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5장 任實 만세운동의 지주 金榮遠 先生
김영원(金榮遠) 선생
김영원 선생은 1853년(철종 4년) 8월 5일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시목동에서 김성집(金星集)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경화(化京), 도호(道號)가 원암(源庵)이며 본관이 경주인 김영원은 3살에 부친을 여의고 15살에 모친마저 별세하였다. 그러나 유년기부터 농사일을 하면서도 주경야독하는 향학열은 제자백가(諸子百家)에까지 이르렀다. 김영원의 학문은 20세를 전후해 유학자로서 자리를 잡았으며 고종 15년(1878) 25세 때는 정읍 칠보의 무성서원 장의(掌議)로 선출되었고, 이듬해에 전라도 서원 색장(色掌)이 되었다.
이 무렵 대과에 급제할 웅지를 품었으나 뇌물과 매수로 합격되는 부패를 통분해 한 나머지, 고향의 시목동 선우봉 밑에 삼락정(三樂亭)을 세우고 후학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때의 문하생 가운데 박준승과 양한묵은 후일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일원으로 신명을 다했다.
이 때 김영원은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동학에 몸담을 것을 결심하고 최승우(崔承雨) 접주의 안내로 동학에 정식 입교하여 포(包) 조직과 교세 확장에 몰두했다.
김영원 선생은 나라 잃은 백성들이 자포자기와 허탈에 빠지는 것을 막고 일본을 능가하는 국민의 저력을 북돋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판단하여 독립정신 계도(啓導)를 위한 《운무지(雲霧誌)》를 월간으로 발행코자 하였으나 왜경이 이를 탐지하고 폐사 조치함으로 웅지를 펴지 못했다. 그러나 뜻을 굽히지 않고 교훈도원의 요직을 맡아 배일(排日) 지하운동을 계속했다. 우리가 흔히 33인이라고 하는 민족대표는 당초 김영원 선생이 각계와 밀회를 거듭하여, 1차로 105인을 대표로 뽑았는데 다음에 49인, 다음에 45인을 선발했다. 고종의 인산(因山)날을 기해 각계각층의 여망에 따라 조선민족대표로 33인을 선출키로 하고 그 중에서 천도교 측이 17인을 파견키로 하는데 막중한 조정 역할을 했다. 이 때 김영원은 이미 고령이므로 박준승과 양한묵을 대표로 참여토록하고 지방 책임을 자청, 이해 9월 초 하향하여 독립운동 자금조달을 위해 ‘대성미(大誠米)’를 염출하는 데 동분서주했다.
한편 손병희, 오세창 등과 긴밀히 연락하고 숙의한 끝에 도내에서는 3월 10일부터 본격적으로 3․1 운동의 불길을 폭발시켰다.
1919년 3월 2일 서울에서 전해 받은 독립선언서를 운암면 일대에 게시하였다. 이날 正午경, 운암면 지천리에 있는 천도교 교구실에서 천도교 전도사인 한준석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여 매를 전해 받았다. 이에 그는 독립선언서를 운암면 내의 입석리(立石里), 선거리(仙居里), 학산리(鶴山里) 일대에 게시함으로써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을 이 지역 주민들에게 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3월 12일의 임실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의 정신적 배경이 되게 하였다.
3․1 운동의 선봉에 나선 김영원은 불행하게도 3월 27일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나 취조담당자가 창동학교(昌東學敎) 제자라서 조사서를 간단히 꾸며 석방되었는데 형사인 박용(朴勇) 또한 사표를 내고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삼혁당 김영원 선생의 손자 김정갑 씨
그러나 동지들이 고문에 못 이겨 김영원이 주모자라고 자백하자 김영원의 취조와 고문은 더욱 심해졌으며, 당시 일본인 판사 모리에게 일본 재판은 받지 않겠다고 버티다 심한 고문을 또 당하였고, 고문으로 인해 사경에 이르니 병보석으로 귀가조치 되었다가 그해 7월에 재수감되었다. 김영원은 옥중에서도 자정이 되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대니 수감되어 있는 다른 동지들도 따라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는 감방을 옮기고 가혹한 고문을 당하자, 마침내 67세의 노구로 1919년 8월 26일 옥중에서 일생을 마쳤다.
김영원은 한말의 구국운동 20년, 합병 후 독립운동 10년을 통해 보신책으로 두희(斗熙), 병옥(秉玉), 병원(炳遠) 등의 별명과 변명으로 변신술을 썼다. 천도교 도호인 원암 외에 삼혁당(三革堂)이라 자호(自號)를 정한 것은 갑오년(甲午年) 동학혁명에 가담하여 첫 번째 혁명하고, 갑진년(甲辰年)에 머리를 깎고 자신을 두 번째 혁명하고,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세 번째 혁명을 뜻한 것이다.
선생의 후손(後孫)인 김정갑은 현재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시목동에 살고 있으며, 조부님의 애국애족과 충성심을 기리기 위하여 삼요정(三要亭) 옛터에 2001년 9월 28일 삼락정(三樂亭)을 복원하여 관리하고 대대손손 선영들의 묘소를 지키고 있어 애국지사의 후손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김영원 선생의 유업을 기려 정부에서는 1963년 3월 1일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그리고 1993년 6월 1일에 국가유공자증을 추서 하였다.
註 : 《全北地域獨立運動史》 292面 (2004年 發行)《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03面
❏ 金榮遠 先生의 功積內容
本籍및 住所 : 任實郡 雲岩面 仙居里 (柹木洞 : 감나무골) 姓 名 : 金 榮 遠 (字 : 化 京) 別名과 變名 : 斗熙, 秉玉, 炳遠, 炳熙, 道號(天道敎) : 源 庵 雅 號 : 三 革 堂 生 年 月 日 : 1853년 (哲宗 4年 癸丑) 8月 5日 殉 國 : 1919年 (己未) 8月 26日全州刑務所에서 獄死 享年 67歲
❏ 雲岩에 異人이 나다
평화시(平和時)에는 슬기롭고 어진 인물(人物)이 필요하고, 난세(亂世)에는 영웅호걸(英雄豪傑)이 나와야 하며, 비상(非常)한 시국(時局)에는 비상(非常)한 인물(人物)이 나오는 것이니, 한말(韓末)의 소용돌이 니란(泥亂)속에 전북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감나무골 고요한 마을에서 이인(異人)이 태어났다.
그 이름은 김영원(金榮遠), 그의 선조(先祖)는 경주 김(慶州金)씨,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학림군(鷄林君) 김 균(金 稛)을 파조(派祖)로 하여 그 후손(後孫)을 학림군파(鷄林君派) 또는 위호(諱號)를 따서 제숙공파(劑肅公派)라 하는데 공(公)의 손자(孫子)인 대사성부제학신민(大司成 副提學 新民)의 14대손(代孫)이 김영원(金榮遠)이다.
김영원의 조부(祖父)는 진사과(進士科)를 합격(合格)한 김만현(金萬玹)이며 부친(父親)은 김성집(金星集)인 바 그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先生)은 낳으면서부터 기골(氣骨)이 남보다 장대(壯大)하고 눈에 정기가 빛나 운암(雲岩)에 이인(異人)이 났다고 소문(所聞)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불행(不幸)히도 삼세(三世)에 아버지를 여의고, 십오세(十五世)에 어머니마저 병(病)이 위독(危篤)하자 선생(先生)은 손가락을 잘라 마시게 함으로 잠시 소생(蘇生)하였으나 겨우 유언(遺言) 몇 말씀 남기신 후 끝내 별세(別世)하셨다. 선생(先生)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는 농번기(農繁期)에 형(兄)의 농사(農事)일을 돌보아주면서 틈틈이 주경야독(晝耕夜讀)과 농한기(農閑期)인 겨울에 도마치(道馬峙)를 넘어 서당(書堂)을 다니는데 하루는 고갯길에서 호랑이를 만나 곤봉(棍棒) 하나로 그 호랑이를 격퇴(擊退)하여 실신(失身)한 동문생(同門生)을 업고 귀가(歸家)하였더니 선생(先生)의 담대(膽大)함에 놀라지 않은 이 없었다.
당시 이씨조선말기(李氏朝鮮末期)의 동향(動向)은 삼정(三政)의 문란(紊亂)과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폐단이 쌓이고 쌓여 민생(民生)은 도탄(塗炭)에 빠지고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의 폭정(暴政)에 시달리는 민중(民衆)의 분노(憤怒)는 진주를 위시한 삼남(三南)의 민란(民亂)으로 폭발(暴發)하였으며, 위로 특권계급(特權階級)의 부패(腐敗)와 아래로는 민생(民生)이 동요(動搖)되고 서양(西洋) 물결이 도도히 흘러드니 이때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구호(口號)로 최제우(崔濟愚)를 중심(中心)으로 한 동학(東學)이 포교(布敎)되자 백성(百姓)들은 구세주(救世主)를 만난 듯 사람마다 동학교인(東學敎人)으로 몰려들었다.
❏ 靑年時節에 東學에 歸依
이십세(二十歲)를 넘으니 선생(先生)의 학문(學文)은 자리가 잡혀 젊은 유학자(儒學者)로 손꼽혀 오더니 패기(覇氣) 넘친 그는 고종(高宗) 15年(1878年) 이십육세(二十六歲)때 태인 무성서원(泰仁 武城書院 : 湖南第一의 名門書院)의 장의(掌議)에 선출되고 상운암(上雲岩)에서 훈장(訓將)을 지냈으며, 이듬해에는 전라도서원(全羅道書院)의 색장(色掌)이 되었는데 이 무렵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할 웅지(雄志)를 품고 세 차례나 상경(上京) 문과(文科)에 응시(應試)하였다.
그러나 권문세가(權門勢家)에 아첨하는 풍조가 늘어 과거시험(科擧試驗)은 형식적(形式的)일 뿐, 뇌물(賂物)과 매수로 합격(合格)이 결정(決定)되는 등 부패(腐敗)한지라 비분(悲憤)한 나머지, 이후(以後)로 과거(科擧)를 단념(斷念), 고향(故鄕)에 내려와 시목동(柹木洞) 선무봉(仙舞峰) 밑에 삼락정(三樂亭)을 세워 이곳에 후배(後輩)들을 모아 오로지 몽학(蒙學)에만 힘썼는데, 선생(先生)의 고명(高名)을 흠모(欽慕)하고 원근(遠近)에서 모여든 제자(弟子)들이 많았으나, 그중에도 당시문하생 중(當時 門下生中) 청웅 출신(靑雄出身) 박준승(朴準承)과 전남 화순 출신(全南 和順出身) 양한묵(梁漢黙)은 후일(後日) 삼일운동(三一運動) 때 민족대표(民族代表) 삼십삼인 중 일원(三十三人中一員)이었다.
이 때 선생(先生)은 좀더 넓은 시야(視野)에서 구국운동(救國運動)을 하려면 민중(民衆)의 구세주(救世主)처럼 신앙(信仰)의 대중(大衆)이 되어온 동학(東學)에 몸담을 것이라 단정하고 최승우 접주(崔承雨 接主)의 안내(案內)로 동학(東學)에 정식 입교(正式入敎)하여 포(包) 조직과 교세확장(敎勢擴張)에 힘써 갑오년(甲午年 : 1894) 동학혁명(東學革命) 때에는 임실(任實)의 북접주(北接主)로 활약(活躍)하였다.
동학혁명운동(東學革命運動)이 실패(失敗)한 후(後)로는 회문 산중(回文山中)에 육년간(六年間)을 은거(隱居)하였다.
광무 원년(光武元年 : 1897) 12月 25日 손병희 선생(孫秉熙先生)이 동학(東學)의 삼세교주(三世敎主)로 전통되자 동(同) 사년(四年 : 1900)에는 다시 상운암(上雲岩) 훈장(訓長)으로 나갔다.
❏ 長男 敎民의 憤死
광무 8년(光武八年 : 1904) 국사(國土)가 다시 러시아와 일본(日本)의 전쟁(戰爭)터가 되어 일본(日本)의 승리(勝利)로 정계(政界)가 일변(一變)하여 세상(世上)은 친일파(親日派)가 날뛰어 국운(國運)이 날로 기울어갔다. 선생(先生)은 뜻을 정(定)하고 세 아들 교민(敎民), 교승(敎升), 교석(敎石)에게 유언(遺言)을 남긴 채 고향(故鄕)을 떠나 머리를 깎고 단발(斷髮)하여 민중개화(民衆開化)만이 구국(救國)의 길이라 주장(主張)하면서 운암 출신 최승우의 재정적 지원(雲岩出身 崔承雨의 財政的 支援)을 얻어 전주부중(全州府中)에 창동학교(昌東學校)를 창설(創設), 학감 교장에 취임(學監 校長에 就任)하고, 이어 임실군 구고면 양지리(陽地里 : 현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에 삼화학교(三和學校)를 창립(創立), 장자 교민(長子 敎民)을 교사(敎師)로, 자신은 교장(校長)에 취임(就任)하였다. (1906년)
이 삼화학교(三和學校)는 우리 고장 신제도학교 설립 시초(新制度 學敎設立 始初)가 되며, 인재육성(人材育成)에 전념(專念)하니 각처(各處)에서 제자(弟子)가 운집(雲集)하였고, 그 제자(弟子)들 중 오수(獒樹) 곽한영(郭漢永)은 후일(後日) 전북유림회장(全北儒林會長)이 되고, 그 밖에 삼일운동(三.一運動)때 청웅면(靑雄面)에서 크게 궐기(蹶起)하는 투사(鬪士)들은 거의 삼화학교(三和學校) 출신(出身)이었다.
융희(隆熙) 원년(元年 : 1907년)부터 4년간(四年間)은 천도교(天道敎) 순창교구장(淳昌敎區長)을 겸직(兼職), 교령(敎領)의 지위(地位)에서 순창(淳昌)과 임실 양 군(任實 兩郡)에서 활약(活躍)하다가 1910年 8月 29日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니 제자(弟子), 교인(敎人)들과 앙천통곡(仰天痛哭)하며 삼일 간을 단식(斷食)하였다. 이 때 선생(先生)의 장남 교민(敎民)은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끝내 분사(憤死)함으로써 후일 선생의 옥사(獄死)하심과 더불어 부자(父子) 함께 사절(死節)한 것이다.
이에 선생은 나라 잃은 백성들이 자포자기(自暴自棄)와 허무(虛無), 허탈(虛脫)에 빠지는 것을 막고, 일본(日本)을 능가(凌駕)하는 국민의 저력(底力)을 북돋아 장차(將次) 때가 와 권토중래(捲土重來)의 대의(大義)를 펴려면 국민계몽(國民啓蒙)이 필요하다고 단정(斷定)하고 동지들을 규합(糾合), 성문회(聖門會)를 조직(組織), 회원의 출자금(出資金)으로 성문사(聖門社)를 건립(建立)하여 독립정신 계몽지(獨立精神 啓蒙誌)인 《운무지(雲霧誌)》를 월간(月刊) 발행(發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왜경(倭警)이 이를 탐지(探知)하고 폐회(廢會) 폐사(廢社) 조치(措置)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왜경(倭警)의 감시(監視)로 선생은 갈수록 행동(行動)이 자유롭지 못하였으나 굽히지 않고 진안, 전주, 전남, 장성 등 여러 고을의 천도교(天道敎) 교구장(敎區長)을 차례로 역임(歷任), 이어 347 교리(敎理) 강습소장(講習所長), 교훈(敎訓), 도훈(道訓)의 각 부서(各部署) 천도교(天道敎) 요직(要職)을 맡아 배일(排日) 지하운동(地下運動)을 계속하였다.
❏ 地下活動과 三·一運動 指導
지금(只今)까지 지방(地方)에서만 구국항일운동(救國抗日運動)을 벌여오던 선생은 1918년 1월 서울로 상경(上京), 이제부터는 中央의 요인(要人)들과 함께 지하이작(地下二作)을 함으로써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차원(次元)을 달리하였다.
삼혁당 김영원 선생의 사당 내부
그리하여 교우들 중 가장 인망(人望)이 높은 오세창, 권동진, 라용환, 홍병기, 홍기조, 최 린, 제씨(諸氏)들과 천도교(天道敎) 중앙총부(中央摠部)에서 날마다 밀의(密議)하고 선생의 문하생(門下生) 박준승 양한묵과도 밀의(密議)를 거듭하여 장차 거국적(擧國的) 민족궐기(民族蹶起)를 함에 있어 그에 파견(派遣)할 민족대표(民族代表) 중 천도교측(天道敎則) 인선작업(人選作業)을 하는데 동지(同志)들이 밀회(密會)하던 장소(場所)는 서울 교외 우이동 소재 봉황각(鳳凰閣)과 도선사(道銑寺)를 번갈아 써 왔다.
처음에는 제 일차(第一次)로 105인(人)의 대표를 뽑았다가 그 다음에 49인(人), 그 다음에 45인(人)으로 최종(最終) 선발(選拔)하여 총궐기(總蹶起)를 지도(指導)하고자 계획(計劃)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고종(高宗)의 인산(因山)날을 기해 각계각층(各界各層) 대표(代表)로 국민(國民)을 총지도(總指導)하자는 여망(輿望)에 따라 조선민족(朝鮮民族) 대표(代表) 33人을 선출(選出)키로 하고 그 중에서 천도교(天道敎)측이 17인(人)을 파견(派遣)키로 하였다.
선생은 전기(前記) 여러 동지(同志)들과 밀회(密會)를 거듭하여 17인(人)을 확정(確定)하였는데 이 작업(作業)은 1918년 8월말까지 끝마쳤다. 이 때 선생은 66세였는데 고령(高齡)이므로 문하생(門下生) 박준승, 양한묵 2인(人)을 17명 대표(代表) 중에 참여토록하고 자신(自身)은 지방 책임(地方責任)을 맡아 이해 9월경(九月初) 하경, 전주부중(全州府中) 현 고사동 이군필 교우 집에서 전북도내(全北道內) 천도교(天道敎) 간부회의(幹部會議)를 거듭하였다.
이 때 참가인사(參加人事)로서는 전주에서 김봉년, 민영진(閔永軫), 천두만, 이병춘, 순창에서 우치홍, 차상갑, 익산의 정용근, 남원에서 유태홍, 이기동, 금구의 김화일, 임실에서 최승우, 한영태, 강계대, 박성근, 우성오, 이상 제씨(諸氏)들인 바 이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키 위하여 ‘대성미(大誠米)’를 거출키로 하되 어디까지나 교인 각자의 생활정도(生活程度)에 따라 자발적(自發的)으로 출연(出捐)하도록 하고, 도내활동(道內活動) 조직상황(組織狀況)을 수시로 손병희 교주(敎主)에게 보고(報告)하였다.
선생은 150만 도민들을 한덩이로 뭉쳐 장차 거국적 민중운동을 위한 최적 중대협의를 위해 1919년 2월 중순 최승우 교주와 함께 상경하여 손병희 교주를 비롯, 오세창, 최 린, 박준승, 양한묵 등 45인의 지도인사들과 우이동 봉황각에서 거사일자 거사준비방법 민중동원 자금거출 보안조치 거사 후 일경과의 옥중투쟁 등등 중대 기밀사를 최종 결의하였다. 그리고 곧 하향하여 지역을 분담하고 선생은 임실군민만 전담키로 하여 천도교 임실 교구당을 비밀연락처로 삼고, 3월 1일에 운암면 지천리에서 도내 각 교구 대표들을 비롯, 일반 동지 수백 명을 회동하여 중앙에서 전달된 독립선언서를 전주, 남원, 순창, 임실, 진안에 전달하여 일제히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조치하였다. 이러한 비밀 연락에 따라 도내 각 시군에서는 3월 10일부터 3․1독립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폭발되었다.
❏ 先生의 最後(獄死)
도내(道內) 각(各) 교구 인사(敎區人事)들과 밤마다 밀회(密會)를 하고 때로는 한밤중에 손수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마을마다 붙이고 다녔으며 군민(郡民)들과 도민(道民)들의 3․1 운동(運動)을 지휘(指揮)해 오다가 3월 27일 불행히도 왜경(倭警)에 체포(逮捕)되고 말았으니, 민중(民衆)들은 위대(偉大)한 지도자(指導者) 한 사람을 잃게 되었다.
삼락정복원기념비(운암면 선거리 시목동)
즉시 전주경찰서(全州警察署)에 구속(拘束)되어 조사(調査)를 받는데 때마침 선생을 취조(取調)한 담당자 박용(朴勇)은 일본(日本)인과 함께 순사(巡査)로 있었지만 옛날 창동학교 출신으로 선생의 제자(弟子)인지라 사제지정(師弟之情)도 있었고, 또 박용의 어머니는 천도교(天道敎) 교인(敎人)으로 선생을 잘 아는 터이므로 어머니의 분부도 있고 해서 박용이 꾸민 범죄조사서(犯罪調査書)는 매우 간단하게 처리되었다.
박용은 선생의 범죄조사서(犯罪調査書)를 무사(無事)토록 꾸며 놓고는 곧 사표(辭表)를 내고 자신(自身)도 독립운동(獨立運動)에 가담(加擔)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계속 체포(逮捕)된 동지(同志)들이 고문(拷問)에 못 이겨 많은 사람들이 김영원이 주모자(主謀者)의 한 사람이라 자백(自白)하니 선생의 조사(調査)는 다시 시작(始作)되면서 사정(事情)없는 고문(拷問)이 가(加)해지고, 그럴 때마다 몇 번이나 기절(氣節)하였다가 찬물을 붓고 소생(蘇生)시키는 등(等), 처참한 매를 못 이겨 67세의 노구(老軀)는 마침내 1919年 8月 26日 옥중(獄中)의 죽음으로 일생을 마쳤다.
선생은 한말(韓末)에 구국운동(救國運動) 20년, 합병 후(合倂後) 독립운동(獨立運動) 10년을 통하여 항상 신변(身邊)의 위험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므로 보신책(保身策)으로 본명(本名)과 변명(變名) 5종을 번갈아 쓰면서 변장, 변신술(變裝, 變身術)도 썼다. 천도교(天道敎) 도호(道號)인 ‘원암(源唵)’ 외에 삼혁당(三革堂)이라 자호(自號)한 것은 갑오년(甲午年) 동학혁명(東學革命)에 가담(加擔)하여 첫 번째 혁명(革命)하고, 갑진년(甲辰年 : 50歲)에 머리를 깎아 자신을 두 번째 혁명(革命)하고,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세 번째 혁명(革命)하여 호를 ‘삼혁당(三革堂)’이라 부른다고 한다.
註 : 《三革堂(金榮遠)功績文集》 7面 內容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