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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울릉군 기독교 100년사
◈ 제 1 장 기독교의 전래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카톨릭이 들어온 연대를 1784년으로 정한다. 그 이유는 한국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은 해가 1784년이기 때문이다. 카톨릭은 1884년에 알렌(Horace N. Allen)이 입국함으로 시작되는 개신교보다 1세기나 앞서서 한국에 들어온 셈이 된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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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군 기독교 100년사
제 1 장 기독교의 전래
 
 
 

1. 카톨릭교의 전래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카톨릭이 들어온 연대를 1784년으로 정한다. 그 이유는 한국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은 해가 1784년이기 때문이다. 카톨릭은 1884년에 알렌(Horace N. Allen)이 입국함으로 시작되는 개신교보다 1세기나 앞서서 한국에 들어온 셈이 된다.
 
그러나 이승훈 이전의 카톨릭 전래에 대해서 몇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첫째는 네스토리안(Nestorian)의 전래를 생각할 수 있다. 숭실대학교에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세운 기독교사학자 김양선(金良善) 목사는 그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 경교(景敎)의 유물이 압록강 맞은편에 있는 안산(鞍山)에 있고, 또 일본 서기(西紀)에는 당(唐)에 유학갔던 홍법대사(弘法大師)가 귀국할 때 경교 승려를 데리고 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당시 당나라와의 접촉이 일본보다 신라가 더 많았는데 일본에 간 경교가 우리나라에 먼저 들어왔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양성(兩性)을 너무도 명확히 분리한 때문에 에베소 총회(431년)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안파는 동방선교에 주력하여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당나라에 들어왔다. 또한 경교가 우리나라에 들어 온 물적 자료로 1956년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에서 그가 수집한 동 십자가와 마리아상, 불국사에서 얻은 돌 십자가(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 소장)와 금강산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大秦은 로마의 한문 표기임)를 들고 있다.
 
둘째는 고려시대에 몽고로부터 접촉이 있었다고 본다. 민경배(閔庚培) 교수는 루부르크(Guillaume de Rubruc-羅柏魯)가 1253년 콘스티노플을 떠나 몽고의 서울 칸바리크(和林)에 왔고 몽고가 일본을 침략할 때 고려에 막대한 군비와 선박을 건조하게 했는데 루부르크는 그 때에 압록강까지 와서 보고 들은 것을 교황청에 보낸 기행문에서 고려를 카울레(Caulei, 高麗)라고 썼다고 한다.(영어로는 Korea로 쓰이게 됨)
 
셋째는 임진왜란 때 일본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와의 접촉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592년 도요토미(豊臣秀吉)는 임진란을 일으켜 가또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 등 장수와 휘하 25만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그 군사들 중에는 최소한 10%가 천주교 신자이었으며, 도요토미가 임진란을 일으킨 이유 중의 하나도 천주교에 대한 증오와 일본의 천주교인을 전쟁을 통해 없애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과연 그들 중 상당수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였고 비참하게 죽은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일본 장수 고니시 유끼나가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그의 휘하에는 그를 종군한 포르투칼 예수회 소속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는 우리나라 땅을 밟은 최초의 성직자였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본군이 철수할 때 한국인 포로를 석방시키는데 노력하고, 또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방문 전도하여 회심자의 수가 수백에 이르고, 순교자가 25명, 시복자(諡福者)가 9명을 헤아렸다고 한다.(오윤태 목사, 日本基督敎交流史)
 
또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에 이수광(李睟光)은 그의 저서 지봉유설(芝峯類說) 가운데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1595년 중국 남창에서 출판)라는 책을 소개하였다. 그 후 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 같은 실학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하였고 사상적으로는 오히려 비판적이었고 아직 신앙심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넷째는 조선 인조(仁祖) 때에 청나라의 침공을 받은 지 겨우 45일 만에 우리는 청나라에 항복하였고 그들의 요구대로 군신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소현세자(昭顯世子),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화의(和議)를 거부했던 김상헌(金尙憲) 최명길(崔明吉) 등이 볼모로 청나라에 보내졌다. 이들 볼모는 처음에 만주지방으로 갔다가 1644년 명나라를 정복하고 왕도를 북경으로 정하면서 다시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천주교에 관해서 공식적으로 처음 접촉을 가진 사람은 소현세자(昭顯世子)였다. 이 때에 소현세자가 접촉한 성직자가 아담 샬(Johann A. Schall) 신부였다. 소현세자는 천문학과 역학 그리고 교리를 이야기 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익히게 되었다.
 
1645년 청나라 황제가 소현세자를 조선으로 돌려보내면서 환관 5명과 궁녀를 딸려 보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였다. 뿐만 아니라 세자의 귀국 소식을 들은 아담 샬 신부는 천문학, 산학(算學)에 관한 책과 지구의(地球儀) 그리고 천주교에 관한 여러 가지 책과 성물(聖物)을 주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소현세자가 귀국한 후 70일 만인 1644년 2월 18일에 학질로 병사하자 조정에서는 청국에서 가지고 온 물건 때문이라고 하여 이들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천주고 전파의 좋은 기회는 이렇게 해서 또다시 허망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 정조(正祖) 때에 이르러 실권한 남인들을 중심으로 신앙운동에 열을 더하게 되었다. 정조 7년(1783년)에 이승훈(李承薰)이 동지사 겸 사은사로 가는 황인점(黃仁點)의 서장관인 부친 이동욱(李東旭)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이듬해 1784년 예수회 소속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한국의 주춧돌을 놓는다는 의미에서 베드로(Peter)라는 영세명을 갖게 된 후로부터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1784년 3월 24일 이승훈은 수십종의 교리서와 십자 고상(苦像), 묵주 등 성물 뿐 아니라 선진국의 각종 사상서, 수리론 등을 푸짐하게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 이익(李瀷)의 문하에 있던 이승훈(李承薰), 이벽(李蘗), 이가환(李家煥),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권철신(權哲身), 권일신(權日身) 등 남인의 명사들과 중인 계급인 김범우(金範禹) 같은 인물이 섞여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가 유교적인 제사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논란의 대상이 되던 중 1785년에는 국가에서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금령을 내리게 되었다. 또한 정조 15년(1791년)에 전라도 진산(현재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신주(神主)를 불태운 윤지충(尹持忠)을 사형에 처함으로 말미암아 천주교는 더욱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1795년 1월 몰래 입국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국가에서는 강력하게 단속함으로 말미암아 1791년 신해교난(辛亥敎難) 1801년 신유교난(辛酉敎難)과 1839년 기해교난(己亥敎難) 1846년 병오교난(丙午敎難) 1866년 병인교난(丙寅敎難)등 무서운 박해가 계속되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의 씨앗은 이렇게 해서 심어진 것이며 그 후의 발전상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다.
 
 
 

2. 기독교와의 접촉

 
1627년 화란(네덜란드) 사람 벨테브레(J.J.Weltevree)가 1626년 홀란디아호 선원으로 극동지방에 왔다가, 1627년(인조 5년) 우베르케르크호로 바꾸어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도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했다. 동료인 히아베르츠, 피에테르츠와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고 경주에 상륙하였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1628년 서울로 압송되어 조선에 거주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외국인은 고국으로 갈 수 없는 법에 따라 조선인으로 살면서 박연(朴燕)이라는 이름으로 관리로 지내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1653년 제주도에 상륙한 하멜(Hendrick Hamel) 일행 33명이 제주도에 표류되어 조선에서 13년간 억류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프로테스탄트 신자로서 그 중에 8명이 탈출하여 1668년 7월 20일 화란의 암스텔담에 도착한 후 「표류기」와 「왕국 기행문」을 출판하였는데 이것이 역사상 유럽에 최초로 한국(Coerre로)을 소개 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받고 있다.
 
1816년에는 영국에서 중국으로 파견한 사절 아머스트(Amherst) 경을 호위하고 중국에 왔다가 조선 서해안 해도(海圖) 작성의 임무를 띠고 내항하였던 영국 군함 알세스트(Alceste)호의 함장 막스웰(M. Maxwell) 대령과 리라(Lyra)호의 함장 바실 홀(Basil Hall) 대령 등이 비인만 앞에 정박했을 때 문정을 위하여 배에 올라갔던 마량진 첨사 조대복(趙大福)에게 성서를 전해 주었는데 이것이 성서의 한국 전래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바실 홀(Basil Hall)은 이 과정에서 탐험을 기록한 「한국 서해안 및 류큐제도(琉球諸島) 발견 여행담」을 1818년 발간하였다.
 
어쩌면 하멜 「표류기」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일로서 1832년 서해안을 방문한 화란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 구츨라프(Karl. F. A. Gutzllaff)는 한국 땅에 최초로 발을 디딘 선교사로서 한문 성서를 대량으로 전파한 최초의 전도자이며 한글 성서(주기도문) 번역을 처음으로 시도하여 「한국의 위클리프」라 일컫기도 한다.
 
 
 

3. 국외로부터의 선교시도

 
기독교의 첫 한국의 선교의 시도는 독일 루터파 선교사로 1832년에 내한했던 귀츨라프가 내한 첫 선교사로 알려져 있다. 그 후 화란, 영국인 등에 의한 접촉이 있었고, 보다 직접적으로 한국교회의 형성에 기여한 선교부는 만주지방에서 선교하였던 스코틀란드 연합 장로교회 선교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1872년 중국선교사로 파송된 존 로스(John Ross. 羅約한) 멕킨타이어 (McIntyre, 馬勤泰) 등은 만주지방에서 한국인에게 첫 세례를 베풀었고,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882년에 최초의 한글성경, 곧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백홍준, 서상륜에 의해 1883년부터 매서전도가 시작되었다. 1887년에는 첫 한국어 신약성경본인 [예수셩교젼서] (Ross Version)가 간행되었다. 스코틀란드 연합장로교 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으므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한국선교를 시도하였던바 후일의 한국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여러 접촉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개신교의 한국 선교는 1880년대 이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장로교회의 경우 1884년 이래로 미국의 북장로교(1884), 호주 빅토리아장로교(1889), 미국남장로교(1892) 카나다장로교회 (1897)를 통해 선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들 4대 장로교 선교부는 1893년 선교부간의 연합체인 '선교사 공의회'를 조직했는데 이들은 상호 협의와 합의를 거처 선교지역을 분할하였다. 이 분할안을 보통 '예양협정' (Comity Arrangement)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선교부간의 인적, 재정적 낭비를 막고 단시일안에 한국을 복음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미국 북장로교는 재령, 강계, 평양, 서울, 청주, 안동, 대구 등 평안도, 황해도 경상북도 지역을 맡게 되었고, 미국 남장로교는 전주, 군산, 목포,광주, 순천 등 전라도와 충청도 일부 지방을 맡았다. 또 카나다장로교(후에 카나다연합교회)는 함경도지방과 간도지방을 선교구역으로 하였다.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선교부는 호주 장로교선교부(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로 불리었는데 이들은 부산과 경남지역을 선교구역으로 하였다. 그래서 진주지방은 호주 선교부의 관할지역이 되었고 호주 선교부에 의해 이 지방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1) 중국을 통한 선교

 
이 당시 유럽과 미주(美洲)에서 고조된 선교 열기는 극동의 은둔국인 한국을 향하여 도처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구츨라프 등의 탐방이 성과 없이 끝났으나 그 후 33년만에 영국의 용감한 사람에 의하여 이 침묵은 깨뜨려지고 말았다. 그가 바로 영국 회중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의 후원을 받아 중국 선교사로 온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목사였다.
 
1863년 12월에 상해에 도착한 토마스 목사는 1865년 자푸항으로 갔었는데 그곳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중국주재 책임자였던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집에서 두명의 한국 천주교 신자를 만나는 것을 계기로 한국선교의 뜻을 품고 윌리암슨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를 타고 중국 성경을 많이 가지고 1866년 8월 9일 조선행을 떠났다. 한 일주일 후에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나타났고 이어서 강상류인 평양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통상과 선교를 요구하면서 접근해 오는 무장한 이양선(異樣船)에 대한 공포와 적의를 느낀 조선의 관민들과 충돌하게 되었고 강우로 불어났던 대동강 물이 줄어들면서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의 양각도(羊角島) 모래톱에 좌초하고 말았다. 한국측에서는 제너럴 셔먼호를 향해 화공(火攻)을 전개하였으며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살려 달라고 애걸했으나 분격한 군민(軍民)들은 그들을 결박하고 타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이리하여 토마스 목사는 1886년 9월 2일 그의 나이 27세에 한국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으나 나중에 마펫 선교사가 학습 교인반을 조직할 때(1893.11) 그 가운데 토마스 목사에게 중국어 신약 성서를 받았던 사람을 발견했다고 했으니 과연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었다.
 
 
 

2) 만주를 통한 선교

 
1872년 10월 만주선교에 착수한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 선교사 로스(John Ross)와 메킨타이어(John Macintyre)는 윌리암슨을 통하여 그의 한국 선교 열의에 감명을 받았으며 특히 토마스 목사의 순교 소식을 듣고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스 목사는 한국으로 오는 길을 찾고 특히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선생을 찾기 위해서 두차례에 걸쳐 고려문(高麗門)을 방문하였는데 두 번째인 1876년 4월에 의주 상인 이응찬(李應贊)을 만났다. 이응찬의 도움으로 1877년에 「조선어 교재」를 저술하고 다음으로 본격적인 성경 번역에 착수하였다. 이응찬을 비롯하여 백홍준(白鴻俊), 김진기(金鎭基), 이성하(李成夏) 등은 1879년 이전에 각각 매킨타이어 목사와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어 맨 처음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말로 번역된 최초의 성경이 1882년에 나온 「예수 셩교 누가복음 젼셔」였다. 그 후 계속해서 단편으로 출간되다가 신약 27권이 완전히 번역되어 「예수 셩교 젼셔」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것이 1887년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로스역』이라 일컫는 한글로 된 최초의 신약 성경이다.
 
이와 같이 한글 성서가 간행되면서부터 로스 목사는 우선 성서반포가 자유로운 만주의 한인촌을 대상으로 하여 김청송을 권서 겸 전도사로 파송하여 수많은 한국인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한인촌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국내에서는 1879년부터 백홍준의 전도로 구도자가 생겼으며 1882년 이후 누가, 요한복음이 간행되자 폐지(廢紙)속에 미제본된 복음서 낱장을 끼워 밀반입하였다. 그 후 1882년 10월에는 서상륜(徐相崙)이 대영성서공회 최초의 한국 권서(또는 매서)로 파송을 받아 다량의 복음서를 반포하였다. 이 무렵 백홍준이 요리문답반을 운영하였는데 1885년에는 18명의 신자로 예배 처소까지 마련했으니 이것이 국내 최초의 「의주 신앙 공동체」이다.
 
평양과 서울에도 1883년에 이미 복음서가 반포되었으며 형 서상륜으로부터 성경을 받아 읽고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예수 믿기로 작정한 서경조(徐景祚)는 황해도 소래(松川)로 돌아와 열심히 전도하여 1885년까지는 최소한 20여명의 세례 지원자를 내었으며 1886년에는 예배 처소까지 마련하여 매주일 예배를 드렸으니 이것이 한국교회의 요람이라 일컫는 소래「신앙공동체」이다.
 
 
 

3) 일본을 통한 선교

 
1881년 일본 주재 미국 선교사 루미스(Henry Loomis) 목사가 두 번째 일본에 올 때 주 일본 미국 성서공회 총무가 되었으며 1882년부터는 한국 주재 총무까지 겸하게 되었다. 이로써 남쪽을 통한 선교를 위해서 그 기지가 마련된 셈이다.
 
이 무렵 국내에서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으며 그 때문에 그 해 9월에 이수정(李樹廷)이 수신사 박영효 일행을 따라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이미 1년전에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친구 안종수(安宗洙)로부터 들은 바 있는 기독교인 농학자 쯔다센(津田仙)을 만나 성경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을 받아서 읽으면서 기독교에 접근해 갔다. 일본에 간 지 3개월 후인 12월 25일에는 축지교회(築地敎會)의 성탄 축하예배에 참여하여 큰 감명을 받고 다음해 4월 29일에는 노월정교회(露月町敎會, 지금은 芝敎會)에서 야스가와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동년 5월 8일부터는 도쿄 싱에이교회(新榮敎會)에서 전국 기독교도 대 친목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이수정은 한국어로 공중기도를 하였고 그 이튿날에는 요한복음 15장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한문으로 된 신앙고백서를 발표-내용은 이영헌의 한국기독교사 66쪽 참고). 이 신앙고백문은 문서로 남아있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신앙고백서로서 높이 평가 받는다. 이즈음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던 루미스 목사는 이수정의 재능과 그가 세례까지 받은 독실한 신자임을 발견하고 그를 찾아가서 한국말 성서번역을 권했다.
 
<이수정과 최초 한글번역 성경>
이수정은 이 제안을 받고나서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오로지 성서번역에만 몰두하여 처음에는 한자에 토를 단 「현토한한(懸吐漢韓) 신약전서」를 1883년에 완역, 1884년에 출판하였으며 곧이어 한글 성서번역에 들어가서 1884년 4월 10일경 「신약 마가젼 복음서 언해」라는 이름으로 마가복음이 완역되어 그 이듬해 2월에 6,000부를 간행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맨 처음 공식으로 입국한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날 제물포에 상륙할 때 그들의 손에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 들려 있었다. 그 외에도 이수정을 중심으로 도쿄에 처음으로 한국인 유학생을 주축으로 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그는 또 미국을 향하여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호소하기도 하여 「한국의 마게도니아인의 부름」이라고 일컫기까지 되었다.
 
 
 

4) 미국을 통한 선교

 
① 감리교 매클레이 목사 최초 방한
 
(<매클레이 선교사>) 1882년 5월 22일 한미 수호통상조약 체결과 함께 초대 주한미국공사로 부임한 푸트(L. H. Foote)가 고종에게 한국의 친선 사절단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여 1883년 7월 16일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변 수, 고영철, 한광철, 최도민 등이 제물포를 출발하여 9월 2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이들 일행이 시카고로 가는 차중에서 미국 감리교회의 가우쳐(J.F.Goucther) 목사를 만나게 되어 3일 간을 교제하는 가운데 가우쳐는 한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윌리(Wiley) 감독에게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편지와 함께 선교비의 일부로 2,000불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듬해에는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약하고 있던 감리교의 매클레이(R.S.Maclay) 목사에게 한국에 가서 선교사업 개시의 타당성 여부를 탐사해 보도록 요청하는 편지 를 보냈다. 이리하여 매클레이 목사 부부는 1884년 6월 19일 일본의 나가사키항을 떠나 6월 24일 아침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매클레이 목사는 당시 승정원 승지로서 외위문(外衛門) 교섭사무를 보고 있던 김옥균(金玉均)을 방문하여 한국에서 선교할 수 있도록 임금께 상주하는 서함을 맡겼으며 2차 방문때 병원과 학교 사업을 허락하셨다는 뜻을 전달받았다. 이 때문에 매클레이를 한국 선교의 양부로까지 추앙하게 되었다.
 
 
② 알렌 의사의 입국
 
(<알렌 선교사>)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내외의 요청에 따라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한 것은 1884년 여름이었고 사업비로 약 5,000불을 책정하였다. 이 때 중국 선교 의사로 임명받아 상해, 남경 등지에서 선교지 물색을 위해 고민하던 알렌(Horace.N.Allen)에게 상해에 있던 그의 친구 핸더슨 (Henderson)이 주한 미국 공사관에 청하여 조선에서 선교사임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공사관 공의로 채용토록 하여 선교 본부로부터 한국 주재 의료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알렌은 1884년 9월 20일 인천에 도착, 22일에 서울에 들어왔으나 이가 한국에 공식적으로는 맨 처음 온 선교사이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한국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알렌의 입국 후 12월 4일 국내에서는 갑신정변이 발발하였고 그 때 수구파의 거두요 명성황후의 사촌인 민영익이 부상을 당했는데 알렌이 서양의술로 완쾌시켰으므로 조정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마침내 고종의 시의까지 되었으며 1885년 2월 25일에는, 광혜원(廣惠院, 후에 濟衆院)이라는 왕립 체제의 병원을 설립하므로 본격적인 의료선교에 착수하게 되었다.
 
 
③ 언더우드와 아펜셀러의 입국
 
(<언더우드>, <아펜셀러>) 1884년 7월 24일 미 북장로교 선교 본부는 언더우드(H. G. Underwood)를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언더우드는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행 기선을 타고 1885년 1월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는 일본에 머무는 동안 장로교 선배 선교사인 헵번(J.C.Hepburn)박사로부터 선교사업의 훈련을 받으면서 한국인 신자인 이수정에게서 한국말을 배웠다. 그러다가 알렌이 세운 병원에서 교수할 수 있는 전망이 보이자 1885년 3월 31일 감리교의 아펜셀라(Henry.G.Appenzeller)와 함께 일본의 나가사키를 떠나 4월 2일에 부산에 잠시 정박했다가 4월 5일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는데 그 날이 마침 부활절이었다. 그들은 도착의 감격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창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언더우드는 도착 즉시 알렌의 광혜원에서 일하며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곧 거리나 골목 혹은 시골에 나가서 한국인과 대화하며 전도를 하였다. 1886년 7월 11일에는 헤론 의사의 한국의 교사였던 노춘경(盧春京)에게 세례를 주어 한국 안에서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게 했는데 이 노춘경은 로스가 번역한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1887년 봄에는 소래의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 등 세 청년이 의주 전도사 백홍준과 함께 언더우드를 찾아와 세례 받기를 원함으로 시취하여 세례를 베풀었다.
 
1887년 9월 27일에는 14명의 신자가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 모여 장로 두 사람을 선정하여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를 세웠으니 이것이 한국 장로교의 모교회인 새문안교회의 시작이다. 그런데 장로로 선출된 두 사람은 봉천에서 온 사람의 사촌들이었고 그 밖의 사람들도 봉천 전도인의 전도를 통해서 믿게 된 사람들이었으며 이 창설 예배에 로스 목사가 참석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1879년 만주에서 형성된 신앙 공동체가 서울의 처음 조직교회로 연결되었음을 보여 준다. 새문안교회의 약사에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본 새문안 교회는 장로교 본산지인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전통적 장로교 성격과 복음주의적인 미국 장로교와 최초의 세례자이자 한국말 성서 번역에 참여한 한국인(서상륜)에 의해 창립된 남다른 역사성을 갖고 있다.”
 
 
 

5) 호주를 통한 선교

 
(<데이비스선교사>)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두번째 장로교 선교부는 호주의 빅토리아주 장로교회(Presbyterian Chruch of Victoria)였는데 한국선교는 1889년 10월 데이비스 목사(Rev.Joseph Henry Davies)와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Miss Mary T.Davies)양에 의해 시작되었다. 데이비스는 한때 인도 선교사였으나 건강이 좋지 못하여 선교사로 일한지 22개월 후에 귀국하여 멜버른 대학교를 졸업하고 카오필드 문법학교(Caufield Grammar School)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일했다. 그는 다시 인도 선교사로 가려고 했으나 한국선교의 긴방성을 알리는 중국주제 영국성공회 선교단체인 씨엠에스(CMS)소속인 월푸(John R.Wolfe)주교의 편지를 읽고 한국선교를 자원하게 되었다. 성공회에 속해 있던 그는 학교 교장직을 버리고 장로교로 이적한 후 에딘버러의 뉴 칼리지(New college)에서 신학수업을 마친 후 1889년 8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가 된 그는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Young Men's Fellows- hip Union)의 파송을 받고 1889년 8월 21일 멜보른을 떠나 한국으로 향한 여행을 시작하였고 그해 10월 2일 이른 아침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10월 4일에는 서울에 도착하였고 언더우드(H.G.Underwood), 헤론(Dr.Heron)등과 함께 생활하며 한국어를 습득하였다. 서울서 5개월을 보낸 후 아직 선교사가 없는 지방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한 그는 메리는 서울에 남겨둔채 1890년 3월 14일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서울을 떠난 그는 수원, 과천 등 경기도 지방과, 공주 등 충청도지방을 거쳐 경상도지방까지 300마일에 이르는 약 20일간의 답사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1890년 4월 4일 금요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리한 도보 여행으로 인해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페렴까지 겹쳐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절망적인 상태에 있던 그는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인 4월 5일, 오후 1시경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한국에 온지 겨우 6개월만이었다. 당시 부산에 체류했던 캐나다 선교사 게일(J.S.Gale)은 데이비스의 시신을 부산 영선동 뒷산에 매장하였다.
 
그의 죽음은 호주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데이비스를 파송했던 청년연합회는 1890년 7월 23일 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한국에 선교사를 다시 파송 지원하기로 결의하였다. 또 1890년 창립된 장로교 여선교회연합회(P.W.M.U.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도 데이비스양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결과 1891년에는 청년연합회의 파송을 받은 멕카이 목사(Rev.J.Mackay)부부와 여선교회 연합회의 파송을 받은 세 사람의 미혼선교사인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페리(Miss Jean Perry), 퍼셋(Miss Mary Fawcett)양 등 5명의 선교사들이 1891년 10월 내한 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은 부산진에 주택(선교관)을 마련하고 한국인과 접촉하기 시작하였고 구체적인 전도활동을 개시하였다. 그후 1894년에는 아담슨(손안로, Rev.A.Adamson), 1900년에는 엥겔(왕길지, Rev.G.Engel), 1910년에는 맥켄지(매견시, Rev.N.Mackenzie), 메크레이(맹호은, Rev.F.Macrae), 1911년에는 멕크라렌(마라연, Dr.C.McLaren) 등 여러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부산, 경남지방에서 값진 봉사를 하였다. 호주 장로교회는 1889년 데이비스를 파송한 이래로 1940년 와킨스(왕영애,Miss I.Witkins)양을 파송하기 까지 7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들은 부산에 선교기점(1891)을 마련한 이후 인접한 경남지역에서 활동하였는데 그 결과로 진주(1905), 마산(1911), 거창(1913), 통영(현 충무.1913)에 선교지부(Mission Station) 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의료 등 3분야에서 활동하였다.
 
(<매견시 선교사>) 호주의 선교사들 중 맥켄지(梅見施 : J. N. Mackenzie)는 1910년 2월 한국주재 호주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부산, 동래, 울산, 울릉 등을 자기 선교지 관할에 두었고 울릉도 선교는 경상노회의 파송으로 1910년부터 1917년 사이에 5회에 걸쳐 순행하여 초기 울릉도교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는 1938년까지 한국에서 주로 나환자를 돌보는데 전념했고 그가 한국에서 귀국하자 호주 빅토리아주 장로교 총회에서 그를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1940-1941) 이러한 일은 호주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드물게 보는 일이다. 즉 여러해 동안 본국을 떠나 외국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사람을 본국 교회의 총회장으로 선출한다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더없는 영예이고 교회로서도 큰 용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맥켄지 부부가 그들의 선교지인 한국에서 좀처럼 다른 사람이 하기 어려운 나환자 보호와 간호에 28년이라는 긴 세월의 값진 봉사를 한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탁월한 지도력과 깊은 신앙적 확신이 있었음도 주효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들의 두 딸인 여의사 헬렌 맥켄지(Helen Mackenzie)와 간호원 캐더라인 맥켄지(Catherian Mackenzie)는 한국에서 출생하였고 해방 후 일시 중국 본토에서 선교사로 일한 바 있다. 이들이 1952년 9월 일신부인병원을 설립하였고 1982년 11월 10일 현재의 이름인 일신기독병원으로 개칭하였다. 뿐만 아니라 맨켄지 원장은 자기가 이 병원에 근무하면서 한국 여의사 김영선에게 원장 자리를 넘겨주고 자기는 평의사로 근무하여 1976년 은퇴하여 본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부산의 일신기독병원의 존재는 호주선교부의 자랑인 동시에 한국교회의 자랑이다. 헬렌은 2009년 9월 18일 호주의 양로원에서 사망했다.
【문화】 울릉군 기독교 100년사
• 제 1 장 기독교의 전래
• 제 2 장 우리나라 교회의 조직
(2024.06.21. 20:10)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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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