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황산대첩 진군로 (7) 이성계의 승리로 고려사직보전
피로 넘친 ‘황청黃川 피바위’ 말없이 역사의 현장 지켜 제왕봉帝王峰과 권포리權布里 ... 대첩 기려 정도전이 명명
황산에서의 대첩
인풍리와 인월리에서 각각 바람과 달을 끌어내 수많은 왜구를 물리치면서 승전의 기반을 마련한 이성계였으나 막상 황산의 일대접전을 앞두고는 승리를 예측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하늘처럼 믿는 대장 아지발도가 아직 건재한데다 우리 측 군사들도 많이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 기필코 이겨야 하는 왜구와의 싸움을 목전에 둔 황산벌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정적이 흐르면서 병사들의 기장은 높아가건만 우리 측이나 왜구측은 피아간에 먼저 싸움을 걸지 않는다. 이때 천지를 뒤흔들 듯한 이성계의 포효가 무거운 정적을 깼다. “겁먹은 자들은 물러가라. 나는 싸우다가 적에 죽겠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는 나를 따르라”며 이성계가 비호같이 말을 몰아 적진을 향해 돌진해 나가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겁을 먹고 있던 우리 측 군사들은 이성계의 이러한 결연한 의지에 감동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용기백배해 죽을힘을 다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왜구의 사기도 만만치는 않았다. 나이 겨우 십 오 륙세 되는 소년장수 아지발도의 창을 막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아지발도阿只拔都 잡은 피 바위
백전노장 이성계는 그동안 갖가지 전투를 통해 얻은 경험에 비추어서 이번 황산 전투는 분명히 이길 것으로 확신했다. 따라서 그는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아지발도를 사로잡아 잘 달래면 좋은 인재로 써 먹을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이런 이성계의 내심을 들은 장수 이두란은 “아지발도를 생포하려면 우리 군사의 희생이 너무 클 것이므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 며 그냥 죽일 것을 주장했다. 이성계는 이두란의 이러한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전신을 투구와 갑옷으로 감싼 아지발도는 날래고 용맹해 활을 쏘아 죽일 수 있는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성계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두란에게 “그러면 내가 화살로 투구를 쏠 터이니 투구가 땅에 떨어지거든 그대가 곧 저놈의 목을 쏘라” 고 말하고는 곧바로 말을 몰아 내달리며 아지발도의 투구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이성계의 화살은 아지발도의 투구 꼭대기 한 가운데 끈이 떨어지면서 투구가 기우뚱하자 놀란 그는 투구를 황급히 고쳐 쓰려고 했다. 이두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비발도의 목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이두란의 화살은 아비발도의 목을 정확히 뚫었다. 펄펄 날던 아지발도는 입에서 폭포수처럼 시뻘건 피를 쏟으면서 백마에서 곤두박질 쳐 순식간에 시체로 변했다. 눈 깜작할 사이에 우두머리를 잃은 왜구들은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북을 울려 총 공격을 명령했다. 사기충천한 우리 군사들은 북소리를 천둥처럼 울리면서 우르르 달아나는 왜구들은 닥치는 대로 쳐 나갔다. 마치 수만 마리의 황소 떼가 울어대는 것처럼 처참히 울며 달아나는 왜구들, 실로 교만할 대로 교만했던 저들의 침략이 청산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죽은 왜구는 우리 군사의 거의 열배나 되었고 덕둔산과 지리산 쪽으로 달아나 살아난 왜구는 겨우 칠십 명에 불과했다.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였고 피는 황천을 가득 차게 흘러 칠일간이나 물을 마실 수 없었다. 천육 백 여필의 말과 산더미만큼의 병기와 수급을 노획했다. 생포된 왜장들은 잔뜩 겁을 먹은 채 이성계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대첩, 이것이 바로 고려의 사직을 보전함과 동시에 교만한 왜구를 통쾌하게 섬멸한 이성계의 황산대첩이었다. 이 치열한 전투 당시 강처럼 피가 넘쳐흘렀던 황천 가장자리 넓은 바위는 지금도 벌건 피를 머금은 채 ‘피바위’라는 이름을 달고 말없이 그 자리에 박혀 있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제왕봉帝王封 아래의 권포리權布里
황산벌 싸움에서 도원수 이성계를 제외하고 공이 가장 큰 사람은 외방출신인 이두란이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외방출신의 처명에 대하여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처명은 이성계가 1369년 12월 요동을 정벌할 때 사로잡은 장수로 처형하지 않고 살려 주었다. 이두란은 이성계의 관대한 처분에 깊이 감사한 나머지 그는 항상 이성계의 곁을 떠나지 않고 충성을 다하였는데 이번 싸움에서도 목숨을 바쳐 싸움으로써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아지발도 또한 용감무쌍한 소년장수였다. 그는 용기와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나이가 어린 탓에 두려움을 몰랐다.
아지발도에게는 출정하기 전부터 사랑하는 애첩이 있었다. 에지가 뛰어났던 그의 애첩은 아지발도의 다리를 붙잡고 말리는 애첩의 간청을 물리치고 끝내 출정 길에 나섰다. 이에 애첩은 통곡을 하면서“ 정 이번 출정을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면 저의 간곡한 소원을 들어 주옵소서, 부디 고려에 가시거든 제발 황산이라는 곳에 진을 치지 마옵소서, 장군님께서 크게 불리한 곳입니다.”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이러한 애첩의 부탁을 성가시게 여긴 아지발도는 장수들이 보는 앞에서 칼을 뽑아 애첩의 목을 쳐 죽이고 자신만만하게 고려 출정을 단행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전투의 승리는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 바로 한 전투를 이끄는 주장의 교만과 자중에서 그 성패의 갈림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여원치에서 만난 길할미의 지시를 겸허하게 받아들인 이성계는 승리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고 애첩의 지극한 간청을 잊은 아지발도는 스스로 이역만리의 객귀가 되었던 셈이다.
정도전은 이 대첩의 원인을 제천봉의 천제로 상징하여 제천봉을 태조봉太祖峰이라 불렀고 이곳의 기운을 얻어 널리 왕권을 잡을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봉 아래 마을 이름도 권포리權布里라 불러 지금도 그 이름이 그대로 불려오고 있다. 또 이성계는 황산대첩을 마친 그 이듬해에 황산에 들려 당시의 대첩은 자신의 노력만이 아니라 생사고락을 함께한 8원수 4종사라 하여 그 이름을 바위에 새겼다. 이를 어휘각이라 하여 황산대첩비지 서쪽 모퉁이에 전해져 오는데 다만 일제강점기 말에 일본인들이 뭉개버려 그 정확한 명단을 해독할 길이 없음이 아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