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바다 전초 전투(Nevada Outpost Battle)-1
1953년 미 해병 제1사단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매현리 부근 네바다 전초 고지를 지키고 있었다. 3월 26일 밤에 중공인민의용군(PVA)은 미 1군단의 주요 저항선인 제임스타운 선 북쪽에 있는 미 해병 제1사단 5연대의 전초 기지를 기습 침공해 베가스 전초, 레너 전초를 쟁취했다. 유엔군은 즉각 중공인민의용군을 격퇴하는 네바다 전초 전투(Nevada Outpost Battle, 1953.3.26.~30)를 시작하였다.
▲ 제임스타운 선(The Jamestown Line, 1953.3.31)(사진:WikipediA)
제임스타운 선(The Jamestown Line)은 문산리 근처 임진강에서 시작하여 황해도 연안의 김포 반도에서 금화 동쪽 지점까지 중요한 전선 구역으로 약 56km(35마일)의 아치 모양을 하고 있다. 이 경계선은 1951년 5월과 11월 사이에 UN군 반격 중에 38선 바로 북쪽인 코만도(Commando) 작전 중에 설정되었다.
미 제1군단이 담당한 이 구간은 서울과 불과 약 48km로 아주 가까워 미 해병1사단, 미 제3사단, 미 제25보병사단, 한국군 제1사단. 영연방 제1사단 등 유엔군단과 사단이 모두 투입된 곳이다, 이곳에서는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사될 때까지 계속 전투가 벌어졌다.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한 폄의 땅을 더 차지하려고 사미천 강(Samichon River) 전투를 포함해 여러 곳에서 동시에 전투가 벌어졌다.
▲ 제1해병비행단의 중공군 57고지 폭격(1953년 2월 3일, 사진: 미국방부)
만일에 중공인민의용군(PVA)이 네바다 전초를 모두 확보하면 남쪽 상당히 먼 곳까지 모두 관측당해 군사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유엔군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네바다 전초를 지켜야 했다. 절대적으로 물러설 수 없는 진지였다.
유엔군 총사령관은 네바다 전초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유엔군은 해병 제7연대 1개 대대를 추가 투입하고, 공군과 포병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역습을 가했으나 상실한 전초를 탈환하는 작전에 실패하였다.
유엔군 지휘부는 레노 전초의 탈환을 보류하고, 1차 공격 목표를 베가스 전초 탈환에 힘을 집합하여 베가스 전초를 마침내 탈환했다. 베가스 전투에서는 손실이 너무 컸다. 엘코와 카슨 해병대원들은 진지를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텼다. 상부에서는 빼앗긴 베가스 고지를 다시 탈환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미 해병 제1사단 5연대 제2대대의 존 멜빈 대위는 D 중대를 지휘했는데, 2시간도 안 돼 해병대원 16명이 죽었다. E 중대도 피해가 막심했다. 중공군 제120사단이 퍼붓는 포탄은 1분에 약 500발로 엄청난 포탄이 베가스 전초에 쏟아졌다. 3일간 미 해병 제5연대는 중공군 제120사단, 중공인민의용군(PVA) 병사들과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전투를 치렀다.
야간 전투에서 중공군의 백린섬광탄이 가까이에서 터졌을 때는 에릭 페터슨 중위는 방탄조끼를 벗어 네플리스 병사의 눈을 가려주었다. 말은 오랜 시간 침착하게 참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말은 다시 고지를 향해 놀랍게 올라가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미 해병 병사들도 제대로 하기 힘든 야간 임무를 말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수행하는 것을 보고 해병들은 모두 감탄했다.
▲ 중공군의 백린 섬광탄(사진: 미 국방부)
수송 작전을 완벽하게 한 다음 날 3월 28일에는 참호 30m 거리에서 백린 연막탄이 터졌는데, 레클리스 병사는 이때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중공군은 한국전쟁에서 백린탄을 많이 사용했다. 백린탄의 사용 목적은 보병이 접근하거나 집결하지 못하는 억제력이 있었다.
백린은 촛농처럼 피부에 늘어 붙어 심한 화상을 일으켰다. 백린은 신체의 지방층을 녹이고 들어가 사람이나 동물을 죽이는 맹독성 물질이다. 백린이 사람의 피부나 점막에 노출되면 수분을 빼앗겨 피부 조직이 모두 무너지거나 괴사한다, 백린탄이 터지면 해병대원들은 말을 데리고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했다.
해병 5연대 군의관은 수시로 말의 심리와 상처를 확인했다. 동물은 공격당하면 무서워 도망치거나 숨어버리는데, 레클리스 병사는 전혀 달랐다. 강인한 제주마의 특성을 레클리스 병사는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했다. 해병대원들은 오히려 말의 침착함과 인내심을 배우며 함께 전투를 수행했다.
▲ 레클리스 병사가 탄약을 수송한 전초 기지(사진: 미 국방부)
미국 해병대의 군마 레클리스는 어려운 전투 상황 속에서 홀로 불굴의 해병 정신을 실천했다. 말은 어려운 악조건, 잔혹한 조건에서 탄약을 수송했다. 말의 진정한 친구이자, 전투 훈련사 조셉 라담 병장은 말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항상 조마조마했다. 포탄을 장전한 말은 논을 가로질러 야산으로 향했다.
소총 사격장까지의 거리는 1,800야드가 넘었다. 말은 폭약이 쏟아지는 곳을 통과하고 있었다. 소총 사격장으로 가는 마지막 등반 길은 45도 각도였다. 가파른 길 때문에 조셉 라담 병장은 처음에 6라운드만을 실어 보냈다. 정상까지는 조련사 라담 병장, PFC 케리, 그레이그, 먼로 콜먼 해병대원이 자원하여 레클리스 병사와 5번 동행했다. 그러나 군마가 길을 제대로 찾아간 이후에는 동행자 없이 레클리스 병사 혼자 다녔다.
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주 김혁문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갔었다. 부산 피난 시절에 부산항 부두에서 일하다 높은 산등성이에 있는 집을 찾아갔다. 김혁문은 아침 해를 보고 집에 가라고 손짓하면, 아침 해는 혼자서 집을 잘 찾아갔다. 이렇게 경험이 쌓은 레클리스 병사는 전쟁터에서도 고지 훈련을 잘 소화하고 완수했다.(계속)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