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6장 3․1運動의 民族代表 朴準承 先生
박준승 선생은 본관이 밀양(密陽)으로 호는 비암(沘菴 : 3․1독립운동 실록에는 자암, 전북지역 독립운동사에는 批菴으로 되어 있음)이며, 1866년(高宗 3년, 丙寅) 11월 24일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 주치부락에서 박호진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매우 빈곤한 가정 출신으로 7세 때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고 1876년 11세가 되던 해에 김영원(金榮遠)을 스승으로 했는 바 이때부터 천도교 사상을 동경하게 되었고 접주가 되어 활동하다가 1908년(융희 2년)에 수접주(首接主)가 되었다.
1912년 정읍으로 이사하고 이어 전남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위원장(巡諭委員長)을 역임했다. 그는 탁월한 인격과 투철한 교리를 겸하여 설법에 능하였으므로 일찍부터 교조의 신임을 받아 입교한 지 얼마 안 되어 접주(接主)로 임명되고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는 당당히 수접주가 되어 혁명군을 지휘하였다.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1898년 7월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체포되어 처형되니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가 대를 이었다. 그런 뒤 손병희는 일본에 망명해 있었고 그가 보낸 이용구가 진보회(進步會)로 변신,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전국의 천도교 교인들을 재정비하기 위하여 도별 지도부를 편성했다. 1916년에는 전북을 책임 짓는 도사(道師)로 교도 중 일진회에 가담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도록 철저히 단속하였다. 1919년 1월 천도교는 조국 광복의 큰 소원을 빌기 위하여 105일 기도를 올리도록 59만 교도에게 이르니 박준승은 성금을 모금하는 등 임실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2월경에는 손병희로부터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고 수교도 유태홍, 박영창, 김의규에게 독립선언서 5천 매를 배부하여 장성, 남원, 임실 등지에서 궐기하게 하였다.
그는 2월 25일부터 27일경까지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했다가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과 만나 3․1 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승낙하였다. 2월 27일 최 린,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김완규, 나용환, 홍병기, 양한묵 등의 동지들과 함께 김상규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였다.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되니 천도교가 주축이 되고 기독교, 불교 등 타 종교와의 협력으로 이룩되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것도 천도교가 운영하는 보성인쇄소(普成印刷所)였다. 이리하여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의 일원으로 추대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박준승 선생이 다른 민족대표 32명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받은 취조문서를 보면, 교주 손병희에게 지방교구의 실정을 보고하고 고종 임금의 장례에 참가하기 위하여 상경했다가 우연히 독립선언서를 서명하게 되었노라고 답변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가 항일투쟁을 꾸준히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체포된 후 그는 경찰의 신문(訊問)에 묵비권으로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경찰은 백지 조서로 검찰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검사의 신문에 응한 답변 중 주목할 것은 석방 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이냐는 물음에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옥중생활도 그만큼 고역을 면치 못해 심한 고문에 시달려야했다. 선생께서는 1920년 10월 30일 보안법 및 급 정치 범죄 처벌영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2년 6개월 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는 동안 그렇듯 건강한 그였지만 일제의 고문에 견디다 못해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니 일제도 할 수 없이 병보석으로 석방시켜 주었다. 그의 나이 56세요, 유일한 혈육인 16세의 아들 星來를 두고 석방된 지 며칠 만에 본가인 정읍군 산외면 정량리 안계 부락에서 마침내 운명하였다. 그의 장례는 천도교장으로 엄수되고 영구는 정읍군 북면 마정리 뒷산에 안장되었다. 감격의 8․15 광복을 맞아 後孫들은 건국유공자 직계자녀의 예우를 받았으며 1962년 3월 1일 그에게는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정읍시에서는 1963년 충의사를 지어 그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3․1 절에 시민들이 모여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 朴準承 先生의 묘비문은 다음과 같다
위대하도다 公이시여! 청사에 길이 빛날 항일투쟁과 혁명정신은 겨레에 민족정기와 자주정신을 일깨워 주셨으며, 세계만방에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선양하셨도다.
公의 姓은 朴氏요, 號는 沘庵이요, 본관은 密陽이니 高麗文科司憲糾正太師 諱 武烈公 鉉의 21世 손이시며, 考 通政大夫 諱 昊鎭 妣 淑夫人 漹川 卜氏 第三子로 1866년 丙寅 11월 24일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에서 탄생하시어 1915년 정읍군 산외면 평사리에 이거하시었다.
公은 유시로부터 천성이 穎悟하고 才藝가 출중하여 애국애족하는 사상이 견고하시었다.
이때에 국정이 해이하여 국내에는 탐관오리의 횡포가 자행되고 국외로는 東蠻西夷의 침략이 심중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진지라 이에 강개한 公은 동지를 모아 대세를 시정하려고 동학에 입도하여 서기 1894년 갑오에 혁명을 일으켜 除暴救民, 斥洋斥倭의 旗幟를 높이 들고 분투하셨으나, 외국 군대의 개입으로 혁명 위업은 중도에 좌절되었다. 그러나 公은 初志를 불굴하고 동지규합과 심신단련에 더욱 주력하여 1904년 甲辰에 斷髮黑衣의 개화운동에 首接主로 活躍하였으며, 全羅道 巡喩委員, 천도교 도사, 중앙총부 감사 등의 교직을 역임하였다. 己未年 3월 1일 거족적 대 의거인 자주독립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의 일인으로 항일운동을 영도하시다가 왜경에 피검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2년여 간의 옥고를 겪으시던 중 얻은 병으로 1921년 辛酉 3월 23일 56세로 원사하시었다. 公의 묘소는 정읍군 북면 마정리에 있었으나, 장소가 협소하고 환경이 不適하며 墓墳이 崩壞하고 草沙가 退脫하여 공산낙목 一배토에 蕭條荒凉한 참상은 目不忍見이었다.
이에 개탄한 지방인사의 발기로 公이 가신 45년을 경과한 1965년 乙巳 6월에 관민 혼연일체의 정성으로 이곳을 택하여 公의 遺骸를 社會葬의 禮式으로 墓碑를 수립하여 公의 遺德을 추모하는 바이다.
형제여 자매여! 후세를 계승할 청년들이여! 유해를 길지에 안장하고 장엄한 묘비를 건립한 성의를 명심하라.
3․1운동 민족대표 박준승 선생의 묘
그리고 공이 보여주신 숭고한 정신과 불굴의 실천력을 계승하여 국토통일을 이룩함으로써 국위를 만방에 선양하는 때에야 비로소 공의 영령에 진실한 위안을 드리는 소이가 될 것이라.
以偈頌曰 準命承道 布德濟生 達觀玄機 更張開化 倡義募兵 勇敢抗敵 巡喩曉衆 警世救國 人權平等 民族正氣 獨立宣言 自決主義 三十三同志 錚錚一人 究竟光復 威振萬邦
서기 1965년 乙巳 六月 顯忠日 三一同志 李甲成 撰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2券 372面《全北地域獨立運動史》 284面 (2004年 發行)《三一獨立運動實錄》 上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