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마지막 황제이신 순종황제께서 1926년(丙寅) 4월 25일(음 3월 14일) 춘추 53세로 승하하시니 각 신문사에서는 순종황제께서 황후가 위중하다는 호외만 발행하고 총독부에서는 당일 국상을 발표하지 아니하고 일본 국내성과 수차의 전화 통화 끝에 다음날 26일 오후 9시 15분에 일본 국내부에서 승하하신 일자를 하루 늦게 26일 오전 6시 10분에 승하하였다고 정식 발표하였다. 그리고 인산일은 6월 10일로 택정하였다.
이를 기해 그 동안 3․1 운동 이후 항일운동은 지하에서 활동하다가 서울 중동학교를 비롯 중앙고보, 연희전문 등 각 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선전문을 수만 매 등사하여 비장하였다가 6월 8일 지방에 있는 각 중학교에는 봉투 하나에 5, 6매씩 넣어 우송하고 서울에 있는 각 중학교에는 해당학교 우편함에 넣어 배부하고 인산일인 10일에 각자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대여(大輿)를 봉송한 후에 대중에게 선전문을 살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주동자가 임실 출신의 김재문 등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김재문은 1907년 4월 16일 임실군 임실면 성가리 283번지에서 태어났으며 서울 중동학교 특과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 시대에 순종의 승하는 한민족의 반일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데 충분했다. 3․1 항쟁과 1910년 이래의 일제 강점, 그리고 15년 간의 가혹한 압박생활에서 무기 없는 민족의 비애와 통분을 반항으로 분출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러한 분위기가 성숙되어 갔다.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저항할 수 있는 요인을 송두리째 봉쇄 억압당하고 있던 한민족은 순종(純宗)의 승하에 곡하고 주권 없는 조국을 탓하는 과정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독립의 구심력을 찾아 민족의 항쟁을 펼쳐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는 망곡(望哭)행사라도 가져보려 했으나 워낙 철저하게 철통같이 경비하고 탄압했기 때문에 그것마저도 지나친 간섭을 가했다. 6월 1일경부터 국내외의 각 단체 세력이 인산(因山)을 전후하여 활동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 조선군에서는 헌병사령부 안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여 순찰척후대를 투입하고 승마대와 자동차가 전령 연락을 하도록 하였다.
6월 6일 조선 공산당 계층이 ‘6․10운동 준비공작’과 ‘격문’을 압수하게 되자 서울시내의 군경은 계엄 상태에 들어가면서 발악적인 탄압작전을 폈다. 6월 8일경에는 서울시내의 전 사상단체를 수색하였다. 그리고 6월 10일에는 경찰 헌병 외에 5,000명의 보병, 기병, 포병을 풀어 서울 시내 요소에 포진케 하고 봉도 차 운집한 민중을 위협 공갈하였다. 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무단(武斷) 장의(葬儀)를 주도하는 일제와 그에 대한 한민족의 반식민지(反植民地) 감정은 일제의 유례 없는 고압체제 앞에서도 장엄한 대결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오호! ‘오천년사의 최후 인산’ 이란 소재로 산하는 의구한데 왕손은 하처귀(何處歸)냐.”고 동아일보는 대서특필하였다. 이것은 백의민족의 망국에 대한 순수하고 비통스런 일단을 요약해 주는 것이었다.
당시의 망곡(望哭),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역사의 정의 앞에서 기도하는 약자의 양심이었고 엄숙한 봉도행사, 그것은 망국 왕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민족의 자립을 구하는 역량 집결의 가능성을 상징하게 하는 것이었다. 망곡과 봉도행사는 국내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해외 동포들도 망곡을 잊지 않았다. 학생들도 전국 각처의 망곡과 봉도행사에 참여하였고 또한 학교도 휴교 조치하였다. 서울 시내의 사립 고등보통학교, 전문학교와 일부 관공립학교도 봉도 휴학을 하였고 많은 여학교 학생은 소복 망곡도 하였다. 지방학교의 학생들도 동맹휴학에 다수 참여하였다.
6․10만세 운동은 김재문을 중심으로 학생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6월 10일 오전 8시 40분경부터 학생들 중심의 6․10 가두 실력 투쟁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단성사 부근에서 이선호의 선창과 중앙고보생 이동환(李東煥)을 중심으로 한 30~40명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관수교 부근에서는 연희전문학생 5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경성사범학교(을지로 5가) 앞에서 박두종(朴斗種)과 청년 2명이, 훈련원 제전(齊殿)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창신동 채석장 입구에서 50세 정도의 남자가 동대문 밖 동묘 앞에서 격문을 뿌리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6․10만세 투쟁의 현장에서 연희전문학교 학생 42명,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생 8명, 보성전문 학생 7명, 중앙고 학생 58명, 양정고보 학생 2명, 배재고보 학생 1명, 송도고보 학생 1명, 이밖에도 수십 명의 학생이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고 동대문경찰서에 50명, 본정경찰서에 10명 등 210여 명이 구속되었다. 그 중 106명이 조사를 받았으며 6월 14일까지 우선 47명의 학생이 수감되었다.
6월 19일에는 중앙고보생 19명과 조철호(趙喆鎬) 교사도 수감되었는데 이들 중 66명 대부분의 학생들을 방면하고 주모자 11명을 기소하였는데 출신도별로는 경북 출신 3명, 강원도 출신 1명, 함경남도 출신 3명이며 전라북도 출신 학생이 4명으로 이들은 다음과 같다.
▪ 李東煥 27세 정읍군 산외면 평사리 26 중앙고등보통학교 5학년 ▪ 郭戴炯 20세 김제군 만경면 만경리 355 중동학교 특과 2학년 ▪ 金載文 22세 임실군 임실면 성가리 283 중동학교 특과 3학년 ▪ 黃廷煥 22세 익산군 망성면 화산리 107 중동학교 특과 3학년
앞서 열거한 이들의 활동상황은 다음과 같다.
곽대형, 김재문, 이동환, 황정환 등은 1926년 5월 23일에 서울(당시에는 경성) 시내 각 학교 학생 50여 명과 성북동 삼산평(三山坪)으로 회동하여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인 본정(本町) 현(現) 충무로를 습격하고 식민통치의 상징권부(象徵權府)인 총독부를 때려 부수자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다음날 김재문(임실 출신)은 통동(通洞)에 있는 자기 집에서 이동환, 황정환, 곽대형, 박용규(경북 달성 출신. 중앙고보 5학년) 등과 만나서 본정 습격에 대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는데, 이때 그와 같은 습격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으로 판단하고 순종의 인산(因山)일인 6월 10일에 격문을 뿌리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5월 29일 이들은 김재문의 집에 모여서 격문을 기초하고 등사판을 빌려서 5,000매를 등사하였다. 등사된 격문을 각각 1,000매씩 나누어 들고 국장(國葬) 당일의 장의행렬 속에서 오전 8시 30분을 기하여 살포하는 동시에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기로 하였다.
6월 10일 김재문은 황정환과 함께 동대문 밖 숭인동(崇仁洞)에서 국장행렬을 기다리다가 봉송하는 군중 속에서 격문을 살포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곧바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6․10 만세운동 학생 주동자 10명과 함께 1926년 11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27년 4월 1일 경성복심원에서 1명을 제외한 나머지 주동역할을 한 학생들에게 징역 1년이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註 : 《全北地域獨立運動史》 370面 (2004年發行)《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6券 280面
김학우는 삼계면 출신으로 15세에 전주 공립고등보통학교에 합격하였다. 2학년 때부터 독립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하여 동지 학생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3학년 때인 1926년 6월 10일 국장일을 당하여 서울에서부터 독립만세를 외치는 6․10 만세 사건이 일어나니 지방에도 그 소식이 전해지고 전주고보도 동맹휴학을 하게 되었다. 일경의 검거 선풍 속에서도 김학우는 다른 학생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어 5개월 간의 형을 받았다. 형을 받고 나온 이듬해에 중앙고보에 편입하였고 후에 일본대학에 유학을 갔다. 유학시절에도 항일사상을 키우고 운동에 참여하였다.
註 : 《任實郡誌》 244面
성준섭은 1902년 1월 27일 임실읍 이도리 900번지에서 父 성수길과 母 조자국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생으로 20세의 어린 나이에 서울 탑골공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여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자 수천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5일에는 학생주도의 ‘조선독립만세’ 시위에 강기덕(康基德)과 김원벽(金元壁)이 선두에서 인력거를 타고 독립만세 시위를 감행하다가 남대문에서 일경과 충돌하여 주류가 체포되어 대열이 붕괴되자 박하윤(朴潤夏), 윤귀용(尹貴龍) 등이 뒤를 이어 남대문 부근과 대한문 부근에서 맹렬하게 시위하다가 체포되었다. 3월 5일 밤에는 각 전문학교, 중등학교 학생대표 등 63명이 서울시 송현동(松峴洞) 62번지 이인식(李仁植)의 집에서 투쟁에 관한 사후대책과 그 발전을 의논하다가 발각되어 대다수가 체포되었다. 3월 6일에는 서울 시내 각 경찰서와 헌병의 수사로 주동 학생 43명이 구속되고 《조선독립신문》, 《국민회보》, <경고문> 등 선전물을 대량 압수당했다. 이 때에 관련된 임실 출신의 성준섭과 전북 출신 학생은 다음과 같다.
▪ 河泰興 20세 전주군 전주면 서문밖 죽림, 연희전문학교 상과 1년 ▪ 李亮植 27세 무주군 부남면 부창리 292,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3년 ▪ 李仁植 18세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 453, 보성고등 보통학교 3년 ▪ 成俊燮 20세 임실군 임실면 이도리 598, 경성고등보통학교 1년 ▪ 金亨植 19세 옥구군 옥산면 쌍봉리 59, 경성고등보통학교 1년 ▪ 金宗鉉 19세 익산군 익산면 이 리 627, 중등학교 고등과 ▪ 李炳寬 19세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 53, 중앙학교 3년 ▪ 愼鏞俊 19세 고창읍 벽사면 川 리 43, 휘문 고등보통학교 2년
위에 열거한 학생들은 모두 재판에 회부되어 형 판결을 받았는데 성준섭은 그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8개월여의 기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수형번호 3-62, 3-84, 3-507)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선생의 후손은 제적부를 확인한 결과 충남 강경읍으로 전적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국가보훈처의 자료에 의하면 미포상자로 남아 있어 관리번호 31980호를 지정하여 관리만 하고 있다.
註 : 《全北地域獨立運動史》 352面 (2004年發行)《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1券 146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