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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임실문화원의 지식창고 임실독립운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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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 임실독립운동사 (2005)
◈ 제4장 任實地域 自生 義兵
❀ 강 사 과 (姜司果) / 강사과는 무과급제 출신으로 사과(司果, 정 6품) 벼슬을 지냈으며 임실 출신인데 이름은 미상(未詳)이다. 그는 1905년(광무9, 乙巳)에 소위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의 간섭이 심해지자 1906년(광무10, 丙午)에 창의기병(倡義起兵)하여 동지 50여 명을 규합하였다.
 

1. 제4장 任實地域 自生 義兵

 
❀ 강 사 과 (姜司果)
강사과는 무과급제 출신으로 사과(司果, 정 6품) 벼슬을 지냈으며 임실 출신인데 이름은 미상(未詳)이다.
 
그는 1905년(광무9, 乙巳)에 소위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의 간섭이 심해지자 1906년(광무10, 丙午)에 창의기병(倡義起兵)하여 동지 50여 명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전남북 각처에서 유진항전을 벌려 왜군 수비대를 응진하였으며, 특히 동년 12월에 전남 장성읍을 습격하여 왜놈인 우편취급소장을 사살하였다. 그 후의 종적은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35面《高氏家門과 그 姻親》 635面의 當時 倭警 情報 記錄임.
 
 
❀ 강 성 구 (姜成九)
강성구는 임실군 하운암면 거둔리(지금의 운암면) 출신이다.
 
그는 1908년(융희2년, 戊申) 가을에 창의하여 동지 30여 명을 규합 영솔하여 약 1년 동안을 주로 임실지역을 중심으로 유격활동을 하였으나 그 전과에 대한 기록은 없다.
 
1909년(융희3년, 乙酉) 12월초에 휘하 의병을 해산시키고 귀가하여 은신 중에 왜경에 체포되었으나 그 후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36面
 
 
❀ 강 재 천 (姜在天)
강재천은 호가 송석(松石)이며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다.
 
그는 한국군 참령(參領)으로, 1907년(융희1, 丁未) 7월 31일에 왜적들의 흉계에 의하여 한국군이 해산되자 이에 반대하여 전라도에 와서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전남 장성과 전북 임실을 중심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는 선봉장인 李尙允이 民財를 징발한 것을 개탄하고 스스로 의병을 해산하고 산중에 은신하고 말았다.
 
1919년의 3․1 운동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56面
 
 
❀ 강 한 용 (姜漢用)
강한용은 1882년 임실군 덕치면에서 태어났다.
 
양윤숙 의진에 가담하여 임실 일대에서 활약했다.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乙巳勒約’(을사륵약)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침략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활동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 주구들을 처단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한용은 의병장 양윤숙의 부하로 참여하면서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수단으로 동지 7명과 칼 한 자루를 휴대하고 1909년 음력 2월 9일 임실군 강진면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이어 같은 달 10일 밤 동면 오두월리에서 친일 이장으로부터 군수품을 거두었으며, 13일에는 하운암에서도 의병진의 군용품을 거두는 등 주로 군자금과 군수품 징수에 중점을 두어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피체(被逮)되어 1909년 6월 17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28세의 나이에 징역 15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나 그 후손이 없어 아직도 전수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10046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國家報勳處) 第12券 50面《全北義兵史》 下券 140面
 
 
❀ 김 경 련 (金京連)
김경련은 임실군 신평면 출신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는 1908년 7월경에 동지 3명과 함께 거의(擧義)하여 약 3개월 동안 고창 흥덕의 일부지역에서 항전활동의 자금을 마련하다가 동지 박양운이 체포된 후에 은신하고 말았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97面
 
 
❀ 김 경 삼 (金京三)
김경삼은 임실군 덕치면 출신이다.
 
그는 1909년 2월에 동지 수 명을 규합하여 창의(倡義)한 후 약 1개월간 덕치를 비롯, 임실 관내에서 활동하다가 해산하였으며 체포된 기록은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97面
 
 
❀ 김 기 만 (金琪萬)
김기만은 1882년 임실군 일도면 중당리(지금의 임실읍 화성리 중금 마을) 출신이다.
 
정성현 의진에 가담하여 순창과 임실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의 내정을 속속 장악하였다.
 
이후 1907년에 이르러 다시 헤이그특사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한편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전국 각처의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무장투쟁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에 강력하게 저항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분투하였다. 김기만은 이 같은 시기인 1908년 7월 15일 정성현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같은 해 10월경까지 동지 13명과 함께 총으로 무장하고 순창과 임실 일대를 무대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피체(被逮)되어 1910년 2월 23일 광주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나 그의 후손이 없어 아직도 전수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10193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25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2券 166面
 
 
❀ 김 낙 필 (金洛必)
김낙필은 1886년 남원에서 태어났으며, 정성현 의진에 가담하여 남원, 임실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나아가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륵약’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지배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행하여 우리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이 위기에 처하자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 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했다.
 
김낙필은 이 같은 시기에 정상현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수단으로 1908년 11월에 남원군 아영면, 임실군 내, 1909년 1월부터 4월까지 임실군 九成里와 하운암면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피체(被逮)되어 1909년 11월 10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1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나 그의 후손이 없어 아직도 전수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10201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獨立運動史料集》(國家報勳處)別集 第1輯726~727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2券 180面《全北義兵史》 下券 625面
 
 
❀ 김 동 구 (金東九)
김동구는 이명이 동구(銅九)라고도 하며 의병장으로서 옥구와 남원, 임실, 순창, 태인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우리나라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의해 국권이 피탈(被奪)되더니 이어 1907년 7월 ‘정미7조약’으로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즉각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을 거국적으로 곳곳에서 전개하여 갔고, 특히 군대해산으로 해산된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김동구는 이 같은 시기인 1909년경 김막동, 김상천, 박치근, 한자선, 박화숙, 최석봉 등과 더불어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대일항전과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1909년 4월 22일 의병부대를 이끌고 옥구군 성남면 유촌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징발하였다. 같은 해 6월 7일에는 김막동, 김상천 등 2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남원의 안산방 석문동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고, 같은 달 신정리에서도 군자금을 거두었다.
 
그리고 같은 달 임실군 덕치면 원촌리 이장 집과 순창군 구미리 이장 집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이밖에도 같은 해 10월 24일 김상천과 박형렬에게 지시하여 임실군 하신덕면 물량리(지금의 신덕면 신덕리)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수합하게 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98面《獨立運動史料集》(國家報勳處)別集 第1輯 621, 760, 771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2券 196面
 
 
❀ 김 막 동 (金莫同)
김막동은 임실군 덕치면 원치 마을에서 태어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김동구 의진에 가담하여 옥구, 남원, 임실, 순창, 태인에서 활약했다. 1907년 7월 ‘정미7조약’과 그 부수 각서에 따라 같은 해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고, 이에 민족의 무력이 상실된 것을 통분해 하던 대한제국의 병사들은 스스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제와 투쟁하던가, 아니면 기존의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일제에 항전함으로써 의병전쟁을 국민전쟁으로 발전시켰다.
 
김막동은 이 같은 시기인 1909년 초 김동구 의병장이 김상천, 박치근, 한자선, 박화숙, 최석봉 등과 더불어 의병부대를 조직함에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9년 4월 22일 김동구 의병장의 지휘 아래 옥구군 성남면 유촌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징발하였다. 같은 해 6월 7일에도 그는 김동구 의병장을 추종하여 김상천 등 2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남원군 아산방 석문동과 신정리 등에서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임실군 덕치면 원촌리와 순창군 구미리 등에서도 군자금과 군수품 수합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1909년 9월 21일 당시 22세의 나이로 피체(被逮)되어(高氏家門과 그 姻親 870面의 當時 倭警 情報 記錄에도 나타남) 같은 해 12월 1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22세의 나이에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나 후손이 없어 아직도 전수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10226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國家報勳處) 第12券 208面《全北義兵史》 下卷 599面
 
 
❀ 김 병 두 (金秉斗)
김병두는 남원군 내지사방 관기촌(지금의 지사면 관기리) 출신이다.
 
그는 1908년(융희 2년) 6월부터 강원도 원주의 박주서의 부하로 의병활동을 하다가 남원경찰서에 자수하였다. 그때 나이는 18세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705面
 
 
❀ 김 사 청 (金士淸)
김사청은 임실군 오지면 망전리에서 태어나 강진면 율치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1909년 3월 24일에 동지 7명을 인솔하고 정상현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선봉장이 되었다.
 
그후 30여 명 의병대의 앞장에 서서 임실, 태인, 김제, 남원 등지에서 유격전과 군용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1909년 5월 경에 41세의 나이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동년 7월 23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항소하여 15년 형을 선고받고, 소지하고 있던 화승총을 몰수당했으며 옥고를 치렀다. 그 후 후손은 찾을 수가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25面
 
 
❀ 김 상 천 (金祥千)
김상천은 1888년 임실군 덕치면 상두동 출신이다
 
그는 김동구 의진에 가담하여 남원, 임실, 순창 등지에서 활약했다. 1907년에 들어서 일제는 헤이그특사 사건을 기화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이어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인 군대까지 해산케 하였다. 이에 민족의 무력이 상실된 것을 통분해 하던 대한제국의 병사들은 스스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투쟁하던가, 아니면 기존의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항전함으로써 의병전쟁을 국민전쟁으로 발전시켰다.
 
이 같은 시기인 1909년 초 김상천 등은 김동구 의병장인 김막동, 박치근, 한자선, 박화숙, 최석봉 등과 더불어 의병부대를 조직함에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9년 6월 7일 김동구 의병장의 지휘 아래 김막동 등 2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남원군 아산방 석문동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고, 같은 달 신정리에서도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임실군 덕치면 원촌리와 순창군 구미리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이밖에도 같은 해 10월 24일 김동구 의병장 지시에 따라 박영렬과 함께 임실군 하신덕면 물양리에서도 군자금과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이와 같이 김상천은 김동구 의진에 참여하여 남원, 임실, 순창 등지에서 군자금 및 군수품을 수합하는 활동을 하면서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피체(被逮)되어 1909년 11월 24일 광주재판소 전주지부에서 당시 22세의 나이에 징역 10년씩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나 그 후손이 없어 아직도 전수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10420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2券 270面《全北義兵史》 下券 599面
 
 
❀ 김 성 로 (金成魯)
김성로는 임실군 출신이며 기타 인적사항은 미상(未詳)이다.
 
그는 1909년(융희 3년)에 나이 47세 임에도 나라가 기울어 감을 참을 수 없어 창의(倡義)하고 동지 15명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각처에서 유격활동을 하다가 그 해 10월 25일에 임실군 강진면 율치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 중 순국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36面
 
 
❀ 김 인 식 (金寅植)
김인식은 1879년(고종16년) 9월 20일 삼계면 후천리 498번지에서 父 김정현과 母 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호는 류촌(柳村)이며 가승(家乘)은 계림군 김균(鷄林君 金稛)의 9세손 김성진(金聲振 : 察訪公)을 거쳐 찰방공의 子 당계(棠鷄) 김원중(金元重)의 11세손이 곧 유촌인데 천성이 총명하여 일찍부터 학문을 통달하더니 젊어서 아버지가 卒하자 큰 뜻을 품고 상경, 고종 광무 3년에 궁내부(宮內府) 주사(主事)로 발탁되었다.
 
이때 국내 정세는 날로 기울어져 친일 정부가 조직되고 광무 9년(1905년)에는 일본 흉계에 놀아난 이완용 등 매국도당 5적(賊)들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니 유촌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출신 오기호(정6품관)와 義를 맺어 함께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두 사람은 중국 청년 장병린, 황흥 등과 자주 접촉하여 동양 3국의 친선과 번영을 표방하여 구국동지회를 조직하기에 성공하였다.
 
그 후 노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국내 소식이 궁금해 귀국하여 보니 의병들이 각처에서 봉기하여 일군과 싸우는가 하면 탐관오리들은 일군과 결탁하여 온갖 매국 행위를 서슴지 않는지라, 류촌은, 오기호, 라인영 등 우국지사들과 밀의(密議)하여 폭발물을 선물로 가장하고 이것을 친일 괴수 이지용, 박제둔에게 보냈으나 실패했다.
 
그 후 다시 최동식, 이기, 정인국, 윤계찬, 이광수, 김영채, 최익진, 서장보, 서정희, 민충식 등 여러 지사들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일본어 통역관 박용화를 암살하기로 결정하고 장사(壯士) 황화서, 이홍래, 강원상, 김동필, 지팔문 김경선, 이경진, 박대화 등 10명을 모집하여 1907년 2월 12일 2인組 6派로 나누어 朴을 기습하였는데 일부 대원의 실수로 발사 직전에 탐지되어 동지들은 격투 끝에 모조리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동지 일행이 체포되자 자신회(自新會) 본부가 수색 받아 애국가를 비롯 일본의 통감부와 각국 영사관에 보내는 메시지와 전국에 살포할 격문, 자신회(自新會) 선서문 등이 모조리 압수당하고 장차 중형에 처하게 되었는데 동지 민충식의 양부 민영휘(閔泳徽)의 주선으로 이해 6월에 민충식, 이혁종은 철도(鐵島)로 라인영 등 12명은 지도(智島)로 김인식, 오기호, 서정희는 진도(珍島)로 5년간 유배되었다.
 
1909년 음력 정월 15일 새벽에 나인영, 오기호, 강 우, 유 근, 정춘모, 이기 등 수십 명과 함께 서울 북부재동 취운정 아래 초가 북벽에 ‘단군 태왕조’ 신위를 모시고 제천의 큰 의식을 거행하고 ‘단군교’를 창시하여 민족중흥에 이바지할 종교로 육성하였으며, ‘단군교’는 1910년 6월에 교명을 ‘대종교’로 고치고 포교활동을 통하여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길러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끝내 조국을 강탈하니 한일합병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자신회(自新會) 동지들은 모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왔으나 그들의 구국운동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3․1 운동 후에는 중국 상해를 근거지로 둔 독립단과 제휴하여 동지 중 부호로 알려진 김동필, 박대하 등 여러분에게 자금을 염출하여 상해 독립단에 운동비를 제공하는 등 암암리에 투쟁을 계속하였으나, 류촌은 1925년 10월 11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52세의 나이로 서울 권농동 어느 여관에서 객사하였다.
 
류촌의 孫 김윤기는 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8․15 후 유해를 고향의 선산에 모셔 안장했으며, 건국유공자 1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는 대통령표창을, 1977년에는 건국포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4券 580面三溪面史 170面
 
 
❀ 김 종 삼 (金鍾三)
김종삼은 임실군 강진면 내동 출신이다.
 
그는 1909년 초에 정상현 의병대에 가담하여 동지 30여 명과 함께 임실, 태인, 김제 등지에서 항전하는 한편 군용금을 모금하다가 동년 5월경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09년 7월 13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30세의 나이에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후손이 없고 기록이 불충분하여 포상이 안 되고 다만 국가보훈처의 미 포상자 명단에 기록되어 관리번호 12250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26面
 
 
❀ 김 성 룡 (金成龍)
김성룡은 1875년(고종 12)에 태어나서 임실군 강진면 밤재(栗峙)에서 살았다. 그는 의병장 양윤숙의 휘하로 들어가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다른 의병들과 함께 1909년 10월 29일에 당시 35세의 나이로 체포되었다.
 
註 : 《高氏家門과 그 姻親》 871面의 當時 倭警 情報 記錄임.
 
 
❀ 김 현 집 (金玄執)
김현집은 천도교인으로 되어 있고, 1866년에 운암면 마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장하다가 의병에 가담하여 임실군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1905년 11월 ‘을사륵약’을 강제로 체결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군대까지 해산시킴으로써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김현집은 이 같은 시기인 1909년 정성현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는 천도교인으로 임실군 하운면(下雲面) 마치리(馬峙里) 동장(洞長)의 신분으로 같은 해 7월경까지 동지 10여 명과 함께 총으로 무장하고 순창, 임실 등을 무대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정성현 의진에 참여하던 중 1909년 7월 15일 오후 4시경 마치동 후방에서 일본군 남원수비대의 총격을 받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나 후손이 없어 아직도 전수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950593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26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5券 157面
 
 
❀ 김 형 기 (金炯基)
김형기는 1866년(고종 3)에 태어나서 임실군 덕치면 갈재(葛峙)에서 주막(酒幕)을 경영하며 생활하였다.
 
그는 의병장 최산흥(崔山興)의 부하로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910년 4월 6일에 통감부 전주재판소에서 폭동죄로 징역 1년의 선고를 받았다. 그 재판기록에 의하면, 그는 1908년 음력 7월에 최산흥의 부하로 가담하여 그 동료 80여 명과 함께 순창군 내를 횡행하여 폭동을 방조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후손이 없어 포상을 받지 못하고 다만 국가보훈처 기록에 의하여 미 포상자로 파악되고 관리번호 10303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 券 145面
 
 
❀ 남 기 영 (南奇永)
남기영은 1872년(고종 9년, 壬申)에 임실현 신안면 율촌(지금의 임실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8년(융희 2년, 戊申) 말에 창의(倡義)하여 동지 15명을 규합하고 그 후 약 1년 동안을 주로 임실지역 내에서 일본에 항전하였다.
 
이듬해 10월 24일에 왜군 토벌대의 공격을 받아 고향인 율치에서 38세를 일기로 순직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券 634面
 
 
❀ 노 경 련 (魯敬連)
노경련의 출생지는 임실군으로만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종열 등 4명의 동지와 함께 거사할 것을 모의하고 1912년 7월부터 11월까지 임실군 상신덕면(지금의 신평면), 이인면(지금의 임실읍 이인리), 옥전면(지금의 청웅면), 상운면(운암면) 등의 관내를 잠행하면서 자금을 마련하는 등 활동을 하였으나 항전한 사실은 전해진 것이 없으며 동지들이 체포되어 은피한 것 같다. 그러나 국가보훈처의 미포상자 내력에 수록되어 관리번호 10671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08面
 
 
❀ 박 가 오 (朴柯吳)
박가오는 임실군 덕치면 암치리 출신이다.
 
그는 1909년 2월 경에 김동구가 창의 기병(倡義 起兵)하자 이에 가담하여 주로 임실, 남원, 태인, 고부 등의 산간지역을 잠행하면서 약 8개월 동안 항전을 계속하였다.
 
1909년 10월 말경에 동지들이 거의 체포되어 의병대가 해산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최산흥의 부하로 들어갔다가 1910년 2월경에 임실군 강진면 갈담 순사주재소에 자수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99面
 
 
❀ 박 가 우 (朴可又)
박가우는 1884년(고종 21)에 태어나서 임실군 덕치면 암치(巖峙)에서 농업을 경영하였다. 그는 1910년 1월 19일에 폭동죄로 기소되어 통감부 전주재판소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재판기록에 의하면 박가우는 1909년 음력 2월 20일에 최산흥의 부하로 들어가서 27일까지 동료 15명과 함께 순창 군내를 횡행하면서 폭동 행위를 방조하였으며 이 사실을 법정에서 자백하였다고 되어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146面
 
 
❀ 박 계 홍 (朴溪洪)
박계홍은 임실 출신이다.
 
박성숙, 김기홍, 박성택과 같이 1909년 2월경에 김동구가 창의 기병(倡義 起兵)하자 이에 가담하였다. 그 후 약 8개월 동안 동지 20여 명과 함께 임실, 남원, 순창, 태인, 고부, 흥덕, 등지에서 산간지대를 누비면서 유격항전을 계속하다가 1909년 10월 12일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수형 상황은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98面
 
 
❀ 박 명 로 (朴明魯)
박명로의 인적사항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1908년 6월 경에 창의(倡義)한 정성현 의병장의 선봉장이 되어 약 1년 6개월간 3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임실, 남원, 순창, 고부, 태인, 흥덕 등지를 출몰하면서 수십여 차례의 유격활동을 한 것이 분명하나, 기록에 남아있는 것은 1909년 7월 14일에 의병대원 8명을 인솔하고 전주군 구이동면 신정리(지금의 구이면)에 주둔하고 있다가 태인에 주재하고 있는 일본군 헌병대 8명의 습격을 받아 교전하였다.
 
1909년 말경에 의병대가 해산된 후에 은신하여 체포되지는 않았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26面
 
 
❀ 박 문 길 (朴文吉)
박문길은 재판기록에 의하면 박복금과 공모하여 1909년 음력 8월 2일에 식칼을 가지고 임실군 상북면 금당리(지금의 임실읍 금당리) 고갯길에서 통행인을 협박하여 군용금을 모금한 사실이 있다는 기록이 독립운동사 자료 별집 1권 837쪽에 수록되어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713面
 
 
❀ 박 복 금 (朴卜金, 朴福金)
박복금은 재판기록에 의하면 박문길과 공모하여 1909년 음력 8월 2일에 식칼을 가지고 임실군 상북면 금당리(지금의 임실읍 금당리) 고갯길에서 통행인을 협박하여 군용금을 모금한 사실이 있다는 기록이 독립운동사 자료 별집 1권 837쪽에 수록되어 있으며 문서기록보관소 판결문에는 1910년 12월 1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북지부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713面
 
 
❀ 박 성 숙 (朴成淑)
박성숙은 임실 출신이다.
 
박계홍, 김기홍, 박성택과 같이 1909년 2월경에 김동구가 창의 기병(倡義 起兵)하자 이에 가담하였다. 그 후 약 8개월 동안 동지 20여 명과 함께 임실, 남원, 순창, 태인, 고부, 흥덕 등지에서 산간지대를 누비면서 유격항전을 계속하다가 1909년 10월 12일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수형 상황은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98面
 
 
❀ 박 성 택 (朴成澤)
박성택은 임실 출신이다.
 
박성숙, 김기홍, 박계홍과 같이 1909년 2월 경에 김동구가 창의 기병(倡義 起兵)하자 이에 가담하였다. 그 후 약 8개월 동안 동지 20여 명과 함께 임실, 남원, 순창, 태인, 고부, 흥덕 등지에서 산간지대를 누비면서 유격항전을 계속하다가 1909년 10월 12일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수형 상황은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98面
 
 
❀ 박 영 열 (朴永烈)
박영열은 임실군 덕치면 상치지동 출신이다.
 
그는 1909년 4월 경에 김동구 의병대에 가담하여 동지 20여 명과 함께 약 6개월 동안 임실, 남원, 순창, 태인 등지에서 잠행하면서 군용금을 모금하는 한편,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그들은 공모하여 임실군 하신덕면 공금 영수원 홍기화의 집에 가서 백성들로부터 많은 재물을 강제 징수한 것을 꾸짖고 군수금을 조달하라고 협박하였다. 1909년 10월 24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22세의 나이에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99面
 
 
❀ 박 용 근 (朴龍根)
박용근은 1874년에 임실군 덕치면 무울리(無鬱里)에서 태어났으며 소금장사가 직업이었다.
 
그의 재판기록에 따르면 그는 1908년 음력 12월 14일부터 1909년 음력 7월 5일까지 의병장 양윤숙의 부하로 활동하였는데 1909년 6월 29일에는 순창군 구림면 송리동(松裏洞) 정춘성(鄭春成)의 집에 들어가 의병임을 밝히고 군자금의 보조를 요청하여 엽전 15냥을 거두어 갔다. 그 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09년 12월 1일에 통감부 재판소에서 징역 7년의 선고를 받았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148面
 
 
❀ 박 치 근 (朴致根)
박치근은 임실군 덕치면 백우리(白憂里) 출신이며 김막동, 한자선, 최석봉 등과 함께 임실군 덕치면 출신이다.
 
그는 1909년 4월 중에 김동구 의병대(《高氏家門과 그 姻親》 871面의 當時 倭警 情報 記錄에 의하면 김성용, 양학수와 함께 양윤숙의 의병대로 기록되어 있음)에 가담하여 주로 임실, 남원, 순창, 태인 등지에서 약 6개월 동안 유격활동을 하다가 동년 9월 20일(위의 기록에는 10월 29일로 되어 있음)에 당시 22세의 어린나이에 임실군 덕치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후 1909년 12월 1일에 광주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김막동은 7년 형을 받고, 22세의 나이에 박치근은 한자선, 최석봉과 같이 각각 1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99面《高氏家門과 그 姻親》 871面의 當時 倭警 情報 記錄임.
 
 
❀ 박 학 봉 (朴學奉)
박학봉은 1883년(고종 20년 癸未)에 임실군에서 태어난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전북에서 기의(起義)하여 활약한 의병장으로서 1909년(융희 3년 乙酉) 부하 15명 정도를 이끌고 구국 항일전을 전개하던 중 그해 10월 19일 임실군 덕치면 만덕치(萬德峙)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하다가 전사 순국하였다. 그때의 나이는 27세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國家報勳處) 第9券 636面《全北義兵史》 下券 637面
 
 
❀ 배 성 집 (裵成執)
배성집은 임실군 덕치면 원치리 출신이다.
 
그는 주막업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김동구 의병대에 매번 주식을 제공한 것이 1909년 4월에 발각되어 일본경찰로부터 김동구의 동정에 대한 취조를 받았으나 실토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경찰이 김동구를 체포하려는 것을 탐지하고 은밀히 알려주어 은피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09년 10월 6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51세의 나이에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99面
 
 
❀ 소 윤 명 (蘇允明)
소윤명은 임실군 상운면 입석리(지금의 운암면) 출신이다.
 
그는 1909년 2월경에 정성현(鄭聖鉉) 의병대에 가담하여 임실, 태인, 남원 등지에서 항전하는 한편, 활동자금 모금을 하였다.
 
1909년 8월 23일에는 하운면 유정리에서 최춘식, 홍문국을 납치하여 호두산의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는 한편 심하게 구타를 했는데, 그전에 홍문국이 의병대의 동정을 갈담 헌병분견대에 밀고하여 의병 한 명이 헌병에 체포되었다.
 
그후 1909년 12월 말일 경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0년 3월 22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27面
 
 
❀ 송 인 택 (宋仁澤)
송인택은 임실군 하운암면 출신이다.
 
그는 1909년 초에 김동구 의병대에 가담하였다. 동년 5월 2일 밤에 동지 20여 명과 함께 금구군 구류면 상화리에 있는 천주교 선교사인 프랑스 사람 페카로크 집에 들어가서 목사 정광협을 위협하여 총 3정 외 12점을 획득하였다.
 
그 후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09년 6월 25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00面
 
 
❀ 양 학 수 (梁學洙)
양학수는 1866년(고종 3)에 태어나서 임실군 덕치면 물우리(勿憂里)에서 살았다. 그는 박치근, 김성용과 함께 의병장 양윤숙의 휘하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동지들과 함께 1909년 10월 23일 44세의 나이로 체포되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152面《高氏家門과 그 姻親》 871面의 當時 倭警 情報 記錄임.
 
 
❀ 유 장 열 (柳璋烈)
유장열은 초명이 봉희(鳳熙)이고 본명이 丙熙이며 字가 允文이다.
 
그리고 장열(璋烈)은 아마도 그의 호(號)인 듯하다. 그는 본관이 고흥이며 1878년(고종 15년)에 고창현 오산면 봉산리에서 상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높고 풍채가 뛰어났던 그는 일찍이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왕조 말기에 왜적이 우리나라에 침략을 가속화하자 그는 1909년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으고 왜적을 물리치고자 무장항쟁을 전개하였다. 그와 많은 의병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결국 조선은 왜적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계속 항일투쟁에 매진하여 1912년에 독립의군부 호남창의동맹단의 의병장 이석용 의진에 참여하여 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14년에는 경상북도 풍기에서 한 훈 등과 함께 동지를 모아 광복단을 조직하여 친일파를 처단하고 헌병분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전개하던 중 그는 1919년에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전주의 한 부호가를 침입했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재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그는 기력이 쇠하여 재기하지 못한 채 1961년에 일생을 마쳤다.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64面
 
 
❀ 유 종 해 (柳鍾海)
유종해는 임실 출신이다.
 
그는 1908년에 창의(倡義)하여 동지 7명을 규합하여 약 2년 동안 주로 임실 순창 등지에서 유격활동을 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괴롭혔으나 자세한 활동 상황은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88面
 
 
❀ 이 상 대 (李相大)
이상대의 출신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이종렬 외 3명과 공모하여 거사자금을 마련키로 하고 1912년 7월 중에 임실군 상신덕면(신평면)에서 자금모금 활동을 하였으나 유격활동 사실은 전해진 것이 없으며 동지들이 체포된 후에 은신생활을 한 것 같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09面
 
 
❀ 이 용 의 (李容儀)
이용의는 임실군 구고면 두복리(지금의 청웅면) 출신이다.
 
그는 이종렬외 4명과 함께 거사자금을 마련하기로 공모하고 1912년 7월부터 11월까지 임실 관내 4개 면을 잠행하면서 모금활동을 하였다.
 
그 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2년 12월 28일에 광주지방법원 전주지부에서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09面
 
 
❀ 이 종 열 (李宗烈)
이종열은 임실군 구고면 수봉리(청웅면 향교리) 출신이다.
 
그는 이춘풍외 4명과 함께 거사자금을 마련하기로 공모하고 1912년 7월부터 11월까지 4개월간 임실 관내 4개 면을 잠행하면서 모금활동을 하였다. 그 후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2년 12월 28일에 광주지방법원 전주지부에서 1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09面
 
 
❀ 이 초 래 (李初來)
이초래는 임실 출신으로 전할 뿐이다.
 
그는 1907년 8월 1일 한국군이 강제해산 될 때 병사였는데 일본의 보호정치를 반대하여 귀향 즉시 창의기병(倡義 起兵)한 의병장으로 《독립운동사》 1권 의병항쟁 편에 수록되어 있으나 활동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20面
 
 
❀ 이 춘 풍 (李春風)
이춘풍은 임실군 옥전면 하중산동(청웅면 원동) 출신이다.
 
그는 이종렬 외 4명과 함께 거사자금을 마련하기로 공모하고 1912년 7월부터 11월까지 임실 관내 4개 면을 잠행하면서 모금활동을 하였다. 그 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2년 12월 28일에 광주지방법원 전주지부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09面
 
 
❀ 이 홍 길 (李弘吉)
이홍길은 1888년 2월 21일 임실군 아산면 사촌리(지금의 삼계면 학정리) 출신이다.
 
그는 1908년 6월 26일에 정성현 의병에 가담하여 의병 15명과 함께 총기로 무장하고 동년 7월 1일까지 임실, 순창, 남원 등지에서 유격활동을 한 뒤 일경에 체포되어 1910년 1월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290面《全北義兵史》 下卷 627面
 
 
❀ 임 계 홍 (林溪洪)
임계홍은 1879년(고종 16년)생으로 임실군 덕치면 천내리 출신이다.
 
그는 임성택, 임성숙과 같이 김동구 의진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1909년(융희3년) 10월 14일 세 명이서 나란히 31세의 나이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그 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80面《高氏家門과 그 姻親》 871面의 當時 倭警 情報 記錄임.
 
 
❀ 임 성 규 (林成奎)
임성규는 순창군 구암면 이곡리(지금의 구림면) 출신이다.
 
그는 1909년 음력 3월 20일경에 동지 4명을 규합하여 약 1개월 동안 주로 임실군 덕치면 관내에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그 후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0년 10월 11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21面
 
 
❀ 임 성 숙 (林成淑)
임성숙은 1864년(고종1)에 임실군(당시는縣) 덕치면 천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임계홍, 임성택과 함께 김동구 의병대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하던 중 1909년 10월 14일 46세의 나이로 셋이서 함께 남원 경찰서 순사대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다른 기록은 찾을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727面
 
 
❀ 임 성 택 (林成澤)
임성택은 1853년(고종 16년)생으로 임실군 덕치면 천내리 출신이다. 그는 임계홍, 임성숙과 함께 의병장 김동구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1909년(융희 3년) 10월 14일 셋이서 함께 57세의 나이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그 후의 기록은 알 수가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80面《高氏家門과 그 姻親》 871面의 當時 倭警 情報 記錄임.
 
 
❀ 전 석 기 (全錫基)
전석기는 1861년(辛酉) 10월 7일 지금의 임실군 청웅면 석두리에서 부친 운초(雲樵) 전규택(全奎宅)과 모친 옥천조(玉川趙)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은 어린시절부터 부친에 의하여 한학과 예의범절을 훈도받아 대의를 숭상하는 기풍이 몸과 마음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11세가 되던 해(1871) 향리의 한학당에 입학, 주경야독으로 수학에 열중하였으며 1888년 28세가 되던 해 부친을 잃었다. 어린시절부터 부친의 선비정신을 훈도받았기에 부정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강직한 성품으로 살았다.
 
1895년 왜놈들이 민비를 살해하고 1905년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며, 1908년 왜놈들에 의해 호남창의병이 대 소탕당하고, 1906년에는 최익현 선생이 태인과 순창에서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에 대항하다가 조정에 의해 대마도로 유배를 당하여 가는 등 국란의 상황에 대장부의 기개가 머리끝까지 끓어올랐다.
 
그러자 선친의 묘소가 있는 옥석리 조항 마을에 가족을 이사시키고 1908년 12월 16일 48세의 나이로 정성연 의병장이 주도하는 의병에 가담하여 제 2초 십장(파수대장)의 중책을 맡아 항시 총검을 휴대하고 전주, 금구, 태인, 임실 등지에서 항일의병투쟁을 지휘하였으며 의병 군수용품을 조달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공은 1909년(융희3년) 3월 29일에 왜경 헌병에게 피체(被逮)되고 말았다. 그 뒤 1909년 6월 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내란 및 강도죄로 교수형을 언도받았다. 공은 남의 나라 국권을 침탈하는 왜놈들에 대한 창의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항고하여 같은 해 7월 3일 대구공소원에서 징역 12년 형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른 후 1924년 7월 만기 복역 후 출감하였다. 공은 왜경에 의해 옥고를 치루면서 그 여독으로 신음하다 1925년 12월 평생에 길러온 우국충정을 모아 노령의 한목숨을 국권회복에 바치려 했으나 하늘을 우러러 의병투쟁의 좌절을 한탄하며 64세의 일기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9券 416面《靑雄面誌》 87面
 
 
❀ 정 남 쇠 (丁南釗)
정남쇠는 1885년(고종 22년)에 임실군 성수면 원중에서 태어났다.
 
그의 소속 의병대와 활동 상황은 알 수 없으나 1913년 3월 29일에 대구 복심원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는 김필수, 박보국, 한일성, 홍윤무, 박동환, 김상신, 이남용과 함께 이석용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해산 후 1913년 3월 29일 대구 복심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1券 411面 기록 참조.《全北義兵史》 下券 724面, 판결문.
 
 
❀ 정 노 현 (鄭盧鉉)
의병장으로 전북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국권이 피탈되고, 이어 1907년 7월 ‘정미7조약’으로 군대까지 해산 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강제 해산된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하고 의병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정노현은 무력투쟁으로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자 1908년경 임실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 15券 389面
 
 
❀ 정 성 현 (鄭聖鉉)
정성현은 임실 출신의 의병장이다.
 
그의 이름은 성현(聖鉉, 聖玄, 成鉉) 聖連, 成運, 成立) 등으로 각종 의병자료에 나타나 있어서 종잡을 수 없으나, 활동내용으로 보아 동일인임이 분명하며 다른 인적사항은 전해진 것이 없다.
 
그가 항일구국의 큰 뜻을 품고 창의(倡義)한 시기는 추측건대 1908년 6월경인 것 같으며, 동지 30여 명을 규합하여 임실, 태인, 김제, 금구, 남원 등지를 출몰하면서 약 1년 반 동안 항전을 계속하였는데도 기록이 없는 것이 안타까우며, 《대한독립 항일총사》 상권에는 ‘금구’ 태인에서 항전하였다고 수록되어 있다.
 
그의 의병대가 언제 어떻게 종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1909년 말기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끝까지 체포되지 않은 것 같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24面
 
 
❀ 조 기 성 (曺基成)
조기성은 1883년 2월 5일 父 조석문과 母 김화삼 사이에서 임실군 신평면 토고지리(지금의 신덕면 오궁리)에서 태어났다.
 
1909년 1월 18일 정성현(鄭聖鉉) 의병장 휘하에 들어간 뒤, 임실, 태인, 남원 등지를 잠행하면서 3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유격활동을 하였으며 군자금을 모금하는 데 앞장섰다. 한편 임실군 상북면 염치에 살던 오응백에게 군자금으로 광목 3필을 모집하다 일경에 피체(被逮)되었다.
 
그뒤 1909년 12월 2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소위 강도죄로 징역 5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그의 후손인 조현숙은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 222-65번지에서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9券 467面《全北義兵史》 下卷 628面
 
 
❀ 최 덕 중 (崔德中)
최덕중은 임실군 하운암면 둔기리 출신이다.
 
그는 1909년 4월경에 유종여 의병대에 가담하여 순창군 구림 팔덕 등지에서 군용금을 모금하면서 항전활동을 하였다.
 
10월 20일 밤에 그는 동지 2명과 함께 순창군 우부면 백야치(지금의 순창읍)에 있는 주막에서 군용금을 모금하다가 밀고를 당해 경찰에 체포되고 제봉렬과 양수공은 체포되기 직전 도피하였다.
 
그는 7월 28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46세의 나이에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92面
 
 
❀ 최 만 년 (崔萬年)
최만년은 당시 임실군 영계면 관전리(지금의 동계면) 출신이다.
 
그는 김동구가 창의기병(倡義 起兵)한 1909년 2월 경에 가담하여 약 2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임실, 순창, 남원, 태인 등지를 잠행하면서 약 8개월 동안 유격활동을 계속하다가 1907년 9월 27일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재판기록을 찾아 확인한 결과 24세의 나이에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01面
 
 
❀ 최 봉 갑 (崔鳳甲)
최봉갑은 순창군 하동면 어촌 출신이다.
 
그는 1909년 3월 24일에 임실 출신인 김경삼의 부하로 가담하여 임실 군내 오지면(吾支面), 남면(南面), 말천면(袜川面) 등지에서 잠행하며 모금활동을 하였다.
 
그 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09년 3월 29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종신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97面
 
 
❀ 최 산 흥 (崔山興)
최산흥은 1883년 순창군 구림면 통안리에서 태어났다.
 
1906년 10월 이경춘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가 도십장(都什將) 및 전포장(前砲將)이 되어 그해 12월까지 120여 명의 부하 의병을 이끌고 태인, 부안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이석용 의병장과 함께 검찰(檢察)이라는 직무를 맡아 120여 명을 이끌고 임실, 남원, 진안, 용담 등지에서 일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 뒤 1908년 6월에는 양윤숙 의병장의 휘하로 들어가 중군장이 되어 500~60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임실, 순창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계속하였고 특히 1908년 3~4월 에는 임실군 상동(지금의 성수면)에서 일본군을 처단코자 부하 100명과 함께 임실 수비 기병대와 주재소를 습격하여 기병 한 명을 살해하고 두 명을 부상시켰다.
 
또 1908년 11월 초순에는 양윤숙 의병장의 지시로 검찰직무를 맡은 최명칠에게 명하여 의병 34명을 이끌고 순창군 서기 조명운으로부터 500냥의 군자금을 모으게 하는 등 활동을 벌였다. 같은 해 12월 15일 양윤숙 이하 동료 의병 50~60여 명과 함께 일제기병에게 협조한 변대주의 집을 소각한 뒤 피체(被逮)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09년 12월 27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였으나 1910년 3월 3일 대구 공소원과 4월 8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형이 집행됨으로써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나 후손이 없어 아직도 전수되지 못하고 국가보훈처에서 관리번호 5212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다.
 
註 : 《獨立運動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9券 489面
 
 
❀ 최 석 봉 (崔石奉)
1880년 1월 25일 순창에서 태어났다.
 
최석봉은 김막동, 한자선, 박치근 등 동료 의병 11명과 함께 1909년 4월경에 김동구 의병대에 가담하여 주로 임실, 남원, 순창, 태인 등지에서 약 6개월 동안 유격활동을 하다가 동년 9월 20일에 임실군 덕치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그 후 1909년 12월 1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죄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運動史料集》(國家報勳處)別集 第1輯766 767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9券 491面《全北義兵史》 下券 599面
 
 
❀ 하 영 록 (河永錄)
하영록은 임실군 성수면 하대촌(지금의 대판리로 추정) 출신이다.
 
그는 나라가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1909년 초에 기의(起義)하여 동지 수명을 규합(糾合)하여 완주군 고산지역에서 수차 항전하였으나 1909년 3월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09년 3월 22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 지부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31面
 
 
❀ 한 계 석 (韓桂錫)
한계석은 청주한씨 후예로 한말에 司果벼슬을 지냈던 한명고의 아들로 고종 25년(1888) 6월 18일 현 임실군 임실읍 신안리 낙촌에서 태어났으며 字는 子善이라 하고 아호는 낙촌이라 하였다.
 
낙촌은 천성이 영민하여 6세에 소학을 배우고 10세에 대학을 배우니 사람들은 그를 신동이라 했고, 차차 자라니 인품이 준수하고 기골이 장대하였다.
 
광무 11년(1907) 7월 선생의 나이 20세 때 일본은 고종을 폐위하고 제멋대로 순종을 왕위에 올린 다음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니 이후로 한국군이 해산되었다.
 
그는 1907년 8월에 이석용이 창의(倡義)할 무렵부터 이에 가담하여 거사(擧事)준비에 주력하였고,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 용바위에서 호남 의병 창의동맹단을 결성하는데 참여하였으며 그 후 9월 13일의 진안읍 습격에 참가하였고, 9월 16일에 내원사접전에서 참패를 겪기도 하였으며, 장수, 임실, 순창, 남원 등 각처의 산간부를 출몰하면서 일본군과 닥치는 대로 싸웠다.
 
그러다가 1909년 9월부터 전개된 일본군의 대 토벌작전으로 정재 이석용 의병장을 비롯 각처의 의병들이 속속 해산하고 더 이상 의병활동이 불가능하므로 낙촌도 부득이 다른 의병들과 헤어졌으나 이것은 싸움을 멎은 것이 아니라 기회를 타 다시 뭉쳐 재기하기로 하고 사방을 피해다니며 지하공작을 하거나 친일분자들에게 보복을 가하였다.
 
그러다가 이해 11월 오랜만에 본가에 돌아와 숨어 있던 중 불행히도 일본헌병에 검거되어 소위 폭도, 강도 및 방화죄로 11월 24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 공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포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75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券 957面《任實郡史》(1968年發行) 376面
 
 
❀ 한 광 언 (韓光彦)
한광언은 임실군 구고면 원동(청웅면 원동) 출신이며, 이종렬 외 세 명과 함께 거사자금을 마련하기로 공모하고 1912년 7월부터 11월까지 임실 관내 4개 면을 잠행하면서 모금활동을 하였다.
 
그 후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2년 12월 28일에 광주지방법원 전주지부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08面
 
 
❀ 한 일 성 (韓日成)
한일성 혹은 록성(錄成)이라고 하며 1880년(고종 17년) 임실군 성수면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석용의진에서 김필수 박보국 정남쇠 홍윤무 박동환 김상신 등과 함께 장수군 진전면의 진전면사무소를 공격하여 공전영수원 이용구 육동기 면서기 한용신 면장 이순영에게 군 자금을 모금하였다. 동년 12월 17일 밤 이석용등과 함께 임실군 남면 야당리 강정수로부터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는 강도상해 및 강도죄로 기소되어 1913년 2월 22일 광주지방볍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0년형을 받았다. 곧 이어 항소하여 1913년 3월 29일 대구 복심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21券 766面
《全北義兵史》 下券 729面
 
 
❀ 한 자 선 (韓子先)
한자선은 김막동, 박치근 등과 함께 임실 출신이다.
 
그는 1909년 4월 중에 김동구 의병대에 가담하여 주로 임실, 남원, 순창, 태인 등지에서 약 6개월 동안 유격활동을 하다가 동년 9월 20일에 임실군 덕치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후 1909년 12월 1일에 광주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김막동은 7년 형을 받고 박치근, 한자선, 최석봉은 같이 각각 1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599面
 
 
❀ 한 흥 삼 (韓興三)
한흥삼은 지금의 정읍군 옹동면 출신이다.
 
그는 1909년 2월 10일경에 정성현 의병대에 가담하여 약 6개월 동안 임실, 태인, 김제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동년 8월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09년 9월 13일에 광주재판소 전주지부에서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28面
 
 
❀ 홍 성 원 (洪成元)
홍성원은 임실군 하운암면 기동 출신이다.
 
그는 1908년 6월경에 정성현 의병대에 가담하여 임실, 순창, 남원 등 지에서 유격활동을 하다가 1909년 9월경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수형 상황은 알 수 없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28面
【저작】 임실독립운동사 (2005)
• 제3장 海山 全基弘 義兵將
• 제4장 任實地域 自生 義兵
• 제5장 韓末 義兵關聯 警察 情報
(2018.07.3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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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