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제1장 靑雄 農樂團의 日本駐在所 襲擊事件
1925년 늦은 봄에 청웅면 구고리 농민들이 농악을 즐기는 것을 보고 당시 청웅 주재소 일본인 순사 사또가 주재소의 허가도 없이 농악을 치며 도로를 누비고 다닌다는 트집을 잡고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청웅 면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세를 올리며 농악을 계속하니 농악 단장 이강세(李康世)를 주재소로 연행하여 발길로 차면서 구타하였다. 뒤를 따라와서 동정을 살피던 농악 단원들이 그들의 면전에서 대표자가 구타를 당하니 삽시간에 흥분을 하여 “저놈 잡아라” 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주재소로 들어가 이강세를 구출하고 사또를 납치하여 거리로 나왔다. 이를 지켜보던 수백 명의 군중들은 사또를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고 농악 단원들은 사또를 끌고 2㎞가량 떨어진 모래재까지 와서 생매장까지 계획하였다. 사또가 눈물을 흘리며 무조건 책임을 지겠으니 살려달라고 용서를 빌어 목숨을 살려주었다.
그 뒤 청웅면은 항일사상이 가장 농후한 지역으로 낙인찍혀 학교설립인가가 불허되고 과중한 세금과 부역동원 등으로 일제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설립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늦어진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註 : 《任實郡誌》 243面
1928년 5월 21일 오후 1시경, 6학년 5교시에 교실 앞에서 정렬하였는데 4명의 생도가 늦었다고 하여 당시 훈도인 평춘도범(平春道範)이 수업을 중지시키고 여러 시간을 교정에 세워둔 채 퇴교하므로 벌을 받던 생도 가운데 전창순(全昶淳)이 그 이유를 질문하였다. 평춘 훈도는 노발대발하여 “무슨 잔소리냐, 너희 같은 놈들은 죽어도 좋다.”는 등의 욕설을 함부로 하고 뺨을 마구 때려 입에서 피까지 나게 하고 2, 3군데의 상처에다 한때는 실신까지 하였다.
이 사건이 1928년 5월 29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됐고, 그 이전인 5월 26일에는 동교 5학년 생도들이 읍내 봉황산에서 집회를 갖고 평춘 훈도의 비행을 폭로하였다. 5월 31일 학부형 김재문, 문인근이 교장을 방문하여 항의하였으나 사실을 부인함으로 6월 2일에 학부형총회를 개최하여 문제가 확대되었다. 이 사건이 1928년 5월 29일, 6월 2일자 동아일보에 계속 게재됨으로써 일본인들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시켰다.
註 : 《任實郡誌》 244面
1.3. 제3장 日帝의 發惡과 三溪面民의 受難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한국의 청년들을 닥치는대로 일본군에 편입시켜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리고 1942년부터는 한국인에게도 의무징병제를 실시하여 노인과 부녀자 이외엔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소모품처럼 내몰았다. 거기다가 물자부족으로 군수품의 공급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자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갖가지 물건들을 약탈해갔다. 놋그릇부터 숟가락, 젓가락까지 거두어가고 가을추수기에는 벼를 거두어갔다. 밭의 목화까지도 강제로 수탈하여 갔다. 이 당시 농민들은 공출을 피하기 위하여 타작한 벼를 밤에 몰래 땅에 묻기도 하고, 놋그릇 따위는 변소에 묻기도 하였다. 고무신, 담배, 운동화가 배급제로 실시되고 쌀을 절약한다 하여 술도 빚지 못하게 하였다. 양복은 물론 옷감도 구하기 힘들었고, 옷감을 절약하여 군복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로 어린 학생들도 겨울에 반바지를 입도록 하였으니 겨울에도 동상자가 속출하였다. 이 당시 한국인의 생활은 이를 데 없이 처참하였다. 부모의 회갑이나 결혼식에 약간의 술을 몰래 빚었다고 감옥에 가게 되고, 곡식은 추수가 끝나자마자 모두 공출로 빼앗겨 농민들은 검불나락을 찧어 먹고 이것마저 떨어지면 나무뿌리나 풀뿌리로 연명하는 지경이었다. 소위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이때 나왔다.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만 먹고 곡식을 먹지 못하면 변이 제대로 나오지 못해 항문이 막히고 힘을 주게 되면 항문 부위가 찢어졌던 것이다. 삼계면은 산간부에 자리잡고 있어서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이 일찍 떨어지게 되고 이른 봄부터 문자 그대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농민들은 땀 흘려 가꾼 곡식을 모두 공출로 약탈당하고 배급을 타서 먹었다. 그러니까 약탈해 간 쌀은 일본으로 가져가고 그 대신, 만주에서 들여온 콩이나 깻묵 따위를 배급으로 주었다. 뿐만 아니라 목화도 공출로 거두어다 군복을 짜는데 사용하고 그 씨는 기름을 짜서 비행기에 사용하였는데, 심지어 기름을 짜고 난 씨의 찌꺼기까지 배급으로 주면서 먹도록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몇 년 전인 1942년에서 45년까지 한국인들의 생활은 거의 누구나 이처럼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농민들을 쥐어짜기 위해서는 말단 행정기관의 머리인 면장에 누구를 임명하느냐가 문제였다. 면민들을 아우르고 민심도 수습하여 공출을 효과적으로 거두기 위해서는 면민들의 추앙을 받는 자를 임명해야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삼계면장에 김학술이 임명되었다. 그는 일찍이 한학과 신학문을 교육하여 운암공립보통학교와 삼계공립보통학교 등에서 훈도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마을마다 찾아다니며 사랑방교육을 통한 농촌계몽운동과 은연 중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그의 인기와 덕망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즈음 그에게 면장 취임의 교섭이 들어왔다. 그러나 면장이란 직책이 공출을 독려하고 무거운 세금을 거두며 젊은이를 전쟁터로 떠미는 징용과 정신대 처녀까지 협력해야하는 자리이므로 한 마디로 거절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거절할수록 사상이 의심스럽다느니 하면서 협박과 회유를 계속하므로 부득이 면장 취임을 수락하였다. 1944년이 되자 일본의 발악은 극에 달하고 공출로 농민들을 약탈하는 것도 극에 달하였다. 임실군청에서는 3일이 멀다하고 면장회의를 개최하는데 그 때마다 경찰서장과 각 과의 주임이 참석하여 공출 100%의 수납을 지시하고 만약, 공출 곡식을 감추다가 발각되면 사상범으로 엄벌에 처하겠다고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군청에서 면장회의가 있은 다음날은 면장 주재 하에 이장회의를 소집하여 그것을 할당하였다. 이때는 면의 순사부장(지서 주임)이 참석하였다. 이 무렵 개인별 공출 할당량을 보면 논 10두락에 벼 40가마 정도를 배정하였다. 이정도의 할당은 생산량 전부에다 검부적까지 합해도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김 면장은 고심 끝에 믿을 만한 부하 면서기들에게 극비리에 지시하기를 각 이장들에게 알리어 공출량에 구애받지 말고, 요령껏 감추라는 암시를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니 어떤 사람은 벼 가마니를 구들장 윗목이나, 아궁이 땅 속, 텃밭 또는 독에 넣어 묻기도 하였다. 또 저수지에 가마니를 던져 물 속에 감추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삼계면은 자연히 공출 실적이 12개면 가운데 가장 저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2월 어느 날 군청직원과 경찰서 순사들로 구성된 합동수색반이 예고없이 급파되어 삼계면 모든 마을을 샅샅이 수색하기에 이르렀다. 합동수색대는 3명씩 한 조가 되어 마을마다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먼저 이장을 마을회관 마당에 꿇어 앉히고 마을주민 모두를 한 장소에 집결시킨 후, 남자는 속옷 바람으로 언 땅에 엎드리도록 한 후 몽둥이로 사정없이 매질을 하였다. 한 마디로 공출에 응할 것인가 아니면 감방에 갈 것인가 택일 하라는 것이다. 당시 젊은 사람들은 모두 군인이나 노무자로 끌려가 거의 모두가 50이 넘는 사람들이었으니 그 광경은 눈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혹독하게 매질을 당한 사람들은 오지리 이장 최성철과 삼은리 이장 오천영, 덕계리 이장 허형울을 비롯해서 어은리 주민 유학수, 유동수, 유재영, 이윤의 등이었다.
이렇게 집단 고문을 하는 동안, 한패의 수색반은 텅 빈 마을의 구석구석까지 수색하였다. 그러다보니 변소 속, 혹은 퇴비장 밑에서 벼 가마를 찾아내면 그 임자를 불러 몹시 매질하고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이때 어은리 주민 한 사람이 매를 이기지 못하여 면서기들이 곡식을 감추고 공출은 조금만 내라고 시켜서 한 일이라고 자백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이 일은 일개 면서기의 단독 결정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면장이 조직적으로 선동한 것으로 보고 상부에 보고하였다.
당시 임실군수 계영각(桂龍珏)은 평소부터 김학술 면장의 인품을 존경하던 터라 군수의 적극적인 변호로 사법처리는 면하고 권고사직으로 면직하는 선에서 사건이 처리되었다.
註 : 《任實郡誌》 245面
❀ 김 교 민 (金敎民) 김교민은 1888년 3월 22일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803번지에서 애국지사인 父 김영원과 母 이종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교명(敎明)이고 호는 민암(民菴)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선생은 갑오동학 혁명가이며 독립운동에 몸 바친 김영원 선생의 장남으로 유소시(幼少時)부터 인근 사람들에게 총명하고 영리하다는 칭송을 받았으며 서당에서 글공부를 잘하여 아버지의 총애도 많이 받았다.
아버지가 전주부중(全州府中)에 창설한 창동학교를 졸업하고 현 청웅면 양지리에 설립한 삼화학교 교사로 재직 중 상경하여 중앙총부 부근인 안국동에 거주하면서 천도교 중앙총부 교리강습소에 1907년 융희 3년 3월 1일자에 입학, 동년 8월 14일 6개월의 속성과를 졸업, 동년 28일자로 천도교 전국 각 교구 순회강사로 임명받아 강연에서 교리도 소중하지만 급선무가 국가문제라고 하며 일본이 을사조약 후 통감부를 설치하고 정치교육을 핑계 삼아 우리나라 관직명을 전부 고치고 2단계로 우리나라 중요 대관들을 모두 친일파로 만들어 현재 나라가 풍전등화(風前燈火)격이니 우리 국민 모두 일동 단결되어야 한다고 심혈진토역설(心血盡吐力說)하며 어떻게 해야 전 국민이 일시 불꽃같이 일어나게 할까하고 유지인사들과 토론하던 중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되니 아버지의 弟子와 敎人들이 함께 통곡을 하며 아버지와 함께 교민은 3일간 단식 끝에 교민이 울분을 못 이겨 1910년 9월 5일 울안에 있는 매실나무에 목을 매어 분사(憤死)함으로써 후일 아버지 김영원이 옥사(獄死)하심과 더불어 父子가 나라를 위하여 순절(殉節)한 것이다.
註 : 김영원 선생 후손(김정갑)자료에 의함.
❀ 김 교 승 (金敎升) 김교승은 1892년 12월 26일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802번지에서 애국지사인 부 김영원과 모 이종례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으며, 자는 敎玉이고 호는 栢菴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1905년 선생이 14세 때 아버지가 전주부중에 창동학교를 세워 학감이 되니 지금까지의 서당교육을 그만 두고 이곳을 졸업하여 신교육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아버지가 다시 고향인 청웅면에 삼화학교(三和學校 : 일명 司馬齊學校)를 세워 교장이 되니 선생은 또 다시 삼화학교에 입학하여 제1기생으로 졸업을 하였다.
동학혁명 당시에 아버지는 임실 북접주로 크게 활약하였으며 교승은 후일 3․1운동 때 아버지의 참모역이 되어 불철주야 눈부시게 활약하였다. 청웅면의 박성근, 박원엽, 박용식, 한도수, 한기수, 박준창, 이성의 이기섭, 이강세, 정명조, 최양옥, 양성도, 최종수, 박재근, 강진면의 엄길영, 이중혁, 임실면의 강계대, 문명근, 관촌면의 우성오, 운암면의 최종기, 최미경, 둔남면의 이기동, 박판덕, 신덕면의 한정교 등 군내 여러 동지들과 함께 각 지방을 담당하여 궐기에 주도를 하였다.
교승은 봉화를 올리는 책임을 맡아 밤이면 봉화불로 각지에 신호하고 낮에는 인편으로 연락에 빈틈이 없었다.
3월 15일에는 선생이 선두가 되어 고향인 운암면 선거리 봉통산(烽桶山)에서 밤 10시에 주민 50여 명을 모아 횃불을 들고 만세를 고창하였는데 이에 참여한 주요 인사로는 박정환, 이종현, 이종문, 김교필, 이용필, 박만택, 이용수, 김경환, 김교일, 지연종, 최명옥, 제씨들이다.
3월 18일 밤 10시에는 주민 100여 명이 선무봉(仙舞峰)에 올라가 횃불을 대낮같이 밝히며 두 번째로 만세를 고창하고, 3월 20일에는 밤 12시에 후동 동민 120여 명과 함께 세 번째로 만세를 불렀으며, 3월 23일 밤 10시경에는 150여 명의 주민이 선거리 앞 참나무정으로 모아 만세를 외치고 이어서 주재소를 습격하러 몰려갈 즈음에 왜경이 선거리를 기습하는 바람에 계획이 좌절되었다.
이때쯤 아버지가 왜경에 체포되었는데 교승도 함께 체포되었으나 다행히도 주위에서 가담하지 않았다고 변명해준 덕분으로 석방되었으나 아버지는 끝내 옥사하고 말았다. 이후 교승은 가사를 불고하고 지하로 숨어들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33년 4월부터 1938년까지 장장 5개년에 걸쳐 천도교 구파가 제창한 멸왜심고기도(滅倭心告祈禱)의 임실군 지도위원 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는데 이에는 선생을 비롯하여 최종기, 김한경, 박성언, 최종택 제씨들이다.
그 동안 선생은 군내 천도교인들로부터 독립운동 성금을 모금하여 1년 2회씩 천도교 본부에 상납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38년 2월 20일 황해도 신천에서 왜경에게 단서가 잡혀 전국적으로 검거 선풍이 벌어지자 교승 외 4명의 지도위원도 체포되었다.
이것을 천도교 구파의 105일 “멸왜심고기도사건”이라 칭한다.
아버지가 일찍이 3․1운동 임실 천도교 측 총 책임자로 체포되어 전주 옥중에서 모진 고문으로 거의 불구가 되니 왜경은 부득이 병보석으로 한동안 석방을 하였다. 이때 교승은 아버지를 지게로 짊어져 집으로 모셔온 후 백방으로 간호하되 집안이 가난하여 약을 살 수가 없으니 박씨부인은 산단 같이 고운 자기 머리털을 아낌없이 잘라 팔아서 약을 구해 완치를 보았다.
병이 회복되자 왜경은 나머지 형기를 채우기 위해 아버지를 다시 형무소에 수감하였는데 장독(杖毒)이 근치(根治) 안 되었음인지 형기를 마치지 못한 채 끝내 옥사한 것이다. 또 교승은 아버지가 형무소에 복역하는 동안 28㎞나 되는 전주를 일주일에 한 번씩 면회를 하여 사식(私食)을 넣어드리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註 : 김영원 선생 후손(김정갑) 자료에 의함.
❀ 박 원 충 (朴源忠) 박원충은 1881년 2월 19일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694번지에서 태어났다.
1939년 4월 의병장 이석용을 추모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제작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성수면 삼봉리 죽전마을 뒤편에서 1907년 호남창의동맹단을 조직하여 대일 항전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이석용 의병장을 추모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다.
이날 모임에서 박원충과 이석용의 장남 이원영 등은 이석용을 추모하기 위해 선생이라 칭하고 ‘정재 이선생 유허비’를 건립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1939년 4월 4일 그는 동료들과 더불어 폭 1척, 높이 4척 5촌의 기념비를 만들고 제의(祭儀)를 행했다.
그는 이 일로 피체(被逮)되어 1941년 10월 8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사형자의 분묘제사초상(墳墓祭祀初喪) 등 취체(取締)에 관한 건으로 징역 4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44년 12월 1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4券 334面
❀ 심 진 규 (沈鎭奎) 심진규 지사(志士)는 1891년 辛卯 3월 4일 삼계면 뇌천리 풍산 심씨 첩(堞)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6년 지리산에서 9개월, 강원도 유점사(楡占寺)에서 3년 간을 수학(修學)하고 1919년 3월 1일 오수에서 이기창씨와 2일 이리와 군산에서, 3일에는 대전형무소, 7일에는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동년 10월 인천에서 밀항하여 상해에 도착, 4월초 ‘상해 독립단’에 가입하여 외교 총무를 담당하였다.
1920년 4월 하순 상해공원에서 일본 헌병에게 수류탄을 던져 좌측 팔에 부상을 입히고 불란서로 피신(避身) 중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 후 1921년 ‘전주교육 조성회’(全州敎育 造成會)를 발족(發足)하고, 1922년에 오수 양잠조합을 창설하여 조합장을 역임하였다.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東京)에서 한의업(韓醫業)을 하면서 동경 유학생을 선도하였으며, 1935년에 ‘동양의도회’(東洋醫道會)에 출강(出講)하였다.
1940년에 귀국(歸國)하여 안성(安城)에 한의업 유도회 고문(韓醫業 儒道會顧問)을 하다가 1 966년 8월 28일 別世하였다.
註 : 《任實郡 三溪面誌》 174面
❀ 심 한 경 (沈漢卿) 심한경은 1886년 2월 18일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661번지에서 태어났다. 화순(華淳)이라고도 한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이석용 의병장이 일제에 의해 사형당한 뒤 1939년 4월에 이석용 의병장을 찬양하는 유허비를 세우며 공적을 기림으로써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이석용 의병장과 같은 마을 출신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이석용 의병장의 순국을 애도하며 항일의식을 길러오던 중 이원영 등 동지들과 함께 1939년 4월 4일 의병장의 출생지인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의 죽전마을에 ‘이석용 선생 유허비’를 세우고, 공물을 드려 제사를 지내는 등 항일 지사의 공훈을 기렸다.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발각되어 그는 1941년 10월 8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분묘제사초상 등 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 13券 33面《念齋野錄 序文編》(朴成壽 엮음)
❀ 양 길 웅 (梁吉雄) 양길웅은 1922년 9월 12일 임실군에서 태어났다.
1943년 5월 일본군 해군 군속으로 남양군도 뉴 조지아도에서 해군 시설공사에 종사하면서 솔로몬도의 전황을 알게 되었다. 귀국 후 동지인 원봉운에게 작년 5월경 솔로몬 근역에서 있었던 미․일 해전에서 미국군함 2척과 일본군함 5척이 격침되고 다수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는 데도 미국군함 2척만 격침된 것으로 신문에 보도하고 있음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1944년 12월 30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해군형법, 조선 임시 보안령 등으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10券 201面
❀ 이 기 택 (李起澤) 이기택은 1905년(광무 9년, 乙巳) 2월 15일 임실군 성수면 월평리 338번지에서 父 이광의와 母 한형자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이다. 아들은 강순, 강원이 있었으며 그의 손은 서울에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선생은 1931년 10월 30일과 1936년 9월 1일 두 번에 걸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실형을 받고 장기간 옥고를 치렀다.
註 : 《聖壽面 受刑人名簿 廢棄目錄》 拔萃 (1981년도 폐기)
❀ 이 원 영 (李元泳)
이원영(李元泳) 선생
이원영은 구한말의 의병장 정재 이석용의 아들로 1899년(광무 13년 乙亥) 5월 14일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716번지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선공(先公)의 가르침을 받아 충효의 길을 실천에 옮기려 애썼다. 정재 공이 ‘을사륵약’으로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을 분하게 여겨 1907년 丁未에 거의하여 토왜(討倭)타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니 先公은 일시 몸을 숨겼다. 이때에 왜군은 그의 가옥을 소각하고 선공을 잡으려 하니 先公은 가율(家率)과 몇몇 마하(摩下)를 거느리고 지리산 달궁으로 들어가 남원의 의병장 진사 高光秀 軍과 합세하여 유격전을 벌일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공도 선공(아버지)을 모시고 들어갔는데 선공은 고진사와 결인(結姻)을 합의하여 그 산중에서 이공(李公)과 고진사(高進士)의 영애와 혼례를 거행하였으니 이 또한 의군(義軍)만이 겪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얼마 뒤인 1914년 갑인(甲寅)에 그의 아버지는 왜군에게 잡혀 대구고등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아 바로 형이 집행되었다. 이때에 공은 법정으로 뛰어들어 왜정의 포악무도함을 꾸짖으니 저들은 법정소란 죄로 몰아 구속하였다.
그 후 풀려나와 공은 바로 선공의 장례를 치루고 3년을 한결같이 곡묘(哭墓)하였다. 상(喪)을 마친 뒤에 백립(白笠)을 쓰고 망국의 한과 실부(失父)의 통한(痛恨)을 종신토록 잊지 아니하였다. 또 왜(倭)의 치하에서 왜의 호적에 등재되는 것을 거부하고 삭발에도 불응하매 왜경은 수 차례나 투옥시켰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한국인의 기개를 떨쳤다.
그는 1941년 10월 8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형사자 분묘제초상 등 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유허비 사건으로 많은 지사들이 투옥되기도 하였다. 우리 조국의 광복도 이러한 선열들의 살신성인의 유택(遺澤)으로 얻어진 것이 아닌가.
공은 광복 후에도 선공의 공을 정부에 올려 건국공로훈장을 받았으며 임실군 성수면에 소충사를 세워 선공(先公)을 제향(祭享)하였으니 공이 평생에 품었던 한을 일부나마 풀었다. 그리고 1983년 계해(癸亥) 11월 27일에 운명하니 향년 85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國家報勳處) 第9券 350面
靑菴 李元泳 忠孝碑文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항상 으뜸으로 삼아 누구나 이를 實行하려 하였으나 그것이 어려웠다. 그러기에 朝廷에서는 이를 찾아 포양(褒揚)하고 정려각(旌閭閣)을 세우게 命하여 百姓으로 하여금 본받게 하고 또한 이것을 敎化하였다. 그런데 近代에는 社會가 急變하게 變하여 이를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는데 湖南의 任實에 이를 實踐한 사람이 있으니 곧 靑菴 全州 李公諱 元泳 그 분이다.
이원영 선생 기념비
靑菴公은 開國功臣 完山 府院君 諱 伯由와 燕山朝의 戊午名賢 貞簡公寒齋諱穆의 後이며, 韓末의 義兵長 靜齋 諱錫庸의 아들로 1899년 光武 13년 乙亥 5월 14일에 任實郡 聖壽面 太平里에서 태어났다. 靜齋公이 乙巳勒約으로 나라가 亡하게 된 것을 憤하게 여겨 1907년 丁未에 擧義하여 討倭타가 衆寡不敵으로 敗하니. 先公은 一時 몸을 숨겼다. 이때에 倭軍은 그의 家屋을 燒却하고 先公을 잡으려 하니 선공은 家率과 몇 摩下를 거느리고 智異山 達宮으로 들어가 南原의 義兵長 進士 高光秀軍과 合勢하여 遊擊戰을 벌릴 것을 協謀하였다. 이때에 公도 先公를 모시고 들어갔는데 先公은 高進士와 結姻을 合意하여 그 山中에서 公과 高進士의 令愛와 婚禮를 擧行하였으니 이 또한 義軍만이 겪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얼마 뒤인 1914년 甲寅에 先公은 倭軍에 잡히어 大邱高等法院에서 死刑宣告를 받아 바로 刑이 執行되었다. 이때에 公은 法廷으로 뛰어들어 倭政의 暴惡無道함을 꾸짖으니 저들은 法廷騷亂 罪로 몰아 拘束하였다.
그 후 풀려나와 공은 바로 선공의 葬禮를 치루고는 3년을 한결같이 곡묘(哭墓)를 하였다. 상을 마친 뒤에는 백립(白笠)을 쓰고 亡國의 한과 失父의 痛恨을 終身토록 잊지 아니하였다. 또 倭의 治下에서는 倭의 호적(戶籍)에 등재(謄載)되는 것을 拒否하고 삭발(削髮)에도 不應하매 倭警은 수차례나 投獄시켰으나 끝까지 屈하지 않고 韓國人의 氣槪를 떨쳤다. 또한 先公의 유허비사건(遺墟碑事件)으로 많은 志士와 같이 投獄되기도 하였다. 우리 祖國의 光復도 이러한 先烈의 殺身成仁의 遺澤으로 얻어진 것이 아닌가.
公은 光復 후에는 先公의 功을 政府에 올려 建國功勞勳章을 받았으며 任實 聖壽에 소충사(昭忠祠)를 세워 先公을 제향(祭享)하였으니 公이 平生에 품었던 恨을 一部나마 풀었다.
그리고는 1983년 癸亥 11월 27일에 卒하니 享年 85세였다.
公이 卒한 뒤인 1990년에 公도 또한 建國功勞勳章愛國章을 받았다.
이와 같은 忠孝兼全의 의행(懿行)에 대하여 성균관장을 비롯하여 각처 향교에서 포양(褒揚)의 글이 답지(遝至)하니 公의 영윤(令胤) 明根氏는 그 의행(懿行)을 碑에 새기고자 글을 請하여 천식(淺識)不文하나 사양(辭讓)치 못하고 감히 그 개략(槪略)을 위와 같이 적는다.
2003년 월 일
成均館儒道會 總本部 會長 李 海 門 謹 撰
東 來 後 人 鄭 炳 朝 謹 書 不 肖 者 李 明 根 謹 竪
❀ 이 존 철 (李存哲) 이존철은 1895년 5월 9일 완주군 우전면 홍산리 252번지에서 태어났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이석용 의병장이 일제에 의해 사형당한 뒤, 1939년 4월에 이석용 의병장을 찬양하는 유허비를 세우며 공적을 기림으로써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석용 의병장과 친교를 이루었다. 그러한 관계로 평소 이석용 의병장의 순국을 애도하며 항일의식을 길러오던 중 이원영, 심한경 등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이석용의 출생지인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뒷산에 이석용 유허비를 세우고, 공물을 드려 제사를 지내는 등 순국지사의 공훈을 기렸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발각되어 그는 1941년 10월 8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분묘제사초상(墳墓祭祀肖像) 등 취체령(取締令)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 13券 344面
❀ 이 현 승 (李賢承) 이현승은 1879년 2월 18일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234번지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의 조국 강점에 통분을 금치 못하고 의병을 일으켜 일군과 교전하다가 피체되어 순국하신 정재 이석용 선생을 그는 일제의 탄압 아래서도 추모하기 위하여 이석용 의병장의 아들 이원영 등과 함께 1939년 음력 4월 4일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죽전 등에서 ‘정재선생 유허비’를 세워 ‘의에 순국한 선비’라고 새겨 칭송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 일로 인하여 일본경찰에 피체(被逮)되어 1941년 10월 8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그 후 1968년 10월 20일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國家報勳處) 第11券 236面
❀ 이 맹 호 (李猛虎) 이맹호는 장수군 산서면 봉서리에서 출생하여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819번지에서 거주하다가 이원영, 최병섭, 심한경, 이현승, 이존철과 같이 이석용 의병장의 유허비를 세우다가 적발되어 분묘 제사 초상 등 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4월을 선고받은 것으로 재판 판결문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다른 자료에는 기록이 없다.
註 : 판결문
❀ 이 홍 섭 (李弘燮) 이홍섭은 1911년 7월 12일 임실에서 태어났다.
1932년 1월 임실군 지사면에서 홍웅아(洪熊兒), 이갑두(李甲斗) 등과 함께 사회과학 연구를 위한 비밀독서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4년 일경에 피체(被逮)되었다. 이로 인하여 1935년 10월 25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國家報勳處) 第 11券 239面
❀ 조 희 제 (趙熙濟) 조희제는 자(字)가 운경(雲卿)이요, 호는 염재(念齋)이며 본관은 함안이다.
병자호란에 창의한 세마(洗馬) 평(平)의 후손이며 청경(靑耕) 병용(炳鎔)의 둘째 아들로 1873년(고종12년 癸亥) 12월 10일에 지금의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사사하여 일찍이 호남에서는 문명이 있었다. 그의 애국활동은 대한제국시대와 일본식민지시대의 초기에 난국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의병장들의 공판과 3․1 운동 시 애국투사들의 공판을 방청하여 재판실황을 기록하고 자료들을 수집하여 야사실록(野史實錄)을 기록한 공적으로만 세상에 알려지고 또한 그 기록이 《염재야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회문산 일대를 중심으로한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한 의진은 물론 임실, 순창, 남원 등지를 근거지로 활동한 의진도 거의 후원을 많이 받았다. 물론 상당한 부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해냈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사실이 일본에게 노출되면 심한 괴로움을 당하였는 데도 그것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고 의진을 도왔으며 의진들이 노상 들락거려도 괴롭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회문산 바로 아래 회문리인 고향을 한 번도 떠나지 않고 견지한 것으로 보아도 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비밀리에 항일투사들의 겪은 바를 기록에 남겼는데, 특히 이석용의 사형공판 실황을 사실대로 남긴 것은 당시 호남창의사에 희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는 의병활동을 돕는 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고 있는 투사들을 돕기 위해 가산을 거의 기울였다고 한다. 의병활동을 멈춘 후에도 그의 애국활동은 계속되었는데 1938년 12월 2일에는 그가 엮은 한말 전후의 야록을 편찬하고 있음이 일제경찰에 탐지되어 그 귀중한 사서 등 야록 원고가 모두 압수되고 많은 서책도 몰수되었으며, 그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임실경찰서에 수감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위독하게 되었다.
그러자 1939년 1월 3일 왜경은 임실병원을 지정하여 10여 일 간 연금상태로 입원 치료하였으나 회복이 되지 않았으며, 왜놈은 할 수 없이 그를 석방하니 귀가한 지 일주일 후인 1939년 1월 9일(음력 1938년 11월 17일)에 향년 66세로 별세하였다.
그의 아들에는 형래, 승래, 은이 있고, 손자는 형래의 아들이 현직, 현국, 현성이고, 승래의 아들은 현진, 현태, 현일, 헌이고, 은의 아들은 준현과 윤규이다. 그의 야록은 왜경찰들에게 압수되어 대부분 회수하지 못하고 남은 것으로 《염재야록》 두 권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運動史 資料集》(國家報勳處) 第 2 券 557面《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 6券 675面《全北義兵史》 下券 664面
念齋의 歷史的 精神 韓國精神文化硏究院 敎授 朴成壽 엮음
趙熙濟선생의 字는 운경(雲卿) 號는 念齋, 1873년(癸酉 高宗 10) 12월 10일(음) 全北 任實郡 德峙面 回文里에서 청경(靑耕) 趙柄鏞의 次子로 출생하였다.
1887년 14세 때부터 당대의 湖南 名儒 宋秉璿과 松沙 奇宇萬에게 師事하였다. 淵薺 宋秉璿은 뒷날 乙巳條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自決殉國하신 憂國烈士였으며, 松沙 奇宇萬은 1895년 乙未事變에 抗擧 義兵을 일으켜 獄苦를 치른 憂國志士였다.
念齋의 휘는 熙濟이고 字는 雲卿인데 咸安사람이다.
洗馬를 지낸 바 있는 운학(雲壑) 휘 平의 후예로서 高宗 癸酉년(1873년) 12월 10일에 태어났다.
公은 천품(天稟)이 高邁하여 松沙 奇宇萬 선생의 門下에서 受學하여 學問이 정밀하고 통투(通透)하였으므로 선생이 늘 칭찬하였다. (念齋先生實記略)
이같이 두 스승이 憂國忠心의 사표였으므로 그 밑에서 배운 念齋 趙熙濟 역시 스승의 不運과 기울어져 가는 國運에 無關心 할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그가 1895년 스승인 奇宇萬이 義擧한 이후 언제 어떻게 義兵戰爭에 협조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한 傳聞이나 記錄이 없다. 단지 확실한 것은 그가 직접 義兵에 참여하는 길보다 죽음을 무릅쓴 義兵鬪爭 事實을 靑史에 남김으로써 그들의 못 다한 恨을 풀어주는 길을 택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가 바로 《念齋野錄》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소루(疎陋)함을 무릅쓰고 일찍이 박기재(朴基宰), 홍진표(洪震杓)와 함께 野史 쓰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 결과 高宗朝 乙未事變 이후로 草野에서 節義를 세운 諸公들의 사적(史蹟)을 한데 모아 두 冊子를 著述하였는데, 모두 간결하게 정리되지 못하여, 거칠고 문아(文雅)하지 못하여, 촌스럽기만 하니 完美한 사적(史籍)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후세에 善을 좋아한 사람이 나와서 이를 재택(裁擇)하여 발휘시킨다면 萬의 하나라도 取할 것이 없지 않을 것이다. (念齋野錄小敍)
公은 어려서부터 悲憤慷慨한 뜻이 있어 乙未年(1895년) 國變이 있은 이후로 節義 있는 사람들의 實蹟을 모아 엮어서 《念齋野錄》이라고 이름하였다. (念齋野錄實記略) 따라서 念齋野錄은 흥미위주의 단순한 野史가 아니다. 그것은 國難을 당하여 나라와 겨레, 그리고 문화를 守護하기 위하여 궐기한 愛國志士들의 숭고한 精神을 保存하려는 鬪魂의 역사였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비록 바다의 한쪽에 치우쳐 있기는 하나 檀君의 化育으로 시작하여-----新羅, 高句麗의 衣冠이 모두 中國의 그것과 서로 伯仲의 勢를 이루어 왔고 朝鮮時代에 와서는 그 禮樂과 文物이 中華制度 못지않게 찬란하였다. 불행히도 지난날 賊臣들이 임금을 속이고 敵을 방안에까지 끌어들여 온 나라를 원수들에게 넘기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천만 동포가 노예가 되고 사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와 그렇게 깨끗했던 삼천리강토가 하루 아침에 오랑캐들이 춤추는 비린내 나는 장소로 변하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趙友 熙濟를 비롯한 여러분들이 時勢를 개탄한 나머지 1895년 高宗 32년 乙未 이후의 國家變亂과 이를 전후하여 있었던 여러분들의 忠義와 事行들을 찾아내어 기록으로 남기고 이름하여 《野錄》이라 하였다. 그 당시로 말하면 禍變이 혹독하면 할수록 여러분들의 氣槪와 節義도 그만큼 더 매서워서 그야말로----일월과 빛을 다툴만한 일이 벌어졌으며, 바로 거기서 그들의 國亂主義的 精神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崔秉心, 念齋野錄字)
念齋 자신은 이렇게 강렬한 歷史精神을 자서(自敍)에서 매우 완곡하고 담담하게 설명하고 있다.
무릇 높은 벼슬아치[公卿大夫]나 이름난 學者[儒林碩德]들의 學德은 國史나 野史에 두루 실려 있어 百世에 빛나기 마련이지만 저 草野에 묻힌 하찮은 벼슬아치나 이름 없는 선비들의 훌륭한 節義는 역사에 남지 않는다. 특히 그들이 義兵을 일으켜 賊을 토벌한 일은 아주 행하기 어려운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기록하지 않아 이것이 뜻있는 이들의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이다.(念齋野錄小敍)
敍文에 보이는 이 글은 아주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으나 그 眞意는 念齋 固有의 歷史精神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혹자는 말하기를 韓末의 國亂과 節義에 대하여 諸家들의 기록이 있기는 하나 모두 한결같지 않고 수다스러워서, 어떤 이는 작은 일은 기록하고 큰일은 빠뜨리며, 어떤 이는 여기에는 자상하고 저기에는 소략하며, 또 어떤 이는 甲은 알고 乙은 모르며, 어떤 이는 東쪽을 빠뜨리고 西쪽만 기술하여 世敎에 輕重이 되기 不足하고 後世人에게 믿음을 얻기 어렵다고 하였다. (念齋野錄小敍)
다시 말해서 무릇 歷史敍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史實의 取捨選擇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쓰는 이의 價値判斷이 수반되기 마련이며 그럴 때 흔히 범하는 過誤는 地位가 높고 낮은 것, 권력이 강하고 약한 것을 基準 삼는 일이다. 이러한 世俗的인 基準을 가지고 역사를 쓰게 된다면 草野에 묻힌 지체가 낮은 선비들의 事蹟을 기록할 가치조차 없는 하찮은 사건으로 취급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아무리 지체가 낮은 선비라 하더라도 그 忠節이 높고 뜨거우면 그것이 기록되어야지 그렇지 않다면 高官大爵들의 행적만 歷史에 남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아! 비록 한때는 이름 없는 사람이었을지라도 節義를 굳게 지키고, 목숨을 바쳐 屈하지 않음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장하고도 偉大한 일이니, 그들의 事蹟을 사람마다 기록하고, 집집마다 간직해 두어서 後世에까지 묻혀지지 않게 한다면(그것이 중요한 일이지) 작은 것을 기록하고 큰 것을 빠뜨리고 여기에는 자상하고, 저기에는 소략한 것이 무어 그리 흠될 것이 있겠는가.(念齋野錄小敍)
念齋野錄은 이와 같이 趙熙濟가 朴基宰, 洪震杓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완성하였는데 完成 時期는 1834년 辛未年 12월이었다. 3년 뒤인 1934년 5월에 崔秉心이 序文을 쓰고 있고 같은 해 3월 李炳殷이 跋文을 쓰고 있다. 6券 2冊으로 되어 있는 이 野錄에는 1895년 乙未事變(國母弑害)이후 1919년 國王(高宗) 승하까지 25년 간의 史實을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제1권에서 제4권 까지를 묶은 1冊에는 주로 韓末 日宰下의 義士와 烈士의 事蹟을 기록하고 5권에서 6권까지를 묶은 2冊에는 上疏文, 檄文, 詩文 등을 수록하고 있다.
一券 乙未, 丙申義兵 二券 乙巳勒約 事端및 殉國烈士 事行 三券 丙年, 丁未義兵 四券 合邦顚末 및 節義 五券 李道宰 上疏, 奇宇萬, 權世淵, 柳麟錫 檄文 등 六券 國民建議所跋文, 崔益鉉 布告文, 黃玹 庚戌絶筆詩 등
念齋野錄은 韓末義兵戰爭史 硏究에 貴重한 새 史料이다.
특히 그가 기록한 義兵將 가운데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人物들이 나타나 있다. 그 좋은 例가 奇宇萬 휘하의 朴源永(長城), 丁相燮(靈光)을 들 수 있으며, 특히 任實出身인 義兵大將 李錫庸에 대한 全州公判記가 유명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念齋野錄은 後世 史家들이 면밀히 檢討해 보아야 할 史料라 할 수 있다.
念齋 自身이 小敍에서 言及하고 있듯이 韓末 在野抗日史料로써 黃玹의 《梅泉野錄》이 있고 宋相燾의 《騎驢隨筆》, 박은식(朴殷植)의 《韓國痛史》 등이 유명하다. 《念齋野錄》은 이들 抗日史料와 同時期에 執筆된 값진 野史라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가 차분히 資料를 정리하여 文章을 추고(推敲)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歷史精神과 抗日精神은 《매천야록》이나 《기려수필》 못지 않게 高貴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念齋는 史禍를 입어 끝내 飮毒自決 하는데 이르고 있는 것이다.
戊寅(1938년) 11월에 갑자기 念齋野錄이 발각되어 任實警察署에 10여 일 동안 拘禁되었다. 구금 중 분개한 마음이 복받쳐 오름으로 因하여 生命이 거의 끊어지려 하였다. 이에 放免되어 自家에서 치료를 하고 있는데, 며칠도 안 되어 다시 머리를 깎으라는 협박을 받았다.
이에 公은 모든 家事를 정리하여 나누어 맡긴 뒤 弟子들을 불러 이르기를 “저들에게 모욕을 당하면서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조용히 자결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1938년 11월 18일 밤 극약을 마시고 自決하니 享年 66세였다.
이 때 文集 數 券이 있었으나 모두 저들에게 압수당하고 傳하지 못하니 斯文의 運이 비색하여 그렇게 된 것일까 슬프고 애석하기 그지없다.(念齋先生實記略)
《念齋野錄》은 《梅泉野錄》과 더불어 抗日野史精神을 克明하게 드러내 준 不朽의 愛國史書라 할 수 있다.
❀ 최 병 섭 (崔秉燮) 최병섭은 1878년 10월 24일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576번지에서 태어났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이석용 의병장이 일제에 의해 사형당한 뒤, 1939년 4월에 이석용 의병장을 찬양하는 유허비를 세우며 공적을 기림으로써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그는 이석용 의병장과 같은 마을 출신이고, 어려서부터 이석용 의병장과 친교를 이루었다. 그러한 관계로 평소 이석용 의병장의 순국을 애도하며 항일의식을 길러오던 중 이원영, 심한경 등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이석용의 출생지인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뒷산에 이석용 유허비를 세우고, 공물을 드려 제사를 지내는 등 순국지사의 공훈을 기렸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발각되어 그는 1941년 10월 8일 전주지방법원에서 64세의 나이에 소위 분묘제사초상(墳墓祭祀肖像) 등 취체령(取締令) 위반으로 징역 4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 13券 634面
❀ 최 종 엽 (崔宗燁) 최종엽은 본적이 운암면 입석리 90번지이며 주소는 당시 정읍군 정주읍 장영리 196번지로 되어 있으며, 당시 농업학교 학생으로 3․1만세 운동에 참여하다가 1934년 9월 17일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것으로 수형자 명부 자료에 나타났으나 그 외 기록은 없다.
註 : 편집자 자료에 의함.
❀ 한 일 수 (韓一洙) 한일수는 일명 정수(正洙)라고도 하며 1914년 1월 20일 청웅면 구고리 양지마을 613번지 원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달리 의협심이 강하고 특히 민족정신이 투철하여 일찍부터 항일사상이 싹텄는데 이러한 배일사상(排日思想)은 청웅 면민들에 대한 일본의 보복정책을 봐오면서 더욱 불타올랐다. 그는 일본을 이기려면 먼저 배워야 하기에 가정이 빈한하여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밀항하여 적개심을 발휘하리라 결심했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많은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자기의 목숨도 위태할 때 모든 동지들을 구하려 단독 책임을 고집하여 8개월 간 미결수로 있으면서 조사 끝에 1943년 12월에 장기법원(長崎法院)에서 사형(死刑)을 구형받고 이후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장기(長崎)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나머지 동지들은 석방되었다. 8월 15일 조국광복으로 그는 3년 8개월 만에 조국의 하늘 아래 큰소리로 기쁨의 환호를 외쳤다. 한국인의 영웅으로 불리던 그는 고향에 돌아와 모든 것을 감추고 오로지 30여 년 간을 생업에만 열중했으며 8․15를 자신의 재생의 날로 여기며 살았다.
註 : 《任實文化》 第6號 (1989年, 任實文化院 發行) 89面
무인 멸왜 기념비는 임실군 운암면 상운마을 운암초등학교 정문에 갑오동학혁명기념비와 3․1 만세운동 기념비와 같이 세워져 있다.
천도교를 중심으로 왜적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1938년 무인년에 일어났던 국민운동의 일환이었다. 이와 같은 멸왜 기도와 우리나라의 주권회복의 운동이 극비리에 진행되다가 1938년 2월 17일 발각되어 노출됨으로써 전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사건으로 임실에서도 최종기, 김한경, 김교승, 최종택, 박성언 등이 멸왜 기도 사건으로 일경에 잡혀 들어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건이다.
따라서 무인 멸왜 기도는 갑오동학혁명과 3․1 운동의 정신적 영향을 이어받은 운동으로 비문은 아래와 같다.
前世 壬辰 몇 해련고, 二百四十아닐런가. 개 같은 왜적(倭賊)놈을 하느님께 造化받아 一夜間에 滅하고서 대보단(大報壇)에 맹서(盟誓)하고 한(汗)의 원수(怨讐) 갚아보세. 이 말씀은 天道敎 一世敎祖이신 水雲大神師가 民族의 將來를 예시(豫示)하고 걱정하신 말씀이었다. 그럼으로 天道敎人들은 一世紀 동안 끊임없이 抗日運動을 지속(持續)해 왔었다. 布德 七七年(1936) 八月 十四日에 일지매(一枝梅)처럼 표일한 절개로 정절(貞節)을 지켜온 四世 大道主春菴 上師께서 過去에는 스승님들께서 傳統적으로 安心歌中 심고滅倭心告를 實行해 왔지마는 이제는 時期가 成熟했음으로 一般 頭目들과 敎人들에게 “無窮한 내 造化로 개 같은 倭賊놈을 一夜間에 滅하고서 전지무궁(前地無窮)하여놓고 大報壇에 盟誓하고 汗의 怨讐까지 갚겠습니다.” 라고 朝夕食告 때에 至誠껏 기도(祈禱)하라고 밀회(密會)를 내리었다. 이렇게 멸왜기도(滅倭祈禱)와 우리나라 主權回復運動이 극비(極秘)리에 進行되는 도중 布德 七九年(1938) 二月 十七日 이 사실이 信川警察署에 적발(摘發)되어 外部로 노출(露出) 확대(擴大)되었다. 그리하여 황해도 연원대표 홍순의(黃海道 淵源代表 洪順義)를 필두(筆頭)로 崔俊模와 中央幹部 여러분이 피검(被檢)되었고 春菴 上師께서 老患으로 병상신문(病床訊問)에 그쳤으나 이로 因하여 全國各地에서 數百 名의 교역자(敎役者)들이 投獄되었다. 任實에서도 최종기, 김한경, 김교승, 최종택, 박성언 등 이 倭滅祈禱事件으로 被檢되어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을 받았다. 그러한 拷問의 여독(餘毒)으로 出監 後 즉시(卽時) 환원(還元)한 분이 김재계(장흥), 손필규(논산), 이강우(해남), 김정삼 네 분이었다. 前世壬辰에 왔다가 일을 못했다고 쇠술로 밥을 먹지 않고 젓가락으로 먹으면서 朝鮮을 侵略하기 위하여 三百餘年 동안 주책(晝策)해온 日本이 三年 동안이나 前 敎會的으로 滅倭祈禱를 實行한 天道敎人들을 無罪로 석방(釋放)한 것은 우리나라에 對한 물리적 강복(物理的降伏)이 아니라 精神的 降伏이었다. 그러므로 무인 멸왜기도(戊寅 滅倭祈禱)는 甲午東學革命과 三一運動의 精神的 영향(影向)을 이어받았다. 南北分斷의 祖國이 아직도 統一을 이루지 못한 오늘 滅倭祈禱의 精神的意義를 되새기고 民族精氣를 바로잡기 爲하여 이 碑를 세워 先烈들의 거룩한 殉道殉國精神을 千秋萬代에 傳한다.
戊寅 滅倭運動 謀議 加擔者
최종기, 김한경, 최종택, 김교승, 박성언, 이홍국, 송화중, 이부연, 김정삼, 이성남, 이성조, 이홍섭, 이은택, 이원택, 박준표, 이만득, 지상문, 이종귀, 황호중, 이복영, 이도근, 이기철, 임팔엽, 박영준, 황호익, 임종기, 이진실, 최복록, 안진용, 박용운, 손복만, 이기환, 최동안, 최동진, 김정갑, 김정수, 엄창길, 신귀동, 곽동연, 이우상, 이판출, 김남쇠, 김정열, 염동문, 염경수, 임태규, 신옥진, 박기영, 박경관, 이종귀, 박관도, 박귀봉, 김형석, 김귀봉, 김형문, 노용섭, 노인섭, 김기선, 최창순, 우봉민, 김성표, 김정대, 최동완, 최상무 64명
1.6. 제6장 任實에서의 全北 記者大會와 日帝의 彈壓
1928년 4월 28일 임실 청년회관에서 제4회 전북기자 정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일 배헌(裵憲)의 사회로 시작하여 손각(孫角 : 동아일보 순창 지국장)이 개회사를 하기 위해 등단하자 일본경찰은 사전 검열 없이 대회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방해를 하더니, 집회계를 제출한 전영률(全榮律)과 사회자 손각을 경찰로 연행하고 토의안건 23건 중 7건을 강제로 중지시켰다.
대회장에는 분격의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임실의 삼영서장(森永署長), 평방보안주임, 손각, 박춘 등 5명에게 대표가 항의를 한 결과 배헌, 전영율이 연행된 사태속에서 대회는 강행되었다. 당일 참가 인원은 49명이었는데, 2명이 연행되었음으로 47명이 토의를 진행하였고 이명수(李明壽, 의장), 오동균(吳東均, 부의장), 김영춘(金葉春), 조판오(趙判五, 서기), 오태영(吳泰泳, 배헌, 전영율 석방 교섭 위원) 등은 대회의 진행을 위해서 맹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5월 7일이 되자 전주서(全州署)는 행동을 주시하여 동아일보 전주지국 기자 김지수(金智洙)와 조선일보 전주지국 기자 하준기(河駿基)를 비롯하여 이리에서 동아일보 이리지국장 배헌, 중외일보 이리 지국장 임혁근(林赫根) 그리고 군산에서는 박 춘을 구속했다.
이어서 임실 청년회 회장 이명수(李明壽), 동아일보 순창 지국장 손각, 중외일보 남원 지국장 김영춘, 동아일보 군산 지국장 조판오, 등을 구속하고 가택과 지국을 수색하였다. 이들을 구속하고 수색하는 이유는 전북 기자대회의 토의사항과 강령이 볼온하다는 것이었다. 이들 가운데 6명은 경찰 취조를 거쳐 결국 송치되었다.
이러한 전북기자대회 사건은 국내 언론계뿐만 아니라 호남지방의 항일적 분위기를 더욱 가열화시킬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신간회 결성은 1928년 1월 14일(동아일보는 1928년 1월 18일) 임실군의 회장은 박영호, 부회장은 장환기, 총간은 최일 외 11인 본부대표는 이명수, 노병춘, 장환기, 후보 문병국, 최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