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강원도
◎ 원주목(原州牧)
사(使) 1인, 판관(判官) 1인,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 1인.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두었고, 고려 태조(太祖) 23년 경자(庚子;晉나라 高祖 天福 4년)에 원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 무오(戊午;宋나라 眞宗 天禧 2년)에는 지주사(知主事)를 두었고, 고종(高宗) 45년 무오(南宋 理宗 寶祐 6년)에는 원주에서 왕명을 거역한 일로 인하여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했는데, 원종(元宗) 원년 경신(南宋 理宗 景定 元年) 지원주사(知原州事)로 회복하였다. 10년 기사(己巳;南宋 度宗 咸淳 5년)에 위사공신(衛社功臣) 임유무(林惟茂)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정원 도호부(靖原都護府)로 승격하였고, 충렬왕(忠烈王) 17년 신묘(元나라 세조 지원 28년)에는 합단(哈丹)의 난리를 당하여 굳게 지켰으므로, 익흥 도호부(益興都護府)로 고쳤다. 충렬왕 34년 무신에 원주목(原州牧)으로 승격하였고(元나라 武宗 至大 元年), 충선왕(忠宣王) 2년 경신에는 강등하여 성안부(成安府)로 하였다.(至大 4년) 공민왕(恭愍王) 2년 계사(癸巳)에 태(胎)를 주의 땅 치악산(雉岳山)에 안치하고, 다시 원주목으로 회복하였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별호는 평연경(平演京), 또는 평량(平涼)이라 한다.(淳化 때 정한 것이다) 속현(屬縣)이 1이니, 주천(酒泉)은 본래 고구려의 주연현(酒淵縣)인데, 신라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내성군(柰城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顯宗) 9년 무오에 원주 임내에 이속(移屬)하였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별호는 학성(鶴城)이라 한다.
명산(名山)은 치악(雉岳; 州 동쪽에 있는데, 봄·가을에 香祝을 내려 제사지내기를 小祀로 한다)·거슬갑산(琚瑟岬山;주천현 북쪽에 있는데, 그 고을 관원이 제사지낸다)·사자산(師子山)이다.(주천현 동북쪽에 있다) 대천(大川)은 섬강(蟾江)이다.(州 서남쪽에 있는데, 興原倉이 있는 곳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평창군(平昌郡)에 이르기 84리, 서쪽으로 경기도 여흥(驪興)에 이르기 64리, 남쪽으로 충청도 충주(忠州)에 이르기 20리, 북쪽으로 횡성(橫城)에 이르기 24리이다. 호수(戶數)가 1천 1백 48호요, 인구가 3천 2백 33명이다. 주천현의 홋수가 1백 63호요, 인구가 2백 80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백 84명이요, 선군이 82명이다. 토성(土姓)이 6이니, 원(元)·이(李)·안(安)·신(申)·김(金)·석(石)이요, 망래성(亡來姓)이 1이니, 최(崔)요, 속성(續姓)이 1이니, 조(趙)이다.(횡성에서 왔는데, 鄕吏이다) 주천의 성이 3이니, 조(趙)·윤(尹)·노(盧)요, 망래성(亡來姓)이 2이니, 왕(王)·동(童)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강(康)이다.(晉州에서 왔는데, 鄕吏이다) 없어진 우도곡 부곡(又刀谷部曲)의 망성(亡姓)이 2이니, 채(蔡)·윤(尹)이요, 없어진 소을탄소(所乙呑所)의 성이 1이니, 지(池)이다. 인물은 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 원충갑(元冲甲)이다.(충렬왕 때 사람이다)
땅이 메마르며, 간전(墾田)이 7천 5백 56결이요(논이 5분의 1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뽕나무·삼·배·밤·닥나무·칠이다.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잣·지초·시우쇠·느타리·북나무충영·사슴포·여우가죽·삵괭이가죽·노루가죽·수달피·표범꼬리요, 약재는 오미자(五味子)·바디나물뿌리[前胡]·궁궁이[芎藭]·승검초뿌리[當歸]·모란뿌리껍질[牧丹皮]·나팔꽃씨[牽牛子]·측백나무열매[栢子仁]·복령(茯苓)·복신(茯神)·대왕풀[白芨]·쥐꼬리망초뿌리[蓁芃]·다린송진[白膠香]·북나무진[安息香]·인삼(人蔘)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주(州) 서쪽 50리 탑전리(塔前里)에 있다.(下品이다)
영원산 석성(靈原山石城)이 주(州) 동쪽 30리에 있다.(둘레가 6백 46步이며, 샘이 2가 있는데, 四時에 마르지 아니하며, 또 창고 9칸이 있다) 역(驛)이 5이니, 단구(丹丘)·신림(神林)·안창(安昌;본래 安壤)·유원(由原;본래 幽原)·신흥(新興;주천현에 있다)이다. 각림사(覺林寺;치악산 동쪽에 있는데, 고을에 가기 40리이다. 禪宗에 붙이었고, 전지 3백 結을 주었다. 우리 太宗이 潛邸 때 글을 읽던 곳이다. 일찌기 횡성에서 무예를 연습하다가, 이 절에다 輦을 머무르고, 옛 늙은이들을 불러서 위로하고, 절에 밭과 민호를 주고, 주의 관원으로 하여금 도와주게 하였다.) 흥법사(興法寺;州 서쪽 30리에 있다. 절에 비가 있는데, 고려 太祖가 친히 그 글을 짓고, 崔光胤이 당나라 태종 황제의 글씨를 모아서 돌에 새기었다. 益齋 李齊賢이 일찌기 말하기를, “글뜻이 웅장하고 깊고 크고 고와서, 검은 홀[玄圭]과 붉은 신[赤舃]으로 廊廟에서 揖讓하는 것 같고, 글자의 크고 작은 줄이 서로 맞아서, 난새가 까맣게 뜨고 봉황이 깃들이어, 기운이 우주를 삼키는 듯하니, 참으로 천하의 보배라” 하였다.)
월경처(越境處)는 충청도 제천현(堤川縣)의 서쪽 가질문촌(加叱文村)과 원은촌(原犭犬 村) 등 2촌이 15리쯤 주(州)의 남쪽 지경에 들어와 있고, 경기 지평현(砥平縣)의 동쪽 죽장촌(竹杖村)과 북평촌(北坪村)·거질단(居叱丹)·송현(松峴) 등 4촌이 15리 쯤 주(州)의 서쪽 지경에 들어와 있다. 관할[所領]은 지군사(知郡事)가 1이니, 영월(寧越)이요, 현(縣)이 2이니, 횡성(橫城)과 홍천(洪川)이다.
【원전】 5집 677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