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장 任實地域 3․1運動의 歷史的 背景
조선왕조 500년의 사직은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통감 데라우찌 사이에 조인된 한일합방 조약으로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일본은 노일전쟁의 승리로 국제사회에서 그 힘을 인정받았고 1905년 11월 한국정부를 무력으로 위협하여 한일협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뒤이어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한 후 1907년 7월에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였다하여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8월에는 마지막 남은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같이 한국병합의 전초작업을 끝낸 일본은 보호정치란 명목으로 많은 악법들을 만들어 우리 국민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06년 전국에 ‘농공은행’(뒤에는 식산은행으로 변경시킴)과 ‘금융조합’을 설립하여 도시와 농촌의 경제를 장악하기 시작했고 1908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토지를 빼앗기에 혈안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민족은 의병투쟁을 비롯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나 일제는 무력으로 탄압하여 이를 진압하는 한편 ‘일진회’ 같은 매국단체를 조직하여 후원까지 하였다.
일진회의 회장 이용구는 일본의 사주를 받아 ‘합방상주문’과 ‘합방청원서’를 순종황제에게 제출하자 이에 대한 반대가 전국적인 규모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진회의 매국행위는 정부의 무능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일본정부는 한국의 완전합병을 목적으로 현직 육군 대신인 ‘데라우찌’를 제3대 통감으로 발령했다.
1910년 6월 20일 서울에 도착한 ‘데라우찌’는 도착 4일 후 한국의 경찰권을 강제로 빼앗고 국내의 정치 정세를 면밀히 분석한 후 한일합병을 추진하였다.
새 통감에 부임하자 이에 영합한 이완용은 1차로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황제를 왕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뒤이어 한국 황실의 안전을 보장하고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정치기관의 통합만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데라우찌의 병합 안(案)에 별다른 이의 없이 조인함으로써 한일병합조약을 8월 29일 공포하였다.
병합조약이 발표되자 통감부는 즉시 한국정부의 모든 기관을 접수하고 사후처리에 착수하였다.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식민지 지배체제를 확립해 나아갔다. 총독부에서는 총독, 관방, 총무부,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가 있고 실무는 문관인 정무통감 밑에 총괄되었다.
경찰권은 헌병과 경찰이 장악하고 교육관은 성균관을 비롯 한성사범학교 등 관립학교와 보통학교 등이 있었는데 그 수가 적을 뿐 아니라 식민지 교육장으로 전락하였다. 또한 서울의 용산과 함경도 나남에 육군 2개 사단과 진해만과 영흥만에 해군 2개 부대를 주둔시켜 데라우찌는 이런 막강한 힘을 앞세워 부임 초기에 한국국권을 회복하려는 단체는 물론 그들의 앞잡이로 이용가치가 적은 일진회를 비롯 10여 개의 정치단체를 해산시켰다.
또한 출판법과 신문지법을 제정하여 국민신문, 한성신문, 대한매일 등 우리말 신문과 경성신보, 조선일보 등 일본말 신문을 정리 또는 폐간시키고 경성일보, 매일신보 등 어용신문만 남겨두었다.
그리고 국외로부터 들어오는 신문, 잡지도 판매를 금지, 또는 제한시켰다. 한편 제국주의 충성스런 신민을 만든다는 명목 하에 ‘한국역사와 지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여 수십만 권의 서적을 압수 소각해 버리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급 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임용하여 민족동화교육을 담당케 하여 우리말 사용을 금지시키고 강제로 일본말만 사용케 하였다.
이처럼 치밀하고 철저한 ‘무단정치’는 한국 국민의 자주의식과 항일구국운동을 억제시켰다. 한․일 병합조약이 발표된 이후에도 한국민의 거국적 저항이 없는 것을 본 총독부는 적이 안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 무단정치 하에서 표면상에 나타난 것일 뿐 몇몇의 친일파를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은 나라 잃은 슬픔과 분격에 몸부림쳤고 총독정치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경찰의 모진 고문을 못 이겨 옥중에서 죽은 애국지사도 많았고 평생을 상복차림으로 하늘을 보지 않고 죽은 유생도 있었다.
이처럼 조선총독부는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여 야만적인 무력탄압을 가함으로써 이 시기의 독립운동은 지하운동으로 바뀌어 크게 두 줄기로 나뉘어 있었다.
그 하나는 의병운동을 계승한 무장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신문화운동을 통한 실력양성 운동이었다. 이 무렵 1918년 1월 8일 윌슨 미국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보도 관제와 은폐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즉시 알지 못했으나 재한(在韓) 미국선교사와 재일(在日) 재미(在美) 한국유학생들을 통해 국내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국내에서보다 앞서 독립운동의 횃불을 올린 것은 재일 한국유학생들이었다. 재일 한국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도쿄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 독립단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했던 것이다. 일제의 수도 한복판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한 것과 국내 3․1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고종황제가 의문의 붕어(崩御)를 했다. 덕수궁에서 기거하던 고종황제는 건강이 좋았는데도 춘추 68세로 1919년 1월 21일 새벽 갑자기 붕어(崩御)하신 것이다. 격문과 독립신문에서 황제의 독시(毒弑)를 연일 주장하자 민심은 술렁거렸고 항일감정을 크게 부채질하였다. 이런 사실들이 퍼져나가자 수십만의 군중은 대한문 앞에 모여들어 밤낮으로 통곡하며 원통함을 가누지 못했다.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붕어와 ‘민족자주선언’ 및 ‘독립선언설’ 등이 한데 겹쳐 일제 식민지 통치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항일정신을 더욱 고취시켰으며 거국적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때 천도교를 비롯, 기독교, 불교, 유림 등 각 종교단체를 망라한 구 한국사회에 이름 있는 인사들을 민족대표로 내세워야 한다는 데 합의하였는데 구 한국시대 저명인사들은 한 사람도 응하지 않았다. 이에 천도교 중심인물들은 크게 실망하여 이 운동을 포기하려고까지 하였으나 때마침 고종황제의 붕어로 민족의 배일감정이 절정에 달하여 다시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천도교에서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등 15명과 기독교에서 이승훈, 양진택 등 16명이 불교 측에서는 한용운, 백용성이 서명하니 서명한사람은 모두 33인이 되었다. 이처럼 어려움 속에서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하여 마침내 거족적인 3․1만세운동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오후 2시가 되자 조선총독부에 ‘독립선언식’을 한다는 것을 알리고 한용운의 독립선언에 이어 만세를 불렀다. 통고를 받고 태화관을 포위했던 일본경찰대 80여 명은 우리 민족사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민족대표들을 연행하였다. 한편 정오경부터 수많은 인파가 몰려든 탑골공원에서는 민족대표가 예정을 바꾸어 이 식전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2시 정각에 연희전문학교생 ‘강기덕’이 선언서를 낭독하려고 할 때 황해도에서 참석한 기골이 장대한 젊은 ‘정재룡’이 학생신분으로 더 큰 일을 하라고 대신해서 선언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2천 6백여 자에 이르는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군중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터져 나오고 파고다 공원은 천지가 떠나갈 듯 만세소리가 가득찼다. 이때부터 서울을 비롯 전국 각처에서 거족적인 3․1운동은 확산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