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영웅, 제주마-3
한국마사회는 전쟁이 나자, 경주마를 관리하기 힘들어 마주들에게 말을 가져가라고 통보했다. 주인이 없는 말들은 기수에게 넘기거나, 상인에게 헐값에 팔아버렸다. 상인이 가져가지 않는 말은 필요한 사람이 그냥 가져가 키우라고 말했다. 김혁문은 전쟁이 났다는 이유로 돌보던 경주마를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오염된 사료를 먹일 수가 없어 힘들지만 멀리까지 가서 사료를 구했다.
▲ 1950년 한국전쟁, 서울역 근처(사진:국가기록원)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서울 시민들은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김혁문의 가족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피난을 떠났다. 어디까지 피난을 떠나야 할지 몰라 말에 수레를 연결하여 끌고 하고 했다. 한강에 도착해 보니 물이 너무 깊어 가족들이 건널 수 없었다. 말이 건널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영등포 쪽으로 이동하여 말에 의지하여 겨우 한강을 헤엄쳐 서울을 벗어났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 1950년 부산 국제시장(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어린 말을 끌고 피난을 떠나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김혁문은 한편으로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다른 사람들은 걸어가는데 자기 식구들을 말에 의지하여 가끔 수레에 타고 가기도 했다, 힘들게 부산까지 내려온 김혁문 가족은 말과 같이 생활했다. 말을 이용해 부두에서 군수품을 하역하고 운송하며 돈을 벌었다. 유엔군은 1950년 6월 28일 참전을 결정하고 미군의 첫 파병부대인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가 한국에 도착해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대치하여 첫 전투를 하였다. 북한군은 8월 초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16개국 유엔군 병력이 부산항으로 도착해, 전선으로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 1950년 8월 6일 부산항 제1부두에 도착한 미군 병사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됐다. 서울이 수복됐다는 말에 사람들은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청산하고 서울로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10월 1일 유엔군은 삼팔선을 넘었다. 북한 정권은 전세가 기울어지자, 소련과 중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10월 19일 중공군 20만 명이 기습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1950년 12월 14일 유엔군은 삼팔선 이남으로 다시 남하하고, 함경북도에서 고립된 미국 제10군단은 피난을 희망하는 10만 명과 함께 흥남항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1951년 1월에 서울을 함락했다. 유엔군은 계속 밀려 시민들은 또다시 피난을 떠났다. 유엔군은 3월 15일에 서울을 재탈환했다. 37도 선에서 피아간에 지루한 고지 쟁탈전이 계속 이어지다가, 1951년 6월 23일 휴전회담이 개막되었다.
▲ 타이거 여단(군번도 없는 비정규 유격대원)
김혁문 가족은 한국전쟁의 전선이 확실치 않아 부산에서 계속 생활했다. 서울이 안정된다는 소식에도 전혀 반응이 없던 김혁문 청년은 차츰 시간이 흐르자 고향 집이 그리웠다. 가족들과 상의하여 부산에 피난 내려와 살던 작은 집을 다른 사람에게 팔고 서울로 갈 준비를 하였다. 부산을 떠난 지 며칠 안 지나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에 안타깝게도 여동생 김정숙이 길에서 지뢰를 밟아 다리를 다치는 큰 사고가 발생했다. 병원이 없었지만 어렵게 의사를 수소문해 수술을 받았다. 동생을 수레에 태워 계속 서울로 갔다.
1952년에 김혁문 가족은 여동생과 조랑말 아침 해를 데리고 밤이 어두워서 예전에 살았던 신설동 집으로 돌아왔다. 신설동은 조선왕조 한성부(漢城府) 동부의 숭신방(崇信坊)에 새로 지었다 하여 신설계(新設契)로 불렀다. 1896년 갑오개혁 때 동네 이름을 신설동으로 고쳤다. 동네 사람들은 새말, 신리(新里)로 고집스럽게 불렀다.
고향 집은 전쟁통에 다행히 불타지 않고 그대로 보전되어 있었다. 말을 집에 데리고 있다가 그대로 둘 수 없어 신설동 경마장을 찾아갔다. 신설동 경마장은 1951년 4월 미국 공군의 비행장으로 징발되어, 그동안 다쳐서 남아있던 말들도 모두 사라지고 문 출입이 어려웠다. 김혁문은 전쟁 중이라 수입도 별로 없어 고민했지만, 말을 굶길 수 없어 말을 끌고 다니며 일을 했다. 김혁문은 말을 집에 두고 같이 생활하기가 불편해 여러 가지 방안을 찾다가, 해가 뜨기 전에 제주마를 이끌고 경마장으로 몰래 숨어 들어갔다. 경마장에는 파손이 되지 않은 온전한 공간이 몇 군데 있었다.
▲ 지평전투(1951년 2월 13일~16일) 승리 후 만든 지평비행장
유엔군 비행기는 멀리 떨어져 있고, 군인들도 경마장 시설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김혁문은 말을 경마장 한쪽 구석에 몰래 숨겨놓고 자주 들락거리며 사료와 물을 주었다. 피난을 떠났다가 국군을 따라 일찍 서울로 돌아온 사람들은 신설동 경마장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신설동 경마장의 역사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김혁문은 힘든 노동 일을 마치면 꼭 경마장 마구간을 찾아 말의 상태를 돌보고 말을 쓰다듬고 안아주었다. 집에 올 때는 고맙다고 어루만져 주었다. 늦게 집에 돌아오면 어린 여동생의 발을 치료하고, 밥을 차려주고 말동무를 해주었다. 동생은 의족이 없이는 문밖에 다닐 수가 없었다. 방에서 하루 내내 기대어 있거나, 갓난아이처럼 벌레처럼 기어다녔다. 김혁문은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면서 빨리 여동생에게 제대로 된 의족을 사주고 싶었다.(계속)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