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바다 전초 전투(Nevada Outpost Battle)-2
▲ 한국전쟁 피난 시절 부산 산등성이 집(사진:국가기록원)
한번은 레클리스 병사가 대원 12명이 겨우 짊어지는 통신선을 혼자서 운반했다. 교전하다 다친 병사를 보면 살며시 다가가 병사를 도왔다. 레클리스 병사는 이것을 배운 적이 없었다. 다친 병사를 등에 태워 의무대까지 싣고 내려왔다. 해병대 의무대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생기자 너무 신기해 사진을 찍어 기록했다.
군의관은 전에 레클리스 병사가 다쳤을 때 군의관이 말을 치료해 준 것을 말이 기억해 내고 다친 병사를 등에 태워 의무실로 데려오지 않았나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하였다. 부상병을 실어 나르는 일은 조셉 라담 병장이 절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이런 사연으로 레클리스 병사는 부대원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다.
레클리스 병사는 전투에서도 매우 신속하게 움직였고, 해병대원들이 필요한 것을 알아채고 재빨리 보급했다. 매우 치열한 전투였지만, 레클리스 병사의 큰 활약 덕분에 미 해병 5연대는 전초 기지를 확보하고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중공군의 대공세가 끝나자, 미 해병대는 승리를 자축했다. 당시 참전했던 병사는 “레클리스가 말없이 총탄을 뚫고 생명과 같은 탄약을 날라주는 모습에 모두가 감동했다. 이는 적을 물리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작전상 진지 전환이 어려워졌다. 미 해병이 주둔한 진지 주변에 무지막지한 중공군의 박격포와 실탄 사격이 이어졌다.
레클리스 병사에 등에 탄약을 실어 보내는 병사들은 이번이 말의 마지막 임무라고 항상 두렵게 생각했다. 그래서 탄약을 등에 올려줄 때마다 말을 만지고 안아주었다. 마치 인디언 추장이 멀리 전투를 떠날 때 말에게 했던 의식을 행하는 것과 같이 엄숙하게 말을 대했다. 생환 의식을 하면 말을 틀림없이 돌아온다는 믿음으로 말을 어루만졌다. 그러면 말은 약속대로 임무를 마치고 안전하게 돌아왔다. 정말 놀라운 기적의 연속이었다.
네바다 전초 전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병사는 신문 기자와의 대담에서 “무반동총 1개당 약 11kg에 달한다. 탄약을 2~3개씩 고지에 운반하는 건 쉽지 않다. 제주말은 미 해병대원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전장에서 레클리스 병사는 등에 4개의 탄약통을 메고 산 아래부터 정상까지 오르내렸다. 정기적으로 75mm 포탄 10발을 운반했다. 무게는 220파운드이다. 무게로 확산하면 약 100kg에 육박한다.
중공군이 3번의 공세를 취할 때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는 진지를 끝까지 방어했다. 5일간 전투에서 중공군은 1,300명 전상자가 나왔다. 미 해병대는 118명이 전사하고, 실종 98병, 중경상자 800명이 후송되었다. 한국 해병대는 26명이 전사, 97명이 부상자가 후송되었다.
▲ 튀르키예 여단 병사(사진:구글)
베가스 전초 전투는 역사에 남을 만한 피의 전투였다. 완전히 “피로 지킨 고지”라고 미국 해병대 전투사에 기록되었다. 많은 문헌에서 네바다 진지의 전투는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힘든 전투였다고 기록했다. 네바다 베가스 전투에서 해병대 1사단 5연대 전체 병력의 70%의 손실을 보았다.
전투가 종료된 후 1953년 4월 4일에 미국 제25보병사단 소속의 튀르키예 여단으로 병력을 교체하였다. 새뮤얼 탱커슬리 월리엄스 미 제25보병사단은 5월 5일 시리 아카르 준장이 이끄는 튀르키예 여단에 네바다 콤플렉스와 인근 전초 기지인 베를린과 동베를린의 방어 책임을 맡겼다.
튀르키예 여단이 마주한 지역에는 중국인민의용군 3개 연대로 제120사단 358연대, 359연대와 제46군단 360연대였다. 중국인민의용군은 라스베이거스, 엘코, 카슨 전초에 대규모 공격을 준비했다. 1953년 7월에도 중공인민의용군은 네바다 전초기지를 뺏기 위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미 해병대 지상군 병력은 1953년 1월 1일부터 동년 7월에 전투가 끝날 때까지 25,000명에서 28,000명 사이를 항상 유지했다. 미 해병대 1사단은 3개의 유기 보병 연대인 1, 5, 7 해병대 포병 연대, 11 해병대 및 기타 전투 및 지원 요소가 사단 또는 그 구성 요소를 통제하는 삼각형 개념을 고수했다. 전투는 탱크, 박격포 및 기타 무기를 사용했으며, 지원 부대는 트럭 또는 수륙양용 트랙터를 통한 수송, 통신, 공병, 정찰 및 화물 처리를 맡았다.
미 해병 제1사단에서 베가스 전투의 영웅들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했을 때, 레클리스는 중대원들과 함께 사열대를 통과했다. 행사를 마치자 다른 중대 해병 전우들이 레클리스 병사를 만나러 왔다. 미국 신문 특파원 기자들도 배가스 전투의 숨은 영웅인 레클리스의 사진을 찍어갔다. 정전회담이 시작되고 종결되어 전쟁이 끝났다.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미 해병들은 여전히 최전선 고지를 지켰다.
미 국방부 대변인이 팬타건(Pentagon) 프레스센터에서 한국전쟁 정전회담에 대한 정례 언론 브리핑을 마치고 신문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 공세를 받았다. 신문 기자가 국방부 대변인에게 미 해병 제1사단 소속 레클리스 병사의 근황을 질문했다. 국방부 대변인은 “제주마 레클리스 병사는 국방 예산으로 공식 절차를 받아 구매한 말이 아니다. 한국전쟁에서 개인이 필요해서 구한 말이다. 공식적으로 군마로 기록되지 않았다. 한국에 남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 미 해병대 레클리스 병사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신문사 기자가 국방부 대변인의 발언은 “해병은 누구도 버리지 않는다. 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이라는 미국 해병대의 오랜 관습과 전통을 무시하는 처사이다.”라고 말했다. 기자의 질문과 미 국방부 대변인의 공식 발언이 처음으로 미국 신문에 보도되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