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任實郡 關聯資料)
본 문건(文件)은 양만정(楊萬鼎)과 고홍석(高洪錫)이 편저(編著)한 장흥 고씨(長興高氏)의 역사, 그리고 고씨 가문(高氏家門)과 그 인친(姻親)이란 자료에서 구(舊) 한말(韓末) 의병활동(義兵活動)에 대하여 당시 일본경찰(日本警察)이 보는 정보보고(情報報告) 내용을 임실군과 인접군에 관한 사항 중에서도 일부를 발췌하여 수록하였다.
隆熙 元年 (丁未, 西紀 1907, 明治 四十年) 十一月 六日 南原 警務分署 警部 小松己生 警務 局長 松井茂에게
오늘 오전 다섯 時 운봉 분파소(이곳에서 사십리 거리) 순사의 보고에 따르면 엊그제 사일 오후 두 時경 폭도 삼십 명이 각각 화승총을 휴대하고 운봉군 산내면 백장암(百丈庵 : 운봉읍내로부터 三十리)에 이르러 오는 五일 운봉읍내를 습격하기 위하여 준비 중 폭도(暴徒)에 강제로 가입하였던 자가 五일 오전 한 시경 남몰래 백장암을 빠져나와 운봉읍내에 도주(逃走)해 왔는 바, 수괴자(首魁者)는 임실군에 사는 李某(석용 : 錫庸)이며 또 그 자의 말에 의하면 금년 구월 순창 군내를 습격했던 김동신(金東臣)은 장수군 번암방 삼리동에 머물러 있다고 함. 따라서 소관(小官)은 순사 三名, 순검 三名 및 수비대 하사 이하(下士 二下) 六名과 함께 오늘 오전 여섯시 반 토벌차(討伐次) 우선 운봉군에 출장함을 보고함. (南秘發八三號)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552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元年 (丁未, 西紀 1907, 明治 四十年) 十一月 十日 전라북도 南原 警務分署 警部 小松己生 警務 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暴徒 逮捕方面에 대한 出張報告
당 관내(當管內) 부근(附近)을 배회(徘徊)하고 있는 폭도의 수괴자(首魁者)체포 향방에 대하여 미리 수배해 두었기에 오늘 이평국(今年二月 南原에서 봉기한 폭도 중 수괴의 한 사람), 강사과(姜司果 : 임실군 출신으로 작년 十一月 순창 폭도사건의 수괴의 한 사람), 고진사(高進士 : 먼저 군대에 의해서 살해된 고광순과 한패의 자) 및 고광순(高光洵)의 동생 고광문(高光文) 등은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이곳으로부터 약 八十리)에 모여 있다는 다소 믿을 수 있는 정보를 얻었기에 명조(明朝) 미명(未明)에 습격 체포할 목적으로 소관 이하(小官 二下) 순사 三名, 순검 五名, 수비대 五名은 오늘 오후 한時 그 곳에 출장하겠기에 보고함.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552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元年 十一月 十一日 南原 警務分署 警部 小松己生 警務 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暴徒 出沒의 件 報告
이달 八일 오후 일곱 시경 폭도(暴徒) 약 三十名이 태인군(泰仁郡)으로부터 순창군(淳昌郡) 하치등면(下置等面) 피노리(避老里)로 진입하여 이날 밤 남쪽을 향하여 출발했다는 정보(情報)를 지난 9일 오전 여섯시 그곳 면장(面長)으로부터 계출(屆出) 있었기에 동군(仝郡) 분파소(仝郡分派所) 재근(在勤) 순사(巡査) 부영관삼(富永官三)은 순검(巡檢) 한 명과 함께 그 면(面)에 정찰 차(偵察次) 출장(出張) 조사(調査)한 바에 의하면 폭도(暴徒)는 그 수(數)가 삼십 명(三十名)으로써 그 중 이십이 명(二十二名)은 소승총(小縄銃)을 휴대(携帶)하고 지난 팔(八)일 일곱시경 피노리(避老里)로 들어와 김용희(金龍熙) 한테서 승마(乘馬) 한 마리를 강탈(强奪)하고 또한 반계리(磻溪里) 금정동(金井洞)과 기타 여러 곳에서 촌민(村民)을 협박(脅迫)하여 횃불을 들게 하고 길 안내를 시켜 그날 밤 십(十)시경 상치등면(上置等面) 둔전리(屯田里)로 나와서 송정리의 주막 박옥경에게 들러 주식(酒食)을 먹고 거기서 마치령(馬峙嶺)을 넘어 정읍군 내장사로 진행하고 있는 형적(形跡)이 있어 살펴보건대 그 폭도들은 이달 육일 밤 순창군 인화면(仁化面) 마을리(馬乙里) 한성삼 집에 방화하고 그날 밤 임실군 덕치면 방향으로 진행 중 그 다음날 칠일(七日) 갈담(葛潭) 방면에서 임실군 분파소(分派所) 재근(在勤) 순사(巡査) 시도장장(矢島長藏)이 출장 도중 충돌하여 그로부터 태인군에 이르러 재차 순창군으로 들어온 자들로 생각되는데 그 수괴(首魁)는 불명하고 그 폭도들은 총기 외에도 승마(乘馬) 네 마리, 소 한 마리, 기타 물품을 갖고 있는데 모두가 민가에서 훔친 것으로 사료됨을 보고함.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553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二月 二日 南原 警務分署 警部 小松己生 內部 警務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長水郡에 暴徒 出沒의 件
❍ 지난 一月 二十九日 폭도 수십 명이 장수군 내진전면 강촌(江村 : 장수로부터 서남쪽으로 四十五里)에 와서 식사를 하고 그 지방을 배회하고 있는 것을 같은 달 三十日 그곳 면장이 장수 순사주재소에 신고해 옴에 따라 그곳 주재순사(日人巡査三名)는 그날 바로 그곳에 이르러 적정을 정찰한 즉 폭도는 이미 지난 밤 저녁을 먹은 뒤 떠나버려 자취를 숨겼기에 부근 마을을 수색하였으나 아무런 형적(形跡)을 못 찾았음. 그날 밤 그곳에서 숙박하고 그 이튿날 삼십일일 귀소(歸所)하였음. ❍ 그달 三十日 동군(仝郡) 내진전면 盤谷(읍내에서 서남으로 五十里)에 폭도 十三名이 와서 저녁밥을 시켜먹고 어디론가 떠났으며 더욱이 같은 달 三十一日 저녁 열시경 폭도 三十名이 동군 외진전면 가동에 저녁밥을 대접받고 어디론지 떠났음.이상 면장 등의 신고를 종합하면 적은 부근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장수 주재 순사는 그들의 소재 수색을 위하여 오는 삼일 외진전면 방면으로 출장하겠기 보고함.
* 위 내용은 정재 이석용 의진과 관련된 사항으로 판단되어 기록하였음.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576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三月 六日 南原 警察分署長 警部 小松己生 內部 警務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暴徒 所在에 關한 件
지난달 十九日 남원군 보현방(寶玄坊) 사촌(沙村)에서 가등대위(加藤大尉) 및 당서(當署) 순사부장(巡査部長) 고교준 일행(高橋準 一行)에 의하여 토벌(討伐)되어 흩어져 달아난 폭도수령(暴徒首領) 임실군(任實郡) 상동면(上同面) 이석용(李石龍 : 또는 李錫庸, 一名 李學者)의 행동에 대하여 밀정(密偵)을 놓아 수사해 본 바 이의 일행은 사촌(沙村)에서 패주(敗走)해 그날 장수군 외진전면 고산동 매부(妹夫)집에 숨었다. 다음날 二十日 임실군 오육동(五六洞)에 이르러 잠복(潛伏)하고 二十三日 보현방(寶玄坊) 사촌(沙村)에 와서 유참봉(劉參奉) 외 두 집에 방화하고 장수군 과천촌(果川村)에 이르고 二十六日 덕유산(德裕山) 방면(方面)으로 향한 후에는 종적을 알 수 없음.
이상 보고함.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619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三月 七日 南原 警察分署長 警部 小松己生 內部 警務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暴徒의 件 報告
이달 五일 오후 열두 時경 폭도 약 二十명이 각기 총을 휴대하고 임실군 방면에서 순창군 아동면(阿東面) 추동리(秋洞里 : 읍내에서 동북 三十리)에 들어와 洞長 장남노(張南老)에 대하여 세금 걷는 것을 책망(責望)하고 일천량(一千兩)을 내놓으라고 협박(脅迫) 구타(毆打)하면서 엽전 칠십일 량(七十一兩)을 털어갔다고, 또 공전(公錢) 영수원(領收員) 모(某)가 동장(洞長)집에 와서 잤는데 그이로부터 옷가지 및 갓을 빼앗아 달아났다는 것을 어제 六일 오후 한 시 피해자가 순창주재소에 신고했기에 두시 반 동지 수비대장 이하 六명, 일인(日人) 순사 일 명(巡査一名), 한인 순사(韓人巡査) 이 명(二名)이 토벌차(討伐次) 출장(出場)갔음을 보고함.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621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三月 七日 南原 警察分署長 警部 小松己生 內部 警務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暴徒의 件 報告
어젯밤 오전(午前) 한 時頃 폭도(暴徒) 수십 명이 임실군 둔덕면(屯德面 )오수리(獒樹里 : 南原 任實 兩 郡界), 임실읍 내에서 三十里, 南原邑 內에서 四十里 全州街道)에 들어와 임실주재소 순사 김재환(金在桓)의 실가(實家)로서 동가족(同家族)이 주점(酒店)을 하고 있는 집에 방화(放火)를 하고 또 역인(驛人)을 붙들어 구타(毆打)하여 빈사자(瀕死者)도 있는 것 같음. 이 내용을 남원군 덕고방(德古坊 : 둔덕면의 隣村) 서촌동장(西村洞長)으로부터 오늘 정오(正午) 통보해 왔기에 당(當) 수비대에 교섭(交涉)하여 병졸(兵卒) 五名 일인순사(日人巡査) 三名, 韓人巡査 一名에다 밀정자(密偵者) 二名을 몰래 딸려서 토벌차(討伐次) 출장(出張)시켰음.
더욱이 이달 삼일(三日) 야밤에 폭도 다섯 명이 남원군 견소곡방평촌(見所谷坊坪村 : 南原에서 西쪽 四十里)에 들어와 민가를 침입하여 짚신을 훔쳐 달아난 것을 동장(洞長)이 보고해 왔음. 해(該) 폭도(暴徒)는 이달 三日 남비발(南秘發) 第七十八號 보고 남생방(南生坊)에 나타난 자(者)들과 동일한 것으로 보임. 위 보고함.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622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三月 八日 南原 警察分署長 警部 小松己生 內部 警務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暴徒放火 其他 暴行의 件
이달 七일 남비발(南秘發) 第八十二號 폭도방화 기타(暴徒放火其他)의 건(件)에 대하여 먼저 보고한 바 있었거니와 본 건에 관한 임실 주재 순사(任實 駐在巡査)로부터 상보(詳報)가 왔기에 다음과 같이 보고함.
폭도(暴徒) 약 三十名은 日七 오전 세 시경 임실군 둔덕면(屯德面) 오수역(獒樹驛) 주점(酒店) 김용원(金龍元 : 巡査 金在桓의 實父)집에 뒷문을 부수고 침실(寢室)로 들어와 차고 있던 도검(刀劍)으로 김용원의 목부(部)를 찔러 두 군데에 상처를 입히고(우선 생명에는 지장이 없음.) 또 가옥(家屋)의 여기저기에 방화(放火)하고 물러감에 있어 임실군 강진면 율치동에서 붙들어온 천도교원 박해룡(朴海龍)에 대하여 발포(發砲) 사격(射擊)하여 부상시키고(다행히 중상이 아님) 남원군 보현방(寶玄坊 : 남원읍 내에서 三十里) 방향(方向)으로 떠났다함. 그리고 이 폭도는 임실군 상동면(上東面 : 지금의 성수면) 李石龍(註 : 李錫庸) 등의 一行으로 즉 지난달 十九日 남원군 보현방(寶玄坊 )사촌(沙村)에서 수비대(守備隊)에 격퇴(擊退)된 자임.
위 보고함.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624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三月 八日 南原 警察分署長 警部 小松己生 內部 警務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管內 各郡의 暴徒 빈번 출몰(頻繁出沒)의 件
- 本월 五日밤 열두시 경 폭도 二十名 임실군 석현면(石峴面) 류천동(柳川洞 : 읍내에서 남방 三十里)에 나타나 민가(民家)에 침입(侵入)하여 무명 두 필을 강탈(强奪)하고 상동촌민(上同村民) 한극삼(韓極三)인 자(者)를 협박(脅迫)하여 순창방면으로 끌고갔다는 연락을 동(同) 자위단장(自衛團長)으로부터 六日 오후 다섯시 임실주재소에 신고가 있었다. - 同 六日 午前 한 시경 暴徒 四名이 임실군 오지면(梧支面) 어은동(漁隱洞 : 읍내에서 南方 三十里) 들어와 동장(洞長)을 협박하여 식사(食事)를 하고 同 다섯 시쯤 남원 가도(街道) 오수역(獒樹驛) 방면으로 떠났다는 것을 六日 오후 다섯시 동장으로부터 임실군 駐在所에 보고가 있었음. - 同 七日 오전 네 시경 폭도 범(凡) 三十名이 임실군 둔덕면(屯德面) 신기리(新基里)에 와서 동장(洞長)을 구타(毆打)하고 다시 동면(同面) 정동(停洞)에 이르러 역둔토(驛屯土)의 도사음(都舍音) 박영호(朴榮浩)를 붙들어 동쪽 장수군 방면으로 떠났다는 것을 七日 午後 한시 동(同) 자위단장(自衛團長)이 임실 주재소에 신고하였음.생각건대 이 폭도는 七日 오전 한 시경 南原, 任實 양 군계(兩郡界)인 오수역에서 한인 순사(韓人巡査)의 집에 방화한 것과 동일인 것임.
❍ 칠일 오후 여덟 시경 폭도 육 명이 남원군 생조벌방광동(生鳥伐坊廣洞 : 읍내에서 서남방 약 五十里)에 들어왔다가 곧바로 전남 옥과군(玉果郡) 방면(方面)으로 떠났다는 것을 오늘 오후 다섯시 동(同) 방장(坊長)이 당서(當署)에 보고함. ❍ 이달 六日字 장수군 계북면 자위단장(自衛團長)으로부터 장수 순사주재소(長水巡査駐在所)에 보고(報告)하기를 폭도(暴徒) 수백 명이 무주군 주고(酒庫 : 장수읍내에서 북방 六十里)에 집합(集合)해 있고 또 同日 경상북도 지방에서 本部 溪北面 양악(陽岳)을 거쳐 폭도 四十名이 무주군 주고(酒庫)지방에 이르렀다 해서 이곳 주재순사(駐在巡査) 五名은 진안수비대(鎭安守備隊)와 협의(協議)하고 이를 토벌(討伐)할 양 오늘 오전 다섯시 진안(鎭安 : 장수에서 六十里)을 향해 출발한 것을 보고함.
追伸 : 이달 七日 남비발(南秘發) 第八十四號 순창수비대(淳昌守備隊) 및 주재순사(駐在巡査)의 일행이 폭도추적(暴徒追跡)한 결과는 도중(途中) 폭도(暴徒)의 종적(踪跡)을 잃어 실효(實效) 없이 귀임(歸任)하였음.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624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三月 八日 光州 警察署長 警視 坂東榮次郞 內部 警務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暴徒의 一般 狀況報告
관내(管內)에 폭도(暴徒) 발발(勃發)의 연원(淵源)은 재작년(再昨年) 광무(光武) 10년(1906) 6월 민종식(閔宗植 : 洪州暴徒의 거괴(巨魁)), 최익현(충청남도의 유생으로 순창, 남원지방 폭도의 수괴(首魁))의 무리가 일한(日韓) 신조약(新條約)에 반대하여 각 지방에 배일(排日)적인 격문(檄文)을 발송하여 홍주, 남원 등지에서 폭동이 일어나게 하고, 그와 같은 무리인 본도(本道)의 유생 광양군의 백낙구, 장성군의 기우만, 창평군의 고광순 등이 무지한 완민(頑民)을 선동 유혹하여 끝내는 동년 11월 중 관제개정(官制改正)의 결과 실직(失職)이 된 전군리(前郡吏) 등과 공모하여 비도(匪徒) 50여 명이 구례와 광양의 두 개 郡을 습격함을 시작으로 동년 12월 중 전라북도 임실군의 강사과(姜司果)는 그의 일당 50여 명을 인솔하고 장성군을 습격 일본인 한 명(우편취급소장)을 참살(慘殺)하기에 이르렀다.
다음해 광무 11년(1907년) 2월 남원의 박재홍은 그의 무리 70명으로써 남원진위대를 습격하여 한때 이를 점령하였지만 곧 물리쳤고, 다시 동년 4월 최익현의 무리들이 경상남도의 유생 이광선의 무리 약 100여 명과 같이 진위대를 습격하였고 동년 7월 경성에서의 한병폭동(韓兵暴動)이래 각 지방에서 불은의 형세(形勢)가 재연(再燃)하고 특히 당 관내인 전라남도와 같은 곳은 고래의 애국지사의 소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지방으로서 --- 이하생략.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635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三月 十三日 南原 警察分署長 警部 小松己生 內部 警務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暴徒 長水郡에 集合한 風說에 關한 件
이달 八日 南秘發 第 八十七號 및 同日 電報한 바와 같이 本道 무주군 酒庫에서 폭도 수백 명이 집합해 있다 해서 장수 주재순사는 진안수비대와 협의 토벌하려고 출장하였는 바 그 후 동 주재순사로부터 아직까지 아무런 보고 없었음. 그래서 어제 저녁 소관(小官)의 신사(頣使)(註 : 수족처럼 부리는 심부름꾼)를 하고 있는 密偵者의 동생 某가 장수방면에서 돌아와 하는 말에 따르면 폭도 수십 명 모두가 軍銃을 지니고 장수군 하번암면에 들어오고 또 수백 명의 폭도는 장수군 천천면에 집합해 오고 있다 함. 과연 사실인지 內偵을 위하여 지체 없이 오늘 아침 두 명의 密偵者를 장수군에 파견하였음.
위 보고함.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641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三月 十三日 午後 八時 南原 警察分署長 警部 小松己生 內部 警務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長水 駐在巡査 暴徒와 交戰의 件
방금 장수 주재순사의 보고에 의하면 지난 십일 오후 열시 장수군 수내면 덕산 자위대장은 장수 주재순사에게 밀보하여 말하기를 오늘 저녁 폭도 오십 명이 마을에 와서 읍내를 습격할 것이라는 말을 드러내 놓고 하는가 하면 또 몰래 읍내에 정찰자를 낼 것이기에 이에 따라 주재원은 크게 경계를 펴고 다음날 십일일 오전 네시 순사 횡산각마 동 적우풍평 및 한인순사 두 명은 주재소를 출발 덕산에 도착해 보니 적은 어제 저녁 숙박하지 않고 촌민에게 폭행을 가한 후 중번암면 방향으로 떠났다 함. 따라서 추적해 보니 과연 동면 중동에서 휴식중인 것을 정지했으나 지형상 곧바로 촌내로 처들어갈 수 없기에 앞에 있는 소악(小岳)에 올라가(적의 소재지에서 칠팔백 미터) 적상(賊狀)을 굽어보니까 적은 세 곳에 보초를 내서 경계를 하고 있었음. 그 때가 午前零時三十分인데 一行은 즉시 山上에서부터 발포하니 적은 낭패산란(狼狽散亂)하여 村內로 달려감을 보자 일행은 더욱 사격을 퍼붓자 적도 뒤쪽 산에 의지하여 응사하기에 일행은 하산하여 적에게 다가가면서 사격을 하니 오후 두시가 되자 적은 힘이 다해 북쪽 산속으로 도주하기 시작하기에 일행은 적이 의지해 있던 산을 점령하고 추격하니 적은 산을 넘어 운봉군 방면으로 도주하였음. 따라서 일행은 멀리 쫓아가기를 그만두고 중동의 인가를 수색하였더니 군데군데 핏자국이 어려 있었지만 사체는 발견할 수 없고 그러나 부상자는 78명 있을 것으로 추찰(推察)하였음. 그리고 화승총 셋, 바랑 셋, 기타 의류 등을 버리고 갔기에 이를 노획하였고 더욱 이 교전에서 일행이 사용한 탄환은 百十九發이었으나 村民의 부상자가 없었으며 또한 일행도 아무런 일없이 무사하였음. 위 보고함.
追伸 : 오늘 오후부터 당지 전주 간 전신 불통이었기에 그 원인 취조 중이었음.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642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四月 八日 南原 警察分署長 警部 小松己生 內部 警務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暴徒의 件 報告
엊그제 六日 午前 두 시경 폭도 십수 명(十數名)이 임실군 하북면 고덕리(읍내에서 三十里 : 지금의 관촌면임)에 들어왔을 때 진안군 일서면(一西面) 시동(矢洞) 주막(酒幕)에서 주소(住所) 씨명(氏名) 년령(年令) 미상(未詳)의 남자 일명(一名)을 잡아와서 졸목치(拙目峙)라 일컫는 곳에서 총살하고 바로 어디론가 출발했다는 것을 다음날 七日 오후 다섯시 하북면(下北面 : 지금의 관촌면) 자위대 단장이 임실 주재순사에게 신고함에 따라 동(仝) 순사(巡査)는 출장 조사하겠다는 보고가 있었음.
위 보고함.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699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四月 八日 全州 警察署長 警親 宮館貞一 內部 警務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暴徒 來襲 討伐狀況 報告
이달 三日 당서 부내 진안군 마령면 사곡리에 폭도 내습한 상황에 관하여 진안주재소 담임순사로부터 보내온 보고의 요지는 다음과 같음.
이달 삼일 오전 네 시경 폭도 十二名이 각기 화승총을 지니고 마령면 사곡리 오정렬 집에 몰래 들어와 집사람을 협박하고 엽전 十兩을 빼앗고 또 그 면 평지리 신진명(愼珍明)집에 난입하여 같은 수단으로 신화 五十兩과 백목 한 필을 빼앗아갔다는 급보를 받고 청미(淸未)순사 김 순사는 수비병 육 명과 함께 그 날 오후 세시 출발하여 수색하였으나 종적을 모르고 채동산정(菜東山頂)에 빈집이 있는데 그곳에 숨어있지 않겠느냐는 항설(巷說)에 따라 일행은 비를 무릅쓰고 登山해 보았으나 또한 없는 바 다음날 四日 진안으로 돌아왔음. 이상 보고함.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701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四月 十日 南原 警察分署長 警部 小松己生 內部 警務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暴徒 出沒의 件
❍ 이달 六日 폭도 六十名 정도가 장수군 내진전면 오산촌 (장수읍에서 四十五里, 임실읍 내에서 四十里)에 와서 자고 이튿날 또 그 面 대창촌(大倉村)에서 일박(一泊)한 뒤 어디론가로 떠났음. 이 사실은 폭도수사차(暴徒搜査次) 엊그제 팔일(八日) 그 面에 출장한 당서(當署) 한인(韓人) 순사(巡査)가 귀서(歸署) 보고하였음.
❍ 이달 七日 야반경 폭도 약 백여 명이 장수군 내진전면 桐花市場(동고지장)에 와서 세 가지 격문을 붙였다고 그 마을 洞長으로부터 다음날 八日 장수 순사주재소에 알려왔기에 순사 오 명(巡査五名 : 日人三名, 韓人二名)이 어제 九日 그곳에 출장하였으나 이미 폭도들은 행방을 알 수 없었다고 보고해 옴.
이상 두 무리의 폭도는 동일한 자로서 그 수는 五六十名 정도인 것 같음.
--- 이하 생략.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703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四月 十日 南原 警察分署長 警部 小松己生 內部 警務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暴徒에 의해 長水郡民 生活難에 關한 件
當署下 長水郡은 當地에서 九十里, 진안에서 六十里, 임실에서 七十里에 있고 交通은 全州를 迂廻하여 한 달에 겨우 七回로 本道에서 가장 교통 불편한 곳임. 근래 폭도는 同郡과 同郡에 隣接한 무주군 안성, 경상남도 안의 등지에서 潛伏하여 郡內에 出沒하는 일이 빈번(頻繁)하고 수색토벌이 뜻대로 되지 못함에 따라 郡民은 가장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 처지에 도로관계 기타 사정으로 위의 각 마을에는 폭도의 출입이 많고 그때마다 식사 제공하여 평상시에도 물자결핍이 심한데 폭도 때문에 더욱더 村民이 窮乏하여 의식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폭도에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고 그 郡 주재순사로부터 보고가 있음. 각지에 주둔해 있는 군대는 현재 철수하고 이에 대체되는 소수의 騎兵을 배치하고 있는 실정인데 따라서 군대의 활동은 한층 불충분할 것이 면키 어려운 일로 생각됨.
위 보고함.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704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六月 十二日 統監(古谷長官), 副統監, 大將 內部大臣, 內部次官, 隊長, 參與官 通信管理局長, 度支部次官
題目 : 全羅北道 全州警察署長 報告 (六月六日)
이날 四日 임실군 상북면(上北面)에서 우편체송(郵便遞送) 일인(日人) 일명(一名)이 폭도에게 저격(狙擊)되어 죽었다는 보고가 있어 취조해 보니 同人은 전주우편국 체송인(遞送人)으로서 원적(原籍) 광도현쌍삼군(廣島縣双三郡) 팔차촌(八次村) 평민(平民) 광창장병위(廣창長兵衛 : 明治十一年 十一月生)인 자(者)로서 그날 오관(五貫) 팔백량(八百兩) 남짓의 우편물을 휴대(携帶)하고 전주를 떠나 남원으로 향하던 도중 그 面 슬치동 부근(瑟峙洞 附近)에서 십명(十名) 미만(未滿)의 폭도(暴徒)에게 저격되어 가슴에 관통 총상을 받고 그대로 즉사한 것 같음. 그 사람은 호신용단총(護身用 短銃)과 은뚜껑 시계(時計), 화폐 약간(貨幣若干)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편물과 단총(短銃)을 제외한 피해는 없었음. 적도(賊徒)의 종적(踪跡)은 밝혀지지 않았음.
위 報告(通報)함.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748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十二月 十六日 全羅北道 觀察使 李斗璜 內務大臣 宋秉晙 閣下
題目 : 面長 조난(遭難)에 關한 件
부내(部內) 남원 경찰서장(警察署長)의 보고(報告)에 관련(關聯)되는 공전영수원 겸(公錢領收員兼) 면장(面長)의 피해사건(被害事件)은 아래와 같음.
十二月 八日 오후 열시 임실 순사주재소(任實巡査駐在所)에 한 사람의 한인(韓人)으로부터 신보(申報)가 있어 오늘 오후(午後) 여섯 시경 상동면(上同面) 면장(面長)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殺害)되었다 하므로 동(仝) 주재소(駐在所) 순사(巡査) 횡전청송(橫田淸松)은 이를 알리고 다음날 아침 미명(未明)에 헌병 일 명(憲兵一名), 동(仝) 보조원 이 명(補助員 二名) 일한인(日韓人) 순사(巡査) 각 이 명(各二名)은 상동면(上同面)으로 출장(出張)하여 조사해 보니 十二月 상동면 면장 겸(兼) 공전영수원(公錢領收員) 박상준(朴相俊 : 그 面 道引洞 十一統 二號) 당(當) 三十九歲는 임실 재무서장(任實財務署長)의 명(命)에 의(依)하여 결복(結卜)과 은결(隱結)의 조사(調査)를 하기 위하여 그날 상동면(上同面) 가정리(可貞里) 주점(酒店) 정귀봉(鄭貴奉) 집에 임원(任員) 팔 명(八名)을 소집(召集)하여 협의(協議)하고 오후 다섯 시경 마치고 임원 三名은 물러갔는데 돌연(突然)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二十八九歲의 한 남자가 면장 등의 방에 들어와 면장을 강제로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집 밖에는 수 명의 같은 무리가 모여 있다가 면장을 동반하여 상동면 백호동(白虎洞)의 산 위로 갔는데 얼마 되지 않아 면장이 피살(被殺)되었다고 함.(중략)
이상의 사실(事實)로 미루어보아 범인은 상동면 출신(上同面出身) 이석용(李錫庸) 일파의 폭도(暴徒)가 저지른 소행이 아닌가 여겨지는데 피해자는 면장으로서 재무관리의 명을 받아 징세(徵稅)에 관여하고 그때 임원(任員)을 소집하여 이 사무를 보고 있었기에 이들 폭도의 반감을 사서 이 같은 不幸을 보게된 것으로 생각됨.
위 보고함.
추신 : 十二月 十一日字 전북경비수(全北警秘收) 第四十三號 第三項 속보(續報)임.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784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二年 (1908) (明治 四十 一年) 十二月 十八日 韓國 駐箚憲兵隊長 明石元二朗 內部 警務局長 松井茂에게
題目 : 面長 殺害事件(十二月九日 任實 분견(分遣)所長 報告)
十二月 九日 임실군(任實郡) 상동면(上同面) 행정(杏亭)에서 살인사건(殺人事件)이 있었다는 보고(報告)를 접(接)하고 상등병 일 명(上等兵 一名) 보조 이 명(補助 二名)을 현장(現場)에 출장시켜 취조(取調)한 바 다음과 같음.
- 被害日時 : 명치(明治) 四十一年 十二月 八日 오후(午後) 여섯 시부터 동(同) 열 시사이 - 被害 場所 : 임실군(任實郡) 상동면(上同面) 백당동(白唐洞)(柯亭泉에서 杏亭으로 通하는 中間 山길, 任實 東쪽 約 十五里) - 被害者 住所 氏名 : 임실군 상동면(上同面) 도덕(道德) 第十一統 二號, 농업(農業) 면장(面長) 박상준(朴相俊) 三十九歲 - 사체(死體)의 狀態 : 생략(省略)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785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三年 (1909) 十月 二十三日 全羅北道 警察部長 警視 宮川無行 警務局長 松井茂 앞
기보(旣報) 와 같이 지난번 남원 경찰서에서 체포된 폭도수괴(暴徒首魁) 최산흥(崔散興)은 작년 五월 경비훈(警秘訓) 第七十九號에 의하여 조사한 바 아래와 같다.
- 씨명, 년령, 신분, 직업, 전관직의 구별충청남도, 은진군(恩津郡), 강경(江景), 무직,전 관직(前官職) 최산흥(崔散興) (당 27년) - 비도(匪徒)를 숙취(聚)하고 혹은 옹립(擁立)되어 수괴가 된 동기 즉 원인, 수단, 목적,
최산흥은 일찍이 견포행상(絹布行商)을 하고 있던 중에 광무 9년 시월경 원 평해군수로서 폭도수괴가 된 이경춘이란 자가 청년 상인은 전부 폭도에 가입해야 한다는 권유에 의하여 처음 폭도에 투신하였고 동인의 부하가 되어 전라북도 각지를 횡행하던 중 태인군에서 일본군대와 충돌하여 드디어 패산하자 이의 휘하를 떠나 그 후 이학사(이석용)의 부하가 되어 배회 중 다시 임실군에서 일본 군대에 의하여 대 타격을 받고 분격한 나머지 곧 순창군에 이르러 수괴가 되어 부하 50~60명을 모아 수비대 및 일본 각 관헌을 습격할 목적으로 각지에서 행동하고 있었으나 근래 군대 및 경찰관헌의 수색이 점점 엄중한 결과 소수의 부대로써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으므로 금년 5월경부터 수괴 양윤숙과 연합한 이래 그의 부장이 되어 함께 행동하던 중 체포되었다. (중략)
주된 근거지 혹은 출몰한 지역은 순창군 구암면 및 임실군 阿山면(지금의 삼계면 후천리)의 2개소이고 임실, 순창, 태인군 및 전라남도 담양군의 일부에 출몰하고 있었다고 한다.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857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統監(佐竹) 內部大臣 內部次官 總務長官 憲兵隊長 外波武官 駐箚軍司令官(參謀長)에게 警務局長 名
題目 : 9月中 暴徒狀況
당 관내(管內) 수괴(首魁)라고 인정하는 자 16명으로 부하 300여 명으로 계산된다. 관내 다수의 집단(集團)은 거의 해산하고 그 환영(其幻影)을 볼 수 없다. 근(僅)히 10명 내외의 소집단(小集團)이 있는데 불과(不過)할 것 같다. 그리고 차등(此等)은 추호(秋毫)도 저항력(抵抗力)을 갖지 못하였다.
미약(微弱)한 소집단이 三三五五 산제(山祭) 우(又)는 여리(閭里)에 출몰하는데 불과하다. 차(此)의 근거지급(根據地及) 배회지(徘徊地)로서는 수괴(首魁) 이사근(李士根) 외 성명 미상자는 익산, 여산, 고산의 각 군, 정성현(鄭聖鉉)은 임실, 순창, 태인, 전주의 4군, 김동구(金洞九)는 임실, 태인, 순창, 남원, 전남 담양군 각 군, 양윤숙(楊允叔) 급(及) 초산흥(崔散興)은 순창외 수(數)군, 마정길(麻正吉), 한○○는 금산, 진산, 용담, 무주의 각 군, 이성화(李成化), 정대홍(鄭大洪)은 고부, 태인, 정읍, 부안, 흥덕, 고창, 무장의 각군으로 본 월중(本月中) 5명 이상의 집단이라고 인정하는 수는 최소 24회에 급(及)하였다. 당 관내는 전남의 여파(餘波)를 수(受)하여 일반에게 급(及)하는 경제상의 관계, 역시 다대(多大)한 영향을 몽(蒙)하여 부유자(富有者)는 약탈(掠奪) 불감(不堪) 피난하여 농사의 감독, 소작미의 징수 등, 자연히 수입에 영향이 미치고 미곡을 폭도로부터 약탈당하여 시장에 나갈 물자는 감소하며 어업자는 전념, 차(此)에 종사할 수 없음으로써 기 수입의 감소를 면치 못한다.
본 월중 여행자 보호 31회에 급(及)한다.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859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 動向 報告 事項
隆熙三年(1909)十一月 二十二日 : 晴, 溫, 상오 8시반 금천소위(今泉少尉) 동반출발(同伴出發) 지(至) 태인군(泰仁郡) 냉수정리(冷水亭里) 25里 오반(午飯) 잉발(仍發) 지(至) 임실군(任實郡) 덕치면(德峙面) 고덕치(高德峙) 25里 착(着) 주둔(駐屯).
隆熙三年(1909)十一月 二十三日 : 早 晴, 映 陰, 잉유고덕상(仍留高德峠) : 설론차덕상(說論次德峠), 강진(江津), 상운(上雲), 하운(下雲), 순창군(淳昌郡) 호계(號溪), 팔등(八登), 합(合) 6면(面) 면장(面長) 고덕상(高德峠), 물우리(勿憂里), 장산리(長山里), 신촌리(新村里), 일구지(日九地), 사곡리(沙谷里), 교항리(橋項里), 각 동장급(各洞長及) 고덕상(高德峠) 인민 등(人民等) 명일(明日) 오후(午後) 대사지휘(待事指揮).
폭도(暴徒) 김갑순(金甲淳), 제래이(提來以) 정성현(鄭聖鉉), 부하자복(部下自服), 강진면(江津面) 율상(栗峠) 거(居) 정성현(鄭聖鉉) 이(以) 폭도(暴徒) 동(同) 성명(姓名) 피착(被捉) 심사 후(審査後) 방송(放送).
※ 德峠面은 현 德峙面을 말함.
隆熙三年(1909)十一月 二十四日 : 陰, 大雪
잉유고덕상(仍留高德峠)
- 하오 3시 각 면장 각 동장 급 인민(人民) 등을 소집우(召集于) 주재소(駐在所) 정중설유(庭中說諭) - 호계면장(號溪面長) 자남원불원불태(自南原不遠不泰) - 폭도(暴徒) 한사(韓士) 안남순(安南順), 박순근(朴順根), 제래심향(提來審向) 양민방송(良民放送)
훈유(訓諭) 상동(上同)
덕상(德峠) 팔등(八登) 양면장(兩面長) 재차(再次) 설유(說諭)
現에 양윤숙(楊允淑)이가 덕상면(德峠面) 물우리(勿憂里) 일구지(日九地)
신촌리(新村里), 순창군 무림면(茂林面) 운정리(雲頂里) 사사리(四士里), 이을리(伊乙里), 호계면(號溪面) 구주리(九走里), 도사리(道士里)로 왕래한다는 탐보적실(探報的實)한즉 정중지어외(鼎中之魚外) 안위착득(安爲捉得)하려니와 각 洞이 호상엄호(互相掩護) 은닉불고(隱匿不告)하면 시일천연지폐(時日遷延之獘)가 有할지니 각 동은 협력 상조하되 각동이 신실인(信實人) 2, 3명씩 선봉(選捧)하여 종적을 수탐(搜探)하여 급급밀고(急急密告)하면 파병포착(派兵捕捉)할지니 人民 等은 동심분력(同心奮力)하여 사속취박(斯速就縛)케 함이 가(可)할 사(事).
隆熙三年(1909)十一月 二十五日 : 晴
잉유고덕상(仍留高德峠)
- 임실군수래착(任實郡守來着) 군대로문(軍隊勞問) - 암미대위(岩尾大尉) 작일(昨日) 피노리래착(避老里來着) - 폭도(暴徒) 조이중(趙二仲) 착내이(捉來以) 정성현(鄭聖鉉) 부하(部下) 자복(自服) - 덕상면장(德峠面長) 보고(報告) 각동(各洞) 지휘(指揮) 폭괴밀탐운운(暴魁密探云云)
隆熙三年(1909)十一月 二十六日 : 陰 雨 晩 晴
잉유고덕상(仍留高德峠)
임실군 덕상면(德峠面) 고덕상(高德峠) 거사인(居士人) 변규호(邊奎浩)는 조이재산가(曹以財産家)로 갈담(葛潭)에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와 순사주재소(巡査駐在所)몰진이래(沒眞以來)로 용달(用達)을 몰입(沒立)하여 일용물품을 수구수납(隨求輸納)하고 각 수비대토벌내왕(守備隊討伐來往)에 제반물품을 편의(便宜)하도록 지점(支店)함은 전(專) 위민정(爲民情)하여 진력담임(盡力擔任)함이요, 실비권리(實非權利)하여 송성(頌聲)이 편일(遍溢)하고 덕비가입운(德碑柯立云).
隆熙三年(1909)十一月 三十日 : 大雪
잉유피노리(仍留避老里)
- 임실군 하운면(下雲面) 신기(新基) 김봉조(金鳳曺) 이폭도초래(以暴徒招來) 심문(審問) 전일(前日) 진안 수비대(鎭安守備隊) 피착양민방송(被捉良民放送) 확증유지(確證有之) 즉위효유방송(卽爲曉諭放送) 자수비대(自守備隊) 물침표성급(勿侵票成給) - 순창군 무림(茂林) 구암(龜岩) 양면(兩面)과 임실군 덕상(德峠) 강진(江津) 양면(兩面)은 처재(處在) 회문산중(回文山中)하여 궁협심곡(窮峽深谷)에 촌리영락(村里零落)이온데 인민정형(人民情形)은 루경폭도(屢經暴徒) 침해(侵害)하여 생활곤란(生活困難)하며 수확무한중(收穫無暇中) 우이결세체납(又以結稅滯納)에 우위곤박(尤爲困迫)하여 지어곡물대납지경(至於穀物代納之境)에 극위애귀운운(極爲哀歸云云)
隆熙三年(1909)十二月 六日 : 晴
운암면(雲岩面) 각동(各洞)은 조지영업자거(造紙營業者居) 다실(多失)하니 유래폭도지란(由來暴徒之亂)으로 도금(到今) 3년을 폐업(廢業)하여 태지영창지(苔紙映窓紙等屬)은 미성승종운(未成繩種云) --- 중략
隆熙三年(1909)十二月 七日 : 晴
上午 9시 선발지(先發至) 임실군 갈담리 50里 오반(午飯) 잉발지내주(仍發至內州) 신정리(新亭里) 30里 지숙(止宿) 병대(兵隊) 2名 동반(同伴)
隆熙三年(1909)十二月 八日 : 晴
上午 8時 半 출발(出發) 환도압(還道壓)
자(自) 순창군 내로 경(經) 임실군 갈담리하여 지(至) 전주도로교량이 완전 수치(修治)함.
隆熙 三年(1909) 十二月 八日 全羅北道觀察道 村 上 則 貞 事 務 官 金 鎭 賢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874~877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隆熙 三年 (1909) 十月 二十五日 統監(佐竹) 內部大臣 內部次官 總務長官 憲兵隊長 外波武官 駐箚軍司令官(參謀長) 警務局長 名
題目 : 9月中 全羅北道 暴徒狀況
當 내부수괴(內部首魁)라고 인정되는 者 16명으로 부하 300여 명으로 산(算) 된다. 관내 다수의 집단은 거의 해산되어 그 환영(幻影)을 보지 못한다. 근(僅)히 10명 내외의 소집단이 있음에 불과하다. 그리고 차등(此等)은 소호(小毫)도 저항력이 없다. 미약의 소집단 三三五五 산야(山野) 또는 여(閭)리에 출몰하는데 불과하다. 차(此)의 근거지급 배회지로는 수괴(首魁) 이사근(李士根) 외 성명 불상자는 익산, 여산, 고산의 각 군, 주성현(朱聖鉉)은 임실, 순창, 태인, 전주의 4개군, 김동구는 임실, 태인, 순창, 남원, 전남 담양의 각 군, 양윤숙급 최산흥은 순창 외 수군(數郡), 마정길, 한봉서는 금산, 진산, 용담, 고창, 무장의 각 군, 이성화 주대홍은 고부, 태인, 정읍, 부안, 흥덕, 고창, 무장의 각 군으로 본월 중 5명 이상의 집단이라고 인정되는 것이 습래(襲來) 24회에 及하였다. 당 관내는 전남의 여파(餘波)를 수(受)하여 일반에 급(及)한 경제상의 관계역(關係亦) 다대(多大)한 영향을 몽(蒙)하고 부유자는 약탈(掠奪)에 불감(不堪) 피란하여 농사의 감독 소작미의 징수 등 자연수입에 향급(響及)하여 미곡을 폭도에게 약탈당하여 시장에 갈 물화(物貨)는 감소하고 어업자는 전념 차(此)에 종사할 수가 없음으로 그 수입 감소를 면치 못하고 본 월중 여행자 보호 31회에 及하였다.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877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明治四十三年(1910) 三月 四日 韓國 駐箚憲兵隊長 사까끼바라 昇造 內部警察局長 松井茂 앞
通 報
중략
전북 임실군 내에서 적 1명을 체포하였다.
2월 24일 갈담 헌병 분견소 상등병 1명, 보조원 1명은 임실군 구고면 평지리에서 적도(賊徒) 1명을 체포하였다.
註 : 《長興高氏家門과 그 姻親》 904面의 當時 倭警 情報 報告 記錄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