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황산대첩 진군로 (6) 풍부한 지략. 용기로 전투승리
인풍引風...광풍 업은 화살에 왜구 秋風落葉 인월引月... 달빛 끌어내 승전 이끈 황산黃山기적
황산黃山에서의 격전
이성계가 제왕봉에서 칠일동안 천제를 마치고 난 뒤 군사를 이끌고 나와 진을 친 곳은 황산줄기의 나지막한 정봉이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황산의 남쪽은 제법 넓은 냇물이 흘러 나가는 좁은 계곡이 있고 북쪽으로는 아영의 사창과 인풍리를 지나 함양으로 통하는 울도치가 보인다. 그리고 사창리 마을 앞 해발 오백 미터 앞에는 환산에서 뻗어 내린 아담스런 봉우리가 솟아있는데 이 봉우리 정상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왜구들이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한 눈 안에 그대로 들어와 적정을 훤히 관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동쪽으로는 풍천이 흐르고 그 양 옆에는 논밭이 펼쳐있는데 산 아래 남쪽으로는 낮은 평지와 늪지대가 있으며 이 편지와 왜구의 진지와의 사이에는 낮은 야산 줄기가 황산에서 뻗어내려 지리산을 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세를 유심히 살펴본 이성계는 틀림없이 왜구들이 이 애산과 험준한 산속에 매복하고 있으면서 우리군사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여기서 이성계는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 뭔가를 떠올렸다. 그러나 마냥 왜구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왜구들의 동정을 정확히 살피기 위해서라도 저들을 향해 싸움을 걸기로 결단을 내렸다.
바람 불어준 곳 인풍리引風里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급한 상황이더라도 왜구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인 우리군사인지라 무모하게 병력을 투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이성계는 우선 몇 명의 장수들로 하여금 일부 군사를 이끌고 풍천이 흐르는 왼편의 평지를 향해 슬그머니 시도해 보도록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리 군사들은 반격해 오는 왜구에게 번번이 싸움다운 싸움을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채 퇴각해 왔고 이런 진퇴를 거듭하는 동안 해는 벌써 정오를 반나절도 훨씬 넘었다. 더구나 바람마저 때 아닌 동풍이 불어 닥쳐 우리 군사들이 싸우기에 심히 불리해짐으로써 야산에 매복한 왜구만 움직일 뿐 막상 황산아래 숨어 있는 왜구의 주력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정봉에 진지를 구축한 것이 잘못이었던가? 그렇다면 앞서 여원치에서 길할미가 일러준 작전은 오히려 저들의 간사한 속임수였던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급기야 이성계는 하늘을 우러러 제발 하늘이시여! 저 팔랑치에서 불어대는 바람을 돌이켜 이제우리의 화살이 힘차게 왜구의 가슴을 찌를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이성계가 이처럼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난 잠시 후 일진광풍이 팔랑치에서 힘차게 불어오더니 그 바람이 아영의 야산을 흔들어 놓을 듯 몰아치고 난 뒤에 급기야 방향을 바꾸어 왜구들이 매복해 잇는 곳으로 불어 닥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런 광경을 본 이성계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우측 험한 길을 택해 매복하고 있는 왜구를 유인한 뒤 곧장 북을 울려 쏟아져 나오는 적을 향해 총공격을 명령했다. 이처럼 이성계군의 총 공세가 시작되자 그동안 매복해 움직이지 않던 왜구들이 물밀 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성계의 추측을 훨씬 뛰어넘은 엄청난 숫자였다. 이성계는 이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우전 20발과 유엽전 50발을 쏘아 일단 쏟아져 나오는 왜구들을 주춤거리게 하면서 마침내 휘몰아치는 바람을 등지고 비 오듯 화살을 퍼부어댔다. 이렇게 되자 광풍에 힘을 얻은 화살은 왜구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면서 우리 군사 앞에 그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갔다. 그러나 왜구들도 만만치 않았다. 물러서지 않고 세 차례나 기습을 감행 해왔다. 이처럼 왜구들의 기습은 집요한 것이었다. 급기야 벌어진 황산천의 대혈투 피아간에 얽혀 진흙에 뒤범벅되어 벌인 이 격전에서 끝내 일어선 자는 정작 우리 군사들뿐이었다. 말 그대로 대승이었다. 아! 중과부적으로 어렵게만 여겨왔던 이번의 싸움이었는데 천사에 따른 지세의 힘이 이처럼 클 줄이야...... 남정북벌로 산전수전 다 겪었던 백전노장 이성계로서도 처음 실감한 일이었다. 인풍리引風里, 남원시 동면 황산아래 자리한 이 마을은 그래서 당시전투에서 우리 군에 절대 유리한 바람을 불어준 곳이라는 뜻에서 인풍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달을 끌어온 곳 인월리引月里
인풍리 싸움에서 대패한 왜구들이 다시산위로 물러가 웅거한 채 요새만 굳게 지키고 있자. 이성계는 우리 군사들을 풀어 요해처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고 휘하 이대중 등 군사를 독려하여 왜구들을 사정없이 올려 쳤으나 사력을 다해 대항하는 왜구에게 오히려 쫒기어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실로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어려운 싸움이었다. 그 까닭은 이미 해는 서산에 기울어 날마저 어두워진데다 어떤 기발한 새 작전도 떠오르니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성계는 다시 ‘천제님이시어! 어서 동천에 달이 뜰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라며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를 했다. 쇠뿔은 단김에 빼야한다는 말처럼 승리의 여세를 몰아 왜구를 섬멸해야 할 판에 날이 저물어 버린다는 일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이성계의 간절한 기도는 하늘에 닿았던가. 대낮같이 밝은 달이 두둥실 떠오르는 게 아닌가. 하늘은 섬 도둑떼 보다는 우리의 고려를 우리의 이성계를 도운 것이다. 이성계는 동녘에서 덩그렇게 달이 돋자 군사를 정돈하고 진격나팔을 불어 총 돌격을 명하니 우리 군사들은 일시에 산 정상으로 기어올라 적진으로 치달았다. 피아간 백병전이 치열해지자 이성계는 아군을 진두지휘 하면서 진격을 독려했다. 이때 적장 하나가 창을 겨눈 채 이성계의 뒤로 달려들고 있었다. 마침 이를 본 장수 이두란이 큰소리로 “영공은 뒤를 살피시오” 하며 큰 소리를 치며 말을 달렸으나 이성계는 알아듣지 못했다. 미쳐 손을 쓸 틈도 없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명궁 이두란은 급히 활을 들어 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적장의 목을 명중시켰다. 이처럼 위급한 상황에서도 이성계는 의연히 싸움에 몰두하였다.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면 다시 말을 갈아타기를 여러 번, 급기야는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왜구가 쏜 화살이 이성계의 왼쪽 다리에 꽂히기도 했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고 박힌 화살을 뽑아 팽개치며 더욱 세차게 왜구들을 쳐나갔다.
숫자상으로도 월등히 우세한 왜구들이 이성계를 두어 겹으로 포위하여 위기일발의 어려움에 처했으니 이성계는 휘하 기병들과 저들의 포위망을 뚫고 그 자리에서 적 여덟 명을 베어 죽이니 왜구들도 더 이상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다. 이와 같은 이성계의 기개에도 불구하고 우리 장수들 역시 지쳐 있기는 왜구와 다름없어 승패는 여전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성계는 풍부한 지략과 용기로 용장다운 기백을 높이 떨치면서 결국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나갔다. 인월은 이처럼 때에 달이 올라 우리의 작전을 도왔던 관계로 전투가 이만큼이락도 이뤄질 수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부터 달이 올라왔던 황산의 동쪽을 인월리引月里라 불러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