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황산대첩 진군로 (4) 용계리 닭 울음소리 신호로 출정.... 대승(大勝)
이성계군(李成桂軍) 함미산성 쌓아 왜구일망타진 아지발도 전주(全州) 침공 루트 막아 위기모면
진기리(陳基里)의 야간전투(夜間戰鬪)
함양 사근역 혈투에서 패전의 쓰라림을 맛본 우리 군사들은 가까스로 남원으로 물러앉아 개경으로부터의 구원병을 애타게 기다리며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 삼도도원수로 급파된 이성계는 일단 장수 습진번덕에서 군사를 조련 한 뒤 용계리의 닭울음소리를 신호로 때 아닌 밤중에 출정을 하게 된다. 물론 이 출정은 이미 왜구의 동정을 샅샅이 살펴온 척후의 보고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출정 길을 택하는 일은 이성계 자신이 극비리에 지시를 했다.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이미 용계리의 닭 울음으로 감쪽같이 왜구를 치러 나설 때를 얻었지만 이제 왜구 소탕의 첫발을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가 가장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재빠른 선택 진기리(陳基里)
장수에서 인월로 가는 지름길은 번암을 거쳐 가는 길뿐이다. 그러나 이 길은 왜구들의 동정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면 모르나 “장차 남원을 거쳐 광주로 향하리라”며 “자세히는 몰라도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세밀히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단지 급한 마음에 저들을 빨리 소탕해 버릴 요량으로 지름길만을 택하여 가는 것은 아무래도 왜구의 음흉한 전략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으로 자칫 만용이 될 수도 있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여러 정황을 분석하는 한 편 저들의 호언장담에서 그 실마리를 풀고자 했다. 과연 왜구들이 장차 남원을 거쳐 광주로 향할 것인가. 그런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저들이 호언장담 하는 이면에는 진군의 목표가 다른데 잇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 이르자 이성계는 갑자기 눈에 별이 쏟아지며 가슴이 확 트이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당초 저들이 쳐들어온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곡창 호남을 샅샅이 누비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식량을 약탈해 가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미 함양에서 당당 해 질대로 당당해진 기세를 슬그머니 접어 남원에서 광주로 갈 리가 없는 것 아닌가. 기운이 차면 누구나 교만해지고 기운이 빠지면 누구나 인색한 법이며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것이 사람마다 지닌 속성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교만 해 질대로 교만해진 왜구들은 남원을 놓아두고 인월에서 곧장 전주로 향해 갈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는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측 군사들을 남원에 그대로 남겨둔 채 자신이 이끄는 군사들로 하여금 곧장 전주를 향해 떠날 차비를 갖추게 하면서 교만한 왜구를 일망타진 할 작전을 세웠다. 즉 인월에서 전주로 가는 지름길은 남원 산동 목동에서 고개를 넘어 보절을 통과해야 하는데 보절로 접어들면 일단 산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서 이곳이야말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맞아 싸우기에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요새였다. 이성계는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고 장수에서부터 일부 군사를 이곳으로 보내 함미산성을 쌓고 진지를 구축하는 등 모든 준비를 해 놓은 상태여서 이제는 다만 주력부대가 선발대와 합류해 왜구를 소탕하면 되는 것이다. 이때에 쌓았던 함미산성의 흔적이 지금까지 지명과 함께 남아 있고 진을 쳤던 터도 진기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진기리는 원래 진기리(陳基里)로 불렸던 것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진기리(眞基里)로 바꿔 버렸다. 그러니 조선 종자를 왜종자로 바꾼 이른바 창씨개명만을 욕할게 아니지 않는가. 아니나 다를까 산서 고개를 넘어 부랴부랴 보절 진기리에 도착하자 마침 왜구들이 횃불을 밝힌 채 산동의 목동 고개를 삼삼오오 떼를 지어 넘어오는 것이 포착되었다.
밤에 잃은 나팔 구라치(求螺峙)
아뿔사.! 병법에 ‘동을 치려는 듯 하면서 실은 서를 친다’ 말 그대로 분명 잔 꽤 많은 왜구들이 전주 침공을 감행 하기 앞서서 꽤 많은 척후가 미리 길을 정탐하기 위해 어둠을 타고 잠임 해 들어온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이성계는 내심회심의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예견 했던 일이라도 자신의 판단이 맞아 떨어졌을 때의 느끼는 희열이란 마치 수도자가 많은 고행 끝에 어느 날 문득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 얻는 법열과도 다를 바 없으리라. 더욱이 다른 길을 타고 산동의 목동고개 넘어 까지 귀신도 모르게 우리 군사를 보내 잠자코 숨어 있다가 왜구들이 다 넘어왔다 싶으면 나팔을 불라고 단단히 일러둔 일까지 있었다는 사실까지를 포함시켜 보면 당시이성계가 느꼈던 기쁨이 어느 정도였을 것이라는 점은 상상 되는 바 크다.아무것도 모른 채 지껄이며 점점 왜구들이 앞으로 다가오자 난데없이 이성계는 큰소리로 명령하기를 “횃불을 밝히라”! 하고 소리쳤고 횃불잡이 군사들은 명령대로 미리 준비했던 횃불을 일제히 밝히니 당황한 왜구들은 기겁하여 반사적으로 오던 길로 너나없이 몸을 돌려 헐레벌떡 줄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왜구들이 작살 맞은 뱀이 달아나듯 전후좌우 살필 틈도 없이 횃불을 든 채 한참 달아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저 고개 마루에서 ‘뛰’- 하며 나팔소리가 났다. 그러나 정신없이 달아나는 왜구들인지라 어느 곳에서 나는 소리인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우왕좌왕하며 달아나는 꼴이 실로 가히 볼만한 눈요기꺼리였다. 마치 독안에 든 쥐가 힘써 빠져나갈 구멍을 애써 찾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진풍경이 횃불 아래서 연출되는 동안 대부분의 왜구들은 맞아 죽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왜구는 겨우 몇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기서 살아 돌아간 왜구들은 횃불에 비친 우리 군사들의 진지를 보고 그대로 아지발도에게 알려 끝내 왜구의 전주 침공 루트를 포기 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군사들은 사생결단하고 달아나는 왜구를 쫒다 지녔던 소라나팔을 잃게 되는데 날이 밝아서야 다시 찾게 되었다. 이런 일로 인해 산동의 목동에서 보절의 진기리로 넘어오는 고개이름을 잃었던 나팔을 다시 찾은 곳이라는 뜻에서 지금까지 구라치(求螺峙)라 불러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