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황산대첩 진군로 (5) 제왕봉(帝王峰)서 전승기원 천제(天祭)올려
이성계(李成桂) 겁먹은 군졸 호통... 운봉진군명령 길할미 나타나 왜구 소탕책 낱낱이 알려줘
제왕봉(帝王峰)에서의 천제(天祭)
전주침공을 위해 구라치를 넘어오던 왜구의 척후를 한밤중부터 새벽까지 진기리에서 박살낸 이성계는 몇 명 살아남지 않은 적의 줄행랑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곧장 발길을 남원으로 옮겼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면 이번 전투를 위해 개경으로부터 천리를 행군해 오는 동안 왜구에게 당한 우리백성의 시체가 가는 곳마다 즐비하였던 그 참혹한 광경을 쉽사리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원에 도착한 이성계는 일단 우리군사의 환영을 받고 난 뒤에 그동안 왜구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놓고 장차 왜구 소탕을 위한 작전에 들어가 의견을 청취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이
“왜구들은 운봉황산의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진을 치고 있기로 공격에 어려움이 많으니 다시 남원으로 진출하기를 기다렸다가 치는 것이 옳다”
고 입을 모았다. 일찍이 사근 내 전투에서 크게 패한 장수들은 잔뜩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의견들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호통치듯 말하기를 왜구토벌을 목적으로 천리 길을 달려온 군사가 왜구를 찾아 공격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거늘 왜구를 보고서도 공격하지 않는다면 어찌 옳은 일인가. 여러 장수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각자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여 한 치의 착오 없이 작전에 임할 수 있도록 하시오. 내일 아침 우리는 여원치를 넘어 운봉으로 진군 하겠소 라고 하였다.
길할미를 만난 여원치(女院峙)
아침이 밝아오자 이성계는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승전을 기원하는 맹세를 겸한 조찬을 서둘러 끝내고 왜구가 진치고 있는 황산을 향해 부랴부랴 잔뜩 안개 낀 아침을 헤치며 행군의 길을 떠났다. 운봉은 실로 호남의 지붕이라 불러오는 높은 고원이며 남원에서 운봉으로 가자면 반드시 평지에서 고원으로 접어드는 고개가 하나 있는데 이 고개를 지금까지 여원치라 불러오고 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이성계가 거의 고개 정상에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짙은 안개가 자욱하여 시야를 심히 가리더니 비몽사몽간에 어떤 할미가 나타나 말하기를
“지금 급한 대로 곧장 운봉으로 발길을 옮기지 말고 반드시 저산으로 올라가 일주일 동안 천제님께 치성을 드린 뒤에 진군하시오. 그래야만 하늘의 도움을 얻어 이길 수 있소. 그리고 텅 빈 사창(社倉)에 진을 치지 말고 그 아래 후미진 곳에 숨기고 약간 시창을 비켜 그 옆에 군사들을 먹일 솥을 걸고 곧장 산봉우리에 올라 황산 골짜기에 숨어 있는 왜놈들의 동정을 잘 살펴가며 잇는 힘을 다해 싸우시오, 그래야만 저들을 물리칠 지리를 얻게 될 것이오. 또 아무리 힘센 군사라 할지라도 민심을 얻어야 이길 수 있고 더욱이 교만하고 무자비한 왜놈들을 맞상대하여 쳐 부시는 데는 반드시 백성의 인심을 얻는 일이 첫째이니 부디 추호도 민폐를 끼치지 말고 정당하게 왜구 소탕할 일만 차근차근하시오. 그래야 하늘이 도와서도 이기고 산신이 돌봐서도 이길 것이오”
라고 말을 마치자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자욱했던 안개도 활짝 걷히고 드디어 눈부시게 밝은 아침 햇살을 대할 수 있었다. 그럼 이 노파는 누구인가? 전하는바에 따르면 이 노파는 본디 함양에 살았던 미모 단정한 여인이었는데 왜장 아지발도가 그녀를 희롱삼아 젖가슴에 손을 대니 칼로 자신의 젖가슴을 도려내어 자결한 원귀의 화신이었다고 일러오고 있다. 즉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왜구에게 당한 사무치는 원한을 갚기 위해 그녀는 때에 길할미가 되어 새벽안개 속에 싸인 채 이성계 앞에 나타나 왜구소탕의 비결을 낱낱이 알려준 것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지금까지 남원에서 운봉을 넘는 고개를 여원치(女院峙)라 부르게 되었고 노파가 가르쳐준 대로 왜구와 맞서 싸울 때에 군사들을 먹일 솥을 걸었던 곳을 정봉(鼎峰), 말을 매었던 곳을 차마동(車馬洞)이라는지명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7일간 천제(天祭) 모신 제왕봉(帝王峰)
여원치 정상에 올라가 일단 진을 치고 북쪽을 바라보니 약 3킬로 지점에 마치 투구를 쓴 모양과 같은 괴이한 산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예로부터 고남산(高南山)이라 불러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잠시 숨을 돌리고 난 뒤에 이성계는 그 산으로 올라가 곧장 동서 두 군데에 각각 천하대장군 한 쌍을 마을 어귀에 세우도로 하여 온갖 잡귀를 몰아내었으니 이때에 잠시 군사를 머물렀던 여원치 옆의 후미진 곳을 지금도 병막동(兵幕洞)이라 불러오고 있다. 그리고 해발 850미터에 달하는 고남산 정상에 올라 석축으로 천제단을 쌓도록 하고 인근 마을 한 복판 바위틈에서 천연으로 솟아나는 정화수를 떠다가 7일 동안 밤낮으로 정성껏 치성을 드리며 지리산 신을 비롯한 팔도명산의 여러 산신까지도 불러 모아 전승을 비는 기원제를 정성껏 올렸다. 이로부터 고남산을 제왕봉(帝王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또 밤에는 수천개비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워 불과 오륙 킬로미터 전방에 있는 왜구들에게 위압을 가했으며 한편 척후를 적진으로 밀파시켜 왜구들의 일동일정을 낱낱이 살펴오도록 하고 황산 서북쪽에 군사를 보내 고개 마루에 크고 작은 돌들을 쌓아 아차하면 석전을 할 계획도 세우고 휘하의 중군을 비밀히 움직여 인월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좁은 계곡에 매복토록 하는 등 철저한 대비를 차근차근 진행시켰기로 중군리(中軍里)라는 이름이 그대로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러나 결코 전투는 예상 할 수 없었다. 이성계 휘하의 군사는 고려군과 여진족을 합쳐 편성한 병력이 천 여 명에 불과한데 비하여 왜구의 숫자는 거의 열배에 가까운 대병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심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천제를 마친 바로 그날 밤 이성계는 또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내용인즉 즉 황산 서북쪽 고개 마루에 쌓아둔 돌들이 울면서 말하기를
“장군님! 무엇을 망설이고 계십니까? 왜구에게 희롱당하여 왼쪽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한 여인이 길할미로 나타나 장군님께 칠일칠성을 말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지체하지 마옵시고 내일 당장 출전하소서”
하였다. 그 이튿날 긴 밤에 있었던 꿈을 기이하게 여긴 이성계는 새벽녘에 참모들을 집합시켜 당일의 일진을 보았다. 어느 때와 같이 이두란을 시켜 백보 앞에 투구를 놓아두고 유엽전 3개를 뽑아 쏘아보니 백발백중이었다. 매우 만족스런 결과였다. 그래 제왕봉 천제단에서 장차 진을 칠 곳을 바라보니 마치 비단으로 길게 다리를 놓은 듯하여 정봉과 제왕봉 사이를 장교동(長橋洞)이라 불렀는데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이때에 훤한 앞길을 예견한 이성계가 스스로가 지어 부른 이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