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안의 궁궐. 건청궁 " 경복궁 후원의 기울어진 향원정(香遠亭)을 보수하고 연결 다리인 취향교(醉香橋)를 남쪽에서 북쪽에 목재로 아치 형태로 만들어 최근에 공개하였다. 향원정을 보고 2007년 복원한 건청궁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보통 광화문에서 출발하는 일반적인 관람 코스를 선택해 경복궁을 걷다 보면 건청궁은 맨 마지막 코스에 만나게 되어 대부분 힘들고 지친 상황에서 이 집을 보게 되지요. 따라서 대충 보거나 소홀하게 지나치게 되므로 건청궁을 여유 있게 제대로 보려면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청와대 앞)으로 들어와 향원정과 건청궁, 집옥재와 태원전 영역을 보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관람코스를 추천한다.
▼2021년 10월 향원정을 4년에 걸쳐 해체 ·보수해 오픈했다.
▼구한말 자료 등을 활용하여 향원정을 연결하는 취향교를 건청궁 앞의 원래 위치에 목재로 옛 모양인 아치 형태로 향원정과 함께 오픈하였다.
▣ 건청궁(乾淸宮)
▶건청궁 변천사 ☞건청궁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궁궐로 1873년 고종(1852~1919, 재위 1863~1907)이 내탕금(개인 돈)으로 만든 단청 없는 사대부 양반가옥처럼 사랑채(장안당),안채(곤녕합), 서재(관문각) 등을 건립했다. ☞고종이 건청궁 건립한 것은 부친 흥선대원군에서 벗어나 친정한다는 정치적으로 자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경복궁 중건(1868년) 후 얼마 안 되었으므로 신하들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내탕금으로 검소하게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장소라 지었다지만 어진을 모신 전각이라면 나랏돈으로 지었을 것이다. 건청궁은 실제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하거나 외교관 접대의 장소로 활용되었지요. 1894년 겨울 향원정에서 외국인을 초청해 피겨스케이팅을 시연하였다. ☞1887년 건청궁의 야간 경비, 경호 등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을 설치하였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아관파천) 일제는 1909년 건청궁을 철거하고 조선 물산 공진회 전시장으로 사용하였다. ☞1939년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완공했는데, 이 미술관은 해방 후 국립현대 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됐다. ☞건청궁은 경복궁의 전각 중에서 가장 나중에 건립되었지만 일제에 의해 가장 먼저 사라진 전각이 된 비운의 건물이다. ▼조선총독부 미술관 -국사편찬위원회 사진-
☞2007년 일제가 철거한 건청궁을 복원(관문각 제외)해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 | | 경복궁 화재로 고종과 명성황후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김 | | | | | | | | | |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 ~1897. 3월) | | 건청궁 철거 후 조선 물산 공진회 전시장으로 사용 | | | | |
▶관람한 순서 취향교→ 솟을대문→ 초양문→ 장안당 →정화당 →추수부용루→ 필성문→ 관문각지→ 복수당 → 정시합 →청휘문→자선당유구→ 곤녕합→ 함광문→ 솟을대문→ 인유문 ▼솟을대문과 남행각 건청궁(乾淸宮)은 "하늘이 맑다’'는 뜻이며 앞에 향원정을 연결하는 취향교가 있다.
▼초양문(初陽門) 장안당과 행랑채 건물 사이의 문으로 "이른 봄"이란 뜻이며 청나라 옹방강(1733~1818.추사 김정희 스승)의 글씨를 집자(集字) 하였다.
▼장안당(長安堂) ☞건청궁 서쪽의 장안당은 왕의 거처로, 장안(長安)은 "오래도록 평안하다"는 뜻이다. ☞장안당 현판 오른쪽 상단에 임금의 글씨를 뜻하는 ‘어필(御筆)’이 전서체로 새겨져 있고, 왼쪽 하단에는 ‘주연지보(珠淵之寶)’, ‘만기지가(萬機之暇)’라는 낙관 두 개가 새겨져 있다. 주연지보는 고종의 낙관(落款)이다.
☞장안당은 당시 조선 사대부 상류 주택의 건축 양식 중에도 가장 격식을 갖춘 건물로 지붕 합각에 희(囍) 자가 보이며 복도를 통해 곤녕합과 연결되어 있다.
☞왕이 소대(召對: 왕이 신하를 불러 만나는 것, 특히 낮에 경연관을 불러 정례의 경연 외에 따로 강론을 주고받는 것)를 행하거나 신하를 만나는 곳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편전의 용도로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고종은 이곳에서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공사를 접견하면서 여러 정치적인 문제를 처리했을 것이다.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할 때(을미사변), 고종은 이곳에 감금된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는 왕이 계신 곳에 있는 그림이다. 일월오봉도가 놓이는 위치는 주로 용상 뒤로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물이 일정한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장안당 앞에는 매화나무, 뒤쪽에는 고종이 좋아했다는 감나무가 자라고 있다. ☞정화당(正化堂)은 "올바른 교화"라는 뜻으로 추수부용루의 북쪽에 붙어 있으며 침방이다.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 추수부용(秋水芙蓉)은 "가을 물속의 연꽃"이란 뜻이며 서편에 누마루 형식으로 지은 집이다.
▼필성문(弼成門) "도와서 이룬다"는 뜻으로 벽돌로 만든 서쪽 아치문이다.
▼관문각터(觀文閣址) 장안당 뒤편의 관문각(觀文閣)은 고종의 서재로, 원래 전통적인 목조건물이었다가 1891년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친의 설계로 2층 벽돌조 건물로 개조되었다. 고종은 관문각에서 책을 읽고 주로 외국인들을 맞이하였다. 1901년 헐렸고 2007년 복원되지 못하고 터만 복원되었다. ☞고종 글씨의 현판
▼독립문도 설계한 러시아인 사바틴의 서양식 2층 건물인 관문각
▼상궁과 나인들 거처인 복수당이며 복수(福綏)는 "복록을 받아 편안하다"는 뜻입니다.
▼녹금당(綠琴堂) "녹색의 거문고"라는 뜻으로 복수당 서행각에 있다.
▼정시합(正始閤) "처음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옥호루의 북쪽 건물로 왕비의 침전이다.
▼청휘문(淸輝門) "맑은 빛"이라는 뜻으로 자선당 유구로 나가는 문이다.
▼자선당(資善堂) 유구(遺構) 자선당은 조선의 왕세자(세자비)가 거처하던 동궁이다. 일제가 1918년 조선 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철거한 것(일제는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세움)을 일본 무역상 오쿠라가 동경으로 옮겨 '조선관'이라는 현판을 달고 사설 미술관으로 사용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건물은 소실하고 주춧돌과 기단이 남았다. 김정동 교수의 끈질긴 추적 끝에 유구를 발견해 현재 경복궁에 돌아왔지만 원래 위치에 있지 못하고 이곳이 있습니다.
▼경복궁에 복원한 자선당과 일본에서 소실된 자선당(조선 미술관)
▼자선당 유구 위쪽 녹산(鹿山)의 단풍
▼녹산에서 인왕산 방향으로 보이는 복수당 지붕
▼곤녕합(坤寧閤) ☞명성황후(1851~1895.경기 여주 출생. 순종의 모친)의 침전으로 민가의 안채에 해당된다. "땅이 편안하다"는 뜻의 곤녕합은 왕비의 덕성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왕의 거처인 장안당의 동편에 있다. ☞고종 글씨의 곤녕합 현판
☞주련 맥상요준경북두(陌上堯樽傾北斗) 누전순악동남훈(樓前舜樂動南薰) 천문일사황금방(天門日射黃金榜) 춘전청훈적우기(春殿晴曛赤羽旗) 쌍궐서연농함담(雙闕瑞煙籠菡萏) 구성초일조봉래(九城初日照蓬萊) 벽소쌍인난성세(碧簘雙引鸞聲細) 채선평분치미제(採扇平分雉尾齊) ☞곤녕합에 딸린 누각 옥호루는 "옥으로 만든 호리병"이라는 뜻으로 원래 옥호빙(玉壺氷.옥병 안의 얼음)의 줄인 말인데 깨끗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옥호루의 동쪽에 있는 사시향루(四時香樓) 현판은 장안당의 추수부용루와 짝을 이루는 이름이다. 그 이름에서 여성적인 분위기가 한껏 느껴지는 사시향(四時香)은 "4 계절 끊이지 않고 꽃향기가 풍긴다"는 뜻이다.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는 44세의 짧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1895년(고종 32)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6시경 일본 낭인 등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한다. 일본 공사와 낭인 집단에게 조선 황후가 궁궐에서 시해당할 정도라면 무장과 경호 등 안전에 여러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불안한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에 가서(아관파천) 보호받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 군주가 왕비를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나라를 지키고 운영하겠는가? 우리나라가 약하고 외국의 힘이 세다고 "이 이제이(以夷制夷. 이 나라 힘을 이용하여 저 나라를 제어함) 하면 될 것 같은데 말처럼 쉽지 않고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백성들은 갈라지고, 관리들은 무능하고 사리사욕과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군주는 백성들보다 왕실만을 위하므로 부국강병을 제때 제대로 하지 못해 망했다. 결국 부정부패와 사리사욕 등을 채우면서 국가 미래와 부국강병을 못하는 무능한 지도자는 사라지고 새로운 지도자가 비전을 제시해 국민 소통과 화합을 이끌어내 국가의 지속적 성장과 발전을 이뤄 부국강병을 이뤄야 하지 않겠는가? 고종은 1895년 12월 1일 명성황후 사망을 발표했고 1896년 2월 아관파천(약 1년 거주) 후 1897년 11월 21일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을미사변 때 죽은 왕실을 호위하는 시위대(侍衛隊) 대장 홍계훈,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1900년 남산 장충단(奬忠壇, 원위치는 신라호텔 자리)에 모시고 제사를 지냈고 현재 장충단 공원에 장충단비가 있다 ▼옥호루 현재 사진과 옛 사진(서양식 건물인 관문각이 뒤에 보인다)
▼최초로 전등을 설치해 야간 안전 경호에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 일제는 왜 명성황후를 죽여야 했나?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데 친러파 왕후가 앞장서서 조선 침략을 막으려 하므로 시해하였다. ▼함광문(含光門) "빛을 머금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고 곤녕합과 행랑채 사이 문이다.
▼인유문(麟遊門) "기린이 노닐다"는 뜻으로 자선당 유구로 갈 수 있다.
▶복원한 건청궁 현판의 바탕색과 글자색을 비교해 보니 차이가 나는데 기준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집니다. 고종의 글씨인 장안당 현판과 곤녕합 현판의 바탕색과 글자색이 다른 것은 동시에 쓰지 않았거나 나중에 복제품을 붙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로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현판은 검은색 바탕에 황금색 글자에 테두리가 있습니다. ▶오방색(五方色)은 한국의 전통 색상이며 방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출처: 중앙일보, 소년 한국일보, 네이버, 구글, 경향신문, 문화재청,경복궁관리소,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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