에 조직한 거점조직인 ‘임자동밀맹단’의 곡성지역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약간의 부력도 있었으나 불망록(弗忘錄)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타인에 비해 이석용 의진에 많은 후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2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5券 290面
❀ 이 경 하 (李景夏) 경하는 자(字)이며 이름은 병연(炳淵)이고 호는 국사(菊史)이다.
본관은 진안(鎭安)으로 진안 출신이다. 최자운, 정진희와 함께 진안을 대표하는 밀맹단원으로 활동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4面
❀ 이 규 진 (李圭鎭) 경남 하동 사람으로 하동을 대표하는 인물로 최제학과 함께 기록되어 있어 임자동밀맹단의 단원임을 알 수 있으나, 그 밖의 내용은 미상(未詳)이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1面
❀ 정 진 희 (鄭鎭喜) 字는 택신(宅信)이고, 호는 수당(修堂)이며, 일명 종엽(鍾燁)이라고도 한다. 본관은 동래이고 1885년 3월 13일 진안군 마령면에서 태어났으며 학행이 겸전(兼全)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비분강개하며 구국의 일념을 떨치지 못하고 다음 해 1911년 3월에 옛 동지 몇 명을 규합하여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일본에 건너가 일왕을 암살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1912년 이석용이 의병활동의 재개를 위해 각 지역에 비밀결사인 ‘임자동밀맹단’을 조직하자 최자운, 이경하와 함께 진안 지역을 대표하는 단원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중국 망명을 위해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동년 10월경에 피체(被逮)되었다. 이후 진안군 마령면에 거주하면서 이석용 의병장의 제례를 주관하였고, 후진양성과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일경의 감시에 시달리다가 1940년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0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5券 396面
❀ 정 찬 석 (鄭贊錫) 자(字)는 숙명(淑明)이고 구례의 대표이며 구례군 해교사람이다.
기타 인적사항과 활동사항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1面
❀ 조 성 민 (趙成珉) 호는 거남, 본관은 한양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 산서(山西) 경남(慶男)의 후손으로 지금의 장수군 산서면 동고지에서 태어났다. 기록으로 보아 임자동밀맹단원임은 파악되나 활동근거나 내력이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2面
❀ 조 영 선 (趙泳善) 자(字)는 이경(而慶), 호는 배헌(拜軒), 본관은 옥천이다. 곡성군 옥곡면 오지리에서 창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임자동밀맹단원으로서 조우식, 안자정, 안영오, 유인수와 함께 활동하였으며 곡성지역을 대표하는 단원이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2面
❀ 조 우 식 (趙愚植) 자(字)는 종안(宗顔) 호는 성암(省庵) 본관은 옥천이며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에서 용섭의 아들로 태어났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1월 전라북도 순창군 구암사에서 전주 의병대 및 남원의병대와 함께 적과 접전하였다. 음력 4월 13일(양력 6월 4일) 태인에서 의진을 구성한 면암 최익현 의진이 정읍, 순창, 곡성을 거쳐 순창으로 되돌아왔다. 조우식은 이 때 면암의 의진에 합진(合陣)했다.
4월 20일 관찰사 이도재가 의병을 해산할 것을 권유하는 황제의 칙지(勅旨)와 고시문을 전해왔다. 이 때 읍의 동북쪽에서 일본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보고가 있어 돈헌 임병찬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보니 왜군이 아니라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 군사들이었다.
면암은 관군인 진위대와는 접전할 수 없다고 하며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종용(慫慂)했으나 진위대는 의진을 향하여 포화를 퍼부어 이 때 의진은 모두 흩어지고, 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하였다. 면암의 곁에는 조우식, 최제학 등을 비롯한 12명의 문인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공격해 들어온 관군에 의하여 이들은 모두 체포되고 경성으로 압송되어 신문(訊問)을 받았으며 조우식은 징역 8월에 笞(태) 100도(度)의 형을 받고 석방되었다. 석방된 뒤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를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2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券 927面
❀ 최 병 심 (崔秉心) 자(字)는 경존(敬存)이고 호는 금재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874년 10월 5일 전주 玉柳洞(지금의 교동)에서 태어났다. 간재 전우(艮齋 田愚)의 수(首)제자이며 조선조 유학의 저명인으로 1905년 전주에 옥류정사(玉流精舍)를 개설하고 일천여 명의 제자를 배출하여 명성을 떨쳤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勒結)되자 단식으로 항거하고 토역선참(討逆先斬)의 격문을 작성하여 도처에 붙이는 등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1912년 호남창의대장 이석용이 전남북 양도에 걸쳐 일본군대와 항전을 계속하자 독립임자동밀맹단을 조직하고 각 지역을 분담하여 활동할 때 전주지방을 맡아 이석용의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다.
1918년 ‘옥류정사’가 항일사상의 본거지로서 큰 영향을 행사함에 간파한 일제가 ‘옥류정사’ 일대 1,800여 평을 잠업(蠶業)시험장으로 조성한다는 구실을 세워 협박강탈하려하자 단식으로 저항하고 토지강제 수용령이 발동되자 결사 항거하였다.
이어 일제가 옥류동 집 일대에 방화를 하였으나 “불에 타 죽겠다.”고 버티다가 일경에 의해 구출되었으며 그 후 토지는 수용되고 말았다. 1920년 염재 조희제(念齋 趙熙濟)가 일제의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실상을 담은 野史集(염재야록)을 저술, 발간할 때 서문을 작성한 연유로 일경에 피체(被逮)되자 6일간 단식으로 항거하였다. 그 때 임실경찰서에 수감되어 곤욕을 치렀다. 또한 1942년 일제의 소위 동화정책으로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반대하고 조상의 성씨를 수호하며 84세까지 살았고, 문집 15권이 전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3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9券 486面
❀ 최 자 운 (崔子雲) 자운은 자(字)이며 이름은 준용(俊庸)이고 호는 양재(陽齋), 본관은 전주로 만육 양(晩六 瀁)의 후손(後孫)이다.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 출신(出身)이며 정진희, 이경하와 함께 진안 지역을 대표하는 밀맹단원으로 학덕이 있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4面
❀ 최 제 학 (崔濟學) 字가 중열이며, 호는 습재(習齋)이고, 본관은 탐진(眈津)인데 1882년(고종 19년) 3월17일 진안군 성수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호이고 어머니는 흥덕 장씨이다. (《전북의병사》 하권 472~477面)
최제학은 면암 최익현 문인으로서 의병대에서 활동하였으며, 1905년 2월 면암 최익현이 일본을 배척한다는 이유로 일본군 사령부에 끌려가서 곤혹을 치른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최제학의 나이는 25세의 청년으로 면암을 모시고 시종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화를 촉구하기 위하여 면암은 판서 이용원, 김학진, 관찰사 이도재, 참판 이성렬, 이남규 등에게 글을 보내어 함께 거사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6년 최제학은 수남 고석진과 함께 스승 면암을 찾아뵙고 거의(擧義)에 대한 계획을 진언(進言)하였다. 이에 면암은 제자들과 의논하여 태인에 은거중인 전 낙안군수 돈헌 임병찬과 제휴하기로 하고 이어 1906년 3월 3일 최제학은 면암의 서신을 가지고 돈헌을 찾아가 일을 성사시켰는데 이 자리에서 임병찬은 정식으로 면암을 스승으로 모시는 집지(執贄)를 하였고, 면암은 돈헌에게 군사를 모으고 훈련시키는 일을 일임(一任)하였다.
이후 습재는 3월 면암과 함께 진안으로 가서 그곳에 뜻있는 선비들과 면암의 만남을 주선하였으며 면암의 거처를 그의 집이 있는 삼우당으로 잡았다. 면암은 이후 한달 여 동안을 진안에 머물면서 여러 인사들과 만나기도하고 서신으로 연락도 하며 4월 15일 다시 태인으로 돌아왔다.
윤 4월 8일 면암이 담양 용추사로 가서 송사 기우만을 비롯하여 남도 유림 50여 명과 만나 거의(擧義)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동맹록에 서명하는데 습재도 서명을 하였다. 이후 습재는 음력 4월 13일 무성서원 거의(擧義)에 참여하게 되고, 이어 면암은 최제학 등 문인과 함께 6월 4일 태인 무성서원에 회동하여 유생 80여 명의 호위를 받아 6월 5일 정읍, 고창, 순창으로 이동하였다. 정읍에서 각종 무기를 접수하여 내장산에 들어가 유진(留陣)하고 6일 순창으로 되돌아가 무력을 보강하고 곡성으로 진군하였다.
9일 다시 회군하여 오산촌을 거쳐 19일 순창으로 되돌아갔다. 다음날인 20일 순창읍의 동북쪽에서 왜병이 들어온다는 보고가 들어와 돈헌이 군대를 이끌고 나가보니 왜군이 아니라 전주, 남원의 진위대들이었다. 면암은 관군인 진위대와 접전할 수 없다며 그들에게 물러날 것을 권고하였으나 진위대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먼저 포화를 퍼부었다. 이때 중군장 정시해는 관군의 탄환을 맞고 순국하였다.
이틈을 이용하여 의진(義陣)은 모두 흩어지고 면암 곁에는 29명만이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의병들이 대항하지 않자 관군은 포위망을 좁혀 왔으며 이튿날 전원을 경성으로 압송한다는 황제의 칙명(勅命)을 전달하였다. 이때에는 면암과 최제학을 비롯 12명만 남았을 따름이었다. 특히 면암 최익현과는 최후까지 행동을 같이 하였음은 물론, 면암의 의병이 해산될 때까지도 면암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를 비롯 12명이 면암과 함께 6월 18일 전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訊問)을 받았으며 김기술, 문달환 등은 석방되고 최제학, 고석진은 구류 4개월, 그리고 면암과 돈헌은 8월 하순 대마도에 유배형을 언도 받아 떠나고, 최제학은 징역형을 받고 출소한 후, 이로 인하여 면암의 호남창의는 막을 내렸다고 한다. 이들을 두고 순창의 12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최제학은 1959년 가을에 병을 얻어 9월 10일 하동(河東) 사동(寺洞)의 집에서 서거(逝去)하니 향년 78세였다. 기록으로 보아 1912년 겨울, 당시 이석용 의병대장이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중국으로 건너갈 계획을 세워 조직된 단원의 한 사람인 최제학은 이규진과 함께 하동사람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하동을 대표하는 ‘임자동밀맹단’의 단원임을 알 수 있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券 955面
❏ 습재 최제학 선생의 비문
이곳 삼우당은 명문 탐진 최씨의 터로 효제의 가풍이 면면히 이어온 곳이며 또 을사 직후에 의열에 불타던 최제학 선생이 그 스승 면암 최익현 선생을 받들고 호남 최초로 의병활동을 준비하던 곳이다. 선생의 자는 仲悅이요 號는 習齋이다. 1882년 3월 아버지 成鎬와 어머니 興德張氏의 차남으로 이곳 목동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不流齊 李起晦의 문하에 들었고 淵齊 宋秉璿, 松沙 奇宇萬 선생을 받들던 중 면암을 흠모하여 사제의의를 맺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통분한 선생은 곧 면암과 송사를 찾아 구국의 계책을 품의하고 다음해 정월에 秀南 高石鎭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방책을 마련한 뒤 면암의 뜻을 받들어 돈현 임병찬과 초기 의병활동 주도세력을 규합할 때 돈헌은 태인의 鍾石 여막을 거점으로 하고 습재는 면암을 이곳 삼우당에 모시고 注書 李浩鎔과 장수태수 鄭休鐸, 임실태수 趙奎夏, 운봉주서 朴鳳陽, 영남면우 郭鍾錫, 화개 姜頭領 등과 연락하여 뜻을 모으며 형인 若川 濟泰와 함께 가산을 팔아 軍자금을 마련하였다. 나이 25세에 召募將이 되어 순창으로 무기를 옮길 때 상여를 꾸며 日帝의 눈을 피했으니 그 같은 智慧와 勇氣에 대하여 그 때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면암이 없으면 습재도 없고 습재가 없었으면 면암도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녹슬은 창칼이 저들의 신예무기를 대항할 수 있었으랴. 이때에 패전과 동시에 一狂 鄭時海 는 순국하고 왜적에게 끌려간 면암은 3년, 돈헌은 2년의 형을 비롯하여 선생과 수남도 4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한 선생은 대마도로 면암을 찾아 극진히 간병을 하다가 면암이 순국하니 장례를 극진히 모셨다. 고향에 돌아와 高山 尹滋臣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회를 노려 방랑하다가 1915년 가을에 지리산 하동 장암에 들어가 은거하던 중 1959년 가을에 한 많은 일생을 마치니 78세였다. 실로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의 쓰라린 역사 속에 그리고 나라를 잃은 통분 속에 또 대한민국 건축 초기의 혼란 속에 충렬과 정의에 몸부림치다가 돌아가셨으니 이 의롭고 빛나는 일생을 기리어 작은 이 돌에 선생의 행적을 일부나마 새겨 이 나라 자손만대에 길이길이 전하고자 한다.
註 : 《習齋 崔劑學先生의 遺稿集》 187面
❀ 최 창 열 (崔滄烈) 공(公)의 字는 회향(晦鄕)이고 호는 화봉(華峯)이며 본관은 全州이다.
선생은 1877년(丁丑) 7월 5일 임실군 성수면 봉강리 89번지에서 父 최우택(崔友宅)과 모(母) 경주이(慶州李)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公)께서는 글을 좋아하여 유년기에는 남원의 농산 신(申)선생에게서 수학하였고, 성장하여 간재 전우(艮齋田愚)선생의 문인이 되어 성리학의 심오함을 듣고 치가와 수신에 힘써 왔다. 공의 나이 16세에 전주이씨와 혼인하였고, 그 이듬해인 계사(癸巳)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 후 어머니를 모시고 5남 1녀의 형제들을 거느린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으며 슬하에 3남을 두고 어려운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면서도 나라 걱정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향리의 선각자로서 존경을 받아왔다.
특히 공의 9대조 영길(永吉)은 임진란에 공을 세워 도사창주첨사를 지냈고, 가선대부중추부사를 역임하셨으며, 8대조 완성(完成)은 동지중추부사(2등공신)를 하셨고, 7대조 후량(後良)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문인으로서 9대조가 건립한 정자(飛飛亭 : 완주군 삼례 소재)를 쓸고 닦으며 관리해 오다가 일본인에 의하여 불에 소실(선판은 불길에서 튀쳐나와 멸실되지 않았음)되고 공의 8대조가 임진란에 큰 공을 세워 나라로부터 하사받은 이 일대의 토지를 몰수하는 등 일본인의 핍박이 극에 달하자 크게 분노한 公은 면암 최익현 선생의 항일구국운동에 뜻을 같이 해 왔다.
또한 정재 이석용 의병장과 같은 동향인이며 1년 지기 벗으로서 밥을 굶으면서도 군자금을 모아 의병들에게 전달하고 김병주와 같이 임실을 대표하는 ‘임자동밀맹단원’ 으로 활약하였다.
일본인에 의하여 소실된 정자(비비정)는 1901년 공의 고향인 임실군 성수면 봉강리에 이건하고 당우를 구축하자 스승이신 간재 선생께서 박약제(博約濟)라 편액하여 주셨으며, 그곳에서 나라를 찾기 위하여 식자배출을 위한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 현 성수면 봉강리 소재 비비정은 상량문에 1930년에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192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의 시묘를 하였으며, 마지막 날 솥 밑이 빠져 공의 효심을 하늘이 알고 그랬다고 전하고 있다. 공께서는 평생소원이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0년(庚辰) 향년 64세로 생을 마쳤고 유고로서는 《화봉집(華峯集)》 두 권이 있다.
후손으로는 선생이 3형제를 두셨으며 장손으로는 각각 석호, 장호, 현호가 고향과 미국에서 살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4面《全州崔氏 族譜와 華峯集》 拔萃
❀ 허 간 (許 幹) 자(字)는 직수(直叟) 호는 노서(蘆西),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1868년(고종 5년)에 지금의 임실군 삼계면 목동에서 태어났고, 1924년에 별세하였다. 기록으로 보아 임자동밀맹 단원으로 파악되나 활동내력이 파악되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3面
❀ 허 업 (許 業) 자(字)는 암경(巖卿), 호는 몽회(夢晦)이고 본관은 양천이다.
1883년(고종 20년)에 지금의 임실군 삼계면 목동에서 태어났고, 학행으로 향리에서 존경을 받았으며 1922년에 별세하였다. 기록으로 보아 임자동밀맹단원으로 파악되나 활동내력이 파악되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3面
❀ 허 주 (許 柱) 자(字)는 이경(理卿), 호는 석당(石堂)이고 본관은 양천이다. 지금의 임실군 삼계면 목동리에서 태어났으며 벼슬이 박사(博士)였다. 기록으로 보아 임자동밀맹단원으로 파악되나 활동내력이 파악되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註 : 《全北義兵史》 下卷 233面
정재 이석용 의병장은 이상과 같이 ‘임자동밀맹단’을 조직하여 큰 뜻을 버리지 않고 오직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의진이 해산한 뒤에도 계속 활동을 전개하여 왔으며 1912년 10월 12일 자신이 의병활동을 할 때 군량과 자금을 보내주던 고향 친구 정동석(鄭東錫)을 찾아갔다. 이석용은 그를 찾아가 그 동안의 의병활동에 지원하여 준 데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자신의 국내활동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과 그리하여 중국으로 망명할 것 등을 의논한 뒤 자신의 망명자금을 다시 한 번 부탁하였다. 정동석은 그의 부탁을 쾌히 승낙하였다. 정동석은 10월 13일 그의 부탁대로 자금을 건네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이랴? 정동석은 그를 배반하고 임실 경찰서에 이석용을 고발한 뒤 10월 12일 전남 순천으로 도망해 버렸다. 그것도 모른 채 13일 새벽 이석용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정동석을 찾아갔던 것이다.
마침내 이석용은 일본경찰에 포위되어 정동석의 집(지금의 성수면 삼청리 429-1번지)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가 그의 나이 겨우 32세였다. 임실 경찰서로 끌려간 그는 전주 경찰서로 옮겨져 전주법원에서 살인, 방화 및 강도죄가 적용되어 사형(死刑)을 선고받았다.
이석용 의병장의 큰아들 원영(元泳)은 기해(己亥 : 1899)년 동짓날이 생일이니 1912년 부친이 체포당할 때 열네 살이었고,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지리산 속 산내면 달궁에 쫓겨와서 살았고 그 때 고광순(高光洵) 의병진(義兵陣)의 의병선봉장 고진사(高進士) 광수(光秀)의 가족도 얼마간의 돈을 주고 집을 사서 살았던 운봉(雲峯) 닭실 집을 일본 군경이 달려와서 불을 질러버리니 하는 수 없이 달궁(達宮)으로 들어가 남의 협실에서 살았다. 고진사(高進士)의 딸도 기해(己亥 : 1899)생으로 하지(夏至)날이 생일이어서 이원영과 동갑이었다. 의병은 의병끼리 통하는 지라 이 의병장이 체포당한 다음해 1913년에 두 사람을 혼인(婚姻) 후 하산(下山)시켜 충절(忠節)의 가정(家庭)을 보존토록 하였다.
그리고 1914년 사형(死刑)이 집행된 이석용 의병장의 시신(屍身)은 16세의 아들 이원영과 24살의 고진사(高進士) 장남 고재진(高在振) 두 사람이 대구형무소에서 거창(居昌) 안의(安義)까지 허술한 관에 넣어 지게로 운구(運柩)하고 안의(安義)에서 임실 성수 고향까지 그곳 선비 의병동지들의 주선(周旋)으로 상여를 꾸며 반상(返喪)하였다 한다.
그 참상을 어찌 말과 글로 다 쓸 수 있을 것인가. 왜경왜병과 싸우며 몸을 숨긴 고진사의 명(命)으로 이 혼인이 성사된 것이다. 의(義)로운 사람은 의(義)로운 행동을 하는 것임을 우리는 여기에서 배울 수 있다.
1914년 1월 12일 전주법원에서 그가 재판을 받을 때 일본검사와 일문일답한 재판기록이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재판장이 선고를 내리려고 이석용에게 기립(起立)할 것을 청하자 그는 말하기를 “기립은 경의(敬意)를 표하는 것인데, 나는 원수(怨讐)에 대한 경의를 표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간수배(看守輩)들이 달려들어 강제로 일으켜 세우니 그는 크게 노하며, “나는(내) 마음으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재판장은 사형을 선고한 뒤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사형이 선고되자 그는 아들의 면회를 요청하였다. 그는 16세 어린 아들 원영(元泳)을 만났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아들 원영에게 그는 “충(忠)과 효(孝)를 잊지 말라.” 한 마디 엄숙히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때 그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듯 광채가 빛나고 몸에서는 이채가 발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구형무소에서 이석용 의병장이 아들에게
“원영아 슬프다. 나라와 백성을 보전하지 못하고 삼십칠 세로 허수히 가니 너는 고향에 돌아가 조부님 전(前) 효도 하여라. 가문 서책을 잘 두었다가 후손을 잘 가르쳐 선영 봉제사를 잘 모셔라. 원영아 나는 죽어도 산 듯하다.
네가 주색을 즐기면 기일에 운감을 하지 않겠다. 나 죽으면 나의 시체는 월출이면 일몰이니 영암 월출산 기슭 남해 바닷가 일본 땅을 향하여 묻어 달라. 그리하면 내가 저승에 가서 일본을 꼭 망하게 하리라. 나는 살아서 황제를 모시지 못하였으니 전주 이 왕조 땅에 ‘황극단(皇極壇)’을 세워 선황제를 모시게 하여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1914년 4월 4일 정오, 이날 호남의병대장 이석용은 조국 광복의 대망을 이루지 못한 채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받고 순국(殉國)하였다.
하늘도 슬펐음인지 일본인 형무소장은 부하에게 이르되 “저 사람은 비록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세상에 드문 志士이니 너희들은 결코 실례됨이 없게 하여라.” 하였다.
이에 따라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이석용 의병대장의 장남인 이원영 의사(義士)는 8년 동안 행상(요강행상)을 하면서 비축한 자금과 자영하는 농토 2,600평을 매각한 자금으로 1955년 5월 5일 아버지의 ‘의병활동기념비’를 세웠다가 이 비(碑)를 고쳐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주위에 김구(金九)선생, 5열사, 호남창의대장 이석용, 28의사를 각각 새긴 비군(碑群)을 만들어 ‘황극단(皇極壇)’이란 이름으로 현 전북대학교 내에 건립하였으나 전북대학교가 확장되면서 다시 전주시 송천동 1가 234-10번지(어린이회관 앞)에 옮겨 세웠다. 그리고 임실군 성수면 소재지(양지리)에는 이 의병장과 28의사(義士)를 향사하는 소충사(昭忠祠)를 세웠다.
그의 묘소는 전남 영암군 월출산(月出山) 아래 가지동(可之洞)에 홀로 모셨으나, 임실군의 소충사(昭忠祠) 성역화사업에 의하여 1995년 11월 20일 고향인 성수면 오봉리에 배위(配位)와 함께 상단에 모셨고, 28의사(義士)는 삼열합동(三列合同)으로 하단(下壇)에 새로이 모셨으니 이제는 편히 잠들고 계시리라 생각된다.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은 원영(元泳)이고, 작은 아들은 우영(祐泳)이다. 두 사위는 장현풍과 최학열이다. 孫子는 영원의 아들로 명근(明根)과 우영의 아들로 효근(孝根), 경근(景根), 순근(順根), 장근(章根)이 있다.
1962년 그의 공적을 기리어 정부에서는 대한민국건국 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 전주 재판소 공판기록
念齋 趙熙濟 野錄에서
甲寅 正月 12日, 全州 公判은 다음과 같다.
폭도 이석용이 의병대장이라 자칭하고 다수의 부하를 모집하여 전북과 경남 등지를 횡행하며 風雲을 일으키다가 지난 해 10월에 임실 경찰서원에게 체포되어 당 지정 검사국으로 이송되어 마침내 살인 방화 강도범으로 처리를 받게 되었다.
이때 나이가 37세인데 긴 머리털에 평복을 입었으며 얼굴은 얽고 수염은 드물고 외모는 용잔(庸孱)하여 들리는 소문과는 같지 않았다.
그러나 심판을 받게 되어서는 말과 웃음이 태연자약하였다. 우리나라 사람 및 일본사람이 방청을 하러 몰려들어 법정 안팎으로 겹겹이 둘러싸서 어깨를 비비고 발을 맞대니 입추의 여지가 없어 문득 人山을 이루었다.
첫 번째 물었다. ‘글을 많이 읽었다는데 과연 그랬느냐?’
‘四書三經 以外에 諸子百家의 書籍도 역시 모두 읽었다.’
두 번째 물었다. ‘재산이 있는가?’
‘빈한한 선비가 어찌 재산이 있을 이치가 있느냐.’
세 번째 물었다. ‘무슨 목적으로 감히 폭도 노릇을 했느냐?’
‘너희 일본 놈들을 배격하기 위한 것이다.’
네 번째 물었다. ‘통솔한 부하가 3백 명이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랬느냐?’
‘그렇다’
다섯 번째 물었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천황의 은덕이 망극하여 일반 신민이 모두 다 즐거워하는데 너도 역시 충실한 국민이 되고 싶지 않느냐?’
크게 웃고 대답을 했다.
‘차라리 대한의 개와 닭이 될지언정 네 나라 신하되기는 원치 않는다.’
여섯 번째 물었다. ‘의병이라 자칭하면서 인명을 살해하고 마을에 불을 놓아 공금을 강탈하였으니 이 무슨 불법의 행동이냐.’
‘제 나라를 배반하고 일본놈에게 붙은 자는 부득불 죽이고 집을 불태울 수밖에 없으며, 공금에 있어서는 본시 대한국 국세이다. 임금이 잃어버린 것을 신하가 찾아 쓰고, 아비가 잃어버린 것을 자식이 찾아 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무엇이 불법이란 말이냐?’
일곱 번째 물었다. ‘그렇다면 군대를 해산하고 종적을 숨긴 것은 무엇 때문이냐?’
‘시기가 불리하여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잠깐 동안 군사를 휴식하고 후일에 기회를 기다리기 위해 그런 것이다.’
여덟 번째 물었다. ‘충신 의사라고 자부하면서 이미 성공 못할 줄을 알았다면 죽음이 있을 따름인데 하필 구구히 살아남아서 이런 곤욕을 당하느냐?’
‘네놈들이 어찌 내가 죽지 않은 까닭을 알겠느냐. 옛날 제갈공명은 여섯 차례나 기산에 나가서 싸웠고, 강유가 아홉 번째 중원을 친 것도 모두 성공 못할 줄을 알면서도 강행한 것이다. 비록 성공 못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노력하여 죽은 뒤에야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당당한 국사(國士)로서 후일의 광복을 계획하지 않고 어찌 스스로 죽을 수 있겠느냐’
아홉 번째 물었다. ‘창의록을 장황하게 저술한 것은 무슨 소용이 있어서 그랬으며, 불망록은 무슨 의미가 있어서 그렇게 수다하게 적었느냐.’
‘창의록으로 말하면 충분심(忠憤心)이 격동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그것을 일본정부에 전달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불망록으로 말하자면 의병을 일으킨 5~6년에 걸쳐 많은 친구의 보조를 받았기 때문에 뒷날 은혜를 갚고자 해서 그런 것이다.’
열 번째 물었다. ‘사실심문은 이로써 끝났다. 너도 자신에게 이익될 말이 있으면 기탄(忌憚)없이 다 말하라.’
‘지금 포로가 되었으니 다만 빨리 죽여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무슨 자신을 유리하게 할 말이 있겠느냐. 비록 그러하나 다만 한 되는 바는 이등박문이 안중근의 손에 죽었는데, 나는 사내정의(寺內正毅)와 우리나라 5적 7적을 죽이려다가 못 죽인 것이요. 또 동경, 대판에 불을 지르려다가 못한 것이다.’
재판장이 출석하면서 석용더러 기립하라고 청하므로 석용은 말했다.
‘기립(起立)이란 바로 경의(敬意)를 표하는 것인데 원수 놈에게 경의를 표하는 이치가 어디 있느냐. 이 때문에 전일에도 실행하지 않았던 것인데 또 어찌 번거롭게 하느냐.’
왜놈들이 간수를 시켜 부액(扶腋)하여 강제로 일으키므로 석용은 크게 꾸짖었다. ‘네놈들이 강제로 나를 일으키지만 마음이 안 일어나는데 어찌 하냐.’
판사가 사형선고를 분명히 읽고 퇴석(退席)하므로 석용은 태연히 말했다. ‘집안일을 부탁하고자 하니 내 아들과 면회시켜 주기를 청한다.’
왜놈들이 아들을 끌고 와서 그 앞에 절을 하므로 다만 효도하고 우애하라는 두어 마디 말을 부탁하는데 눈빛이 번쩍여 이채를 띠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