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황산대첩 진군로 (2) 용(龍)은 태조등극, 닭울음 조선(朝鮮) 개국 상징
군사훈련 적합한 지역 ‘섭진(習陣) 번덕’ 이라 불러 일제(日帝) 때 龍鷄를 龍溪로 바꿔 버린 .... 우리 지명 찾아야.
장수(長水)-용계리(龍鷄里)
개경을 출발한 이성계는 곧장 금산을 거쳐 전라좌도의 산골길을 타고 이른바 용담현감 피원량 등이 앞서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쳤다는 고남이재를 넘어 새벼리서 길을 넓히고 왜구가 머물고 있다는 지리산 밑을 하루거리로 남겨둔 장수에 도착, 일단 현의 남쪽 팔공산 및 벌판에 군막을 쳤다. 장막을 치고 난 이성계는 개경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는 동안 쌓였던 노독을 풀어주기 위해 군졸들에게 일정한 시간동안 휴식을 취하도록 하는 한편 정병 몇 사람을 척후로 뽑아 적정을 살펴 오도록 하고 얼마쯤 지난 뒤 군졸들을 불러 모아 대략 다음과 같은 훈시를 했다.
“장병 여러분! 우리는 오늘 저 머나먼 개경으로부터 무모한 왜구를 치기 위해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무찌르고 만주벌판을 누볐던 광개토대왕의 후예로써 당당한 옛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바로 고려의 백성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떤 형편에 처해 있습니까. 우리에게 굴복되어 꼼짝 못하던 저 북방 오랑캐가 되살아나 우리를 괴롭히고 또 두 차례나 정벌 길을 나섰다가 불행히 심한 바닷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여 그대로 되살아난 왜구가 지금은 남해를 돌아 서해 진포에 상륙하여 내륙까지 들어와 갖은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미 저들은 우리 화통도감에서 만든 화포 맛을 보고 허겁지겁 물러갈 퇴로를 잃은 채 각처로 흩어져 우왕좌왕 하다가 이제는 하룻길에 불과한 지리산 밑에 떼를 지어 죽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너나없이 이 석자 되는 칼로 무도한 왜구를 소탕하여 위태로운 고려의 사직을 편안케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 할 수 있도록 힘껏 싸웁시다”
하면서 옆구리에 찼던 칼을 뽑아 크게 휘두르자 군졸들은 일제히“와” 하는 환호성을 질렀고 잠시 후에 적정을 살피러 갔던 척후가 급히 돌아와 지리산 밑에 진치고 있는 왜구들의 동정을 상세히 알려왔다.
습진(習陳)번덕에서의 훈련
척후가 알려온 적정의 중요내용은 함양에서 힘써 싸우다가 후퇴한 우리 측 군사는 남원에 있고 왜구들은 운봉까지 와서 불을 지른 뒤 다시 인월(引月)로 물러나 ‘장차 남원을 거쳐 광주를 향해 진격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상세한 보고를 받은 이성계는 척후가 내민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내심 어떤 결심이 섰는지 일단 이곳에 전열을 재정비하고 왜구를 소탕 할 진법을 익힐 것을 명령했다. 이와 함께 이성계는 첫째 정병을 그대로 척후로 삼아 다시금 적정을 소상히 살펴오도록 엄히 명령하고 둘째 모든 군졸들을 크게 넷으로 갈라 하나는 왜구, 또 하나는 우리 측 토벌군, 그리고 나머지하나는 독안에 든 쥐새끼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매복 군을 만들어 이른바 가상훈련을 철저하게 시켰고 또 한 무리는 엉뚱하게 산서너머 어디론가 보냈다. 이성계가 구상한 작전은 곧 군졸을 모아 시킨 훈련은 가상의 왜구를 맞아 우리 측 주력부대가 일단 지형 상 유리한 쪽을 선점토록 하고 마구잡이로 몰려드는 왜구를 유인할 수 있는 대로 유인하여 이를 계속 해서 잡은 후 막판에 들어서는 왜구들이 도망칠만한 도주로에 군사들을 매복시켰다가 갑자기 나타나 이들을 후려치는 방법이었다. 장차 닥칠 왜구와의 만만치 않은 한판 승부를 놓고 언뜻 보기에는 한가롭게 보일 수 있는 이런 훈련을 왜 이성계는 반복해 가며 철저히 시켰을까. 도대체 그 깊은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지극히 명백하다. 즉 이미 척후가 알려온 인월의 지형이나 이 수분치 밑 벌판의 지형은 엇비슷한 산중 속의 분지였기 때문이었으며 뚜렷한 명분으로 다진 장병들의 인화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은 승리를 안겨주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남정북벌로 다져진 백전노장 이성계 자신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연유로 지금까지 장수읍에서 수분치로 향하는 팔공산 아래 벌판을 습진번덕이라 불러오고 있다. 사랑스런 우리 지명이 아닐 수 없다.
용계리(龍鷄里)에서의 닭 울음
팔공산자락 밑 습진번덕에서 훈련을 마친 군사들은 이제 저 무도한 왜구를 소탕하기위해 전쟁에 있어서는 묵적수행에 걸 맞는 시간의 선택 또한 중요한 일이다.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피아간의 다툼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서둘러야 된다는 법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늦춘다고 되는 법도 없다. 오직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피아간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그에 걸 맞는 시간에 어느 편이 보다 신속한 대처를 할 수 잇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법이다. 왜구들이 장차 광주를 점령하기 위해 며칠 뒤 인월을 떠나기로 했으며 일부선발대가 그에 앞서서 바로 떠날 차비를 하고 잇다는 척후의 보고를 받고 훈련을 명령한 이성계는 곧바로 휘하 장수들을 불러 출정을 앞둔 작전회의를 가졌다. 여기서 한 장수가
“그동안 군졸들은 훈련 속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급하다 할지라도 이 밤을 쉬도록 한 뒤에 내일 아침에 떠납시다.”
하고 제의를 했다. 이에 성미 급한 또 다른 장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구의 움직임이 있으려는데 어찌 시간을 다투어 치지 않으려 합니까. 밤을 도와 곧바로 진군해야 합니다.”
라며 맞섰다.
“아침도 아닌 새벽에 떠나기로 하자. 우리의 생사는 하늘에 달렸으니 새벽 첫 닭 울음을 신호로 떠나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여 두 의견을 절충시키니 더 이상 별 무리는 없었다. 이렇게 회의를 마치고 막 각자의 장막 속에 들어 군졸들이 잠들려 할 때였다. 난데없이 마을에서 “꼬끼오” 하는 닭 울음소리가 났고 이 소리를 신호삼아 우리군사들은 부랴부랴 서둘러 출정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용계리(龍鷄里)를 출발해 막 산서면 비행기재까지 약 3km쯤 진군 했을 때 적의 척후병과 맞부딪쳐 그들을 생포하게 된다. 하늘이 도와준 그 닭 울음소리 때문에 이성계 군은 적정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고 화를 면함은 물론 왜구를 소탕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얻어진 이름이 장수 용계리(龍鷄里)다. 그런데 일제가 슬그머니 골짜기를 뜻하는 용계리(龍溪里)로 고쳐 놓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해방 반세기를 지내왔다. 여기서 용은 태조등극을 상징하고 닭 울음은 조선개국을 상징하는 말이니 애당초의 용계리(龍鷄里)로 고쳐 우리의 지명으로 받들어야 할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