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에릭 페터슨(Eric Pederson) 해병대 중위 -2
에릭 페터슨 중위는 군용차를 동대문으로 몰았다. 길은 넓고, 도로에 차가 없어 금방 동대문에 도착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신설동 경마장을 물어보니 가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전쟁 중이라 경마장은 다 망가져 있고, 말은 몇 마리 없는데, 제대로 먹지 못해 뼈가 보이고 힘이 없어 보이는 병든 말뿐이었다. 신설동 경마장 말의 상태가 좋지 않아 운전병에게 부대로 돌아가자고 명령했다. 차를 타고 나오는데 멀리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에릭 페터슨 중위는 차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말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숨겨진 곳에 흰색의 발 3개를 가진 튼튼한 붉은 암말을 보았다. 황홀하게 멋진 말이 눈에 들어왔다. 말의 상태도 아주 좋았다. 말의 나이는 잘 모르지만, 다리가 아주 튼튼했다. 말의 주인을 찾으니, 사람들은 말 주인이 ‘김혁문’ 청년을 알려주었다. 주민들이 그려준 약도를 가지고 에릭 페터슨 중위는 김혁문의 집을 찾아 나섰다. 김혁문을 만난 에릭 페터슨 중위는 호주머니 속에 있던 개인 돈 250달러를 꺼내 손에 들고 전쟁에서 말이 꼭 필요하니 팔라고 통사정하고 손을 꼭 잡았다.
▲ 미 해병 1사단 마크 (사진: 미국 해병대박물관)
통역자는 미 해병 1사단 병사들의 어려운 전쟁 상황을 땅에 지도를 그려가며 청년에게 설명했다. 김혁문은 심장이 놀랐는지 갑자기 뛰는 것을 느꼈다. 에릭 페터슨 중위는 현재 말들이 전쟁으로 충분한 사료를 공급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말 관리는 더 어렵다는 점을 들어가며 설득했다. 청년은 말과 함께 부산까지 피난까지 다녀온 일을 말하고, 그동안 너무 깊은 정이 들어 말을 절대로 팔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에릭 페터슨 중위는 자기 부대원들의 희생이 너무 많아 양보가 어렵다고 말하고 청년에게 도와달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김혁문은 말과의 인연은 절대 끊을 수가 없는 하늘의 뜻이라고 해병 장교에게 그냥 가라고 사정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김혁문의 집안 사정을 잘 아는 동네 사람들은 군인이 이곳까지 직접 찾아와 부탁하는데, 들어주라고 편드는 사람도 있었다. 에릭 페터슨 중위는 돈을 건네며 집안도 돌보고 동생의 의족도 사라고 자꾸 권유했다. 김혁문은 다시 한번 깊은 고민에 빠졌다. 몇 년 전에 죽은 암말 아침 해와 다리를 다친 여동생의 얼굴이 동시에 머리에 떠올랐다. 동네 사람 중에는 멀리 타향에서 우리나라를 구하러 온 젊은 해병 장교를 꼭 도와주어야 한다고 크게 떠드는 사람도 있었다. 김혁문은 눈에 핏줄이 서고 눈물이 나 “미국 장교의 간곡한 사정을 이해는 하지만 말을 절대로 팔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에릭 페터슨 중위는 미 해병 1사단 5연대 2대대가 지키는 고지는 이번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이곳이 뚫리면 서울까지 위험해진다고 거듭 강조했다. 높은 고지에 이 말이 꼭 필요한데, 말을 못 구해가면 자기 부하 병사들이 모두 죽는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통역하는 사람은 김혁문 청년에게 지금은 북한군과 치열하게 총을 쏘고 대포로 싸우고 있으니 한번 양보해서 군인에게 말을 건네주자고 계속 설득했다. 김혁문은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용한 시간이 계속 지나갔다.
▲ 미 해병 1사단 5연대 2대대 마크(사진: 미국 해병대박물관)
날이 저물고 어둑해지자, 김혁문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에릭 페터슨 중위에게 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김혁문은 외국 군인들이 다른 나라에 와서 그것도 전쟁터에서 죽어간다는 말에 마음이 아팠다. 말을 계속 데리고 있고 싶지만, 상대방이 너무 불쌍하고 애절해 보였다. 마음이 조금씩 움직였다. 김혁문은 동생 다리에 의족을 해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젊은 군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혁문은 신설동 경마장으로 오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동안 좋은 풀과 사료를 구하러 돌아다니며, 말을 돌보던 일이 떠올라 눈물이 나왔다. 제주마는 사과와 당근을 좋아해 항상 싱싱한 당근을 사러 동대문 시장까지 갔었던 일이 생각났다.
더구나 멀리 부산까지 힘들게 피난을 갔다 온 말을 군대에 내보내 고생시키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전선으로 보낸다고 생각하니 공연히 슬프고 눈물이 나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웃 사람들은 김혁문에게 힘을 내라고 말했다. 김혁문은 에릭 페터슨 중위에게 말고삐를 넘겨주고 경마장을 남몰래 빠져나왔다. 에릭 페터슨 중위는 말할 뜸도 주지 않고 그냥 가버린 김혁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당근 특식
경마장에서 어렵게 말을 구했지만, 부하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부대까지 말을 데리고 갈 일이 정말 깜깜했다. 날은 어둡고 운송할 방법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말을 끌고 부대까지 갈까 하다가, 가만히 생각하니 거리가 너무 멀었다. 더구나 저녁 늦은 시간에 말 운송차를 구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지근지근 아팠다.
다음날 에릭 페터슨 중위는 서울 시내에서 말을 운반할 수 있는 화물차를 파악했지만, 쓸만한 차량이 없었다. 용산역 주변의 군부대를 직접 찾아다니고, 화물을 적재하는 트레일러를 찾아 청량리역 골목을 배회했다. 남대문 시장 입구에서 작은 트레일러를 보았다. 지붕이 없는 트레일러는 자재 운반용 트레일러였다. 에릭 페터슨 중위는 트레일러 주인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였다.
에릭 페터슨 중위는 작은 트레일러에 과연 말을 실을 수 있을지 시험을 먼저 해보고 싶었다. 상인은 실험을 허락했다. 경주마는 처음에 트레일러를 보고 겁을 잔뜩 먹었지만, 주인인 김혁문이 다시 나타나자, 용기를 내 트레일러에 올랐다. 에릭 페터슨 중위는 트레일러를 가진 상인에게 돈을 주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해병 장교는 말을 판 청년 김혁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시간이 없어 곧바로 서둘러서 신설동 경마장을 떠났다.
▲ 1950년대 동대문(사진:서울역사박물관)
신설동 경마장을 출발한 에릭 페터슨 중위 일행은 차량 속도를 올리지 못하고 기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나아갔다. 트레일러에 오른 제주마는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시가지를 구경했다. 평소에 보던 길인데 조금 이상했다. 아침 해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지만, 자기를 좋아하고 아끼던 김혁문이 안 보여 조금 불안했다.
말을 실은 트레일러는 천천히 종로와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 서대문으로 향했다. 도로에 있는 사람들과 아이들이 천천히 가는 말이 신기해 자꾸만 따라왔다. 아침 일찍 출발한 말은 어느새 높은 고개가 보이는 독립문 앞에 도착했다. 에릭 페터슨 중위는 잠깐 쉬어가자고 하면서 고민했다. 말을 걷게 하는 방법이 좋을지, 그대로 말을 태운 채 고개를 넘어가는 게 좋을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한참 생각하던 에릭 페터슨 중위는 고개가 너무 높고, 흙길에 좁고 울퉁불퉁하여 위험하다고 판단하였다. 무엇보다 말을 안전하게 수송하기로 하였다.
▲ 트레일러와 제주마 (사진: 미국 해병대박물관)
에릭 페터슨 중위는 잠시 쉬는 동안에 통역자에게 고개 이름을 물었다. 통역자는 무악재에 대하여 아는 대로 유래 및 안산과 인왕산을 설명했다. “무악재는 개성과 의주로 가는 길로 고개가 너무 높아 사람들은 모두 몇 번씩 쉬어서 넘었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도 무학대사와 함께 이 고개에서 광활한 남쪽 땅을 보고 도성을 구상했다. 청나라 연경으로 가는 사신들은 이곳이 말 안장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이 고개를 길마재로 불렀다.
우리나라에는 말(馬)과 관계되는 지명이 마산 등 774개나 되고, 풍수지리에서도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상을 갈마음수(渴馬飮水) 형국이라 하여 좋은 생활 터전으로 여겼고 주변에 집터를 잡았다.”라고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통역자는 군사 지도에서 부산 옆에 있는 마산(馬山)과 전북 마이산(馬耳山)을 가리켰다. 에릭 페터슨 중위는 저 고개만 넘어가면 이제 힘든 고개는 없는데 하면서 고개 옆에 있는 우뚝 솟아있는 안산(鞍山, 296m)과 인왕산(338m)을 연속 쳐다보았다.
▲ 서대문 무악재(사진:정부기록사진집)
에릭 페터슨 중위는 김혁문 마주(馬主)가 미리 챙겨준 싱싱한 당근과 사과를 어린 제주마에게 주었다. 아침 해는 당근을 먹으면서 주인 김혁문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머리를 계속 흔들었다. 오랜만에 맛있는 당근을 먹은 제주마는 군인을 따라서 무악재를 넘어갔다.(계속)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