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3장 任實地域 3․1運動의 時代的 背景
임실지역의 항일운동은 전국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또한 도내에서도 독립운동 ‘훈, 포장’ 수여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이는 이 지역 운암출신의 부자로 덕망이 높았던 전주 최씨인 ‘최찬국’이 도내에서 최초로 남원(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오수면 둔덕 지역이다.)에 들어온 천도교에 일찍(1874년) 입교한 후 진안, 장수, 무주, 용담, 순창, 남원, 구례, 곡성 등 10여 개 군에 잠입하여 포교하니 교도 수가 수천에 달하였으며 이 지하조직에 동량 역할을 한 김홍기, 김영원, 한영태, 최승우, 최유하, 최동필, 등 여섯 분이 결의 형제의의를 맹약하고 포덕사업에 전력하였다. 이들은 1894년 갑오동학 농민혁명 때에는 대접주 신분으로 식량과 무기를 제공하고 임실을 무혈 석권하여 집강소 설치로 민정을 다스리고 남원의 대접주 김홍기(오수 출신)와 합세하였다. 전주에서 전봉준 부대와 만나 손병희 선생과 합류하여 공주 공격에도 참여하였으나 공주성 싸움에서 패하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최승우(최찬국의 자)는 임실교구장이 되고 청웅에 제 2교구를 건립하여 초대 교구장에 박준승(3․1운동 33인 중의 한 분)이 임명되었다. 2대에 최승우가 임명되면서 배일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사재를 털어 청웅에 삼화학교를 설립하였고, 전주에 창동학교를 설립하여 김영원 선생을 교장으로 모시면서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니 일본 헌병들은 배일사상이 농후하다 하여 강제로 폐교시켰다. 전주의 창동학교도 폐교 당하였으나 그 결실은 이 학교 출신으로 박준승과 전남 화순출신의 양한묵 등 3․1운동 33인 중 두 분을 배출하였고 박용(朴龍)은 일제 시 한국인으로는 초대 경부가 되어 3․1운동 시 임실경찰서 근무 중 그의 모친이 찾아와 칼을 내려놓고 이 대열에 참여하라고 강력히 주장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그 보다는 이 자리에서 그 분들을 제 양심껏 도와줄 것이니 안심하라.”고 하고 일본경찰로서 우리 독립투사들에게 많은 선심을 써주어 임실은 6개월 간이나 계속 우후죽순처럼 만세를 불렀으나 옥고를 치른 분은 전국적으로도 제일 많으면서도 사망자는 타 지방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뿌리 깊은 천도교의 조직과 삼화학교에서 배출된 인물들이 각 처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하였으니 타 지역에 비해 많은 항일 투쟁을 전개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